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文藝時感 - 韓雪野

이강기 2015. 10. 1. 21:17
잡지명 삼천리 제13권 제3호
호수 제13권 제3호
발행년월일 1941-03-01
기사제목 文藝時感
필자 韓雪野
기사형태 문예평론

作品을 써내지 못할 것 같은 불안은 어떤 일부의 作家에게만 限한 問題가 아닌 듯 하다. 누구나 없이 『쓸 수 없는 작가』의 苦憫과 失意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들은 때로 自嘲를 느끼고 또는 『때』를 탄하는 일이 있다. 어쨋든 그 무엇의 탓이겠든지 작가가 시방 苦境에 처해 있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한때는 동키호-테처럼 호기스럽게 外界遍歷에 나서서 현실을 제멋대로 요리해 보고 또 되나 안되나 무상한 열의를 가지고 현실을 재구성하려고 애를 써 보았으나 때가 나빠서 그랫든지 사람이 못나서 그랫든지 아무 이룬 배 없이 한 개 백수건달로 私世界의 좁은 문을 통하여 정신적 고향으로 돌아와서 보잘것은 없으나 책상위에 조고만 관조의 세계를 펴놓고 민민한 심경을 엮어 소설이라는 일음으로 내놓아보고 또 스스로 자기도취를 느끼기까지 했으나 그 흥분은 결코 오라지 못했다.
私世界에 쌓은 조고만 塔속에서 스스로 움지길수록 작가는 이마를 받고 손발을 다칠뿐. 어쨋든 그것은 작가의 本道는 아닌 듯 싶다. 그러므로 작가들은 거개 심경소설이니 사소설이니 하는데 대하여 점점 흥미와 열의를 상실하면서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당연한 일이기도 하리라. 두 말 할거 없이 사소설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나쁠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것은 작가의 높은 앰비숀이 살 수 있는 세계는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들은 막연히나마 어떤 전기를 생각하고 그윽히 새로운 파악을 꾀하고 있으나 아직 그 미광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신인도 그렇고 旣成도 그렇다. 아니 어떤 의미로 보면 旣成이란 사람들이 더욱 氣息奄奄한 형편이다.
新人에게는 그래도 문학적 비죤이니 이류죤이니 하는 것이<254> 있지만 旣成에게서는 그것마자 점점 枯渴하면서 있는 것이다. 일즉 어떤 사람은 『얻은 것은 이데요 잃은 것은 藝術이다.』와는 陳磨한 재담을 한 일이 있으나 여기서 새삼스레 그 말투를 본 받을 것 없이 실로 旣成에게는 한 개 김빠진 『이야기』만 남고 『로망』(廣義로 小說)은 없어지면서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다 그만두고라도 金南天씨같이 根氣좋은 분은 挽近 멫해동안 조곰도 意氣가 挫折됨이 없이 評壇과 作壇을 독보하다싶이 휩쓸고 다니면서 一作을 내면 거이 一作마다 평론 기타 어떠한 기회, 심지어 남의 신간 소개에서까지 自作自薦의 변호를 게을리 하지않고 또 一作마다 새 이즘을 내걸고 새 意義를 스스로 붙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하등 이렇다 할 轉機와 新生面을 보여주지 못할 뿐 아니라 실없이 侏儒의 잔소리와 재담만 늘어갈 뿐이고 그 알맹이에는 綿 대신에 스프가 버쩍 늘어가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곰 3文짜리에 百圓廣告를 내고 예사로운 賣藥에 聖樂的 效能書를 붙이고 있는 感만 더하게 하는 것이다.
그 같이 明晳한 두뇌를 가진 氏로서도 한갓되히 독자를 疲勞케 하는 작품밖에 못내는 터이니 가외의 작가는 다시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여게 한 가지 異例가 있으니 그것이 金氏와는 정반대로 자기로 자신을 말한 일이 한번도 없고 또 남이 그를 말한 일도 거이없는 한 사람의 新進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놀람은 더욱 커지지 않을 수 없다.
