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百萬讀者 가진 大藝術家들

이강기 2015. 9. 28. 10:52

잡지명 삼천리 제9권 제1

발행일 19370101

기사제목 百萬讀者 가진 大藝術家

기사형태 대담·좌담

 

百萬讀者 가진 大藝術家

 

文豪 李光洙氏 無情全作品하다

 

文豪 春園無情,開拓者以來 10長篇, 數十短篇, 數百詩歌을 쓰섯다. 그의 이 모든 藝術作品은 만흔 사람의 정신적 양식이 되여잇다.

이제 自己作品에 대하여 터러노코 한 사람의 讀者로 더부러 이러케 말슴하다.

處女作 無情開拓者

 

-無情* 쓸때의 사생활은 엇댓서요.

-東京 早稻田大學에 다니든 一學生이었지요. 학비라고 매달 20원식 中央學校에서 보내 주었는데 내용은 金性洙氏가 대였는지 잘 모르겟으나 늘 그 때 學監이든 安在鴻氏 일홈으로 오더구만그 뒤 中央學校에 대하여 나는 이 학비의 恩功를 갑허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마음에 걸려요. 압흐로도 무슨 기회에든지 있지 말고 기어히 보답하려 생각하고 있어요.

-그 때 소설을 써서 그 稿料를 가지고 학비에 보태임이 되였어요?

-5원식이었으니까 매일申報社에서 매달 주는 稿料가요, 하로에 20폭도 못되지요. 그러다가 처음 시험한 이 신문소설이 인기가 낫든지 無情을 끗내자<130> 곳 게속해서 무얼하나 더 쓰라고 하기에 다시 붓을 잡어 開拓者를 쓰기 시작하였더니 그 때에는 一躍 20원을 주더구만. 4배 폭등이지요. 매월에...呵呵.

-靑春에도 尹光浩등 단편을 만히 발표하섯지요. 六堂도 고료를 보내주었어요.

-2,3천부 백이는 잡지에서 엇더케 稿料까지 줘요.

-無情朴英彩를 너무 불생하게 만들었고 開拓者性淳이를 너무 불상하게 죽었지요. 그 때 東京女學生界에서 항의가 없었서요?

-항의는 女學生패에서도 각금 날어왔지만 제일 지독한 것은 유림과 경학원 도학자들이였음니다. 지금도 이저지지 않는 것은 뒷날 李王識長官까지 지내든 韓昌洙男爵中樞院 양반들까지 20여명이 連名하여 開拓者(더구나 新生活論 때문도 있었겟지만)를 싯게 말나고 總督, 總務總監에게 와 每日申報社長에게 陳情書를 보냇더래요. 그 문제로는 나를 끗까지 옹호하여주든 加藤社長이 뒷날 나에게 그 陳情書를 보이기에 구경하였는데 李光洙란 놈은 애비 에미없이 자라난 하향 상놈의 자식으로서하고 나를 마구 공격했더구만 性渟의 신연애관, 자유결혼관 등 *德律이 그 때 선량한 朝鮮 古來道德破壞한다 해서요.

-그래. 었더케되였어요?

-한창 내 공격이 심할 적에 하로는 씨가 찾어와서 韓昌洙男爵이 당신을 맞나고 싶어하니 같이 가자 하는구려. 그 때 일언지하에 거절했지요. 나를 보고싶거든 찾어와 보라고, 내가 권문세가라고 머리 숙여 찾어갈 줄 알었드냐고 그랬더니 다시는 두 번 말이 없더군요.

-찬성도 많었지요?

-신진청년들에게는 격려의 편지가 많이 왔어요. 더구나 서울 官立高等普通學校학생들이 20여명이나 쭉連名하여서 편지했는데 어디까지든지 굳게 싸워 나가달나고요.

-無情이나 開拓者에서는 무었을 표현하려 애썼어요?

-그 때 여明期의 신진지식계급 남녀들의 고민을 그려보려 했지요. 새로운 연애문제, 새로운 결혼문제 등을 통해서요.

先導者

 

-先導者島山先生을 모델로 했다기 보다도 차라리 그 어룬의 일대기를 예술의 형식을 빌어 기록한<130>것이라고 世評이 있는데요.

- 그렇읍니다. 島山先生이 청년시대에 것고 게시든 姿態를 충실하게 적으려 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중도에 중지되고 말었서요. 單行本으로 출판하려 하재도 잘 허락하여 주지 않어요.

-先導者뿐 아니라 未完成作이 많했지요.

