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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민족문화작가회의, 민족미술인협회 등
10개단체 소속 예술인 100여 명이 2003년 3월25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미국의 이라크 전쟁중지와 한국군 파병 반대」 요구
집회를 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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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이라크 공격 이후 全세계가
反戰平和(반전평화)운동으로 떠들썩하다. 국내에서도 지난 3월 미국의 이라크 공격 직전에 反戰平和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바 있다. 최근 미국이
이라크에 전투병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해 온 이후에는 전투병 파병에 반대하는 反戰平和운동이 소란스럽게 전개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反戰平和운동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다수인 것 같다. 누구나 전쟁을 싫어하고 平和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反戰平和운동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전쟁 반대」와 「平和」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평화운동이 현실적으로 의미 있는 정치적 운동이 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각국의 사회주의 세력이 反戰平和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면서부터이다. 1907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개최된 제2인터내셔널 7차 대회에서 각국의 사회주의 단체 대표들은 자본주의 경제질서 때문에
일어나는 자본가계급을 위한 전쟁에서 노동자들이 병사로 동원되고 물질적 희생의 대부분을 부담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이유로 일체의 전쟁준비와
전쟁수행에 반대할 것을 결의했다. 1912년 프랑스사회당은 『노동자계급은 전쟁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총파업과 반란도 불사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이 무렵부터 사회주의자들은 국제적인 맥락에서 「平和애호세력」이라고 자칭하기 시작했다(국내적인 맥락에서 자기들을
「진보세력」이라고 자칭하는 것과 동일한 전술적 고려下에서). 그러나 막상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 각국의 사회주의자 및 노동자들 대부분은
애국적 열정에 휩싸여 參戰(참전)하거나 전쟁수행에 협조했다. 반면에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戰場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미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적극적으로 平和운동을 전개했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조합, 농민운동단체, 평화주의자 및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여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미국인민평의회」라는 통일전선 단체를 결성했다. 이 과정에서 종교적 동기에서 평화운동에 참여했던 젊은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가 됐다. 미국의 평화운동은 도시 주변의 이민자들 사회, 특히 東歐(동구)에서 온 이민자들이나 유태인 및 노동자와
농민들로부터 상당히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루시타니아號 격침 사건으로 미국內에서 參戰여론이 고조되자 윌슨은 입장을 바꾸어
1917년 參戰을 결정했다. 사회당은 여론동향의 변화나 정부의 결정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反戰平和운동을 전개했다. 상당수 지식인들과 노조
지도자들은 이러한 사회당의 反戰平和 노선을 反애국적인 것으로 비판하면서 사회당에서 이탈했다. 소련 정책에 따라 춤을 춘 美 공산당의
평화운동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동조했던 자신들의 태도를
반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가 된 러시아를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인 평화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대
후반~1920년대 초반에는 자본주의 列强들의 對蘇 무력 간섭의 중단을 요구하는 평화운동이 전개됐다. 1920~1930년대
유럽에서는 小國들을 중심으로 평화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小國들이 강대국들 간의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小國들이 평화를 위해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것이 평화운동자들의 주장이었다. 이 당시 평화운동이 성과를 거두었던 나라들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동시에 독일에 쉽게
정복당했다. 대표적인 나라가 네덜란드이다. 이러한 평화운동의 영향으로 인해 네덜란드 정부는 1930년대에 나치독일의
히틀러가 軍備(군비)를 강화할 때에도 군사력 강화를 추진할 수 없었다. 1940년 독일이 침공해 왔을 때 네덜란드軍은 힘없이 무너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네덜란드가 빈약한 무기로 무장한 인도네시아 독립군에게 패배해 식민지 인도네시아에서 쫓겨난 것도 군사력 부족 때문이었다.
1930년대 후반 세계대전의 위기가 고조되면서 미국의 대학가에서는 사회주의 및 親사회주의 성향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反戰운동이
전개됐다. 공산당 주도下에 「전쟁과 파시즘을 반대하는 미국인 연맹」이라는 통일전선 단체가 결성되어 평화운동을 이끌었다. 미국의 평화운동세력은
스페인 내란이 발발하자 스페인 左翼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국제의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의 작품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는 이 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공산당의 평화운동은 소련의 정책에 따라 춤을 췄다. 소련이 독일과 不可侵(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면 평화운동을 강화하고, 소련과 독일이 전쟁을
하게 되면 연합군의 對獨戰(대독전) 강화를 선동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미국의 평화운동세력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의 뉴딜정책과
對蘇협력정책을 지원했다. 左傾(좌경) 정치인 헨리 월러스가 부통령으로 있으면서 루스벨트 정부와 평화운동세력의 관계를 원만히 조정했다.
