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文學과 生의 問題 - 白鐵

이강기 2015. 10. 1. 21:14
잡지명 삼천리 제11권 제1호
호수 제11권 제1호
발행년월일 1939-01-01
기사제목 文學과 生의 問題
필자 白鐵
기사형태 문예평론

月前에 나는 例의 知識階級論을 통하야 생의 문제를 제의하면서 그것을 통하야 知性의 改造를 생각하고 또 그것을 계기로 해서 문학문제를 재인식하야 자기의 체계 우에 어떤 발전적인 것을 꾀하고저 한 것은 그 생의 문제의 제출과 함께 자기로선 문학주위의 시대적 의미로서나 또는 문학자체의 현대적인 과정으로서 혼자서 생각하고 반성하는 한 두가지의 사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극히 약한 조건인지 모르지만 첫재로 나는 今日의 시대를 한 개의 前提的인 時期로 보는 것이다. 例의 知識人論 중에서도 나는 현대를 하나의 薄暗時代로 보되 이런 시대에 어떤 「新生」을 약속하는 문학이 등장될 것을 理想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에 있어 그 薄暗이 시간적으로 오후에 속하는지 오전에 속하는지는 今日을 대하는 주체가 다른데서 자연히 달너질 문제인지 모르거니와 나로선 그것을 유리한 측에서 占定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동료들 중에는 대개 이런 견해에 반대의 意를 表하고 있는 듯하다.
나의 知識人論과 그 生의 문제에 대해서는 金南天 金午星氏 등이 친절한 비평을 해준 것이 있는데 氏 등도 이 견해에 대해서는 각각 반대의 意를 표하고 있다. 例를 들면 金南天氏는 「知性과 生의 哲學」(東亞日報)에서 今日을 어둠이 짓터가는 黃昏으로 봐서 - 黃昏엔 모든 소가 꺼머-게 보힌다는 哲言을 인용한 대목이 있는데 거기 대해서 金氏는 명백한 의견을 듯겨준 것이 없어 확실한 말은 할 수 없으나 혹시 그 말은 현재에 있어 新生의 문학을 생각할 수 없는 시대임을 지적함이든가? 그러나 金氏는 今日의 현실적인 것에 대하야 나의 의견의 전부를 부인한 것은 아님은 알 수 있는데 金氏는 그 직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이 있다. 「미네루바의 올뱀이는 하용 黃昏에 處하야 비로소 그의 飛翔을 개시하였다고 한다. 한 역사적 사회가 세계적 역사적 임무를 다했을 때 知慧의 女神은 黃昏을 타서 새로운 활약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이것은 이 시대에 대한 知혜의 새로운 활약을 是認한 말이다. <228>
金午星氏가 「知性人의 문제」 「魔術的 精神과 逆說的 精神」 등 2차에 걸처서 내게 보낸 抗論에는 그 主旨가 時世를 不拒하는 나의 현실에 대한 태도를 비판하는데 있었다. 金氏는 今日의 현실에 대하야 그 反歷史的인 현실을 受認할 수 없는 것과 현실에 實部와 虛部를 설정하는 것이 잘못이며 今日의 地方的인 情熱과 意慾은 知性人의 個性的 情熱과 意慾과 상통하는 것이 있을 수 없으며 도대체 今日은 時世的인 것에 有利한 側面을 설정할 수 없다는데 있다. 그代身 金氏는 今日의 현실을 超脫」 또는 「超克」한다든가 「現實의 利益을 단념하고 獨自의 個性에서 知性을 살녀야한다」고 주장을 한다. 대체 나는 수년 이래 「超克」 「超脫」 등의 현실에 대한 태도의 설명을 드러왔으나 지금와서는 다만 공허한 감을 느낄 뿐이요. 거기서 아무 것도 시작이 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현실과는 직접 관련하지 않고 獨自的 個性을 설정한다는 말도 내게는 너무나 空虛한 宣言인 것 같다.