-千眼記도 쓰다말고 金十字架도 쓰다가 사정으로 중지했지요.

-은 모델이 있어요?

-冊 卷扉에 쓴 모양으로 내 親舊라는 동무가 있는데 그 사람이 지낸 이약이를 줄거리로 삼엇지요. 그 동무는 농촌을 개조하여 보겟다는 뜻을 품고 서울을 떠나 조고마한 한 마을로 갔구려가서 학교도 세우고 소비조합도 만들고 병원도 만들고 그리다가 잡혓서요. 그래서 7懲役을 치르고 新義州刑務所로부터 나왔지요. 지금도 사라있읍니다. 바로 그 때 그 사람 辯護를 맡은 이가 金炳魯씨엇지요. 金炳魯씨도 판결이유서를 보고 控訴하여도 별 수 없으리라고 하여 우리가 상의하고 그양 初審에서 服役해 버렷지요.

-거기 나오는 여자들도 더구나 梨花學堂 하이칼나패들도 정말 그렇게 질질 따라다니며 연애하고 간음하고 그랫서요.

-더러는 作爲도 있었겟지요.

-에서 표현하려 애쓴 그 암시는?

-나는 因果를 밋어요. 사람의 행실이란 반드시 피를 심으면 피를 거두고 벼를 심으며 벼를 거두고마는 因果關係를 보이려했지요. 세상사람이 제 가슴속에는 악하고도 험상구즌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결과만 그 반대로 좋은 것을 어드려고 거짓을 부리는 것이 원체 잘못이지요. 저는 피를 심어 노코서 벼를 거두려든다면 그는 언제든 꼭 슬품과 환멸에 빠저버릴 밧게 없지요. 에서도 여주인공이 평시에 거기 나오는 귀족의 미모에 반하여 처음에는 그저 好男兒로구나!하는 가비여운 생각을 가짐에 불과하었스나 그 의 씨가 점점 자라나서 나종에는 그만 남편있는 녀자의 몸으로서 그와 불의의 관계를 맺는 일에까지 떠러지고 말어요. 그리면서도 내가 그리는 여주인공은 대개 악의 원인으로 해서 슬품의 파국을 당하면서라도 결코 자포자기하여 아조 타락하고마는 여성들은 아니엇지요. 어디까지는 반성하고 다시 오른길에 도라가 살겟다고 懺悔하며 노력하는 그런<131> 녀자들이지요. 비록 性慾에 못이겨, 비록 돈이나 여에 못이겨 일시는 몸을 망치지만 다시 예전날에 도라가려고 悔恨하는 그런 女性으로

-因果觀을 집어 넣은 소설은 그 밧게는 엇더엇더한 것이 있어요?

-再生의 순영이도, 女子一生의 금봉이도 그 밧게도 여러편이 잇지요.

-大體 지금까지 쓴 소설을 大別한다면 이 因果觀的 소설과 또 엇든 範疇의 소설이 있어요?

-차츰 이야기 하겟읍니다만은 朝鮮民族의 장점단점을 표현하려 한 것이 있지요.

-로는?

-端寄哀史李舜臣이지요.

端宗李舜臣

 

-었재서요?

-우리 民族短點을 나타낸 점으로는 李舜臣을 들지요. 李舜臣에 대하여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延禧專門 元宇博士()硏究라 하는 영문저술을 한 것이 있는데 그 卷頭에다가 李光洙지은 李舜臣에서 참고한 것이 만노라 하였고 또 壬辰亂史紀로는 이 소설같이 완전한 것이 지금까지의 다른 저술에 없다했었고 또 이 소설을 그대로 英譯하여 , 각국에 내노으려하나 너무도 朝鮮民族短點을 그려낸 것이기 때문에 행여 歐米識者에게 악인상을 줄가 두려워하여 그만두었노라 하고 말했서요. 내 뜻을 알아주는 이 오직 이 元博士뿐이예요. 아직은.

-말하자면 民族的 性格描寫가 잘 되였다는 뜻임니까?