뉴 레프트 운동의 苗板이 된 1950년대
反戰운동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한동안 유럽의 평화운동은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유럽 각국의
대중들이 「평화운동이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소련 영향권으로 편입된 東歐 각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非민주적 상황들도
평화운동이 西歐에서 외면당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프랑스에서 일부 공산당원들과 프랑스 거주 베트남人 공산주의자 및 좌경민족주의자들이 전개한
소규모 反戰운동(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식민통치권을 회복하기 위해 프랑스가 호치민의 베트민 정부를 공격한 것을 반대하는 운동)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西歐에서 전개된 거의 유일한 평화운동이었다. 미국에서는 戰後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對蘇(대소) 강경정책을
취하면서부터 평화운동세력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트루먼 정부의 冷戰(냉전) 대결주의 노선이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있다고 선전하는 공산당
주도의 평화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쟁에 신물을 느끼게 된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평화운동가들은 한국전쟁 개입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은 벌였다. 이에 영향 받은 대중들은 미국 정부에 대해 휴전을 서두르도록 압력을 가했다.
1950년대에 들어와서 세계 각지에서 전개되고 있는 공산주의 세력의 공세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의 右翼(우익)세력은
左翼(좌익)세력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이것이 바로 미국 官街를 비롯한 각계각층에서 격렬한 「빨갱이 사냥」을 야기시킨 매카시 선풍이다.
매카시즘 선풍에 밀려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이 위축되자 無정부주의 성향의 평화주의자들이 미국의 평화운동을 주도했다. 그들은
평화방송(Pacifica Radio)을 통해 無정부주의적 평화사상을 선전하고, 특히 샌프란시스코와 시애틀 등 태평양 연안 지역에서 「해방」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등 출판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그 지역의 지식인과 대학생들을 자기들의 캠프로 끌어들였다. 이들의 문화적 표현이 「비트
제너레이션」의 反사회적 문화활동이다. 그들은 젊은 세대에게 反戰·反기성의 사고방식과 보헤미안적 생활을 유행시켰으며, 이것이 몇 년 뒤에 등장하는
뉴 레프트(New Left) 운동과 反文化운동의 苗板(묘판)이 됐다. 그들은 또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버트란드 러셀을
끌어들여 1955년 反核平和공동성명을 발표하게 했다. 그들의 성명은 全세계의 과학자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평화연구가 유행하게 됐고, 지식인들의 反核운동단체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정상적인 核정책을 위한 전국위원회(SANE)」는 그 시기에 조직된
대표적인 지식인 反核운동단체다. 매카시 선풍에 기가 꺾여 있던 左翼세력들은 평화운동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後衛(후위)에서 無정부주의자들의 선도를
지원했다. 지식인들의 평화운동에 고무되어 미국 대학가에서도 사회주의 학생들과 無정부주의 학생들의 주도下에 평화운동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1959년에는 청년사회주의자연맹 회원들의 주도下에 「대학생평화연합」이 결성됐다. 그들은 미국의 對蘇 냉전정책을 비난하면서
시위·집회·서명운동 등을 전개했다. 훗날의 뉴 레프트 운동의 스타들 대부분이 이때 「대학생평화연합」에서 그들의 운동경력을 쌓았다. 이들은
1950년대 말부터 기성문화에 대항하는 상징으로 포크 뮤직을 이용했다. 밥 딜런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평화운동에 참여하는 대학생들의 신분증과
같았다. 이 시기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의 反核平和운동은 소련의 核무기 개발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하지 못하고, 미국의
核무기 개발만 문제 삼았다. 1963년 미국과 소련이 대기권에서의 核실험을 금지하는 核실험금지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미국의 反核平和운동은 일단
시들해졌다. 좌익세력들, 反戰운동 통해 부활 노려 평화운동을 통해 부흥을
모색하려는 미국 지식인 사회와 대학가의 사회주의 세력은 196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과 함께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1964년 과격파
