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金東仁의 春園硏究

이강기 2015. 10. 1. 17:59
잡지명 삼천리 제6권 제7호
호수 제6권 제7호
발행년월일 1934-06-01
기사제목 春園硏究
필자 金東仁
기사형태 문예평론

緖言

우리는 過去에 잇서서 자랑할 만한 國家를 歷史的으로 가저 보지 못하엿다.
三國鼎立의 이전 시대는 정확한 긔록이 업스니 자세히 알 길이 업스나 三國時代부터 벌서 우리의 祖先의 비참한 력사는 시작되엿다. 北으로는 唐이며, 오랑캐들의 끈힘업는 침노와 南으로는 X의 건드림을 바드면서 안으로는 三國 서로 끼리끼리의 싸홈의 계속-한 때도 편안히 벼개를 노피하고 잠을 자본 일이 업섯다.
오늘날 서로 뭉처저서 2천 萬이라는 數를 이룬 朝鮮民族이라는 것은 三國時代에 잇서서는 5,6개의 나누어진 敵國이엇다. 正確한 記錄은 업스나 口傳에 의지한 記錄으로 상고하건대 三國分立과 三韓의 以前에는 한 뭉치에 뭉처진 民族이엇다. 그것이 어떤 經路를 밟엇는지 여러 國家로 分立되면서 어제까지는 형아 아우야 하든 同族끼리 서로 다투고 싸우고 그 싸홈의 勝利를 엇기 위하여서는 異族인 外國의 勢力까지도 빌기를 결코 주저하지 안헛다.

新羅의 三國統一

新羅가 三國을 統一한 뒤며, 그 뒤를 그대로 아슨 高麗朝를 지나서 李朝의 消滅을 보기까지 한 때도 外國을 굽어보거나 넘겨본 歷史가 업시 戰戰兢兢이 지낫다. 元을 숭보면서도 머리를 수기고 절한 高麗朝며 X를 업수히 녀기면서도 X軍에게<215> 全國을 짓밟히며 胡를 더렵게 보면서도 그 正朔을 밧들지 안치 못한 李氏에까지-過去의 우리의 歷史는 그들의 後孫인 今日의 우리들로 하여금 憤만을 이르키게 하는 것이엇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祖先에게 尊敬과 愛慕의 念을 禁치 못하게 하는 것이 잇스니, 그것은 卽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祖先의 훌륭한 藝術遺産이엇다.

藝術遺産

만약 이 藝術遺産만 업섯드면 우리는 이 우리의 貧弱햇든 祖先의 무덤에 침을 뱃기를 주저하지 안햇슬 것이다.
國家의 起伏이 자심햇스며, 그런 때마다 前 國家의 國民으로 하여금 祖國을 回想하는 길을 막는 手段으로서 前代의 遺産을 모도 업시해버렷스매, 藝術遺産이라야 ?富하지는 못하다. 深山에 잇는 寺院, 그 寺院에 殘存한 若干, 혹은 陵墓에 감초인 故人의 所持品, 또는 地中에 埋沒된 것 약간-이런 것이 우리가 藝術遺産으로서 우리의 祖先에게서 물려 바든 것이다.
量으로는 薄弱키 짝이 업는 것이다. 몃 번의 國體의 變動에 或은 파괴되고 혹은 燒失되고, 또는 流失, 被盜 온갓 파란을 격그면서도 그냥 殘存하여 잇는 數個의 藝術-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커다란 ?持로서 異民族에게 우리의 조상을 자랑할만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量의 多少를 말함이 아니라, 그 質로서 우리의 조상은 그 當時의 다른 어떤 民族보다도 빼난 文化生活을 하엿다는 증거가 넉넉히 되므로...
彫刻에 잇서서, 繪畵에 잇서서, 또는 工藝에 잇서서 우리 조상은 가장 노픈 文化生活을 경영하엿다.<216>

이러한 最高水準의 文化生活을 경영한 우리의 조상이 後世에 남길만한 文學藝術은 웨 創造하지 못햇나?
創造치 못햇슬 것이 아니다. 創造는 하엿지만, 後人이 일허 버렷다고 박게는 생각할 수가 업다. 支那의 文字가 輸入되고 또 吏讀가 發明된 이상에는, 文學을 創造치 못하엿슬 까닭이 업다. 人生感情의 高等表現方式인 美術과 音樂을 가젓든 民族이, 비교적 단순한 表現方式인 文學을 못가젓슬 까닭이 업다.
高麗朝에 와서 著作된
金富軾의 三國史記와 一然의 三國遺史를 보면 거기는 歷史的 事實보다 傳統的 事實이라고 認定할 수박게 업는 이야기가 만히 잇다. 바보 溫達의 이야기라든가 官昌의 이야기라든가 百結先生의 이야기라든가 이박게도 이와 近似한 자미잇는 이야기들은 實在한 史談이라기 보다 三國時代의 小說이 아닐가 추측된다. 三國時代의 小說이 전하고 전해서 高麗朝에 와서는 史上에 實在化하여 울리지 안헛나, 이러케 추측되는 점이 만타.

暗澹한 高麗朝

朝鮮民族의 藝術史上에 잇서서 가장 暗黑한 時代가 高麗朝엇다.
지금 市場의 商品으로 化해서 비싼 갑에 매매되는 高麗滋器가 高麗朝 藝術을 자랑하는 唯一의 증거품으로 남어 잇슬 뿐이다. 그 박게는 어떤 藝術을 가젓섯는지 想像도 허락하지 안는 배다.
李太祖가 李氏朝鮮을 建國한 뒤에 가장 苦心한 것은 高麗 愛國者 박멸이엇다. 그 手段으로서 高麗」를 想起할만한 物件은 모도 破壞하고 燒棄하엿다. 高麗朝의 文化의 긔념품은 李氏의 손으로 모도 부서 버렷다. 善竹橋가 남어 잇는 것이 웬 까닭인지 의심될 만치 「高麗내음새」를 이 세상에서 消滅시켜 버렷다. 今日의 소위 고려 그릇은 모도 李氏朝鮮 建國 以前에 흙 가운데 무첫든 물건이지 地面 上에 잇는 高麗物件은 李氏의 손에 殘滅되엿다.<217>
高麗의 美術, 文學 等도 이때에 이 秦始皇아닌 朝鮮始皇의 손에 흔적 업시 사라저 버렷슬 것이다.
이리하여 高麗朝는 朝鮮 藝術史 上에 「暗黑時代」라는 넉자를 적어 노코 지나갓다.

李氏朝鮮

李氏 朝鮮朝.
「龍飛御天歌」는 李氏朝鮮을 찬송하기를 强制하는 한낫 政?的 時調에 지나지 못하다 하나, 政?은 政?으로 미루어 두고, 그 뒤에 숨은 藝術的 價値는 拒否할 수 업는 배다.
그러나 암담키 짝이 업는 李氏朝鮮이엇다. 李氏朝의 文獻이며, 製作品 等은 (兵火 몃 번에 多少間의 遺失은 잇다 하여도) 비교적 만히 남어 잇다. 그러나 500年間에 겨우 이것이엇든가. 500年이라는 세월은 짤지 안흔 셰월이다. 그 동안에 겨우 이것이엇든가.
金時習의 著作 數篇, 許筠의 著作 數篇, 金萬重의 著作 數篇, 朴趾源의 著作 數篇, 그 박 몃 가지-이것이, 李朝朝鮮文學의 全部이엇다.
其他 藝術에도 特筆할만한 것을 몃 개 남기지 못하엿다.
그 박게는 平民 압박하기와 양반 끼리끼리의 싸홈과 朱子學의 末端硏究로 500年間을 無爲히 보냇다.

그러나 三國時代부터 벌서 文章藝術의 도취경을 맛본 이 民族은 이러한 貧弱한 文學뿐으로는 만족을 할 수가 업섯다.
正本이며 그 作者까지도 알 수 업는 만코 만흔 平民文學이, 愛讀되고 愛聽된 크나큰 事實을 우리는 이저서는 안 된다.<218>
임진록, 춘향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금송아지전, 흥부놀부전, 토끼전, 숙영낭자전 그 박 헤일 수 업스리 만치 만코 만흔 文學作品이 귀로, 눈으로, 이 民族의 새를 께어 다녓다.
文學을 사랑하고 文學에 대한 欲求心은 가지고 잇스나, 政治적 결함 때문에 文學의 指導者를 못가지고, 文學의 提供을 밧지 못한 이 民族의 새에는 正本도 알 수 업고 作者의 氏名도 알 수 업는 平民文學이 흘너 다녓다.
가장 배우기 쉬운 文字을 가지고, 그 우에 活版術까지 아는 이 民族이 그들의 愛讀하는 春香傳이며, 興夫傳의 原本에 의지한 寫本이나, 活版本을 가지지 못하고 그 原作者의 氏名까지 일허 버렷다 하는 것은 얼마나 참담한 일이냐?

이러구러 李氏朝도 그 終末이 가까웟다. 世態가 차차 복잡하여 가면서 外事多端 外國(西洋)文化의 輸入 等, 차차 어즈러워 가서 民間 事에 일일히 양반들이 간섭키가 힘들어 갓다. 아직 것 人生의 末技로서 수모 밧든 藝術도 차차 그 날개를 자유로히 퍼도 간섭할 사람이 업서젓다.

國初 李仁植

한 개의 慧星이 나타낫다. 菊初李仁植이엇다.
과연 慧星이엇다. 황냥한 朝鮮의 벌판에 文學이라는 씨를 뿌리고저 나타난 菊初는 「鬼의 聲」 「치악산」 「血淚」 等 몃 개의 씨를 뿌려 노코는 夭逝하엿다. 慧星과 가치 나타낫다가 慧星과 가치 사라젓다.
山間에 피엿든 한 개 名花, 그러나 樵夫들은 이 名花을 알지 못하엿다. 남이 알지 못하는 새에 피엿다가, 아지 못하는 새에 저버렷다.

春園
李光洙

그 뒤를 마터 가지고 이러선 사람이 春園
李光洙다.
初年의 號는
孤舟- 외배 그 뒤에 春園 長白山人 等, 여러 가지의 이름을 가진 李光洙.<219>

春園
李光洙

定州出生

春園은 1892年 春2月에 平北 定州邑에서 남쪽으로 한 40里 들어가서 잇는 山村의 全州 李門의 長孫으로 태여낫다.
집안은 시골서는 내로라고 뽑내는 집안이오.
春園의 出生當時에는 家産도 넉넉하엿스나, 그가 세상에 나온 지 4,5年 뒤에는 차차 家運이 기우러저서 큰집에서 작은집으로 작은집에서 오막사리로 것잡으새 업시 零落되기 때문에, 地主에서 自作農으로, 自作農에서 小作農으로-이리하여 8.9歲 때에는 벌서 어린 몸으로 山에 올나가서, 나누를 하고 소를 끄을고 밧헤 나 다니는 苦役을 맛보지 안흘 수가 업게 되엿다.
朝鮮農村에서 사난 가난한 집 소년이, 맛보는 온갓 고생을 그는 다 맛보앗다. 그러나 하누님은 이 少年을 시험하심에 그맛 고생으로 끗을 막지 안흐섯다.
「-그것은 내가 (
春園자긔) 열한 살 적 일이다. 불과 열흘 내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괴질로 도라가시고, 어린 누이동생과 나와 단둘만 남앗슬 때다. 부모는 다 돌아가섯지만 그래도 먹고 살겟다고 내가 물을 길어오고 반찬을 만들고 밥을 지엇다.
(靈臺 第2號 「人生의 香氣)에서」

早失父母한 孤兒

아직 철부지인 열한살 쩍에 그는 孤兒가 된 것이다. 이 글에는 누이동생과 자긔와 단둘이라 햇지만 그 박게 또 아직 젓먹이 어린 누이가 하나 더 잇섯다. 그 젓먹이 동생은 할 수 업시 남의 집으로 보내고, 남은 누이동생과 함께 부모를 일흔 외로운 집을 지켯다.
이리하여 여기서 人生의 가장 고달프고 쓰라린 경우에 直面한 이 少年은 어떠한<220> 受難의 途程을 밟엇나?
春園 자긔가 쓴 自傳의 一種이라 할만한 「人生의 香氣」에서 한두 도막, 그때의 그의 고생을 적어보자.
음력 9월 (부모를 한꺼번에 일흔 것이 음력 8月이다) 어떤 날 이 少年은 저녁밥 지을 나무를 해오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갓다. 「人生의 香氣」에는 「나는 서투른 솜씨로 불 잘 부틀만한 풀을 골라 가면서 뷔엇다」 하엿지만 이 서툴다 하는 것은 어런과 對照하여 하는 말이지, 벌서 꽤 熟鍊된 솜씨잇슬 것이다. 나무를 좀 뷔기는 하엿다. 그러나 이왕 온 이상에는 내일 땔 것까지는 뷔어 가지고 나려가려고 욕심을 부리든 이 소년은 낫질을 잘못해서 왼손 無名指 셋재 마듸를 꽤 기피 베엇다.
거기서는 피가 소섯다. 이 피를 볼 때에 少年은 자긔의 외로운 신세와 장내가 더욱 딱하게 생각되여서 소리를 처서 울엇다. 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산에서 통곡하고 잇슬 때에 웬 女人이 지나가다가 이것을 보고 가까히 와서 따뜻이 위로하고 자긔의 치맛고름을 찌저 少年의 손을 싸매어 주엇다.
「집에 돌아오니 어린 누이가 대문 박게 나와서 울고 섯다. 나는 부억으로 들어가서 지금 해 온 나무로 밥을 지어 누이와 가치 부두막에 안저 먹으면서 그 녀인의 얼골을 생각하엿다. 그러고는 父母가 다 돌아가신 뒤에 처음으로 긔운을 어더서 언제까지든 살리라, 힘잇게 살리라 하엿다」
아모리 오막사리라 하나, 소년의 힘으로서는 그 집을 지탱해 나갈 수 업섯다. 소년은 할 일 업시 어떤 친척의 집에서 눈치ㅅ밥 사리를 하게가 되엿다.

담배장사

이 불상한 소년을 위해서 동리 사람이 돈 3圓을 주엇다. 그 3圓을 가지고 少年은 담배장사를 하엿다. 무엇이라나 하는 권연을 平壤서 한 통을 사다가 한 갑 한 갑식 팔면 近1圓의 리익이 붓는다. 定州 邑內에서 사오면 리익이 박하다 해서, 이 少年은<221> 멀고먼 길을 平壤까지 가서, 사다가는 팔고, 팔고 하엿다. 그러면서 이러구러 1년을 지난 뒤엇다.
「나는 마츰내 어린 누이동생이 잇는 곳을 탐지하여 알앗다. 어룬들이 두고두고 쇠겨왓지만 나는 마츰내 알어낸 것이다. (?-원문) 거이 1년 동안이나 잇는 곳도 모르고 서로 떠나 잇든 그리운 누이동생-인제 겨오 셰살 잡히는 어린 누이동생-(?-원문) 누이가 잇는 곳은 여기서 30리다. 느진 가을 볏이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젓지마는 인제 떠나면 해지기전에 넉넉히 들어 갈 것이다. 어떠케 해서던 그 어린 것을 차저 와야겟다. (?-원문)
첫고개 넘에는 작년에 한꺼번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이 잇다. 쥐통(코렐라)에 돌아가신 까닭으로 동넷 사람들도 들여다 보지를 안허서 바로 마당에 무덧든 것을 내가 사방으로 다니면서 돈 1백스무냥 (12圓)을 구걸하여다가 이 고개 넘어 다 옴겨 무덧다. 옴겨 무든지가 아직 한 달도 못 넘은 무덤은 마치 새 무덤과 가텃다. 나는 우둑허니 무덤 아페 서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해골을 옴겨 오든 광경을 생각하엿다. 나는 그 때에 구걸해온 돈으로 뵈와 백지와 칠성판도 사왓스나, 밀집거적으로 싼 것이 아직 썩지 안헛스니 구태 송장내나는 것을 글을 필요가 업다 하야 그대로 두 사람이 지게에다 저다가 그대로 무더버리고 말엇다. 그 가슴께는 굵고 머리와 다리는 가는 아직도 누런 빗이 그대로 잇는 밀집거적에 싸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체가 눈에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볼가바서 동뚝 틈으로 숨어서 시체를 지고 올 때에 나는 말업시 그 뒤를 따라갓다. 「어찌면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 시체를 저러케도 초라하게 섬거적에 싸서 뭇는담」 하고 흔자 눈물을 흘렷다. 더구나 개판조차 아니 덥고 시체 우에다가 함무로 흙을 퍼부을 때에 금할 수 업시 눈물이 낫스나 겨테 섯든 어른들에게 우는 얼굴을 보이는 것이 분해서 가만히 돌아서서 눈물을 씨처버렷다.
나는 우리 녯집터에 다달앗다. 집은 벌서 헐려버리고 그 자리에는 무배채를 심것다.<222> 그래도 저 오동나무 압, 살구나무 아레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그막 4년의 생활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집이 헛개비 모양으로 보이는 듯하여 (?-원문)
둘재 고개에 다달앗다. 이 고개는 여우가 나와서 사람을 홀려간다는 무서운 고개로서 아이들은 해만 넘어가면 이 고개 밋헤서 놀다가도 소리를 지르고 다라나는 데다. 우리 동네의 봄은 이 고개에 제일 먼저 온다. (?-원문) 나는 다시 다름질을 시작햇다. 눈물에 몽농하여진 눈에는 발미트로 휙휙 지나가는 길바닥이 보엿다 안보엿다 한다. ... 큰 개 적은 개들이 콩콩 짓는 촌 중을 지나서 내 누이가 잡혀와 잇다는 그 이웃집으로 들어 갓다. 그 집은 내 먼 일갓집이다. (?-원문)

누이동생을 맛남

심부림 갓든 녀편네가 웬 아이를 다려다가 내 아페 세운다. 이것이 내 동생이야? 저 뼈와 껍질만 남은 누더기에 싸인 어린애가 내 동생이야? 그 불그스레하든 뺨은 어듸갓서? 그 별갓든 눈의 광채는 어듸 갓서? 어지하면 이것이 내 동생이야? (?-원문)
나는 또 한번 「이애 너 나 알아보니. 야 아니?」하고 물엇스나 역시 대답이 업섯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또 알아볼 리도 만무하다. (?-원문) 나는 그 집에서 나왓다. 어스름에 내가 그 집을 나서서 압길로 나갈 때에 누이가 물그럼히 나를 바라보든 것과 내가 그날 밤 혼자서 그 여우나는 고개를 넘어 오면서 20리 동안이나 울고 온 것은 긔억되나 내가 웨 그 누이를 안다리고 왓는지는 생각 안 난다.
나는 그후 1년 동안이나, 이리 저리로 동냥글을 어더 닑고 돌아다니다가 어떤 사람에게 내 누이가 나 당겨간 후에 한 달이 못되여서 리질로 죽어버렷다는 말을 들엇다』 (人生의 香氣에서)
이리하여 여기저기 동냥들이나 어더 닑고 눈치ㅅ밥을 먹으며 다니다가 이 소년은 드듸어 자긔의 고향을 뒷발로 차고 서울로 뛰어 올라왓다. 담배장사를 하여서 번 돈과<223> 밋 (그의 어머니가 자긔의 아들의 장가들 때 쓰려고 준비해 두엇든) 명지 몃 필, 무명 몃 필을 팔은 돈 모도의 合計가 30圓 內外의 大金을 쥐고 이 소년은 向學熱에 들떠서 서울로 올라 왓다. 아직 京義線이 開通되기 전이라, 진남포로 가서 화륜선을 타고 仁川을 지나서 서울로 들어 온 것이다.

서울行

서울서 얼마를 공부하다가 다시 玄海灘을 건너서 東京으로-이리하여 5,6年間을 공부를 할 때에
「나는 어려서 父母를 여이고 無依無託하게 돌아다닐 때에 흔히 老人들게서 初年 苦生은 末年樂의 근본이니라. 네가 자라면 五福이 구비하고 남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되리라」 하는 말로 위로하여주는 말을 들엇다』
(人生의 香氣에서)
幼年時代에 그러케도 薄福햇든 이 少年이건만, 이상히도 그에게는 늘 몃 사람의 後援者가 잇섯다. 이것은 무론 그의 才分의 德이겟지만 진퇴유곡하여 「죽어버릴가 하고 죽을 방법을 생각할 때는 반드시 무슨 일 하나 생겨서」 그의 힘을 북도두어 주엇다. 그러고 이런 意外의 幸運이 그로 하여금 神經的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비교적 樂天的인 오늘날의 그의 性格을 이룬 것이다.

東京遊學

열아홉 살에 그는 東京서 中學을 마추고 高等學校에 入學할 준비를 하다가 자기 祖父危篤이라는 飛電에 다시 오래 간만에 故鄕에 발을 드려 노핫다.
故鄕에서 祖父喪을 당하고 그 뒤를 이어서 그는 五山中學校의 敎鞭을 잡게가 되엿다.
人生의 가장 감격되기 쉬운 나희의 열아홉살의 청년-多情多恨한 그의 空想的 生活은 이 山間中學의 교사생활을 하는 동안에 그로 하여금 차차 詩人이 되게 하엿다. 가슴 속에 充溢되고 壓縮된 감정의 덩어리를 기피 감추고 山間小路를 哲學者와<224> 가튼 긔분으로 거닐면서 여러 가지의 空想에 잠길 동안 그의 마음ㅅ속에서는 하늘이 그에게 주신 藝術的 才分이 차차 노픈 소리로 울리워 나기 시작하엿다.
4年間을 山間에서 敎員生活을 하엿다. 그런 뒤에 漂泊의 길을 다시 떠낫다.
시베리아로 돌아 다녓다. 滿州로 支那 本土로 지향업는 그의 放浪生活은 1年間을 게속하엿다. 해가 산에서 떠서 산으로 지던가 山에서 뜨지 안흐면 산으로 지기라도 하는 山투성이 조선 땅에서 사라서 산을 보지 안차야 안흘 수가 업는 땅만 돌아다니든 그에게는 해가 地平線에서 떠서 地平線으로 떠러지는 滿州와 시베리아의 벌판은 驚異엇다. 驚異라는 것은 凡人에게 잇서서도 詩를 자아내거든 藝術的 天分을 가지고 잇는 이 靑年에게랴. 진일을 광막한 벌판에 서서 뜨는 해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少女와 가치 가슴을 두근거리든 그-
本是는 아메리카로 유학차로 떠나든 길이지만 1年間을 漂泊을 하다가 1年 後에는 그는 다시 五山으로 돌아와서 또 다시 교편을 잡게 되엿다.

어린 벗에게

「어린 벗에게」
이전 학생시대에 그의 後援者요 知已이든 六堂
崔南善이 刊行하는 雜誌 「靑春」에 「어린 벗에게」를 寄稿한 것이 바로 이 두 번재의 五山學校敎員의 된 直後엇다.
때는 1914年 그 스물 네 살 나든 해-
「少年의 悲哀」도 그와 前後하여 가튼 靑春 誌上에 發表되엿다.
그 전에도 數個의 短文의 發表가 업는 배는 아니엇지만
春園이 創作家로서의 第1步를 내여 드듼 것이 이 때이다. (次號續)<225>
<215-225>

 

잡지명 삼천리 제6권 제8호
호수 제6권 제8호
발행년월일 1934-08-01
기사제목 春園硏究(二)
필자 金東仁
기사형태 문예평론

「어린 벗에게」와「少年의 悲哀」 其他

當時의 朝鮮의 사정은 바야흐로 文藝라는 물건을 맛보고저 허덕이는 때엇다. 아직것은 順調롭지 못한 環境 때문에 (그다지도 이 民族이 조하하는)文藝를 正面으로 맛보지 못하든 것이 時代가 박고이면서부터(略) 文藝에 대한 동경이 매우 甚하엿든 때엇다. 菊初
李人稙이 좀 너무도 일즉 나기 때문에, 民族과 련락이 되지 못하엿든 「文藝」에 대한 熱이 바야흐로 무르익엇슬 때엇다. 누구던 그 첫 旗幟의 오르기만 기다리고 잇는 때엇다.
이 때에
春園의 「젊은 꿈」(當時의 原名은 「어린 벗에게」엇다)이 「靑春」 誌上에 나타낫다.

서양문학의 영향

다른 問題는 다 둘째로 밀고 이 「젊은 꿈」의 한 編은 西洋文學의 영향을 바든 最初의 朝鮮作品이라는 點에서 特書할 가치를 가진 者다. 무론 그전에도 臨時臨時의 소설 비슷한 것이 업지는 안엇스나, 그 영향된 點에서, 혹은 愛讀되고 널리 알리운 點에서, 또는 그 가치에서, 西洋文學의 영향을 바든 朝鮮最初의 小說이라는 일커름을 넉넉히 바들 것이다.
장차 눈뜨려는 조선이엇다. 아직것 最良의 手段을 다하여 庶民階級을 壓迫하든 정치가 <145> 沒落되고 동시에 儒敎萬歲의 時代가 지남을 따라서 거기 대한 反抗心이 庶民階級에 올라 잇슬 때엇다. 그러고 온갓 새로운 思潮과 事物을 어더 들이려고 기다리는 때엇다. 그때에 春園의 첫번 小說이 나타낫다.
조선이라 하는 바다에 「時代的」이라는 배를 타고 그 첫 거름을 내여 지픈 春園의 「젊은 꿈」은 그럼 어떤 作品인가

「젊은 꿈」 全篇에 充溢된 내용은 孤寂한 사람의 사랑에 대한 熱熱한 동경이다. 공상에 가 까운 理想的 사랑을 힘을 다하여 부르지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人間愛」라 부를 종류의 것이 아니오, 戀愛라 命名할 종류의 것이다. 當時 아직 슨물네 살의 靑年의 春園은 人間愛를 아지 못하엿다. 뿐더러 그의 生長이 生長이엇드니 만치 人間愛라는 偉大한 사랑이 이 세상에 存在하엿스리라고는 짐작도 못할 時代엇다. 돈 잇는 곳에 사랑이 잇다. 그는 그 生長이 가난하엿드니 만치, 고단하고 쓰라린 過去를 본 뿐 愛情이라 하는 것을 보지를 못하엿다. 어렷슬 적에는 부모가 生存햇스나, 살림이 고단하기 때문에 자식을 사랑할 겨를도 업는 집안이엇고, 가난하기 때문에 친척들에게도 구박은 바덧슬 지언정 사랑은 맛보지 못한 그가 ,차차 인생이라는 것에 눈뜨기 비롯한 뒤에 쳐음으로 느낀 젓은 사랑이엇다. 人間愛보다도 小愛엇다.
「나는 조선 사람이로소이다, 사랑이란 말은 듯고 맛은 못 본 조선 사람이로소이다. 조선에 엇지 남녀가 업사오리까만은 조선남녀는 아직 사랑으로 만나본 일이 업나이다」
「젊은 꿈」의 이 한 구절은 , 그의 心境을 如實히 말하는 배다.
人生의 가장 즐거워야 할 幼年時期와 少年時期를 긔구하고 고달프게 보낸 그가, 겨우 제 철이 들면서, 가장 절실히 늣낀 것은 느끼고 바랜 것은 「사랑」이엇다. 사랑ㅅ 가운데도 小愛엇다. 人間愛라 하는 것은, 그가 좀더 자라서 좀더 마음의 餘裕를 어든<147> 뒤에야 비로소 느낄 것이다.
「남녀관계도 육교를 하여야 비로소 만족을 어듬은 야인의 일이오. 그 용모거지와 심정의 우미를 탄상하며 그를 정신적으로 사랑하기를 무상한 만족으로 알기는 문명한 수양 만흔 군자로야 능히 할 것이로소이다. 」
얼마나 리상적 사랑에 동경하는 부르지즘이냐. 이것은 그 全生을 고적에 보낸 사람의 苦叫 이다. 苦叫라라기 보다도 저주에 가까운 부르지짐이다. 다른 모든 人生問題라는 것이 그의 眼中에 업섯다. 사랑을 맛보고서야 다른 것은 생각할 것이지 사랑을 아직 맛보기 전에는 다른 것은 無意味한 일이엇다.
「아름다운 소년(少年)을 사랑한다 하면 곳 추행을 상상하는 이는 -」
사랑하는 對像으로서는 결코 女子만을 바래지 안헛다. 少年이라도 不關하엿다. 누구던 품에 안겨줄 이만 잇섯스면 足하엿다.
이리하여, 그의 첫 小說인 同時에, 朝鮮新文學部의 具體的 建設期의 그 첫 作品은 「사랑에 대한 열열한 동경」이라는 形態로 나타낫다.
「젊은 꿈」은 그 내용 전부가 「사랑에 대한 동경」일 뿐 아니라 그 小說型에 잇서서도 어떤 「나」라는 靑年이 「그대」라는 美少年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된 것이다.

기교와 형식

小說의 技巧-形式에 잇서서는 이 小說은, 순란한 美文(그것은 朝鮮口語體 文章의 初創期인 當時에 잇서서는 果然 驚異의 美文이엇다.)이 한동안 戀愛하는 男女의 편지투의 표본이 된이 만치 훌륭하엿다는 點 以外에는 그다지 볼 것이 업다. 꿈과 가튼 일을 써 나아가다가 그나마 結末도 짓지 안코 끗막어 버렷다.
「이 세상의 냉혹하고 괴로움을 생각할 때에, 하로라도 밧비 이 세상을 버서남을 깃버하엿나이다. 나는 더러운 병석에서 오즘똥을 싸 뭉게다가 죽지 아니하고 신선한 아츰 해빗<148> 망망한 해양 중에 비창한 광경 속에 죽게 됨을 행복으로 녀겻나이다. 」
이와 가치 熱과 空想으로 찬 辭句로 꾸며 나아가다가, 事件的으로 아모 결말도 보이지 안코 「끗」자를 달아 노핫다.

元來, 春園은 短篇作家로서는 너무도 無能하다. 그의 短篇 中에 가장 그 自身도 사랑한다는 「가실」조차(이것은 將來 다시 말하려 하거니와)道德的이오 事件的의 결말이 업시 「끗」자를 달아 노하서, 감상자로 하여금 奇異한 念을 품게 하거니와 「한멈」 「血書」 「혼인」 어느 것, 안 그런 것이 업다.

또 다시 학창생활

「젹은 꿈」을 當表한지 얼마 지나서, 그는 다시 學窓生活을 하려고 東京으로 건너갓다.
長篇 「無情」이며 「開拓者」를 쓴 것이 이 때이다.(그 長篇에 대하여도 아레 다시 쓰겟스니 여기서는, 문제를 삼지 안는다」 그 長篇을 쓰는 틈틈이 「靑春」 誌上에 발표한 것이 「少年의 悲哀」 「失戀(원명은 尹光浩)」 등이다.
「少年의 悲哀」를 여기서 그 內容이며 形式을 일일히 檢討한다 하는 것은, 初年期의 作品을 부러 들추어내는 感이 업지 안흐니, 붓을 눗는 편이 도리혀 올흔 일일 줄 안다. 다만 그 數篇의 習作品에서 그의 孤寂한 心境이 同性愛, 同性愛나마 행혀 하고 바라보는 것을 發見할 수 잇슬 뿐이다. 「少年의 悲哀」를 쓴 것이 「1917, 1, 10 朝」이오. 「失戀」이 「1917, 1, 11 夜」전날은 四寸同生에 대한 사랑을 테마로 한 小說을 썻고 이튼날은 男子끼리의 同性愛를 테마로 한 小說을 썻다는 點과 그 썻다는 節期가 冬期이며 그 場所가, 東京留學生 監督府 寄宿舍이엇든 것을 附記하면, 당시의 그의 心境을 엿볼 수가 잇슬 것이다.
1917. 1. 17에 쓴 感想文 「彷徨」의 한 구절
「平生에 불낌을 보지 못하는 寢室은 칩다. 게다가 뉘가 저편 유리창을 반쯤 열어 노하서 콧마루로 찬바람이 휙휙 지나간다.
이런 가운데서 無情, 開拓者 其他 初創期의 數個 短篇이 생겨난 것이다. <149>
<146-149>

 

잡지명 삼천리 제7권 제1호
호수 제7권 제1호
발행년월일 1935-01-01
기사제목 春園硏究(三)
필자 金東仁
기사형태 문예평론

「無情」과 「開拓者」
「無情」을 發表한 機關은 大韓每日申報의 後身이오 당시의 唯一한 朝鮮文 新聞이든 每日申報엇다.
春園은 「無情」의 대부분을 東京 朝鮮留學生 監督部 寄宿舍에서 썻다. 쓴 동기는 무론 한 가지로는 文學的 創作慾이나 또 한편으로는 約少한 稿料로나마 學費를 좀 벌어 보겟다는 慾望에서 잇다.
그런지라 「無情」을 보려 할 때에는, 學窓時代에 더구나 번거로운 긔숙사에서 썻다는 핸듸캡을 부치지 안흘 수가 업다.
그러나, 六堂의 「無情」 序文의 一節에 잇는 바 「혼자매 크지 못하도다. 그러나 뷔인 들에 부르짓는 소리는 본대 떼지어 하는 것이 아니로다. 벗 부르는 맹꽁이 소리는 하나가 비롯하여, 왼 벌이 어우르는 것이로다」 라는 말과 가치 번거로운 긔숙사에서 約少한 稿料를 엇기 위하여 쓴 그 作品이 量에 잇서서 아직것 朝鮮에서의 初有인 것인 동시에 質에 잇서서도 아직것 朝鮮사람이 보지 못하든 새로운 것이엇다.〈150〉

春園은 아직 것의 수 개의 短篇에서도 그러하엿고 그 썩 뒤에 東亞日報에 連載한 여러 개의 長篇에서도 그러하엿거니와 그는 소설을 언제던지 說敎機關으로 삼엇다.
쳐음 붓하는 長篇小說인 「無情」에서도 먼저 說敎로서 시작하엿다.

과도기의 모양
朝鮮의 過渡期의 先覺者然하는 사람들을 비웃기 위하여 「김장로」라 하는 인물을 만들어 내고 過渡期의 소위 新女性으로서 「선형」을 製造하고 또한 過渡期의 모범 청년으로서 주인공 「리형식」을 製造하고- 이러한 過渡期의 수 개의 인물의 음지김으로서 「過渡期의 朝鮮의 모양」을 그려보려 하엿다.
거기는 경성학교 영어교사 리영식이라는 주인공이 김장노의 딸 선형에게 영어개인 교수를 시작하는 것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선형의 아버지 김장노는 新式人物이라고 自任하는 사람으로서 자긔 딸과 리형식과를 約婚시키기 위하여 그 交際를 위해서 이런 방첵을 취하엿다. 이러케 두어 번 서로 보게 한 뒤에는 約婚을 하게 된다.
형식이라는 인물도 過渡期의 朝鮮靑年의 性格을 대표하는 者로서 자긔는 新人이어니 하는 구든 信念을 가지고 잇는 인물이다. 자긔의 친구 신우선이라는 사람을 舊式人物이라 경멸하고 김장노의 新人然하는 것을 역시 경멸하고 자긔 혼자가 新人이어니 自信하고 잇다.
이런 리형식에게 三角관게를 가진 한 개의 여성이 登場을 한다. 그것은 형식의 어렷슬 때의 恩師의 딸이오 어렷슬 때의 約婚者로서, 긔구한 운명에 희롱을 바더, 현재는 기생에 籍을 두고 잇는 박영채라는 여인이다.
영채는 舊思想의 典型이다. 그는 삼강오륜을 信條로 하고, 어렷슬 때에 자긔의 아버지가 짝지여 준다고 한 리형식이란 우상(!)을 사모하고 바라며, 아직것 그 몹슨 半生을 보내면서도 오로지 리형식을 만날 날을 질기며 그의 貞操를 지켜왓다.
-이것이 이 소설의 序曲이다.〈151〉
거기서 一轉하면서는 리형식이 김장노의 딸 선형을 영어를 가르키며, 「이쁜 게집애로다」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는 때에, 영채가 出場을 한다. 영채는 오래 두고두고 리형식의 거처를 찻다가 겨우 알어 가지고 형식을 차저 오게가 되는 것이다.
형식의 가슴에서는 두 개의 여성이 亂舞를 한다. 하나는 돈과 「新式」과 「新學問」을 가진 선형이라는 여성이다. 또 하나는 純情과 눈물과 熱과 자긔 희생의 크나큰 사랑을 가진 영채라는 여성이다.
자긔가 自由로 取할 수 잇는 두 개의 여성에서 형식은 어느 편을 取하엿나.
第28節에서 作者는 형식을-
「형식의 속 사람은 여물은 지 오래엇다. 마치 봄철 곡식의 씨가 땅 속에서 불을대로 불넛다가 안개비만 조금 와도 하로 밤에 쑥 움이 나오는 모양으로 형식의 속 사람도 (略) 갑작이 껍질을 깨트리고 뛰여난 것이라」
하엿지만 형식은 아직 깨지 못하엿다. 그는 영채를 생각할 때는 영채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그와 結婚을 할 결심을 하며, 또 한편으로 선형을 보면 선형에게도 또 한 마음이 기우러 진다. 그는 아직 줏대를 못 잡은 사람이다. 무슨 일이던 자긔의 뜻대로 행하지를 못하고, 바람에 기울거리는 갈 때와 마찬가지로 자긔가 舊式이라고 경멸하는 신우선에게도 의견을 물으며, 혹은 형식이가 사람으로 녀기지도 안는 노파 따위에게까지 의견을 뭇고 한다.

여기 우리가 매우 興味를 느끼는 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흔들이기 쉽고 주때가 업는 주인공 리형식을 우리는 즉시로 이 소설의 作者인 李春園으로 볼 수가 잇는 점이다.
新道德律을 세우고 新戀愛觀을 말하고저 春園은 이 소설을 붓하엿거늘 아직 人生行路의 과정을 덜 밟은 作者는 자기의 말하려는 意識的인 思想보다도, 그의 마음에〈152〉 內在하여 잇는 舊道德的 꼬리를 더 만히 보엿다.
이 소설의 主旨로 보아서, 당연히 冷情한 붓끗으로 조상하여야 할 舊道德의 표본인물인 박영채를 너무도 아름답고 熱情的인 붓으로 찬송하엿기 때문에, 讀者는 도로혀, 作者가 말하려는 新道德보다도 영채의 經歷이 말하는 舊道德에 同情을 가지게 된다.

월화의 美化
그것 뿐 아니라 기생 월화의 에비조-트에 잇서서도, 作者는 당연히 월화를 「時代의 副産物인 悲劇의 主人公」으로 조상하여야 할 것이어늘, 情熱에 넘치는 붓끗은 월화를 너무도 美化하여 월화가 信奉하는 舊道德을 讀者에게 主張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아직 주때잡지 못한 作者의 全貌를 讀者의 아페 스스로 내여 보인 未熟한 일이다.

주인공 리형식은 김장노의 딸과 約婚準備行動을 게속하는 동안에, 박영채의 身上에는 變事가 생긴다. 즉 형식이 봉직하고 잇는 경성학교의 교주요, 부자요, 방탕아인 김현수라는 사람에게 청량사에서 강간을 당한다.
아직것 리영식을 위하여 곱게 지켜오든 정조를 빼앗긴 영채는 인제는 살 면목이 업다 하여 유서를 써노코, 대동강에 빠저 죽으려 평양으로 나려간다.
이것을 안 형식은, 영채를 구하고저 불야불야 평양까지 쪼차 나려간다.
그러나 평양까지 나려갓든 형식은 대동강을 차저보지도 안코, 七星門 박글 한 번 휙 돌아보고는 도로 上京하여 버린다.
웨 영채의 시체(그러치 안흐면 영채의 행방)를 차저보지도 안헛느냐.
作者는 이 奇怪하고도 矛盾된 형식의 행동을 속여 넘기기 위해서, 童妓 게향의 적삼 등에 땀이 내배인 이아기며, 평상 우에 안저서 몸을 흔들거리고 잇는 「탕건 쓴 노인」 등을 登場시켯지만, 이 모든 것은 단지 作者의 詐欺術에 지나지 안는다.〈153〉
영채의 행방을 그냥 감초아 두어서 讀者로 하여금 영채가 죽엇는지 살엇는지 궁금증이 나게하기 위하여, 이런 術法을 써서, 형식으로 하여금 거저 도로 上京케 한 것이다. 作者가 아직것 우리에게 提供해오돈 형식의 성격으로서는, 결코 이러치 못할 것이다. 적어도 신우선에게 세 번 이상의 電報를 처야 할 것이며, 경찰서에는 설흔 번은 갓스야 할 것이머, 大洞江邊은 3백 번은 오르나렷스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선형과 약혼을 하고 혼인을 하고 미국 류학을 가는 공상을 三천 번은 햇스야 할 것이다. 적어도 형식은 이만치 약하고 줏대업는 인물이다.
이러한 줏댸업는 인물을 가지고 作者가 자기의 戀愛觀을 說明하려고 新人生觀이며 新道德을 말하려하니 여간 힘든 노릇이 아닐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련달아 나오는 矛盾이 모도, 作者가 주인공의 性格을 잘못 선택한 데 잇다. 이러한 줏대없고 定見없고 자긔의 주장이 업는인물에게 (저곳 속담말과 가치) 竹に棒を 접한 것 갓치 超人的이며 巨人的인 思想을 먹음게 하엿스니 어찌 矛盾이 생기지 안흐랴. 도리혀 신우선과 가튼 성격의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거나, 그러치 안흐면, 리형식 가튼 성격을 舊型의 인물로 만들어 끝까지 희롱을 햇거나 하엿스야 될 것이다.

형식은 平壤서 無爲히 드로 上京을 하엿다.
형식은 경성학교에서 쪼껴낫다. 기생을 따라 平壤다녀 왓다는 罪目이지만, 校主 金某의 非行을 들추어 내인 까닭에 쪼껴난 것이다.
그러자 그는 드듸어 김선형과 約婚을 하엿다.

혼약의 장면
그 婚約의 場面.
이 소설에 잇서서, 作者가 주인공 리형식을 理想的 人物로 만들으랴고, 空想과 思索이 꼬리를 풀어 나가는 場面을 만들은 이외에는 이 小說 全編은 過渡期의 朝鮮의 眞實한 形像이다. 된장에서 구데기를 골라내는 주인 노파며, 기름때가 뚝뚝 흐르는〈154〉 영채의 양모며, 유리창 달닌 집에서 의자를 노코 초인종을 달고, 이것이 開化거니 하고 生活하는 김장노ㅅ집이며, 페스탈로취며 엘렌케이의 이름도 몰라서 「푸스털과 얼는커의 학설은 보앗지오. 그러나 그것은 다 지다이오꾸레왼다.」고 喝破하는 裴學監이며, 어느 것이 「朝鮮의 모양」 아닌 것이 업다.
그 가운데서도 이 約婚의 場面이야말로 가장 過渡期의 朝鮮의 꼴이다.
서양서는 남녀가 미리 交際를 하다가야 約婚한다는 말을 듯고 리형식을 자긔 딸에게 영어를 가르킨다는 名目으로 數月間 서로 보게 하고, 인제는 다 되엿거니 하고 형식을 불러서 婚姻을 請하는 김장노나, 영채를 따라 平壤까지 갓다온 그 길신의 먼지가 아직 잇는 동안에, 김장노의 딸과 婚約하기로 승낙한 리형식이나, 「에그 엇쩌나, 어쩌면 조화?」 하면서도 약혼을 승낙하는 김선형이나, 이것이 모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靜觀하며 축복하고 잇는 목사님이나, 이 몃 개의 인물이 모혀 안저서 엄숙한 형식 아레서 行한 一場의 喜劇은, 當時 朝鮮의 형태를 너무도 如實히 그려낸 것으로서 文헌的 價値로도 우리가 保存하여 둘 만한 것이다.