-利害를 초월하여 榮毁를 초월하여서 一端을 타고 생각한 일을 위하야는 제 목숨을 내바친다는 情神이것이 李舜臣에 있었지요. 그러나 野心과 시긔에 찬 朝廷諫臣의 성격이 보담 더 多數朝鮮人의 성격적 전형이었다고 나는 보아요. 端宗哀史에 이르러서도 死六臣같은 분들이 그야 혹은 君臣으로 혹은 國祿을 타먹는 利害關係로 움지겻다고 보는 이도 있을넌지 모르나 나는 거기에 그런 이나 에 움지긴 것이 아니고 나야말로 올타고,이리하는 일이 하늘에 떳떳한 길이라고 alt었으니까 利害情誼를 초월하여서 그 艱難을 밧으면서 심지어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를 위하야 싸운 것이라고 보아요. 이 빗나는 민족적 성격을 그러노라 했지요. <132> 붓이 하여 이 뜻을 세상 사람들에게 충분히 알려드리지 못하였다면 그는 븟그러운 일이지만

-大體로 쓰신 소설에 運命그것을 밋으서요? 運命으로부터 오는 비극을 그리려하지 않었어요? 運命觀(혹은 偶然)을 었더케 取扱하섰어오? 端宗哀史李舜臣이나 再生이나 그 여자의 일생이나 모다 슬푸나 슬푼 작품들이지요. 모다 題材가 비극적이지요. 이것들을 一括하여 運命의 비이라고 부를 것이 못 됨니까?

-남들은 내 소설을 或也 통속소설이니라 하고 評去합데다만은大體로 통속소설이라함은 쉽게 썼다거나 卑俗하게 이야기 됐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알기에는 그 사건에 偶然을 작고 取扱함에 있어요. 사건을 만드러 가는데 도모지 뜻하지 않은 우연히 이러나는 諸事件과 인물을 작고 집어 너치요. 그러면 그 소설은 얼마든지 자미있게 꾸며 나갈 수가 있지요. 가령 여주인공이 貞操의 위기에 당하여 있을 적에 생전에 얼골도 성도 모르는 었던 사내가 나타나서 해 주었다또는 돈이 없어 자살하려고 었던 청년이 강변에 섰는데 우연히 보니 金鑛脈이 있어 부자 됐니라하는 등등, 소설가로 안저 만일 이 偶然만 시인하고 그를 작고 활용한다면 그 소설은 얼마든지 제가 공상하는대로 자미있는 것이 되지요. 偶然이란 卽 運命이지요. 그러나 나는 이러한 偶然을 밋지 않습니다. 절대로 밋지 않습니다.

-그러타면 지금까지 그려온 이란?

-말하자면 因果觀的 」」이지요, 착하지 않는 행실과 마음을 가젔기에 슬프고 지참한 결과를 거두고 만다는 그러한 비극들이지요.

생각건대 옛날 끼리시야 悲劇은 전혀 운명적 비극이었지요. 었던 엽게 하였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일생을 두고 아모리 조케 되랴해도 간 곳마다 맛나는 사람마다 과 재앙을 갔다 주어 망하고 만다*는 그런 비극들이지요. 그러다가 섹스피어에 와서 그는 성격 비극을 그렸지요. 그 사람의 성격이 야심 때문에 친다든지, 남을 밋지않는 그런 성격가진 때문에 친다든지 리차드왕가튼 왕의 야심을 그린 , 함물렛트 같이 의심을 작고 품는 성격을에서 이러나는 비극 등등 다 그러치 안슴니까. 그러다가 근대에 와서 입센이 나서면서 社會悲劇이란 말이 있게 되였지요. 사회제도가 낫부니 모든 비극이 생긴다 등등.

그러나 같은 사회적 조건아래서도 었든 사람은 악하게 되고 었던 사람은 선하게 되니까그러니까 나 보기논<133> 마음이 착하면 그것이 必然的 으로결코 우연이 아니외다행복을 거두고 그러치 안으면 필연적으로 불행을 거둔다는 그런 비극즉 인과적 비극이라고 스사로 판단하고 있서요.

許生傳異次頓」 「有情

 

-許生傳은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지은 것이여요?

-朴燕岩熱河日記속에 있는데 그저 간단하게 줄거리가 씨워있지요. 濟州島 이약이 등 그러고는 그 외의 이약이는 모다 만들었지요. 許生傳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그 전에 少年이든가 靑春, 붉은 저고리에든가에 로써 써 보았지오.

-異次頓?

-그것도 대부분 만들었지오. 그러나 朝鮮史上에 최초의 殉敎者佛敎異次頓이란 어룬이 있었지요. 분명히 殉敎한 날자도 음력 87일이든가요분명히 생존했든 분이나 오늘까지 전해오는 史料가 있을 듯 하건만 없어요. 三國遺事6,7행 싸여 있을 뿐이지요.

-有情處女作無情의 속편 격임니까?