평화주의자들과 노먼 토머스를 비롯한 舊사회당 간부들은 미국의 베트남戰 파병을 저지하기 위한 反戰시위를 조직했다. 이에 대한
사회의 반향이 신통치 않자 反戰平和운동세력은 미국이 베트남戰에 참전할 경우 최대의 희생자가 될 청년들이 모여 있는 대학가로 눈을 돌렸다. 존슨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미국의 베트남戰 개입규모는 급속히 확대되었고, 이에 상응해 대학가의 反戰平和운동도 급속히 확대됐다. 1965년 봄
「민주사회를 위한 대학생모임(SDS)」의 주도下에 워싱턴 DC에서 2만 명의 군중이 참여한 대규모 평화집회가 열렸다. 이는 당시로서는 워싱턴
DC 역사상 최대규모의 평화운동집회였다. 反戰平和운동세력은 그 후 이 최대기록을 계속 갱신해 나갔다. 같은 시기에 샌프란시스코의 버클리大에서는
1만 명이 참가한 反戰집회가 열렸다. 기록적인 군중동원에 고무된 평화운동세력들은 쉴 새 없이 反戰 집회·시위를 개최하면서,
처음에는 北베트남과의 평화협상 개최를, 평화협상이 개최된 후에는 미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그들은 대중적 호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베트남戰에서 돌아온 제대군인이나 미국 主流사회의 인사들, 그리고 인기 연예인들을 운동에 끌어들였다. 또 흑인민권운동세력 및
女權운동세력과도 연대하여 反戰平和운동의 外延(외연)을 확대했다. FBI와 CIA는 이러한 反戰平和운동이 국제공산주의운동과
연결되어 있다는 판단 아래 反戰平和운동 內에 침투한 국제공산주의운동 연계세력을 색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베트남 공산화와 소련·東歐
붕괴를 거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지난날 미국과 西歐에서 反戰平和운동을 고취하기 위해 다양한 공작을 전개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당시에는
FBI, CIA의 그런 노력은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됐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평화운동세력은 평화적
투쟁방법만으로는 미국 사회와 정부에 대해 제대로 압력을 가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대학가를 중심으로 폭력투쟁을 강화했다. 대학가에서는 폭력시위
대학생들과 진압 경찰 간의 유혈충돌사태가 빈발했다. 대표적인 1970년의 켄트대학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사회에서는 국내의 갈등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베트남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됐다. 같은 시기
西歐에서도 反戰平和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됐다. 공산주의 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주축으로 한 西歐의 反戰운동은 미국의 反戰운동을 고무했을 뿐
아니라, 미국 정부로 하여금 국제적 고립감을 느끼게 만들었고, 국내 反戰운동과 대치하는 데 지쳐 있는 미국 정부를 심리적으로 더욱 피곤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反戰운동은 「제4전선」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의
反戰운동을 「제4전선」으로 불렀다. 南北 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의 反戰운동을 고조시키기 위해 각종 정치·언론 공작을 전개했다. 정치적으로는
사이공의 反共정권이 평화를 원하는 민중을 탄압하는 부패독재 정권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언론부문에서는 南베트남에 파견된
서방 언론매체 특파원의 현지보조자(Stringer)로 해방전선(베트콩) 혹은 평화운동세력에 연루된 자들을 적극적으로 취업시켰다. 이 현지
보조자들은 현지사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는 서방 기자들에게 사이공 정부의 독재·부패상과 反민중성을 브리핑하고, 美軍병사들이 만행을 자행한 현장 등
미국의 전쟁 개입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 주는 곳으로 기자들을 안내했다. 서방 기자들, 특히 미국 기자들은 결국 현지
보조자들이 유도하는 대로 보도하게 됐고, 그 보도는 미국 시민들로 하여금 사이공 정권에 대한 비판적 시각, 미국의 개입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
厭戰(염전)의식 등을 갖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미국과 西歐의 평화운동세력은 그런 보도내용을 자기들의 평화운동 자료로 이용해 미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敵으로부터 선전수단을 박탈하라」는 모토 아래 이런 언론공작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미국과
西歐에서 평화운동이 미국의 베트남전쟁 수행을 방해하고 하고 있는 동안, 南베트남에서도 사이공 정권의 전쟁 수행을 방해하는 平和운동이 전개됐다.