이리하여 리형식은 어대까지도 영채를 다시 차저보려 平壤으로 간다 만다 야단을 하다가, 이즌 듯이, 김장노의 딸 선형과 약혼을 하고 이 가을로 선형과 함께 米國 留學을 가기로 작정을 한다.
이것이 즉 第85節.
第49節에서,
「선생이시어. 이 몸은 가나이다. 19년의 짧은 一生을 더러운 죄로 지나다가 이 몸은 가나이다. 그러나 차마 이 더럽고 죄만은 몸을 하로라도 세상에 두기 하늘이 두렵고〈155〉 금수와 초목이 부끄러워 원도 만코 한도 만흔 대동강의 푸른 물결에 더러운 이 몸을 던저 양양만 물결로 하여금 더러운 이 몸을 씻게 하고 무정한 어별로 하여금 죄 만흔 이 살을 뜻게 하려 하나이다」 云云한 遺書를 남겨 노코 平壤으로 나려간 뿐 영채의 生死에 관해서는 一句一言도 쓰지 안헛다. 50절에서 85절가지 그새 36節 間을 讀者는 영채의 소식을 몰낫다. 당시의 일을 모르기는 모르지만, 아마 이 소설을 連載하든 每日申報社 編輯局에, 「영채가 죽엇는지 살엇는지 알으켜 달라」는 投書장이나 잘 들어 왓슬 것이다.
이러케 감초아 오기를 36節, 第86節에서 비로소 作者는 「이제는 영채의 말을 좀 하자. 영채는 과연 대동강의 푸른 물결을 헤치고 룡궁의 객이 되엿는가」하는 서두로서, 그새 이저버린 듯이 버려 두엇든 영채를 다시 復活시컷다. (此項未完)
(腹喪, 病臥 등으로 그새 2개월을 休載하고, 이번도 너무 奔忙하여 이 項도 未完으로 끗내는 것은 讀者와 編者에게 未安키 짝이 업다.〈156〉
〈149-156〉

 

잡지명 삼천리 제7권 제1호
호수 제7권 제1호
발행년월일 1935-01-01
기사제목 春園硏究(4)
필자 金東仁
기사형태 문예평론

『無情』과 『開拓者』 (此頃承前)
그새 오랫동안 每日申報 紙面上에서 그림자를 감초앗든 영채가 다시 독자의 아페 登場할 때는 그는 汽車의 客이엇다. 自殺하려 平壤으로 가는 즈음이엇다.
아직 죽지 안헛다. 每日申報 連讀者는 熱狂하엇다. 讀者는 영채의 죽음을 바래지 안헛다. 作者는 영채라는 女人을 한 개 낡은 典型의 女性으로 嘲笑를 하려는 意圖로 이 小說을 出發시켯지만, 讀者의 왼 同情은 영채에게 모혀 잇섯다. 舊탈을 버스려 하면서도 아직 채 벗지 못한 作者라 영채를 嘲笑하려 하면서도 情熱의 붓은 영채를 너무도 美化햇기 때문이다. 낡은 思想의 우에 억지로 새로운 思想을 鍍金하려 하엿지만 鍍金보다는 本地의 銀色이 찬연히 빗낫다.
영채의 탄 汽車 안에는 병욱이라 하는 女學生이 잇섯다. 東京留學生으로 귀향하는 길이엇다.
이 병욱이야말로 作者가 보혀 주려는 새로운 思潮를 한 몸에 지닌 人物이다.
말괄냥이라고 하고 시픈 괄괄한 성미의 주인이오 굿센 性格의 所有者며, 理智와 判斷力을 아울려 가진 우에, 자긔의 인생관도 웬만치 가진 한 개의 新女性이엇다.
이 병욱이란 女性은 作者가 이 小說을 써 나려가다가 中途에서야 비로소 자긔의 誤斷(리형식과 가튼 性格의 주인으로서는 도저히 이 小說을 理想대로 進行시키고 結末〈202〉 내기가 힘들 점)을 깨닷고 急造하여 出場시킨 人物인 듯한 感이 업지 안타. 急造하여 出場시킨 증거는 여러 가지로 알 수가 잇스니,
첫재로는 이병욱의 同行者로, 병욱의 男동생이 긔차에 同乘하엿다고 하엿는데 병욱의 고향에서는 이 남동생은 종적이 사라지고 말엇스니 이것은 作者가 갑자기 小說의 進展을 轉還시킬 때에 將來의 풀랜을 미처 세우지 못하고 막연히「이런 人物도 혹은 必要하리라」하여 집어 너헛다가 그만 그 뒤에는 이저버린 것일시 분명하고,
둘재로는, 황주에 下車하여서의 처음 한동안의 生活描寫가 그야말로「踏步로」式으로 갈팡질팡 小說을 어떠케 進展시킬가 애쓴 형적 등으로
병욱 登場 以後의 이 小說은 전혀「동달이」인 것을 알 수 잇다.
作者는 병욱이라는「동달이」로서, 이 小說을 合理化시키려 하엿다.
그러나 作者自身이 아직「戀愛」라는 怪物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지라, 병욱도 戀愛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엿다. 以下「無情」에서
여학생(병욱)은 영채의 신세타령을 듯고,
?그러면 지금도 그(형식)를 사랑하시오?」
사랑하나냐 하는 말에 영채는 가슴이 뜨끔하엿다. 과연 자긔가 형식을 사랑하엿는지... 알 수 업다. 자긔는 형식이란 사람은 자긔가 차저야 할 사람으로 알앗슬 뿐이오 18년 내로 일즉 형식을 사랑하는지 생각해 본적도 업섯다. 다만 어서 형식을 찻고 십다. 어서 만나면 자긔의 소원을 이루겟다 만나면 깃브겟다 하엿슬 뿐이다. 그럼으로 영채는 멀거니 녀학생을 보다가
?그런 생각은 해 본적도 업서요. 어려서 서로 떠낫스니까 얼골도 잘 긔억하지 못하엿는데...」
?그러면 부친께서 너는 아모의 안해가 되어라 하신 말슴이 잇스니까 지금것 차젓슴니다 그려... 별로 사모하는 생각도 업섯는데」〈203〉
?네. 그러고」(略)
作者는 이러한 말로서 讀者에게「영채가 형식에게 품엇든 바는 戀愛가 아니라」고 강제하려 하엿다. 그러나 이것은 作者가 병욱이라는 人物를 理想化하기 위해서 억지로 附會시키는 억지에 지나지 못하며 나아가서는 作者自身이 아직도 든든한 戀愛觀을 把握치 못하엿다는 점을 讀者에게 發表한데 지나지 못한다.
戀愛라는 것은 理智의 産物이 아니오 感情의 産物인 이상에는「理由를 따저서」 解決될 것이 아니다. 영채가 과거 18년간을 오로지 형식 한 사람만을 사모하고 동경하고 지나온 그 아름다운 行動이 어듸서 나온 것인가. 作者는 여기 대하여「父母의 명령이니」하는 억지의 해답을 나렷다. 그러나 부모의 명 때문에 하는 義理的 行動에 과연 이런 크나큰 순정이 생길 수 잇슬가.
當時의 先覺者로 自任한 作者는 그의 猪突的 勇猛으로서 온갓 在來의 因習을 다 破棄하려 하여 이런 억지까지 나오게가 된 것이겟지만 우리는 영채의 형식에게 가진 바 감정을「사랑」이라고 박게는 볼 수가 업다. 사랑을 하기에 父母의 명령도 자연히 복종하고 시폇슬 것이고 사랑을 하기에「그」를 위하여 정절을 지켜 왓슬 것이고 사랑을 하기에 자긔의 정절이 남에게 더럽힌 뒤에는 죽기로 결심을 하엿슬 것이다.
?無情」 以後의
春園의 小說이 흔히 犯한 過誤가 역시 이것이다. 그의 生長과 敎養과 傳統이 그에게 준 바 性格과 그의 理想이 나흔 바의 理論이 미처 調化되지 못하고 그 調化되지 못한 것을 小說에서 억지로 附會시키려고 하고 하여서 가여운 喜劇과 强制가 나타나고 한다.
그러고 여기 또 한가지 자미잇는 것은 박영채가 自殺하려 가는「汽車」에서 병욱을 만나게 된 이「汽車上의 奇綠」이라는 점이다.
春園의 小說에는 흔히 汽車上의 奇綠 (혹은 정거장)이 잇다.「흙」에도 누차 이런 場面이 잇섯고「再生」에도 그런 곳이〈204〉 잇고「어린 벗에게」에도 (그것은 汽船이나) 그런 곳이 잇고 그 박게도 車上의 奇綠이 흔히 잇다. 이것은 혹은 春園이 過去에 잇서서 汽車에서 奇異한 일이라도 경험한 일이 잇서서 自然히 小說마다 이런 場面이 나오는지.

황주 병욱의 집에서의 月餘의 生活.
小說「無情」은 그 前半部는 잘라 버리고 여기서 出發을 하는 편이 도로혀 小說價値를 노피게 되지 안흘넌지.
거기는 할머니가 잇고 아버지가 잇고 어머니가 잇고 오빠가 잇고 올케가 잇고 하여 한 집안이 가초여 잇는데 그 每人이 모도 한 時代를 代表하는 性格을 가젓다.
병욱의 성격과 영채의 성격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업거니와. 딸이 공부를 하는 것을 실허 하면서도 방임하는 아버지며,
의리를 알면서도 제 안해를 사랑할 수 업는 오빠며
조선의 부억 며누리인 올케며,
어머니 할머니며,
이 몃 사람이 모혀 안저서 밀국수를 먹으며 지나는 광경은 過渡期의 조선의 모양을 그대로 그려 낸 것이다. 너무도「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性格들을 誇張시킨 嫌이 업지 안흐나-그러고 이것이
春園이 흔히 犯하는 過誤이나-이러한 여러 가지의 性格의 人物을 한 座席에 모하노코 操縱하는 것은 이 作者의 獨步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한 우리는 作者의 不用意를 볼 수가 잇스니, 즉 作者는 이 小說을 어떠케 어듸로 언제까지 끄을고 가려는지 確乎한 게획을 세우지 안흔 證據로는 (將來의 進展上 혹은 必要할가 하여) 영채가 병욱의 옵빠에게 이상한 感情을 가지게 만든다. 혹은 이것을 쓸 당시에는 將來 병국(병욱의 옵빠)과 영채와를 결합올 시킬 心算으로 그 복선을 꾸며 두엇섯는지도 알 수 업다.〈205〉
-이리하여 영채는 안온한 田園生活의 月餘를 보낸다.

喜劇배우 리형식이 다시 登場을 한다.
이 희극배우이요 또한 자긔 딴에는 자긔는 先覺者여니 하고 잇는 형식은 영채의 뒤를 따라 平壤까지 갓든 그 먼지를 채 털지도 못하고 영채를 위해서 흘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선형이라는 돈만흔 미인과 혼약을 하고,
?-형식은 깨여서부터 잘 때까지 선형과 미국만 생각한다. 그래도 조금도 적막하지 안코 도로혀 더 할 수 업시 깃벗다. 형식의 모든 희망은 선형과 미국에 잇다. 기생집에 갓다고 남들이 시비하고 돈에 팔려 장가를 간다고 남들이 비방을 하더라도 형식에게는 모다 우서웟다. 천하사람이 다 자긔를 미워하고 조롱하더라도 선형 한 사람만 자긔를 사랑하고 칭찬하면 그만이다. (略) 길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도 이제는 자긔와는 종류가 다른 불상한 사람가치 보인다. 더구나 이전에는 자긔의 동무로 알아오든 주인 노파가 지극히 불상하게 보이고 갑자기 더 늙고 쪽으러진 것 가치 보인다.」
이가치 천하를 어든 듯이 깃버하고 잇다.
性格의 不統一-作者는 어찌하여 이 형식에게 잇서서는 性格의 統一이라는 점을 留意치 안헛는지. 이런 때는 이러틋 굿센 性格의 주인이 되고 어떤 때는 어린애나 일반으로 左右하는 性格의 主人인 리형식은 우리의 小說常識으로는 상상치 못할 人物이다.
세상의 비방을 眼中에 두지 안느니만치 굿세인 性格의 主人이 또한 황주 김병욱의 편지 한 장 때문에는 무한 번민을 한다.
황주 김병욱의 편지라 하는 것도 小說技術上으로 嚴密히 보자면 한낫「踏步로」에 지나지 못한다. 新聞紙上의 明日分의 小說은 써야겟는데, 展開方針이 確立되지 안헛스므로〈206〉 거기서 踏步로를 하면서 一兩日間을 그냥 넘기면서 그 동안 생각한다는 한 속임수에 지나지 못한다. 그런지라 踏步로의 몃 절은 혹은 寞大히 넘겨야 할 種類의 것인지는 알 수 업스나, 踏步로를 하려해도 性格混亂의 責은 면치 못할 것이다.

영채는 병욱과 함께 황주서 지나다가, 병욱을 따라서 音樂공부하려 동경으로 가게 된다.
여긔서 作者의 질기는「車中 奇綠」은 다시 생기게 된다. 선형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는 리형식이 가튼 긔차에 타게가 된 것이다.
그 새 田園生活 月餘에 온갓 過去의 雜念에서 버서낫든 영채는 남대문 정거장에서「리형식군 만세」라고 여럿에서 웨치는 소리에 소스라처 놀랏다. 영채와 병욱과의 대화-

?언니. 웬일인지 나는 가슴이 몹시 설녭니다.」
?웨? 리형식씨란 말을 듯고?」
?응 여태껏 닛고 잇는 줄 알앗드니 역시 니즌 것이 아니야요. 가슴 속에 기피기피 숨어 잇든 모양이야요. 그러다가 리형식군 만세라는 소리에, 갑작이 터저 나온 것 갓습니다. 마음이 진정처 아니해서 못견듸겟소.」
?아니 그러켓니. 읏잿든 7,8년 동안이나 밤낫 생각하던 사람을 그러케 어떠케 쉽게 닛겟니. 이제 얼마 지나면 니즐테지만.」
?니저야 할까요?」
?그럼 어찌하고?」
?안니즈면 안될가요?」〈207〉

이것을 作者는 그냥「사랑」이 아니라「因習」이라고 할가. 만약 이것을 因習이라고 一蹴하려면 사랑이란 어떤 것이라고 표본을 보여즐 義務가 作者에게는 잇다. 그러나,「因習에는 사랑이 存在할 수 업다.」고 誤斷은 나렷지만 이 以上 다른 종류의 소위「참사랑」을 把握치 못한 作者는 一者를 因習이라고 경멸하면서도 새 것을 보혀주지를 못하엿다.

병욱은 물끄렴이 영채를 보더니 영채의 겻헤 가 안저서 한 팔로 영채의 허리를 안으며,
?형식씨가 벌서 혼인을 하섯다. 지금 동부인하고 미국가는 길이란다.」
?에? 혼인?」하고 영채는 병욱의 팔을 잡는다. 병욱은 위로하는 소리로
?아까 여기 왓든 선형이라는 이가 그의 부인이란다.」
?그러면 그 때에 벌서 약혼햇든가.」하고 지나간 일에 실망을 한다. 자긔의 지나간 생활이 더욱 슬퍼지고 원통해진다. 자긔는 세상에 속아서 (略)
?언니. 웬그런지 원통한 생각이 나요.」
?그러나 장내가 잇지 안흐냐.」하고 힘잇게 영채를 안아준다.

이 少女의 心境을 사랑이 아니라면 어떤 것을 사랑이라 하려는고.
作者가 아모리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구구히 설명하나 그것을 미들 사람은 업슬 것이다.

형식도 이 汽車에 영채가 탄 것을 알게 된다. 이 희극광대는 여기서 또 공상을 한다. 性格의 統一과 感情의 純化에 서투른 作者는 형식이 空想에 빠질 때마다, 混線 混線을 거듭한다. 이 때의 형식의 공상도 이전의 여러 번 거듭한 空想과 마찬가지로〈208〉 그런 型이엇다. 거기는 哲學的 術語를 만히 느려 노하서 여러 가지로 형식의 空想을 合理化시키려 한 努力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 努力에도 不拘하고 讀者는 갈피를 차릴 수가 업다. 作者도 갈피를 못차렷슬 것이다. 형식이도 갈피를 못차렷다. 作者의 亂筆이 어즈러히 춤출 뿐이다.
이러케 아모도 갈피 차리지 못할 亂想을 하다가 형식은 영채를 만나 보려고, 영채의 車室로 향한다.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잇든 형식의 性格으로는 이 때에 臨하여 미국이고 안해고 돈이고 모도 내던지고 便所에 가는 체 하고 몰내 汽車에서 뛰처 나려서 도망치여야 할 것이다. 그러고 도망친 뒤에는 또 도망친 일을 후회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아는 형식은 그런 人物이다.
그런데 형식은 비교적 정돈된 머리로서 영채를 방문하고 순서잇게 영채와 이야기를 하고, 더구나, 병욱이가 형식을 嘲笑할 때에,
?이 게집애가 꽤 사람을 골린다.」고 냉정한 판단까지 나릴 수 잇섯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미들 수 업는 일이다.
도로혀, 형식이 영채를 차실에 차젓스면 영채의 아페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해 사죄하고 영채와 살자고 빌다가 병욱에게 쪼껴가야만 순조로운 進行이 아닐가.
그러나 이러케 되면 小說이 되지 안켓는 고로 作者는 여기서 이전의 형식의 성격을 슬쩍 속여 버리고 또한 굿세인 사나히로 만들어 노핫다. 거듭 말하거니와 主人公 李亨植의 性格을 그릇 選擇하기 때문에 이 小說은 自初至終으로 이러틋 不統一이 된 것이다.

형식의 마음에는 생로운 의문 하나이 이러난다.
대체 자긔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선형인가. 영채인가. 영채를 대하면 영채를 사랑하는 〈209〉것 갓고 선형을 대하면 선형을 사랑하는 것 갓다. 아까 남대문에서 차를 탈 때까지는 오직 선형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친 듯 하더니, 지금 또 영채를 보면 선형은 둘재가 되고 영채가 자긔의 사랑의 대상인 듯도 하다. 그러다가 또 압헤 안즌 선형을 보매 이야말로 내 안해 내 사랑하는 안해라는 생각도 난다. 자긔는 선형과 영채를 둘 다 사랑하는가. (略) 사랑은 결코 동시에 두 사람 이상에 향할 수 업는 것이어늘 지금 자긔의 마음은 어떠한 상태에 잇나.(略)
오래 생각한 뒤에 형식은 이러한 결론에 달하엿다.-
자긔가 선형을 사랑하는 것도 결코 뿌리 기픈 사랑이 아니라. 자긔는 선형의 얼굴이 이뿐 것과 태도가 얌전한 것과 학교에서 우등한 것과 부자요 양반의 집 딸인 것 박게 아모것도 선형에 관해서 아는 것이 업다.

이러케 發端하여 混線的 描寫는 다시 시작되여 한참을 나려 가다가 또 의례히 시작되는 大悟가 잇고 大悟가 생긴 뒤에 또 만족해서 빙긋이 웃는다.

형식의 생각에 자긔와 선형과 또 병욱과 영채와 그 박게 누군지 모르나 잘 배우려 하는 사람 몃 10명 몃 백명이 조선에 돌아오면 조선은 하로 이틀 동안에 갑작이 새 조선이 될 듯이 생각한다. 그러고 아까 슬픔을 이저버리고 혼자 빙그레 우스며 잠이 든다.

이 가련한 희극배우는 이러틋 스스로 위로하고 그 우에 國士然한 감회까지 품으며 잠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大悟를 讀者는 결코 信用치 안흐러라. 칠면조와 가치 변하기 쉬운 형식이 한 때 大悟한단덜 그것이 몃 십분이나 가랴.〈210〉
이 갸륵한 남편에게 전염됨인지 형식의 안해 (선형도 空想의 大家인 형식도 잠이 들엇는데) 자지도 못하고 공상을 한다. 좀더 적절히 말하자면 강짜를 한다.
空想! 空想! 웨 作者는 登場하는 모든 人物을 이러틋 空想질기는 사람으로 만들엇는지. 우리의 아는 선형은 좀 鈍感하고 多信한 女人이엇드니. 만약 이런 女性으로서 강짜를 하엿다면 衆人環視中에서 남편의 따귀를 따리며 울어야 할 것이며 그러치 안흐면 鈍感한 微笑를 띄고 남편을 마저야 할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의 人物을 실은 南行列車는 삼랑진까지 갓다. 여름 暴雨에 線路가 破損되여 乘客들은 모도 나리게가 되엿다.
여기서 이 네사람은 부득불 서로 얼굴을 대하지 안흘 수가 업게 되엿다.
나러서 모도 함께 밀러서 어떤「이랏샤-」를 부르는 려관으로 들어가서 한 좌석에 마조 안는다.
여기서부터 이 小說은 終來을 향하여 急템포로 나려간다.
각각 제 感情을 따로 품은 네人物. 한 남자와 세 녀자.
자긔의 아페서 亂舞하는 三角的 一組의 男女를 嘲笑와 同情으로 보고 잇는 병욱이.
約婚한 男子와 영채와의 새를 불쾌한 생각으로 보는 선형이. 近 20년간을 사모하든 사람을 일코 속으로 애타하는 영채.
이 틈에 끼워서 東으로 西로 건들거리는 형식이.
이 네 개의 人物이 한 자리에 모히매 作者는 이 融和를 어떠케 꾀하려는가.
여기서 삼낭진 水害만난 사람들에게 대한 民族愛로서 4人의 감정을 융화시킨 점은 용하다. 이런 巨大한 사건이 突發하지 안헛드면 네사람은 제각기 제 품은 감정대로 헤지고 말앗슬 것이다.〈211〉
이 民族愛라는 것이 또한 이 作者의 항용 쓰는 武器이나 대개가 억지로 意識的으로 揷入하여 作品의 內容과는 어울리지 안는 긔괴한 느낌을 주는 것인데 이 場面에서 뿐은 이런 問題가 아니면 도저히 서로 한 좌석에 모혀서 한 마음으로 談笑를 못할 것으로서
春園의 全作品을 통하여 唯一의「적절한 揷入」이엇다.
단지 우리가 그냥 의심하고 밋지 못할 것은 이 때의 瞬間的 心理로 인하여 네사람이 가튼 感情 아레서 行動하엿다 하나 이 感動이 언제까지나 게속 될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익히 알고 침뱃는 배지만 형식과 가튼 줏때업는 人物에 잇서서 이 感動이 단 1일을 갈지가 의문이다.
하여든 네 男女는 여기서 이 동족들이 大自然의 暴威에 집을 일코 産을 일코 먹을 것을 일코 우는 양에 同情心이 생겨서 림시로 정거장을 빌려가지고 거기서 同情음악회를 열어서 거기서 어든 義捐金으로 이 가련한 동족들에게 萬分一이나마 조력을 한다.
그런 뒤에는 려관에 돌아와서 아직 흥분에 들뜬 이 네사람은 서로 흥분되여 이야기를 주고 밧는다.

형식은 주먹을 불끈 쥐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거닌다.
?여러분은 오늘 그 광경을 보고 어떠케 생각하십니까.」
(흥분되기 쉽고 그 꼴에 國士로 자처하는 형식으로는 할만한 노릇이다.)
이 말에 세 사람은 어떠케 대답할 줄을 몰랐다. 한참 잇다가 병욱이가
?불상하게 생각햇지요.」하고 우스며「그러치 안아요?」한다. 오늘 가치 활동하는 동안에 훨신 친하여젓다.
?그러치요. 불상하지요. 그러면 그 원인이 어듸 잇슬까요.」
?무론 문명이 업는데 잇겟지요. 생활하여 갈 힘이 업는데 잇겟지요.」〈212〉
?그러면 어떠케 해야 저들을...저들이 아니라 우리들 이외다... 저들을 구제할까요.」
?힘을 주어야지요. 문명을 주어야지요.」
?그리하랴면?」
?가르처야지요. 인도해야지요.」
?어떠케요?」
?교육으로 실행으로」

그러나 이 문답은 도로혀 병욱이가 뭇고 형식이가 (연지구지한 끄테) 대답을 하엿서야 될 것이다.
이런 문답을 게속하는 동안에 신우선이가 이 방에 들어온다. 신우선은 사(신문사)의 명으로 수해실황을 보려 왓다가 정?°장에서 네남녀의 긔특한 행동을 듯고 감격하여 이리로 차저 온 것이다.
이리하여 여기서 다섯 사람이 흥분과 감동으로 제각기 장내의 희망을 討論하는 막으로 이 小說은 大團圓을 맷는다.
第 126節은 蛇足이다.
126節에 잇서서는 作者는 아직것 이 小說에 登場하엿든 人物 全部를 再登場을 시켜서 그들의 10년 후를 讀者에게 알게 하엿다. 그러나 이것은, 新派悲劇(혹은 正劇)의 大團圓과 가튼 느낌을 줄 뿐 小說的 ?果를 조금도 더 돕지를 못하고 도로혀 우섭게 만들은데 지나지 못한다.
한가지 더 긔괴한 것은 신우선과 영채를 結合시키지 안흔 점이다.
作者는 누차 신우선이 어떠케 영채를 內心으로 사랑하엿는지를 설명하엿다. 영채도 또한 신우선을 밉지 안케 보앗다는 말도 여러번 하엿다. 이 두 남녀야 말로 서로 性格도 맛고 지식에도 共通點이 만흐며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서 結合되지 안흐면〈213〉 안될 人物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作者는 웨 이 두사람을 結合시키지 안엇는지.
이 小說의 一部의 目的이 因習打破와 新戀愛觀 樹立에 잇다는 것이 否認치 못할 事實인 이상에는 이 점으로 보아서라도 반드시 結合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신우선은「내 친구를 사모하든 女人이니」하고 그만 斷念하고 영채는 또한「형식씨의 친구니」하여 斷念한 것은 作者가 自進하여 因習을 지키라고 指示함과 마찬가지로서 矛盾의 感을 면치 못한다.
아아 우리의 땅은 날로 아름다워 간다. 우리의 연약하든 팔뚝에는 날로 힘이 오르고 우리의 어둡던 정신에는 날로 빗이 난다.(略)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이 아니요 무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질겁게 하고 가멸게 하고 굿세게 할 것이로다. 깃븐 우슴과 만세의 부르지짐으로 지나간 세상을 조상하는「무정을 마치자.」
이 감개무량한 數言이「無情」 全編의 끗막음 節이다.
이리하여「無情」은 無情하게도 末尾가 몽롱하게 끗이 낫다.
이「無情」은 여러 가지 意味에 잇서서 永遠히 닛지 못할 收穫이다.
아직 그 文章에 잇서서는 己未年「創造」雜誌가 나타나서 舊투를 一掃하기까지는 그래도「이러라」「이로다」「하더라」「**라」의 투가 만히 남어서「無情」에 잇서서도 그 例를 버서나지 못하엿지만 朝鮮口語體로서 이만치 긴 글을 썻다 하는 것은 朝鮮文發達史에 잇서서도 特筆할만한 價値가 잇다.
이「無情」이 朝鮮社會에 던진 波動도 特筆할만한 것으로서 巨匠
李人植이 그 새 몃개 發表한 小說은 感情에 잇서서 在來의 感情이엇섯는데 새로운 感情이 포함된 小說이 朝鮮에 나타난 嚆矢로도 無情은 特筆할 價値를 가젓스며,
大衆에게 一顧도 밧지 못하고 逝去한
李人植씨의 이후로 朝鮮서 처음으로 大衆에게 〈214〉환영된 小說로도 特筆할 價値가 잇거니와,
이 小說의 作者인
春園에게 잇서서도 가장 큰 作品이니 그 뒤에 發表된 모든 長編小說(史譚은 除하고) 이 嚴正한 意味에 잇서서 이「無情」의 延長에 지나지 못하는 點(이것은 後에 論함)으로 보아서도 이「無情」은 아직 것의 春園의 代表作인 同時에 朝鮮新文學이라 하는 大建物의 가장 긴한 주춧돌이다.
그 뒤의
春園의 文學史上의 功罪는 차차 論하러니와 이 한만 作品 가지고도 春園의 이름은 朝鮮新文學史에 지울 수가 업슬 것이다.「無情」이 完結된지 얼마 지나서 역시 每日申報紙上에 春園의 第 2長編「開拓者」가 실렷다. 그러나 이「開拓者」는 論치 안는 편이 도로혀 점잔치 안흘가.
?無情」을 揭載하여 大衆의 환영을 바덧는지라 每日新報는 販賣政策上
春園에게 또 小說을 써달라고 부탁하엿슬 것이며, 春園은 용ㅅ돈이라도 어더 쓰노라고 執筆을 한 것이지 그 이상 아모 것도 업다.
?無情」에 잇서서 잇는 情熱을 모도 다 쓰고 뷔인 마음에 새로운 感動을 집어너키 전에「開拓者」를 쓴 것이라. 거기는 한 개의 感動도 업고 한 개의 情熱도 업다.
아모 性格이며 情緖며를 가지지 못한 몃 개의 人物이 마치「잠껼에 듯는 옛말」과 가치 꿈틀거리다가 結末을 매젓다.
春園의 이데올로기를 小說형식으로 억지로 비저 노흐려고 性格도 업는 허수아비를 몃 개 만들어 노코 不自然한 言行을 行케 한「文字의 濫費」에 지나지 못한다.
그의 小說마다 의려히 나오는 몃장 노래도 더욱 그 不自然感을 돗굴 뿐이다.
말하자면
春園은 교활하게 되여서「新聞小說이다. 되는대로 쓰자.」고 진실한 태도를 내여 버린 모양이다.
그런지라「開拓者」는 論外로 집어 던질 수 박게는 업다.(此項 끗)〈215〉
〈202-215〉

잡지명 삼천리 제7권 제3호
호수 제7권 제3호
발행년월일 1935-03-01
기사제목 春園硏究(五)
필자 金東仁
기사형태 문예평론

己未前後

每日申報紙上에 「無情」과 「開拓者」를 揭載한 뒤에
春園은 또, 매일신보의 囑託으로 南朝鮮踏破를 하엿다. 그리고 그 踏破記를 每日申報 지상에 揭載하엿다.
그러나 거기는 「無情」으로서 조선에 말하려든 그 이상의 별것이 업섯다. 새로운 관찰이며 意圖미가 업섯다. 말하자면 이것도 無情의 한 연장에 지나지 못하엿다.
그러자 戊午년이 넘어가고 己未년이 이르럿다.
(六行?)

春園의 망명

그 때 맛츰 귀향하여 잇든 春園은 이 의논이 한창 무르익은 때에 다시 동경에 발을 들여노핫다.
를 草함에 잇서서 그 草案者에 급하엿든 留學生間에서는 이 유학생계 유일의 문필가인 春園에게 그것을 촉탁하엿다.
이것은 春園에게 잇서서는 달갑고도 또한 무서운 일이엇다. 그가 아직 주창하여 오는 민족주의적 열정으로 보아서는 이 우에 더 명예로운 일이 업슬 것이다. 그러나 그 글을 草함으로 당연히 바들 법적 제재는 역시 그에게는 쓴 일이엇다.
그는 -를 草하엿다. 그런 뒤에는 그의 동지이자 또한 委囑者들이 그냥 留東하여<170> 잇는데 반하여, 그는 황황히 상해로 망명하엿다. 이것이, 조선문학사상에 잇서서 특필할 만한 기념탑인 「創造」誌 창간호 발행의 數日 후이엇다.
이 避身이라는 것이, 春園의 온갓 방면을 가장 잘 설명하는 배다. 春園은 어듸까지던 문학의 人이지 결코 前線에 나설 실행의 인물이 못된다. 지금도 春園은 자기 스스로를 文士라기 보다, 오히려 政客으로 보고시퍼 하고, 남이 그러케 보아주지 안는 데 대하여 불평까지 품고 잇스나, 春園은 어듸까지던 문학의 人이지 정치의 人이 아니며 筆의 人이지 실행의 人이 아니니, 이제라도 누가 만약 「위험성을 띈 정치운동」에 春園더러 참가하라 하면 春園은 피신의 여지를 본 뒤에야 승낙을 할 것이다.

「創造」와 朝鮮文學

己未年이라는 해는 조선에 잇서서, 온갓 방면으로 조선을 前期와 後期로 나눈 것 가치 문학운동에 잇서서도 己未 前의 것은 과도기인 것에 반하여 己未년부터 비로서 구체적으로 발전과정에 들엇다.
李人稙에게서 李光洙로, - 이리하여 李光洙에게서 얼마만치 生長한 문예는 온갓 의미에 잇서서 啓發期의 문학이엇다.
아직 그 플릇트에 잇서서던 描寫에 잇서서던, 舊탈의 흔적이 그냥 남어 잇섯다.
문장에서까지도 역시 구탈이 그냥 남어 잇섯다.
이 모든 구탈이 己未年 2월에 창간된 「創造」에서 비로서 一掃되엿다.
春園까지의 문예에 잇서서는 소설의 흥미를 그래도 「이야기의 자미」와 「戀愛 혹은 情事의 자미」로서 비저 보려 한데 반하여 「創造」에서는 「리알리즘의 眞味」야말로 소설의 최고 흥미라 하고, 「이야기로서의 흥미」를 拒否하여 버렷다.
이리하여, 아직껏의 소설내용에 대한 정의를 뒤집어 놋는 한편으로는, 조선문학이 쓸 형태를 비로소 만들어 노핫다.<171>
첫재로 口語體의 확립이엇다.
春園까지에 잇서서는, 그 글투에, 「이러라」 「이더라」 「하도다」 「이로다」 등은 그냥 구어체로 사용하엿다. 「創造」同人들은 의논하고 이런 정도의 글까지도 모도 一蹴하고 「이다」 「이엇다」 「한다」 등으로 곳처 버렷다.
조선말에는 존재치 안흔 He와 She 등 代名詞를 몰 모라 「그」라 하여서 지금 조선서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 사용케 한 것도 創造의 공이다.
겁만흔 春園이 감히 생각내지 못란 지방사투리-특히 평안도 사투리를 地文에 잡아 너흐며 일변으로는 前人이 「점잔치 못하다」고 一顧도 하지 안튼 土語들을 모도 지면상에 부활시키어서, 조선어를 풍부케 하기에 전력을 다하엿다.
지금 文藝物 뿐 아니라 온갓 글에, 조선어가 아모런 말이라도 사용될 수 잇다는 점을 先鞭을 부처서, 오늘날 조선어를 이만치 풍부히 만들어 노흔 점은 創造에 치하할 박게는 도리가 업다. 만약 創造에서 이런 蠻勇을 보이지 안헛드면 (문예의 내용은 春園시대보다 변하엿슬지 모르나)형식에 잇서서는, 얼마한 진보가 잇섯슬넌지 심히 의심하는 바이니, 「이러라」 「하도다」 등도 當年에 잇서서는 口語로 인정되든 바이니, 이탈에서 버서낫슬넌지도 의문이어니와, 土語를 무제한으로 문장화한다는 것은, 「無智하다고 일커를 만한 만용」이 업시는 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고 표현에 잇서서도 春園은 「한다」 「이다」 등으로 족하다 한데 반하여, 창조에서는 「햇다」 「이엇다」로 모도 過去辭로 만들어서, 실감 味를 주엇스니, 그 이래 지금까지 조선의 문학이 걸어온 것은, 전혀 이 형식에 입각하여서다.
이리하여 己未년 2월에 창간된 創造誌는, 「朝鮮文學開拓」의 독기를 노피 들고 이 황야를 다스려 나갓다.

文人輩出

己未年의 한 소리 만세성에 寺內와 長谷川의 정치가 깨여지고 齋藤溫情主義가 조선의<172> 우에 날개를 폇다.
동시에, 寺內 시대의 조선이 좀 풀리며 민간에도 신문잡지발행을 좀 너그러히 할 때에, 몃 개의 잡지가 생겨낫다.
文藝誌 「廢墟」도 온정주의의 餘德에 생겨낫지만, 불행히도 廢墟誌 目體 자체는 조선문예계발에는 아모 공헌도 업섯다.
「開闢」誌도 온정주의의 餘德으로 생겨낫다. 그러고 開闢誌는 문예잡지는 아니엇지만, 「創造」이후에 문예에 큰 공헌이 잇섯스니, 廢噓의 同人이든
廉尙燮이 소설가로 전환하여 成家한 것도 開闢이오, 玄鎭健, 羅彬, 金素月, 등도 開闢을 무대로 생겨난 작가들이다. 그박게도 만흔 문인들이 배출하엿다.
만약 이 배출시대에 잇서서, 과거 創造가 처노핫든 先鞭만 업섯드면, 그야말로 群雄亂舞의 혼란상태를 이루엇슬 것이다. 문장이며 용어범위며 표현이며 「리알의 限界」 등에 모도 先鞭이 잇섯는지라, 이 群雄은 一絲의 얽힘도 업시, 오로지 문학건설에 정진하엿다.
바야흐로 이러한 때에, 上海 피신해 잇든 春園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왓다.
다시 돌아온 때의 조선문학은, 그가 떠날 때와는 비길 수도 업도록 진보하엿다.

春園이 上海在留 중은
安島山의 훈도를 바덧다.
動하기 쉬우니 만치, 또한 감격키도 쉬운 春園은 비상한 심경으로 비상한 환경에서 비상한 생활을 하는 중에, 감화력이 놀랍게도 강한 島山의 훈도를 바든 것이다.
이전 「無情」條에서 말한바 春園의 이원적 성격에, 여기서 또 한가지가 添加되엿다. 피신 이후의 春園이, 그 성격상 매우 커 보이는 때는 이상 3者가 잘 융화된 때오. 모순이 보일 때는 이상 3者가 상격이 된 때다. 감수성이 만코 共鳴性이 만흔 春園은 일시 감격된 감정은 모도 그대로 삼켜 버렷다. 在來의 것과 모순이 되는지 안되는지를<173> 考察치도 안코...
그런지라, 파쇼를 찬미하는 한편으로는 톨스토이를 찬미하며, 제국주의를 강조하는 한편으로는, 또한 침략주의를 배격하는 데도 결코 주저하지 안는다. 그러고도 이 모순된 二面을 모도 정당시하고, 결코 부자연타 보지 안는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그의 성격이 대단히 단순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오. 또 한편으로는 공명성이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의 단점인 동시에 또한 그의 장점에 다름업다. 만흔 모순을 보이는 이 단점은 또 한편으로는, 객관적으로 새로운 사상에 대하여는 늘 선봉을 선다는 선도자로서의 그의 일면을 보여 준다.
다만 한가지 붉은 사상 뿐에는 한번도 물들어 보지 안흔 것은, 島山의 위대한 감화의 힘이 아닐까.

長白山人

귀국 후에 한동안 春園이 사용한 號 「長白山人」은 上海신문XX에서 그가 쓰든 號이니, 거기 대한 島山의 설명은 「주머니ㅅ속이 늘 비엇스니, 一長白이오, 겨울에도 힌 夏洋服을 입엇스니 二長白이오, 마음이 단순하니 三長白이오, 長白山下의 조선인이니 此亦 長白이라」함과 가치, 上海에서의 春園의 생활은 비참하엿다. 만약 이 때에 島山의 위대한 감화력만 업섯드면 春園은 빈곤에 못 이기어 타락하엿슬 것이다.
헐벗고 굶고, 이런 빈곤과 싸우다 못하여 그는 어던 기회에 그만 귀국하기로 한 것이다. 단순하고 심약한 春園이 이 「귀국할까」 「말까」의 兩難의 자리에서 얼마나 번민하엿슬지는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잇다.
이러다가 드듸어 눈 꾹 감고 귀국하엿다. 그러고 現부인
許英肅씨와 사랑의 보금자리를 비로소 틀엇다.<174>

春園의 短編

이 귀국한 뒤의 春園의 거취에 태하여는 그 때 갓 형성된 문단은 매우 흥미의 눈으로 보앗다.
어떤 길을 밟으려는지. 春園이 아직껏 産出한 문학은 한 민족의 啓蒙期의 대중 문학이엇다. 그러나 수년 간 망명생활을 한 뒤에 귀국한 때의 조선문학은 20세기의 세계문학과 同例의 것이엇다. 조선민중의 문학에 대한 鑑賞眼은 어느 정도이건, 문학만은 홀로히 노픈 자리에 뛰여 올랏다.
春園은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따라오려 하엿다.
「開闢」 「朝鮮文壇」 등에 揭載된 「가실」 「거륵한 이의 죽음」 「血書」 등 수 편의 단편이 이 때의 작품이다.

「가실」 以下 短編

「가실」 이하의 數個 단편은 조선 사회에 상반된 두 가지의 관점 아레서 발표되엿다.
대중은 또 다시 열광하엿다. 그새 대중의 아페 제공된 소설이라는 것은, 대중적 안목으로 보자면 乾燥無味한 것이엇다. 거기는 연애도 업고 연애가 잇댓자 自嘲的 의미 이상의 것이 업고, 活劇이 업고 비극이 업고-말하자면 리알과 주관의 맛을 알만한 고등한 감상안을 못 가진 조선대중에게는, 문자의 濫費로 박게는 보이지 안는 것을 소설이랍시오 하고 대중의 아페 제공하여 오든 것이엇다.
이 달갑지 안흔 高等料理에 饑餓症을 느끼고 잇든 대중의 아페, 오래간만에 春園의 소설이 나타낫다. 거기는 사건적 흥미가 잇고, 화려한 문장이 잇고, 그 우에 그새 망명기간에 春園의 마음에 생긴 바 (그전부터 잇든 것이 자란 것이엇다.) 雄壯癖과 感激癖이 다분히 든 점까지, 대중의 기호에 마젓다.
그러나 문단에서는 비교적 냉담하엿다. 문예적 가치로 보아서, 「無情」 등 前期作品보다 훨신 떠러지는 작품으로서, 거기는 당시의 문단의 일종의 자존심과 시기까지 석겻겟지만, 이 소설들을 문예라 보지도 안헛다.<175>
그러면 그 단편들은 어떤 것인가. 個個로 간단히 보기로 하자.
-「가실」-
이것은 三國遺史의 가실의 이야기를 物語化한 우에, 그 중간에 당시의 春園의 감수성 만흔 성격이 잡어 너헛든 反戰意識을 약간 가미한 한 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소설은 사건적으로던 소설적으로던 또는 도덕적으로던 채 끗맷지 못한 소설이다.
新羅 어떤 시골 총각이 동리 처녀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高句麗遠征軍에 끼어서 전장에 나갓다가, 거기서 포로가 되여, 수년간 고구려 머슴으로 지나면서도, 신라에 남겨둔 處女(그와 약혼한 색시)가 못 니치어, 드듸어 정드렷든 제2 고향을 떠나서 고국 新羅로 향한다 하는데서 이 소설은 끗이 낫다.
그러면, 그는 무사히 신라까지 돌아 갓느냐. 혹은 중도에서 병이라도 나서 죽엇느냐. 만약 중도에서 병이 나서 죽엇스면, 이는 天道가 무심한 것이다.
만약 무사히 신라까지 돌아 왓다면, 그의 약혼한 처녀는 아직 그를 기다리고 잇섯나. 혹은, 소식업는 낡은 임보다, 눈 아페 보이는 새 님을 마자 갓나. 전자라면 거기는 감격할 인정이 잇고, 후자라면 몸서리칠 무정이 잇다.
이 3자 중의 한가지의 末端을 보여주지 안흐면 이 소설은 미완이라는 비방을 면치 못할지니 사건적으로 보아도 아직 미완일 뿐더러 「소설이란 한 개 인생을 말하는 것」이라는 견지로 보아도 미완이며 「人生」을 「不具化」한다는 도덕적 견지로 보아도 불완전한 작품이다.
이리하여 「가실」은 「중도에 끈허진 한 자미잇는 이야기」가 되여 버렷지, 그 이상은 올라가지 못하엿다.<176>

-「어떤 아츰」-
이것은 春園의 悲壯癖과 感激癖의 산물로서, 거기는 한 개의 성격도 업고 사건도 업고 그 작품 주인공인 「그」라는 인물이 새벽에 산에 올라가서 혼자서 비장한 감격에 잠겨서 「오오」와 「아아」를 부르짓는 부자연한 이야기에 지나지 못한다.

비장미

-「거륵한 이의 죽음」-
이 소설은 春園의 소설을 말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例證 들만한 점을 가진 자이다. 이 소설의 첫머리에 주인공인 듯이 등장시켯든 「대위 夫妻」를 작자는 下半部에서는 일허버리고, 전력을 다하여 東學先生 海月의 뒤를 따라갓다. 이것은 이 소설의 上半部와 下半部에 주인공을 달리한 것으로 소설 통일상 지장이 잇는 배다. 海月을 주인공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대위 內外」가 중대시되엿다.
이것은 단편소설의 효과상 피해야 할 일이다.
또, 春園이 소설상에서 위대 혹은 理想人을 쓰려면, 거기는 그의 悲壯癖과 感激癖이 너무도 강열히 나타나서, 비장미보다도 희극미가 도로혀 압서는 것을 이 소설에서도 볼 수 잇스니 이 비장벽이 과히 활동하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春園이 말하려든 「자기 희생의 대정신」은 도로혀 이 희극적 비장미 아레 감초여서 막연하여 젓다.
崇神人組合에서나 운운할만한 몃 가지의 기적적 사건은 피하여야 할 것이다.
-요컨대 「거륵한 이의 죽음」은 천도교 긔관의 잡지인 「開闢」을 위하여 쓴 것이라는 一語로서 전부가 끗날 것으로서, 거기는 神格으로 誇張된 인물의 부자연스런 최후가 그려지어 잇슬 뿐이다.

-「殉敎者」-
이것은 劇이다.<177>
내용은 「거륵한 죽음」과 同工異曲인데다가 한가지 春園이 소설상 질겨 등장시키는 中年好色의 재산가인 송서방이라는 인물이 첨가된 뿐이다.
그러나 春園은 웨 이것을 劇이라고 썻는지부터가 의문이다.
마듸마듸마다 說明地文이 나오고 등장인물의 全행동의 가장 조그만 일동까지라도 모도 地文으로 설명한 이 物語는 劇으로는 도저히 볼 수가 업다.
春園은 「脚本」을 몰랏다.