-아녀요. 그런 뜻은 없어요. 나는 有情에서는 인정의 아름다움을 그리느라 하었서요. 그 일을 했다고 報酬를 밧는 것도 아닌데 다만 아름다운 에 끄을려 몸도 바치고 생명도 바치고 재물도 바치는외람한 말이지만 만일 내 작품 중에 후세에 가히 끼처질 만한 것이 있다면 이 有情가실이 이라고, 외람한 말*나 외국어로 번역될 것이 있다면 그 有情이라고 생각해요. 더구나 有情속에 西伯利亞의 자연묘사를 한 에 이르러서는 나는 상당히 힘을 드렷소이다.

女子一生愛慾彼岸

 

-오늘로서 愛慾彼岸(1220)이 끗이 났읍데다 그려.

-그랬서요. 나는 이 愛慾彼岸에 깨긋한 殉敎者와 같은 處女 한분을 그려 밧지요. 그는 결혼도 아니했고 에 대한 일이나 이성의 입조차 한번 마처보지 못하고 그대로 순결하게 죽은 그런 처녀를 그러봤지요.

-開拓者性淳이 가치?

-그보다도 더 깨끗하게.

-女子一生某女史가 모델이란 말이 있드군요.<134>

-어느 부분은 모델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사실을 소설보다 하다 하는 말은 참으로 오른 말로서 往往히 소설보다 더 슬푸고 한 실지의 사실이 많으니까요.

-[金鳳]이를 修道尼를 만든 데 대해서 서울 여학생들이 원망하는 편지를 보내지 안엇서요?

-원망할 까닭이 조금도 업겟지요. 그러케 金鳳이는 성욕과 金慾으로 작고작고 타락하고 가다가 다시 크게 참회하고 인생의 오른 길에 들려고 무한히 애쓰저 안엇서요?

앗가 말한 모양으로 그래도 金鳳의 마음에 허영과 악이 차 있스면서도 어릴 때 리갑가튼 지사들의 이야기 듯든 그 소녀시대의 감화가 어느 한 모통이에 인남어 있서서 그것이 힘이 되엇지요. 인과의 법칙은 예서도 바른 길로 표현이 된 세 이지요.

-이번에 쓰는 新作 그의 自敍傳?

-말하자면 女子一生을 그리든 모양으로 男子一生을 그리려 했지요. 그래서 제목을 그의 自敍傳이라고 했어요.

-愛慾彼岸을 쓰든 붓으로 그러케 내리 계속하여 써도 기분과 제재가 그러케 갑작이 전환이 되서요?

-글세. 내 생각에는 新年號 紙上에서부터나 쓸 작정을 하였더니 신문사에서 하로도 끈치말고 작고 꼭 있대여 쓰라고, 벌서 예고까지 덜컥 내노앗기에 하는 수 없 이러케 병중에서도 하로 쉬지 못하고 써감니다.

-(文責在筆*)-

1220일 저녁에<135>

名優 羅雲奎氏 아리랑等 自作全部를 말함

 

朝鮮映畵界開拓者先駒者이며 아울너 그 天禀斯界 第1人者世上에 이미 定評이 잇는 羅雲奎氏가 이제 한 사람의 映畵觀客으로 더부러(아리랑) (잘 잇거라) 10數篇自作全部에 대하야 率直하게 心懷를 말하다.

아리랑

 

-풍년이 온다

풍년이 온다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날 넝겨주오

하는 이 노래는 누가 지었어요. 한동안은 그것이 벌서 십년은 되였지만그때 서울이든 시골이든 어데서든지 어린아이 자란 할 것 없이 모다 즐겨 부르든 아리랑의 이 주제가(主題歌)를 누가 지었서요.

-내가 지었오이다. 나는 국경 회령(國境會寧)이 내 고향인 것만치 내가 어린 소학생 때에 청진(淸津)서 회령(會寧)까지 철도가 노키 시작하였는데 그 때 남쪽에서 오는 로*자들이 처 로 길뚝을 닥그면서 아리랑 아리랑하고 구슬픈 노래를 불르드군요. 그것이 어쩐지 가슴에 충동을 주어서 길 가다가도 그 노래 들리면 거름을 멈추고 한참<136> 들었서요. 그러고는 애연하고 아름답게 넘어가는 그 멜로디를 혼자 웨어 보앗답니다. 그리다가 서울 올라와서 나는 이아리랑노래를 찾었지요. 그때는 민요(民謠)로는 겨우 강원도 아리랑(江原道)이 간혹 들릴 뿐으로 도모지 찾어 들을 길 없더군요. 기생들도 별로 아는 이 없고 名唱들도 즐겨 부르지 않고그래서 내가 예전에 듣든 그 멜로디를 생각하여 내어서 가사(歌詞)를 짓고 곡보는 단성사(團成社) 음악대에 부탁하여 맨들었지요.