南베트남에서의 평화운동은 미국이 베트남戰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직전인 1964년 사이공에서 「베트남민족자결운동」이라는
단체가 결성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 단체의 의장은 사이공의 저명한 변호사 구엔 롱, 부의장은 군사 쿠데타로 축출된 고 딘 디엠 정권에서 교통부
고위 관리를 역임한 바 있는 호 기아 리였다. 그 외에도 私기업 소유주, 국영기업체 사장 등이 주요간부에 포함되었다. 이
단체는 미국의 베트남 파병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은 미국인에게, 베트남은 베트남인에게」라는 표어를 내걸고, 南베트남 사태를 외세의 개입 없이
베트남 민족끼리 자주적·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美軍 파병에 반대하면서 사이공 정부와 해방전선은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민족자주정신과 형제애에 입각해 협상하라고 촉구했다. 보수적 명망가들을 앞장세운 베트남의 평화운동 「베트남민족자결운동」은
平和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南베트남 기득권층 인사들을 더욱 광범하게 끌어들여 1965년 「평화수호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의
간부진은 「베트남민족자결운동」의 간부들보다 더 저명하고 더 보수적인 인사들로 구성됐다. 의장 팜 반 후엔은 北베트남 출신으로서 공산 통치를 피해
南으로 내려와, 디엠 정권에서 난민대책위원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의 딸 고 바 탄도 이 단체의 간부였다. 탄은 파리 대학을 거쳐 美 컬럼비아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 디엠 대통령의 수석 법률고문을 역임한 엘리트였다. 베트남의 舊귀족 가문의 후손으로서 사이공
지식인 사회에 고상한 인품의 소유자로 널리 알려져 있던 사이공大 역사학 교수 톤 타트 두옹 키, 카오 민 치엠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예술가인 당 반 키 등도 참여했다. 당시 저명한 여류詩人 구엔 곡 수옹과 그의 남편도 이 단체에 참여했다. 출신배경과 경력으로 볼
때 그들 중의 누구도 공산세력과 연결된 사람이라는 의혹을 살 만한 사람은 없었다. 평화수호위원회는 사이공 정부에 대해
해방전선과의 평화협상을 개시하라고 청원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의 호소는 오랜 기간 전쟁과 내전에 염증을 느껴온 南베트남 지식인 및
대중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들은 전국을 유세하면서 대중의 서명을 받은 청원서를 사이공 정부와 해방전선에 전달하려 했다.
해방전선은 그들의 청원서를 반갑게 접수했지만, 사이공 정부는 그들의 활동을 해방전선 게릴라들의 투쟁을 지원하고 정부의 게릴라소탕작전을
방해하는 활동으로 규정했다. 사이공 정부는 청원서 접수를 거부하고, 그 간부들을 체포했으며 주요 간부 세 명을 北베트남으로 추방했다.
평화수호위원회의 간부들이 추방되거나 투옥됨에 따라 南베트남에서의 平和운동은 잠시 소강상태에 처하게 됐다. 투옥됐다가 석방된 이 단체의
간부들은 1968년 「민족민주평화세력연맹」을 결성했다. 사이공 정부의 탄압을 피해 베트콩 해방區에서 결성된 이 단체에는
베트남민족자결운동, 평화수호위원회에 참여했던 인사들 외에 새로운 인물들이 참여했다. 한 때 군사정권이 조직한 민간인 평의회 의원을 역임한 바
있는 람 반 테트, 南베트남의 권위 있는 프랑스어 학자 탄 기, 사이공의 부유한 실업가 팜 곡 훙, 민주화 운동가 출신의 대학교수 구엔 반
키에트, 불교계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트릭 돈 하우 등이 그들이다. 이 단체의 의장에는 사이공에서 인간성 좋은 元老로 평판이 나 있던 70代
고령의 감상적인 민족주의자 트린 딘 타오가 선임됐다. 민족민주평화세력연맹의 간부들 가운데 다수는 西歐에서 교육받은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성향의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은 사이공의 부패 독재정권에 대해서 반대하고, 전쟁으로 인한 베트남인들의 피해에 분개하면서도,
北베트남 노동당이나 南베트남 해방전선에 대해서는 상당한 거리감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北베트남의 공산주의에도 반대하고, 사이공의
親美反共정권에도 반대하는 모든 민족·민주·平和세력을 결집시킨 南베트남의 제3세력임을 자처했다. 민족민주평화세력연맹은
창립선언문에서 베트남 영토內에서 진행되는 모든 군사적 적대행위를 중지할 것과 北베트남과 南베트남은 兩 지역의 특수성을 존중하며 평화적·점진적으로
통일을 추진해야 하며, 그를 위해 평화협상을 개최해야 한다고 촉구, 자기들이 중도노선을 지향하고 있음을 과시했다. 전쟁과 사이공 정권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北베트남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해방전선에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南베트남의 많은 지식인들이 겉모습만 보고 이 단체에 동조했다.