-「혼인」-
昭和 5년 10월 10일 발행 興文堂書店印本에 나타난 이 「혼인」은 어찌된 셈인지를 알 수가 업다. 이야기가 한참 진행되다가 「새벽 닭이 두홰나 울 때쯤 하야.」로서 그 뒤가 업다.
이것은 무책임한 출판업자의 무지한 일로 박게는 볼 수가 업다.
그러나 (이 책이 제4版이니) 제4版이 되도록 이런 실수를 訂正치 안흔, 원작자의 책임도 면치 못 할 것이다.

-「할멈」-
이것은 한 개 스켓취지 소설이 아니다.
소설에는 인물과 사건과 배경- 즉 성격과 행동과 문제- 이 3자가 구비되여야지 그 한가지라도 빠지면 안되는 것인데 여기는, 소설상 사건이라고 볼 자가 업다.
한 소설의 일 장면- 이러케 볼 박게는 업다.

大衆은 興味를 求한다

-「血書」-<178>
이리하여 수 개의 단편소설을 썻지만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안흔 春園은, 드듸어 돌아서서 다시 연애소설을 썻다.
이 「血書」가 대중에게 얼마나 환영을 바덧는지는 이 「血書」가 게재된 「朝鮮文壇」 잡지가 순식간에 絶版이 된 점으로 알 수 잇다.
조선의 작가들은 연애소설을 그새 쓰지 안헛다. 全지구상에 너무도 만흔 작가들이 모도 연애를 주제로 소설을 썻는지라, 인제는 연애로서는 새로운 「人生」을 말할만한 재료를 구하기 힘들엇다. 그래서 자연히 련애소설은 沒覺을 당하엿든 것이다.
그러나, 소설에서 「人生」보다도 「戀愛」를 구하고저 하는 대중들은 戀愛物語에 주렷다.
여기, 春園의 연애소설이 대중의 앞에 제공된 것이다. 더구나 그 내용은 연애에 애타는 異 소녀가 너무도 타는 심정에 마그막에는 죽어 버리며 「나」라는 주인공은 소위 「큰 뜻에 바친몸」으로 일생 결혼을 안하려고 마음 먹은 사람이라,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중에게 꼭 마젓다.
당년 조선대중이 얼마나 戀愛物語에 주렷든가 하는 점은 「사랑의 불꼿」이라 「金孔雀의 哀想」이라 하는 등등의 책자가 놀라운 부수로 발행된 것으로도 알 수가 잇다.

「血書」는 春園의 화려한 문장과 春園의 플롯트組成才能으로 비저진 자미잇는 物語와 春園의 정열적 문자가 합하여 된 센틔멘탈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 소설은 「人生」을 말하는 바가 업다. 讀後에 沈思케 하는 餘音이 업다.
-말하자면 이것도 소설로는 실패의 部에 속할 者다.

-「H君을 생각하고」-
이것은 작자도 서문에서 말한 바와 가치, 「사실담」이다. 그런지라 소설로 운운할<179> 것이 못된다.
만약 이것을 소설로 보이랴면 작자는 사실을 좀 굽혀서라도 소설적 가미를 할 의무가 잇다. 더욱이, H군의 애인이라는 여인의 배신적 행동(독자는 그러케 보앗다)에 대하여도 작자는 독자의 오해를 똑똑이 풀어 줄 의무가 잇다. 이 모든 점을 그냥 넘겻스매, 「H君을 생각하고」는 작자의 일기의 拔수로 보아 둘 박게는 도리가 업다.

失敗의 原因

이리하여 귀국 이후의 재출발을 창작 방면으로 버드려는 春園의 企圖는 완전히 실패하엿다.
사건적 흥미에 너무 置重하려는 생각(이것은 신문소설을 쓴 餘毒이다.)이 그의 실패의 첫 원인이고,
내재한 悲壯癖을 발표하고저 하는 욕망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 비장벽이 (단편이니만치 너무도 부자연하도록 명료하게 나타나므로)작품을 損치는 둘재 원인이오
단편을 취급함에 장편적 수법을 사용하엿슴이 또한 실패의 원인이다.
여기서 春園은 煩悶하엿다.
온전히 붓을 꺽글까. 꺽자니 그래도 알끈하엿다.
그러면 붓을 그냥 게속하여 잡을까. 그러나 그냥 잡자니 스스로도 작품에 불만을 느끼는 것을 어찌하랴.
대중의 환호와 동업 문인의 냉시 가운데서, 자기의 거취에 대하여 번민을 거듭하다가, 그가 제3차 출발의 활로를 발견한 것은 東亞日報 紙上의 신문소설 게재엇다.
이리하여 春園은 비로소 자기의 정당히 나아갈 길을 발견하엿다.
신문소설을 엄정한 의미의 문학이라 보기에는 너무도 이단적 조건이 만히 가즌다.
그러나 신문소설이 그 민족문예 助長에 가지는 역할은 무엇에 비기지 못할지니, 明治초년의 일본문단에 잇서서 尾崎紅葉이며 德富?花 등의 소설을 문예물로 보기에는<180> 좀 거리가 머나, 문학운동의 불가결할 운동이라는 점은 부인치 못할 것으로서 그들의 대중적 운동이 업섯드면 오늘날의 일본문학의 대성은 꿈도 못 꾸엇슬 것이다.
이와 마챤가지로 春園이 동아일보를 무대삼고 나타난 제3차 출발은, 또한 허수로히 볼 수가 업는 일이다.
여기 대해서는 순차로 論之하고 그 전에, 순서상 春園의 논설 등에 대하여 매우 간단히 한마디 하여야 할 것이다.

數種論說

「新生活論」 「民族改造論」
이 논설 등은, 春園이 자기 문학에 대하여 불만을 품는 동안 신국면 타개의 일방도로서 한 일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論中의 主義로서 직접 이는 春園의 主義어니 하기에는 春園은 너무도 변하기 쉬운 사람이니, 감수성이 강한 春園이 어떤 원인으로 일시적 흥분과 감동으로 揮之한 長論文으로 보면 그만이다.
무론 그런 논설을 쓴 이후에는 그의 마음에도, 이 論과 상부하는 이상도 貯藏하엿겟거니와, 부분적으로는 그 論과 정반대되는 論도 또한 정당하다고 밋고 잇느니만치 단순하고도 감수성 강한 春園이다.
그런지라, 이 주장이 春園의 절대적 사상이라고 인정하기 어려운 만치, 이 論으로 春園의 사상 동향을 폄하기 어려우니까, 가브여운 정도로 보아 넘길 종류의 論說이다.

이리하여 제1기와 제2기를 지나서 제3기에 들어선 春園을 이하 순차로 보기로 하자.
(續)<181>
<170-181>


잡지명 삼천리 제7권 제5호
호수 제7권 제5호
발행년월일 1935-06-01
기사제목 春園硏究(六)
필자 金東仁
기사형태 문예평론

物語와 史話와 小說
嚴正한 의미의 창작이 자기의 本質과 맛지 안흠을 깨닷고
春園은 이에 第三次의 道程을 밟엇다. 東亞日報를 舞臺로 삼고 連載物語를 쓰기로 方向을 바꾼 것이다.

춘원집필의 신조
「아무쪼록 쉽게, 언문만 아는 이면 볼 수 잇게, 읽는 소리만 들으면 알수 잇게, 그러고 교육을 밧지 안한 사람도 리해할 수 잇게, 그리고도 독자에게 道德的으로 害를 밧지 안케」
以上이 「春園短篇小說集」의 自序의 一節이다.
결국 이것이 현명한 일이엇다.
사실에 잇서서, 當年의 朝鮮文藝는 讀者 大衆을 眼中에 두지 안코 너무도 노피 올라 뛰엿다. 文藝는 文藝대로- 讀者는 讀者대로-이러케 서로 平行的으로 걸어갓다.
너무도 노피 올나 뛴 文藝를 讀者層은 리해할 수 업섯다. 리해하지 못할 것이라, 애당초 보기부터 拒否하엿다. 그때의 文藝物의 讀者는 數人의 文學靑年과 그박 「文藝를 읽어야 새로운 사람이거니」하는 모던 級 사람에 지나지 못하엿다. 大衆은 이 乾燥無味한〈260〉 文藝를 읽을 생각도 안하엿다.
羅彬의 新聞小說, 廉想涉의 新聞小說 等等, 수 개의 新聞小說이 잇기는 하엿지만, 그것도, 「新聞에 連載하엿스니 新聞小說」이지 결코 新聞小說의 本質에 맛는 者가 아니엇다.
이리하여, 文藝는 文藝대로 제 갈 길만 가고, 大衆은 大衆대로 저 읽고 시픈 것만 읽고-이리하여 文藝와 대중은 영구히 平行的으로 나아 갈 듯이 보이는 이 현상에 미루어, 반드시 그 兩者를 한군대 握手케 할 中間的 文藝가 나타나지 안흐면 안될 것이다.
마치 明治文壇에 잇서서 新進氣銳의 純文藝派와 아직 눈뜨지 못한 대중을 握手시키기 위하여, 大町桂月의 文章運動과 尾崎紅葉, 德富蘆花의 文化的 文學運動이 不可缺의 것이 엇든 것과 마찬가지로, 朝鮮에 잇서서도 그 중간의 作家가 생겨나지 안흐면, 文藝는 저 혼자 외로운 춤을 추다가 저 혼자 스러저 버릴 박게 도리가 업게 되엿다.〈261〉

문화적 문학운동
말하자면 文化的 文學運動이엇다.
그것은 우리 子孫에게 끼처 줄 遺産으로서의 文學運動보다도 그 文學線까지(눈 어둔) 讀者를 끄을어 올니려는-文學運動이라기 보다 文化運動이라는 편이 더 적절할 운동이엇다.
春園은 이 길에 나리려 하엿다.
新文學樹立에 잇서서
李人植의 뒤를 이어 孤君분투하든 春園은 여기서 또한 文化的 文學運動을 위하여 孤軍분투하려 일어섯다.
「許生傳」이하 만흔 長編이 東亞日報에 꼬리를 이어 나타낫다.〈261〉
이하, 春園이 그간 발표한 만흔 長編을(완결되고 출판된 것만 추려서) 순서를 뒀°러서 論하려 하거니와, 그 보담 먼저, 그 여러 작품을 대략 分類하여 볼 필요가 잇다.

작품을 분류하면
그의 作品을 대략 「物語」와 「史話」와 「小說」의 세가지로 나눌 수가 잇다.
「許生傳」과 「一說春香傳」이 物語의 部에 들을 것이오,
麻衣太子와 「 端宗哀史」와 李舜臣등이 史話의 部에 들 것이고,
「再生」과 「群像」과 「흙」과 「有情」등이 新聞小說의 部에 들 者이다.
이상의 모든 것을 순서로 따저 보자면, 許生傳, 一說春香傳, 再生, 麻衣太子, 群像(혁명가의 안해, 삼봉이네 집, 사랑의 多角型) 李舜臣, 흙, 有情-이러케 된다.
그런데 이상의 11편을 웨, 物語와 史話와 新聞小說의 三者에 分하느냐 하면, 그 三種이 다 각각 다른 특색을 가젓기 때문이다.
許生傳과 一說春香傳은 「物語」라고 박게는 말할 수가 업는 종류이다. 그것은 小說로서의 조건을 갖지 못하엿스니 小說이랄 수도 업는 자요, 史話가 아니니 史話의 部에 들 수도 업는 것이오, 한개 이야기로 박게는 分類할 수 업다.
麻衣太子, 端宗哀史, 李舜臣의 3編은, 또한 史話라는 특수한 部類에 집어 너흘 수 박게 업다.
이것은 小說로 되기에는 너무도 史實에 忠實하여, 作者의 主觀이 제거되엿스며, 소설로서의 末尾도 未備하고(史實的말미가 잇슬뿐) 史譚으로 보기에도 아직 「譚」으로서의 展開가 업스니, 史話(外史로 볼 박게는 업다.
「再生」과 「群像」과 「흙」과 「有情」이 新聞小說로 볼 수 잇는 者다.
여기 대한 群論은 그 개개의 작품에서 하려니와 이 3者를 모도 한데 뭉처서 개괄적으로 말할바는 이상의 것이, 모도 新聞紙上에 揭載되엿다 하는 점이다.〈262〉
대체 新聞紙上에 揭載된 작품에는 여러 가지의 핸듸캡을 부치지 안흘 수가 업는 것이다.
一日 一回分이라는 특수한 조건을 가진이 만치, 그 一回分을 채우기 위하여는 「쓸말」을 제거하는 수도 잇고, 「쓸데 업는 말」을 집어 넛는 수도 잇스며,
그 一回分 一回分이 모여서 한개의 이야기를 구성하여야 하느니 만치, 거기도 특수한 고려가 필요하며,
文章도 簡明平易를 爲主해야 하는 이 만치, 거기도 핸듸캡을 부처야겟고,
그 우에 더욱이, 春園의 작품에 대하여 더 특수한 핸듸캡을 부처야 할 것은, 春園의 新聞連載物의 9割 이상이, 「春園이 該社의 기자로 在勤中에 制作된」점이다.
이 점에 특별한 핸듸캡을 부치지 안흐면 안 될지니, 대체 그 新聞社社員의 자리에 잇스면 작품의 本質的 價値보다도 興行的 價値에 더 留意를 할 義務가 잇는이만치, 여기부터가 제한이 부틀뿐 아니라, 그외에도 時間的으로 空間的으로 만흔 구속을 안바들 수가 업는 것이다.
먼저 時間的으로 보아서, 총망중에 瞬時의 여유를 어더서 작품의 붓을 잡앗스며 작품의 붓을 잡앗다가라도 新聞社員으로서의 用務가 생기면, 쓰든 붓을 내여 던지고 그 用務를 끗내고, 다시 게속의 붓을 잡으야 하며, 이리하여 밀리고 밀려서, 編輯끗막음 시간이 다 닥치면 그야말로 飛筆로라도 그날 分은 써 날려야 하는 이 만치, 거기는 조잡되고 설친 곳이 만케되지 안흘 수가 업스며,
空間的으로 또한 新聞編輯 責任者로서의 어즈려운 용무를 머리에 담고 잇느니 만치 작품의 進展에 관하여 서서히 생각할 여유가 업시 그날그날 당하는 것을 억지로 게속시키기 때문에 성기고 「되는대로 쥐어 부친데」가 만타.
端宗哀史가튼데서 당연히 알아 본 뒤에 執筆하엿어야 할 宮中風俗이라던가 재상가의 예의 등에 관해서도 한곤대도 조사해 보지안코(常識으로 추측을 허락치 안는)〈264〉 이 朝鮮宮中 風習을 단지 자신의 想像으로 써 나가기 때문에 作品이 도리혀 喜劇化한 點등은 이 조흔 實例가 될 것이다.
이런 點등을 모도 그 작품 개개에서 자세히 보기로 하고 먼저 春園의 귀국 후 최초의 「完結된 新聞上作品」인 「許生傳」을 보기로 하자.

許生傳
朴燕巖의 「熱河日記」중의 「玉匣夜話」가운데 잇는 許生의 이야기를 物語化한 것이 이 「許生傳」이다.
그러나 春園의 「許生傳」은 燕巖의 그것과는 전연 다르다.
단지
孝宗 大王時에 墨積洞에 許生이라는 가난한 선비가 잇섯는데, 그 許生이 卞進士라는 부자에게 돈 萬兩을 꾸어다가 安城서 과일무역을 하여 큰돈을 남기고, 뒤이어 濟州서 말총무역을 하여 큰리를 남기고,
그뒤 도적의 무리를 인솔하고 어떤 無人島에 가서 거기를 開?하여 거기 所産을 長崎에 팔아서 3년간에 巨利를 본 뒤에 자기는 단신 도로 歸國(利50萬餘는 바다에 던지고)하여 버렷다.
때마츰 孝宗大王은 北伐의 큰 뜻을 품고 人材를 고르든 중 許生의 인물됨을 듯고 정승 李浣을 보내서 許生을 부르려 하엿는데, 許生은 李浣의 人物됨이 마음에 안들어, 표연히 어듸로 가 버렷다 하는 大?의 줄기가 燕巖의 것과 공통되지, 이야기의 展開는 전혀 春園의 創作이다.
이야기의 展開뿐 아니라, 거기 담긴 思想이라던지 주장이라던지 暗示라 던지는 모도 朴燕巖의 것과는 大相不同이다.

허생전도 一創作
그것은 철두철미한 자미잇는 이야기다. 그 文章에 잇서서던 表現에 잇서서던 進展의〈264〉 技術에 잇서서던 한 자미잇는 이야기라는 한마듸로서 끗이 날 것이다.
表現技術上으로 보아서 「無情」시기보다도
李人植의 時期보다도 썩 더 뒷거름처서 「흥부놀부전」이며 「장화홍련전」의 衣鉢을 繼襲하엿다고 볼 수 잇는 作品이다. 단지 그 古代小說과 相異되는 점은 「許生傳」에는 春園自身의 人生觀이 때때로 암시된다는 점뿐이다.

「글세 이놈아 도적놈이 오면 벌벌 덜든 것이, 연약한 아이들을 보면 그러케 긔운이 나느냐.」

「세상사람이란 저 생긴 것 보다 낫다고 해주어야 조화하는 것이다.」

「손을 대지 말어라. 완력을 쓰는 것은 언제나 조치 안흔 일이어.」

이 이야기의 主人公인 許生을 시켜서 말하게 하는 바 이런 主義등이며,

「그래 겨우 그 뿐(孝宗時代의 北伐의 의미가, 明나라에 대한 報恩이라는 말에 대하여)이란 말이오? 종이 상전의 원수를 갑는 것이구려.」

「조선팔도의 힘을 기우려서 북벌을 한다 하기로 그래도 좀 큰 뜻이나 잇는가 하엿더니 겨우 그것이란 말이오? 겨우 대명국 원수를 갑는 것 뿐이란 말이오?」

하여 X粹的 思想을 暗示한 點 등등이 古代小說에서 보지 못할 새로운 점이다.
그 박게는 「여러 사람이 목침을 베고 누워서 한사람은 읽고 다른 사람은 들을」〈265〉 한 자미잇는 이야기에 지나지 못한다.
거기는 아모 眞實性도 업고 아모 迫眞力도 업다. 이러한 한개 허황한 이야기일지라도 그 主人公인 許生의 性格을 하나 創造하여 근대적 묘사에 뿌리를 두고 이야기를 만들어 나아 갓스면, 자미잇고도 文學的으로도 좀더 나은 것이 되겟거늘 春園은 이 점에 너무도 겸손하엿다. 이 이야기에서 作者가 주인공의 외양에 얼마나 不注意하엿는가 하는 점으로서는 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몸찝이 조그마코 식은 코를 홀작홀작 들여 마시는 사람으로 만든 것부터가 어울리지 안흐니,
「성큼 성큼 나가버리고」(時文社版 許生傳).
「빙그레 웃고.」
「천천히 걸어가고.」
「엄숙한 어조로.」
등은, 作者가 설명한 바의 主人公의 外樣과는 調和되지 안는 바이다.

年代의 착오
작자가 이 이야기를 씀에 얼마나 不注意하엿는지는, 175頁에 「일본이 흉년이 들어서 명나라에서 곡식을 사다가」云云이 잇스니, 대체 이 이야기는 孝宗때로서, 明나라가 망하고 淸나라가 이룩된지도 수십년후인데 明나라가 웬 명나라며
더욱이 임진왜난때에 일본으로 건너 갓다는 어떤 노인(90살이 가까운 老人)의 이야기에 「자기 선친이 난리때 일본으로 건너 왓는데 자기는 일본서 나서 고국 구경은 하지도 못하엿다」는 말이 잇는데, 임진왜난은
宣祖大王 24, 5년에 시작되고 宣祖在位41년 光海君在位14년 仁祖在位27년-즉 壬辰後 孝宗前까지는 60년 미만이오 이 이야기(許生傳)는 孝宗初葉이나 中葉의 이야기니(孝宗在位年數는 10년이다), 壬辰난리에 인본으로 간 사람이 나흔 子息이면 아모리 최대한도로 볼 지라도〈266〉 73,4歲이내다. 80歲이상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평범한 年數까지 상고하여 보지 안코 썻스니 다른 점도 얼마나 설치엇는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잇다.

作者가 이 作品을 대하기에 이만치 불충실하엿스니 만치 이야기의 줄기도(한낫 자미잇는 이야기로라도) 너무도 不自然한데가 만타.
許生이 말총貿易을 하려 濟州道로 갓는데, 그 며칠뒤부터는 벌서 제주는 地上樂園으로 변하여, 제주목사는 종사 하나를 바다보지 못하고 東軒에서 파리나 날리고 잇섯다.
그것이 너무도 클클하여 목사는 官屬들을 내보내서 까닭업는 트집을 잡아서 성중 사람들을 노하게 하여 보려고 애쓴다.
관속들이, 혹은 음식을 먹고 일부러 갑슬 안내고 일어서면 섬ㅅ사람들은 「돈이 업나부다. 후일 셈하시오」할 뿐 다투려지 안코 지나가는 사람의 따귀라도 따리면, 「그 냥반 도깝이 들린가부다」하고 피하고 말고, 귀에 담지 못할 욕이라도 하면, 「타관에서 온 사람인가부다 하고 대척치 안코 아모런 행패를 할지라도 성중사람은 송사하려 오는 사람이 업다-. 이 이야기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잇다.
이만치 감화력이 세인 聖人이 어찌 제 안해 하나를 御치 못하엿나. 物慾을 모르고 道通한 이 聖賢의 안해로서는 너무도 物慾세고 俗世的인 惡妻엇다. 許生의 놀라운 感化力으로도 제 妻까지는 감화를 못시컷든가.
뿐 만 아니라 이전에도 누차 말한바와 가치, 春園에게 內在한 矛盾된 두 가지의 感情-汎人類愛主義와 國粹的 帝國主義는 이 許生傳에도 나타나서 「새나라」章에서 그러틋 人類愛를 강조하든 作者가 末尾에서는 許生으로 하여금 강렬한 국수주의자로〈267〉 만들어서 北伐策을 論케 한다.

이 「許生傳」에 잇서서 作者는 許生을 너무도 萬能한 사람으로 만들기때문에 온갓곳에서 不自然感을 느끼지 안흘 수가 업다.
노련한 水夫보다도 더 航海에 밝은 許生이엇다.
許生은 언제 검술을 배왓는지.
「이놈아」하는 우리가튼 소리가 나며 허생의 칼이 번적하며 곰보(惡人)의 손에 잡앗든 칼이 마당에 나가 쟁쟁한 소리를 내며 떠러지고 곰보도 땅에 업드려 허생의 손에 목아지를 눌리고 속절업시(?).

또 許生은 언제 그러케 20世紀 地理를 배왓던지 無人孤島의 所在處까지 다 알엇다.

요컨대 許生傳은 燕岩의 「玉匣夜話」의 一節을 뼈로 삼고 그 우에, 「아라비안 나이트」와 「런빈슨 크룻소」로 살을 만들고 人道主義와 民族主義로 피를 만들은 우에 古代小說型의 옷을 입힌 한 자미잇는-그러나 또한 不自然한 이야기다.
만약 春園으로서 「朝鮮民衆이 理解할 수 잇는 低級物語」를 쓰려는 목적으로 이 「許生傳」을 썻다 하면 그것은 너무 「뒷걸음질」이다. 웨 그러냐 하면 이 「許生傳」보다 훨신 나은 「無情」도 그만치 讀者層에게 환영을 바든 것을 보아서 朝鮮讀者는 「無情」만한 정도면 넉넉히 理解할 수 잇스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誤斷은 아니겟스며.

一說春香傳
「許生傳」을 쓴 뒤에 春園은 다시 「一說春香傳」을
그러나 이것은 型으로 보아서 「許生傳」과 同曲이오 실로 보아서
李海朝의 春香傳의 敷延에 지나지 못한다.
이전에 每日申報에 連載되고 그 뒤에 單行本으로 出版되여 지금까지도 年年 수만부씩 인쇄하는 「獄中花」는 본시 李海朝가 광대(唱劇俳優)들을 불러다가 口述케 하고 그것을 筆記한 것이다.
春園은 이것을 재차 필기한데 지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儒家에게의 四書三經이나 예수敎人에게 바이불이나 일반으로 春園은 이 「獄中花」는 加滅을 허락치 안는 神聖한 글로 보앗던지, 한 장면, 한 行動까지도 모도 原書에 구속되여 一寸一分도 自由로 그 탈을 벗지 못하엿다. 한개의 재담한마듸 넉두리까지라도 加하지도 못하고 減하지도 못하엿다.

웨 이다지도 「獄中花」에 구속되엿는지. 여기는 春園이 作品마다 질겨서 집어 넛는 人道主義며 民族主義며 또는 비장한 기분까지 집어 너흘 줄을 잇고, 조심조심히 前者의 발자욱을 따랏다.

문화적 문학운동
이리하여, 春園은 兩個의 物語를 東亞日報紙上에 揭載하엿다.
조심조심히 썻다. 春園이 上海로 망명하기 이전과 다시 歸國한 뒤의 새에는, 文學的으로 朝鮮의 社會가 너무도 변하엿스므로 여기 질겁한 春園은 자기의 인제 밟을 길로서 「文化的 意味를 가진 文學運動」을 開拓하려고 이러틋 「許生傳」이며 「一說春香傳」의 레벨까지 뒷걸음을 친 것이엇다.
그러나 春園自身으로도 기대하지 안헛든 聲援이 讀者層에서 울리웟다.
「당신의 作을 기다린지 오래다. 목마른 우리에게 그대는 그 윤택잇는 作을 보여다고 乾燥無味한 所謂 文藝들을 보기도 실타.」〈269〉
이러한 聲援聲이 굉연히 독자층에서 울리우기 시작하엿다.
動하기 쉽고 感激키 쉬운 性格의 주인인 春園은 여기 感泣하엿다. 讀者는 아직 내게 잇다 하는 自負心까지 일어낫다. 아직껏 쓸쓸한 마음으로 내버럿든 文學에 대한 자신까지 다시 생겻다.
여기서 일단 내여버렷든 희망을 다시 잡은 春園은 그새 두 편 쓴 低級物語型을 내여 던지기로 하엿다. 다시 小說을 붓하기로 하엿다.
이리하여 붓한 것이 「再生」이다.
그의 世出作 「無情」과 비교하여, 그 技巧에 잇서서 天壤의 차로 進步되엿스나 內容에 잇서서 熱과 情이 減退된 소설로서 「再生」이 東亞日報紙上에 揭載되엿다.

이하 「再生」의 完熟한 技巧와 手凡한 내용을 들처 보기로 하자(續).〈270〉
〈259-270〉

잡지명 삼천리 제7권 제6호
호수 제7권 제6호
발행년월일 1935-07-01
기사제목 春園硏究(七)
필자 金東仁
기사형태 문예평론

再生

발표 당시에 이 「再生」만치 독자의 환영을 바든 작품도 朝鮮에서 드물엇거니와, 발표가 끗 난뒤에 또한 이 「再生」만치 빨리 이치워 버린 작품도 드물 것이다.
이 「再生」이 東亞日報상에 연재될 때에 얼마나 만흔 학생(그중에서도 여학생)이 신문배달부를 마치 情人이나 기두르듯 기두렷스며, 서로 소설의 전개를 토론하며 슬퍼하고 기뻐하엿든가.
그만치 全朝鮮의 청년남녀에게 空前의 환영을 바든 「再生」이 또한 어찌하여 그러틋 일즉이 버림을 바덧는가.
「無情」으로서 初出發을 할 때는
春園에게는 熱과 勇이 잇섯다.
「許生傳」으로 再出發을 할 때는, 겁과 「小心」과 「試驗感」이 잇섯다.
「再生」으로 第3次 出發을 할 때는, 다시 회복한 自信의 우에 「어차피 신문소설이 아니냐」는 무책임한 느낌이 석겻든 모양이다.
붓에 대하여 너무도 무책임하엿든 증거로는 이 소설의 중요인물인 백윤희의 本宅이 첫머리에는 다방골이라 하고 얼마 나려가다가는 (이사도 안하엿는데) 관수동으로<256> 되고 더 나려 가다가는 관철동으로 된 점으로도 알 수가 잇다.

이 소설에는 無情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의 전형적 인물이 등장을 한다.
순영--그는 밋슌·칼레이지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어떤 학교의 가장 전형적 여성이다. 허영심이 꽤 만코, 貞操에 대하여 분명한 관렴을 못 가젓고, 눈이 높고, 그러면서도 판단력과 理智가 결핍된--가장 전형적의 여성이다.
봉구--그는 고지식하고 꽁하고, 여자라는 것을 신성시하는 한개 샌님이다.
김박사--그는 예수교 게통으로 米國을 다녀온 가장 보통형의 인물로서 「지어서 하는 듯한 공순한 태도와 우슴」의 주인이요, 여학생들의 웅덩이를 추근추근이 따라다니는 인물이요 한사람에게 거절을 당하면 즉각으로 제2후보자로 돌아서느니 만치 변통성 조흔--지금 보통 말하는 바 米國博士라면 그 전면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잇는 타입의 인물이다.
백윤희--그는 조선식 「오입쟁이」라면 그 全幅이 설명되는 타입의 인물이다.
이상의 주요인물과 그박게 부속인물 몃며치 석겨서 한개의 비극을 연출한다.
먼저, 己未年 만세통에, 순영이는 그의 옵바와, 옵바의 친구 봉구와 함께, 비밀출판 등을 하다가, 봉구와 옵바는 관헌에 붓들려서 囹圄의 몸이 되고, 순영이는 다시 W학교에서 공부를 한다.
그런데 여기 백윤희라는 부자가 등장을 하여, 순영의 다른 옵바를 가운데 내새워 가지고, 순영이를 자기 손아구에 너흐러 한다.
봉구는 만세통에 순영과 함께 숨어 다니면서 지나든 기억이 사라지지 안허서 옥중에서도 순영만 생각하며 자기 딴에는 순영도 자기만을 생각하고 잇스려니하고 스스로 위로밧고 잇지만 貞洞處女의 대표적 성격을 가진 순영은 지난 시절의 소꼽노리를<257> 그냥 기억하리만치 한가하고 守舊的의 여인이 아니엇다.
어느날 순영의 옵바는 제 누이를 백윤희에게 선보이량으로 순영을 기숙사에서 불러내여서 함께 산보가자고 얼려서 동대문박 백윤희의 별장으로 데리고 갓다.
장안 갑부 백의 별장의 호화로움은 이 허영심만흔 게집애의 마음의 한편 구석을 단단히 두드렷다.
이리하여 순영의 마음에는 「이 세상에는 이러한 호화로운 생활도 잇구나」하는 생각이 자리잡엇다.
그런일이 잇슨 그 해 겨울 방학 때에 또 둘재옵바에게 불리워서, 옵바의 집에 나간 순영은, 옵바를 따라서, 그 밤으로 東萊溫泉으로 갓다. 작자는 이때에 순영의 심리를 조금도 보여주지 안헛지만, (안헛는지 혹은 출판상 착오인지 不明하다. 웨 그러냐하면, ?東書?版 「再生」에는 상편 38, 39의 兩回가 遺落되여 소설의 이야기도 연결이 안된다.) 순영은 필시 자기가 東萊로 가는 사건에 대하여, 무슨 기대를 품엇슬 것이다. 웨그러냐 하면 순영은 자기 둘재 옵바의 爲人을 알며, 그 우에(작자는 역시 그런말은 안하엿지만) 이런 종류의 여학생으로서는, 백윤희에게 대하여 자존심상으로라도 자기를 다시 차즐 것을 분명히 밋고 잇섯슬터이니까.
그러니까, 자기의 東萊行에 대하여 어떤 정도까지의(恐怖석긴) 희망이라도 품고 잇섯슬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東萊는 백윤희가 먼저 가 잇섯다. 그날밤 순영은 백윤희에게 정조를 빼앗겻다. 그러고 그 이튼날로 도로 학교 기숙사로 도망하여왓다.
이리하여 다시 종교학교의 기숙사안에서 외양뿐은 경건한 생활을 거듭하고 잇슬 때에 난데업는 密告狀이 학교당국자에게 뛰처 들엇다. 즉 순영은 백윤희와 東萊溫泉에서 情交를 매젓다는 사건에 대한 밀고엇다.<258>
순영은 딱 잡아 떼엿다. 그런일이 업노라 하엿다. 본시 신용밧든 순영이라 순영의 말이 서기는 섯다.
이리하여 학교의 의심은 풀어 노핫지만 순영의 마음에는 다시 파도가 일엇다.
인전 자기는 깨끗한 사람이 못 된다는 생각이 통절히 가슴에 서리엇다.
여름 방학.
순영은 또 옵바의 집으로 나왓다. 나오고 보니, 세상은 기숙사보다 넓고 자유로웟다. 옵바는 이번은 노골적으로, 「백이 원산 별장에서 기다리니 그리로 가자」고 달랫다. 순영은 「불떵어리가치 뜨거운 살이 그립고 힘잇게 자기를 꽉 껴안던 두팔이 그리워 지어서」 옵바를 따라서 원산으로 갓다. 원산서는 50여 일을 백윤희와 내노코 夫妻生活을 하엿다. 그동안에 술도 먹어 보앗고 담배도 뱃다. 그러고 방학이 끗나서 다시 기숙사로 돌아 왓다.

그날밤 11시 차에는 해수욕장에 왓던 손님들이 만히 탓다. 순영은 아는 서양인과 조선사람을 만히 만낫다. 그러나 조금도 꺼림업시,
「용서하서요. 나는 몸이 곤해서」
하고 침대로 들어가고 말엇다.

50일간에 순영은 이만치 변하엿다.

그러는 동안에 그해 가을에, 감옥에 들어갓든 봉구가 나왓다. 감옥에서 몃해 오로지 순영만 그리든 봉구는 출옥하자 곳 순영에게 편지를 하엿다. 그러나 순영은 회답도 안하엿다. 안하는 동안 비로소, 봉구가 자기를 그러틋 사랑하든 것을 알엇다.<259>
그러고 이 허영의 여인은 번민하엿다. 번민이라야, 인생으로서의 번민이 아니라, 「백에게 갈까」 「봉구에게 갈까」하는, 양손의 떡格의 번민이엇다.
이러다가 봉구를 충동하여 봉구에게 돈 500원을 만들게 하고 둘이서 釋王寺로 놀러갓다.

「깃브시어요!」하고 순영은 봉구의 억개에 기댄다.
「네」 봉구는 퍽 슴겁게 대답하엿다고 혼자 낫츨 붉히엇다.
「저도 깃버요. 미스터 신이 그러케 저를 사랑해 주시니깐 깃버요. 저를 오래오래 사랑해 주세요.」
「오래오래?」
「네, 오래 오래 아주 오래」
「...」
「그러시지요? 그런다고 그러세요! 네. ?」

이 교사한 여인은 자기의 허물을 감쪽가치 감초고, 천진한 청년과 함께 淫樂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순진한 청년 봉구는 이 淫女를 그래도 잔뜩 밋기 때문에, 아모 의심도 업시, 기쁜 마음으로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런데 釋王寺에서는 의외의 일이 돌발한다. 즉, 순영과 白의 관게를 아는 「선주」라는 여인이 나서서, 무심코 순영에게(봉구와 동반햇슬 때) 향하여, 금년 여름 원산서 애기나 배지 안헛느냐는 인사를 한다.
이리하여 봉구의 마음에 형언할 수 업는 불낄이 일어낫슬 때에, 순영은 어떤 태도를 취하엿나? 그는 변명치 안헛다. 단지 자기 左手無名指를 이빨로 딱하니 깨물서<260> 거기서 흐르는 선혈로 「永遠不變」이라 쓰고 울 뿐이엇다.
이 수단의 효과는 다시 말할 것도 업다. 봉구는 다시 詰難하지도 못하고, 「내가 잘못햇소이다」고 女神前에 사죄를 하엿다.
그러고 이 여행 중에, 순영은 봉구라는 인물에게 대하여 비로서 戀愛를 느꼈다. 그 순진함이 마음에 푹푹 백이엇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여행서 돌아와서 한달 미만에 백부자에게 시집(妾으로)을 가버렷다. 그런데 시집을 가기 전날 순영은 이전 釋王寺갈땟 費用 기타의 500원을 곱다라케 봉구에게 返送하엿다. 즉 순영에게 잇서는 그 500원만 도로 주면 봉구에게는 아모 의무감도 느끼지 안는 것이엇다.

이리하여 이 소설의 무대는 두 곳으로 갈라진다. 서울 東大門박 백부자의 별장의 美花 순영은 기픈 안방에서 봉구가 詰難하려 올까바 전전긍긍히 지난다.
그러는 동안 봉구는 저 늙은 홀어머니를 버려두고 서울서 자최를 감춘다. 그가 (이하 2줄 판독불능) 빼앗은 봉구는 자기도 부자가 되여 자기를 차버린 애인을 도라볼 마음으로 그곳에 간 것이엇다.
春園이 이런 境遇의 잇서서 흔히 주인공으로 하여금 **한 **** *****을 取케 하는 것이 상투수법이엇는데 여기서 그 悲**을 버리고 가장 *** ***分店으로 가게 한것을 春園은 後日 後悔햇슬넌지도 모른다. 웨그러냐 하면 이 소설의 말미에서 봉구로 하여금 취하게 한 입장은, 우에 말한 그런 道程을 밟은 뒤에야 더 적절하겟스매...
그러나 鑑償者側으로 보자면 이 발전은 가장 자연스런 것이다. 봉구와 가튼 성격의<261> 사람이 그런 경우를 당하면 그 길(仲介店店員)을 밟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리하여 얼마 仲介店에 잇는 동안에 봉구는 주인의 신임을 엇고, 주인의 家庭內事까지 도마타 보게 된다.
그 仲介店 金氏집 가정내막을 보면. 주인 김씨는 단지 好人이라는 一語로 끗날 사람이며 전처소생 맛아들 「경훈」은 東京서 공부를 하는 학생인데 爲人이 좀 부족하게 생겻고, 소박덕이 맛딸(역시 전처소생)이 잇고 작은 딸(지금 안해 소생) 경주도 좀 부족한 편인데 W녀학교 통학중이며,
「경훈은 사랑골방에 잇는 금고를 엿보고 경주어머니는 안방 금고를 엿보고 시흥집(맛딸)은 거기서 떠러지는 부시러기를 엿보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봉구는 주인 金氏내외의 신임을 사고. 작은 딸 경주의 짝사랑을 밧고 잇다. 그러나 金色夜叉의 貫一과 가치 오로지 金錢만 연인으로 생각하고 잇고 그우에 자기를 차 던진 순영에게의 愛着을 그냥 이즐수 업는 봉구는 경주의 사랑 따위는 알지도 못하고 잇섯다.

그러는 동안에 순영의 남편 白富者도 月尾島에 놀너왓다가 이 金氏에게 米豆를 하려고 10萬石팔기를 주문하엿는데 그 證據金 20만원을 바더 가라는데 그것을 바다올 역할을 봉구가 지게 되엿다. 봉구는 이 寄綠을 통절히 느끼면서 20만원을 바다오려 月尾島로 갓다.
여기서 작자의 붓은 조금 지나처서 月尾島에서 봉구로 하여금 여관 하녀가 애기수레에 모시고 잇는 애기를 걸핏보고.
「꼭 나로구나」
하고 소리를 지르고, 그 애기가 자기와 순영과의 아이라 단정을 하게 하엿다. 生後<262> 2개월여의 어린애에게 능히 아모 예비지식도 업시 이만한 판단을 어떠케 나릴까.

여기서부터 이 소설은 차차 복잡하여 진다. 金氏의 맛아들 경훈은 좀 덜난데가 어떤 사상단체에게 이용되여 자기 아버지에게서 돈 30만원을 흠처내려고 늘 벼르든 중이다. 그러고 이날 봉구가 月尾島로 간날이 그 약속한 최후 기한이다. 그날까지 30만원을 변통치 못하면 피살당할 줄 밋고 잇다.
그날 白富者에게 20만원을 바다가지고 돌아온 봉구는 그돈을 주인에게 전할까하엿스나 불행히 주인을 만나지 못하여 그냥 잇든 중, 밤9시경에 의외에 순영의 방문을 바덧다.
순영은 봉구가 제남편에게 왓다 간 것을 알고 이즈음 차차 봉구가 그리워 오든 차에 봉구생각이 심하여, 봉구에게 용서함을 빌려 차자 온것이엇다. 그러나 마음이 뾰롱한 봉구는 마음으로는 통곡을 하엿스나 표면 끗끗내 냉담하게 순영을 돌려 보냇다.
그동안에 金氏집에서는 좀 덜난 위인 경훈이 돈을 빼아스량으로 제 아버지를 권총으로 죽인다.
그 혐의는 즉시로 봉구에게 씨어진다. 이리하여 봉구는 主人殺害犯으로 잡히워 가고, 그 봉구를 응호한 죄로서 경주도 공범으로 잡혀 간다.

여기서 이 소설은 상편이 끗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상반부와 하반부를 나누어서 말할 필요가 잇다. 상반부를 쓰고 春園은 병이 심하여 그의 肺를 하나 잘라내지 안흘 수가 업섯다.<263>
이 大手術때문에 생명의 위험까지 바닷지만 다행히 경과가 양호하여 다시 定人이 되게 되엿다. 그러나 수술때문에 소설을 오래동안 신문지상에서 끈켯고, 건강이 회복된 뒤에야 다시 집필을 하엿다.

춘원의 전 작품을 통하여 이 再生 上篇만치 기교에 잇서서 완전한 자가 업다. 거기는 白부자의 집이 茶屋*이 되엿다 관수동이 되엿다 한 喜劇은 잇지만, 그 외에는 일점의 나므럴데가 업는 者다.
플릿트를 꾸미는데 잇서서 너무도 흥미 일방으로 만든 것과 취급된 문제가 너무도 金色夜叉식이기 때문에, 통속소설의 비방은 면치 못하겟지만, 기교에, 잇서서는 만점이엇다.
이 소설은 하편이 씨어지기 때문에 전편을 망처버렷다.

下篇에서는 어떠케 되엿나.
이 성격의 사람이면 이러케 진전되여야 하겟다는 점을 하편에서는 무시하엿다.
상편에서도 말한 바와 가치, 봉구가 國士的 *分으로 해외로 탈출치 안코, 주식중개점 점원으로 취직한 등으로 성격을 주요시한 것이 분명하지만, 하편에서는 성격을 무시하고 事件을 만들엇다.
선영, 봉구, 백윤희, 경주, 등 몃 사람이 登場하여 전개될 場面은 「再生下篇」과는 다를 것이다. 하편에 잇서서는 이 소설전체를 新派 비극적 결말을 맷게하기 위하여 旣製의 코-쓰에 억지로 인물들을 끄을고 다녓다.
다시 말하자면, 작자는 「이 인물들이면 이러케 전개되리라」는 필연적 코-쓰를 취하지 안코, 新派 비극식의 코-쓰를 만들어 노흔 뒤에 인물들을 억지로 그리로 몰아너<264>
그런지라 하편에 잇서서는 등장인물들은 제 성격에 맛지 안는 코-쓰를 가노라고 그야말로 작자의 채쭉에 몰려서 허덕허덕 쫏겨 다닌다.

이 하편의 코-쓰는, 작자가 본시 「再生」을 쓰려고 시작할 때의 企圖는 결코 아니리라.
題名부터가 再生인 이상에는 종말에 잇서서 무슨 「再生」적 사건이 생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종말에서는 여주인공 선영은 九龍淵 물에서 비참한 최후를 보앗스며 남주인공 봉구는 마음에 업는 생활을 自暴的 기분으로 「사회나 위하여 바치자.」고 自己?牲적 심경으로 취하엿스니, 거기 무슨 「재생」이 잇스랴.
東亞日報 紙上에 揭載 당시에 그러틋 환영밧고 끗난 뒤에 그러틋 빨리 이치운 연유도 여기잇다. 新派 비극적 사건의 매력에 끄을렷든 것이오 新派 비극적 安價의 매력이기 때문에 長續性이 업는 것이다.
그 하편을 이하 보기로 하자.