-영화스토리도 혼자 생각했어요. 어떤데서 암시(暗示)를 받었고 또 어떤 뜻을 표현하느라고 애썼어요.

-이야기도 모다 혼자 생각해 냈지요. 나는 거기에 표현하려한 정신은 한 개의 아모 구속도 아니받는 인간을 그리려 했지요. 그러자면 미친 사람이 되어야 하지요. 미친 사람 눈에는 세상에 모든 권위(權威), 무서운 것도 머리 숙일 곳도 아모 것도 없지요. 제가 웃고 싶으면 언제든지 웃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아모 말이나 하고요그래서 이 주인공을 철학

(哲學)을 연구하다가 미처진 사람으로 만들었지요. 이 미친 사람에 누이 申一仙가 있었지요. 누이가 옵바의 친구와 연애하는데 그 집 머슴이 누이를 탐내지요. 그레서 이 머슴을 미친 사람이 죽이지요. 죽이고 나자 그 사람 정신이 바로 도라 가지요. 그래서 살인죄 殺人罪를 쓰고 옥에 드러가는 것으로 전편前篇의 끝을 삼었지요?

-그때 여우女優?

-신일선申一仙이지요.

-신일선이는 어떻게 발견했어요?

-내가 부산(釜山)에 갔을 적에 하로 저녁은 연극구경을 갔는데<137> 무대 우에 올라서서 독창(獨唱)하는 어엽분 나어린 소녀가 있더군요. 그러나 그때는 막연하게 기억만 해두었다가 서울와서 이 처녀작을 박이려고 생각을 하자 여우를 얻을 필요 있어 그때 함경도 함흥(咸興)에 가서 극장에 있다는 그를 다려왔지요. 그 아버지는 서울 경운동 리강전하(李堈殿下)()에서 마당도 쓸고 심부름하는 노인이고 그 옵바는 순사(巡査) 다니다가 그만둔 사람이지요.

-신일선이를 배역(配役)으로 얻는 것은 큰 성공이었지요!

-그랬지요. 그때는 그가 처녀시대고 열성이 있고 용모가 아름답고 퍽으나 유망하였지요. 중도에 결혼사건만 없이 그대로 성장하였다면 지금쯤은 큰 스타가 될 것을 앗가운 일을 하였지요.

-아리랑은 제작비(製作費)가 얼마나 드럿서요.

-3,000.

-그 돈을 뽑앗서요?

-봉절 당시(封切)에 거지반 그 3,000원은 다 빼었지요. 흥행 성적이 조왔으니까 그 뒤 통계를 치면 아마 여러 십곱의 돈이 생겻슬걸요모다 작품은 요도()라는 흥행업자의 손에 가 있습니다만은

(風雲兒)금붕어

 

-아리랑이 그렇게도 큰 센세이슌을 일으킨 뒤 둘재번 작품으로 내노흔 것은?

-풍운아이지요. 이것은 그때 닥크라스가 전성하여 뛰고 다름박질하고 그런 영화를 일반사회에서 요구했으니만치 나도 이런 것을 착수해 보앗지요.

-스토리가 어떻게 되였든가요?

-서백리아를 오래 방랑하고 있든 주인공이 고토라고 조선에 찾어오지요. 그가 차깐에서 어떤 인테리여성을 만낫는데 그 역시 외지로 도라다니든 무슨 당원이지요. 둘은 마츰내 어린 아이 하나를 얻어요, 즉 다 자란 사람에게는 기대할 것 없으나 앞으로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잘 길러 내자아모조록 잘 길러내서 우리 뜻을 본 박게 하자 함에 중요한 뜻이 있었지요. 그래서 땅우에 우리 지도도 그리어 가르켜주었고<138> 거짓말과 속이는 불정직한 성격(性格)*로 잡어 주었고이런 것을 거칠거칠하게 선()이 굵게 그리느라 했어요.

-그때 女優.

-金靜淑이었지요.

-김정숙이는 어떻게 발견했어요.

-그가 처음 윤백남씨의, 백남푸로덕슌에 있었서요. 그런 것을 대려왔지요. 원래는 부산(부산)서 긔생노릇을 하였대요.