탁 닛 한 등 평화운동 통해 베트남 赤化에 기여 민족민주평화세력연맹은 1969년
해방전선과 연합해 南베트남임시혁명정부를 구성했다. 이로 인해 정치적 평화운동세력들이 사이공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자 이번에는 정치적 색깔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종교계 인사들이 평화운동의 배턴을 넘겨받았다. 1960년대 말부터 평화와 중립, 反독재·反부패를 주장하면서
南베트남에서의 평화운동에 앞장섰던 종교계 인사들로는 안쾅 寺院(사원)의 승려 트릭 트리 쾅과 그의 추종자들인 트릭 티엔 호아, 트릭 트리,
가톨릭의 트란 우 탄 신부, 호앙 퀸 신부 등이 있다. 이들의 지도下에 많은 승려들이 평화를 요구하며 가두에서
焚身(분신)자살했다. 불교도와 가톨릭 교도, 학생들이 사이공 정권이 와해될 때까지 격렬한 反정부시위를 벌였다. 「화」등의 저서로 최근 우리
사회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승려 탁 닛 한도 당시 종교계의 평화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탁 닛 한은 南베트남에서
평화운동을 벌여 동포들을 공산치하로 몰아넣고, 자신은 이국인 프랑스 땅에서 편안하게 마음의 평화를 찾는 염불을 하고 있는 셈이다.
南베트남의 평화운동은 표면상으로 드러난 간부들이나 그들이 발표한 성명서만을 놓고 보면, 순수한 민족주의적 평화운동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南베트남이 공산화된 후 드러난 바에 의하면, 그러한 단체들은 모두 北베트남의 지령에 따라 南베트남해방전선 공작원들이 감상적 민족주의 인사
및 자유주의 인사와 평화지향세력들을 포섭해 조직한 것들로, 창립에서 운영까지 모두 해방전선공작원들에 의해 조종된 것이었다.
평화운동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인사들은 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자기들은 해방전선과 무관하며 오로지 「민족과 평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南베트남이 공산화된 후 再교육센터에 들어가서야 자기들이 해방전선 공작원 및 프락치들에 의해 철저히 조종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1965년 평화수호위원회의 열성회원이던 여류詩人 구엔 곡 수옹이 평화를 호소하며 사이공 정부의
정당성을 부정한 詩를 발표한 罪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장은 판결문에서 그녀의 詩를 옛날 중국의 楚漢전쟁 때 고향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애절한
곡조의 피리를 불어서 楚나라 병사들의 전투의지를 꺾었던 漢나라 軍의 책략(四面楚歌)과 동일한 효과를 가진 것으로 사이공 정부의 對共전쟁에 막대한
피해를 주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有罪를 선고했다. 이 재판장의 평가는 당시 南베트남 국내외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南베트남이 공산화된
現시점에서 보면 극히 정확한 평가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미국은 국내외의 反戰平和운동에 굴복, 北베트남과의 平和협상을
받아들였다. 당시 美軍은 駐越미군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 장군의 말처럼 北베트남 정규군과 南베트남 공산게릴라들을 궤멸 직전의 상황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시점에서 미국은 南베트남을 사실상 포기하는 내용의 平和협정을 北베트남과 체결했다.
