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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蓄妾史

이강기 2015. 9. 28. 11:01

개벽 신간 제3

발행일 19350101

기사제목 朝鮮蓄妾史

필자 靑吾

기사형태 논설

 

朝鮮蓄妾史

 

靑吾(車相瓚)

1.意義及別稱

 

이란 무었이냐. 반상긔(飯床器) 쟁첩이냐 바누질 그릇의 실첩이냐 하는 말은 巷間에서 쓰는 허튼 수작이어니와 그것을 좀더 意義잇게 古典參考하야 본다면 說文에는 하되 妾之言接也-聞彼有禮하고 走而往焉하야 以得接見君子也-라하고 左傳에는 하되 女爲人妾하니 不聘也-라하고 彙苑에는 接也-得接見君子而不得伉儷也-하얐으며 朝鮮俗行謎語에는 붉으면 대초(大棗). 대초면 달고 달면 엿()이요. 엿이면 붙()고 붙으면 이다란 말이 잇다. 이 여러 가지의 말을 綜合하아보면 이란 뜻이니 卽 女子男子正式夫婦가 되지 않고 그냥 接近하야 산다는 뜻이엿다. 에는 良妾賤妾2종 구별이 있으니 良妾은 글자 그대로 良家의 여자로 남의 이 된 것이요 (이 경우에 婚儀는 정식의 無異하나 다만 新郞所著紗帽兩角하고 를 행한다.) 賤妾元來身分이 천한 여자로 남의 이 된 것이니 하면 私婢, 官婢, 國婢(官婢, 國婢卽 妓生.) 卽 公私賤婢及娼妓類이 그것이다. 然而妾에는 또 여러가지의 別稱이 있으니 卽 副室, 少室, 別室, 側室, 小家 等. 小家少室과 가튼 말이니 本妻原則上 大家에 있는 까닭에 거긔에 하야 하는 말이요. 側室, 別室, 副室本妻正室이라 하는데 하야 생긴 말이다. 그런데 近畿地方에서는 別室이라면 대개는 老人妾을 가르처 말하고 開城地方에서는 良妾을 가르처 산後室(生後室)이라 하며 또 近來에는 이란 名稱忌嫌하야 或稱 第2夫人 또는 左夫人이라고도 하는 일이 잇다. 그리고 本妻宅字를 노와서 혹은 楊州宅 春川宅, 玉洞宅, 嘉會洞宅 하지만은 은 특히 집를 부처서 平壤, 全州大邱, 淸進, 寺洞집이라 하며 尊稱하야도 그저 마마(媽媽)라 하고 마님 아씨의<20> 말은 쓰지 안는다.

2. 起源

 

東洋人畜妾制度는 원래 支那人多妻主義에서 기원되였으니 禮記檀弓篇鄭註에 의하면 支那는 소위 23시대부터 일즉이 多妻主義가 유행되야 帝嚳()四妃하되 1正妃를 삼고 其次三次妃를 삼었으며 帝堯도 또한 그 를 쓰고 帝舜不告而娶한 까닭에 正妃는 없으나 이 三夫人있었고(長妃娥皇, 次妃女英, 又次妃癸比) 夏禹氏3부인外 舜39인으로 하야 12인을 두고 殷人12인 외 3927인을 더하야 39인을 두고 上代帝嚳을 본받어 正妃하고 殷人27인의 381인을 39인을 더하야 121인을 두었으니 그 1인과 夫人 3인과 927世婦81女御엿다-進也侍也-卽 侍女. 內則篇註하되 天子御妻81인이 9하고 世婦27인이 3하고 9인이 1하고 夫人3인이 1하고 1인이 1專當하야 15만에 두루 5일의 를 하고 諸侯1인이 9하되 夫人 2인이 姪姊가 있어서 그 6인이 1하며 21하고 夫人1專當하야 51를 맛추게 된다 하얐으며 白虎迪에는 하되 卿大夫12이요 11이라 하얐다.