-한 번 대려다가 한 촬영을 마칠 때까지 즉 한 작품을 끝낼 때까지 보수는 얼마나 주나요. 300원 주어요?

-그런 경제력이 었어야지요? 피차에 그저 희생적 노력이란 생각이 있으니깐? 버티어 가지요. 그때나 이때나 한 100원식 주는 폭이 되지요?

-*정숙이는 금붕어까지에 나오더니 이내 종적을 감추더구만요. 영화계에서는 지금은 무얼해요.

-어느 시골의 캅페―」여급으로 도라다닌데요?

-그도 역시 연애때문에 타락했는가요?

-그런 점도 있겟지요? 그와는 금붕어에도 함께 나왔는데 인테리 여성으로의 특질이 있어 좀 더 발전 할 수 있었든 것을요?

-풍운아금붕어는 흥행 성적이 어더했서요?

-내가 초긔에 만든 아리랑」 「風雲兒」 「野鼠의 세편은 일본내지인인 요도()가 돈을 대여 하였는데 제4작인 금붕어에 와서는 단성사의 도라가신 박승필(團成社 朴勝弼)씨가 돈 대주었어요. 그래서 그때 비로소 羅雲奎푸로덕슌을 설립하고 첫 작품으로 금붕어를 하였는데 다 좋앗서요. 모다 5,6배식 남었지요.

잘 있거라<139>

 

-잘 있거라는 거칠거칠하고 남성적(男性的 ) 작품이어서 많은 사람을 울리고 감격케 하였지요. 흥행 성적도 좋왔을걸요.

-그것이 제작비용이 2,800원 드럿지요. 그때는 원체 필림 값이 싸고 셋트를 만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그양 들에 나가 로케으로 박여냈으니까 비용이 훨신 적게 들었지요. 그리고 열흘동안이란 짧은 시일에 끝냈으니깐요.

-그때 여자스타?

-全玉氏였지요.

-성악가 강홍식(姜弘植)씨 마누라가 된

-그렇지요. 全玉氏와 더부러 그 뒤 玉女도 박였지요. 그런데 잘 있거라는 열여드래 동안의 서울 흥행에서 벌서 제 미천을 다 뽑는 호성적을 내었음에 불구하고 玉女에 와선 아조 망첫지요. 비용은 4000원식이나 먹여서그것은 셋트의 설비가 불완전한 데다가 눈이 푸실 푸실 오는 겨울이고 도모지 활동이 여의치 못했서요. 나는 그때 일이 이처지지를 않어요. 玉女가 단성사에서 봉절될 적에 첫 날 관객 틈에 끼어 가보고 그만 落望했어요. 완전히 실패된 작품이었거든그래서 그 길로 집에 도라와 이불을 쓰고 두문불출하여 큰 결심을 하고 일주일동안 생각해 씨나리오를 써낸 것이 저 저 강을 건너서이였지요.

을 건너서사나히

 

-저 강을 건너서는 확실히 걸작이었지요. 아리랑에 버금갈 걸작이었지요. 어덴가 푸로작가 崔曙海作風을 연상식히는 좋은 대목이 많었지요.

-. 다행히 성공했어요. 그러나 間島에까지 가서 로케했든 관계로 비용은 많이 나서 제작비 모다가 6,000여 원이 들었어요. 역시 요도()가 대어 주었어요?

-尹逢春氏도 그때 함께 갔지요.

-그렇지요. 全玉 尹逢春 모다, 함께 출연했어요.

-지금도 이처 않짐은 잘 있거라속에 북간도 어느 촌학교에서 눈바래치는 추은날 학생들이 창가하고 체조하는 대목 같은 것은 참으로 좋왔어요.

-원래 그 제목도 저 강을 건너서가 아니고 처음에는 豆滿江을 건너서이었지요. 그러다가 그것이 자미없다고 어느 측에서 말이 있기에 중도에 변경했는데 내 생각에는 간도 동포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려보자 함이었지요. 그러나 저 강을 건너서에는 다행히 호평도 받고 내 자신도 자신이 있섰습니다마는 그만<140> 그 다음 작품인 사나히에 와서는 또 망첫지요.

-사나히는 있든 것이든가요.

-돈 가진 집안 자식이 아버지에 불평을 품고 뛰어나와 활동하는 것인데 여러 가지 장애가 있어 실패하고만 작품이 되었지요.

-여자 스타는 누구였든가요?

-柳新芳이라고 새로 나온 이지요.