여기서 적은 紙面의 전부를 金氏와의 논의로서 채울 수는 없으나 大意를 통하야 생각하면 하나의 시대가 전환을 한다면 그 어두음이 어느 경계가 저쪽에 속하고 어느 것이 이쪽에 속한 것인가는 극히 微妙한 것이요. 또한 그 전환이 一見 意外의 우연적인 것이 계기가 되는 이유도 一律的으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인 줄 한다. 더구나 今日에 처하는 知識人이나 文學者가 미래에 대한 이상을 설정하고 그것을 현실적인데서 주장을 가지는 문제는 더욱 데리케-트한 문제는 아닌 줄 안다.
個性과 普遍性 問題에 있어도 金午星氏는 個性을 鍊磨시켜서 普遍性으로 변화한다는 말을 하면서 도스트엪스키-의 例를 인용하고 있으나 金氏의 의견데로 도스트엪스키-는 결코 個性이 세련되여 普遍化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주장한데서는 공연한 國民主義者로서 地方的인 것을 주장하야 國際性과 대립했고 作品上에도 個性과 普遍性이 외관상으로는 도리혀 합치되지 않은 例를 수다히 갖이고 있다. 도대체 個性自體를 아무리 닥고 쓸고 해도 그 자체가 普遍性으로 변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보다도 個性과 그 時의 현실과 부닥처서 個性的인 眞實性과 現實의 本質的인 기피 深에 合致되여 普逼性과 통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데까지 個性을 통하야 普遍性에 나가는 것이요. 그 個性은 現實에 사는 生의 장면을 떠나서 個性自體의 純粹한 문제는 아니다. 내가 미래에 理想을 설정하고 그것과 통하되 生의 장면에서 통일하고저 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물론 나는 金午星氏의 비난과 같치 個性과 普遍性을 機械적으로 용납하고저 한 기억은 없다. 나는 무었보다도 현대의 知識人이 사는 내용을 좀더 채와보자는데서 個性과 普遍性 現實과 理想을 설정했든 것이다. 하나 역시 金氏와의 議論은 今日의 現實性에 있다.<229>
가령 현대가 金午星氏 등의 설명대로 현대는 暗黑하야 一尺을 그 속에 넣어 볼 여지가 없더라도 우리들은 오히려 이 현실에서 현재 살었고 살어야 하고 또 살기 위하야 노력해야 한 것이다. 東京의 某市井主義作家는 그의 작품을 통하야 市井的인 현실에 대한 自由勞?者의 生活情熱을 표시하야 「그레도 역시 살고 있고 살어나가고 살어가여야 한다」고 自己生活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내가 現世에서 生을 생각하고 그것을 등장시키는 것은 첫재는 이런 소박한 생활적인 감정과 의욕을 근거를 잡고있는 주장일는지 모른다. 여기에 비하면 내가 몬저 말한 것 현대에 대하여 하나의 「新生」의 문학이 誕生할 시기로 占定하는 것은 훨신 그 근거가 微弱한 것이라 할 것이다. 나는 다만 今日의 현실적인 것에 대하여 可及的으로 그것을 희망하고 신뢰하고저 하는 것이다. 본래 近代라는 體構가 今日에 니르러 모순을 가진 것이라면 그리고 어떤 사건이 우연적으로 致來되어 한 현실을 이룬 경우에도 그것이 역사의 軌上에 올나선 한 그 현실도 모순을 갖고 있으며 그 한에서 거기서 虛部와 實部를 구별하고 그 實部를 유리한 요소로 어떤 필연적인 것을 차저내는 것 그것이 내가 역사를 신뢰하는 最大限度의 生活情熱이다.
우리들이 今日에 사는데는 역사와 미래에 대하야 그만한 신뢰를 갖지 못하고서 살어갈 수 가 없는 것이며 내가 生의 態度에 있어 될 수 있는대로 理想을 추구하고 眞理를 신뢰하는 것은 그런 때문이다.
몬저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들은 미래에 理想을 설정하고 현실에 살되 그것과 통하는 장면을 生에 求하여 그 理想에 도달한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今日에 우리들이 생활하는 장면이 아무리 어둡고 卑俗하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강하게 理想을 추구하고 요구해가는 생활이라면 그 生活形態에서 우리들은 하나의 理想을 추구하는 형식은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生의 문제를 제출한 것은 무었보다도 현상을 目睹하는 사실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결코 그 반대는 아니다. 나는 이런 生의 問題를 통하야 현대의 知性問題가 空虛한 知識主義에 떠러지고 너무 知識을 위한 知識的인 경향에 떠러버린 현상에 鑑하야 그 知的 生活이 어느 듯 生의 問題와 隔離된 것을 지적하고 거기서 知性의 改造의 의미를 붓잡어 보자든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 나의 이런 노력을 한편으로 도리혀 知性을 害치는 결과에 니를 험이믄 헌닙었든 것이다.