또 더욱 지금 心境小說이니 私世界니 하는 데로 부터 다시 本格小說에의 志向으로 돌아가랴는 우리의 앞에 한개의 微光을 던저준다는 점에서도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즉 아직 별로 아는 이 없는 듯한 新人 石仁海 君의 『山魔』(人文許論, 昨年 5月號)와 『彷徨』(朝光, 昨年 8月號)인데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 作들이 아무의 입에도 오르지 못하였슴에도 불구하고 작년도의 最大收穫이였다는 것과, 作家全般이 이른바 心境小說이니 私小說이니 하는데 권태가 생기고 落望을 느끼는 때 이 作은 우리에게 한 개 귀중한 示唆를 준다는 점과 또 하나는 신인을 돕고 키우기에 대단히 인색한 이 文壇과 또는 신인이 나오기 극히 어려운 이때에 있어서 그만한 力量과 修練과 構成을 가지고 나왔다는데 걸려있는 것이다.
오늘은 이른바 純文學의 소리가 높은 것이 사실이오 또 많으나 적으나 作家全體가 그리로 접근해 오랴고 노력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 접근해 오는 路程은 작가마다 各異하다. 즉 종전 이른바 無意志派 혹은 藝術至上主義의 一群과, 他方 功利主義라든가 傾向派라고 부르든 一派의 純文學에의 코오쓰는 서루 다른 것이다.<255>
前者는 더욱 社會現實, 客觀世界에의 무관심을 강조하고 생활이라는 것보다 한 개 단편적인 토픽을 번거럽게 修飾하고 潤色하고 화장하는데 반하여 後者는 결국에 있어서 私世界로 가는 것은 전자와 같으나 그리면서도 어디까지든지 사생활을 통하여 시대를 말하랴 하는 것이다.
또 같은 일상적, 신변적 모티-브를 취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전자는 現實逃避 乃至 嫌忌의 面으로부터 하는데 반하여 후자는 시대의 표면을 흐르는 一時的 現象에 흘러 버리지 않는 부분으로서의 생활의 日常的 部分을 취하려고 한다. 이 생활중의 일상적인 부분은 어떤 시대의 假面이든가 안개라든가 강요에 대해서 가장 탄력성이 있는 것이다. 여게 오늘의 일상적인 身邊小說의 특수한 의의가 있지 않을지.
물론 石仁海君의 작품도 心境的, 私小說的 要素를 다분히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체로 內省的, 感性的, 抒情性에만 치중하랴는 이른바 純文學派와는 달리 石군의 작품에는 강렬한 생활적인 ?事性과 또는 생활적인 모랄이 지배적인 것이다. 記述이며 描寫의 점으로 보면 대체로 寫實的이여서 誇大한 形容이라든가 불필요한 데코레이슌이 없다. 簡潔直 截하면서도 餘韻과 密度가 높은 문장가운데 최대의 함축을 내포시켜서 작품의 印象히 심각히 뒤를 끌고 머리를 욱박혀 오는 것이다.
石군의 二作 『山魔』와 『彷徨』(작품으로는 『山魔』에 일단의 長이 있다)은 모다 구절구절한 하층 생활자 층에서 取材한 것이면서도 그 작품의 혈관 속에는 굳센 生活的 모랄이 흐르고 그 신경계통에는 美學的 均齊와 偕調가 있어 藝術的 薰香이 높고 또 그리면서 동시에 발랄한 생기가 全遍을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신인다운 문학적 정열이 결코 軌를 逸하지 않고 꼭 자리가 잽혀 있는 것도 신인으로서는 보기 어러운 세련이라 할 것이다.
君은 二作에서 ?軻不遇의 落魄란 사람, 무지한 사람, 劣情이 激烈한 사람, 아무 수호의 배경이 없는 賤民과 流民을 주장 그렸는데 그러면서도 그것은 단순히 그러한 사람의 설명이나 정의나 分析이 아니고 실로 생활하는 그 자태를 그대로 再現한 것이다. 여기에 예술로서의 一切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작품은 實* 解說이 아니고 표현인 것이다. 물론 작품표현에 있어서 묘사외에도 사람에 따라서는 흔이 說明과 揷話와 시츄에이숀과 아반츌같은 것을 巧妙히 엮어가고, 또 이것은 素材整理上 또는 구성상 피할 수 없는 일이나 石君의 표현에 있어서는 묘사가 지배적이오 설명은 극히 적다. 그러니만치 신인으로 犯하기 쉬운 아니 차라리 다수의 작가가 범하고 있는 남을 설득하고 남에게 인식시키랴는 설명이 보이지 않고 어디까지든지 그 作品은 현실의 재현이오 있는 그대로의 표현이여서 그것은 한 개의 말하는 현실로서 독자에게 주는 저력이 더욱 강한 것이다.<256>
따라서 그 作들은 人間의 性格도 說明을 거치지 않고 표현된 생활을 통하여 단적으로 單純化하고 또는 綜合化하여 그 단면이 넉넉히 전체를 彷彿케 하는 것이다.