仁川에 놀러갔다가 내가 발견했지요. 인천서 기생노릇을 하든 여성입니다. 그러나 어느 여자고 보女子高普를 마친 인테리 여성이었지요. 文學을 좋아하여 스사로 붓을 드러 도 짓고 도 쓰느라 하였고 風貌敎養이 있느니 만치 인테리의 근대적 여성으로 보였지요.

-나히는.

-그때 수물세살.

-엇재서 梨花專門 文科 출신 같은데서 女優를 구하지 못하고 그저 기생과 여급사회에서만 구하러 드러요? 東京서는 귀족집안에서까지 구한다는데가령 入江たか로 말할지라도 그가 子爵의 따님이 아녀요?

-梨花出身이야 어디 눈이 높아서요...

文藝作品벙어리 三龍

 

-그 다음이 저 유명한 文士 羅稻香原作 벙어리 三龍인가요?

-그렇읍니다.

-文藝作品을 착수하게 된 동기는?

-어릴 때부터 문학을 좋아한 탓으로 틈만 있으면 여러 작가의 작품을 읽느라고 노력했지요! 그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것이<141> 이 벙어리 三龍이었어요. 또 그 스토리 된 품이 映畵化하기에 알맛고 주인공이 내 비위를 끄으러요.

-벙어리 三龍은 마치 저 藤森成吉彼女をおさうさせたか와 비슷한 맛이 있지요?

-그래요. 생각하여보면 퍽으나 심각한 제재었어요. 그때 돈이 들기는 3,600원이엇는데 스을 너무 크게 잡앗다가 아소 실패한 점이 있었어요. 나는 지금도 생각하거니와 그것을 다시 토키로 박어보고 싶어요.

-마즈막의 라스트 씬인 불놓는 장면은 셋트로 했든가요.

-東大門 밖에 나가서 대문과 마루와 안방의 세 셋트를 만들어 놓고 여기에 차레차레 불을 질넛지요. 그러고 온 가옥이 타는 모양은 煙幕을 사용해서 만드러냈지요, 그런데 그때 혼난 일이 있었지요. 집을 짓되 조히와 헌겁으로만 형을 만들면 너무 빨니 불에 타 버릴가 저어하야 그 뒤에다가 두치 널판장을 대이고 그리고 석유 한통을 사다가 모다 골고루 뿌렷지요. 아모조록 오래오래 두고 골고루 부트라고그 뿐더러 그 장면만은 아조 핍진하게 만들 생각으로 내 몸에 실지로 불이 달리는 것을 박이려고 그래서 솜옷을 지어 입은 그 우에다가 나도 석유를 잔득 첫지요. 그런데 그 장면은 안방에서 이 불난리에 울며 부르짓는 여자를 내가 뛰여 들어가서 구해 가지고 엽꾸리에 끼고 다라나오는 대목인데 이걸 좀 보세요. 글세 불을 부첫드니 예상과 어그러저 아조 일시에 화약이 폭발되듯 탁 붙겟지요. 내 전신에도 빨간 불길이 붙확, 나는 크게 火傷했지요. 이마와 엽구리에도 한사하고 그 여자를 구해내기까지는 하였지요. 카메라가 작고만 도라가는데 그렇다고 끊질 수가 있어야지요! 그러서 그 뒤 약 한달 동안을 두고 알엇지. 큰 화상을 당했어요. 그 여자도 머리가 타고 젓가슴 타고 야단 낫지요. 마츰 누가 경험있는 이가 있어 온몸이 火光에 싸힌 나를 보고 그냥 땅우에 구을라고 하여 눈 우에 마구 구으렀기에 목숨은 구했지만 지금 생각하기에도 몸서리가 치는 큰 모험이었어요.

-그때 그 여자는 누구인데.

-역시 柳新芳이었지요.

開化黨임자 없는 나룻배

 

-선구자 金玉均을 취급한 史劇 開化黨은 흥행가치로는 차치하고라도 우리 영화사상에 남긴 가치있는 사업이었지요.

-사실 고백하지만 史劇은 어려워요. 그 시대의 말씨라든지 의복제도라든지 그런데다가 사실에만<142> 충실하자면 작품이 승겁게 되고 예술미를, 즉 꿈을 집어넣자면 역사를 위조하게 되고요. 엇잿든 그 작품에서 가장 컷트를 많이 당했어요. 그러고 그 작품이후에는 같은 史劇이라도 李朝 500년 동안의 역사물은 되도록 취급치 말나는 주의를 받었어요.

-開化黨에도 여자가 나오든가요.