이와같이 支那古代 帝王으로부터 王公卿士에 이르기까지 多妻 卽 畜妾制度公認한 까닭에 소위 大聖人이라고 하는 孔子까지도 이 있었고 (孔叢子曰 宰予楚昭王을 보고 말하되 夫子妻不服綵하며 妾不衣帛이라 하얐은즉 孔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孔子子伯魚이 있었으리 (子思孔子庶孫이란 이 있은즉 伯魚有妾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 唐代韓退之, 白樂天, 杜牧之, 蘇東坡 等 소위 著名의 인물치고는 별로 없는 사람이 없었다. 唐明皇當時後宮佳麗 3천인이 있었단 말은 虛風 잘 뜨는 中國사람의 소위 白髮三千丈式으로 그리 신용할 수 없다 할지라도 近代軍閥張宗昌가튼 色男이 자그만치 26인의 愛妾을 두엇다는 것은 누구나 너무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럼으로 中國人人物 如何와 세력 여하는 그 妾數多寡를 가지고 할 수 있다 하야도 過言이 안일 것이다.

3. 三國及高麗時代畜妾

 

朝鮮支那國土相接하야 自來 政治上, 文化上 各方面으로 그 影響을 많이 바든 中 畜妾弊風도 또한 그 影響를 바더서 往昔 三國初期부터 벌서 畜妾가 있었으니 魏志에 의하면 沃沮는 나라가 하야 高句麗臣屬되고 美女를 보내서 婢妾을 삼었다 하고 唐書에는 하되 新羅王族眞骨 또는 1이라하고 貴族2이라하야 兄弟女姑姊姊妹<21> 모도 하야 를 삼음으로 妻族은 대개가 1로서 2하지 않고 만일 하다면 항상 妾媵을 삼었다 하얐으며 王室에 있어서도 대개가 支那과 가티 正妃以外에 다수의 姬妃를 두었으니 그 중 顯著한 예를 말한다면 高句麗 第2世王 琉璃明王松氏王妃가 잇는 외에 鵑川女禾姬漢女雉姬를 두어 松妃한 후 2기가 서로 을 다투다가 雉姬禾姬에게 을 보고 漢土逃歸하매 이 안탑갑다녁여 저-유명한 黃鳥歌를 지은 사실과 그 뒤 山上王兄妃于后를 삼은 酒桶村 美人으로 小后를 삼은 것과 中川王椽氏 王后가 잇고도 또 美女貫那寵愛하야 小后를 삼고자한 것가튼 것이다. 그 외 新羅, 百濟, 後百濟 等國도 모도 다수의 後宮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公卿士大夫家까지 역시 이 있엇던 것은 여러 가지 記錄에 의하야 또한 알 수 있다.