살인범으로 잡혀간 봉구는 어떠한 심문에도 입을 봉하고 대답지 안는다. 그야말로 자기의 이름이 봉구인 것과 가치 封口이다. 봉구의 성격으로는 함직한 일이다. 영웅감으로라도 그랫슬 것이며, 厭世的 자폭기분으로도 그랫슬 것이다.
그러고, 이 침묵은 法廷上의 봉구의 立장을 매우 나쁘게 한다.
그런데, 순영은, 이때문에, 매우 마음을 썻다. 여기는 작자의 말 一節이 가장 이때의 순영을 잘 설명할 것이다. 가르되
「순영으로 하여금 이러케 맘의 아픔을 깨닷게 한 것은, 물론 백에게(남편) 대한 불만도<265>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큰 것은 어린애를 나흠으로 하야서 생긴 정신의 변통이다.」
이때에 순영을 위로하여 주기 위하여 인순이라는 여성이 등장을 한다. 순영의 동창선배요 기숙사 시대의 지도자엇다. 그러고 이런 타입의 여성은 春園이 질겨서 작품상에 등장을 시키나니 無情에 잇서서 김병욱」 이와 한 타입의 여성으로서 理智 意志 主張 道德觀 戀愛觀 등이 非常이 밝고 活潑性과 親切性이 풍부하며 그 우에 또한 교만치는 안흐면서도 「朝鮮내에서는 결혼할 만한 상대자를 발견하지 못하는」종류의 여성이다. 그러고 그 인순과 순영의 대화도 「無情」의 어떤 장면과는 너무도 갓다.
「-왼세게 사람이 누구는 행복을 안 구하니? 하지만 정말 행복을 어든 사람이야 며치나 되나? 웨 그래? 웨 다들 행복이 못 돼? 너는 웨 괴로워 해? 안 그러냐?」
「그래」하고 순영은 고개를 숙엿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이 무에요?」
「남을 행복되게 하도록 힘쓰는 것이지. 말하면 의와 그 나라를 구하는 것이지!」
「의와 그 나라?」
「웨?」
「내게는 너무도 놉구려--」
이리하여 인순의 壓力에 끌리는 순영은 병욱의 壓力에 끌리는 영채와 지독히도 갓다.
이리하여 순영은, 봉구의 공판이 마음에 안 노히여 구경을 갓다. 그런데 거기서 순영은 무엇을 보앗나?
봉구의 共犯으로 잡힌 경주(피해자의 작은 딸)가, 그 좀 어리석은 정신을 가지고도, 赤心을 다하여 봉구를 사랑하고, 봉구를 위해서는 아모런 ?牲을 하여서라도 봉구만 放免되기를 애쓰는 놀라운 사랑--아직 이 순영따위의 여자는 전설상의 연애로박게는<266> 생각치 안튼 거대한 연애를 보앗다.
여기 감동된 순영이 또 한가지 본 바는 이 함구불언하는 봉구의 입장이 구해내기 매우 어려우나 단 한가지 일만 辯明되면 봉구에게 걸린 혐의도 업서지겟다는 점이다. 즉 그 慘變이 잇슨 시각(오후 9시부터 10시 반까지)에 봉구의 알리바이가 증명되면 봉구를 넉넉히 구하겟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각에는 봉구는 자기旅?에서 순영과 함께 잇섯다. 이것을 증명할 자는 순영박게 업다.
순영은 법정에 일어서서, 그것을 변명하엿다.
一時的 흥분과 감동으로 법정에서 큰일을 저즐러는 노핫다. 그러나, 이 여인의 虛榮心과 경박성이 그러틋 쉽게 사라질 수가 업다. 그는 다시 自暴的 기분으로 東大門 박, 제 남편의 집으로 돌아왓다. 그런데, 의외에도, 尹辯護士 내외가 와서 백부자에게 아까 법정에서의 순영의 행동을 칭찬한다. 즉 능청스럽게 꾸며 대기 때문에, 재판장의 마음도 음지기여, 被告가 유리하게 됏습니다. 참 어쩌면 그러틋 機智가 만흐시오!」하는 것이엇다.
이리하여 재판소 사건은 유야무야중에 업서저 버린다. 남편도 그다지 의심을 안하게 된다. 그러고 이 경박한 여인은,

「내가 웨」하고 순영은 스스로 자기의 말을 책망하엿다.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안는가. 그 남편을 사랑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내 「의무」가 아닐까? 어린애(봉구와의 새에 나흔 그러나 표면은 白氏의 아이)는? 누가 알길내? 나 박게 누가 알기래. 그러타. 자기는 이 집을 떠나지 안는 것이 조타.」

이러케 생각하고 안심하고, 도로혀 남편이 자기를 의심할 것을 근심한다. 수일 후 檢事局에<267> 불리운 그는 이전 공판정에서의 공술을 전면으로 否認하여 버렷다.
이리하여 봉구의 사건은 유리하게 전개될 듯 하다가, 다시 떠러저 버린다.
그러나 봉구는 그런 것은 모른다. 자기가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또한 지극히 미워하든 순영이가 공판정에서 그러틋 자기를 변명하여준 일에 대하여 感泣할 뿐이다.
판결은 나렷다. 봉구는 사형.
여기서 작자의 붓은 外道로 버덧다.
이 사형판결에 대하여 봉구는 맹렬히 生의 執着을 느꼇서야 할 것이다. 일즉이 순영을 굽어 보기 위하여 取引仲介店으도 달아낫든 만치 凡人인 鳳九는 여기서 사랑하든 순영의 悔心까지 보앗는 지라 무엇보다도, 生을 가장 바랫서야 할 것이다. 하로밧비 세상에 나가서 다시 순영을 품에 안고 즐겁게 살 날을 생각하며 「살려 살려」 애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春園의 悲壯癖은 이 男주인공으로 하여금 悲壯한 코-쓰를 밟게하기 위하여 성격을 무시하고 外道를 밟게 하엿다, 여기서 봉구는 한 희극적 영웅으로 변한다.
「죽음 무엇이냐.」
이러한 悲壯한 영웅감으로 봉구는 공소도 하지 안코 묵묵히 사형의 날을 기두렷다.
「윤변호사에게는 봉구의 이러한 심리는 알 수 업는 것 중에 하나엇다, 사람이란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조흔 것. 云云」
하엿지만 이 심리는 尹辯護士 뿐 아니고 왼 讀者도 이해치 못할 자다. 작자 자신도 이해치 못할 것이다. 단지 작자의 旣定 코-쓰에 봉구를 억지로 끄을어 온 뿐이엇다.
-(續)-<268>
<256-268>

잡지명 삼천리 제7권 제6호
호수 제7권 제6호
발행년월일 1935-07-01
기사제목 春園硏究(七)
필자 金東仁
기사형태 문예평론

再生

발표 당시에 이 「再生」만치 독자의 환영을 바든 작품도 朝鮮에서 드물엇거니와, 발표가 끗 난뒤에 또한 이 「再生」만치 빨리 이치워 버린 작품도 드물 것이다.
이 「再生」이 東亞日報상에 연재될 때에 얼마나 만흔 학생(그중에서도 여학생)이 신문배달부를 마치 情人이나 기두르듯 기두렷스며, 서로 소설의 전개를 토론하며 슬퍼하고 기뻐하엿든가.
그만치 全朝鮮의 청년남녀에게 空前의 환영을 바든 「再生」이 또한 어찌하여 그러틋 일즉이 버림을 바덧는가.
「無情」으로서 初出發을 할 때는
春園에게는 熱과 勇이 잇섯다.
「許生傳」으로 再出發을 할 때는, 겁과 「小心」과 「試驗感」이 잇섯다.
「再生」으로 第3次 出發을 할 때는, 다시 회복한 自信의 우에 「어차피 신문소설이 아니냐」는 무책임한 느낌이 석겻든 모양이다.
붓에 대하여 너무도 무책임하엿든 증거로는 이 소설의 중요인물인 백윤희의 本宅이 첫머리에는 다방골이라 하고 얼마 나려가다가는 (이사도 안하엿는데) 관수동으로<256> 되고 더 나려 가다가는 관철동으로 된 점으로도 알 수가 잇다.

이 소설에는 無情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의 전형적 인물이 등장을 한다.
순영--그는 밋슌·칼레이지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어떤 학교의 가장 전형적 여성이다. 허영심이 꽤 만코, 貞操에 대하여 분명한 관렴을 못 가젓고, 눈이 높고, 그러면서도 판단력과 理智가 결핍된--가장 전형적의 여성이다.
봉구--그는 고지식하고 꽁하고, 여자라는 것을 신성시하는 한개 샌님이다.
김박사--그는 예수교 게통으로 米國을 다녀온 가장 보통형의 인물로서 「지어서 하는 듯한 공순한 태도와 우슴」의 주인이요, 여학생들의 웅덩이를 추근추근이 따라다니는 인물이요 한사람에게 거절을 당하면 즉각으로 제2후보자로 돌아서느니 만치 변통성 조흔--지금 보통 말하는 바 米國博士라면 그 전면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잇는 타입의 인물이다.
백윤희--그는 조선식 「오입쟁이」라면 그 全幅이 설명되는 타입의 인물이다.
이상의 주요인물과 그박게 부속인물 몃며치 석겨서 한개의 비극을 연출한다.
먼저, 己未年 만세통에, 순영이는 그의 옵바와, 옵바의 친구 봉구와 함께, 비밀출판 등을 하다가, 봉구와 옵바는 관헌에 붓들려서 囹圄의 몸이 되고, 순영이는 다시 W학교에서 공부를 한다.
그런데 여기 백윤희라는 부자가 등장을 하여, 순영의 다른 옵바를 가운데 내새워 가지고, 순영이를 자기 손아구에 너흐러 한다.
봉구는 만세통에 순영과 함께 숨어 다니면서 지나든 기억이 사라지지 안허서 옥중에서도 순영만 생각하며 자기 딴에는 순영도 자기만을 생각하고 잇스려니하고 스스로 위로밧고 잇지만 貞洞處女의 대표적 성격을 가진 순영은 지난 시절의 소꼽노리를<257> 그냥 기억하리만치 한가하고 守舊的의 여인이 아니엇다.
어느날 순영의 옵바는 제 누이를 백윤희에게 선보이량으로 순영을 기숙사에서 불러내여서 함께 산보가자고 얼려서 동대문박 백윤희의 별장으로 데리고 갓다.
장안 갑부 백의 별장의 호화로움은 이 허영심만흔 게집애의 마음의 한편 구석을 단단히 두드렷다.
이리하여 순영의 마음에는 「이 세상에는 이러한 호화로운 생활도 잇구나」하는 생각이 자리잡엇다.
그런일이 잇슨 그 해 겨울 방학 때에 또 둘재옵바에게 불리워서, 옵바의 집에 나간 순영은, 옵바를 따라서, 그 밤으로 東萊溫泉으로 갓다. 작자는 이때에 순영의 심리를 조금도 보여주지 안헛지만, (안헛는지 혹은 출판상 착오인지 不明하다. 웨 그러냐하면, ?東書?版 「再生」에는 상편 38, 39의 兩回가 遺落되여 소설의 이야기도 연결이 안된다.) 순영은 필시 자기가 東萊로 가는 사건에 대하여, 무슨 기대를 품엇슬 것이다. 웨그러냐 하면 순영은 자기 둘재 옵바의 爲人을 알며, 그 우에(작자는 역시 그런말은 안하엿지만) 이런 종류의 여학생으로서는, 백윤희에게 대하여 자존심상으로라도 자기를 다시 차즐 것을 분명히 밋고 잇섯슬터이니까.
그러니까, 자기의 東萊行에 대하여 어떤 정도까지의(恐怖석긴) 희망이라도 품고 잇섯슬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東萊는 백윤희가 먼저 가 잇섯다. 그날밤 순영은 백윤희에게 정조를 빼앗겻다. 그러고 그 이튼날로 도로 학교 기숙사로 도망하여왓다.
이리하여 다시 종교학교의 기숙사안에서 외양뿐은 경건한 생활을 거듭하고 잇슬 때에 난데업는 密告狀이 학교당국자에게 뛰처 들엇다. 즉 순영은 백윤희와 東萊溫泉에서 情交를 매젓다는 사건에 대한 밀고엇다.<258>
순영은 딱 잡아 떼엿다. 그런일이 업노라 하엿다. 본시 신용밧든 순영이라 순영의 말이 서기는 섯다.
이리하여 학교의 의심은 풀어 노핫지만 순영의 마음에는 다시 파도가 일엇다.
인전 자기는 깨끗한 사람이 못 된다는 생각이 통절히 가슴에 서리엇다.
여름 방학.
순영은 또 옵바의 집으로 나왓다. 나오고 보니, 세상은 기숙사보다 넓고 자유로웟다. 옵바는 이번은 노골적으로, 「백이 원산 별장에서 기다리니 그리로 가자」고 달랫다. 순영은 「불떵어리가치 뜨거운 살이 그립고 힘잇게 자기를 꽉 껴안던 두팔이 그리워 지어서」 옵바를 따라서 원산으로 갓다. 원산서는 50여 일을 백윤희와 내노코 夫妻生活을 하엿다. 그동안에 술도 먹어 보앗고 담배도 뱃다. 그러고 방학이 끗나서 다시 기숙사로 돌아 왓다.

그날밤 11시 차에는 해수욕장에 왓던 손님들이 만히 탓다. 순영은 아는 서양인과 조선사람을 만히 만낫다. 그러나 조금도 꺼림업시,
「용서하서요. 나는 몸이 곤해서」
하고 침대로 들어가고 말엇다.

50일간에 순영은 이만치 변하엿다.

그러는 동안에 그해 가을에, 감옥에 들어갓든 봉구가 나왓다. 감옥에서 몃해 오로지 순영만 그리든 봉구는 출옥하자 곳 순영에게 편지를 하엿다. 그러나 순영은 회답도 안하엿다. 안하는 동안 비로소, 봉구가 자기를 그러틋 사랑하든 것을 알엇다.<259>
그러고 이 허영의 여인은 번민하엿다. 번민이라야, 인생으로서의 번민이 아니라, 「백에게 갈까」 「봉구에게 갈까」하는, 양손의 떡格의 번민이엇다.
이러다가 봉구를 충동하여 봉구에게 돈 500원을 만들게 하고 둘이서 釋王寺로 놀러갓다.

「깃브시어요!」하고 순영은 봉구의 억개에 기댄다.
「네」 봉구는 퍽 슴겁게 대답하엿다고 혼자 낫츨 붉히엇다.
「저도 깃버요. 미스터 신이 그러케 저를 사랑해 주시니깐 깃버요. 저를 오래오래 사랑해 주세요.」
「오래오래?」
「네, 오래 오래 아주 오래」
「...」
「그러시지요? 그런다고 그러세요! 네. ?」

이 교사한 여인은 자기의 허물을 감쪽가치 감초고, 천진한 청년과 함께 淫樂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순진한 청년 봉구는 이 淫女를 그래도 잔뜩 밋기 때문에, 아모 의심도 업시, 기쁜 마음으로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런데 釋王寺에서는 의외의 일이 돌발한다. 즉, 순영과 白의 관게를 아는 「선주」라는 여인이 나서서, 무심코 순영에게(봉구와 동반햇슬 때) 향하여, 금년 여름 원산서 애기나 배지 안헛느냐는 인사를 한다.
이리하여 봉구의 마음에 형언할 수 업는 불낄이 일어낫슬 때에, 순영은 어떤 태도를 취하엿나? 그는 변명치 안헛다. 단지 자기 左手無名指를 이빨로 딱하니 깨물서<260> 거기서 흐르는 선혈로 「永遠不變」이라 쓰고 울 뿐이엇다.
이 수단의 효과는 다시 말할 것도 업다. 봉구는 다시 詰難하지도 못하고, 「내가 잘못햇소이다」고 女神前에 사죄를 하엿다.
그러고 이 여행 중에, 순영은 봉구라는 인물에게 대하여 비로서 戀愛를 느꼈다. 그 순진함이 마음에 푹푹 백이엇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여행서 돌아와서 한달 미만에 백부자에게 시집(妾으로)을 가버렷다. 그런데 시집을 가기 전날 순영은 이전 釋王寺갈땟 費用 기타의 500원을 곱다라케 봉구에게 返送하엿다. 즉 순영에게 잇서는 그 500원만 도로 주면 봉구에게는 아모 의무감도 느끼지 안는 것이엇다.

이리하여 이 소설의 무대는 두 곳으로 갈라진다. 서울 東大門박 백부자의 별장의 美花 순영은 기픈 안방에서 봉구가 詰難하려 올까바 전전긍긍히 지난다.
그러는 동안 봉구는 저 늙은 홀어머니를 버려두고 서울서 자최를 감춘다. 그가 (이하 2줄 판독불능) 빼앗은 봉구는 자기도 부자가 되여 자기를 차버린 애인을 도라볼 마음으로 그곳에 간 것이엇다.
春園이 이런 境遇의 잇서서 흔히 주인공으로 하여금 **한 **** *****을 取케 하는 것이 상투수법이엇는데 여기서 그 悲**을 버리고 가장 *** ***分店으로 가게 한것을 春園은 後日 後悔햇슬넌지도 모른다. 웨그러냐 하면 이 소설의 말미에서 봉구로 하여금 취하게 한 입장은, 우에 말한 그런 道程을 밟은 뒤에야 더 적절하겟스매...
그러나 鑑償者側으로 보자면 이 발전은 가장 자연스런 것이다. 봉구와 가튼 성격의<261> 사람이 그런 경우를 당하면 그 길(仲介店店員)을 밟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리하여 얼마 仲介店에 잇는 동안에 봉구는 주인의 신임을 엇고, 주인의 家庭內事까지 도마타 보게 된다.
그 仲介店 金氏집 가정내막을 보면. 주인 김씨는 단지 好人이라는 一語로 끗날 사람이며 전처소생 맛아들 「경훈」은 東京서 공부를 하는 학생인데 爲人이 좀 부족하게 생겻고, 소박덕이 맛딸(역시 전처소생)이 잇고 작은 딸(지금 안해 소생) 경주도 좀 부족한 편인데 W녀학교 통학중이며,
「경훈은 사랑골방에 잇는 금고를 엿보고 경주어머니는 안방 금고를 엿보고 시흥집(맛딸)은 거기서 떠러지는 부시러기를 엿보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봉구는 주인 金氏내외의 신임을 사고. 작은 딸 경주의 짝사랑을 밧고 잇다. 그러나 金色夜叉의 貫一과 가치 오로지 金錢만 연인으로 생각하고 잇고 그우에 자기를 차 던진 순영에게의 愛着을 그냥 이즐수 업는 봉구는 경주의 사랑 따위는 알지도 못하고 잇섯다.

그러는 동안에 순영의 남편 白富者도 月尾島에 놀너왓다가 이 金氏에게 米豆를 하려고 10萬石팔기를 주문하엿는데 그 證據金 20만원을 바더 가라는데 그것을 바다올 역할을 봉구가 지게 되엿다. 봉구는 이 寄綠을 통절히 느끼면서 20만원을 바다오려 月尾島로 갓다.
여기서 작자의 붓은 조금 지나처서 月尾島에서 봉구로 하여금 여관 하녀가 애기수레에 모시고 잇는 애기를 걸핏보고.
「꼭 나로구나」
하고 소리를 지르고, 그 애기가 자기와 순영과의 아이라 단정을 하게 하엿다. 生後<262> 2개월여의 어린애에게 능히 아모 예비지식도 업시 이만한 판단을 어떠케 나릴까.

여기서부터 이 소설은 차차 복잡하여 진다. 金氏의 맛아들 경훈은 좀 덜난데가 어떤 사상단체에게 이용되여 자기 아버지에게서 돈 30만원을 흠처내려고 늘 벼르든 중이다. 그러고 이날 봉구가 月尾島로 간날이 그 약속한 최후 기한이다. 그날까지 30만원을 변통치 못하면 피살당할 줄 밋고 잇다.
그날 白富者에게 20만원을 바다가지고 돌아온 봉구는 그돈을 주인에게 전할까하엿스나 불행히 주인을 만나지 못하여 그냥 잇든 중, 밤9시경에 의외에 순영의 방문을 바덧다.
순영은 봉구가 제남편에게 왓다 간 것을 알고 이즈음 차차 봉구가 그리워 오든 차에 봉구생각이 심하여, 봉구에게 용서함을 빌려 차자 온것이엇다. 그러나 마음이 뾰롱한 봉구는 마음으로는 통곡을 하엿스나 표면 끗끗내 냉담하게 순영을 돌려 보냇다.
그동안에 金氏집에서는 좀 덜난 위인 경훈이 돈을 빼아스량으로 제 아버지를 권총으로 죽인다.
그 혐의는 즉시로 봉구에게 씨어진다. 이리하여 봉구는 主人殺害犯으로 잡히워 가고, 그 봉구를 응호한 죄로서 경주도 공범으로 잡혀 간다.

여기서 이 소설은 상편이 끗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상반부와 하반부를 나누어서 말할 필요가 잇다. 상반부를 쓰고 春園은 병이 심하여 그의 肺를 하나 잘라내지 안흘 수가 업섯다.<263>
이 大手術때문에 생명의 위험까지 바닷지만 다행히 경과가 양호하여 다시 定人이 되게 되엿다. 그러나 수술때문에 소설을 오래동안 신문지상에서 끈켯고, 건강이 회복된 뒤에야 다시 집필을 하엿다.

춘원의 전 작품을 통하여 이 再生 上篇만치 기교에 잇서서 완전한 자가 업다. 거기는 白부자의 집이 茶屋*이 되엿다 관수동이 되엿다 한 喜劇은 잇지만, 그 외에는 일점의 나므럴데가 업는 者다.
플릿트를 꾸미는데 잇서서 너무도 흥미 일방으로 만든 것과 취급된 문제가 너무도 金色夜叉식이기 때문에, 통속소설의 비방은 면치 못하겟지만, 기교에, 잇서서는 만점이엇다.
이 소설은 하편이 씨어지기 때문에 전편을 망처버렷다.

下篇에서는 어떠케 되엿나.
이 성격의 사람이면 이러케 진전되여야 하겟다는 점을 하편에서는 무시하엿다.
상편에서도 말한 바와 가치, 봉구가 國士的 *分으로 해외로 탈출치 안코, 주식중개점 점원으로 취직한 등으로 성격을 주요시한 것이 분명하지만, 하편에서는 성격을 무시하고 事件을 만들엇다.
선영, 봉구, 백윤희, 경주, 등 몃 사람이 登場하여 전개될 場面은 「再生下篇」과는 다를 것이다. 하편에 잇서서는 이 소설전체를 新派 비극적 결말을 맷게하기 위하여 旣製의 코-쓰에 억지로 인물들을 끄을고 다녓다.
다시 말하자면, 작자는 「이 인물들이면 이러케 전개되리라」는 필연적 코-쓰를 취하지 안코, 新派 비극식의 코-쓰를 만들어 노흔 뒤에 인물들을 억지로 그리로 몰아너<264>
그런지라 하편에 잇서서는 등장인물들은 제 성격에 맛지 안는 코-쓰를 가노라고 그야말로 작자의 채쭉에 몰려서 허덕허덕 쫏겨 다닌다.

이 하편의 코-쓰는, 작자가 본시 「再生」을 쓰려고 시작할 때의 企圖는 결코 아니리라.
題名부터가 再生인 이상에는 종말에 잇서서 무슨 「再生」적 사건이 생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종말에서는 여주인공 선영은 九龍淵 물에서 비참한 최후를 보앗스며 남주인공 봉구는 마음에 업는 생활을 自暴的 기분으로 「사회나 위하여 바치자.」고 自己?牲적 심경으로 취하엿스니, 거기 무슨 「재생」이 잇스랴.
東亞日報 紙上에 揭載 당시에 그러틋 환영밧고 끗난 뒤에 그러틋 빨리 이치운 연유도 여기잇다. 新派 비극적 사건의 매력에 끄을렷든 것이오 新派 비극적 安價의 매력이기 때문에 長續性이 업는 것이다.
그 하편을 이하 보기로 하자.

살인범으로 잡혀간 봉구는 어떠한 심문에도 입을 봉하고 대답지 안는다. 그야말로 자기의 이름이 봉구인 것과 가치 封口이다. 봉구의 성격으로는 함직한 일이다. 영웅감으로라도 그랫슬 것이며, 厭世的 자폭기분으로도 그랫슬 것이다.
그러고, 이 침묵은 法廷上의 봉구의 立장을 매우 나쁘게 한다.
그런데, 순영은, 이때문에, 매우 마음을 썻다. 여기는 작자의 말 一節이 가장 이때의 순영을 잘 설명할 것이다. 가르되
「순영으로 하여금 이러케 맘의 아픔을 깨닷게 한 것은, 물론 백에게(남편) 대한 불만도<265>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큰 것은 어린애를 나흠으로 하야서 생긴 정신의 변통이다.」
이때에 순영을 위로하여 주기 위하여 인순이라는 여성이 등장을 한다. 순영의 동창선배요 기숙사 시대의 지도자엇다. 그러고 이런 타입의 여성은 春園이 질겨서 작품상에 등장을 시키나니 無情에 잇서서 김병욱」 이와 한 타입의 여성으로서 理智 意志 主張 道德觀 戀愛觀 등이 非常이 밝고 活潑性과 親切性이 풍부하며 그 우에 또한 교만치는 안흐면서도 「朝鮮내에서는 결혼할 만한 상대자를 발견하지 못하는」종류의 여성이다. 그러고 그 인순과 순영의 대화도 「無情」의 어떤 장면과는 너무도 갓다.
「-왼세게 사람이 누구는 행복을 안 구하니? 하지만 정말 행복을 어든 사람이야 며치나 되나? 웨 그래? 웨 다들 행복이 못 돼? 너는 웨 괴로워 해? 안 그러냐?」
「그래」하고 순영은 고개를 숙엿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이 무에요?」
「남을 행복되게 하도록 힘쓰는 것이지. 말하면 의와 그 나라를 구하는 것이지!」
「의와 그 나라?」
「웨?」
「내게는 너무도 놉구려--」
이리하여 인순의 壓力에 끌리는 순영은 병욱의 壓力에 끌리는 영채와 지독히도 갓다.
이리하여 순영은, 봉구의 공판이 마음에 안 노히여 구경을 갓다. 그런데 거기서 순영은 무엇을 보앗나?
봉구의 共犯으로 잡힌 경주(피해자의 작은 딸)가, 그 좀 어리석은 정신을 가지고도, 赤心을 다하여 봉구를 사랑하고, 봉구를 위해서는 아모런 ?牲을 하여서라도 봉구만 放免되기를 애쓰는 놀라운 사랑--아직 이 순영따위의 여자는 전설상의 연애로박게는<266> 생각치 안튼 거대한 연애를 보앗다.
여기 감동된 순영이 또 한가지 본 바는 이 함구불언하는 봉구의 입장이 구해내기 매우 어려우나 단 한가지 일만 辯明되면 봉구에게 걸린 혐의도 업서지겟다는 점이다. 즉 그 慘變이 잇슨 시각(오후 9시부터 10시 반까지)에 봉구의 알리바이가 증명되면 봉구를 넉넉히 구하겟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각에는 봉구는 자기旅?에서 순영과 함께 잇섯다. 이것을 증명할 자는 순영박게 업다.
순영은 법정에 일어서서, 그것을 변명하엿다.
一時的 흥분과 감동으로 법정에서 큰일을 저즐러는 노핫다. 그러나, 이 여인의 虛榮心과 경박성이 그러틋 쉽게 사라질 수가 업다. 그는 다시 自暴的 기분으로 東大門 박, 제 남편의 집으로 돌아왓다. 그런데, 의외에도, 尹辯護士 내외가 와서 백부자에게 아까 법정에서의 순영의 행동을 칭찬한다. 즉 능청스럽게 꾸며 대기 때문에, 재판장의 마음도 음지기여, 被告가 유리하게 됏습니다. 참 어쩌면 그러틋 機智가 만흐시오!」하는 것이엇다.
이리하여 재판소 사건은 유야무야중에 업서저 버린다. 남편도 그다지 의심을 안하게 된다. 그러고 이 경박한 여인은,

「내가 웨」하고 순영은 스스로 자기의 말을 책망하엿다.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안는가. 그 남편을 사랑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내 「의무」가 아닐까? 어린애(봉구와의 새에 나흔 그러나 표면은 白氏의 아이)는? 누가 알길내? 나 박게 누가 알기래. 그러타. 자기는 이 집을 떠나지 안는 것이 조타.」

이러케 생각하고 안심하고, 도로혀 남편이 자기를 의심할 것을 근심한다. 수일 후 檢事局에<267> 불리운 그는 이전 공판정에서의 공술을 전면으로 否認하여 버렷다.
이리하여 봉구의 사건은 유리하게 전개될 듯 하다가, 다시 떠러저 버린다.
그러나 봉구는 그런 것은 모른다. 자기가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또한 지극히 미워하든 순영이가 공판정에서 그러틋 자기를 변명하여준 일에 대하여 感泣할 뿐이다.
판결은 나렷다. 봉구는 사형.
여기서 작자의 붓은 外道로 버덧다.
이 사형판결에 대하여 봉구는 맹렬히 生의 執着을 느꼇서야 할 것이다. 일즉이 순영을 굽어 보기 위하여 取引仲介店으도 달아낫든 만치 凡人인 鳳九는 여기서 사랑하든 순영의 悔心까지 보앗는 지라 무엇보다도, 生을 가장 바랫서야 할 것이다. 하로밧비 세상에 나가서 다시 순영을 품에 안고 즐겁게 살 날을 생각하며 「살려 살려」 애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春園의 悲壯癖은 이 男주인공으로 하여금 悲壯한 코-쓰를 밟게하기 위하여 성격을 무시하고 外道를 밟게 하엿다, 여기서 봉구는 한 희극적 영웅으로 변한다.
「죽음 무엇이냐.」
이러한 悲壯한 영웅감으로 봉구는 공소도 하지 안코 묵묵히 사형의 날을 기두렷다.
「윤변호사에게는 봉구의 이러한 심리는 알 수 업는 것 중에 하나엇다, 사람이란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조흔 것. 云云」
하엿지만 이 심리는 尹辯護士 뿐 아니고 왼 讀者도 이해치 못할 자다. 작자 자신도 이해치 못할 것이다. 단지 작자의 旣定 코-쓰에 봉구를 억지로 끄을어 온 뿐이엇다.
-(續)-<268>
<256-268>

잡지명 삼천리 제7권 제7호
호수 제7권 제7호
발행년월일 1935-08-01
기사제목 文藝-春園硏究 (八)
필자 金東仁
기사형태 문예평론

再生 (此項承前)
혼란된 저술
이리하여 사형선고를 바든 뒤의 봉구의 성격은 지리멸렬이엇다. 그는 대체 지사적 비장한 기분으로 사형을 달갑게 바드려 하는지 혹은 죽음에 대하여 극도로 공포를 느끼고 잇는 사람인지 독자는 판단을 나릴 수가 업다.
감옥안에서 尹변호사의 면회를 밧고 도로 감방으로 돌아온 뒤의 數十頁은 독자로서는 도저히 갈피를 차릴 수 업는 혼란된 서술이다. 작자의 붓이 지향업시 난무하는 뿐이지 합리적의 심리진전은 어더 볼 수가 업다.
이러케 난무하던 붓을 작자는 장차 어떠케 매즈려하나.
판결을 바든지 닷새째 되는 날-즉 이날 안으로 공소를 하지 안흐면 일심 판결이 확정되는 날 봉구는 갑작이 生에 대한 집착을 느꼇다. 그러나 작자는 여기서

윤 변호사를 대하야 그러케 큰 소리(공소할 필요가 업다는 말)을 하여노코 또 검사와 판사에게 그러케 큰 소리를 하여 노코 이제 다시 공소를 한다는 것은 넘어도 염치 업는〈270〉 일 가치 생각되엿다 운운.

이러케 서술하엿다. 「생」에 대한 욕망에도 능히 염치 문제가 끼울 틈사리가 잇슬까.

「공소를 하자.」
이러케 봉구는 중얼거렷다. 그러나 참아 전옥에게 애걸할 생각은 나지 안헛다. 그러케 하는 것이 자기를 여지업시 모욕하는 것으로 생각되엿다. 이 때문에 봉구는 더욱 괴로웟다. 그는 주먹으로 벽을 따려보앗다. 발로 방ㅅ바닥을 굴러보앗다. 그러나 튼튼한 벽과 방ㅅ바닥은 다만 텅텅하는 소리를 내일 뿐이엇다.
마츰내 봉구는 정신빠진 사람 모양으로 키보다도 놉픈 창에 부터서 멀건히 밧갓흘 바라보앗다.

이러틋 애타하고 초조해 하는 봉구의 가슴의 한 편에 이 생사 문제보다도 더욱 긴하게 염치 문제가 개재할 여유가 잇슬까. 단지 독자의 마음을 충동키 위하여 주인공의 성격을 무시하고 붓이 외도로 버더 나간 것이다.

白富者의 別莊
이리하여 鳳九의 생사가 어떠케 될지 미지수로 남겨둔채 작자는 슬쩍 딴소리를 끄내엿다. 일즉이 「無情」에 잇서서 영채로 하여금 大洞江에 빠저 죽으려 길을 떠나게 한 뒤에 붓을 딴 길로 옴겨서 독자로 하여금 속을 타게 한 奇謀를 작자는 또 여기서 사용하엿다.
무대는 동대문 박 白富者의 別莊.
순영은 엇떤 날 본 마누라 문병을 갓다가 집으로 돌아오매 남편은 웬 머리 따하느린〈271〉 여자와 白晝에 同衾을 하는 것이엇다.
거기서는 당연히 부처싸움이 일어난다. 그런 뒤에는 자기 집을 뛰처 나와서, 이전 자기가 재학하던 학교에 피부인을 자저갓다. (여기도 또한 상편에서는 W학교더니 여기서는 Y학교로 되엿다.)
무얼하려 피부인을 차졋는지 알 수 업다. 작자도 설명치 안헛다. 이 때의 순영은 반광란의 인물이라 작자도 광인의 행동에는 설명을 못하엿슬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피부인은 처음에는 순영을 냉담하게 대하다가 마즈막에는 순영을 동정하여 순영을 입마춘다. 그때 순영은-

피부인의 입 마촌 등을 만짐은 순영의 령혼을 뿌리부터 흔들어 노핫다. 그것은 마치 전기와 가치 순영의 령혼을 찌르르하게 흔들어 들추어서 새로운 령혼을 이루는 듯 하엿다. 순영의 눈물 흐르는 눈 압헤는 오랜동안 보지 못하엿던 광명의 세게가 번뜻 보엿다. 아츰 햇빗이 넘치는 새로운 세게에 끗업시 푸른 벌판이 열린 듯 하엿다.
(?-원문)
순영은 자기가 하랴고 가지고 왓던 말을 다 할 필요가 업슴을 깨달앗다. 오직 한 마듸 할 말이 잇다하면 그것은
「선생님 말슴은 과연 올흐십니다. 저도 오늘부터는 선생님 말슴대로 새 생활을 시작하겟슴니다.
제 맘이 흐리고 어두워서 보지 못하엿던 것을 선생님께서 분명히 보여 주시엇슴니다.」할 것 뿐이다.

운운하여 一見 순영은 진심으로 悔悟를 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과거에 잇서서 누차 순영이의 임시적 회오를 보고 희망을 부첫다가 낙망하고 한 독자는 역시 이를 신용치 안흘 것이다. 그러고 과연 신용할 수 업섯다.
春園의 작품에 흔히 나와서 도로혀 장면을 그릇치는 것이 이 극적의 경건한 씨-ㄴ이다. 이런 극적 씨-ㄴ을 만들기 위하여 작자는 작중 인물의 성격으로서의 필연적 발전을 고려치 안코 이런 장면을 끼우기를 질겨한다.

그러는 一방 감옥에 잇는 봉구는 사형의 선고를 바든 몸이라 당연히 죽을 것이지만 하늘이 그의 무죄를 돌보아 주엇던지 우연히 진범인 경훈이가 사상관계 사건으로 잡혀끼 때문에 봉구의 원죄가 들어나서 봉구는 다시 광명한 일월을 보게 되엿다.
悲壯한 장면을 부러 만들기 위하여 봉구의 성격을 무시하고 「묵묵히 사형을 기두르는 봉구」를 만들엇던 작자는 이 소설의 기정 코-쓰(봉구의 무죄출옥)를 밟게 하기 위하여는 좀 어색한 필법을 쓰지 안흘 수가 업섯다. 檢事廷에 경훈과의 對面場이며 봉구의 출옥 장면은 슬슬 넘겨 버려서 실감을 주지를 안하엿다.
봉구와 함께 출옥한 경주(인천 김의관의 작은 딸은 도로 인천으로 나려간다. 그 경수를 정거쟝까지 전송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봉쿠는 돌아오는 길에서 의외에도 순영이를 보앗다.

순영도 비극의 코-쓰를 밟는다.
그는 피부인을 만난 날부터 남편의 집에서 나왓다.
나오기는 나왓다. 그러나 순영과 가튼 성격의 사람으로서는 다시 들어갈 길을 예정하지 안코는 나오지를 안흘 것이다. 법정에서 봉구를 변호하고 돌아와서도 그냥 남편의 품을 그린 이 여자이매〈27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자는 이 소설에 비극적 결말을 짓기 위해서 순영으로 하여금 감연히 남편의 집에서 뛰여나오게 하엿다. 뿐더러 남편이 그의 아들 (사실은 봉구와 순영의 아들)을 빼아서 갈 때도 순영은 그냥 남편의 집으로 안 갓스며 남편이 누차 사람를 보내서 도로 오라 할 때도 순영은 귀도 안기우리고 남편이 직접와서 달랠 때도 여전히 잡아 떼엇다.
이것은 백씨의 성격으로도 하지 안흘 일이요. 순영이의 성격으로도 못할 노릇이다. 단지 작자의 悲壯癖이 순영을 그런 코-쓰로 인도한 따름이다.
이 순영의 수난적 비극을 더욱 비장하게 만들기 위하여 작자는 더욱 곡필을 하엿스니 즉 인순이가 순영이에게 대한 태도다.
인순이는 아조 온순하고 애정의 權化로서 일쯕이는 순영이가 백의 妾노릇을 할 때도 함께 月尾島까지 가서 벗을 하여주든-순영이에게는 知己之友엇다.
순영이가 남편의 집을 뛰처 나와서 쓸쓸한 생활을 할 동안 순영은 인순이라도 좀 만나보고 시퍼서 인순이에게 편지를 하엿다.
그랫는데 인순이에게서는 회답도 오지안코.

(上?-원문) 어느 날 저녁 신문에 인순의 사진이 나고 인순은 미국에 류학가는 길로 그날 밤 차로 일본을 향하여 떠난다는 말이낫다. 그 기사를 볼 때에 순영은 실망과 분노와 시기가 한데 석긴 무서운 불쾌감을 깨달앗다.
그 이튼날 저녁 엽서 한 장이 왓다-
「편지는 밧닷스나 길 떠날 준비에 분주하야 가지 못하오며 옛일을 다 회개하고 새 생활을 시작하려 하신다니 깃겁사오며 아모조록 주의 뜻을 잇지 말고 나아가시기를 바라나이다. 총총 이만.」〈274〉
이러케 냉정한 편지다.(?-원문)

작자가 상편에서 보여준 인순의 성격은 결코 不遇에 잇는 친구를 냉대할 사람이 아니다. 단지 작자가 고의로 순영의 환경을 더욱 비참하게 하기 위하여 이런 막을 꾸며 너흔 것이겟스나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고의로 인순을 얄밉게 보는 결과를 짓게 한 것으로서 작중 인물에게 대하여 범한 작자의 죄과라 아니할 수 업다.

米國博士 金氏 登場
이 고적한 순영에게 또 미국박사 김씨가 추근추근 차자단닌다.
함께 미국이고 어듸고 멀리 가자한다. 김박사는 그새 만흔 여자의 웅덩이를 쪼자다니다가 다 실패를 하고 다시 순영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순영의 뱃속에 지금 생장하는 白씨의 씨를 떼어버리자, 그리고 멀리 말성업는 고장으로 가자, 연하여 꾀는 것이엇다.
이 유혹에 솔깃하면서도 주저하고 주저하면서도 거절하는 긔괴한 심리를 탄복할 수 밧게 업다. 아직껏 순영의 성격을 일허버리고 비극적으로만 끄을어가려고 갈팡질팡하던 붓은 여기서 數十頁間을 다시 제 길로 들어서서 음지긴다.
그리고 그동안의 한에 비쏘-트로서 작자는 조선 사회의 일면을 독자의 아페 공개한다. 즉이 불우의 여성을 좀 어떠케 건드려 보량으로 신문기자며 문사라는 일당이 연하여 차자와서 서로
「기미 도오가? 얍바리 와가, 슝에이상와 비진다로?」
「오이꼬라. 와가 슝에이또와 게시카란조」
등등 야로를 하다가 순영에게 욕을 어더먹은 뒤에는 그 분푸리로 순영의 사건을 아조 고약하게 신문에 내인다.〈275〉

이런 등등 아조, 수난의 생활을 하던 순영은 어떤 날 결심을 하고 봉구를 차자보기로 하엿다. 출옥한 뒤에도 봉구는 순영을 잇지못하여 앙앙불락하고 잇다. 이 꽁한 샌님은 순영을 뮈워하고 시프나 뮈워하지도 못하고 가슴만 태우며 잇다. 그런데 인천 김경주에게서 지금 급한 일이 잇스니 나려와 달라는 통지를 밧고 바야흐로 길을 나서려 할 때 순영이 봉구의 집을 차저온 것이다.
뮈워하려하나 뮈워할 수도 업든 선영의 방문을 바든 봉구는 필시 마음은 환희로 떨엇슬 것이다. 그러나 표면 냉연히 마잣다. 순영은 봉구에게 울면서 용서를 구하엿다. 그러나 봉구의 태도는 여전히 냉담하다.
이 냉담(표면상의)은 어떤 정도까지는 수긍할 수 잇다. 그러나 후일 경주의 그러틋 끌는 애모를 차버리고 일생을 자폭적 독신생활을 하니만치 순영을 연연불망하는 봉구로서 끗까지 이러틋 냉담한 표면을 가식할 수가 잇섯슬까.
이것은 단지 작자가 이 作의 기정결말으로 봉구를 끄을어 가기 위하여 봉구의 행동을 강제하엿다 볼 수밧게 업다.

장면은 一轉하면서 인천
경주의 어머니의 임종이라. 경주의 아버지는 비명횡사를 하고 그의 장자인 동시에 상속인인 경훈이는 尊親族故殺犯으로 옥중에 잇는지라, 그의 유산에는 문제가 만하지게 되엿다. 제각기 먹어보겟다고 달려든다. 더구나 경주의 어머니조차 다시 일어나지 못할 중태라 가정 소란이 대단하엿다.
여기서 경주의 어머니는 첫재로는 딸 경주의 장내를 부탁하고저 둘재로는 재산 정리를 부탁하고저 고인쩍부터 신임해오던 봉구를 부른 것이다. 경주모의 臨終席에서 넘어가는〈276〉 마즈막 목숨을 억지로 멈주고 자기 딸과 봉구의 손을 조잡혀 노코 「내 딸을 거두어주게.」 하는 부탁을 나리고 드듸어 세상을 떠난다. 이러한 정성에도 감동치 못하는 봉구. 봉구는 그래도 경주를 안내로 마즐 생각이 업섯다. 단지 그의 생각하는 것은 순영뿐이다. 순영 이외의 여인은 여인으로 볼 줄 모르는 봉구이다.