-나왔지요. 그때는 河小楊이지요. 이 분은 내 친구 尹逢春君의 마누라엇지요. 지금은 갈나지고 다른 곳에 시집갔다 하지만 퍽으나 소질있는 분이엇지요.

-임자 없는 나룻배에는 누가 나왔어요.

-金蓮實이와 文藝峰 둘이.

-그 두분은 어떻게 발견했어요?

-團成社에 있는 내 친구의 소개장을 가지고 처음 金蓮實君이 찾어왔더구만. 그러나 얼골이 그렇게 뛰여나게 어엽분 것도 아니고 연기도 특별히 우수한 것은 아니엇지만 그 사람은 열성이 있어요. 기어히 성공하고야 말겟다는 열성과 노력이 있어요. 그리고 文藝峰君은 그때 演劇市場인가 어디인가의 女優노릇 하는 것을 내가 대려왔지요. 성장할 싹이 보여요. 文君은 요지간 기록영화를 박힌다고 東京 드러가고 없지만.

-임자 없는 나룻배 뒤에는 무었이 있었어요.

-鐵人都鍾路가 있었지만 다 수준 아래고 아리랑3편도 돈은 5,000원이나 먹여가며 일부러 申一仙이도 부활시켜가며, 그랫으나 인구 시일이 없며 여러 가지 장애도 결국 성공한 작품을 만들지 못하고 말엇지요.

-아마 아리랑 3最初의 토키었지요?

-그랫서요. 그리고 이번 박히는<143> 五夢女

李泰俊氏五夢女

 

-文士 李泰俊氏 작품에 착수하게 된 動氣.

-훨신예전에 내가 이 작품을 읽고 대단히 좋고 자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누구의 작품인 줄 몰낫서요. 요전까지 내 기억에는 開闢잡지에서 현상모집에 드러 온 어느 무명작가의 것인 줄만 알고 있다가 비로소 李泰俊氏의 원작이요 그것이 開闢이 아니라 時代日報에 났든 것인 줄 았었어요.

-이번 은 대작인가요? 江原道에 로케슌도 *래 단녀오고.

-상당히 큰 작품이외다. 于先 경비만 해도 6,500원 예산이었는데 아모래도 초과할 것 같해요. 지금 晝夜不分하고 촬영중인데 아마 1월의 제2주나 제3주에는 封切될 듯 해요.

-李泰俊氏 작품은 퍽으나 인정미 있고 묘사가 깨끗하니까 영화로 해도 많은 인기를 얻을걸요. 앞으로도 文士들 작품을 작고 착수하구려.

-그리하고 싶지만 근래에는 문예작품을 별로 읽지 못해요. 다만 예전 기억으로 말하면 春園작품이면 영화화할 만하게 사건이 복잡하고 인물이 多彩하여요, 기회있는대로 만들어보려 해요.

-이번 五夢女에는 누가 스타얘요.

-盧載信이라고 아리랑고개에 나왔든 이지요.

-딴 말이나 자작영화를 상연하기 전에 그 극장무대에 나서서 인사한 적이 있었어요?

-있지요. 大邱平壤같은데 나가서 각금 하였지요. 퍽들 그리 하는 것을 좋아하더군요.

女優處女가 좋은가 婦人이 조흔가요

 

-과거 10년 동안 여러 수십 개의 작품을 만들어 본 경험으로 말하여 녀배우는 시집가고 兒孩 낳은 중년부인이 좋은가요 아즉 나어린 처녀가 좋은가요.

-그야 처녀지요.

-大河內같은 俳優는 말하기를 가 숙련되고 인생의 실감을 가진 名優를 얻자면 역시 시집도 가보고 兒孩도 가저 본 나히도 3,40 된 여자가 좋다고 하더구만.

-그러나 그렇지도 않지요. 내 경험으로 보면 시집가 노으면 그만 이 식어요. 생명같이 알든 영화를 헌신짝 같이 녁이고 그제는 男便이요 연애요 하고 딴데만 정신을 써서 못 써요. 역시 육체의 도 좋고 성격도 순진하든 처녀시절이 낫지요.

(1225夕 京城撮影所 五夢女撮影場所에서 會見하다)<144>

<129-144>

 

 

색인어

이름 : 春園 , 金性洙 , 羅雲奎 , 신일선 , 申一仙 , 金靜淑 , 윤백남 , 박승필 , 朴勝弼 , 全玉 , 강홍식 , 姜弘植 , 尹逢春 , 柳新芳 , 河小楊 , 金蓮實 , 文藝峰 , 李泰俊 , 盧載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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