高麗는 역시 三國와 맛찬가지로 王室에도 正妃 以外 여러 后妃가 있었으니 爲先 麗太祖神惠王后 柳氏외에 莊和王后 吳氏(惠宗母)가 있었고 其外 역대 제왕도 모도 다수의 후궁을 두었던 것은 물론이요 官吏6품관 이상은 또한 을 두게 되엿고 乃至 僧侶까지도 을 두었으니 徐兢高麗圖經高麗官府有媵하고 國官有妾하고(中略-원문) 富豪娶妻至34하야 少不相合하면 輒離去하고 産子居別室이라한 것과 成俔慵齋叢話高麗時以爲住持僧者-豪富勝於公卿하야 至擁婢妾이라한 것을 보와도 當時制度風氣를 족히 推知할 것이다. 그러나 高麗初 等에는 그러케 심하지 안엇다가 中葉에 이르러서 風俗이 크게 毁敗하야 士大夫間妻妾을 서로 爭奪하는 일까지 있어서 明宗崔忠獻大將軍 孫洪胤을 죽이고 그 를 빼아서서 을 삼고 金南俊牧使 李緝潛通하야 其妻로 하야금 其夫케 하고 (高麗本史叅照) 高宗 2년에 鄭稂妻妾으로 競爭을 하다가 그 部 尙書降職까지 되고 (東國通鑑叅照) 同王3년에 李義曩子至榮朔州分道 將軍이 되야 興化雲中道歸化散居하는 楊水尺을 모조리 자기의 愛妾 紫雲仙에게 하고 其名하야 强制徵貢을 함부로 하다가 (朝鮮白丁及妓生이 그때 楊水尺에서 기원되였다) 至榮이 죽은 뒤에 崔忠獻이 다시 紫雲仙하야 을 삼고 籍口하야 또한 徵貢하였으며 (仝上)相國 金元命妻妾을 한자리에 안치고 그 友人 贊成 李龜壽接待하다가 龜壽에게 叱責을 당한 일이 있었고 尹瓘은 또 女眞人이란 愛妾이 있었다. 그 중에 畜妾大家禑王池奫이니 은 본래 行伍出身으로 軍功을 세워 宰輔에까지 이르럿으나 爲人好色貧財하야 姬妾30여인에 달하얏는데 대개는 재물을 취하야 얻고 은 취치 안엇다고 한다. 그리고 高麗君王으로서 寵姬愛妾이 많은 분은 忠肅王王禑李朝 燕山君과 비슷한 風流淫君으로 후궁에 佳麗가 충만한 것은 물론이고 羣妓를 총애하였으니 그중 特愛妓妾七點仙鸞雙飛 小梅香 等이였다. (此等妓<22> 모다 翁主하얏다)

4. 李朝時代畜妾

 

李朝時代에는 畜妾制度가 아주 法令으로 具體化하얐으니 卽 李朝實錄에 의하면 太宗 2春 正月禮曹及領春秋舘事 河崙知春秋舘事 權近을 명하야 三代以下歷代君王妃嬪侍女의 수를 考査以聞하라 하니 禮曹上疏하야 曰 臣等謹案하온 즉 昏儀하되 諸侯9를 취하되 一國에 취하면 兩國하야 姪姊로써 모도 케하고 卿大夫12이요 11인바 그것은 원래 繼嗣를 넓이하고 淫佚코자 함이어늘 前朝婚禮가 밝지 못하고 嫡庶가 제한이 없어서 많으면 혹은 수에 넘처 너머 僣亂한데 이르고 적으면 또는 수를 하야 絶嗣까지 하고 先王의 법을 좃지않으며 大倫紊亂케 하니 그는 다른 까닭이 안이라 國家가 여러가지 施爲擧皆成憲하얐스되 유독 혼례는 舊弊를 아즉까지 쫏는 까닭인즉 殿下先王에 의하야 宮壺를 가추게 하고 卿士大夫까지도 또한 定制에 의하야 絶嗣치 않음과 또는 踰越치 않게 하야써 人倫하되 만일 違越하는 면 법으로 처리하여 진다. 하니 允許하얏다하고 또 典餘通考婚嫁條에는 民年四十 이상 無子者는 비로소 娶妾하되 違令하는 40이라하고 以妻爲妾하고 妻在한데 으로 를 삼는 者 杖九라 하얏다.

