잡지명 |
삼천리 제13권 제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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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
제13권 제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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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월일 |
1941-06-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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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朝鮮映畵發達小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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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林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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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형태 |
논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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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朝鮮의 映畵史는 內地나 支那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활동사진의
수입으로부터 시작된다. 光武 7年頃(?)(明治 36年 西紀 1903) 東京 興行業者 吉澤商會의 손을 거처서 수입 공개된 英米煙草會社의 선전
『필님』이 朝鮮에 있어서 활동사진 상영의 효시라고 한다. 그러나 흥행물로서 활동사진이 등장한 것은 光武 8年(?)頃 圓覺社에서 佛國
「파테」製 단편희극과 實寫를 상영함으로부터인데 뒤니어 演興社, 長安社, 光武臺 등에서 陸續 활동사진을 상영하고, 米人「골부란」「보사덕」등의
경영하든 漢城電氣會社에서 전차선전 겸 「메리꼬라운드」와 더부터 「活動寫眞觀覽所」를 現 동대문 電車會社車庫趾에 개설하야 開化朝鮮의 중요한
신오락물로 활동사진이 등장케 ??였다. 물론 본격적으로 상설 흥행케 된 것은 大正初葉 이후에 속하는 일인데 상영된 사진은 최초엔 前記한
「파테」製 단편, 米國靑鳥製 희극과 實寫와 朝鮮風物을 박은 幻燈類까지였으나 점차 「유니버-샐」장편과 內地의 신파물과 초기 시대극 등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아마 內地의 활동사진 수입 시대로 동일했든 듯 싶다. 이것이 소위 변사와 악대와 더부터 옛 기억이 새로운
활동사진시대의 面影이다. 이 시대는 常設?도 京城에 5, 6개소, 地大都市에 4, 5개소 그밖에 산재한 幾 個所의 非常設? 등을 모두
합처서 손꼽을 수 있을만큼 보급정도도 얕었었다. 이러한 상태가 아마 大正 10年 이후까지 계속되였으리라고 믿는데,〈196〉 이 기간이라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가치 아즉 영화라고 하는 술어조차 생기지 아니한 시대에서 「필님」은 여태까지도 신기한 발견품이요, 활동하는 사진으로서 단순한
오락의 대상에 불과하였다. 비단 朝鮮만이 아니라 內地나 활동사진의 원산지인 外國에서 미처 「필님」이 예술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러나
世界映畵史上에서 활동사진시대라고 부르는 시대를 西洋과 內地에서는 다소간이나마 제작하는 것을 통하야 체험하였지만 우리 朝鮮서는 그저 구경하면서
지내온 것이다. 그럼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朝鮮映畵史에는 활동사진시대라는 것이 있을 수 없을지 모른다. 구경만 하고 제작하지 않는
역사라는 것은 없는 법이다. 역사란 항상 만드는 것과 되어지는 일을 가르치는 말이요, 더구나 예술의 역사라는 것은 창조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朝鮮에 있어서 엄밀한 의미의 映畵史는 당연히 제작의 개시로부터 비롯해야 할 것이다. 활동사진시대라는 것은 영화의
前史時代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선 우리가 일즉이 관객이든 한 시대에 지내지 않는다.