이리하여 이 소설은 여기서 일단락을 맷고 그러고는 껑충 뛰여서 3년이라 하는 세월이 흘러간 뒤의 사건으로 넘어간다. 그러고 거기서 이 소설의 전체를 망처버린 모순된 비극을 향하여 급템포로 나려간다.
3년 뒤.
순영은 泳登浦 紡績工場의 여공으로 그새 모진 목숨을 부지하여 왓다. 그때는 이전 백씨와 헤질 때에 그의 배에 들엇던 백씨의 씨가(게집애다) 생겻다.
白氏에게서 전염된 성병 때문에 게집애는 소경이 되엿다.
이 순영이는 지금 그의 생애의 청산을 하려는 길에 마즈막으로 봉구를 한 번 더 만나보고 시퍼서 봉구를 차자간다.
그 때는 봉구는 비통한 가슴을 부등켜안고 金谷서 농사를 짓고 야학선생 노릇을 하며 뜻업는 여생을 보내는 것이엇다.
이 때의 봉구의 심경을 작자는 이러케 설명하엿다.
야학을 가르키고 눈 우에 비초인 달을 밟으면서 늣게야 집으로 돌아올 때에 그는 눈 우에 끌려오는 혹은 압서가는 자기의 외로운 그림자를 보고 울지 아니하엿든가. -울때마다 그의 눈물 속에는 순영을 생각하는 깁흔 슬픔이 녹아들지 안햇던가. 경주가 인천에 잇는 자기 집도 버리고 봉구를 따라와 진일 구즌 일을 다하여 가며 오직 봉구의 겻헤만 잇기를 원할 때에 봉구는 경주의 그 참되고도 측은한 사랑을 바다들이지 못하는 것도〈277〉 가슴에 기피 백인 순영의 생각을 떼여 버릴 수가 업기 때문이 아니엇든가?
(中略-원문)

순영은 봉구에게 안온다는 조건
「나는 이로부터 혼자다. 하늘 아래 땅 우에 나는 혼자다. 영원히 혼자다.」
「인제부터 조선의 강산이 내 사랑이다. 내 임이다. 조선의 불상한 백성이 내 사랑이다. 내 임이다. 죽고 남은 이 목숨을 나는 그들에게 바치랸다. 그들과 가치 울고 가치 웃고 그들과 갓치 고생하고 가치 굶고 가치 헐벗자. 그들의 동무가 되고 심부름ㅅ군이 되자 종이 되자.
「모든 빗나는 것이어. 모든 호화로운 것이어. 모든 아름다운 것이어. 다 가라. 조선의 모든 백성이 다 안낙을 누릴 때까지 내 몸에 안낙이 업스리라. 다 한가히 놀 수 잇슬 때까지 내게 한가함이 업스리라.
「만일 순영과 가치 한다면? 그러나 그것은 지나간 꿈일너라. 다시 오지 못할 꿈일러라.
「가자! 우리 임에게로 가자! 불상한 조선 백성에게로 가자! 농부에게로 가자! 거기서 그들과 가치 땀을 흘리고 그들과 가치 죽어 그들과 가튼 공동묘지에 무치자.」
이 센틔멘탈한 문장으로 역거내린 봉구의 비장한 결심은 어떤 전제가 잇기 전에는 존재치 못할 것이다. 봉구의 성격으로는 이만한 자기 虐待癖은 가젓슬 사람이지만 이런 결심을 나리기에는 반듯이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즉 순영이 영구히 봉구에게 올 가망이 전무하다 하는 조건이다.
이 땅에 바치자 한 봉구의 결심은 작자도 말한 바와 가치 「선영 이미 업스니 이 땅에나 바치자.」는 자폭적 心境에서 나온 者이다. 이러한 심경으로서 자기 학대를 하는 사람에게 순영이 다시 차자온다 하면 그 결과가 어떠할까.
그는 몃 번 더 냉담을 가식할넌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자의 눈물을 보면 그는 이 압페 감읍하지〈278〉 안으면 안될 것이다

경주도 봉구의 집에 와서 산다, 그러타고 夫妻가 된 바가 아니다. 경주는 봉구가 너머도 그리워서 「그저 겟헤만 두어 주시요.」하고 와서 함께 한 집에 사는 다름이다.
이리하여 이 金谷農村에는 순정적 자기 희생자 한 사람과 자폭적 자기 희생자 한 사람이 세상에 긔묘한 생활을 하고 잇다.
여기 순영이 차자 온 것이다. 그러고 사흘ㅅ동안을 無爲히 잇다가 元山으로 가노라는 한 마듸를 남겨노코 순영은 다시 길을 떠난다.
그러고 순영이 다녀간지 엿샛만에 금강산 온정리에서 부친 순영의 편지는 왓다. 그 편지에는 자기는 자살하려 이 곳에 왓스며 이 편지가 「사랑하는 봉구씨」에게 이른때 쯤은 자기는 벌서 죽엇스리라는 말이 적히어 잇다.
봉구는 곳 행장을 수습하고 금강산을 향하여 떠낫다.

外金剛 九龍淵의 씨인
外金剛
九龍淵 가는 길.
소경 딸을 이끌은 초라한 여인이 단풍의 금강산을 九龍淵을 향하여 길을 더듬고 잇다. 비극적 奇遇가 생긴다. 즉 순영의 모교 생도들이 수학여행을 온 것이다. 이리하여 相距萬里나 되는 兩者의 대조가 독자의 눈 압페 展列된다.
그 뒤에는 이 모녀는 폭포 속으로 잠겨 버린다. 봉구가 허덕 허덕 달려왓다.
시체를 어든 봉구.
「아아 순영이! 안죽으도 조흘 것을」 자기 학대벽을 다분히 가진 이 기청년은 일이 저즐러진 뒤에 후회를 한다.〈279〉
얼마나 사랑하던 사람인고 엇덧케나 사랑하던 사람인고- 그런데 그 사람은 소리업는 시체가 되여 버리고 말앗고나! 한 마듸만 말을 하엿스면 한이 업겟다. 봉구 자기가 지금까지 변함업시 순영을 사랑하여 왓다는 것과 순영의 지나간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겟다는 말만 들려준 뒤에 순영이가 죽엇더라도 한이 업슬 것 갓탓다.
금곡 왓슬 때에 봉구가 한 마듸만 부두러운 말을 하여 주엇더라도 순영이가 죽지는 아니하엿슬 것을-순영을 사랑하노라고 한 마듸만 하여 주엇던들 순영은 자기의 품ㅅ속에서 남은 세상을 살아갈 수도 잇섯슬 걸- 세상에서 다시 지접할 곳이 업서 자기를 차자온 순영을 자기마자 냉대하야 죽음의 나라로 보낸 것을 생각할 때에 봉구의 가슴은 칼로 에우는 듯이 아팟다.
그러나 봉구와 가치 자기 학대벽이 강한 인물에게는 순영의 주검 아페서 자기의 지난 실수를 스스로 책하는 편이 통쾌하지 안흘까. 순영과 일생을 가치하여 調信之夢의 歎을 하느니 보다는 이 편이 행복될 것이다.
그리고 이 아레서 희극 한 개가 더 연출되고 이 상하편의 재생은 막을 다친다.
순영의 오빠 순홍이 갑자기 뛰처 나온다. 수년 전에 어듸다가 폭발탄을 던지고 잠적하엿던 순홍이가, 봉구가 홀로 밤에 순홍의 시체 아페 밤경을 할 때에 그의 아페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고는 누이의 시체를 한 번 보고는 다시 표연히 어두움ㅅ 가운데로 사라지는 것이엇다.
이리하여 이튼날 神溪寺 洞口박게 새 무덤이 생기고.
「나의 사랑하는 안해 순영의 무덤. 무정한 봉구는 울고 세우노라.」
하는 비석이 섯다는 것으로 「再生」은 아모「재생도 업시 終幕을 고한다.」

우에도 말하엿거니와 이 결말은 작자의 본시의 企圖는 아니리라.〈280〉
「순영을 밉게 보기 때문에 봉구는 세상을 버리고 농촌에 숨엇다.
그 때에 세상 살이에 시달리고 시달린 순영이(어떤 곡절로던) 봉구를 차자온다. 봉구는 아직껏 그러케 밉게 보던 순영을 만낫다. 순영의 눈물을 보앗다. 봉구가 진심으로 순영을 미워하던 것이 아니엇다. 순영의 눈물을 볼 때에 봉구의 마음은 다 녹아 버렷다.
「그러고 悔改한 여인과 용서한 남자의 두 사람들은 새로운 활기로서 그들의 再生의 길에 나선다.」
이런 企圖가 아니엇슬까. 그러치 안타하면 「再生」이라는 제목은 무의미하다.

이 作의 死因
요컨대 「再生」은 그 團圓에 잇서서 이것을 비극적 비장미를 내게하기 위하여 작중 인물들을 억지로 딴 길로 끌어 들인데 이 作의 死因이 잇다.
이 再生 전체를 읽은 뒤에 독자의 머리에 그냥 남는 것은 아모 것도 업다. 비극이엇다 하는 개념 이외에는 남는 者가 업다
무엇이 이런 비극을 지엇느냐?
작자도 대답 못할 것이고 독자도 대답 못할 것이다. 여기 대답하려면 「再生」의 내용을 전부 다시 되푸리 하여야 하지. 합리적 원인을 들 수가 업다.
웨?
이 소설 자체가 합리적으로 진행되지 못하엿스니까.
소설의 내용이 흥미 일방인지라, 독자는 그 압력에 끌리워서 단숨에 말미까지는 읽을 것이다.
그러나 독파한 뒤에 심사할 근터리를 주지 못한 이 소설은 따라서 읽기를 강제하고 생각키를 금한 작품」으로 볼 수 박게 업다.
흥미에 끌리워서 一氣讀破한 뒤에 맹낭한 느낌을 밧는 연유가 여기 잇다. 이 소설은 소설 속의 몃 개의 인물의 행장기지. 그것이 합처서 한 개 인생을 보여주지 못하엿다. (此項完)〈281〉
〈269-281〉

잡지명 삼천리 제7권 제8호
호수 제7권 제8호
발행년월일 1935-09-01
기사제목 春園硏究(九)
필자 金東仁
기사형태 문예평론

麻衣太子

「麻衣太子」도 春園의 대부분의 장편소설과 마찬가지로 東亞日報紙上에 연재된 것이다. 그러나 이 麻衣太子에 대하여서는 그다지 쓸 말이 없다.
첫재로 이 麻衣太子는 작자의 본래의 플랜에 의지하여 쓴 者가 아닌 모양이다.
이 소설이 近700頁이 되는 巨冊인데도 불구하고 麻衣太子에 관한 부분은 겨우 그 末尾의 數頁에 지나지 못하고 400여 頁이나 되는 대부분을 弓裔의 이야기로 終始하엿다. 아마 작자는 본시 먼저 弓裔로 시작하여 新羅末年의 어즈러운 政界를 성큼성큼 소개하고 麻衣太子를 주인공으로 삼은 本編에 착수하려던 것이 序編이 본격적으로 되고 너머 길어지므로 本編인 部를 간략히 꾸민 모양이다.
역사로 고찰하자면 金傅王의 세자되는 麻衣太子라는 사람은 「단지 역사를 배경 삼어 가지고
太子의 인물과 성격과 행사 등은 순전히 작자가 창작을 하여서 뿐, 한 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잇슬 것」이지 史上의 麻衣太子는 이야기의 주인이 될거리가 업다.
市井의 한 好漢이던 金傅라는 사람에게 갑자기 王位가 구을러 왓다. 그 덕에 傅의 <238> 아들이 太子가 되엇다. 그 뒤 新羅가 망하매 왕 되는 傅는 고려의 臣子가 되어 고려로 갓는데 태자는 그것을 깨끗다 아니하고 皆骨山으로 들어가서 餘生을 麻衣를 입고 草根을 먹으며 보냇다 하는 것 뿐이다. 그런지라 亂局의 신라말년을 배경으로 이 麻衣太子를 주인공으로 삼어 한 개 이야기를 꾸미자하면 절호의 것이 꾸미어질 것이다.
春園도 처음에는 그것을 뜻하엿스리라. 더구나 麻衣를 입고 石窟에서 餘生을 보냇다 하는 태자의 비장한 마그막은 春園의 질겨하는 배로서 이 한가지의 효과를 겨누고라도 넉넉히 春園이 取材할 만한 者이다.
그러나 그 始初를 弓裔에서 한 春園은 弓裔傅를 창작해 내는 흥미에 쏠려 버리고 말엇다. 더구나 이 반도에 대제국을 건설하려던 弓裔의 雄志도 春園의 비위에 맛는 자로서 春園은 이 흥미 때문에 이 소설의 제목까지도 이저버리고 붓을 그리로만 돌렷다. 그러면서도 거북하기는 한지 나려가다가 한두번 억지로 장래의 麻衣太子를 등장시키고 그 註로서 「이분이 장차 마의태자가 될 분이다」고 암시는 잇지안코 하엿다.
그런지라 이 이야기의 제목이 「麻衣太子」라 된 것은 잘못된 일이다.

또한 이 「麻衣太子」는 소설이 아니다.
소설*서의 일관한 이야기의 줄기가 업고, 게통이 업다.
이 이야기에는 소설적 의미의 주인공도 불분명하다. 400餘 頁이 되는 전편으로 끗이 낫다 하면 당연히 弓裔을 주인공이라 하겟스나, 그 뒤* 近 300頁이 첨가되엇스며 더구나 弓裔가 죽은 뒤 근 20년 후의 일에까지 미첫스며 제목까지가 麻衣太子로 되엇스니 弓裔를 주인공이라 할 수도 업고 만약 弓裔와 麻衣太子의 새에 무슨 유기적 連絡이라도 잇섯스면 또한 그러케라도 볼 수가 잇겟지만 그야말로 弓裔와 麻衣太子는 <239> 소설적으로 아모 연락도 볼 수가 업스니 말하자면 두 개의 이야기를 맛 이은데 지나지 못한다고 박게는 볼 수가 업다. 그것으로뿐 아니라 소설로서의 요소는 거지반 무시 당하엿스니 이것을 소설로는 볼 수가 업는 배다.

무론 단순한 野史도 아니다. 이 이야기의 안에 나오는 사건은 대부분이 春園의 창작으로서 正史와 野史에서 어더 볼 수 업는배다.
이 이야기의 初頭는 小說的 筆法으로 시작되엿다. 그러나 차차 나려가면서 사건이 복잡다단하여 감을 따라서 어느덧 어름어름 변하여 버렷다.
더욱이 전에 一設春香傳을 쓰기 위하여 李海朝編의 唱劇 春香傳 「獄中花」를 읽고 그 인상이 아직 꽤 만히 머리에 남어잇슨 春園은 이 麻衣太子의 가운데도 喜劇式唱劇조를 만히 집어 너헛스니 예컨대 弓裔가 아슬라성에서 나날이 명망이 노파갈 때에 그의 선배되는 량길이 이것을 시기하여 원회를 보내어 弓裔를 모살하려 할 때에 량길의 딸 란영(그는 弓裔의 애인이다)은 제 애인을 구하고저 아슬라성으로 달려 온다. 刺客인 원회는 가장 親友인체하고 弓裔를 차자와서 弓裔와 對酌을 하면서 바야흐로 칼을 몰래 뽑으려 하는 이 위급하고 아슬아슬한 찰나에 男服한 난영이 달려오는 것이다.

란영은 궁예의 압흐로 한거름 가까히 나가며 넌즛 팔을 들어 노랫가락으로
「석남사 깁흔 밤에,
눈혀처 찻던 사람
아슬라 머나먼 길<240>
어이하야 오다던고
독한 칼 품은 녯벗을
삼가소서 함이라」
하고 머리에 쓴 오각선을 버서버렷다. 그럿은 란영이엇다.

이런 唱劇式 장면이 수업시 나온다.
무론 新羅時代에는 歌舞를 조하하엿다는 말은 전하되 그것도 程度問題이다.
또한 그 風俗과 制度에 잇서서도 좀 더 古典色彩가 나도록 창작을 하엿서야 될 것이다. 너머도 現代式이기 때문에 가다가 少佐가 나오고 中尉 下士卒이 나올지라도 突然感을 느끼지 안흘만치 되엇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近 100개나 나오는 것도 독자를 번거롭게 하고 갈피를 차리지 못하게 한다.
모도가 게통잇는 한 개 줄기를 뽑아내지 안키 때문이다.

말하자면 순전한 한 개의 講談이다. 高座에 안저서 부채를 두들기며 이야기로서 들려줄 종류의 것이다.
이만한 내용을 일껏 꾸며 가지고 웨 한낫 講談으로 만들어 버렷는지 이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奇遇의 장면을 질겨하는 春園은 「麻衣太子」의 가운데도 여러군대 奇遇를 집어너헛는데 弓裔王이 山中에서 죽을 때에 하숙하엿던 주인집 老翁이 뜻안한 30년 전의 弓裔의 스승이던 白衣國仙인둥 麻衣太子를 사모하다가 뜻박게 麻衣太子의 아버니의 안해가 된 樂浪公主가 그로부터 수10년 후 佛供하려 入山하엿다가 또한 뜻안한 麻衣太子와 <241> 비장한 會見과 이별을 하는 둥 그 박게도 奇遇가 꽤 여러군대 잇다.
여기는 春園의 斥唐主義가 좀더 심각히 들엇서야 할 터인데 그것조차 업섯다.

「麻衣太子」는 한 개 자미잇는 講談-이 이상 더 말할 바가 업다.

無情에서 麻衣太子까지

「無情」에서 「麻衣太子」까지에 春園이 걸어온 발자최-그것은 련락과 게통이 업다할 수 잇다.
雷動性 너머도 풍부하기 때문에 매작품마다 作風이 다르고, 만약 자세히 조사를 한달 것 가트면 그 作風이 다른 每個作品인즉 그 작품을 내여노키 전에 春園이 읽은 冊子와 공통점이 만타는 점도 발견할 수가 잇스리라 밋는다.
無情과 開拓者가 그 作風이 전혀 다르고, 一說春香傳과 許生傳은 비슷한 곳이 만흐되 그 兩者와 再生은 다른 사람의 작품인 듯이 風이 다르고, 麻衣太子에는 一說春香傳의 流를 품은 흔적이 만히 잇지만 또한 근본적으로는 相違點이 만타.
數個의 단편에 잇서서도 作風은 개개가 모도 다르다.
이것은 모도 雷動性과 被感化力이 녀머도 만키 때문에, 時時로 변하는 春園이기 때문이다.

이러는 동안 춘원의 생활은 사회적으로와 가정적으로 든든히 자리잡혓다.
일즉이 한 재조잇는 고아로서 漂浪하던 시대와 달리, 가정과 가족이 생기고 지위가 구더가고 생활의 근거도 서지게 되엇다.
東亞日報는 春園을 遇하기 厚하엿다. 上海에서 春園을 데려 내온 뒤부터 꾸준히<242> 그의 뒤를 보아 주엇스며 春園이 病床에 너머저서 사무를 못볼 때에도 춘원의 椅子는 뷔어 두어서 후일 다시 나올 날을 기다리고 하엿다. 그런지라 만약 春園의 편에서만 東亞日報를 배척치 안흐면 언제까지던 東亞日報는 春園을 질겨 마잣다.
이러틋 서로 굿게 매저진 東亞日報가 점점 長成하엿다. 다른 온갓 신문의 우에 군림하듯이 되게까지 되엇다. 이 東亞日報의 大成이라 하는 것이 春園의 社會的 大成과 떼지 못할 큰 관게가 잇는 것이다.
春園은 東亞日報紙上에 소설을 쓸 의무를 社에서 지게 되엇다.
社와 春園의 새는 무론 소설을 쓰는 것이 「春園의 義務」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개 문학자로서의 입장으로 볼 때에는 그것은 무엇에 비기지 못할 한 개 커다란 권리라 볼 수가 잇다.
대체 朝鮮과 가치 출판계가 빈약한 곳에서는 자기의 작품을 活字化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이러한 가운데서 무한히 活字化할 의무를 지게 된 춘원은 바꾸어 말하자면 무제한으로 창작을 발표할 機關을 어든 것이나 일반일 것이다.
여기로 春園은 쓰고 또 썻다. 연다라 東亞日報紙上에는 春園의 작품이 나타낫다. ** 가장 세력잇는 新聞紙上에 가장 만히 쓰기 때문에 가장 넓게 알리워젓다. *** 絶好의 환경에 잇서서 春園이 좀 더 힘들이어 쓰기만 하엿면 그는 朝***** 拓者로뿐 아니라 그의 작품의 예술적 가치로까지 末代까지 비치 낫슬******** 조흔 機關을 너머도 허스러히 사용하엿다. **********지의 까닭도 잇스리라.
**********日報의 罪일 것이다.<243>
東亞日報는 文藝를 모른다. 李舜臣사당을 重修할 基金을 엇기 위하여 그 인기를 놉히고저 春園에게 李瞬臣傳을 쓰기로 명하며 滿洲事變이 일어날 때에 인기를 엇기 위하여 滿洲를 背景으로한 小說製造을 명하며 (이 일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중지는 되엇지만)-이러틋 소설이라는 것을 단지 한낫 機會的 利用物로 여기고 또는 大每大朝 등 大新聞에 學藝面이라는 것이 업다하여 일시 學藝面까지 페지하엿던 東亞日報니 만치 東亞日報는 文藝에 無理解이다.
이 東亞日報의 社員으로 안저서 東亞日報紙上에 소설을 쓰는 春園이매 거기 얼마간 구속되지 안흘 수는 업슬 것이다.
그러나 너머 低頭平身하엿다.
본시 好人인 春園은 자기주장을 강조하지 못한다.
그러나 생활이 안정을 따라서 차차 침착은 생겻다. 이 침착하에서 집필한 「端宗哀史」 「群像」 이하의 오늘날까지의 작품을 이하 보기로 하자.
이상의 것도 주로 春園의 作品批評에 치우첫다. 그 작품의 社會性이며 社會的 영향에 관해서는 의식적으로 피하여왓다.
이하도 무론 그러케 하겟다. 그러고 作品批評 이외에 관한 부분은 죄 몰아서 마그막에 한 묵금으로 하고저 한다.
그러면 이하 「端宗哀史」를 보기로 하자. 이 글을 쓸때 어떤날 春園자신이 「단종애사만은 욕하지 말라」고 우스면서 말한 일이 잇느니 만치 春園의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요 겸하여 이 작품이 東亞日報에 연재되는 당시 累計 수천통의 투서가 들어오니 만치 讀者群의 인기가 굉장하엿던 작품이다.
그 「端宗哀史」를 小說 成果上으로 검토하여 보자. (未完)〈244〉
<237-244>

잡지명 삼천리문학 제2집
호수 제2집
발행년월일 1938-04-01
기사제목 春園硏究(十)
필자 金東仁
기사형태 문예평론

端宗前後 歷史와 文獻
春園의 「端宗哀史」를 논평하려면 그 예비지식으로 역사 즉 實史를 잠깐 뒤적여 볼 필요가 있다.
이씨조선의 창업주
太祖大王이 洪武 壬申 7월 16일에 즉위하엿다가 6년 후인 戊寅年에 定宗大王께 禪位하고 당신은 上王이 되었다.
定宗大王은 재위 2년 후 당신의 아우님 太宗大王께 禪位하고 당신은 上王이 되었다.
太宗大王은 즉위 후 元子 讓寧大君을 세자로 冊하였다가 「讓寧은 狂人이라.」 誣하여 폐하고 忠寧大君(後日의 世宗大王)을 다시 세자로 冊한 뒤에 재위 18년 후 世宗大王께 禪位하고 당신은 上王이 되었다.
世宗大王은 그 놀라운 智力으로 치정에 노력하다가 건강을 상하여 임시로 세자(후일의
文宗大王)께 廉務 參決케 하였다가 재기할 기회가 없이 昇暇, 文宗大王이 등극하였다.〈104〉
그런데 世宗大王은 世人이 다 아는 바 만고에 쉽지 않은 聖, 德, 智를 겸한 분이었다. 세종의 妃되는 분이 또한 억세인 性格의 主人이었다. 이러한 두 분 새에 아드님이 여듧 분, 따님이 두 분이요. 庶出로 아드님 열 분, 따님 두 분, 합계 22남매었다. 그런 중에 嫡出 王子들은 부모가 다 그런 분이니만치, 8왕자가 다 걸출한 인물들이었다. 여기서 역사상의 비극은 개막이 된다.
맛 아드님(文宗大王)은 후일 왕위에 오를 분이니만치 교양(유교적)에 매우 힘썼다. 이것이 첫재로 그 분의 건강을 損하였다. 그 뒤 부왕(世宗大王)이 탈로 누었을 동안, 政務를 代攝하고 병석에 侍候하는 6년 간 건강은 상할대로 상하였다. 이 상한 건강상태로 등극을 하였다.
정무의 번잡과 상중 素食 등은 더욱 新王의 건강을 害하였다.
그런중에 心적 苦勞가 또 하나 있었다. 당신의 동생들이 너무도 걸출인데 대한 疑懼었다. 몸이 약하면 마음이 약하여진다. 마음이 약하여 지면 의심치 않을 것을 의심하고 무섭지 않은 것을 무서워하게 된다. 왕은 동생네들을 의심하고 무서워 하였다. 당신 在世中에는 무슨 근심이 없겠지만 당신만 승하하고 보면 當年 10세의 왕자가 어찌될까.
왕위라 하는 것은 무서운 매력을 가진 것이다. 이 왕위라 하는 찬란한 자리가 무사히 어린 왕자에게 전하여 질까. 억세인 동생(王子에게는 叔)들이 너무 만타.
이러한 心적 苦勞는 왕의 건강을 더욱 상하게 하였다.
동생네 중에도, 가장 맛 동생
首陽大君과 그 다음인 安平大君이 가장 무서웟다. 首陽大君은 억세고 闊達하여 小節에 구속되지 안는 사람으로서 매양 入闕하여서는〈105〉 왕의 건강을 보고 왕께 기름진 음식을 잡숫도록 권하고 短喪을 권하고 왕이 喪中이라 하여 돌보지 안는 정무에까지 간섭하여 왕을 떠받고 충동하였다. 이것이 도로혀 왕에게는 무슨 야심이나 있지 않은가고 의심되었다.
이 首陽보다도 더욱 의심되고 두렵고 꺼리우는 것은 安平大君이었다. 安平은 王族-더욱이 왕의 同母弟로서의 부귀나 누리고 근신하는 생에나 보냈으면 좋을 것인데 무슨 연고인지, 文武士를 만히 모으며 도당을 몹는 듯한 모양이 보이며 이러한 無識群뿐 아니라 현직 재상들과도 結連을 모으며 인심을 사는 등 모든 행동이 적지않게 의심스러웠다.
이러한 호랑이들 틈에서 양과 같은 어린 세자가 장차 능히 位를 保持하여 나아갈 수가 있을까. 이것이 왕의 걱정이었다.
이 걱정은 더욱 왕의 건강을 해하여 2년 후에는 임종을 보게 되었다. 이 왕에게는 母后도 승하하고 왕비도 승하하여 대궐 안에는 嬪 이하의 궁녀들뿐이지, 어른될 만한 이가 없었다. 이 왕이 승하하면 당년 12세의 어린 세자가 新王으로 등극케 된다. 漢地 古例에 의지하여도 15세 이하의 幼君에게는 攝政하는 분이 있어야 하는데 대궐안에는 그럴만한 분이 없었다. 이러한 경우에 임하여 왕이 취할 길은, 당연히 당신의 동생 중 가장 큰 이 首陽大君께 부탁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宗親 중 가장 年老者인 讓寧大君(왕의 伯父)께라도 부탁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 부탁이 없이 승하하였으면 大行 王의 가장 근친인 수양대군이 자진하여 幼王攝政을 선언하던가, 정부에서 首陽께 섭정을 請하여야 할 것이다. 啓請, 裁下 등에 있어서 少年王이 어떻게 자의로 裁斷하고 命하고 決하고 할까. 攝政이 없으면 重臣들의 자의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王家의〈106〉 존재라는 것은 무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동생들을 疑懼하는 王은, 임종에 있어서 重臣과 ?臣들을 불러서 어린 세자의 輔佑를 부탁하였다.

우에 말한 讓寧大君이란 어떤이냐 하면 太宗大王의 맛 아드님이요. 世宗大王의 맛 형님으로 처음에는 태종의 세자로 冊되었든 분이다. 그러나 讓寧보다도 世宗을 더 총애하는 太宗은 讓寧을 廢嗣하고 世子로 冊位하였다.
世宗이 즉위한 후에도 世宗의 신하들은 讓寧의 존재를 꺼리어서 매양 世宗께,
「讓寧이 여사여사한 罪가 있아오니 圖謀하소서.」
하고 請하고 하였다. 六鎭을 建置하여 그 勇名을 천하에 날리고 후에 左相까지 되었든
金宗瑞도, 그런 上啓를 하였다가, 世宗께,
「이는 내 뜻을 모름도 심함이니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말을 말라.」
는 질책에 가까운 嚴敎까지 받은 일이 있다. 즉 왕족 중의 麒麟兒었다.

文宗大王은 임종에, 대신들에게 顧命을 하고, 대궐에서는 惠嬪 楊씨로 하여금 장차 幼主의 準攝政(?)을 부탁하였다. 楊씨는 본시 中人집 딸로 궁녀로 들어왔다가 世宗大王의 고임을 받어 封嬪까지 된 사람으로 격식에 있어서던 家閥로 보던 攝政의 자리에 앉을 사람이 못되었다.
이렇게 되여 新王(少年王
端宗)이 등극하매 이 나라에는 임군은 존재하나 王權 行使者는 없게 되었다. 大臣들이 先王의 顧命을 간판삼어 大臣끼리 의논하여〈108〉 작정하고 決裁하고 할 뿐이었다.
이렇게 되매 당연한 順序로서 王叔인 首陽이 (비공식으로나마) 대궐에 출입하면서 幼王을 대신하여 정치에 容喙하였다. 首陽이 이러니 安平大君도 대궐출입이 잣게 되었다.
大臣측으로 보자면 이것은 귀잖은 일이었다. 이 王叔들만 없으면, 自意로 모든 일을 행할 수 있는데, 王叔들이 감시하며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司患府를 시켜서 「禁奔競案」을 제출케 하였다. 禁奔競이란 王族들의 奔競을 禁한다 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제출시켜 아직 아모 철도 모르는 어린 王께 한 번 보이고 敎書가 나려놓으면, 이것은 왕명이라 王叔들의 대궐출입이 불가능하게 되고 따라서 王權은 대신들에게 全屬되고 專屬되게 된다. 王叔으로 보자면, 큰일난 문제이다. 首陽과 安平은 즉시 당시의 首相 皇甫仁에게 달려가서 嚴重抗議의를 하여 이 안을 묵살하여 버렸다.
그러나 일정한 攝政이 없으니많지, 아모리 王叔들이 감시를 한다 하나, 政務는 대개 대신들의 任意로 되었다.
당시의 三公은 領相이
黃甫仁이요. 左相이 金宗瑞요. 右相이 鄭基이었다.
領相 黃甫仁은 단시 한낫 文士이지, 정치가로서의 업적은 아모 것도 없는 사람으로, 文을 崇하는 시대에 오래 살고 오래 벼슬에 있고 큰 흠이 없어서 저절로 領相까지 기어 올라갔지, 領相 재목은 못되었다.
左相 金宗瑞는, 世宗大王의 아레서 六鎭을 建置한 武功은 있지만, 우에 기록한 讓寧참소로 보아도, 그리 향그럽지 못한 우에, 部下
李澄玉에게 北國미녀를 뇌물로 바다서 여기 혹하 등- 將材는 될지언정 相材는 못되었다.
右相 鄭基 역시 한 개 文士에 지나지 못하였다. 攝政이 없는 幼王의 아레 이러한 대신들이 布列되어, 「先王의 顧命」을 방패삼어 국정을 좌지우지하는지라, 王權은 땅에 떠러지고 국정은 보잘 나위가 없이 되었다.
世宗大王 6년간의 患候와 그 뒤 文宗大王 2년간의 喪中無爲의 뒤를 이은 이 世態는 눈 있는 자로 하여금 근심치 않을 수가 없게 하였다.
게다가 王叔 安平大君은 무엇 하려는지 더욱 文士 武士를 모으며 대신들을 사괴며 하여 一大肅淸을 加하지 않으면 나라의 안위가 의심스러웠다.
드듸어 首陽大君이 일어서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先王의 顧命을 유일의 政剛으로 삼는 爲能老物들을 다 處置하여 버리고 스스로 領相 吏, 兵兩曹判書 겸 兵馬都統使가 되고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들로서 內閣을 조직하였다. 安平大君의 行事가 의심스럽다 하여 安平大君도 定配를 보냇다.
이런 때에 림하여 可憎한 것은 조선 신하들의 讒訴심리다.
金宗瑞가 寧讓을 世宗께 讒한 것은 우에도 기록하였거니와 太宗, 世宗 兩朝를 通하여 寧讓을 讒한 자 不知基數요, 太祖 시에 芳幹의 亂을 꾸며내고 芳幹의 亂을 꾸며내고, 대대로 적잔흔 逆獄을 꾸며낸 이들이 모도, 臣類다. 이들은 首陽께 연방 安平을 제하여 버릴 것을 請하였다. 그러나 首陽은 이를 힘있게 눌렀다.
정치에 대하여 自家見을 가지고 있는 首陽은 政權을 잡은 뒤 부터는 어린 임군은 대궐 안에 평안히 있게하고, 임군께 위안될 施設을 게을리지 안는 한 편으로 國政刷新에 勞力하였다.
이 때에 이 首陽을 보는 세 가지의 눈이 있었다. 하나는 의혹의 눈이었다. 이제 저러다가 보위까지 엿보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109〉
하나는 首陽의 심복들로서, 어린 임군은 上王으로 높여 모시고 首陽이 보위에 오르소서 하는 것이었다.
남어지 하나는 首陽의 赤誠을 알아보는 一群이었다.
이 가운데서, 전 兩者는 首陽에게 매우 불쾌한 것이었다. 자기는 어린 조카님을 위하여 이렇듯 애쓰거늘 세상은 이를 曲解하는구나. 여기서 首陽은 이 의심의 눈을 막고 자기의 赤誠을 알게하기 위하여, 君臣의 반대를 일축하고 어린 왕께 왕비를 간택케 하고, 「喪中謹愼」에서 버서나게 하여 드리고저 儒臣들의 禮儀論을 무시하고 短喪을 실시하였다. 어서 왕비에게서 元子가 탄생하여 世子로 책하여 이 임군의 御代를 든든하게 하여 자기가 향하는 의혹의 눈을 것게 하려하였다.
그러나 변함없는 것은 「臣心」이라고 명명할 일종의 심리가 高麗朝부터 그냥 흘려나려 와서 지금까지 미츤 바 小人心이었다. 首陽이 임군되기를 바라는 一群은 자기네의 억측으로서 首陽도 그러려니 하고, 내부공작을 많이하여 어린 임군을 上王으로 모시고 首陽을 즉위케 하려하였다.
首陽도 神이 아니다. 野心과 패기가 남보다 더한 사람이다. 그런 우에 자기게 직접 王權이 없기 때문에 행정상 支障도 많어서 내심 클클하든 차이라,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하여 왔지만 종내 이 誘惑에 빠젔다.
禪位가 되었다. 首陽이 新王이 되었다. 어린 王은 上王으로 높였다.
臣, 民에게 異意가 없었다. 上王의 臣下이든 사람들은 모도 이 新王의 등극을 축하였다. 이곳 백성들은 전통상 우에서 하는 일은 당초에 알려 하지도 안는 것이다.
太祖 開國 이래로 禪位가 관례가 되어오니 많지, 등한히 보았다.〈110〉
新王은 上王으로 하여금 富와 貴에 부족이 없게하여 드리고저, 昌德宮에 모시고 시종, 물품 등을 풍부히 하고, 옛날 왕이 상왕께 대접한 절차를 지켰다.
그 뒤 王이 昌德宮에 上王께 問安을 갔는데, 마음에 없이 王位를 떠난 上王은, 王을 만나지를 않었다. 昌德宮앞까지 世子와 함께 威儀를 가추고 갔다가 敦化門을 들어서 보지도 못하고 景福宮으로 돌아온 것은 王에게는 큰 망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일은 다른 방면으로 한 개 사건이 胚胎되었다. 과거 世宗大王때 集賢殿 학사로 있는
成三門 朴彭年 등은 간간 世宗이 친히 어린 손주님 (지금 上王)을 품에 안고
「이 뒤 이 王孫이 長成한 때는 너히들은 老臣이 되겠구나, 그때 잘 보좌해라.」
는 부탁을 받었다. 그리고, 成, 朴, 등은
文宗의 學友었드니 많지 文宗在位 2년 간 늘 『아우님들을 꺼리든 文宗은) 이 동무 겸 신하에게 장래 보좌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 어린이가 지금 王에서 上王으로 높이우기는 하였다 하나 심중 불평이 있는 것이 확연하여질 때에, 양심상 가책이 되었다. 그래서 때때로 當年의 集賢殿 學士들끼리 모이면, 한탄을 하고 하였다. 그러나 그 뿐, 무슨 대책을 취할 줄도 몰랐거니와 지금 왕의 정치적 수완에 감한 그들은, 이 御代를 어즈러히 하기도 싫었다.
이러구러 丙子年 여름 明使가 오게 되었다. 왕은 上王과 함께 昌德宮에 明使를 초대하여 큰 잔채를 베플게 되었다. 그 때 雲劒으로 뽑힌 사람이 五衛都摠府都摠管
成勝 (成三門의 아버지)와 訓鍊都監 兪應孚었다.
여기서 급격히 謀議는 進涉되었다. 본시부터 一철한 武人으로서 이 王位變動을〈111〉 자미없게 보든 成勝은 아들을 독려하여 문사동지들을 몹게하고 자기는 함께 雲劒으로 서게 된 愈를 설복시키며 一변 武士동지들을 모았다. 그 계략이란 것은, 잔챈날 왕과 세자의 뒤에 설 雲劒 成과 愈는, 왕과 세자를 弑하고 成과 愈의 영솔하는 병사며 동지 무사들의 병사로 上王을 끼고서 景福宮으로 달려가서 上王을 복위케 하자는 것이었다. 이만한 병력을 가젔으면 넉넉히 될 만하였다.
잔챈 날이 이르렀다. 그날 幸인지 不幸인지 世子가 갑자기 잔채에 불참하게 되었다.
여기서 三門과 彭年 등의 심경을 잘 볼 수 있다. 그들은 (더욱이 三問은 시종의 職으로) 현 왕의 恩威가 具備한 王者的 氣風을 안다. 일즉이 世宗께 뽑히어서 몸소 世宗의 偉業을 보았고 文宗의 無爲를 본 그들은 지금의 上王과 王과를 對照하여 볼 줄을 알었다. 臣節로 보자면 上王께 死仕하여야겠고, 大局으로 보자면 上王을 弑할 수 없었다. 成 朴 등은 世子가 不參하였다는 이유로 완강히 거사를 중지하고 후사를 기다리자고 주장하여
愈應孚와 正面衝突까지 하여 중지시켰다. 무론 갑자기 謀事하였드니 많지 精銳分子만이 아니라, 일이 發覺나서 큰 일을 저즐를 각오는 하였을 것이다.
일을 중지한 이상은 십에 팔구는 발각될 것이다. 더욱이 智者가 많은 현정부에게... . 여기서 결사동지 중
金?이란 인물이 어차피 발각될 이상에는 자기가 압서 밀고하여 자기 죄는 赦함을 받고 償까지 타려는 욕심으로 그 丈人 鄭昌孫과 함께 密告를 하였다.
이 密告로서 事件의 全面이 들어나고 모도 잡히게 되었다. 여기서, 임군은 그들을 장차 죽이어야 할 것이나, 그 才質이 너무 아까와서 몇 번을 順應을 권하고 刑場으로 내보낸 뒤에도, 다시 承旨 하나를 따라보내서 또 다시 順應을 권하여 보았다. 그러나 慷慨를 爲主하는 文士나 일치한 武士나, 모도, 上王께 이미 목숨을 내놓은 이상은 돌이키기를 不肯하였다. 刑場으로 끌려 나갈 때에 成三門이 현 왕의 寵臣인 과거의 學友들을 돌아보며,
「자네들은 賢主를 도와서 太平을 이루게. 나는 지하의 故主께 뵈려 가네.」
한 말은, 의미깊은 말로 본다.
이 사건은 또 「臣心」을 음직여 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거에도 벌서 여러 번을 「上王을 外地로 보냅소서.」라 「降封합소서.」 「庶人으로 떨구소서.」 야단인 것을 王은 「不允」의 두 자로 버틔어 왔는데, 또 야단들이다. 그러나, 왕은 여전이 不允하고 단지 上王을 아직껏의 居所이든 昌德宮에서 錦城大君 舊宅으로 옴기었다.
그 뒤
宋玹壽權完이 逆謀를 한다고 告變하는 이가 있었다. 宋은 上王의 丈人이요. 權은 上王의 外叔이었다. 재상들은 또한 上王 처치문제를 꺼내었다.
왕도 할 일 없었다. 上王이 그냥 上王으로 있는 동안은 上王을 빙자하여 혹은 上王께 忠心으로 현 왕께 대항하려는 일이 뒤이어 날 것이다. 漢陽에 上王이 그냥 있어도 그런 일이 그냥 날 것이다. 여기서 上王을 魯山君으로 降封을 하고 寧越로 보내게 되었다.

왕은 密旨를 江原監司에게 나려서, 上王- 지금은 魯山君에게 물질적 불편이 없도록 하게하고 魯山을 모시든 宮女, 宦侍 등을 뒤따라 보냈다.
이것으로 魯山 문제는 끗난 줄로 았었다. 그랬는데 順興에 定配가 있든 錦城大君(왕의 同母弟요. 魯山의 삼촌)이〈113〉 魯山 복위를 回謨하노라고 동지와 병사를 몹다가 발각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야단을 하였다. 그 새 寧越에 가 있는 동안도 연하여 야단하였지만 이 사건이 일어나자 더윽 야단하였다. 魯山이 生存한 동안은 이런 일은 그냥 있을 터이니 圖謀합시사고.
아직껏 꾸준히 이런 上啓에 不允의 두 자로 대하든 왕은 이번은 할 일 없어
「죽이지는 차마 못하겠으니, 庶人이나 만들어라.」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 들을 리가 없었다. 私恩은 私恩이고 국법은 국법이니 宗社에 得罪한 이를 어찌 그냥 둡니까. 近言 亂言者는 모도 魯山을 핑게하오니 이제도 그냥 두었다가는 결코 안됩니다고 宗親府, 議政府, 忠勳府, 六曹가 함께 上啓하여 가련한 少年王者는 그 최후를 보게되었다.