李朝에는 을 이러케 법령으로 公認한 까닭에 高官大爵은 물론이고 至於山林學者까지도 공연하게 畜妾을 하얐으니 朝鮮書院創設者 周新齋 世鵬을 위시하야 (周新齋 武陵雜稿有送襄州老妾詩하니 曰魂消心折淚交㶊 始見寧知此別離 慈病四年長侍藥 嚴寒三歲不窺私 覊留致汝靑春怨 老醜慙吾白髮垂 好去寧親歸美土 緣如未晝後生期) 徐花潭敬德 (成牛溪集云花潭有妾子2) 曺南冥植(見李珥石潭日記) 李晦齋 彦迪 高霽峰 敬命 李栗谷 珥 等 大儒學者가 모도 이 있었고 勳臣으로는 國初 河崙 端宗朝 金宗瑞 世祖時 奉石柱, 中宗朝 朴元宗, 宋軼 等擧皆畜妾大家河崙妓妾 많은 것은 당시에도 世評藉藉하였고 金宗瑞世祖에게 被禍하던 當日에도 3(其中 一妾女眞人)內房에 있어서 內探하러 온 洪允成에게 술을 부어준 일이 있었으며 奉石柱麗朝 池奫과 비슷한 인물로 驍勇醉하고 善射擊毬하야 世祖 靖亂한 까닭으로 하고 이 정2품까지 되였으나 爲人貪婪酷暴하야 朝廷亂臣妻妾功臣에게 下給하야 奴婢를 삼게 할 때이면 그 중 姿色잇는 자를 구하야 을 삼고 日夜縱謠하고 朴元宗首相으로 兵制까지 겸하얏는데 屋宇樓池가 극히 廣大奢麗하고 侍妾이 수십여인에 달하는데 擧皆名舞善彈當代麗人이엿고 宋軼微賤時衣服이 없어서 형제가 옷을 易服하며 出入하다가 功臣이 된 후에는 극히 豪奢의 생활을 하야 官妓하되 妾家廣大華麗하기가 當時無比하고 綾緞<23> 안이면 들이 입지를 안엇다한다. 武將文官보다도 원래 하는 이 만엇스니 李忠武公黃進 林慶業 將軍(妾名梅環)가튼 분까지도 이 잇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도 족히 推知하겟고 王族貴公子流自來 姬妾이 많었으나 역대왕자 중 1豪華의 생활을 하고 姬妾이 만엇던 이는 安平大君 李*이니 그는 여러 愛妾이 있는 중에 특히 저명한 美姬 10인이 있었으니 曰 小玉, 芙蓉, 翡翠, 玉女, 金蓮, 銀贍, 飛瓊, *, 雲英寶 等等이다. 그들 10는 모도 容姿美麗할 뿐 안이라 歌舞書畵絶特한 외에 가 또한 능하였으니 소위 10各賦烟詩는 세상에서 膾煮하는 바이오. 근대 大院君安平에 못지 안은 妓妾大家엿다. 그리고 역대 군왕 중에는 成宗燕山君 父子稀有多妾愛妓家이니 그것은 여긔에 구태여 말치 않어도 이미 누구나 잘안는 바이다.

5. 妾及妾子孫法典上地位

 

上述함과 가티 李朝에서는 法典上으로 公認하얐으나 그 待遇에 있어서는 극히 賤待하얐으니 卽 妻官職을 따러서 貞敬夫人(, 1) 貞夫人(, 2) 淑夫人(, 3, 堂上官) 令人(, , 4) 恭人(, 5) 宜人(, 6) 安人(, 7) 端人(, 8), 孺人(, 9) 職號하나 은 비록 如何高官이라도 그러한 榮職하는 가 없고 戶籍에도 단지 率妾某 혹은 某召史라 하고 와 가티 某封某氏라 하지 못하여 死後銘旌及棺上에 쓰는 것도 또한 그러하고 服制에 있어서도 여간한 賤待를 한 것이 안이엿다.