金南天氏는 그 경우를 우려하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生의 哲學은 哲學의 본질을 一種의 宗敎化의 經路를 거처서 그것을 非合理精神의 세계에 擊留하는 것이 안일 수 없다. 이러한 非合理나 哲學의 宗敎化의 이론이 과연 知性을 擁護하고 伸長시킬 임무를 堪當할 수 있을까지는 적지 아니한 의문이 아니라 할 수 없다」고. <230>
그러나 그것은 金氏의 杞憂가 안인가 생각된다. 물론 내가 提起한 例의 生의 問題를 끝까지를 추구해가면 어느 한도에서 과거의 모든 생의 哲學者들 예를 들면 「니체」나 「케아게팔」과 「세스토프」나 나가서는 「나무노」나 「가셋트」 등까지 와도 어떤 관련을 가지여야 할는지 모르나 意識的으로 나는 그것을 노력한 일이 없으며 그 生의 問題를 절대적인 지위에서 종교와 같이 奉戴하는 노력도 갖이지 않었다. 이상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나는 그것을 극히 소박한 의미에서 혹은 現世에 處하는 生活的인 태도로서 하나의 문학의 知性에 生活的인 呼吸과 信賴와 情熱을 갖이고 북도두자는 노력에 불과했든 것이다. 그런 노력은 今日의 知性을 해치게 될 것인가 하면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질 안는다. 나는 여기서 生이 단순한 감정이나 정열에만도 보지 않고 또한 今日의 知性이 科學的인 것과 合理的인 것에 基本性格을 둔 것이라는데 본래부터 반대하는 바도 아니다. 例의 知識人論 중에서 내가 知的 生活을 최고의 合理的인 生活이라고 규정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知性을 이해하되 그것이 科學과 合理우에 둔다고 해서 分析과 解釋에 끝치고 무었을 행위적인 것에 의하여 통일을 모르는 지식에는 반대다. 그것은 결코 인간이 知的으로 봐서 合理的인 생활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현대의 知性傾向을 生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은 그러 이유에서다. 그와 같이 생의 입장에서 知性問題를 생각하는데는 그 이상 나가서 지성의 내용이라든가 그것을 거느리는 知識階級 知識分子 流派問題 등을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이 나의 知識人인 문제도 명확히 할 것이어니와 여기선 그 모든 문제를 일시에 해결할 수 없고 다만 내가 사용하는 知識人이란 언제나 「선택된 知識人」이란 의미에 사용한다는 것을 附言하는데 끝인다.
이와 같은 生의 問題는 본래 내가 문학을 중심하고 제기한 것은 물론이다. 今日의 文學問題는 너무 學問的인 것에 떠러지고 事態에 屈從하는 傾向이 濃厚해 보힌다. 今日의 문학은 거기에 대하야 한 개의 이상과 정신을 가저야 할 것이 아닌가.
이 때에 있어 그 理想이란 몬저도 말한 바와 같이 平常時代의 理想과는 달나서 하나의 擬裝에 불과한 것이 사실일는지 모른다. 그 理想은 형식에서 저진 것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차저볼 수는 없고 또 구체적인 내용을 가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今日의 인간에 대하야 하나의 자세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들은 2尺 앞은 보는 때와 5尺 밖을 바라보는 때와는 우리들의 몸을 가지는 자세와 행위가 劃然히 달는 법이다. 文學者는 그 이상에 대한 자세와 擬裝을 취급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 자세는 우리들이 日常生活 우에 인물을 통하야 넉넉히 표현해 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야 文學上에 *어 理想과 現實을 통일하는 문제는 인물의 實際生活場面을 통해서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 두 가지를 救하는 길이요. 이론적으로는 理想과 現實이 生을 통하야 통일되는 것일줄 안다. 今日 문학에 있어 文學的인 道德 소위 「모랄」이란 것이 生活者로서의 情熱로서 나타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231>
<228-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