이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데 이보다 썩 後年 成宗朝에
南孝溫이란 文士(今日의 小說家에 해당할 듯)가 당시 上王께 殉한 成, 朴, 등 六臣의 忠烈에 감하여 붓한 기록은 원체 傳聞에 의지하여 쓴 것이니 많지 誤記도 만커니와 六臣의 忠誠을 말하자니까 上王을 폐위, 降封, 賜死한 世祖께 대한 由筆도 많었다.
日字의 틀리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柳成龍이 지적한 河緯池(六臣 중 一人)의 再仕日字 등은 置之하고라도, 丙子年 正月에 病死한
申叔舟 夫人 尹씨를, 소설화하여 「成, 朴등은 죽었는데 申叔舟는 의기양양히 집으로 돌아오므로 尹부인은 이를 부끄러히 여겨 목매 죽었다.」등 6월에 자살한 것 같이 만들었다.
뿐더러, 成, 朴, 成父, 愈 등등이 선위시부터 벌서 上王 復位를 圖코저 자살치〈114〉 않었다고 하였으나 만약 그렇다면, 都摠管 成勝의 군사와 愈의 훈련원 군사를 가젔으면 비단 明使來朝時가 아니라 그 후에라도 언제던 거사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요, 더욱이 그런 密謀가 그런 장기간을 (年餘이다.) 발각 안 되었을 까닭도 없고,
金?이 年餘를 감초아 오다가 그날따라 密告하였을 까닭도 없다. 하물며 黃甫仁, 金宗瑞 등을 誅할 때부터 悲憤慷慨하였다. 운운은, 당치 않기 짝이 없다.
요컨대 南孝溫의 秋江集 六臣專은, 六臣의 충심을 表揚키 위하야 저작한 한 개 소설로서 소설인지라, 사실과는 相違 내지 상반되는 점이 많다.
그러면 春園의 端宗哀史는 어떤 것인가.
南孝溫의 「六臣傳」에서 가장 부자연히 보이는 것은, 단종의 諸臣이 일률로 世祖(首陽)께 대하여, 「나는 그대의 祿을 먹지않고 따로히 쌓어두었으며 稱臣치 안헛(
朴彭年은 啓文에 臣자를 巨자로 썻다. 운운)노라」고 하였다는 점이다. 대저 祿이라는 것은 國祿이지 王祿이 아니라는 것도 모를 六臣이 아니었을 것이고, 이 임군을 임군으로 섬기기 싫으면 爵을 던지고 낙향하여 晝耕夜讀으로 여생을 마춤이 穩當하겠고, 더 一步를 나아가서 上王 복위를 위하여 기짓 臣仕하였다 하면, 어듸까지던 표면으로는 順히 從하여 털끗만한 의심도 사지 않었어야 할 것이요, 朴彭年의 「巨」자 운운의 모험은 절대로 피하여야 할 것이다. 더욱이 시종의 職에 있어서 매일 新王面謁하는 成三門이 1년 간을 어떻게 稱臣하지않고 지났으랴.
부자연한 억설일뿐 아니라 잘못하다가는 六臣을 몰상식한 사람이라는 오해까지 일으키게 하기 쉬운 망년된 說이다.〈115〉

春園의 『端宗哀史』
春園의 「端宗哀史」는 南씨의 六臣傳을 骨子로 삼어 쓴 이야기다. 南씨의 六臣傳이 가진 바의 矛盾이며 부자연까지도 모도, 판단과 수정이라는 途程을 過하지 않고 그대로 계승하였는지라, 전체적 「이야기」로서 이 구성에 관하여는 여기 재론할 필요가 없다.
이 이야기는 端宗大王의 탄생에서 비롯하여 端宗大王의 승하로서 끗을 막은-한 개인의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전설이지 한 사건의 발단에서부터 종결까지의 「潭」이 아니다. 潭도 아니매 더욱이 소설은 아니다.
南孝溫의 六臣傳이 六臣의 忠烈을 表彰하기 위하여 적지 않게 世祖를 誣한 형적이 있다. 그것을 골자삼어 쓴 이야기 인지라 역시 그 譏를 면치 못하리라 본다.
이 이야기가 東亞日報에 연재될 때에 이 이야기를 두고, 두 가지의 상반된 독자가 생겼다. 절대적 歡呼層의 독자와 誹譏層의 독자- 이런 두 종류이다. 그 두 종류는 前後者를 다 또한 둘씩에 나눌 수가 있다.
즉 歡呼層의 독자를 두 종류로 나누자면 하나는, 未知事- 옛날의 宮廷과 양반계급을 등장인물로 하여 역사적 사실을 대중화하여 널리 알려준데 대한 歡呼이요, 남어지 하나는 古史를 보고 늘 端宗의 薄命한 일생을 서러워 하든 사람이든가. 혹은 그 사건의 端宗측 인물의 後孫이 되든가 하는 사람이다.
또 誹譏層 독자를 나누자면, 하나는 春園이 그럴듯이 묘사한 宮廷 혹은 양반계급의 생활, 풍속, 습관, 제도 등등이 하나도 정작과는 비슷도 안하여 애당초〈116〉 읽을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層이요. 또 하나는 南孝溫의 稗史에 수긍치 못하든가 혹은 세조측 인물의 후손되는 사람들이다.
과연 無識(갑자기 다른 용어가 생각나지 않어서 이 용어를 쓰지만)한 독자는 歡呼하였다. 궁중사건은 민간에는 諱之秘之하여 오든 이 王朝라, 秘하는 자에게는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이 인정으로, 이 백성들은, 宮廷錄이라면 머리를 싸매고 달려들 형편이었다. 거기다가 春園은 「宮廷 풍습 제도는 이러이러하였다.」는 듯이 보통 풍습과는 다른 풍습을 창작하여 써 넣었다. 「無識」이란 것은 불상한 것이다. 무식한 독자들은 春園의 이 멀정한 거짓말-創作風習 (宮中이며 兩班宅의)에 연방 머리를 그덕였다.
우리는 「端宗哀史」를 펴놓고, 이야기로서의 효과의 善否를 檢키 전에, (枝葉的의 일이나마 春園의 창작 풍습, 제도를 살펴보자.」

일일히 다 들추자면 「端宗哀史」의 첫 頁에서 끗 頁까지 모도가 창작풍습이라 불가능한 일이니, 중요한 者만 보기로 하자.
그보다 먼저 한 개의 삽화를 기입할 것이 있다.
이 「端宗哀史」 중에, 경성 南大門에 커다렇게 걸려있는 「崇禮門」이라는 三字가 世宗大王의 제 3왕자
安平大君의 필적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余는 春園에게, 「그것은 安平이 아니라 讓寧大君(世宗大王 습듸의 伯兄)의 筆跡이라고 온갓 문헌에 나타나 있다.」고 알으켰더니
春園은 「누가 쓰는 現場을 보았답듸까. 어느 全羅道 유생이란 말도 있읍듸다.」
고 우서 버렸다.〈117〉
이것이 「端宗哀史」를 쓴 春園의 태도다. 즉 말하자면, 어느 大君의 필적이라는 것은 들은 법한데 安平이 문장이 용하였다 하니깐 崇禮門의 현판을 안평의 필적이라 속단하여 버린 모양이다. 그런 뒤에 진정한 주의를 들어도 표면자기의 그릇을 수긍치 않는다.
이 이야기의 가운데 나오는 임군과 왕비에게는 모도 地文에도 敬語를 썼는데 그 경어가 어떤 때는 경어인지 욕인지 구별키 힘들게 되있다. 「안게시었다.」하면 좋을 것을 「엇지 않으시었다.」하는 등의 용어는 둘재두고, 임군이 이 전편에서 한 번도 「용안을 드시지」못하고 「얼굴」을 들고 「마리(하다못해 머리)를 돌리시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시는 등, 너무 상쓰러운 것은 둘재두고, 웬 「놈」이 그리 많이 나오는지 임군, 대신들은 막론이요. 재상가 부인네까지가 모도, 「
鄭麟趾놈이 여사여사합니다.」 「 金宗瑞놈이 이러저러 합듸다.」... 그놈이 어떻고 이놈이 어떻고- 마치 병문친구들의 대화나 다름이 없다.
무론 궁정용어라 하는 것은 註를 달지않고 그대로 쓰면 독자도 모를 것이고 독자는 커녕 웬만한 재상가에서도 이해치 못하는 말이 많었다하니, 궁정에서의 대화를 그대로 쓴대야 무의미한 일이지만, 조금 더 한자를 많이 넣어서 쓰고 또한 조금 더 점잖게 쓸 필요는 있을지니, 이 「端宗哀史」의 最初의 대화로 나오는 것이 궁녀들이 世宗大王께 왕 탄생의 喜報를 아뢰는 것으로서,
「상감마마. 세자빈께옵서 시방 순산하시어 게십니다.」
「이 해에 경사가 많구나. 종서(金宗瑞-때의 左議政)가 六진을 진정하고 돌아오고 또 원손이 났으니, 이런 경사가 또 있느냐.」
이렇게 되었다. 임군이 신하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 承傳色(宦官)이 왔다면 모르거니와〈118〉 宮女가 나오기가 뚱딴지다. 전편을 통하에 내내 임군있는 자리에는 반드시 궁녀가 모시었으니, 이것은 작자의 오해이다. 정 일품 「嬪」에서 비롯하여 종 구품「奏羽」 「奏變宮」 등에 이르기까지의 內命婦가 內殿 이외- 더욱이 男姓宰臣들이 모시고 있는 자리에까지 나온다는 것은 좀 과한 망발이다. 대화도,
「상감마마. 원손 탄강하오섰읍니다.」
「금년에 과연 경사가 많고나. 좌상(左相)이 六진을 진정하더니 운운.」
등, 한문을 좀 더 많히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 때의 점잖은 사람의 용어는 한문에다가 토만 겨우 조선말을 달은 것 쯤이지 오늘날까지 조선말이 남어있는 것은 전혀, 常人이나 부녀자의 덕택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자초지종으로 양반이거나 常人이거나 부녀자거나 꼭 동일한 말을 썼다.
「상감마마」라는 칭호도 一考할 필요가 있다. 大內에서 부인들이나 宦官들은 임군께 대해서는 「상감마마」라 한 듯하다. 그러나 보통 신하들은 「殿下」라고 불러 모섰지 상감마마라 하지 않었다. 이 「이야기」전편을 통하여, 전하라 부른 것은 한 곤대 인가 두 곤대 밖에 없고, 그 밖은 다 상감마마라고 되었는데, 이것도 잘못이다.
임군이 三公에게는 相禮로 대하는 제도인데 「宗瑞가」운운도 안되었거니와 여기 뿐 아니라 이 「이야기」에는 대화에서 제 삼자를 화두에 올릴 때에, 모도 그 姓名을 불렀지 칭호로서 말 한 것이 없다. 예컨대 대화 중 「金判書가 여사여사하고 「李參判이 이러저러」하다는 곳은 없고 모도가 「金 아모개」 「李 아모개」- 게다가 때때로는 「놈」까지 부처서, 賤人들의 대화가치 만들어 놓았다.
전편을 통하여 대화며 용어가 천스럽지 않게 된 곳을 찾자면 至難(한 곤대도 없는지도 모르겠다.)한〈119〉 일이니까, 이런 것은 일일히 집어낼 수 없고 다른 방면으로 보자.


端宗이 즉위 후 慶會樓에 혼자 배회하며 (임군은 재위중 「혼자」라 하는 경우는 단 一秒라도 없다. 심지어 用便도, 「매화틀」이라는 運搬便器에 內待扶掖으로 본다.) 어떤 때는 「얼음이 얼거든 핑구나 돌릴까.」 생각하며 (임군이 핑구라는 이름은 커녕 구경이라도 한 일이 있을까.) 임군이 궁녀들과 산보할 쩍에 대신이 內裏까지 혼자서 뛰처들어와 임군께 뵈오며, 端宗이 上王이 되어 壽康宮으로 나온 때 주머니에 「돈」이 없어서 초를 못사오고 (돈은 李朝에는 孝宗朝에 처음 鑄하였다. 그 전은 楮布다.) 매일 朝會를 받고 (朝會라는 것은 節日이나 혹은 무슨 受稅할 일이나 그런 등 事가 있는 때야 있다.) 아모에게나 金生員 李進士라 부르며 (生進科에 급제한 사람이 아니면 이 칭호를 못 부른다. 지금은 함부로 영감, 진사, 주사 등으로 부르나 당시에는 白面이면 단지 서방이다.) 임군이 당신의 부왕의 생각을 하는데 「아바마마」며-이런 풍습, 습관, 제도상의 실수를 찾어 내자면-아니, 도리어 실수 아닌 것을 찾자면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여기는 대궐에 어떻게 얼컨하게 관련이 있는 사람의 집은 모도 「宮」이라 하였다. 首陽大君宮, 安平大君宮, 무슨 君宮, 부슨 尉宮, 심지어 惠嬪楊씨 궁이라는 것까지 있다. 하인배들의 간편을 위한 지칭으로 駙馬宮, 무슨 洞宮 등으로 불리우는 일은 있으나, 정식으로 궁호가 나리기 전에는 궁이 될 까닭이 없다. 더욱이 楊씨는 中人집 딸이라, 제 친정으로 돌아갔으면 소슬대문도 못할 평대문의 민가요〈120〉 자가를 장만하였으면 楊씨 宅이다. 이전에 모씨의 모야담에 「尙宮마마」라는 것이 있어서 苦笑를 금치 못하였더니 이것도 거기 그다지 손색이 없다.
文宗 妃를 매번 「顯德嬪」이라 하였다. 顯德嬪이란 것은 대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더욱이 「열네살에」 良?로 東宮에 들어와 5년 지나서 良媛으로 封하다.」하였다는데 良?는 從 2品이요 良媛은 종 2품이라 아마 良媛으로 東宮에 들어와 良?로 進封이 되었달 것을 꺼꾸로 쓴 모양이다. 燃藜室記述에는 「初封承徽(종 4품), 進封良媛, 後遂封 世子嬪」이라 듸었다. 그 뒤 世子嬪으로 책되었으면 거저 「世子嬪」이요, 세자가 후일 등극한 때는 왕비요, 왕의 승하 후에 繼王이 바친 호가 「顯德王后」이다. 왕(文宗)의 陵이 顯陵이기 때문이다. 顯德嬪이란 것은 존재치 않었다.
이 「이야기」는 맨 첫줄부터 맨 마즈막 줄에 이르기까지 「네-이-」라고 길게 뽑아서 하는 대답은 한 군데도 없다. 아렛사람이 웃사람에게 대하여 하는 대답도 모도 今日의 平交끼리의 대답인 「예」 한 마듸로 되었다. 임군이 世子嬪을 부르는데
「아가. 듣거라.」
운운은 고소를 지나칠 일이다.
신하가 임군께 자칭하는데, 「소신이 여사여사」라 하고 하였는데, 이도 과오로서, 藩邦으로 自任하는 朝鮮서는 「陛下」라 못부르고 「소신」이라 자칭치 못한다.
이 「이야기」로 보자면, 아렛사람이 웃사람게 뵐 때는 반드시 꿇어 앉는 것으로 되었으나, 조선의 실풍습에 잇어서는, 아렛사람은 웃사람 앞에 반드시 읍하고〈121〉 서있어서야 하며, 계급의 차가 조금만 벌러지면 楹內에 조차 들어서지를 못하고, 좀 더 벌러저서는 臺石(댓돌)우에도 올라가지 못한다.
쇤네(소녀)라 할 것이 전부 소인이라 되었다.
便服이라 할 것이 전부 平服이라 되었다.

요컨대 「이야기」의 줄기는 宮廷秘話이면서도 宮廷이며 巨族들의 생활습관, 풍습 제도 등은 시골(시골서도 양반없는 평안도나 함경도) 土豪의 집안 이야기나 다름이 없이 되었다. 대궐이나 顯家의 습, 속, 제 등은 엿볼 바이 없다. 우에 기록한 것은 그 대범한 자이고, 細少한 一句까지도 모도 시골 土豪의 생활이지 궁중이나 대가의 생활이 아니다.
무론 궁중풍습의 細少한 자는 大官도 알지 못하는 배요, 內官이라야 비로소 알배이지만 대범한 것까지도 알아보지 않고 상상뿐으로 섰다 하는 것을, 작자가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신문사에서 그 신문의 편집국장의 직을 가지고 餘暇에 쓰는 것이라, 참고할 겨를도 없기는 없었겠지. 그러나 너무도 이붓 자식 취급한 점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端宗哀史」 중 이런 이야기가 있다.

(略) 成三問이 北京갓든 길에 어떤 사람(중국인)이 조선 문장 은다는 말을 듯고 墨畵白鷺圖 한 폭을 가지고 와서 畵題를 청하였다. 三問은 그림을 보자말자 「雪作衣裳玉作趾, 窺魚蘆渚幾多時, 偶然飛過山陰墅, 誤落羲之洗硯池」〈122〉
라고 불러서 명나라 사람들을 놀래었다고 한다. 아무리 三問이 詩는 잘 못짓는다 하더라도 이 만큼은 그도 詩人이다.(略)

이상은 대체 三門이 詩를 잘 짓는다는 칭찬인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稗官雜記」에 잇는 아레와 같은 삽화를 春園이 誤釋한 것이다. 즉, 三問이 北京에 갔는데 그 곳 사람이 白鷺圖를 (펴 보이지는 않고) 題詩를 請한다. 그래서 三問은 「雪作衣裳玉作趾, 窺魚蘆渚幾多時」라고 부르는데 그듀Œ야 그 사람은, 白鷺圖를 펴보인다. 보매 墨畵圖라, 「雪作」 「玉作」은 안되었다. 여기서 三問은 頓智를 내어 「偶然飛過山陰墅, 誤落羲之洗硯池」라 下句를 불러서 「雪」과 「玉」의 땜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맛 것을 誤釋하리 많지 한문지식이 약한 春園이 아니다. 이붓 자식격으로 대스럽지 않게 붓을 잡았기에 이런 실수가 생겨난다.

우에 기록하니 만치 개괄적으로 결점을 들추엇스면 인제부터는 逐頁檢討를 하기로하자.〈123〉
〈104-123〉





잡지명 삼천리 제10권 제10호
호수 제10권 제10호
발행년월일 1938-10-01
기사제목 春園硏究(11), 『端宗哀史』(此項 承前)
필자 金東仁
기사형태 문예평론

사건의 발단은 世宗 23년 7월 23일로 시작된다.
이 날 왕실에 원손이 誕降하였다. 지금 임군의 맏아드님인 왕세자의 원자로서 장차 왕세손으로 책봉이 될 분이요 겸하여 장차에는 이 나라의 임군으로 등극을 할 귀한 영아었다.
마츰 집현전에 입직한 두 학사
申叔舟成三問(장차 이 왕손이 등극한 뒤에 그분께 申은 逆臣이 될 사람이요, 成은 충신이 될 사람이다)을 데리고 産報를 기다리든 임군은 男孫 誕降이라는 보도에 매우 기뻐하는 일방 거느린 두 신하에게 원손이 장래 등극하는 날에 잘 보좌하기를 당부하였다.
그 뒤에는 이야기는 一轉하며 이 임군의 가족 상태를 알려준다. 이 임군께는 원비 탄생의 왕자라 세자까지 여듧분이나 되는데, 다른 왕자는 다 건강하고 더욱이 제 2의
首陽이며 제 3의 安平 등은 패기만만한 인물임에 반하여 세자는 우애심은 지극하나 건강이 아조 나쁜 분이다. 그러니만치 원손 誕降은 더욱 경사이며 왕가 기업은 더욱 튼튼히 하는 초석인 동시에, 원손의 叔들이 너무 괄괄하므로〈212〉 근심도 적지안케 된다.
그런데 이 가련한 원손은 誕降 이튼날 그 생모(세자빈)을 여이어 홀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
이리하여 초단을 막음하고 사건은 12년을 건너뛴다.
「그렇게 조선을 위하여 큰 일을 많이 하신
세종대왕께서 경오년 2월에 승하하신 지 삼년이 지나서 지난 2월에 대상이 지나고 그 후 석달이 못 되어 임신 5월 14일에 우리가 지금껏 세자라고 불러오든 문종대왕께서 승하하시어 이제 12살 되시는 아기께서 왕위에 앉으신 것이다」
작자는 이렇게 말하여 12년 전 탄생의 왕손의 등극을 報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작자는 서술의 순서를 일헛다. 상기와 같이 소년왕의 등극을 報한 직후에는 붓을 돌아서서 다시 3년 전 세종대왕 승하에서 비롯하여 문종대왕 승하까지를 뒷걸음처서 報하였다. 그런 뒤에는 다시 또 뒷걸음처서 顯德 왕후(소년왕의 모후) 승하 이후로 돌아 섯다가 또 썩 뭄러서서 문종의 初娶인 徽嬪 金씨 때부터 문종의 情史를 기록하기 실로 30년 數頁 (博文書?版 초판)에 互하였다. 그러나 기교상으로 보던지 효과상으로 보던지 문종의 情史는 원 줄기에는 아모 필요가 없는 자로서 12頁 쯤으로 간략히 처지하여 버릴 종류의 것이었다.

이러틋 서술의 순서가 바꾸이어 등극한 新王이 다시 왕세자로 되고 승하한 선생이 다시 왕이 되고 과거의 왕(문종)의 情事가 나오고 老臣들에게 세자 顧命이 나리고 혹은 전혀 이 이야기와는 관게가 없는
權陽村의 삽화의 5, 6頁을〈213〉 허비하는 등, 이 순서 바꾸인 것이 실로 제 18頁에서 비롯하여 104頁까지 근 90頁에 互하였다.
그 다음에 幼王 등극으로 돌아온 뒤의 첫 장면은
權擥과 수양대군의 密議다.
권람의 생각에는 남이 내게 불충 불효하드라도 『그러면 어떠냐』하고 치지도외 하겠지만 수양대군은 그렇지 아니하여 자긔의 불충 불효는 용서하드라도 남이 내게 대한 불충 불효는 수호만큼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작자는 이렇게 써서, 여기서 두 사람의 성격을 갈라 세웟다.
그러나 (아레서 기회 있는 때에 다시 지적하겠지만) 작자는 이야기의 진전을 기정 코- 쓰에 끌어너키 위해서는 언제던 작중 인물의 성격을 무시하기를 주저하지 안는다. 더욱이 역사 物語에 있서서는 史的 코- 쓰를 조차가기 위하여 작중 인물의 성격은 조석으로 변하는 일이 흔하다.
제 95頁에서 작자는,
「(略) 이것이 왕의 마지막 말슴이었다. 그 뒤에 몇 번 눈을 뜨시었으나 말슴은 못하시고 운명하시었다.
이 날에 수양대군의 실망이 어떻게 컷든 것은 궁에 돌아오는 길로 사모를 벗어 동댕이를 치어서 모각이 부러진 것을 보아 알 것이다」
즉, 왕의 승하를 본 뒤에 수양은 집에 돌아와서 權擥과 의논을 하였는데 작자는 이미 쓴 바를 이저버리고 수양과 權이 상의하는 도중에도 2, 3차 「王의 壽가 경각에 있다」는 뜻을 말하여서 독자로 하여금 왕이 승하하였는지 아직 생존 중인지 갈피를 차리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이야기 진전을 독자에게 미리 암시하기 위하여 수양으로 하여금 평범한 愚問을〈214〉 연발케 하고 權을 명쾌히 대답을 하여서 수양을 愚人가치 만들은 것도 불찰의 하나이라 할 수 박게 없다.
이 수양과 權과의 密議로서 「顧命篇」은 끗난다. 顧命篇은 장차 진전될 이야기의 서두와 밋 장래의 암시는 어느 정도까지 되었으나, 작품으로서는 실패었다.

「顧命篇」의 뒤에 「失國篇」이 게속된다.
이 작자는 어느 작품에 있어서던 반드시 善人(主人 主公 혹 기타)에 대하여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의 악인을 대립시킨다. 이 「端宗哀史」에 있어서도 顧命篇에서 벌서 至善至聖한 왕과 대립시키기 위하야 수양의 가장 평범하고도 무의미한 행동에까지 모도 장차 簒位를 圖한다는 암시를 보여주었고, 失國篇 첫 머리에
韓明澮라는 악의 대표를 등장시켰다. 이 韓明澮를 악의 대표로 만들기 위하여는 韓의 외모까지도 붓끗이 능히 寫出할 수 있는 최대 능력을 다하여 흉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고 또한 韓의 심리 상태를 그려 가르되,
「한명희는 열 달을 못 채우고 지레 낳을 때에 선악을 가리는 량심 하나를 잊어버리고는 다른 것은 다 찾아가지고 나온 것이다」
하여 표리가 상부한 악인을 만들었다.
이 韓明澮는 松京 敬德宮직이란 말직에 있으면서 가진 악행 비행을 다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왕이 승하하면 세자가 襲位키 전에 수양을 즉위케 하여 자기는 佐命 元勳이 되어 보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선왕 승하 幼王 承位라는 대사가 실행된다. 그래서 韓은 자기가 서울에만 있었드면 이렇게는〈215〉 안될 될것이라고 내심 이를 갈면서 다시 이번은 도적 괴수가 되어 한번 설레어 보아서 잘 되면 조선왕이라도 되어보고 못 되더라도 도적 괴수로 안락한 일생을 보내 보려고 부하들에게 그 방면에 관한 일을 알아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高宮美爵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안허서 서울 權擥에게 「지금
안평이 神器를 엿보는데 웨 수양대군이 일어서지 안느냐. 그대는 수양대군을 가까히 모시거늘 웨 가만 잇느냐」는 힐책의 편지를 보낸다. 회답은 곧 왔다. 상경하라는 회답이었다. 韓은 즉시 상경하여 수양대군에게 謁하고 노골적으로 簒逆을 권고한다.
노성한 작자의 붓은 惡 책사로서의 韓을 여지없이 그려내어 대가로서의 필력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악」을 너무 과장하다가 작자는 그만 자기 함정에 빠진 감이 없지 안타. 韓明澮 같은 책사가 수양의 내심을 충분히 타진하여 보지도 않고 簒逆을 進言할까. 이야말로 일보 잘못하면 목이 열 개라도 당하지 못할 일을...
과연 수양은 전혀 逆心은 없는 듯이 보여서 韓으로 하여금 가슴 서늘케 한다. 붓이 미끄러저서 이런 난국을 만들어 놓은 뒤에 작자는 어낍게 이 장면을 전개시키려다.
148頁에서 149頁로 게속되는 幾個 대화는 약간의 무리는 면치 못하나 이 난국을 용하게 타개하였다. 그런 뒤에 韓은 수양께 불평객들을 많이 수하에 몹기를 進言하고 도도한 웅변으로서 지금의 改局과 거기 처할 수양의 입장 등을 進言하여 일회에 수양이 신임을 어더서 그 뒤부터는 수양邸에 무상 출입을 하게 되었다.

다섯달이 지나간다. 다섯달 뒤 禁奔競案으로 조그만 파란이 있고, 거기서 작자는 안평을 선인화하기 위하여 몇 군대 붓을 놀렸으나, 이 대목은 이야기의 원 줄기에 그다지 필요치 않으므로 그냥 책장을 뒤어
다음 대목에는 明國에 謝禮使를 보내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는 종친 원로들이 제각기 자기가 가려고 경쟁을 한다. 수양도 그 틈에 한목 끼웟다.
만약 수양으로서 무슨 야심이 있다 하면 일각이라도 서울을 떠나지 않고 기회를 였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 使行이 서울 있는 것 보다 더 큰 효과를 수양에게 줄 것이므로 이러틋 힘있게 경쟁하였다 하면, 작자는 수양이 燕京에 다녀온 뒤에 이번 使行의 덕으로 어떤 報를 받었다는 것을 독자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자는 수양이 격렬히 경쟁하든 전말은 쓰고도, 다녀온 뒤에는,
「명나라에 다녀온 뒤로 수양대군의 세력은 흔들 수 없이 되었다」
는 지극히 모호한 一句로서 거더치워 버렸다. 웨, 또는 어떠케 흔들 수 없이 되었는지는 일언 반구 없었다.

드듸어 癸酉년 10월 10일의 變事가 폭발이 된다. 韓明澮의 進言으로 불평객을 많이 기르든 수양은 이 날 드듸어 거사키로 한다.
다른 때는 술 어더먹는 맛에 호기를 뽑고 하는 불평객들도 이 날은 의논이 분분하여 歸一치를 않는다. 이것을 않이꼽게 본 수양은
林藝 한 사람만 데리고 金宗瑞(當面의 巨敵)를 타살하려 간다.〈217〉
이 장면의 군중 심리를 잘 처리한 붓은 그 다음 순간은 시간적 착오를 일으켓다. 즉 수양이 말을 하고 金宗瑞의 집으로 떠난 뒤에 韓明澮가
洪允成을 金宗瑞의 집으로 염탐하려 보냈다 - 작자는 이러케 말한 뒤에 金宗瑞의 집에는 洪允成이 먼저 도착하여 들어가서 술까지 어더 먹고 돌아간 뒤, 宗瑞 혼자서 애첩에게 따르라 하여 술을 많이 먹고 취담을 한 뒤 저녁상이 들어온 때야 수양이 도착하였다.

여기서부터 사건은 차차 긴장되어 간다.
만약 제도며 습속에 대한 작자의 세밀한 연구와 주의만 있었드면 하는 감을 금할 수 없도록 붓은 자유로히 흘러서 사건을 차차 긴장시켜 간다. 野花의 삽화는 無用長物이다.
수양은 金宗瑞를 처리한다. 그러고는 의기 양양히 歸邸하여 韓明澮 權擥 등을 인솔하고 왕의 行在所인 寧陽尉
鄭悰(왕의 매부으로)간다. 여기서 善者와 惡者는 더욱 분명하여 간다. 수양의 수족인 300 군마는 호위 겸 시위 겸으로 이 집을 둘러싼다.
이러한 가운데서 수양은 왕께 뵙고 지금
黃甫仁, 金宗瑞 등이 안평대군을 끼고 역모를 하기로 일이 급하여 上啓치 못하고 金宗瑞부터 죽이고 지금 上啓하는 것이니 곳 처분하여 줍시사고 청(위협일까)을 하여 역모를 얻고 宰臣들을 行在所로 부른다.
이 야밤에 이러난 참극 - 韓明澮는 生殺簿를 가지고 중문 안에 앉었고 대문 안에는 鐵如意를 가진 역사들이 지켓다가, 殺簿에 찌킨 宰臣이면 타살하는〈218〉 양은 너무 慘하다는 감이 없지 안토록 작자의 붓은 날카로웟다.
이러는 중에도 장래의 암시를 질기는 작자는
黃甫仁이 行在所로 오는 길에 某에게,
「나는 君命이라, 死地인 줄 알면서도 가기니와 후사를
成勝兪應孚에게 부탁하게」
하는 말을 하게 하여, 장차 上王 복위 운동의 2대 武夫의 이름을 미리 암시하여 두었다.
여기서 악은 더욱 악다히 黃甫仁의 머리를 잘라다가 夜半 침침한 燭下에 어린 왕의 아페 이것을 내밀어서 왕을 더욱 놀나게 한다.
여기서 수양은 領相, 吏兵兼判 內外 兵馬都統使가 되어 왕 한분 박게는 軍國의 최대권자가 되엇다.

악과 선의 대조 강화는 차차 더 심하여 갓다.
왕이 수양대군에게 나리는 敎書(무론 칭찬하는 뜻이다)를
柳誠源이가 지은 것인데 柳는 장차 사육신의 1-2이니만치 그를 두호하기 위하여 「요점은 鄭麟趾가 불러 준 것이라」하여 선을 자초지종으로 선으로 하려고 圖하엿고 수양에게 아첨하는 무리들을 더욱 과장하여 악담게 하는 일방 許?가튼 선인을 강화하여 許로 하여금 滯座 중에서 수양을 욕하게 한다. 그러나 許?의 영웅적 善駕임을 강조하려는 이 장면은 도리어 수양의 (욕을 먹고도 방임한) 관대한 면을 보여주기 쉽다.〈219〉

이번 수난의 중심인물이라 지목한 안평대군은 定配를 보낸다. 그러나 諸臣에게는 맹렬한 반대가 일어난다. 당연히 극형에 처할 것이지 웨 定配쯤으로 끗막느냐는 것이다.
수양은 누차 거부한다. 동생을 차마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즈막에는, 「그렇기로서니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죽인단 말이야?」
이러케까지 말한다. 그러나 諸臣은 「죄가 없이 지금 定配를 가니 전국 동정이 모이기 전에 죽여야 한다」고 그냥 주장한다.
이것은 작자의 과오로 본다. 죄가 없는 줄 마음으로는 알지라도 표면으로는 유죄로 인정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장면에 있어서 가장 독자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점은 수양의 성격 변화다. 아직것의 성격으로 보자면 수양은 목적을 위하여서는 결코 수단을 가리지 안흘 사람이다. 사실 수양이 대위를 엿보는 사람이면 안평은 당연히 제거하여야 할 방해물이다. 웨 이러틋 보호하나.
그 의문은 즉시 풀린다. 수양은 諸臣들에게 졸리우다 못하여 마지막에
「모도 상감 처분이시지.」
하여 자기는 殺弟의 악명에서 버서나고서 諸臣들에게 직접 상감께 조르라는 암시를 한다.
악은 차차 더 과장된다.
그러나 아직도 독자가 미흡히 생각하는 점이 있다. 일즉이 權擥, 韓明繪 등의 신통치도 안흔 꽤에 感不服之하든 수양이 어느 틈에 이러틋 권모술을 배웟는가.〈220〉
직접 상감께 조르라는 수양의 내의를 들은 鄭麟趾 이하 諸臣은 왕을 차자 들어갓다. 그 때는 왕은 궁녀들을 거느리고 慶會樓에 나서 「어름이 얼거든 핑구나 돌릴가」등의 공상을 하며 잇슬때엇다. 그 때 鄭 이하는 아모 예고도 없시 여기까지 돌입을 한다. 실제에는 존재할 수 없는 無禮다. 왕은 단연히, 鄭등을 上啓에 대하여
「죄없는 안평 叔을 웨 죽이느냐」
고 거절한다.
鄭 이하의 諸臣은 무효히 물러나와서 大諫 李謀를 수양께 보내서 수양이 직접 윤허를 어더야겟다고 알리엇다. 이 보도를 듯고 수양은 또 「안평을 죽여야 하는가. 그러나 차마 아우를 어떠케 죽이랴」고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다가 마지막에 역시 책임을 왕께 돌리고저
「상감 처분에 달렷지 내야 아나」전과 꼭가튼 대답을 한다.
이 회보를 듯고 鄭麟趾는, 率百官 啓請하기로 작정을 한다.

이날 밤 成三問의 집에서는 중대한 회합이 잇섯다. 이 「端宗哀史」중에 수양의 정치에 반대하는 사람 전부가 모인다. 웨 이야기에 등장을 안하는 사람 - 예컨대
金時習가튼 사람들 - 도 참가하게 안하엿는지, 이것은 작자의 不用意로 볼 수 잇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도 마치 퇴위나 한 듯이 비분 강개한다. 웨 이다지도 비분 강개해 하는지는 독자는 이해키 곤란하다. 죄없는 안평을 죽이자는 것이〈221〉 淸白한 선비의 마음에 거슬리기야 하겟지만 정도를 지나처서 비분하여 팔을 뽐내면 야단들을 하엿다. 그리고 마즈막 결론으로는, 밝는 날 만약 鄭麟趾가 百官을 거느리고 안평을 죽이기를 소청하면 자기네는 따로히 나서서 그것을 반대하려 하엿다. 그러나 자기네들과 가튼 미관 말직으로는 힘이 적을테니 高室 하나를 수령으로 추대하여야 겟다고 하여 許?를 선택하고 그를 방문하여 승낙까지 얻는다.
이쯤서부터 작자의 붓은 약간 진보되어 (습관, 풍속 등 까지는 못 미처도) 제도 등에 대하여서는 초두와 가튼 망발은 차차 적어나갔다.

안평도 드듸어 賜事되엇다. 문사들의 조그만 운동이 거대한 권력 아래 움직일 수가 없섯다.
그 뒤부터 작자의 붓은 커다란 과오를 범하엿다.
한참을 연속하여 수양의 改治를 극력 찬송한 것이엇다. 宮紀振肅이며 諸政 쇄신 등은 무론이요 「수양이 조카님되는 왕께 기픈 애정을 가지게 되어 능력이 밋는 껏 왕의 몸과 마음을 평안케 하고 어서 사직의 후계를 엇기 위하여 諒闇중임에도 불구하고 諸臣의 반대를 일축하고 왕비를 마저 들여서 세종대왕 이후 늘 분요하는 세상이 다시 평안하게 되엇다」하엿다.
이러케 만드는 것은 이 이야기의 목적으로 보아서 적지 안흔 과오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지금껏 어린 임군을 동정하여 그 반대되는 「악」을 만들고, 誣에 가깝도록 수양 밋 그 일당의 하는 일을 나쁘게 들추어 왔다.
그런지라 여기 있어서도 이야기의 통일을 도모하려면 반드시 수양의 모든〈222〉 조흔 정치도 한낫 인심을 모려는 계책에서 나온 행동으로 써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전혀 작품 통일을 일케 하는 과오이다.
이 數 頁의 수양 정치 찬송은 작자로서는 그다지 대수롭지 안케 여기고 썻슬 바이지만 이야기 전체를 두로막에 꺽거 놋는 커다란 실수엿다. (此項 未完)
(大病을 알코난 뒤 두뇌 활동도 아직 회복되지 안헛스므로 이만큼만 하여 둔다)〈223〉
〈212-223〉

잡지명 삼천리 제11권 제1호
호수 제11권 제1호
발행년월일 1939-01-01
기사제목 金東仁
필자 春園硏究(12)
기사형태 문예평론

端宗哀吏(承前)
이 아레 하참은 首陽이 兵, 政 兩權을 잡은 뒤의 일을 적었다. 그러나 아직꼇 首陽의 성격과 그 성격에서 우러난 인격을 확립치 못하니만치 여기서도 讀者는 首陽을 본체를 잡기 힘들다. 首陽이 이전 遺賢들을 모도 자기 傘下에 모으고저 공작하는데 있어서도 어떤 때는 「단매에 따려 죽이고 싶어지만 人心을 사기 위하여 감정을 꾹 참고」 그들을 찾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의와」 의리를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하여」찾는다. 해서 수양이 과연 「惡」인지 「善」인치 - 이것을 다시 뒤채어 말하자면 癸酉年 事變이 단지 首陽의 야심에서 나왔는지 혹은 원대한 게획에서 생겨난 것인지 모호하게 되었다. 만약 首陽으로서 의를 사모하는 사람이면 癸酉事變도 「이를 사모하기 때문에 행한 非常行動」이라 볼 수도 있으므로...

禪位나 한 듯이 悲憤케 함

대체 이 이야기에는 「이야기의 進行」에 대한 작자의 선입관이 있기 때문에 작자는 「좀 더 이야기가 진행키 전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흔히 적어 넣였다. 癸酉變亂 直後에 成三問 등 젊은 儒生들이 마치 禪位나 한 듯이 悲憤해 하는 것도 「장차 禪位를 한다」는 작자의 선입관의 산물이다.<216>
이런 과오는 아레 또 나온다. 왕(端宗)이 內官女臣들과 경회루에 산보를 할 때에 鄭麟趾가 또 여기 겁적 뛰처들어온다. 豫通도 없이 政院(史官)의 立會도 없이 政丞이 內殿까지 뛰처든다는 喜劇을 작자는 또 다시 犯한다. 鄭相은 임군께 인사의 말슴을 여쭌 뒤에는 「은밀히 아렐 말슴이 있으니 雜人을 물리처 주시기」를 청한다. 거기 대하여 임군은
「내가 무어 잘못한 것이 있오? 내가 덕이 없어서 날마다 좌상에게 잔소리 - 아차 잔소리가 아니라 충간이드라, 충간을 듣는 것은 세소공지어든 곁에 사람이 있기로 어떠하오」
하고 핀잔을 준다. 이것도 「作者가 鄭相의 장차 할 말을 豫知」하였기에 임군까지도 이린 豫感的 역정」을 내게 한 것이다.
이 王의 豫感的 역정을 마치려는 듯이 鄭相은 王께 禪位를 面請하는 것이었다. 이것 또한 讀者에게는 不自然키 짝이 없으니 책략과 학식이 過人한 鄭相이 이런 拙劣한 (실제로는 잊이 못할) 수단을 취하였슬 수가 없다. 無言의 威脅을 가하여 임군으로 自退케 하던가 혹은 「上王」이라는 향그러운 미끼로 임군을 속이던가 할 것이지,
「알외옵기 황송하오나 보위를 수양대군에게 사양하시오」
이런 무엄한 말은 (아모리 首陽이라는 배경이 있을지라도) 君臣間의 체면상 못할 것이다. 실재의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야기」로서의 진실성이 적으면 소설가는 이를 추려서 소설화할 필요가 있거늘 이 「實在치 못할 일」까지도 再檢치를 많은 것은 作者의 放心으로서 그 책임은 피치 못할 것이다.

事實의 合理化에 대하여

여러 가지의 暗鬪가 있은 뒤에 大勢는 거술릴 수가 없어서 드디어 端宗은 首陽께 禪位를 한다. 이 禪位의 절차같은 것은 참고할 文獻이 있음즉한데 웨 이렇듯 싱거운<217> 式次를 말들었는지? 儀式을 존중하는 朝鮮이라 한편으로는 壯嚴味가 있었을 것이오. 사건이 사건이라 殺氣와 悲痛味는 이 이야기의 진행으로 보아도 다분히 보였어야할 것이다. 만약 이 儀式節次가 참고할 곳이 없으면 「경회루에서 선위식이 거행되었다」쯤으로 간단히 넘기고 거기 대처한 사람들의 심경을 좀 더 확연히 그려서 眞實味를 가할 필요가 있다 본다. 너무도 사실이라는데 관심키 때문에 소설가로서의 상상의 날개를 봉쇄하여 버린 것이다.
이렇게 禪位가 되고 前王(아직 尊號를 안 바첬으니 上王이 아니다)은 그날 밤으로 경복궁을 나서서 壽康宮으로 移御한다.
그 뒤에도 新王(首陽)의 마음은 독자를 霧中에 끌고 다닌다. 三尺童子라도 알만한 일을 明澮輩에게 꺠침을 받은 뒤에야 了解하는가 하연 어떤 때는 諸葛亮以上의 策謀를 쓰는 신왕 - 어느 것이 진정한 新王인가.

新王登極

세월은 흘러서 丙子年-.
新王登極에 대한 誥命과 冕服을 나리기 위하여 明나라의 使臣이 온다.
上王께 충성되기 때문에 新王께 마음으로 복종치 안는 몇몇 신하들은 이 기회에 新王과 新王世子를 弑하여 버리고, 上王을 복위케 하고저 꾀한다, 그러나 불행이 일은 事前에 발각이 되어 그 主謀者들은 모도 新王前에 親鞠을 받게 된다.
옛날 成宗朝의 儒生이요 소설가인 南孝溫의 著作한 6臣傳, 秋江冷話 등을 그대로 밟은 「端宗哀史」의 作者는 南孝溫의 그릇된 관찰이며 細工까지도 그대로 踏襲하였다.
신왕이 成三問에게 대하며
「내 祿을 먹고 어이 나를 배반하느냐」는 힐문에 대하여 成은
「나는 그 祿을 그대로 창고에 쌓어두었오」 <218>
하는 등이며 朴彭年에게 新王이
「그럼 네 어찌 내게 稱臣했느냐」
할 때에 朴은
「稱臣한 일 없오. 啓文에 臣字를 쓰지 않고 巨字를 썼오」
하는 등은 전혀 옛날 儒生의 小細工으로서 成이 「國祿」과 「王綠」을 구별치 못하는 小人이 아닌 이상은 이런 幼穉한 말로 王께 항변하였을리 없고 朴이 深謀遠慮의 사람(과연 그러하니 上王禪位 前에도 後約을 期코저 참지 않었는가)인 以上은 이런 小細工을 하여 자기의 심경을 위험線上에 暴露치 않었을 것이다.
南孝溫은 꽤 소설가적 小細工이 교묘한 사람이었다. 그는 當年에 발생된 사건을 모도 검토하여 端宗悲劇에 附會시킬 수 있는 사건이면 모도 끌어당겨 비극적 加味를 最高度에까지 달케 하였으니, 申叔舟夫人 尹氏의 죽음이라던지 河緯地의 落鄕이라던지(尹氏는 丙子事件보다 반년 앞서서 病死하였고 河緯地는 端宗遜位 以前에 落鄕하였다가 新王(世祖)朝에 禮曹?判에 취직한 것이 史上事件이다) 무엇이나 얼커리가 있기만 하면 모도 비극적으로 소설화하기에 게을르지 않었다. 이렇게 사실을 無視하고까지 소설적 加工을 하는 것은 좀 어떨지 모르지만, 이 南氏의 소설에 一字一劃을 加滅치 못하고 충실히 그를 현대어로 곤처만 놋는다 하는 것도 찬성키 힘든 일이다.
그런지라 소설상 성격의 통일이라던가 순화라던가 하는 수법을 모르는 옛날 소설가 南孝溫의 범한 과실은 그대로 「端宗哀史」에도 옮아젔다. 作者는 10餘面에 ?하여 이 新王의 「愛士」하는 사실을 또한 기록하였으니 과연 이 임군이 「善」인지 「惡」인지 더욱 어즈러워 간다.
이리하여 忠議編은 끗나고 血淚編으로 들어선다.<219>

血淚編의 벗 남이어

血淚編 80面는 아름다운 詩다.
무론 여기도 作者의 放心의 産物인 蹉跌(例컨대 王都事가 魯山을 寧越까지 押途하여 도착한 날 저녁 혼자서 비감하여 강변에 노래 부르는 것을 궁녀가 들었다고 作者는 말하는데, 그 때는 아직 궁녀가 도착키 전이다)이며 新王의 不統一된 言行 등이 있기는 하지만 血淚編 總體의 성과로 보자면 그것쯤은 눈감어도 무관할 줄 안다.
일즉이는 한나라의 임군으로 그 뒤는 上王으로 떠러저서는 魯山君으로 山村에 구양사리하는 이 少年貴人은 그래도 오직 마음의 착하고 어질기 때문에 역경을 역경으로 보지 않고 당신의 불행을 슲어하지 않고 오로지 王者다운 慈愛心으로 좌우를 대하여 敵까지도 감복시키고 감화시킨다.
이 아름답고 순정적인 詩는 대단원으로 향하여 나러간다. 이 血淚編을 本編으로 삼고 그 전의 복잡하고 불순하든 경과를 ?話로 끼어 넣었드면 도리어 작품전체를 한 개의 아름다운 비극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을! 可惜한 일이다.
餘音 길게 뽑는 이 血淚編으로서 新聞紙上 數百回를 나려오든 李朝 500年史 중 가장 애처럽고 구슲은 이야기는 幕을 다친다.