그리고 妾子孫에 있어서는 國初로부터 嫡子孫差別甚嚴하게 하야 太宗 13癸巳에 왕명으로 庶孽子孫勿叙顯職이란 법전을 정하얐으니 이것은 李朝最大惡典이라 안이할 수 없다. 이 법전을 제정한 동기는 원래 당시 權奸 鄭道傳庶孼賤子李太祖하야 開國을 이른 후 嫉妬私怨으로 無罪賢良構誣殺害하고 최후에는 南誾, 李稷 等陰謀하야 芳碩擁立하고 太宗 等 諸王子를 해하랴다가 일이 먼저 發覺되야 伏誅하니 當時代 言官으로 잇던 徐選은 평소에 道傳과 틈이 있어서 互相疾視하다가 이 기회를 타서 子孫, 其他 庶孼 等을 모도 政界에서 永久驅逐할 심산으로 上䟽하야 이 名案 안이 惡法案提議한 것이라 한다. 그때 夫人其夫의 그러한 提案을 하얐다는 말을 듯고 그 후가 없으리라 하더니 徐氏는 과연 자손이 없었다고 한다. 裏面의 사실의 裏面이 과연 그러한지 그것은 알 수 없으나 惡法案인즉 古今稀有名惡法案이엿다. 그러나 그 法典庶孼子孫全然禁錮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안엇다가 成宗朝에 이르러 大典頒降할 때에 또 1층 심하게 되야 庶孼子孫文武生進不許하는 이 생기고 (曾孫以下는 물론 無關) 그 후 大典註解를 할 때에는 일층심하게 되야 子子孫孫이란 句語添付하야<24> 아주 永世禁錮가 되였으니 星湖 李瀷先生한바 庶孼防限徐選으로 하야 姜希孟安瑋 等大典할 때에 심하게 되였다는 말이 곳 이것이다.

其外 妾子家督相續에 있어서는 李朝實錄 太祖 68辛卯奴隷辨定都監上言에 의하야 嫡室無後者妾子繼嗣하되 먼저 良妾子孫으로 하야 奴婢專給하고 良妾無子하고 自己婢妾傳繼明文이 없더라도 半分하고 半分屬公하며 타인의 作妾하야 有子한 경우라도 또한 7分之1을 주고 여분은 屬公케 하얐으며 또 재산상속에 있어서 功臣田은 자손에 전하되 嫡室이 자손이 없으면 良妾子孫에게 전하고 良妾子孫이 없으면 賤妾子孫에게 전한다 規定하고 (經國大典戶典田宅條)

奉祀에 있어서는 文武官 6품 이상은 3대를 하고 7품 이하는 2대를 하고 庶人考妣하되 嫡長子無后衆子 衆子無后妾子奉祀하되 嫡長子妾子만 잇는 때에 奉祀을 원하거나 妾子一支別爲한다 하야도 또한 聽從하고 良妾子無后賤妾子承重한다 하고 (禮典奉祀條)

官吏叙用에 있어서는 文武官2품 이상의 良妾子孫은 정3품에 하고 賤妾子孫은 정56품 이상은 良妾子孫은 정4, 賤妾子孫, 6, 7품 이하 無職人良妾子孫은 정5賤妾子孫及賤人爲良者는 정7, 良妾子之賤妾子孫(소위 개똥庶孽)은 정8품에 한하고 兵曹하며, 2품 이상 妾子孫은 또한 司譯院, 觀象監, 內需司, 惠民署, 圖畵署, 算學, 律學를 따러 採用하게 되엿다. (吏典限品叙用條)

-이하 大典通編限品叙用條 及 刑典條例繁多함으로 한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일반의 法規及慣習打破變更되는 同時 妾根本的 法令上으로 치 안케 되였은즉 累百年間 法令 또는 慣習으로 複雜多端하던 嫡庶의 문제도 또한 자연 消滅하게 되였다.