그리고 1973년 美軍은 南베트남 전선에서 철수했다. 美軍이 철수하자 미국과 西歐의 평화운동은 목표달성을 自祝하는 休業을 했다. 美軍의
완전철수가 있은 지 약 1년 만에 南베트남은 공산화됐다. 南베트남의 공산화는 공산군의 군사적 성공에 힘입은 것이 아니라,
미국과 南베트남에서의 평화운동의 성공에 힘입은 것이었다. 北베트남 군부의 최고지도자 보 구엔 지압 장군도 『「제4전선」에서의 승리가 베트남
공산화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고 실토한 바 있다. 蘇의 중거리 미사일에는 침묵 1980년 西歐와 미국의 左翼세력들은
다시 反戰平和운동에 나섰다. 이번의 메뉴는 反核, 즉 유럽에 미국의 중거리 核미사일을 설치하는 계획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1979년 나토(NATO:북대서양조약 기구)는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에 미국의 「퍼싱Ⅱ」 미사일과 크루즈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은 미국과 소련의 核무기 경쟁에서 미국의 상대적 우위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서로 상대방을 직접 겨누는 장거리 미사일
戰力에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미국이 西歐의 나토 동맹국 영토內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할 경우, 소련으로서는 미국으로부터 날아올 장거리
미사일 외에 西歐에서 날아올 중거리 미사일에 대비해야 하는 부담을 안아야 했다. 소련은 미사일 戰力에서 열세에 처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 중거리 미사일의 西歐 배치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도록 선동했다. 소련은 미국 중거리 미사일이 西歐에 배치되면 그로 인해
西歐人들이 核무기의 밥이 되는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西歐 공산당들을 비롯한 左翼세력은 중거리
미사일배치를 저지하기 위한 평화운동을 전개했다. 소련은 이미 중거리 미사일로 西歐를 겨냥하고 있었지만, 西歐의 평화운동세력들은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평화운동이 西歐를 휩쓸었다. 미국에서도 西歐에 중거리 核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이 전개됐다. 1960~1970년대 反戰平和운동의 베테랑들과 그 후배들이 다시 뭉쳐서 核동결-軍縮(군축)을 촉구하는 평화운동을 전개했다.
1982년 6월 美 뉴욕의 맨해튼에서는 100만 명 이상의 시위를 별였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중시위였다. 그러나
이때의 평화운동은 성공하지 못했다.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국내외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럽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하는 방침을 고수했다.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도 미사일 배치 합의를 고수했다. 소련은 西歐에 배치된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해, 또 미국과의
군비경쟁에 뒤지지 않기 위해 많은 군사비를 추가로 지출해야 했다. 소련 경제는 그러한 군비경쟁을 뒷받침할 수 없었고, 머지않아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소련의 경제적 파탄은 東歐·소련의 공산주의체제 와해로 연결됐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初
소련·동구 공산체제의 붕괴는 反戰平和운동을 전개해 온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을 좌절에 빠지게 했다. 그들에게는 평화운동의 현실적 목적이 사라진
것이다. 장기간 休眠(휴면)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이던 反戰平和운동은 2002년 미국의 조지 W 부시 정부가 이라크를
압박하기 시작하면서 부활했다. 이라크 전쟁 계기로 反戰운동 부활 이번 평화운동은 中東과 유럽에서
먼저 시작됐다. 中東에서는 反美감정이 원동력이었다. 유럽에서는 反자본주의 사상과 反美감정이 뒤섞여 평화운동을 추진했다. 미국의 이라크 장악으로
미국 자본주의와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더욱 공고해지는 것을 저지해 보려는 세력들(그들은 체 게바라의 초상, 낫과 망치가 그려진 깃발, 붉은
깃발을 들고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과 미국의 이라크 장악으로 自國의 이익이 손상되는 것을 우려한 일부 유럽 국가의 反美 세력들이 평화운동에
나섰다. 유럽에서의 反부시 反戰平和운동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동조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지난날의 反戰平和운동
베테랑과 그 후배들이 다시 뭉쳐서 시위, 집회, 서명운동 등을 전개했다. 옛날과 마찬가지로 흥행효과를 높이기 위해 할리우드의 좌익 및 민주당系