君의 작품에 있어서 또 하나 特記할 것은 그의 독특한 대화일 것이다. 筆者 寡聞한 탓인지는 몰라도 대화가 이만침 婉曲하고도 適切하며 簡明하고도 함축이 많은 것은 新人旣成을 물론하고 일즉 본 일이 없다. 물론 君은 이제 겨우 前記 2篇(新聞當選作도 있다 하나)을 세상에 물은 듯하나 이 2편만으로도 君의 대화의 妙는 넉넉히 窺知할 수 있는 것이다.
君의 대화는 인간의 개성이 각각 선명히 그 특징을 나타내며 또는 그 心理的 過程과 사건의 진행을 보이는 透視?的 手法과 言語와 액숀의 均衡, 感情의 뉴안쓰가 고도로 壓縮되여 그 한마디 한마디가 數十語의 설명보다 더 適切有效하게 讀者의 머리를 따리는 것이다.
論보다 證據로 『山魔』 中, 허감독과 순탄이가 서루 만나서 순탄의 의붓딸 복실이를 먹고 멕여줄 공론을 하는 장면 한 토막을 잘라보면.
『날 딸아 오라구』
순탄은 앞서 외진 시내가로 휘적휘적 걸으며 얼추 호령이다.
『능구렁이 네 같 것의 속을 몰라서』
대뜸 달려들어 다부지게 꾹 눌려 떠본다.
『이렇게 대번 늠실거리긴가. 멋인데, 그려』
덩둘한 척 능청을 부리는 허감독,
『복실일 못먹어 결이 났지?』
『번이 알면서 꼬집긴가』
『내 눈이 삐였었지. 애초는 노구쟁이, 로종달에는 장모루씨 우려들고 장이 으젓한데』
『될가?』
(中略)
『고름 맺기 맹세라면 한 수가 있지』
그 다음 순탄이가 복실일 구실리는 場面은
『봄도 한참이니, 사람의 봄맛을 보여주랴. 알뜰한 서방을 중신할게』
『어머니두 애송이가 서방은 다-멘구. 봄이면 저저마다 그런가 뭐』
얼굴이 밝애서 할미꽃을 휘무주르는 복실이가 되우 앙징스러워 밤에
『나이 좀 차라서 열여섯이, 아이를 무웃 밑 뽑듯 할 때야. 허긴, 나 서방해주 하고 나스랴만』
아무리 여우와 바뀌여난 계모기루, 간대루 각박하랴.
마음속에 믿고 싶은 것이 이런 때 인정머리인 게다.
『내가 식은 소리하겠늬. 허감독 말이다. 그런 감참외도 아니 댕기냐?』

이 外에도 그의 대화는 어느 것이고 버릴 것이 없으나 특히 이 목을 잘라 온 것은 그 장면이 제일 表現하기 어려운 대목이기<257> 때문이다. 얼른 보면 말의 재치와 대벗은 것을 取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보기 쉬우나 실상 이상에 인용한 허감독과 순탄, 순탄과 복실의 대화장면은 웬만한 作家가 써놓면 卑俗해지고 醜雜스러지기 십상이오 또 지금 우리들의 大家란 사람들에게 이 장면을 맡긴다 하더라도 그렇게 될 것은 그들의 작품을 보아서도 넉넉히 推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인용으로 보아 石君의 대화가 얼마나 때가 벗은 것인지를 알 수 있으며 또 그 人物들의 心情과 動靜이 손에 쥐일 듯이 선명히 浮彫되여 있지 않은가. 君의 2作의 대화가 모다 妙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이 장면을 取한 것은 그것이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장면이면서 가장 優秀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은 以上 引用을 읽어보고 또 스스로 작가가 되여 제가 써보면 더욱 잘 알 것이다.
여게 關聯하여 또 하나 생각되는 것은 君의 文學上用語와 文章에 대해서다.