6. 歷代名妾畧傳

朝鮮은 역대로 畜妾盛行하니만치 名妾이 또한 많었으니 이제 그 代表될만한 인물을 소개한다면

雲江 趙瑗妾 李玉峯=趙瑗白玉이요. 林川人이니 宣朝朝官至承旨하고 國難하였다. 일즉이 宗室 李逢庶女하야 을 삼었으니 李氏玉峯 또는 玉人이라 하얏는데 姿色美麗하고 詩文歌謠에 능하야 당시 文章巨公이 모도 一頭하얐다. 그러나 불행히 無子早死하고 하얐으니 그의 寧越途中詩千里長程三日越 哀歌唱斷魯陵雲 妾身亦是王孫女 此地鵑聲不忍聞가 극히 凄悽絶悲哀하야 讀者로하야금 13를 할만하고 그의 남편 雲江情疏見黜한 후 지여보낸 근래 安否問 如何 月到紗窓妾恨多 若便夢魂行有跡 門前石路己成沙<25> 云云綿綿情恨曲畵抽寫情恨詩世人膾煮하야 지금까지 巷間俗謠에 오르나린다. 其外 別恨五絶明宵雖短短 今夜願長長 鷄聲聽欲曉雙臉淚千行離怨五絶深情容易寄 欲說更含羞 若問香閨信 殘粧獨倚樓秋恨詩蓬紗遙隔夜燈紅 夢覺羅衾一半空 霜冷玉籠鸚鵡語滿階梧葉落西風 等擧皆 相當名作이다.

宋泉谷 象鉉妾 金蟾=壬辰 常時 東萊府使節死泉谷 宋象鉉妾 金蟾元咸興妓엿다. 몸이 비록 賤妓詩文에 능하고 節操가 있어서 府使를 따러 東萊에 있었는데 화려한 생활을 실여하고 數間茅屋居處하며 평소에 足跡公堂지 안타가 壬亂時 宋公節死하매 그 亦隨死殉節하얏다 한다. (이것은 당시 일반 기록이다) 그러나 당시 俘虜로 잡혀갓다. 歸國姜睡隱澶日記에 의하면 金蟾泉谷節死한 것을 알지 못하고 敵國에까지 잡혀갓섰는데 豊臣秀吉宋府使美人이란 말을 듯고 招見하얐으나 원래 幽靜澶澶威儀가 잇는 외에 文翰이 또한 능달하니 秀吉敢犯치 못하고 優待하야 女敎員으로 삼으니 당시 幕府官閥의 여자들이 모도 就學하야 그때까지 蒙眛靡하던 閨風이 일변하고 解俘歸國하다가 船中에서 泉谷節死함은 하고 投水自殺하랴다가 여러사람이 制止하고 同船姜睡隱이 또한 擧義勸止하니 그는 詩一篇을 지여 자기몸의 介潔한 것을 뵈히고 宋氏家에 와서는 자기의 身上 介潔한 것은 말도 하지 안엇다 한다.

大樹飄零日, 殘花受狂風, 狂風結自息, 花落埋泥中, 誰識泥中花, 不爲蝴蝶嬲(音丘)縱然歸根蔕, 徒爲衆香笑.

楊士奇 妾 그는 失名한 것이 遺憾이나 著名하얐으니 그 夫君安岳에 있을 때에 寄送悵望長途不掩扉 夜深風露濕蘿衣 楊山舘裏花千樹 日日看花歸來歸秋閨怨秋風槭槭動梧枝 碧落冥冥鴈去遲 斜依玉窓人不見 一眉新月下西池辭意가 극히 淸新佳作이다. 此外金高城盛達妾 丁舜憘 金農嚴은 모도 詩文才華一世하엿고 근대에 있어서는 徐箕輔妾 朴竹西 金侍郞 德熙妾 錦園金佐根妾 羅閤, 李裕寅妾 等詩才機智가 또한 유명하엿다.(名妾列傳後機會祥記할 심치고 이만 한다)

6. 尾言

 