二 朝鮮에서 영화가 제작되기 비롯한
것은 大正 7, 8年傾 신파연극의 유행이 한 곱이 넘고, 한창 連鎖劇이 수입되려 할 때 극단에서 만든 連鎖劇「필님」부터이다. 新劇座, 革新團,
文藝團 등이 東京에서 內地人 기사를 데려다가 역시 內地의 新派連鎖劇을 모방하야 몇 장면식 박어가지고 연극의 장면과 장면 사이에 「스크린」을
내리고 비추어 본 것이 朝鮮의 人象 風物이 「스크린」에 나타난 시초다 . 예전 무성시대의 촬영기사이였고, 지금은 녹음기사로 있는
李弼雨씨 같은 이가 벌서 이 시대의
連鎖劇「필님」촬영자였다. 그러나 連鎖劇 「필님」을 우리가 영화라고 불를 수 없는 것은 활동사진을 영화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활동사진만치도 독립된 작품이 아니요, 연극의 한 보조수단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의 한 태생에 그치는 것이다. 독립한
작품이 만드러지기는 大正 9年에 이르러 聚星座 金陶山 일행이 京畿道廳의 위촉으로 제작한 虎列剌豫防 선전영화와, 大正 10年 尹白南씨가 체신국의 의뢰로 제작한 저축사상 선전영화 「月下의 盟誓」로
효시를 삼게 된다. 그러나 이 두 작품으로 말하면 連鎖劇 「필님」정도는 아니드래도 완전히 독립한 영화라고는 말하기 어렵다.〈197〉 전자가
만일 연극의 부속물이라면 후자는 관청의 광고지와 같은 한 선전수단에 지내지 않기 때문이다. 朝鮮映畵史를 말하매, 이 두 작품은 최초의 작품으로
枚擧하는 것은 그 제작의 동기, 작품의 내용은 여하간에, 다른 예술의 보조를 받지 않고 자체로서 완결되었기 때문이다. 좀 더 완전이 독립한
영화가 되기는 大正 11年 당시 黃金?과 朝鮮劇場을 경영하든 興行師 早川某가 東亞文化協會의 명의로 제작한 「春香傳」에서다. 이 영화에는 그때의
인기 있는 변사였든 金肇盛이 출연을 하고, 기생이 출연을 하야 관객의 환영을 받었다. 원작이 유명한 春香傳인 관계도 있었고, 또 처음으로
대중적 장소의 「스크린」에 빛이는 朝鮮의 인물과 풍경을 보는 친근미가 대단히 관객을 즐거히 했든 모양으로 흥행에는 성공했다
한다. 〈img〉〈朝鮮映畵製作從事者數調:이삼13-619801〉〈/img〉 이것을 계기로 釜山에 朝鮮키네마주식회사라고 하는 公稱資本
20만원의 內地人 기업회사가 생기어, 安鍾和, 李月華 주연, 「海의 秘曲」, 尹白南 감독의 「雲英傳」, 「神의 粧」 등의 작품을 만들었으나
회사는 기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朝鮮映畵는 아즉 대규모 기업의 대상이 되기엔 심히 유치했고, 朝鮮의 시장은 아즉 미완의 시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들은 연극에선 신파극, 連鎖劇의 융성과 영화로는 「春香傳」의 성공에 眼目輝煌하야 시기상조의 오해를 한 것이다. 작품으로
보면 「雲英傳」이 「春香傳」과 더부터 고대소설을 영화화한 의미에서 동일한 것이고, 「海의 秘曲」과 「神의 粧」은 하나는 연애극이요, 또 하나는
교훈극으로 모두 朝鮮의 인정풍속을 영화로 본다는 이상의 흥미를 자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회사로부터 초창기 朝鮮映畵界의
주석이〈198〉 된 尹白南, 安鍾和, 李慶孫, 羅雲奎, 南宮雲, 李月華, 鄭基鐸, 李圭卨 등의 諸人材를 출세시킨 것은 있지 못할 숨은 공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후 尹白南씨가 독립 「푸로덕슌」을 京城에 창립하야 李慶孫監督, 羅雲奎主演의 「沈淸傳」을 제작하였다가 해산되었는데, 이
