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兩新聞社의 情報

이강기 2015. 9. 28. 10:43
잡지명 삼천리 제9권 제1호  
발행일 1937년 01월01일  
기사제목 兩新聞社의 情報  
기사형태

소식

  

兩新聞社의 情報
 
停刊中의 兩大新聞, 엇재서 아직 못나오나?
東亞日報現在事情
 
宋鎭禹씨가 최고 책임을 지고 사장을 사임하였으니 받을 벌을 어느 정도까지 받고 낫다을 東亞日報는 벌서 해금이 되염즉 하리라고 일반이 추측함에도 불구하고 엇재서 여전히 신문사의 윤전기는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가. 여기 대한 내면 사정을 보도하리라, 즉 그 경위는 이러하였다.
東亞日報 수뇌부는 중역회의 결과로 宋鎭禹씨에 대함에 梁源模씨로 하여 사장 직무를 대행케 하는 전무로 천하여서 總督府에 해금 교섭을<9> 하였다. 그러나 웬만한 신문계 호흡을 마신 일부 인사는 짐작 하드시 梁源模씨를 내세워서는 간부 引責의 實이 거해지지 않는다 함이니 梁씨를 宋씨의 一延長으로 보아서, 梁씨는 잠정적이고, 「그 뒤에 오는 엇던 인사사태」를 누구나 예측하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梁씨는 宋씨의 寸方대로 움지길 인물이라 보았다. 또 梁씨 退하는 날 宋씨 또한 그 후계로 나서지 않는다고 누가 보증하랴. 더구나 梁源模씨는 잡지 「新東亞」의 편집겸 발행인으로서 日章旗抹消事件의 당면의 책임자이요 또한 동아일보의 사건당시의 유력 간부임에랴, 이 모든 점에서 재삼 교섭했슴에도 불구하고 總督府의 양해를 엇지 못하고 말었다 한다.
이에 第二段方策으로 간부를 개조하였으니 즉 사장에 현재 金性洙 컨체른의 一支柱요, 普成專門學校校長으로 있는 변호사 金用茂씨를 擁立하고, 현재 편집국 정치부기자인 高在旭씨를 편집국장으로, 또 같은 金成洙 컨제른의 일익인 京城紡績株式會社의 李泰魯씨로 하여금 영업국장으로,―이러한 진영을 차리고 總督府에 교섭하였으나, 극비중에 들니는 소식에 의하면 總督府에서는 東亞日報가 전 사회에 문호를 개방하여 인재본위의 개조를 하지안코 의연히 全羅道 及 金成洙系 인물로만 다지려 하는 그 근본정신이 틀녓다 하야 終是 양해를 주지않어 지금은 해금 교섭이 遲遲한 형세에 있다는 *설도 있다. 좌우 *민간 일반식자의 견해도 總督府에서 容許하는 인물일는지 안일는지 그는 未詳하나, 全羅道閥만은 이 기회에 타파하여, 파벌적 소아병적 그 정신을 청산하고, 널니 인재를 세상에 구하야 정말 참다운 東亞日報의 更生을 희망하고 있다.
解禁에 대한 二觀測=東亞日報는 8월 27일에 정간 이래 新春 1월까지 헤면 장장 6개월의 장기에 미첫다. 屢犯일수록 장기인 모양으로 제1차 정간, 제2차 정간, 제3차 정간으로 정간 때마다 40일간이든 것이 60일로 60일이는 것이 4개월로 그 정간일수가 遞增된 과거기록으로 보아 이번은 좀더 장기에 미치리란 설도 있는데, 심하게 비관하는 이는 이렇게 작고 장기로 윤전기를 못 돌니게 하면, 결국는 봉급을 못 주게되야 사원은 張子房의 玉銅蕭 소리에 사산하듯, 저절로 분산하여 버릴 것이요, 그래서 재정에 큰 타격을 바더 자연 00에까지 이르게 하리란<10> 아조 절망적 견해 가진 이도 있는데 이 說의 근거는 기관지로 每申, 민간지로 朝鮮日報만 兩立식혀 노오면 그만 아니냐 하는 某邊의 신방침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吾人은 통치 당국이 결코 이렇듯 狹量하지 않으리라고 믿음으로 결국 단단한 다짐을 밧고 해금이 되여지리라고 보는데 그 시기는 宇內에 瑞氣가 차고 南總督施政 제2년을 맛는 신년정초에 與人民共樂의 의미로서 해금이 되지 않을가, 만일 아직도 반성이 부족하다 하여, 후기를 기다리게 한다 할지라도 느저도 皇紀 2,600년을 3년 후에 마지할 2월 11일의 紀元節에는 해금이 되어지리라고 관측한다.
 