君의 작품이 작년도 新人旣成의 어느 작품보다 뛰여난 것임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이로되 安懷南 氏의 明敏으로도 그 1年 總評에서 石君의 일음을 빼여버리고 나의 기억으로는 오직 李軒求 氏 한 분이 어디선가 약간 건드리고 간 일이 있는 듯 싶다.
하나 李씨는 石군의 작품을 말하는데 있어서 극히 쩌른 한마디로 方言을 살려보려는 노력이 보인다는 의미의 말을 한 법하다. 그러나 石군의 작품을 다만 文章이라는 점에서만 본다 하더라도 方言 云云으로서 막아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큰 侮辱인 것이다. 실은 그 侮辱이 결국 뉘게로 돌아갈 것인지는 모르지만... 결코 君의 用語를 方言으로 부를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君은 細心한 용어로 一言一句를 모다 文學的 彫琢을 加한 연후에 비로소 文章으로 엮어 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君의 문장은 결코 語彙가 풍부하다든가 하는 말로 표현할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 文壇에서 旣成으로서는 蔡萬植 씨가 말의 부자요 또 그 驅使가 독특한 경지에 이르러 他의 追從을 不許하나 石군은 그와는 딴 의미로 이제 껀 나온 작가 중에서 첨으로 用語와 文章에 文學的 彫琢을 준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君의 용어 중 方言이라고 생각되는 말이 있는 句節을 집어다가 두 번, 세 번, 네 번을 읽어보라. 그러면 정녕 우리의 조상이 이땅 어디다가 떨궈놓았든 말을 이제 비로소 찾는 듯 그 말 속에서 핏줄을 느낄 것이오 따라서 그것은 一瞬 뒤에는 곧 내 말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귀에 서투른 파뜩파뜩한 말, 구수한 말들이 많이 나오건만 문장전체는 輕路熟車와 같이 미끄럽다. 그러면서도 또 그의 文章의 성격은 결코 技나<258> 才에 偏하지 않고 그 속에는 늘 한 개의 力線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즉 그의 문장이 美學的 手法위에 생활적 모랄을 獲得하였기 때문이리라.
끝으로 慾을 말하자면 作品構成에 다소의 무리가 있는 듯하고 그것은 특히 『彷徨』의 가운데 이따금 보이는데 이것은 물론 手法上의 문제라는 것보다 차라리 思想上의 문제로 보이는 점에서 앞으로 이 舊套를 벗어나 新生面을 개척해 주었으면 한다.
그 다음 君의 작품을 읽고 나서 한가지 불안을 느낀 것은 君의 작품이 너무도 꼭 째여저서 즉 早熟한 成人을 보는 듯 今後의 更張을 여기서 느끼지 못하는 그것이다. 作家뿐아니라 大成할 사람은 非凡한 반면에 가끔 가다가 루-즈한 데가 보이고 또 그것이 도리여 그 爲人의 將來性, 發展性, 伸縮性을 암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君의 作品에는 즉 한 줄의 여백도 없는 것이다.
돌함같이 꼭 째여저서 더 주릴 수도 없고 더 널굴 수도 없는 感이 든다. 자칫하면 이런 작가는 小完成에서 전진하지 못하고 도리혀 시대에 뒤지는 수가 있는데 그 前鑑으로는 金南天 씨같은 사람을 끌어와도 좋다. 氏는 너무 早熟한 탓인지 마치 臘病質者의 그것같은 날카롭고 배틀어진 신경을 가지고 自家流의 雛型照準器를 딱 놓고 세상과 인간을 내다 보아 조곰이라도 그 寸法에 맞지 않으면 脫線이니 混迷니 하나 이것은 마치 난쟁이가 체대좋은 大人을 병신으로 보는 것 같은 것으로 결국 그가 보는 視野는 건강한 성인의 세계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石군이 그 前轍을 밟으리라는 것이 아니라 小才와 小成에 만족하지 말고 더욱 노력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한 개 他山之石을 보여준 것뿐이다.
어쨋든 나는 君의 작품을 읽으면서 소설의 魅力은 역시 心境小說에 있는 것이 아니고 本格小說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 이제부터 작가들은 다시 私世界로부터 외계로 눈을 돌릴 때가 아닌가 생각하였다. 우리의 문학이 志向할 곳은 역시 그곳일 줄 알며 또 大成하는 길도 그것일 줄 안다.<259>
<254-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