배우들도 동원되었다. 민주당도 정치적 이유에서 이러한 평화운동에 동조하고 있다. 앞의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첫째, 평화운동은 민주국가 내지 半민주국가에서만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추상적으로 정의하자면,
「평화운동」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을 말한다. 그러나 20세기에 전개된 평화운동 사례들을 바탕으로 현실적으로 정의하자면, 「평화운동」은
「자기 나라의 전쟁준비, 전쟁개시(혹은 개입), 전쟁수행을 저지·방해하기 위해 자기 나라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정치적 시민운동」이다. 평화운동이
이처럼 자기 나라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일정수준 이상 보장된 국가, 즉 민주국가나 半민주국가에서만
평화운동이 전개될 수 있다. 둘째, 극소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의미 있는 규모의 평화운동의 중심에는 사회주의세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각국의 평화운동을 조직하고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無정부주의자 등 좌익세력과 좌경 자유주의자, 좌경
민족주의자 등 좌익 주변 세력이다. 이러한 사실은 평화운동을 조직·지도하는 사람들의 신원과 사상성향을 정확히 모르더라도,
평화운동이 사회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혁명단체를 지원하기 위해(적어도 자본주의 국가나 자본주의 지배적 세계질서를 약화시키기 위해) 전개된다는 점,
어떤 이유에서건 사회주의 세력의 사기가 저하되거나 사회주의 세력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게 되면 평화운동도 쇠퇴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셋째, 국내에서 평화운동이 성공한 나라는 망한다는 사실이다. 평화운동은 자기 나라의 전쟁준비를 저지하고 전쟁수행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나라에서든지 평화운동이 극성을 부리면 국가안보가 위태로워지고, 평화운동이 성공하면 (평화운동이 정부를 굴복시키면)
국가의 멸망이나 전쟁에서의 패배를 초래한다. 反戰平和운동을 평가하는 10가지 기준 평화는 좋은 것이나,
평화운동은 국가에 극히 해로운 것이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현명한 통치자(집단)는 자기 나라 안에서는 평화운동이 전개되지 못하도록 하고,
敵國에서는 평화운동이 확산되도록 공작했다. 평화운동이 이처럼 국가에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西方세계의 평화운동을
고취·찬양·지원해마지 않던 소련은 자기 나라 안에서는 그것을 엄금했다. 北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은 南베트남의 추종자들에게는 南베트남에서 平和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도록 하면서도, 北베트남에서는 그것이 얼씬도 못 하게 했다. 오늘날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남한의 추종자들에게는 反戰平和운동을
전개하도록 지령하면서 북한에서는 反戰平和운동을 엄금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평화운동을 금지시킬 수 없는 政體이기
때문에 국가안전을 공고히 하는 데는 취약하다. 그런 취약점을 보완하려면 평화운동에 대한 국민의 지혜로운 대응이 필요하다.
오늘날 국내에서 전개되고 있는 反戰平和운동은 앞에서 밝힌 反戰平和운동들과 軌(궤)를 같이하는 것인가? 다시 말해서 지난날 南베트남에서 전개되었던
反戰平和운동과 같은 성격의 것인가, 아닌가? 그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넘기고, 독자들이 판단을 내리는 데 참고할
기준만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기준은 「운동을 조직하고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는 사람들(표면에 간판으로 내세워진 사람들이
아닌)이 어떤 사람들인가」이다. 그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이 아래에 열거한 10개 항목 중 3분의 2 이상과 일치하면 그들의 평화운동은 지난날
南베트남이나 歐美에서 전개되었던 평화운동과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다. ①남한에 미국의 核무기가 배치되는
것은 반대하면서 북한의 核무장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용인하는 태도를 취한다. ②아무리 문제점이 드러나도 북한에 대한 대폭적 지원을 주장한다.
③남한의 자유시장경제질서를 비판하면서 세상을 확 바꾸자고 주장한다. ④혁명적 노동운동을 추진한다. ⑤자유민주주의를 절차적 민주주의라고 비하하면서
다른 유형의 민주주의를 추구한다. ⑥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부정한다. ⑦북한정권의 전쟁준비 노력이나 인권탄압을 일관되게 변명해 준다. ⑧內外의
敵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안전을 지키는 제도와 노력에 반대한다. ⑨韓美동맹관계를 弱化시키는 조치를 유도한다. ⑩駐韓美軍을 비판하고 미군철수를
요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