왕실과 서민계급의 상관성

요컨대 이 端宗哀史는 南某氏의 「六臣傳」의 現代語化에 지나지 못한 것은 作者 스스로 可惜히 여기어야 할 것이다. 李朝 27代 君主 중에 兩班게급 이하인 庶民에게까지 그 業蹟이 미츤 분은 世宗大王 한분 뿐이다. 이 世宗의 직후에 생긴 端宗事變을 物語化함에 있어서는 당시의 사회상이며 王室과 庶民게급의 관게도 좀 더 밝히어서 世宗聖主의 御長孫으로서의 朝宗께 서민들은 愛慕의 念을 바첬기 때문에 그의 禪位를 痛哭하도록 이야기를 구성할 필요도 있을 것이며, 그런 大事件이 일개 王族의 야심의 산물이라고 간단히 처리하기 전에, 「그런 사변이 생길 必然的 原因」이 있을 것을 再考하여<220> 보아서 사실에 대한 소설로서의 진실성을 더 굳게 고정시킬 필요도 있고 政治勢力에 대한 투쟁보다도 정치이데올로기의 투쟁도 살펴 볼 필요도 있다 본다.
小說構成에 있어서 沒覺할 수 없는 이런 여러 가지의 문제를 度外視하고 단지 「어린 몸으로 마음에 없이 禪位를 하고 마즈막에 가련한 最後까지 보았으니」하여 少年王이니 불상하다 하는 단순한 견해로 결말을 지었는지라, 이것은 인생의 일면도 아니요 當年의 사회상의 검토도 아니요 단지 少年王의 一代記에 지나지 못한다.
새도운 소설의 수법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하는 옛날 南孝溫같은 사람도 역사를 소설화하여 보려 노력한 흔적이 너무도 뚜렸한데 어찌하여 이 作者는 단지 南氏의 노력을 그대로 再敷衍하고 自家의 전개를 전혀 할 생각을 않었는지.
史話의 記錄者이라는 書記役에서 「史實의 再生」이라는 小說家役으로 躍上할 노력을 撤棄한데 이 「端宗哀史」의 致命傷이 있는 것이다.<221>
<216-221>

잡지명 삼천리 제11권 제4호
호수 제11권 제4호
발행년월일 1939-04-01
기사제목 春園硏究(13)
필자 金東仁
기사형태 문예평론

『흙』

雄建한 文學의 産出機運

以上 「無情」에서 「端宗哀史」까지 그 동안에 작품으로 나타난 것을 대강 말하였다.
「再生」을 쓰는 前後에
春園의 생명을 위협하는 병도 나아서 차차 건강을 회복하여가서 이전에 입든 양복은 모도 품이 좁아질 형편이었다. 이러한 육신상의 건강은 필연적으로 좀 더 雄健한 문학을 産出케 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 것도 과한 망발이 아닐 듯 하다.
그러나 신문사의 봉급생활이라는 굴레를 쓰고 있으매 붓의 자유로운 활동은 불가능케 하는 듯 하였다.
「群像」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三部作인 이 「群像」은 과거의 그의 소설의 嚴正한 의미로서의 一節일 뿐이었다.
「李舜臣」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端宗哀史」보다도 더한 「實錄의 번역일 뿐이었다. 「忠武公日記」를 번역한 한낱 傳記일 뿐이었다. 더욱이 그때 東亞日報社에서 忠武公의 사당을 修築하고저 全朝鮮에 웨칠 때에 한 개 인기정책으로 「李舜臣」이라는 소설을 제조하기를 명하였는지라 그 주문에 의지하여 제조한 工作物일 뿐이다.<198>
이러는 동안에 전세계를 漂浪하든 赤潮는 조선에도 들어와서 맹렬한 세력을 이루었다. 春園의 지도자요 마음의 스승인 사람이 이 사상을 절대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드니 만치 春園도 이 사상에는 반대의 입장에 섰다. 그러나 迎合性과 雷動性이 풍부한 그로서 전혀 이 圈外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思潮의 原體인 勞農大衆이라는 데다가 민족주의를 加味하고 朝鮮農民啓發運動이라는데 흥미를 붙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가 창작적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 「흙」이다.

無情과 再生과 흙의 類型

「無情」에서 「흙」에 이르기까지에 春園이 만들은 장편 현대소설이 세 편이다. 「無情」 「再生」 「흙」 이렇게.
이 세 편이 플랜에 있어서 어찌 그다지도 유사점이 많은지 이 세 소설의 男主人은 모도가 年齡과 직업과 교양과 환경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 悲壯癖, 志士癖, 浮動性, 英雄感,空想癖, 自己虐待癖 등 성격상으로는 同一人인 것과 같이 세 작품의 여주인공(주인공의 애인 혹은 안해)도 한결 같이 虛榮癖, 無性格性, 浮弱性, 無貞性, 美貌, 牛首讀經式의 無智 등등이 너무도 같고 女配役으로는 반드시 활발하고 슬기롭고 말 잘하는 中性 男女性의 선배 노처녀가 나오고 미국박사(無情에는 없다)가 나오고 敵役인 色魔가 나오고 雄辯家인 哲學老婆가 나오고 이리하여 비슷비슷한 길을 밟다가 비슷비슷한 결말을 맺는다. 「흙」후의 작품인 「그 女子의 一生」이며 「사랑」도 역시 같어서 영웅벽을 가진 男주인공과 無性格型인 女주인공과 츠근츠근한 好色漢과 能辯인 中性女의 합작인 新派喜劇이다.

農村生活과 그 思想

이 소설에 한참 나려가다가 어떤 농촌 청년이 자기 어머니가 호박잎을 담배 대신으로<199> 쓰는 것이 보기 어려워 짚세기를 삼어다가 팔어서 장수연(長壽煙)을 사다 드렸다는 대목이 있다. 장수연은 도회에서 먹는 담배요 농촌에는 희연(囍煙)이라는 좀 더 값싼 것이 있다. 농촌에서 희연을 먹으면 그야말로 상팔자다.
그러나 작자는 희연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장수연을 등장시켰다. 농촌 청년의 효심이 갸륵하여 장수연을 산 것이 아니다. 朝鮮 농촌이라는데 대해서 이만치 인식이 적은 작자가 이 作에서 주인공 許崇으로 하여금 농촌啓發에 활동하게 한데 이 작품은 출발부터 未洽한 점이 있다. 도회인이 책상머리에 앉어서 상상으로 생각하는 조선 농촌의 고민과 현실과의 새에는 상당한 어귿남이 있지 않을까. 도회인이 「이러하리라」고 동정하는 방면에는 의외에도 농촌인이 痛療을 느끼지 않는 자가 많은 동시에 도회인이 평범히 보는 일 가운데 도리어 큰 고통이 있지 않을까.
이런 일은 흔히 인생생활에서 보는 바로 예를 들 필요도 없지만 이런 착각 때문에 일껏 쓴 호의가 생색 없어지는 일은 너무나 많다.
현명한 이 작자는 이 점을 고려하여 주인공 許崇을 농촌 태생의 청년으로 삼었다. 그러나 小學부터 專門 마추기까지 근 20년을 학생생활이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生長한 崇이 그때까지도 아득한 옛날의 농촌생활의 호흡(그것은 농촌에 가정을 가지고 그 생활감정 가운데 잠긴 뒤에야 알 수 있지 수개월의 시찰쯤으로는 무론 모를 것이다)을 그냥 이해하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도 설명하지를 않었다.
이 소설은 許崇이라는 전문학교 생도가 여름방학에 고향인 농촌에 돌아와서 야학을 가르키다가 上京하는데서 시작된다.<200>
새벽차에 떠나는 許崇이를 이 농촌의 소녀 「유순」이가 옥수수 네 이삭을 쩌 가지고 와서 전별을 한다. 그때 허숭은 유순이의 손을 잡고 머리를 쓸어주며
「내년 여름에 다시 올게」
하고 작별을 한다. 이 단순한 한 장면은 이 소설 끝날 때까지 독자에게 커다란 의문을 주고 종내 해결을 안 주엇다. 이 異性에게 손을 잡히고 머리를 쓸리면서도 부끄렴을 느낄 줄 모르는 소녀가 性이나 혹은 연애라는 것을 아는 여자로 볼까. 만약 아직 천진한 소녀라면 이때의 許崇의 약속인 「내년 여름」을 한없이 기다렸고 여름이 되어서는 매일 아츰 낮으로 정거장 쪽을 바라보고 기다렸고 許崇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였다할 때에 절망의 충동을 받은 것은 웬일일까.
뿐더러 許崇이 자신도 이 소설 全編을 통하여 마치 그 때의 「내년 여름」이란 약속을 혼인 약속이나 한 것 같이 중대시하고 다른 여인과 결혼을 할 때도 이것이 마음에 꺼리었고 後「유순이」가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내가 유순이와 걸혼해 주지(준다는 것은 施惠的 의미일까)않기 때문에 이런 불행이 생겼다」고 책임감을 느낀 것은 전혀 까닭을 알 수 없다. 대체 情愛라는 것은 신비 감정이니 이런 추궁은 않는 편이 좋을지는 모르지만.

貴族主義者

이 첫 장면을 지나서는 서울 許崇이가 寄宿하고 있는 윤참판 댁이 나온다.
富豪요 귀족인 윤참판에게는 장발한(무론 장가들은) 아들과 시집 안 간 過年한 딸과 어린 아들이 있다. 그 중 不足症으로 장남이 죽는 사건으로 第二景이 열린다. 여기서 작자가 新孀 며누리에 대하여 좀 상세하게 성격과 환경을 독자에게 보고한 것은 아마 장차 이 여인도 作中 중요인물로 등장시켜 귀족가의 추태을 보이려든 복선인 모양인데<201> 그 의도를 내버린 듯 종내 재등장을 보지를 못하였다.
그 대신 金甲鎭이라는 城大學生을 등장시켰다.
「(上略)대채 시골놈은 너무 무지하거든. 내흉하고. 또 지방열이 강해서 서울사람이라면 미워하고 배척한단 말이야. 안 그런가. OO학교 교장이 시골놈이니깐으로 교원들도 시골놈이 많거든. OO은행도 안 그런가. OO신문사도 안 그런가. 그러니깐으로 시골놈들이 고약한 게지. 우리 서울사람 탓이 아니란 말이야.(下略)」
「(前略)어디 신문 잡지야 또 보기나 하겠든가. 요새는 그 쑥들이 언문을 많이 쓴단 말야. 언문만으로 쓴 것은 도모지 희랍말 보기나 마찬가지니 그걸 누가 본담(下略)」
金甲鎭은 이런 주의를 가진 사람이다. 가난한 양반의 자식이요 철저한 귀족주의자다. 이 金甲鎭이가 윤참판 집에 출입을 하고 그 집 딸(色과 財가 겸한)을 노리는 것이다.
許崇은 「無情」의 「리형식」이와 한판에 직어낸 성격의 사람으로 장차 高等文官試驗을 치르고 (許崇이와 같은 사람이 웨 高文試를 치르려 했는지는 작자는 一言의 설명도 없으니 독자는 리유를 알 수 없다) 그 뒤에는 농촌에 나려가서 농민운동을 하려는 사람이다. 多分의 悲壯癖과 英雄感을 가진 사람이다.
金甲鎭도 무론 高文試驗를 목적한다.
-이만한 前提면 독자는 이 작자의 소설조성수법으로 미루어 장차 許는 高試에 及第하고 金은 落第하고 許는 윤참판의 사위가 되고 金은 敵役으로 돌고 許는 돈보다도 안해보다도 「事業」에 몸을 바칠 동안 金은 게집에서 게집으로 뛰어다닐 사람이 될 줄은 미리 짐작할 것이다.<202>
그러나 許의 主義를 좀더 검토하여 보자면 (흙)제1편 제15회에서」
「농민 속으로 가자.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가자. 가서 가장 가난한 농민이 먹는 것을 먹고 가장 가난한 농민이 입는 것을 입고 그러고 가장 가난한 농민이 사는 집에서 살면서 가장 가난한 농민의 심부름을 하여 주자. 편지도 대신 써주고 주재소 면소에도 대신 당겨주고 그리면서 글도 가르켜 주고 소비 조합도 만들어 주고 뒤깐 부억 소제도 하여 주고 이렇게 내 일생을 바치자.」

이런 정도의 것이다. 무론 장차 진실한 의미로서의 「농민의 벗」이 되면 좀더 深刻하여지기도 할 것이지만 그래도 역시 「자기는 희생적으로」 「하여 준다」는 施惠的 의식은 좀체 뽑기는 커녕 자각하기도 힘들 것이니 책상머리는 어제까지던 책상머리인 까닭이다. 더욱이 高文試驗을 목적하는 그가 아닌가.

여기서 이 소설은 一轉하면서 新人物을 몇 사람 더 소개한다.
첫재로 韓民敎 선생이다. 韓선생은 일즉이 길에서 설넝탕 배달부의 자행거가 충돌을 하고 서로 네게 책임이 있너니 내게 책임이 있너니 다투는 것을 보고
「지난 일을 서로 책임이나 밀으면 무얼 하느냐. 파출소로 가거나 너의 집으로 돌아가거나 해서 결말을 지어라. 쓸데 없는 승강이는 웨 하느냐.」
하고 떼버린 일이 증명하는 바 같이 비상히 명석하고 사리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요 지도자로서 남녀청년이 많이 그의 門下에서 나고 난 뒤에도 그냥 舊師를 사모하여 찾아<203> 다니느니만치 존경할 만한 인격이다.
이 韓선생이 30년간을 꾸준히 子弟數養에 힘썼는데 그 門下에 사상적으로 우수한 자가 생겨나지 못한 것은 韓선생의 感化力이 부족함인지 혹은 조선청년이 남의 感化를 안받도록 도저한 까닭인지는 작자의 설명이 없거니와 許崇도 金甲鎭도 모도 이 선생의 문을 두드리는 後生이다.
韓선생의 집 집합으로 제3장은 열린다. 이 집회에서 작자는 7, 8인의 才子佳人을 독자에게 소개한다. 이 才子佳人을 다 장차 소설에 활약케 하려든 처음 계획인지 혹은 작자가 소설의 진로를 확립치 못하여 미리 여러 才子佳人을 소개하였다가 장차 필요에 응하여 재등장시킬 자는 재등장시키고 버릴 자는 버릴 예정이었는지는 짐작할 길이 없다.
그 가운데서 작자가 장차 이용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보인 인물이 둘이 있다. 米國神學博士 李建永과 발명가 윤명섭이다. (윤명섭이는 作中에서 역시 쓸 데 없이 되어 재등장을 보지 못하였지만)
李建永도 작자의 처음 의도로서는 훌륭한 청년신사로 활약케 하려든 모양이었다. 이 작자의 수법은 만약 장차 李박사로 하여금 「치근치근한」 「여자의 웅덩이만 따라다니는」 「악의 없는 악인」 「전형적 米國박사」를 만들 예정이었으면 初登場에서 벌서 그 片鱗暗示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처음 소개에 더욱이 知人의 明이 있는 韓民敎 선생이 「장차 큰 일꾼 될 청년으로 衆人에게 피로하게 만들 것은 처음 의도가 달렸든 것이다.
이 집회에서 李박사는 沈順禮라는 처녀와 알게 된다. 鄭西분이라는 여학생도 참석하였다. (이 소설 제3편에서 작자는 어떤 착각으로인지 鄭西분은 沈順禮며 윤정선 윤참판의<204> 딸로 후일 許崇의 안해다)의 선생이라 하였다.
이 집회의 副産物로 李박사와 沈順禮는 사랑하는 새가 되었다.

이러구러 許崇과 金甲鎭은 高文試驗을 치르러 東京을 건너간다.
許는 及第하였다. 金은 落第하였다. 이 때에 기괴한 일이 독자의 앞에 전개된다.
「無情」에서 김선형의 아버지 金長老가 李亨植을 사위로 삼은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예수교인인 金長老는 스스로 開明하였거니 하는 사람이요 신식(金長老에게는 米國式이라는 편이 더 매력있을 게다.) 사상은 게급을 가리지 않는다 하여부러 李亨植을 사위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양반사상이 아주 철저한 윤참판이 어떤 까닭으로 자기의 귀한 딸을 시골 상놈의 자식이요 자기집 행랑방에 寄食하든 許崇에게 주려는 마음을 내었는지.
不可解의 사건은 이에 끄치지 않는다. 이 項 첫머리에도 지적하였거니와 이 혼인문제를 提議 받은 許崇이 단지 「내년 여름에 다시 오마」한 시골소녀 유순이와의 약속을

「(上略)제게는 유순이라는 여자가 있고 일생을 농촌에서 농민교육운동을 하기로 작정했읍니다. 그러니까 따님과는 혼인할 수 없읍니다. 만일 따님과 혼인하면 첫재로 유순이라는 여자에게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中略)저를 믿고 기다리는 유순이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崇의 인격의 명령이요 야심의 명령이었다. 만일<205> 이렇게 대답했으면 숭은 얼마나 갸륵할 것인가.(下略)

云云하여 許崇과 유순이의 세에 무슨 약속이나 있었든 듯이 만들어 독자를 의아하게 한다.
이 不可解事의 뒤를 이어 第3 不可解事 나타난다.
多分의 志士癖과 英雄癖을 가지고 있는 許崇이가 만약 如上한 마음이라면 단연코 윤참판의 혼인제의를 사졀하고 허머와 괭이를 들고 농촌으로 나려가서 비장한 심경으로 모기와 빈대에게 뜯기며 희생적 심경으로 유순이의 남편이 되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許는 잠시 유순이 때문에 주저한 뒤에는 흔연히 윤참판의 사위되기를 승락하였다. 말하자면 許崇이는 성격으로건 신념으로건 주의로건 아직 확립성을 못 가진 사람이다.
崇이가 존경하는 韓선생께 뵙고 자기의 혼약전말을 보고하매 韓선생은 「그러면 부인이 농촌생활에 견디어 백이지 못할 것이니 서울서 변호사가 되라.」 권한다. 그러나 짐작컨대 尹正善(尹참판의 딸)과 결혼을 안했다손 치드라도 許崇은 완전한 농민 지도자가 되지 못할 사람인줄 현명한 韓선생은 짐작할 것이다.
「무엇이던 개인주의로 이기주의로만 마시오. 허군 한몸의 리해와 고락을 표준하는 생각을 말고 조선 사람 전체를 위하야 이하겠다는 일만 하시오. 그 생각으로만 가시면 서울에 있거나 시골에 있거나 또 무슨 일을 하거나 허물이 없을 것이오.」<206>
韓선생은 이렇게 깨처준다. 여기서 작자의 설명은 없지만 아마도 韓선생의 뜻은 조선사람 전체의 리라 하는 것은 조선 사람 個個人이 죄 행복되게 된다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지 어느 단체나 어느 게급이나 어느 집단을 지정하여 그의 경제적 無憂만을 뜻함이 아닐 것이다. 許崇이의 直한 성격과 용기를 아껴서 許崇이가 단지 자기의 출생지인 살여울部落(약 50戶 되는)만의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그의 專門出身의 학력을 포함한 全人格 全生涯를 바치겠다는 이기적(單一人보다는 약간 대규모지만)심정을 버리라는 뜻도 섞이어 있었을 것이다.
이 뜻을 작자도 몰랐거니와 許崇이도 몰랐다. 許崇은 내일이 결혼식 날이라고 몇 곤대 들릴 친구에게 들려서 둘러리며 그 밖 혼인에 대한 준비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그의 약혼자(내일부터는 안해다)가 벼란간 박아지를 긁는다. 연유를 알아보니 그 날 살여울 처녀 유순이 한테서 許崇에서 「비록 잠시라도 당신(선생님이 아니고 당신이다-評者)품에 안겨본 당신께서 저를 잊어버리신다고 저맞아 당신을 잊고 이 몸과 이 마음을 가지고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없나이다. 云云의 (작자는 그 점을 부인할 지 모르나 多分의 시기가 섞인 편지가 온 것을 正善이 먼저 뜯어본 것이다.
순이의 시기와 許崇의 「순이게 대한 의무감」이 不可解인 점은 우에도 여러 번 적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보고

-숭은 다 읽고 나서는 힘없이 방밖에 떠러트렸다. 그리고 그날 밤이 새도록 잠을 못 이루고 고민하였다. 밤중으로 유순이게 달아나려 갈까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차라리<207>정선과 윤참판에게 남아답게 혼인을 거절하고 유순이에게로 갈까-그러나 내일이 혼인례식인데 내일 오후만 지나면 만사는 해결되는데...

이 소설보다 15, 6 년 전에 쓴 「無情」의 李亨植이가 영채때문에 잠 못 이루는 장면과 字字句句까지도 너무도 같은 공상과 번민을 하는 것이다.
이 동안에 지방에서는 米國 박사 李建永은 심순례와 口頭約婚을 해서 처녀의 감정만 농낙해 놓고 돈 많고 세력있는 某名門令孃과 다시 혼약하려 들어 차차 본색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혼약에 일부 책임이 있는 韓선생이 노여워 새 규수의 본댁에 李建永의 過去行狀을 알려 드디어 兩兎를 쫓는 者 한 兎도 못 얻었다.
-이리하여 「흙」 제1편이 끝난다.<208>
<198-208>

잡지명 삼천리 제11권 제7호
호수 제11권 제7호
발행년월일 1939-06-01
기사제목 春園硏究(十四)
필자 金東仁
기사형태 문예평론

『흙』(續)
「흙」제2편은 농촌의 모내는 데서 시작이 된다. 이 소설의 목적이 농촌 소설이었든 것을 작자는 잊지 않은 것이다.
농촌의 모내는 사람 가운데 「유순이」가 있다. 許崇이에게 대한 유순이의 이해할 수 없는 妻感(?)이 또 나온다.

(前略) 허숭이가 곧 유순이의 하늘이오 땅이오 해요 달이요 생명이었던 것이다.
이 남자 저 남자 입맛을 보고 살맛을 보아 물었다 뱉었다 하는 도회 신식여성과 달라, 허숭은 유일한 남편(傍點評者)이오 남자였던 것이다. 허숭이 이전에도 남자가 없고 허숭이 이후에도 남자가 없었던 것이다.
허숭의 마음이 변하야 다른 여자에게 장가 든 것을 본 유순은 하늘, 땅, 해, 달, 목숨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그가 조선의 딸의 맘을 그대로 지니지 아니하였다 하면 그가 도회식 이른바 신식 여자라 하면 울고 원망하고 미처 날뛰고 혹은〈242〉 서로 달려 올라가 허숭의 결혼식에 또는 가정에 한바탕 야료라도 하였을 이다.(下略)

이런 獨斷的 戀愛場面
작자는 무슨 암시를 미리 주었기에 독자에게 향하여 유순이와 許崇과가 보통 예사의 새가 아니라 믿으라고 강권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짧지 않은 소설의 종말까지 根氣 좋게도 그냥 이 축음반을 틀어 놓으니 작자의 근기와 의기는 장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독자가 일즉이 안 바의 유순이는 비록 許崇이가 일시적 양심 마비로서 유순과 肉交를 하였다 할지라도 유순은 그것을 일종의 신식체조쯤으로 여길만한 순진한 소녀었었다. 작자가 독자에게 보여준 許崇과 유순의 과거의 관게라는 것은 단지, 京城으로 떠날 때에 손을 잡고 머리를 한 번 쓸어주고 옥수수 네 자루를 얻어 가지고 「明年 방학 때 또 오마」하고 약속한-아조 평범하고 막연한 일에 지나지 못한다.
이런 독단 연애 장면이 너무도 거듭되고 거듭되며 불가해하게 정화하니까 그 매번을 들추어 내자면 한정이 없겠으므로 이 論에서도 그런 장면은 이하 모도 무시하여 버리기로 한다.

늙은이, 젊은이, 사내, 안악, 모도들 열심으로 모를 꽂고 있다. 이 현장에 이 땅의 지주 신참사와 농업기수 소위 황주사라는 젊은이가 온다. 정*식으로 잘 되었나 안 되었나〈243〉 감독이 심하든 시절이라 그것을 보려 다니는 것이었다. 그러고
春園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이 죄 가령 순사이면 「소설식 전형순사」요 고리대금자면 가장 「소설식 전형고리대금자」요 청년 부호, 노부호, 여교원, 목사, 모도 전형적 인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항주사는 가장 전형적 시골 관리었다.
이 黃吏가 유순이의 이쁘장스런 자태를 눈여겨보고 말이라도 붙이량으로 유순이의 정조식이 잘 되지 못한 것을 트집으로 이리 오라고 호령하고 호령이 즉시 시행이 안 된데 역정이 나서 유순이의 따귀를 따린다.
그 때에 한 「청년」이 나타났다. 딴데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농촌청년이었다. 「청년」은 유순이의 손을 잡은 黃吏의 손을 「으스러저라」하고 싹 쥐어 비틀고 조리를 들어 꾸짖고 黃吏가 여러 번 따려서 코피까지 나도 반항치 않고 구둣발로 나려 찌으려 할 때에 비로소 정당방위로 黃의 뒷덜미를 눌러버리고 그러고 다른 사람들이 달려들으려 할 때에 다른 사람은 밀고 자기 혼자서 黃吏와 승부를 다투려 하였다. 黃吏는 당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도망처 버렸다.
이만하였으면 무론 농촌의 有爲한 청년으로 이 작자가 장차 이 소설에서 유용하게 쓸 복선으로 장케 등하였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무론 여기를 쓸 때의 작자의 의도는 그러하였으리라. 그랬는데 이 청년(한갑이)은 그 다음에 그다지 신통한 인물로 등장치 못하였다.
이 동네에서 이러한 활극(관리를 두들겨 쫓은)이 생긴 이튼날 아츰 유순이가 아츰에〈244〉 우물에서 물을 길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붓드는 사람이 있었다. 보매 뜻밖에도 許崇이다.
유순이의 가슴이야말로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젔겠지만 모든 것을 꾹 참고 물동이도 나려트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허숭이는 남겨 둔 채로...

許崇이 발븐 人生行路
그러면 許崇이는 그새 어떤 인생행로를 밟었나? 아니, 작자는 許崇이에게 어떤 人生行路를 밟기를 엄명하였는가.
許崇은 그 안해 정선과 리혼(법적은 아니다)한 것이었다.
리혼의 近因은 어떤 소송사건(거대한 謝金이 들어올)을 許崇이 거절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遠因이요 또한 겸하여 전체적인 원인은 결국 성격과 이상에 대한 불합치었다.
첫재로 性과 愛의 문제에 대하여 부부는 완전히 의견을 달리하였다. 許崇은 유순이를 사랑하노라고 생각하고 그러케 생각하면서도 안해를 사랑하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만치 전혀 「사랑」의 ABC도 모르는 사람이다. 혹은 작자는 그러치 않다고 부인할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흙」에 나타난 무성격자인 許崇이는 「사랑」에 대해서 문외한이다.
정선이는 「사랑」에 대해서는 조선의 새로운 딸 전부를 대표하는 바 「연애를 연애」하는 여인이다. 육체적으로는 또한 성욕을 질기어 간간 남편이 예법에 맛도록 의식적으로 돌보아 주는 성행위로는 육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불만이 매우 크다. 〈245〉
이런 인조인간적인 許崇과 젊은 정열女인 정선이의 부부생활이 견디어 날 까닭이 없다.
단 여기서 독자가 의심하고 싶은 점은 건장한 남자인 許崇*가 안해에게 불만을 주기까지 절제를 하려면 적지 않게 자제를 하였을 터인데 거기 대한 고심이 조금도 작품면에 나타나 있지 않은 점이다.
崇이가 고향으로 돌아온 날 한갑이(黃吏를 두들긴)이하의 몇 사람이 잡혀갔다. 고향이라 하나 제 집이 없는 崇은 한갑이네 집에 있기로 한다. 이 한갑의 어머니라는 노파는 露西亞文學 전성시대에 露西亞小說에 흔히 나오는 노파型의 인물로 어떻게도 수다스럽고 이야기를 잘 하는지 한 번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고금동서의 시시하고 지저분한 사건 하나도 빼지 않고 느려놓고야 만다. 그러고 이 型의 인물을 春園은 질겨서 작품 중에 내고 그 노파를 통하여 작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는 것이다.

故鄕에 도라와서
崇이가 살여울(故鄕)에 돌아와서 얻은 지식의 하나는
「다섯 식구의 집안이면 논 닷 마지기 밭 이틀갈이 한 아궁지를 당할 뫼. 제 집 이것이면 거드러 거리구 산다」
하는 점이었다. 그러고 장차 이 살여울 동네 50호에만이라도 그것을 어떻게던 만들어 주어서 그들을 행복되게 하자고 굳게 결심을 한다.
대체 농민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겠다든 許崇이가 지금껏 농가 1호의 최소한도의〈246〉 1년 가계도 몰랐다는 것도 기괴하거니와 독자가 (만약)許崇이의 하려는 농촌사업에 약간한 촉망이라도 가젔다 하면 그것은 결코 한집 한집에 대한 토지 몇 마지기 기증(최다한도 50호)가 아닐 것이다.
법학을 전수하며 高文시험을 치르는 사람이 농민계발을 목적한다 하기에 벌서 의심적게 보았더니 결국 朝鮮農民 전체가 아니라 자기 고향 50호를 좀 더 아름다운 생활을 하도록 한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혹은 그것은 어떨까 했더니 그 50호에조차 계발이라는 것은 문제도 삼지 않고 토지 몇 마지기를 만들어 주자고 공상을 하는 따름이었다.
여기서부터 이 소설 종말에 이르기까지 독자가 해석할 수 없는 커다란 수수꺾기가 또 생겨난다.
이 때부터 이 소설의 종말까지 許崇은 혹은 자신을 위하여 혹은 사업을 위하여 혹은 타인을 위하여 금전을 물 쓰듯 쓴다. 그런데 그 금전의 출처를 알 수가 없다. 許崇이 변호사 노릇을 한 기간은 극히 짧다. 그 우에 작자도 말한 바와 같이 某大家의 사건에 승소를 하여 비로소 大家측들의 신용도 생기려든 지음이니까 그 이전은 아조 풋내기었을 것이며 主義的으로 보아서 富측보다 貧측의 사건을 더 많이 보았을 그이매 변호사로 돈을 번 것은 그의 생활비도 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인에게서 받았든 것은 반환하였다. 그러한 그가 웬 돈을 그렇듯 자유로히 썼는가.
許崇과 정선의 내외싸움도 정선인가 자기네 집 행낭의 내외싸움이라도 견학하였는지는〈247〉 모르지만 (아무리 싸홈에는 점쟎은 사람이 없다 치드라도) 점쟎은 집 딸로서는 공상으로도 생각하지 못할 행사를 남편에게 하였다. 여기도 부자연이 있다.
아니 도대체 許崇이 시골로 나려온 것부터가 부자연이다.
비장癖과 자기학대癖을 다분이 가지고 있는 許崇으로서는 안해에게 욕을 먹고 매를 맞을지라도 (무론 일시적 분노야 있겠지만)
「저것도 일종의 엉석이겠지. 나만 참으면 내일 아츰은 또 화평이 이를 껄」
하고 꾹 참어버려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의 스토리를 이렇게 진행시키려니까 작자는 許변호사의 의사를 무시하고 이혼, 下鄕하게 한 것이다.
20년 전 無情에 나타났든 李亨植의 還生體인 이 許學士는 공상, 몽상, 번민, 감격 등등을 거듭하든 끝에
「내 일생을 바처 (살여울 달여울인지) 동포를 도와보자!」
하고 크게 결심하고 그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한다. 시급한 일이 네 가지, 첫재는 의사를 불러올 것. 둘재는 먹을 것을 줄 것. 셋재는 파리 모기 빈대를 없이 하도록 할 것. 넷재는 黃吏 두들긴 죄로 잡혀간 사람을 나오게 할 것이었다.
崇은 읍으로 들어갔다. 경찰서로 가서 서장을 만났다. 여기 충분히 崇의 전인격과 智力이 드러나는 것이다.
농촌아동에서 사립 전문학교생으로 변호사로-이러한 인생행로를 밟은 사람이면 넉넉히〈248〉 조선 시골의 경찰서장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은 짐작을 할 것이며 관리 대 농민의 지위가 축산기수 대 가축의 지위와 大差가 없다는 점쯤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許學士는 서장을 찾어가서 이론을 베풀고 증거를 주장하여 무죄를 부르짖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종내 서장에게,
「법 이론은 후일 법정에서 하시오」
하는 조롱을 받고 물러 나온다. 그 다음은 公醫의 병원으로 간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黃吏(黃은 이 公醫에게 2주간 치료를 받아야 全快되리라는 진단서를 내어 한갑이를 고소하고 지금 입원 중이외다)와 어떤 매음녀가 지꺼려 대는 이야기가 마츰 그 사건에 관한 것이다. 즉 2주간 치료를 요하는 환자가 술만 먹고 노느냐는 등, 희롱을 하고 있는 것이다. 崇은 후일 법정에서 이것을 증거 삼으리라 마음으로 작정한다. 그러고 왕진비 매 10리에 5원 거마비 환자 부담이라는 엄청난 요금을 깍지 않고 의사를 데리고 살여울로 돌아온다.

崇은 강가에 집을 하나 짓는다. 노는 사람들을 삭을 하로에 1원식 주어서 짓기로 하였다. 그 어떤 날 저녁 숭은 몰래 유순이를 찾아간다. 거기서 유순이에게 대해서 한 말,
「내가 서울서 이리로 온 것은 동넷사람을 위해서 왔다면 왔달 수도 있읍니다. 그렇지마는 순씨가 없으면 나는 여기 오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249〉
즉 표면 리유는 농민을 위하여서이고 리면 진심은 유순이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불량소년이 소녀를 유인하는 말이다. 농민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겠노라는 壯圖를 품은 사람이면야 실수하여서라도 이런 말을 어찌 입밖에 내랴.
許崇의 新屋도 落成하고 한갑이의 어머니가 함께 옮아서 식사 심부림을 하고 살여울 동리에 많든 장질부사 환자들도 許崇의 정성의 간호로 적어지고 그러는 동안에 새로운 불행(幸일지)이 생겨난다. 유순이의 홀아버지가 장질부사로 죽는다. 그 뒤따라 유순이의 고모가 목 매고 죽는다. 이리하여 혈혈단신이 된 유순은 許崇이의 집에 와서 한갑 母와 동거를 한다.
그런데 禍不單行이라 許崇이 변호사의 자격으로 黃吏 상해범인 공판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병석에 너머지고 만다. 그 새 많은 장질부사 환자들을 취급할 동안에 崇도 감염이 된 것이다. 유순이는 지성으로 간호하다 못해 종내 崇의 안해 정선이(작자에게 말하라면 유순의 戀敵이다)에게 편지를 하였다. 한데 그 편지가 어찌도 그렇게 명문인지 朝鮮의 제1류의 文士로도 진정을 문자로 표현함에 그만치 쓸 사람이 쉽지 않을 것을 일개 농촌 처녀(小學 졸업이나 하였는지)가 쓴 것이다.
崇의 안해 정선은 남편과 싸우고 갈라지기는 하였지만 어떤 때는 그립고 어떤 때는 밉고 이러케 지나다가 유순이의 편지를 보고 허겁지겁 의사 하나와 간호부 하나를 데리고 남편의 있는 곳으로 나려간다.
그 기차에서 이 작자가 질겨 사용하는 수법인 「우연한 대면의」 장이 나온다.〈250〉

李建永 博士의 登場
李建永 박사가 崔某라는 여자와 기차를 탄 것이었다.
그런데 開城서 또 한 패거리의 우연한 同乘客이 생긴다. 미쓰 홀이라는 洋女가 沈順禮와 함께 기차에 오르는 것이였다.
일즉이 李박사는 沈孃의 감정을 짓밟어 주었다. 그 때문에 沈은 일생을 나앗지 못할 상처를 받었다.
미쓰 홀은 그 사정은 잘 알었지만 李박사라는 인물은 오늘 처음 본다. 미쓰 홀은 사랑하는 제자의 감정을 상처 내고 지금 또한 웬 처녀와 여행하는 李 박사를 못마땅하게 보아서 崔 某 孃에게도 들으라고 朝鮮말로 李박사를 면책을 한다.
이런 기차 奇遇(이것은 전혀 작자의 성벽에서 나온 것이지 이 장면은 송두리채 뽑아버려도 작품에 일호의 영향이 없다)를 지나서 정선이는 남편의 고향에 들어선다.

古聖의 歎息
古聖도 여인 御키 힘듦을 탄식하었지만 許崇과 같이 지도자적 의식을 가젔다고 자신하는 사람으로도 안해는 어찌도 그렇게 감화를 못시켰든지 정선이는 (남편이 과거에 가정과 안해를 버리고까지 달려온) 농촌사업은 존재조차 모르고 어서 남편의 병이 다 나으면 함께 상경할 생각을 하고 있다.
어느날 (인제는 병도 좀 나아서 둘에서 산보쯤은 할 수 있게된 때) 역시 부부는 서울로 가자거니 여기 있자거니 이야기가 났다. 그 때 남편이 안해에게 대해서 한 말
「(上略)대관절 이 공기와 일광이 서울 것과 같은 줄 아오? 당신 같이 몸이 약한 사람은 이런 조용하고 공기 좋은 곳에 살아야 하오. (略) 여기 있읍니다. 우리 여기 삽시다.〈251〉 여기서 농사하는 사람들과 함께 삽시다. 그리고 우리 힘껏 이 동네 하나를 편안한 새 동네로 만들어 봅시다. 이 동넷사람들이 서울서 내라고 하는 사람들보다 인생가치로는 더 높소. 또 조선은 10분지8이 농민이란 말요.(略)」
이만 정도의 것이다. 이만 정도의 말로 능히 서울에 대한 동경을 꺾을 수 있겠으며 농촌에 흥미를 일으키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즉 崇 자신이 농촌흥미를 모른다.
이리하여 상경할 것인가 이 곳에 주저앉을 것인가 태도를 결정치 못한 채로 제2편은 끝난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의 약 3분지1 가량이 되는데 이 소설의 목적이요 겸하여 許崇이의 사업인 농민향상운동은 꽉도 트지 안는다. 뿐더러 「시굴띠기가 되어서 농촌*로만 나려가려는 지아비」와 「양반 꼽재기가 되어서 서울만 살으려는 지어미」와의 개인적 갈등에 끈첬지 『시골을 대표하는 인물』과 『서울을 대표하는 인물』조차 나타나보지 못하였다.
이렇듯 시골이라는데 대하여 지극히 빈약한 인식과 지식밖에는 가지지 못한 사람이 장차 살여울 동리를 구조하려고 하니 매우 위험스러운 노릇이다. 許崇이가 일껏 구조행위라고 내심 득의만만하여 하는 노릇이 도리어 반대로 동네를 해칠 일이 안 되리라고 어찌 보증하랴.
이하 변호사 許崇의 다니는 길을 뒤밟으며 검사하여 보자. 그런데 春園의 소설을 토론함에 있어서 가장 불편을 느끼는 것은 「春園은 대체 자기의 쓰는 소설에 대하여 얼마만치의 관심을 갖고 있는가」 의심되는 점이다. 비근한 예지만 이 「흙」에 있어서도 許崇의 고향이 『살여울』이 되었다 『달여울』이 되었다 하며 『50호 250명』이 되었다 『100호 500명』이 되었다 하여 당초 대중을 잡을 수가 없다. (次號續)〈252〉
〈242-252〉


ID : ma_18_001_0220
잡지명 삼천리문학 제1집
발행년월일 1938년 01월 01일
기사제목 春園硏究(九), 繼續執筆에 際하여
필자 金東仁 김동인
기사형태 문예평론

春園硏究(九), 繼續執筆에 際하여 (춘원연구(구), 계속집필에 제하여)

金東仁
「三千里」 誌上에 『春園硏究』를 繼續執筆하든 것은 여러분이 다 아실 바이다. 그것을 겨우 작품기술 비평의 상반부까지 쓰고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2개년 간을 중단하였다. 지금 小閑을 얻어서 다시 집필을 게속하려 한다. 이달부터 게속하려 하였지만 뜻하지 않은 여러가지 바뿐 일이 중간에 뛰처나와서, 이 달은 뜻을 못이루고, 다음달부터나 하여보려 한다. 대체 『春園硏究』의 애독자가 그리 많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春園作品이라면 여니와 春園硏究- 더욱이 그의 작품에 대한 찬양보다 악평이 더 많은 글이라, 이런 글을 쓰기 때문에 多數人의 미움을 받을 줄로 짐작하는 배다. 그러나 春園과 余와의 개인적 우의는 결코 減損되지 않을 만치 春園은 아량이 있는 사람이니, 余는 余의 執筆慾을 억제치 못하여 多數人의 미움을 각오하면서도 이 글을 쓰려는 배다.
(이제 그동안 中絶된 지 己久하엿슴으로 전회에 낫든 春園硏究 제9를 再錄함니다. 제1로 제8까지는 단행본으로 낼 때, 合收코저함니다.(編輯子)<112>
麻衣太子
(麻衣太子도 東亞日報에) 「麻衣太子」도 春園의 대부분의 장편소설과 마찬가지로 東亞日報 紙上에 연재된 것이다.
그러나 이 麻衣太子에 대하여서는 그다지 쓸 말이 없다.
첫재로 이 麻衣太子는 작자의 본래의 플랜에 의지하여 쓴 者가 아닌 모양이다. 이 소설이 근 700面이 되는 巨冊인데도 불구하고 麻衣太子에 관한 부분은 겨우 그 말국의 數面에 지나지 못하고 4백여 面이나 되는 대부분을 弓裔의 이야기로 終始하였다. 아마 작자는 본시 먼저 弓裔로 시작하여 新羅末年의 어즈러운 정계를 성큼성큼 소개하고 麻衣太子를 주인공으로 삼은 본편에 착수하려던 것이 序編이 本格적으로 되고 너머 길어지므로 本編인 部를 간략히 꾸민 모양이다.
역사로 고찰하자면 金傳王의 世子되는 麻衣太子라는 사람은 「단지 역사를 배경 삼어가지고 태자의 인물과 성격과 행사 등은 순전히 작자가 창작을 하여서 뿐, 한게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잇슬 것」이지 史上의 麻衣太子는 이야기의 주인이 될거리가 없다.
市井의 한 好漢이던 金傳라는 사람에게 갑자기 왕위가 구을러 왓다. 그렇게 傳의 아들이 태자가 되었다. 그 뒤 新羅가 망하매 王되는 傳는 高麗의 臣子가 되어 高麗로 갓는데 太子는 그것을 깨끗다 아니하고 皆骨山으로 들어가서 餘生을 麻衣를 입고 草根을 먹으며 보냇다. 하는 것 뿐이다. 그런지라 亂局의<113> 新羅末年을 배경으로 이 麻衣太子를 주인공삼어 한개 이야기를 꾸미자하면 절호의 것이 꾸미어 질 것이다.
春園도 처음에는 그것을 뜻하엿스리라. 더구나 麻衣를 입고 石窟에서 여생을 보냇다 하는 태자의 비장한 마즈막은 春園의 질겨하는 배로서 이 한가지의 ?果를 겨누라고도 넉넉히 春園이 取材할 만한 者이다.
그러나 그 시초를 궁예에서 한 春園은 弓裔傳을 창작해 내는 흥미에 쏠려 버리고 말엇다. 더구나 이 半島에 大帝國을 건설하려던 弓裔의 雄志도 春園의 비위에 맛는 者로서 春園은 이 흥미때문에 이 소설의 제목까지도 이저버리고 붓을 그리로만 돌렷다. 그러면서도 거북하기는 한지 나려가다가 한 두번 억지로 장래의 麻衣太子를 등장시키고 그 註로서 「이 분이 장차 마의태자가 될 분이다」고 暗示는 있지안코 하였다.
그런지라 이 이야기의 제목이 「麻衣太子」라 된 것은 잘못된 일이다.
또한 이 「麻衣太子」는 소설이 아니다.
소설로서의 일관한 이야기의 줄기가 없고, 게통이 없다.
이야기에는 소설적 의미의 주인공도 불분명하다. 4백여 面이 되는 前編으로 끗이 낫다 하면 당연히 弓裔을 주인공이라 하겟스나 그 뒤로 근 3백面이 添加되엇스며 더구나 弓裔가 죽은뒤 근 20년 후의 일에까지 미첫스며 제목까지가 麻衣太子로 되엇스니 弓裔를 주인공이라 할 수도 없고 만약 弓裔와 麻衣太子의 새에 무슨 유기적 連絡이라도 있었으면 또한 그러케라도 볼 수가 있겟지만 그야말로 弓裔와 麻衣太子는 소설적으로 아모 連絡도 볼 수가 없으니 말하자면<114> 두 개의 이야기를 맛 이은데 지나지 못한다고 박게는 볼 수가 없다.
그것으로뿐 아니라 소설로서의 요소는 거지반 무시 당하엿스니 이것을 소설로는 볼 수가 없는 배다.
(喜劇的 倡劇調) 무론 단순한 野史도 아니다. 이 이야기의 안에 나오는 事件은 대부분이 春園의 창작으로서 正史와 野史에서 어더볼 수 없는 배다.
이 이야기의 初頭는 소설적 筆法으로 시작되였다. 그러나 차차 나려가면서 事件이 복잡다단하여 감을 따라서 어느덧 어름어름 변하여 버렷다.
더욱이 전에 一說 春香傳을 쓰기 위하여 李海朝편의 唱劇 春香傳 「獄中花」를 읽고 그 인상이 아직 꽤 만히 머리에 남어있는 春園은 이 麻衣太子의 가운데도 喜劇式 唱劇조를 만히 집어 너헛스니 예컨대 弓裔가 아슬라성에서 나날이 명망이 노파갈 때에 그의 先輩되는 량길이 이것을 시기하여 원회을 보내어 弓裔를 謀殺하려 할때에 량의 딸 란영(그는 弓裔의 愛人이다)은 제 愛人을 구하고저 아슬라城으로 달려온다. 剌客인 원회는 가장 親友인 채 하고 弓裔를 차자와서 弓裔와 對酌을 하면서 바야흐로 칼을 몰래 뽑으려 하는 이 위급하고 아슬아슬한 찰나에 男服한 난영이 달려오는 것이다.
란영은 궁예의 압흐로 한거름 가까히 나가며 넌즛 팔을 들어 노랫가락으로
「석남사 깁흔 밤에,
눈혀서 찻던 사람
아슬라 머나먼 길<115>
어이하야 오다던고
독한 칼 품은 녯 벗을
삼가소서 함이라」
하고 머리에 쓴 오각선을 버서 버렷다. 그것은 란영이었다.
이런 唱劇式 장면이 수없이 나온다.
물론 新羅時代에는 歌舞를 조하하였다는 말은 傳하되 그것도 程度問題이다.
또한 그 풍속과 제도에 있어서도 좀더 古典色彩가 나도록 창작을 하엿서야 될 것이다. 너머도 현대식이기 때문에 가다가 少佐가 나오고 中尉 下士 卒이 나올지라도 突然感을 느끼지 안흘 만치 되었다.
登場人物의 이름이 근 백개나 나오는 것도 讀者를 번거롭게 하고 갈피를 차리지 못하게 한다.
모도가 게통있는 한 개 줄기를 뽑아내지 안키 때문이다.
(한 개의 講談) 말하자면 순전한 한 개의 講談이다. 高座에 안저서 부채를 두둘기며 이야기로서 들려줄 종류의 것이다.
이만한 내용을 일껏 꾸며 가지고 웨 한낫 講談으로 만들어 버렷는지 이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奇遇의 場面을 질겨하는 春園은 「麻衣太子」의 가운데도 여러군대 奇遇를 집어 너헛는데 弓裔王이 山中에서 죽을 때에 下宿하였던 주인집 老翁이 뜻안한 30년 전의 弓裔의 스승이던 白衣國仙인 둥 마의태자를 사모하다가 뜩박게<116> 마의태자의 아버지의 안해가 된 樂浪公主이 그로부터 수십년 후 佛供하려 入出하였다가 또한 뜻안한 麻衣太子와 悲牡한 會見과 離別을 하는 둥 그 박게도 奇遇가 꽤 여러 군대 있다.
여기는 春園의 斥唐主義가 좀 더 심각히 들엇서야 할 터인데 그것조차 없었다.
「麻衣太子」는 한개 자미있는 講談-이 이상 더 말할 바가 없다.
無情에서 麻衣太子까지
「無情」에서 「麻衣太子」까지에 春園이 밟어온 발자최- 그것은 련락과 게통이 없다 할 수 있다.
雷動性이 너머도 풍부하기 때문에 매 作品마다 作風이 다르고, 만약 자세히 조사를 한잘 것 같으면 그 作風이 다른 每個 作品인즉 그 作品을 내여노키 전에 春園이 읽은 冊子와 공통점이 만타는 점도 발견할 수가 잇스리라 밋는다.
無情과 개척자가 그 작풍이 전혀 다르고, 一說 春香傳과 許生傳은 비슷한 곳이 만흐되 그 兩者와 再生은 다른 사람의 作品인듯이 風이 다르고, 麻衣太子에는 一說 春香傳의 流를 품은 흔적이 만히 있지만 또한 근본적으로는 相違點이 만타.
數個의 短編에 잇서서도 작풍은 개개가 모도 다르다.
이것은 모도 雷動性과 被感化力이 너머도 만키 때문에, 시시로 변하는 春園이기<117> 때문이다.
이러는 동안 春園의 생활은 사회적으로와 가정적으로 든든히 자리잡혓다. 일즉이 한 제조있는 孤兒로서 漂浪하던 시대와 달리, 가정과 가족이 생기고 지위가 구더가고 생활의 근거도 서지게 되었다.
東亞日報는 春園을 遇하기 厚하였다. 上海에서 春園을 데려 내온 뒤부터 꾸준히 그의 뒤를 보아 주엇스며 春園이 病床에 너머저서 社務를 못봄으로 春園의 椅子는 뷔어 두어서 後日 다시 나올 날을 기다리고 하엿다. 그런지라 만약 春園의 편에서만 東亞日報를 배척치 안흐면 언제까지던 東亞日報는 春œ’을 질겨 마잣다.
이러틋 서로 굳게 매저진 東亞日報가 점점 長成하엿다. 다른 온갓 신문의 우에 군림하듯이 되기까지 되었다. 이 東亞日報의 대성이라 하는 것이 春園의 사회적 大成과 떼지 못할 큰 관게가 있는 것이다.
春園은 東亞日本紙上에 소설을 쓸 의무를 社에서 지게 되었다.
社와 春園의 새는 무론 소설을 쓰는 것이 「春園의 의무」일 것이라. 그러나 한개 문학자로서의 입장으로 볼 때에는 그것은 무엇에 비기지 못할 한 개 커다란 권리라 볼 수가 있다.
대체 朝鮮과 가치 出版界가 빈약한 곳에서는 自己의 作品을 活字化하기가 매우 困難하다.
이러한 가운데서 無限히 活字化할 義務를 지게된 春園은 바꾸어 말하자면 無際限으로 創作을 發表할 機關을 어든 것이나 일반일 것이다.<118>
여기서 春園은 쓰고 또 썻다. 연다라 東亞日報 紙上에는 春園의 작품이 나타낫다. 그러고 가장 세력있는 신문지상에 가장 만히 쓰기 때문에 가장 넓게 알리위 젓다.
이러한 절호의 환경에 있어서 春園이 좀더 힘들이어 쓰기만 하였으면 그는 朝鮮新文學의 개척으로뿐 아니라 그의 작품의 예술적 가치로까지 말대까지 비치있을 것이어늘 그는 이 조흔 기관을 너머도 허스러히 사용하였다.
(藝術的 値로까지 末代까지) 거기는 무론 여러가지의 까닭도 있으리라.
가장 큰 원인은 東亞日報의 罪일 것이다.
東亞日報는 文藝를 모른다. 李舜臣사당을 重修할 基?‘을 엇기 위하여 그 人氣를 놉히고저 春園에게 李舜臣傳을 쓰기로 명하며 滿洲事變이 일어날 때에 人氣를 엇기위하여 滿洲를 배경으로한 小說製造를 명하며(이 일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중지는 되엇지만)- 이러틋 소설이라는 것을 단지 한낫 機會的 利用物로 여기고 또는 大每 大朝 등 大新聞에 學藝面이라는 것이 없다하여 一時 學藝面까지 페지하였던 東亞日報니 만치 東亞日報는 文藝에 無理解이다.
이 東亞日報의 社員으로 안저서 東亞日報 지상에 소설을 쓰는 春園이매 거기 얼마간 구속되지 안흘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머 低頭 平身하였다.
본시 호인인 春園은 自己主張을 강조하지 못한다.
그러나 생활의 안정을 따라서 차차 침착은 생겻다. 이 침착하에서 집필한 「端宗哀史」 「群像」 이하의 오늘날까지의 작품을 以下 보기로 하자.<119>
以上의 것도 주로 春園의 작품비평에 치우첫다. 그 작품의 社會性이며 社會的 영향에 관해서는 意識的으로 피하여 왓다.
以下도 무론 그러케 하겟다. 그러고 작품비평 이외에 관한 부분은 죄 몰아서 마그막에 한 묵금으로 하고저 한다.
그러면 以下 「端宗哀史」를 보기로 하자, 이 글을 슬때 어떤 날 春園 자신이 『단종애사만은 욕하지 말라』고 우스면서 말한 일이 있느니만치 春園의 가장 사랑하는 作品이요 겸하여 이 작품이 동아일보에 연재되는 당시 累計 수천통의 投書가 들어오니만치 讀者群의 인기가 굉장하였던 작품이다.
그 「端宗哀史」를 소설 성과상으로 검토하여 보자.-(未完)-<120>
<112-120>