작품으로 朝鮮映畵가 좀 더 확실한 예술적 노선상에 올으는 감을 주었고, 또 尹白南 「푸로덕슌」은 그 뒤 오랬 동안 朝鮮映畵製作의 지배적
기구이였든 소규모제작 母體의 先鞭을 친 것으로 의의가 있었다. 「沈淸傳」은 같은 고대소설의 영화화라고 하드래고 「春香傳」이나 「雲英傳」에
비하야 제작태도가 眞摯하여 관중으로 하야금 비로서 朝鮮映畵를 호기심 이상의 태도로서 대하게 하였고, 또한 이 작품은 감독으로서의 李慶孫씨와
天品있는 연기자로서 羅雲奎씨를 세상에 보낸 기념할만 작품이였다. 그 후, 李弼雨씨가 당시 朝鮮日報에 연재 중이든 인기만화 「멍텅구리」를
영화화하였고, 高麗映畵製作所라는 곳에서 신파소설 「雙玉淚」를 만들었고, 또 전기한
東亞文化協會에서 기생 康月花의 實記 「悲戀의 曲」과 「興夫傳」등을 만들었으나 모두 유치한
것이여서, 결국 흥행사의 기교주의와 열성있는 초기 영화인들의 맹목적 시험의 域을 넘지 아니했다. 李慶孫씨가 「尹白南푸로덕슌」의 朱仁奎,
南宮雲, 金靜淑씨 등을 데리고 맨들은 李光洙씨의 소설 「開拓者」의 영화화도 交是 실패하였다. 계속하여 신소설의 작자로 또한 內地 신파소설
등의 번안자로서 초창기 朝鮮文壇에 공로자이였든 趙一齊씨가〈199〉
鷄林映畵協會라는 단체를 일으켜 尾崎紅葉의 金色夜叉를 번안한
「長恨夢」을 /.bb맨들고, 뒤니어 尹白南감독으로 內地의 劍戟調時代劇 「山塞王」을 맨들었으나 모두 성공치 못하였다. 더구나 「山塞王은 豫期에
反하야로 흥행 성적도 불량하야 이후 타인으로 하야금 劍戟調時代劇이라는 것을 다시금 시험할 욕심을 전연 포기케 할만 하였다. 이 협회가
의의가 있다고 하면, 朝鮮키네마회사 이후 가장 많은 작품을 맨들고, 또 오래 지속되어 浮動無雙했든 초기 朝鮮映畵界에 이의 태도의 토대가 되어준
점이 그 한아요, 또한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으리만치 그 이후 朝鮮映畵界에서 활약한 映畵化人들을 길는 점 또한 있기 어려운 점일
것이다. 이 시대는 朝鮮映畵史上에서 「푸로덕슌」亂立時代라고도 부를만치 실제 작품을 내기까지 이른 圍體는 없어도 京城 시내 웬만한 데면
「XX푸로덕슌」 혹은 XX映畵製作所라는 간판을 볼 수 있을 만한 형편이였다. 좌우간 영화에서 정열이 일반으로 비상히 팽창했든
시대다. 그러나 작품으로 이렇다 할 만한 것이 남지 아니했다, 그저 돈 천원만 마련 될 듯 하면 누구 제작, 제작하며 배우가 감독이 되려고
영화를 하는 사람이 많든 시대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일로부터 올 좀더 확고한 기초와 방향을 가진 朝鮮映畵의 준비를 위하야 은연 중에 토대가
싸아지고 있는 시대였다. 外國에서는 활동사진시대가 終焉하고 예술로서의 영화의〈200〉 시대가 전개되기 비롯하는 시대였고, 朝鮮서는 소박하고
유치한 초창기의 맹목적 시험으로부터 점차 어떤 방향과 일정의 수준이 발견되랴고 하는 전야이였다.
三 朝鮮映畵가 소박하나마
참으로 영화다운게 되고, 또 朝鮮映畵다운 작품을 맨들기는 大正 15年 羅雲奎씨의 원작, 각색, 감독, 주연으로 된 「아리랑」에서 붙어다. 이
작품은 本町 某內地商人의 출자로 된 「朝鮮키네마푸로덕슌」의 제작인데, 「아리랑」을 만들기 전 「籠中鳥」라는 流行歌映畵를 津守란 內地人 監督,
李圭卨 주연 羅雲奎 조연으로 촬영하야 다행히 실패를 보지 않고, 또한 羅雲奎라는 배우의 존재를 세상에 인식시켜 다음 작품을 맨들 가능성이 있게
했음은 다행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2회 작품으로 맨들어진 「아리랑」은 절대한 인기를 得하야 朝鮮映畵로서 흥행성적의 최초기록을 맨들었을