踈漏하나마 이러케 畜妾史를 쓰고보니 혹은 세상사람들이 잘못 오해하고 맛치 영웅이 好酒色을 한다닛가 酒色만 조와하면 영웅이 되는 줄로 알고 먼저 酒色부터 하는 것과 맛찬가지로 畜妾도 상당한 역사가 잇고 歷代帝王君主와 소위 大聖人孔子 父子大儒學者 花潭 栗谷 南冥 等이 모도 이 있으니 보통의 우리들도 당연이 을 둘 것이라하야 畜妾獎勵하는 惡影響을 줄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盜跖傳을 짓는다고 世人이 모도 盜跖이 되고 名妓列傳<26> 썻다고 貞女淑姬가 모도 花柳巷으로 墮落할 것은 안이다. 이것을 읽고 일반이 警醒한다면 그엇지 무익하다 하랴 었지하엿던 畜妾東洋惡風 또는 朝鮮最大惡風이다. 개인의 가정도 그로하야 破滅하고 사회국가도 그로하야 衰亡하얏다. 麗朝忠烈 巷愍王 禑, 諸王도 여러가지의 失德이 만치만은 大部分女妾으로 失德하야 被殺失君亡國諸禍를 입고 李朝에도 妾制公認한 후 君臣上下風氣毁敗하야 비록 世宗盛代에도 王子王族朝官이 공연하게 妓妾爭奪하고 (禮判金何宗室宰相妓妾鹿鳴相爭하다가 御命으로 을 차지케 하엿다) 成宗時에는 成宗妓妾愛好結果 朝臣妓妾爭奪戰盛行할 뿐 안이라. 成宗자신도 美貌宗室 李宣傳某羣妓에게 사랑밧는 것을 보고 妬嫉하야 終身토록 官路치 못하게 하고 後日 燕山君荒淫하얐으니 燕山이 한참 荒淫할 때에 伽倻琴姿色雙絶生員 黃允獻하고도 言笑不喜하는 탓으로 舊夫한다하야 允獻을 죽인 것과 星州妓祭肉猪頭를 보고 張順孫頭骨과 가튼 것을 생각하야 웃다가 張順孫까지 죽일 번하게 된 것과 成世貞(聽松叔父)商山妓를 뺏고도 成氏妬忌하야 流謫식힌 것가튼 것은 成宗李宣傳坎墩식히던 것을 그대로 배운 것으로 그 죄가 燕山보다도 은 그것을 가르친 成宗이 더 큰 것이다. 그리고 黨禍에 있어서도 成廟喪時全羅監司 李克妓妓妾載行한 것을 金馹孫史草直書한 그것이 端緖가 되야 朝鮮 最初士禍戊午士禍를 이르킨 것이다. 그리고 으로 하야 발생한 嫡庶의 문제가 그 얼마나 사회국가에 多大害毒을 끼첫느냐 특히 근대에 있어서는 국법이 解弛하고 風氣大毁하야 소위 지방관리로 가는 자는 治民을 하려 가는 것이 안이라 求妾을 하려가는 이 있어서 名色平安道, 慶尙道, 가튼 色鄕地方官을 지낸 자이면 擧皆平壤妓, 寧邊妓, 大邱妓, 晋州妓을 두되 혹은 2,3, 심하면 8仙女, 더 심하면 私設遊廓을 두다 십히하야 多妾생활을 하게 되였으니 그 돈이 대체 어듸서 낫섯스랴. 無辜한 백성의 膏血을 뽑지 안으면 國財盜賊질하는 것외예는 他道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보니 국가가 엇지 잘 되며 백성이 엇지 安全한 생활을 할 수 있으랴. 西道사람들은 흔이 말하기를 서울兩班놈이 西道사람의 재물을 다 빼섯다고 하지만은 그 소위 兩班놈들의 재산은 모도가 西道妓生妾에게 消費하게 되여 결국 西道재산은 西道妓生이 도로 차지하고 兩班은 송아지모양으로 일종의 反芻作用을 한데 不過한 것이다. 보라 지금까지도 소위 貴族富豪閔家李家 金家 들 가정에 平壤妓生足跡이 드러가 백히지 안는 집이 어듸잇는가를 그것을 制止하랴면 나는 무엇보다도 이미 畜妾한 자는 高率畜妾稅實施하는 동시 未來畜妾을 하는 자는 重婚處罰과 가튼 무슨 법적 制裁가 잇는 것이 필요할 줄로 안다. <27>

<2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