春園硏究(十) (춘원연구(십))

金東仁
端宗前後 歷史와 文獻
春園의 「端宗哀史」를 논평하려면 그 예비지식으로 역사 즉 實史를 잠깐 뒤적여 볼 필요가 있다.
이씨조선의 창업주 太祖大王이 洪武 壬申 7월 16일에 즉위하엿다가 6년 후인 戊寅年에 定宗大王께 禪位하고 당신은 上王이 되었다.
定宗大王은 재위 2년 후 당신의 아우님 太宗大王께 禪位하고 당신은 上王이 되었다.
太宗大王은 즉위 후 元子讓寧大君을 세자로 冊하였다가 「讓寧은 狂人이라.」 誣하여 폐하고 忠寧大君(後日의 世宗大王)을 다시 세자로 冊한 뒤에 재위 18년 후 世宗大王께 禪位하고 당신은 上王이 되었다.
世宗大王은 그 놀라운 智力으로 치정에 노력하다가 건강을 상하여 임시로 세자(후일의文宗大王)께 廉務 參決케 하였다가 재기할 기회가 없이 昇暇, 文宗大王이 등극하였다.<104>
그런데 世宗大王은 世人이 다 아는 바 만고에 쉽지 않은 聖, 德, 智를 겸한 분이었다. 세종의 妃되는 분이 또한 억세인 性格의 主人이었다. 이러한 두 분 새에 아드님이 여듧 분, 따님이 두 분이요. 庶出로 아드님 열 분, 따님 두 분, 합계 22남매었다. 그런 중에 嫡出 王子들은 부모가 다 그런 분이니만치, 8왕자가 다 걸출한 인물들이었다. 여기서 역사상의 비극은 개막이 된다.
맛 아드님(文宗大王)은 후일 왕위에 오를 분이니만치 교양(유교적)에 매우 힘썼다. 이것이 첫재로 그 분의 건강을 損하였다. 그 뒤 부왕(世宗大王)이 탈로 누었을 동안, 政務를 代攝하고 병석에 侍候하는 6년 간 건강은 상할대로 상하였다. 이 상한 건강상태로 등극을 하였다.
정무의 번잡과 상중 素食 등은 더욱 新王의 건강을 害하였다.
그런중에 心적 苦勞가 또 하나 있었다. 당신의 동생들이 너무도 걸출인데 대한 疑懼었다. 몸이 약하면 마음이 약하여진다. 마음이 약하여 지면 의심치 않을 것을 의심하고 무섭지 않은 것을 무서워하게 된다. 왕은 동생네들을 의심하고 무서워 하였다. 당신 在世中에는 무슨 근심이 없겠지만 당신만 승하하고 보면 當年 10세의 왕자가 어찌될까.
왕위라 하는 것은 무서운 매력을 가진 것이다. 이 왕위라 하는 찬란한 자리가 무사히 어린 왕자에게 전하여 질까. 억세인 동생(王子에게는 叔)들이 너무 만타.
이러한 心적 苦勞는 왕의 건강을 더욱 상하게 하였다.
동생네 중에도, 가장 맛 동생 首陽大君과 그 다음인 安平大君이 가장 무서웟다. 首陽大君은 억세고 闊達하여 小節에 구속되지 안는 사람으로서 매양 入闕하여서는<105> 왕의 건강을 보고 왕께 기름진 음식을 잡숫도록 권하고 短喪을 권하고 왕이 喪中이라 하여 돌보지 안는 정무에까지 간섭하여 왕을 떠받고 충동하였다. 이것이 도로혀 왕에게는 무슨 야심이나 있지 않은가고 의심되었다.
이 首陽보다도 더욱 의심되고 두렵고 꺼리우는 것은 安平大君이었다. 安平은 王族-더욱이 왕의 同母弟로서의 부귀나 누리고 근신하는 생에나 보냈으면 좋을 것인데 무슨 연고인지, 文武士를 만히 모으며 도당을 몹는 듯한 모양이 보이며 이러한 無識群뿐 아니라 현직 재상들과도 結連을 모으며 인심을 사는 등 모든 행동이 적지않게 의심스러웠다.
이러한 호랑이들 틈에서 양과 같은 어린 세자가 장차 능히 位를 保持하여 나아갈 수가 있을까. 이것이 왕의 걱정이었다.
이 걱정은 더욱 왕의 건강을 해하여 2년 후에는 임종을 보게 되었다. 이 왕에게는 母后도 승하하고 왕비도 승하하여 대궐 안에는 嬪 이하의 궁녀들뿐이지, 어른될 만한 이가 없었다. 이 왕이 승하하면 당년 12세의 어린 세자가 新王으로 등극케 된다. 漢地 古例에 의지하여도 15세 이하의 幼君에게는 攝政하는 분이 있어야 하는데 대궐안에는 그럴만한 분이 없었다. 이러한 경우에 임하여 왕이 취할 길은, 당연히 당신의 동생 중 가장 큰 이 首陽大君께 부탁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宗親 중 가장 年老者인 讓寧大君(왕의 伯父)께라도 부탁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 부탁이 없이 승하하였으면 大行 王의 가장 근친인 수양대군이 자진하여 幼王攝政을 선언하던가, 정부에서 首陽께 섭정을 請하여야 할 것이다. 啓請, 裁下 등에 있어서 少年王이 어떻게 자의로 裁斷하고 命하고 決하고 할까. 攝政이 없으면 重臣들의 자의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王家의<106> 존재라는 것은 무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동생들을 疑懼하는 王은, 임종에 있어서 重臣과 ?臣들을 불러서 어린 세자의 輔佑를 부탁하였다.
우에 말한 讓寧大君이란 어떤이냐 하면 太宗大王의 맛 아드님이요. 世宗大王의 맛 형님으로 처음에는 태종의 세자로 冊되었든 분이다. 그러나 讓寧보다도 世宗을 더 총애하는 太宗은 讓寧을 廢嗣하고 世子로 冊位하였다.
世宗이 즉위한 후에도 世宗의 신하들은 讓寧의 존재를 꺼리어서 매양 世宗께,
「讓寧이 여사여사한 罪가 있아오니 圖謀하소서.」
하고 請하고 하였다. 六鎭을 建置하여 그 勇名을 천하에 날리고 후에 左相까지 되었든 金宗瑞도, 그런 上啓를 하였다가, 世宗께,
「이는 내 뜻을 모름도 심함이니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말을 말라.」
는 질책에 가까운 嚴敎까지 받은 일이 있다. 즉 왕족 중의 麒麟兒었다.
文宗大王은 임종에, 대신들에게 顧命을 하고, 대궐에서는 惠嬪 楊씨로 하여금 장차 幼主의 準攝政(?)을 부탁하였다. 楊씨는 본시 中人집 딸로 궁녀로 들어왔다가 世宗大王의 고임을 받어 封嬪까지 된 사람으로 격식에 있어서던 家閥로 보던 攝政의 자리에 앉을 사람이 못되었다.
이렇게 되여 新王(少年王 端宗)이 등극하매 이 나라에는 임군은 존재하나 王權 行使者는 없게 되었다. 大臣들이 先王의 顧命을 간판삼어 大臣끼리 의논하여<108> 작정하고 決裁하고 할 뿐이었다.
이렇게 되매 당연한 順序로서 王叔인 首陽이 (비공식으로나마) 대궐에 출입하면서 幼王을 대신하여 정치에 容喙하였다. 首陽이 이러니 安平大君도 대궐출입이 잣게 되었다.
大臣측으로 보자면 이것은 귀잖은 일이었다. 이 王叔들만 없으면, 自意로 모든 일을 행할 수 있는데, 王叔들이 감시하며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司患府를 시켜서 「禁奔競案」을 제출케 하였다. 禁奔競이란 王族들의 奔競을 禁한다 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제출시켜 아직 아모 철도 모르는 어린 王께 한 번 보이고 敎書가 나려놓으면, 이것은 왕명이라 王叔들의 대궐출입이 불가능하게 되고 따라서 王權은 대신들에게 全屬되고 專屬되게 된다. 王叔으로 보자면, 큰일난 문제이다. 首陽과 安平은 즉시 당시의 首相 皇甫仁에게 달려가서 嚴重抗議의를 하여 이 안을 묵살하여 버렸다.
그러나 일정한 攝政이 없으니많지, 아모리 王叔들이 감시를 한다 하나, 政務는 대개 대신들의 任意로 되었다.
당시의 三公은 領相이 黃甫仁이요. 左相이金宗瑞요. 右相이 鄭基이었다.
領相 黃甫仁은 단시 한낫 文士이지, 정치가로서의 업적은 아모 것도 없는 사람으로, 文을 崇하는 시대에 오래 살고 오래 벼슬에 있고 큰 흠이 없어서 저절로 領相까지 기어 올라갔지, 領相 재목은 못되었다.
左相 金宗瑞는, 世宗大王의 아레서 六鎭을 建置한 武功은 있지만, 우에 기록한 讓寧참소로 보아도, 그리 향그럽지 못한 우에, 部下 李澄玉에게 北國미녀를 뇌물로 바다서 여기 혹하 등- 將材는 될지언정 相材는 못되었다.
右相 鄭基 역시 한 개 文士에 지나지 못하였다. 攝政이 없는 幼王의 아레 이러한 대신들이 布列되어, 「先王의 顧命」을 방패삼어 국정을 좌지우지하는지라, 王權은 땅에 떠러지고 국정은 보잘 나위가 없이 되었다.
世宗大王 6년간의 患候와 그 뒤 文宗大王 2년간의 喪中無爲의 뒤를 이은 이 世態는 눈 있는 자로 하여금 근심치 않을 수가 없게 하였다.
게다가 王叔 安平大君은 무엇 하려는지 더욱 文士 武士를 모으며 대신들을 사괴며 하여 一大肅淸을 加하지 않으면 나라의 안위가 의심스러웠다.
드듸어 首陽大君이 일어서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先王의 顧命을 유일의 政剛으로 삼는 爲能老物들을 다 處置하여 버리고 스스로 領相 吏, 兵兩曹判書 겸 兵馬都統使가 되고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들로서 內閣을 조직하였다. 安平大君의 行事가 의심스럽다 하여 安平大君도 定配를 보냇다.
이런 때에 림하여 可憎한 것은 조선 신하들의 讒訴심리다. 金宗瑞가 寧讓을 世宗께 讒한 것은 우에도 기록하였거니와 太宗, 世宗 兩朝를 通하여 寧讓을 讒한 자 不知基數요, 太祖 시에 芳幹의 亂을 꾸며내고 芳幹의 亂을 꾸며내고, 대대로 적잔흔 逆獄을 꾸며낸 이들이 모도, 臣類다. 이들은 首陽께 연방 安平을 제하여 버릴 것을 請하였다. 그러나 首陽은 이를 힘있게 눌렀다.
정치에 대하여 自家見을 가지고 있는 首陽은 政權을 잡은 뒤 부터는 어린 임군은 대궐 안에 평안히 있게하고, 임군께 위안될 施設을 게을리지 안는 한 편으로 國政刷新에 勞力하였다.
이 때에 이 首陽을 보는 세 가지의 눈이 있었다. 하나는 의혹의 눈이었다. 이제 저러다가 보위까지 엿보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109>
하나는 首陽의 심복들로서, 어린 임군은 上王으로 높여 모시고 首陽이 보위에 오르소서 하는 것이었다.
남어지 하나는 首陽의 赤誠을 알아보는 一群이었다.
이 가운데서, 전 兩者는 首陽에게 매우 불쾌한 것이었다. 자기는 어린 조카님을 위하여 이렇듯 애쓰거늘 세상은 이를 曲解하는구나. 여기서 首陽은 이 의심의 눈을 막고 자기의 赤誠을 알게하기 위하여, 君臣의 반대를 일축하고 어린 왕께 왕비를 간택케 하고, 「喪中謹愼」에서 버서나게 하여 드리고저 儒臣들의 禮儀論을 무시하고 短喪을 실시하였다. 어서 왕비에게서 元子가 탄생하여 世子로 책하여 이 임군의 御代를 든든하게 하여 자기가 향하는 의혹의 눈을 것게 하려하였다.
그러나 변함없는 것은 「臣心」이라고 명명할 일종의 심리가 高麗朝부터 그냥 흘려나려 와서 지금까지 미츤 바 小人心이었다. 首陽이 임군되기를 바라는 一群은 자기네의 억측으로서 首陽도 그러려니 하고, 내부공작을 많이하여 어린 임군을 上王으로 모시고 首陽을 즉위케 하려하였다.
首陽도 神이 아니다. 野心과 패기가 남보다 더한 사람이다. 그런 우에 자기게 직접 王權이 없기 때문에 행정상 支障도 많어서 내심 클클하든 차이라,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하여 왔지만 종내 이 誘惑에 빠젔다.
禪位가 되었다. 首陽이 新王이 되었다. 어린 王은 上王으로 높였다.
臣, 民에게 異意가 없었다. 上王의 臣下이든 사람들은 모도 이 新王의 등극을 축하였다. 이곳 백성들은 전통상 우에서 하는 일은 당초에 알려 하지도 안는 것이다. 太祖 開國 이래로 禪位가 관례가 되어오니 많지, 등한히 보았다.<110>
新王은 上王으로 하여금 富와 貴에 부족이 없게하여 드리고저, 昌德宮에 모시고 시종, 물품 등을 풍부히 하고, 옛날 왕이 상왕께 대접한 절차를 지켰다.
그 뒤 王이 昌德宮에 上王께 問安을 갔는데, 마음에 없이 王位를 떠난 上王은, 王을 만나지를 않었다. 昌德宮앞까지 世子와 함께 威儀를 가추고 갔다가 敦化門을 들어서 보지도 못하고 景福宮으로 돌아온 것은 王에게는 큰 망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일은 다른 방면으로 한 개 사건이 胚胎되었다. 과거 世宗大王때 集賢殿 학사로 있는 成三門 朴彭年 등은 간간 世宗이 친히 어린 손주님 (지금 上王)을 품에 안고
「이 뒤 이 王孫이 長成한 때는 너히들은 老臣이 되겠구나, 그때 잘 보좌해라.」
는 부탁을 받었다. 그리고, 成, 朴, 등은 文宗의 學友었드니 많지 文宗在位 2년 간 늘 『아우님들을 꺼리든 文宗은) 이 동무 겸 신하에게 장래 보좌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 어린이가 지금 王에서 上王으로 높이우기는 하였다 하나 심중 불평이 있는 것이 확연하여질 때에, 양심상 가책이 되었다. 그래서 때때로 當年의 集賢殿 學士들끼리 모이면, 한탄을 하고 하였다. 그러나 그 뿐, 무슨 대책을 취할 줄도 몰랐거니와 지금 왕의 정치적 수완에 감한 그들은, 이 御代를 어즈러히 하기도 싫었다.
이러구러 丙子年 여름 明使가 오게 되었다. 왕은 上王과 함께 昌德宮에 明使를 초대하여 큰 잔채를 베플게 되었다. 그 때 雲劒으로 뽑힌 사람이 五衛都摠府都摠管 成勝 (成三門의 아버지)와 訓鍊都監 兪應孚었다.
여기서 급격히 謀議는 進涉되었다. 본시부터 一철한 武人으로서 이 王位變動을<111> 자미없게 보든 成勝은 아들을 독려하여 문사동지들을 몹게하고 자기는 함께 雲劒으로 서게 된 愈를 설복시키며 一변 武士동지들을 모았다. 그 계략이란 것은, 잔챈날 왕과 세자의 뒤에 설 雲劒 成과 愈는, 왕과 세자를 弑하고 成과 愈의 영솔하는 병사며 동지 무사들의 병사로 上王을 끼고서 景福宮으로 달려가서 上王을 복위케 하자는 것이었다. 이만한 병력을 가젔으면 넉넉히 될 만하였다.
잔챈 날이 이르렀다. 그날 幸인지 不幸인지 世子가 갑자기 잔채에 불참하게 되었다.
여기서 三門과 彭年 등의 심경을 잘 볼 수 있다. 그들은 (더욱이 三問은 시종의 職으로) 현 왕의 恩威가 具備한 王者的 氣風을 안다. 일즉이 世宗께 뽑히어서 몸소 世宗의 偉業을 보았고 文宗의 無爲를 본 그들은 지금의 上王과 王과를 對照하여 볼 줄을 알었다. 臣節로 보자면 上王께 死仕하여야겠고, 大局으로 보자면 上王을 弑할 수 없었다. 成 朴 등은 世子가 不參하였다는 이유로 완강히 거사를 중지하고 후사를 기다리자고 주장하여 愈應孚와 正面衝突까지 하여 중지시켰다. 무론 갑자기 謀事하였드니 많지 精銳分子만이 아니라, 일이 發覺나서 큰 일을 저즐를 각오는 하였을 것이다.
일을 중지한 이상은 십에 팔구는 발각될 것이다. 더욱이 智者가 많은 현정부에게... . 여기서 결사동지 중 金?이란 인물이 어차피 발각될 이상에는 자기가 압서 밀고하여 자기 죄는 赦함을 받고 償까지 타려는 욕심으로 그 丈人 鄭昌孫과 함께 密告를 하였다.
이 密告로서 事件의 全面이 들어나고 모도 잡히게 되었다. 여기서, 임군은 그들을 장차 죽이어야 할 것이나, 그 才質이 너무 아까와서 몇 번을 順應을 권하고 刑場으로 내보낸 뒤에도, 다시 承旨 하나를 따라보내서 또 다시 順應을 권하여 보았다. 그러나 慷慨를 爲主하는 文士나 일치한 武士나, 모도, 上王께 이미 목숨을 내놓은 이상은 돌이키기를 不肯하였다. 刑場으로 끌려 나갈 때에 成三門이 현 왕의 寵臣인 과거의 學友들을 돌아보며,
「자네들은 賢主를 도와서 太平을 이루게. 나는 지하의 故主께 뵈려 가네.」
한 말은, 의미깊은 말로 본다.
이 사건은 또 「臣心」을 음직여 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거에도 벌서 여러 번을 「上王을 外地로 보냅소서.」라 「降封합소서.」 「庶人으로 떨구소서.」 야단인 것을 王은 「不允」의 두 자로 버틔어 왔는데, 또 야단들이다. 그러나, 왕은 여전이 不允하고 단지 上王을 아직껏의 居所이든 昌德宮에서 錦城大君 舊宅으로 옴기었다.
그 뒤 宋玹壽權完이 逆謀를 한다고 告變하는 이가 있었다. 宋은 上王의 丈人이요. 權은 上王의 外叔이었다. 재상들은 또한 上王 처치문제를 꺼내었다.
왕도 할 일 없었다. 上王이 그냥 上王으로 있는 동안은 上王을 빙자하여 혹은 上王께 忠心으로 현 왕께 대항하려는 일이 뒤이어 날 것이다. 漢陽에 上王이 그냥 있어도 그런 일이 그냥 날 것이다. 여기서 上王을 魯山君으로 降封을 하고 寧越로 보내게 되었다.
왕은 密旨를 江原監司에게 나려서, 上王- 지금은 魯山君에게 물질적 불편이 없도록 하게하고 魯山을 모시든 宮女, 宦侍 등을 뒤따라 보냈다.
이것으로 魯山 문제는 끗난 줄로 았었다. 그랬는데 順興에 定配가 있든 錦城大君(왕의 同母弟요. 魯山의 삼촌)이<113> 魯山 복위를 回謨하노라고 동지와 병사를 몹다가 발각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야단을 하였다. 그 새 寧越에 가 있는 동안도 연하여 야단하였지만 이 사건이 일어나자 더윽 야단하였다. 魯山이 生存한 동안은 이런 일은 그냥 있을 터이니 圖謀합시사고.
아직껏 꾸준히 이런 上啓에 不允의 두 자로 대하든 왕은 이번은 할 일 없어
「죽이지는 차마 못하겠으니, 庶人이나 만들어라.」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 들을 리가 없었다. 私恩은 私恩이고 국법은 국법이니 宗社에 得罪한 이를 어찌 그냥 둡니까. 近言 亂言者는 모도 魯山을 핑게하오니 이제도 그냥 두었다가는 결코 안됩니다고 宗親府, 議政府, 忠勳府, 六曹가 함께 上啓하여 가련한 少年王者는 그 최후를 보게되었다.
이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데 이보다 썩 後年 成宗朝에 南孝溫이란 文士(今日의 小說家에 해당할 듯)가 당시 上王께 殉한 成, 朴, 등 六臣의 忠烈에 감하여 붓한 기록은 원체 傳聞에 의지하여 쓴 것이니 많지 誤記도 만커니와 六臣의 忠誠을 말하자니까 上王을 폐위, 降封, 賜死한 世祖께 대한 由筆도 많었다.
日字의 틀리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柳成龍이 지적한 河緯池(六臣 중 一人)의 再仕日字 등은 置之하고라도, 丙子年 正月에 病死한 申叔舟 夫人 尹씨를, 소설화하여 「成, 朴등은 죽었는데 申叔舟는 의기양양히 집으로 돌아오므로 尹부인은 이를 부끄러히 여겨 목매 죽었다.」등 6월에 자살한 것 같이 만들었다.
뿐더러, 成, 朴, 成父, 愈 등등이 선위시부터 벌서 上王 復位를 圖코저 자살치<114> 않었다고 하였으나 만약 그렇다면, 都摠管 成勝의 군사와 愈의 훈련원 군사를 가젔으면 비단 明使來朝時가 아니라 그 후에라도 언제던 거사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요, 더욱이 그런 密謀가 그런 장기간을 (年餘이다.) 발각 안 되었을 까닭도 없고, 金?이 年餘를 감초아 오다가 그날따라 密告하였을 까닭도 없다. 하물며 黃甫仁, 金宗瑞 등을 誅할 때부터 悲憤慷慨하였다. 운운은, 당치 않기 짝이 없다.
요컨대 南孝溫의 秋江集 六臣專은, 六臣의 충심을 表揚키 위하야 저작한 한 개 소설로서 소설인지라, 사실과는 相違 내지 상반되는 점이 많다.
그러면 春園의 端宗哀史는 어떤 것인가.
南孝溫의 「六臣傳」에서 가장 부자연히 보이는 것은, 단종의 諸臣이 일률로 世祖(首陽)께 대하여, 「나는 그대의 祿을 먹지않고 따로히 쌓어두었으며 稱臣치 안헛(朴彭年은 啓文에 臣자를 巨자로 썻다. 운운)노라」고 하였다는 점이다. 대저 祿이라는 것은 國祿이지 王祿이 아니라는 것도 모를 六臣이 아니었을 것이고, 이 임군을 임군으로 섬기기 싫으면 爵을 던지고 낙향하여 晝耕夜讀으로 여생을 마춤이 穩當하겠고, 더 一步를 나아가서 上王 복위를 위하여 기짓 臣仕하였다 하면, 어듸까지던 표면으로는 順히 從하여 털끗만한 의심도 사지 않었어야 할 것이요, 朴彭年의 「巨」자 운운의 모험은 절대로 피하여야 할 것이다. 더욱이 시종의 職에 있어서 매일 新王面謁하는 成三門이 1년 간을 어떻게 稱臣하지않고 지났으랴.
부자연한 억설일뿐 아니라 잘못하다가는 六臣을 몰상식한 사람이라는 오해까지 일으키게 하기 쉬운 망년된 說이다.<115>
春園의 『端宗哀史』
春園의 「端宗哀史」는 南씨의 六臣傳을 骨子로 삼어 쓴 이야기다. 南씨의 六臣傳이 가진 바의 矛盾이며 부자연까지도 모도, 판단과 수정이라는 途程을 過하지 않고 그대로 계승하였는지라, 전체적 「이야기」로서 이 구성에 관하여는 여기 재론할 필요가 없다.
이 이야기는 端宗大王의 탄생에서 비롯하여 端宗大王의 승하로서 끗을 막은-한 개인의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전설이지 한 사건의 발단에서부터 종결까지의 「潭」이 아니다. 潭도 아니매 더욱이 소설은 아니다.
南孝溫의 六臣傳이 六臣의 忠烈을 表彰하기 위하여 적지 않게 世祖를 誣한 형적이 있다. 그것을 골자삼어 쓴 이야기 인지라 역시 그 譏를 면치 못하리라 본다.
이 이야기가 東亞日報에 연재될 때에 이 이야기를 두고, 두 가지의 상반된 독자가 생겼다. 절대적 歡呼層의 독자와 誹譏層의 독자- 이런 두 종류이다. 그 두 종류는 前後者를 다 또한 둘씩에 나눌 수가 있다.
즉 歡呼層의 독자를 두 종류로 나누자면 하나는, 未知事- 옛날의 宮廷과 양반계급을 등장인물로 하여 역사적 사실을 대중화하여 널리 알려준데 대한 歡呼이요, 남어지 하나는 古史를 보고 늘 端宗의 薄命한 일생을 서러워 하든 사람이든가. 혹은 그 사건의 端宗측 인물의 後孫이 되든가 하는 사람이다.
또 誹譏層 독자를 나누자면, 하나는 春園이 그럴듯이 묘사한 宮廷 혹은 양반계급의 생활, 풍속, 습관, 제도 등등이 하나도 정작과는 비슷도 안하여 애당초<116> 읽을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層이요. 또 하나는 南孝溫의 稗史에 수긍치 못하든가 혹은 세조측 인물의 후손되는 사람들이다.
과연 無識(갑자기 다른 용어가 생각나지 않어서 이 용어를 쓰지만)한 독자는 歡呼하였다. 궁중사건은 민간에는 諱之秘之하여 오든 이 王朝라, 秘하는 자에게는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이 인정으로, 이 백성들은, 宮廷錄이라면 머리를 싸매고 달려들 형편이었다. 거기다가 春園은 「宮廷 풍습 제도는 이러이러하였다.」는 듯이 보통 풍습과는 다른 풍습을 창작하여 써 넣었다. 「無識」이란 것은 불상한 것이다. 무식한 독자들은 春園의 이 멀정한 거짓말-創作風習 (宮中이며 兩班宅의)에 연방 머리를 그덕였다.
우리는 「端宗哀史」를 펴놓고, 이야기로서의 효과의 善否를 檢키 전에, (枝葉的의 일이나마 春園의 창작 풍습, 제도를 살펴보자.」
일일히 다 들추자면 「端宗哀史」의 첫 頁에서 끗 頁까지 모도가 창작풍습이라 불가능한 일이니, 중요한 者만 보기로 하자.
그보다 먼저 한 개의 삽화를 기입할 것이 있다.
이 「端宗哀史」 중에, 경성 南大門에 커다렇게 걸려있는 「崇禮門」이라는 三字가 世宗大王의 제 3왕자 安平大君의 필적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余는 春園에게, 「그것은 安平이 아니라 讓寧大君(世宗大王 습듸의 伯兄)의 筆跡이라고 온갓 문헌에 나타나 있다.」고 알으켰더니
春園은 「누가 쓰는 現場을 보았답듸까. 어느 全羅道 유생이란 말도 있읍듸다.」
고 우서 버렸다.<117>
이것이 「端宗哀史」를 쓴 春園의 태도다. 즉 말하자면, 어느 大君의 필적이라는 것은 들은 법한데 安平이 문장이 용하였다 하니깐 崇禮門의 현판을 안평의 필적이라 속단하여 버린 모양이다. 그런 뒤에 진정한 주의를 들어도 표면자기의 그릇을 수긍치 않는다.
이 이야기의 가운데 나오는 임군과 왕비에게는 모도 地文에도 敬語를 썼는데 그 경어가 어떤 때는 경어인지 욕인지 구별키 힘들게 되있다. 「안게시었다.」하면 좋을 것을 「엇지 않으시었다.」하는 등의 용어는 둘재두고, 임군이 이 전편에서 한 번도 「용안을 드시지」못하고 「얼굴」을 들고 「마리(하다못해 머리)를 돌리시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시는 등, 너무 상쓰러운 것은 둘재두고, 웬 「놈」이 그리 많이 나오는지 임군, 대신들은 막론이요. 재상가 부인네까지가 모도, 「鄭麟趾놈이 여사여사합니다.」 「金宗瑞놈이 이러저러 합듸다.」... 그놈이 어떻고 이놈이 어떻고- 마치 병문친구들의 대화나 다름이 없다.
무론 궁정용어라 하는 것은 註를 달지않고 그대로 쓰면 독자도 모를 것이고 독자는 커녕 웬만한 재상가에서도 이해치 못하는 말이 많었다하니, 궁정에서의 대화를 그대로 쓴대야 무의미한 일이지만, 조금 더 한자를 많이 넣어서 쓰고 또한 조금 더 점잖게 쓸 필요는 있을지니, 이 「端宗哀史」의 最初의 대화로 나오는 것이 궁녀들이 世宗大王께 왕 탄생의 喜報를 아뢰는 것으로서,
「상감마마. 세자빈께옵서 시방 순산하시어 게십니다.」
「이 해에 경사가 많구나. 종서(金宗瑞-때의 左議政)가 六진을 진정하고 돌아오고 또 원손이 났으니, 이런 경사가 또 있느냐.」
이렇게 되었다. 임군이 신하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 承傳色(宦官)이 왔다면 모르거니와<118> 宮女가 나오기가 뚱딴지다. 전편을 통하에 내내 임군있는 자리에는 반드시 궁녀가 모시었으니, 이것은 작자의 오해이다. 정 일품 「嬪」에서 비롯하여 종 구품「奏羽」 「奏變宮」 등에 이르기까지의 內命婦가 內殿 이외- 더욱이 男姓宰臣들이 모시고 있는 자리에까지 나온다는 것은 좀 과한 망발이다. 대화도,
「상감마마. 원손 탄강하오섰읍니다.」
「금년에 과연 경사가 많고나. 좌상(左相)이 六진을 진정하더니 운운.」
등, 한문을 좀 더 많히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 때의 점잖은 사람의 용어는 한문에다가 토만 겨우 조선말을 달은 것 쯤이지 오늘날까지 조선말이 남어있는 것은 전혀, 常人이나 부녀자의 덕택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자초지종으로 양반이거나 常人이거나 부녀자거나 꼭 동일한 말을 썼다.
「상감마마」라는 칭호도 一考할 필요가 있다. 大內에서 부인들이나 宦官들은 임군께 대해서는 「상감마마」라 한 듯하다. 그러나 보통 신하들은 「殿下」라고 불러 모섰지 상감마마라 하지 않었다. 이 「이야기」전편을 통하여, 전하라 부른 것은 한 곤대 인가 두 곤대 밖에 없고, 그 밖은 다 상감마마라고 되었는데, 이것도 잘못이다.
임군이 三公에게는 相禮로 대하는 제도인데 「宗瑞가」운운도 안되었거니와 여기 뿐 아니라 이 「이야기」에는 대화에서 제 삼자를 화두에 올릴 때에, 모도 그 姓名을 불렀지 칭호로서 말 한 것이 없다. 예컨대 대화 중 「金判書가 여사여사하고 「李參判이 이러저러」하다는 곳은 없고 모도가 「金 아모개」 「李 아모개」- 게다가 때때로는 「놈」까지 부처서, 賤人들의 대화가치 만들어 놓았다.
전편을 통하여 대화며 용어가 천스럽지 않게 된 곳을 찾자면 至難(한 곤대도 없는지도 모르겠다.)한<119> 일이니까, 이런 것은 일일히 집어낼 수 없고 다른 방면으로 보자.
端宗이 즉위 후 慶會樓에 혼자 배회하며 (임군은 재위중 「혼자」라 하는 경우는 단 一秒라도 없다. 심지어 用便도, 「매화틀」이라는 運搬便器에 內待扶掖으로 본다.) 어떤 때는 「얼음이 얼거든 핑구나 돌릴까.」 생각하며 (임군이 핑구라는 이름은 커녕 구경이라도 한 일이 있을까.) 임군이 궁녀들과 산보할 쩍에 대신이 內裏까지 혼자서 뛰처들어와 임군께 뵈오며, 端宗이 上王이 되어 壽康宮으로 나온 때 주머니에 「돈」이 없어서 초를 못사오고 (돈은 李朝에는 孝宗朝에 처음 鑄하였다. 그 전은 楮布다.) 매일 朝會를 받고 (朝會라는 것은 節日이나 혹은 무슨 受稅할 일이나 그런 등 事가 있는 때야 있다.) 아모에게나 金生員 李進士라 부르며 (生進科에 급제한 사람이 아니면 이 칭호를 못 부른다. 지금은 함부로 영감, 진사, 주사 등으로 부르나 당시에는 白面이면 단지 서방이다.) 임군이 당신의 부왕의 생각을 하는데 「아바마마」며-이런 풍습, 습관, 제도상의 실수를 찾어 내자면-아니, 도리어 실수 아닌 것을 찾자면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여기는 대궐에 어떻게 얼컨하게 관련이 있는 사람의 집은 모도 「宮」이라 하였다. 首陽大君宮, 安平大君宮, 무슨 君宮, 부슨 尉宮, 심지어 惠嬪楊씨 궁이라는 것까지 있다. 하인배들의 간편을 위한 지칭으로 駙馬宮, 무슨 洞宮 등으로 불리우는 일은 있으나, 정식으로 궁호가 나리기 전에는 궁이 될 까닭이 없다. 더욱이 楊씨는 中人집 딸이라, 제 친정으로 돌아갔으면 소슬대문도 못할 평대문의 민가요<120> 자가를 장만하였으면 楊씨 宅이다. 이전에 모씨의 모야담에 「尙宮마마」라는 것이 있어서 苦笑를 금치 못하였더니 이것도 거기 그다지 손색이 없다.
文宗 妃를 매번 「顯德嬪」이라 하였다. 顯德嬪이란 것은 대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더욱이 「열네살에」 良?로 東宮에 들어와 5년 지나서 良媛으로 封하다.」하였다는데 良?는 從 2品이요 良媛은 종 2품이라 아마 良媛으로 東宮에 들어와 良?로 進封이 되었달 것을 꺼꾸로 쓴 모양이다. 燃藜室記述에는 「初封承徽(종 4품), 進封良媛, 後遂封 世子嬪」이라 듸었다. 그 뒤 世子嬪으로 책되었으면 거저 「世子嬪」이요, 세자가 후일 등극한 때는 왕비요, 왕의 승하 후에 繼王이 바친 호가 「顯德王后」이다. 왕(文宗)의 陵이 顯陵이기 때문이다. 顯德嬪이란 것은 존재치 않었다.
이 「이야기」는 맨 첫줄부터 맨 마즈막 줄에 이르기까지 「네-이-」라고 길게 뽑아서 하는 대답은 한 군데도 없다. 아렛사람이 웃사람에게 대하여 하는 대답도 모도 今日의 平交끼리의 대답인 「예」 한 마듸로 되었다. 임군이 世子嬪을 부르는데
「아가. 듣거라.」
운운은 고소를 지나칠 일이다.
신하가 임군께 자칭하는데, 「소신이 여사여사」라 하고 하였는데, 이도 과오로서, 藩邦으로 自任하는 朝鮮서는 「陛下」라 못부르고 「소신」이라 자칭치 못한다.
이 「이야기」로 보자면, 아렛사람이 웃사람게 뵐 때는 반드시 꿇어 앉는 것으로 되었으나, 조선의 실풍습에 잇어서는, 아렛사람은 웃사람 앞에 반드시 읍하고<121> 서있어서야 하며, 계급의 차가 조금만 벌러지면 楹內에 조차 들어서지를 못하고, 좀 더 벌러저서는 臺石(댓돌)우에도 올라가지 못한다.
쇤네(소녀)라 할 것이 전부 소인이라 되었다.
便服이라 할 것이 전부 平服이라 되었다.
요컨대 「이야기」의 줄기는 宮廷秘話이면서도 宮廷이며 巨族들의 생활습관, 풍습 제도 등은 시골(시골서도 양반없는 평안도나 함경도) 土豪의 집안 이야기나 다름이 없이 되었다. 대궐이나 顯家의 습, 속, 제 등은 엿볼 바이 없다. 우에 기록한 것은 그 대범한 자이고, 細少한 一句까지도 모도 시골 土豪의 생활이지 궁중이나 대가의 생활이 아니다.
무론 궁중풍습의 細少한 자는 大官도 알지 못하는 배요, 內官이라야 비로소 알배이지만 대범한 것까지도 알아보지 않고 상상뿐으로 섰다 하는 것을, 작자가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신문사에서 그 신문의 편집국장의 직을 가지고 餘暇에 쓰는 것이라, 참고할 겨를도 없기는 없었겠지. 그러나 너무도 이붓 자식 취급한 점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端宗哀史」 중 이런 이야기가 있다.
(略) 成三問이 北京갓든 길에 어떤 사람(중국인)이 조선 문장 은다는 말을 듯고 墨畵白鷺圖 한 폭을 가지고 와서 畵題를 청하였다. 三問은 그림을 보자말자 「雪作衣裳玉作趾, 窺魚蘆渚幾多時, 偶然飛過山陰墅, 誤落羲之洗硯池」<122>
라고 불러서 명나라 사람들을 놀래었다고 한다. 아무리 三問이 詩는 잘 못짓는다 하더라도 이 만큼은 그도 詩人이다.(略)
이상은 대체 三門이 詩를 잘 짓는다는 칭찬인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稗官雜記」에 잇는 아레와 같은 삽화를 春園이 誤釋한 것이다. 즉, 三問이 北京에 갔는데 그 곳 사람이 白鷺圖를 (펴 보이지는 않고) 題詩를 請한다. 그래서 三問은 「雪作衣裳玉作趾, 窺魚蘆渚幾多時」라고 부르는데 그듀Œ야 그 사람은, 白鷺圖를 펴보인다. 보매 墨畵圖라, 「雪作」 「玉作」은 안되었다. 여기서 三問은 頓智를 내어 「偶然飛過山陰墅, 誤落羲之洗硯池」라 下句를 불러서 「雪」과 「玉」의 땜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맛 것을 誤釋하리 많지 한문지식이 약한 春園이 아니다. 이붓 자식격으로 대스럽지 않게 붓을 잡았기에 이런 실수가 생겨난다.
우에 기록하니 만치 개괄적으로 결점을 들추엇스면 인제부터는 逐頁檢討를 하기로하자.<123>
<104-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