張德秀氏의 安住의 地?
풍문인지 모르나 米國서 14년만에 도라온 張德秀씨를 사장으로 擁立하고 新陳容을 整齊하려 하였으나, 某邊의 의향이 一蓮托生의 의미로 사장은 고사하고 부사장까지 고려하란 암시가 있었다 한다. 그렇면 張씨는 어데로 갈고, 물론 학자로서 普成專門學校 敎授로 강단에 서재도 신문사 부사장조차 마다하는 터에 敎授의 자리도 었덜가 주목된다. 그래서 요지간 일부의 소식에 의하면 그가 기독교인에 귀의하여 米國있을 때는 北米 각지 교회로 도라다니며 전도하였다 하느니만치 오히려 지금 인물이 없어 위기에 처하여 있는 朝鮮基督敎靑年聯合會의 회장쯤으로 부활하지 않을가 하는 관측도 있다.
 
中央日報의 難産
그러면 어째서 中央日報조차 난산 상태에 빠저 있느냐 하면 一言而 페지하면 東亞日報는 돈 있으나 인물 없어 난산이고, 中央日報는 인물은 있으나 돈 없어 난산이라 볼 것이다. 지금 대주주를 기하면=中央日報에 재정적으로 패권을 잡고 있는 인물을 기하건대
 
崔善益 7,800株
成樂憲 9,000株(그 중 4,000株는 幽靈株임으로 결국) 5,000株
尹希重 3,000株
姜偉情 800株
이다. 1株는 20원 전액 拂込임으로 돈으로 換價하면
崔善益 156,000원 <11>
成樂憲 100,000원
尹希重 60,000원
姜偉情 16,000원
들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수뇌간부의 선출난이 있으니 즉 呂運亨 崔善益씨 등 舊財閥派는 예전 同社 편집국장으로 있든
金東成씨를 사장=으로 擁立하려 하였으나 그 亦 呂, 崔 직계의 연장이란 의미로 總督府의 양해를 었지 못하여 정돈상태에 있고 한편 成樂憲씨 등의 新財閥派는 문제의 80,000원을 내노코 成씨를 사장으로 곳 속간하려 하나, 이러함에는 崔善益씨측의 舊債權 전부를 抛棄하야 금후 신문경영에 대한 발언권이 없서지지 안코는 안심하여 일당조직으로 신문을 하여 나갈 수 없다 함이다. 그러나 崔善益측은 과거 출자한 160,000원을 승인하고 그 우에 합자하여 신 재단을 만들라고 함으로 쌍방의 주장에 근본적 懸隔이 있어 사태는 去益 조금도 收拾이 되지 않코 있는 형편이다. 일설에는 신문사가 危難에 있단 말을 듯고 예전에 한번 경영하려 들었다가 그양 물너서고 만 鎭南浦의 姜偉情씨가 150,000원=을 질머지고, 수일 전에 서울와서 현신문당국자와 折衝하였으나 결국 崔善益측의 17, 8만원의 舊債 인정론으로 그만 사흘동안 교섭하든 것을 끊어버리고 도로 鎭南浦로 도라갔다는 풍설도 있다. 요컨대 필자의 추측으로는 中央日報는 현재의 50만원을 大減資하여= 결국 과거 여러 채권은 모다 동비율로 100,000원 정도로 나추어 버리고, 새재단이 적어도 10만원에 1만원이라도 더 가지고 드러와서 과반수의 制壓權을 차지하고서 비로소 속간이 되지 않을가? 이러케 관측된다. 어째든 舊債인정이란 큰 장해가 신재벌의 출마를 遲延케 한다. 그러기에 이 문제가 減資로 해결이 아니 되면 제2단으로 이러케<12> 마춥이 되지 않을가, 즉 舊株式會社 中央日報社는 현 간부의 손으로 깨긋이 청산하여 버려서, 현재 재산이라고 80,000원 짜지 사옥이 있는 것을 그를 팔아서 株式에 按分 比例하여 모다 논아가지고 그리고 새재벌이 드러와 독점적 株式會社를 새로 만들어, 그 中央日報 題號를 답습하여 이어 나가지 않을가, 中央日報를 살니자면 현재의 500,000만원을 5분지 1쯤으로 그야말로 「平價切下」하여, 훨신 減資하는 방책을 취하거나 又는 과거의 痼疾을 청산하는 의미로 아조 깨긋하게 舊 株式會社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새회사를 창립하*―이 두 길 밖에 없을 것*다. 지금 兩新聞社財庫는 극도로 타격을 받* 中央, 東亞 모도다 11월부터 사원봉급을 한 分도 지불치 못하고, 흐터질 사원은 흐터질대로 그양 내맛기여 다수 사원이 벌서 신문사를 辭한 이가 만코, 더욱 中央日報 政治部長이든 裵成龍씨 가튼 論客은 주간신문 中央時報의 편집국장으로 직업을 밖우고 말었다. 이대로 2, 3개월만 나간다면 食而爲大요, 食後金剛山求景이요, 사라야 山水甲山 간다는 자연법칙으로 언론계에서 발을 뺄이 있*터이니 이러케 우수 기자를 다 노친 兩 신문사에서 속간이 된대도 었더케 朝鮮日報, 每日申報의 편집, 영업 陣容을 대항하여 나갈가가 또한 의문이 된다.<13>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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