뿐만 아니라, 朝鮮映畵史上 무성시대를 대표하는 최초의 걸작이 된 것이다. 이 작품에 소박하나마 朝鮮사람에게 고유한 감정, 사상, 생활의
진실의 一端이 적확히 파악되어 있고, 그 시대를 휩싸고 있든 시대적 기분이 영롱히 표현되어 있었으며 오랬 동안 朝鮮사람의 전통적인 심정의
한아이였든 「레이소스」가 비로서 영화의 근저가 되어 혹은 표면의 色調가 되어 표현되었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이 작품에서 단순한 朝鮮의
人象, 風景, 習俗 이상의 것을 맛보는 만족을 얻었다. 이 점은 朝鮮映畵가 탄생 이후 당연히 가저야 할 것으로서 미처 가지지 못했든 것을
사람에게 주었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의 성공은 그 내용에서만 아니라 형성과 기술에 있어서도 在來의 朝鮮映畵의 수준을
돌파한대도 연유하였다. 이만하면 단순한 호기심에만 끄을니어 보아오든 관중은, 안심하고 朝鮮映畵를 대하게쯤 되었었다. 또한 이 작품을 통하야
一世의 인기 여배우 申一仙을 세상에 내여 놓아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아리랑」은 朝鮮의 無聲映畵時代를 기념하는 「모슈맨트」였다. 그 다음,
「風雲兒」 「野鼠」 「금붕어」 등을 계속 발표하여 線線한 애수와 더부터 경쾌한 우슴, 鬱勃한 「니히리즘」과 더부터 飄飄한 방랑성 등으로 연상되는
羅雲奎調라는 것을 이야기할 만큼 그의 특징은 명백해젔고 그의 지위는 어언 朝鮮映畵界의 중심에 존재하였다. 그는 「아리랑」 이후 諸作品에서 볼 수
있듯 인기배우만이 아니고, 좋은 「씨나리오」작가요, 또한 보다 좋은 연출자이였다. 이 몇 해 동안은 실로 朝鮮映畵史上 羅雲奎시대라고
일흠해도 좋은 시대다. 사실 무성시대의 朝鮮映畵界서는〈201〉 羅雲奎 이상 가는 영화예술가는 나오지 아니했다. 간혹 이의를 말할 이가
있을지 모르나 나는 朝鮮映畵의 全 무성시대를 羅雲奎시대라고 말하고도 싶다. 그 뒤 映畵界는 朝鮮키네마푸로덕슌의 중지와 전후하야 얼마간 부진기에 드러갓다가 昭和
6년에 오랬 동안 休止狀態서 있든 鷄林映畵協會가 시인 沈薰씨의 원작, 감독으로 「먼동이 틀 때」를 姜弘植, 申一仙을 주연으로 제작하야 朝鮮映畵史上 드믈게 보는 양심적 제작태도를
보혔다. 그것은 西歐의 문예영화를 접하는 듯한 것으로 「開拓者」를 만일 실패한 문예영화라면 「먼동이 틀 때」는 比輕的 성공한 문예영화라 할 수
있었다. 여하간 이 작품은 확실히 「아리랑」과 더부텨 기억해 둘 우수작이다. 이와 전후하야 李圭卨씨가 제작한 「不忘曲」,
「紅戀悲戀」, 極東「케니마」의 「怪人의 正體」, 大陸「키네마」의 「支那街의 秘密」, 朝鮮映畵製作所의 「運命」, 그 외 數種이 있으나 모두 언급할
것이 못된다. 그 중 李慶孫씨가 平壤「키네마」에서 제작한 「椿姬」는 화면의 아름다운 영화였다. 그동안 昭和 2年頃부터 常設? 團成社
映畵部에서 인기있는 변사 金永煥씨가 「落花流水」, 「종소래」, 「세 동무」 등을
제작하야 관객을 끄으렀으나 이것들은 아주 俗化하고 상업주의화한 작품이였다. 이 시대에 羅雲奎씨는 「朝鮮키네마」를 그만두고 독립, 개인
「푸로덕슌」을 이르켜 역시 자기의 원작, 감독, 주연으로 「잘 있거라」, 「玉女」, 「사나이」, 「사랑을 찾어서」, 「벙어리 三龍이」 등을
제작하야 변함없이 인기를 得하고, 자기의 예술적 성격을 유지해 왔으나, 그도 차차 고조기를 지나온 감이 있어 「슬램프」가 느껴지고, 당시
映畵界의 일부에서는 변하는 시대정세와 더부터 傾向映畵에의 관심이 높아지고, 주로 신인들이 거기에 접근되여 있었다.
四
安鍾和씨가 주재하고 李慶孫, 金永煥씨 등 문단, 영화인이
관계하고 있는 朝鮮映畵藝術協會의 年少한 성원과 左翼文化人들과의 합류되여 「流浪」, 그 뒤에 「서울키노」, 「昏街」, 「火輪」 등이 맨드러젔는데
이것은 모두 金幽影씨의 작품이였다. 羅雲奎씨의 작품이 다분히 「내슈댈」한
경향을 가진 것이라면, 전자는 어느 정도 경향적인 의도를 가진 것이라 하겠다. 이것이 昭和 3年부터 5, 6年頃까지의 朝鮮映畵界의
狀況인데, 일종의 內的 心裂의 시대이어서 新興映畵藝術家同盟이라는 단체가 생기고, 「씨나리오」作家協會라는 것이 생기고, 「캎프」의 映畵部가
생기고, 하야 새로운 동향이〈202〉 활발하게 표면화되면서 朝鮮서 처음으로 영화이론과 비평이라는 것이 생기어 徐光霽씨같은 이가 활발히 활동한 것도 이 시기다. 傾向映畵運動은
조직과 이론에 앞슬 뿐으로 실제 창작활동이 相半치 못하면서 昭和 8, 9年頃에 이르러 사회정세는 변하기 시작하야 이 운동은 퇴조되고, 다른 한편
羅雲奎씨와 같은 이도 또한 「스람프」의 빠저 여러 가지 작품을 맨들었으나 전체로 朝鮮映畵는 진보하는 形跡이 보이지 않었다. 羅씨의
「七番通小事件」, 「鐘路」 등은 「아리랑」 등에 비교도 아니 되는 당시 성행하든 「깽」 영화의 拙惡한 기능에 불과하였으며, 그것을 만회코자
시험한 「아리랑」후편, 「아리랑」3편 등도 모두 이 우수한 예술가의 저조를 구해 주지 아니했다. 그 뒤 오래 雄圖을 품고 無聯한 세월을
보내든 安鍾和씨가 「메카폰」을 들 기회를 얻어 「꽃장사」, 「銀河에 흐르는 情熱」, 「靑春의 十字路」 등을 제작하고, 中央映畵社
方漢駿씨가 「撒水車」 「 李圭煥」씨가 「임자 없는 나룻배」, 「바다여 말하라」,
朴基?씨가 「春風」을 제작하였으나 도루 새로운 시기를 획할 정도의
성과를 어찌 못했다. 그러나 이 3, 4년 간의 침체 후, 昭和 9年頃부터 朝鮮映畵는 재건기에 들어가는 감이 있어서 기술적으로도 아주
새로운 시기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감독도 尹白南, 李慶孫, 羅雲奎와 같은 朝鮮映畵 초창기의 사람들이 점차로 제일선으로부터 퇴장하고,
李圭煥, 方漢駿, 朴基?, 尹蓬春 등의 신인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전술한 바와 가치
安鍾和씨가 연극으로부터 영화로 진출을 하고 있는 등 매우 多事했다. 또 배우에도 沈影, 金漢, 獨銀麒, 田澤二, 金一海 등 男優와 文藝峯, 金素英, 金信哉, 玄舜英 등이 女優에서 보는 바와 가치 새로운 「쩨네레슌」이
성장했다. 요컨대 昭和 8, 9年間의 朝鮮映畵界는 「싸이랜트」시대의 말기었고, 「토-키」시대를 마즈려고 속으로 초조하든
시대였다. 당시의 朝鮮映畵가 직면한 임무는 하로 바삐 「싸이랜트」시대로부터의 해탈이였다. 이 시기는 벌서 外國 영화는 물론, 內地
영화가 완전히〈203〉 「토-키」시대로 이행한 대였다. 한 常設?에서 外國과 內地의 영화는 모두 「토-키」인데 유독 朝鮮映畵만이 구태의연한
무성에 머므러 있다고 한 것은 기이했을 뿐만 아니라 관중으로 하야금 이것도 영화인가 하는 의문을 이르킬 만큼 부자연하고 「아니크로닠」 했을 것은
상상하고도 족한 일이다.
五
최초의 朝鮮「토-키」는 昭和 10年 京城 촬영소에서 李弼雨, 李明雨씨 형제가 제작한 「春香傳」이다. 이 영화를 통하야 朝鮮語가
映畵史上 처음으로 영화「필님」에 녹음되어 보았다. 이 작품은 자못 세인의 환영을 받었다. 그것은 물론 초기의 朝鮮映畵(無聲)가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朝鮮「토-키」라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春香傳」이란 소설이 무성, 유성을 물론하고 매양 朝鮮映畵의 출발점이 되였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 후 京城 촬영소에서는 洪開明씨의 「아리랑고개」,
李明雨씨의 「薔花紅蓮傳」, 「洪吉童」, 漢陽映畵社에서는 「아리랑」3편을 「토-키」化 하였지만, 벌서 사람들은 최초의 「토-키」 春香傳을 보는
것과 같은 관대한 태도만을 가지고 임하지는 아니했다. 단순한 「토-키」가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 外國이나 內地의 작품수준에 접근하거나 혹은
朝鮮「토-키」로서의 고유한 성격을 갓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이러한 중요시기의 李圭煥씨는 鈴木重吉씨와 더부터 大邱 聖峯映畵園에서
「나그네」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이 어느 정도까지 內地人의 원조를 얻어는지는 별문제로 하고라도 「토-키」 시대에 드러온 朝鮮映畵를 비로소
반석의 토대 우에 올려놓은 작품임은 사실이다. 사람들은 「아리랑」을 볼 떄와 가치 기뻐하였다. 이 사실은 기술에서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관중의 要求의 한 부분을 만족시켜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女優 文藝峯씨가 비로소 자기의 진심한 가치를 발휘해본 것도 「나그네」요, 當代의
女優 文藝峯을 세상에 내보낸 것도 「나그네」다. 이것은 「나그네」가 실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朝鮮映畵史上에서 「아리랑」과 유사한 의의를 갖는
작품임을 의미한다. 이 작품에 대한 비평이 如何히 구구하고, 얼마마한 양의 결함이 지적된다해도 「토-키」시대에 드러온 이후 조선영화 중 아즉 그
수준을 초월한 작품이 없는 우수작품은 부동의 사실이다. 「싸이랜트」 「아리랑」을 성공시킨 것과 가치 「나그네」를 성공시킨 것도
「레아리즘」이란 사실은 명명될 필요가 있다. 내용의 어느 부분에 가서 아무리 수긍하기 어려운 곳에 逢着하드래도 작자가 생활의 진실을
추구하는 境過에는〈204〉 사람들은 감동을 받는 것이다. 이 밖에 당시까지 조선에는 「토-키」 외에 아즉 「싸이랜트」가 제작되여
安鍾和씨의 「人生航路」, 申敬均씨의 「純情海峽」, 洪開明씨의 「靑春部隊」 등이 제작되어 「싸이랜트」와 「토-키」의
병용시대인 감이 있었으나 이 작품들을 최후로 조선 영화사 上에서 「싸이랜트」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 때가 昭和 12년이었다. 이
해에 기록할 만한 작품으로는 화가 安夕影씨가 紀新洋行에서 제작한
「沈淸」이 있어, 이 작품에서 安씨는 고대소설을 영화화 하는 데 새로운 機軸과 더부터 화면의 회화적인 미를 보혀 주었다. 그 뒤 본격적인
「토-키」시대가 시작되여 제작도 왕성해저, 方漢駿씨의 漢江,
尹蓬春씨의 「圖生錄」, 평론가 徐光霽씨가 處女 「메카폰」을 잡은 「軍用列車」 등이 陸續
발표되었다. 이때로부터 조선 영화에 있어 부산의 「朝鮮키네마會社」 이후로 오래 中絶되었든 기업화의 경향의 추진되어 조선 영화회사가 성립되어
第一回 작품으로 朴基采씨가 李光洙씨의 소설 「無情「을 영화화 하고, 뒤니어 李圭煥씨가 원작, 감독으로 「새 出發」을 제작하였고, 劇硏座映畵部에서
金幽影씨가 「愛戀頌」, 安哲永씨 「漁火」, 東洋劇場에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方漢駿씨가 「城惶堂」, 漢陽映畵社의 「歸着地」, 崔寅奎씨의 「國境」 등이
제작되었으나 모두 「에푹」을 지을 만한 수준에 이르지는 아니했다. 그러나 점차 「토-키」화 된 조선 영화가 일반적으로 기술적 수준이 향상되고
있었든 것만은 움즉일 수 없는 사실이며, 그 중에서 조선의 감독들이 현저히 기술 편중에 빠저 職匠化 할려는 경향이 눈에
띠웠다. 「싸이랜트」 시대를 어제가치 지나온 조선 영화로서 위선 새 기술을 취득하지 아니 하면 아니 되는 事情을 생각할 때 수긍될 수 있는
사실이나, 조선 영화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야 기술과 더부터 예술을, 혹은 예술로서의 「조선토-키」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하야 이 한계는 하로바삐
버서나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완비한 기계 설비와 커다란 생산 기구를 필요로 하는 「토-키」 시대의 조선 영화가 이 이상의 발전을
위하야는 기업화의 방향을 가지 아니 하면 아니 되는 사정과 병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高麗映畵社가 근간 발표한 崔寅奎 감독의
「授業料」, 「집 없는 天使」와 全昌根 감독의 「福地萬里」는
모두 작자의 예술적 성격이 서로 다른 데 불구하고 흥미있는 비평의 대상이 될 것이다. 주위의 諸事情이 여하간에 자기의 예술적 성격의 획득과
기업화의 길은 의연히 조선 영화 금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리라. (끝)〈205〉
〈196-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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