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월북 작가, 오장환과 임화

이강기 2015. 10. 1. 21:35
월북 작가, 오장환과 임화.(1화)  

 

 
 

 



역사의 진실의 김용범 교수입니다. 지금까지 5회에 걸쳐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재미없잖아요. 오늘부터는 문화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문화적인 이야기라 하면 다른 것이 아니고요, 문학, 시인들 중에서 상당히 중요한 두 사람부터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임하라는 시인과 오장한 이라는 시인입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의 분단역사라는 것 때문에 문학사에서 지우개로 싹 지워져 버린 사람들입니다. 북한에서는 북한대로 지워졌고 남쪽에서는 월북을 했기 때문에 지워져 버렸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사람들인데 분단이 됨으로써 이념 문제에 저들이 갈등을 갖게 되고 북을 택했죠. 북을 택했기 때문에 어느 문학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고 공백으로 남게 된 사람들이 바로 이 오장한과 임하입니다. 요즘 와서 임하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교과서에 월북한 사람들 이름을 못 쓰게 되었습니다. 임 동그라미, 오 동그라미 한 동그라미...이렇게 썼습니다. 참으로 슬픈 역사였습니다. 어떻게 책에다가 동그라미..이렇게 쓰겠습니까. 그 중에서 해방이 되고나서 공산주의 이념을 추구하던 문학예술 쪽의 총수가 바로 임하입니다.

1940~50년 사이에 남북한은 자기가 선택한 이념에 따라서 대대적인 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무산계급을 위한 프로레타리아 혁명에 참가하겠거나 아니면 그것의 이념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대거 북한으로 올라갑니다. 북에 있다가 “이건 아니야...”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거 남쪽에 내려갑니다. 민족이동처럼 이념에 따라 예술가들이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됩니다. 특히 한 5년 사이에 임하, 한설야, 이태준 과 같은 예술가들, 한 100면 정도가 월북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쪽에는 어떻게 보면 중요한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가 버리는 문제가 생기죠. 임하는 바로 그중에서 그들의 그룹을 리드하던 사람입니다.

임하가 북한에서 숙청되는 이유는 ‘미제의 간첩’이다. 라는 이유입니다. 남노당 숙청 때 싹 사라져 버리죠. 그러니까 북한에서 지워져 버린 것입니다. 그 임하가 월북하던 47년도가 대단히 중요한 연도가 됩니다. 그 말은 해방 뒤에 남쪽에서 남노당 계열 사람들이 지하로 잠적을 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철저한 탄압이 시작됩니다. 임하가 월북한게 바로 47월 11월 20일인데 임하가 왜 월북했느냐 하는 것은 문학인들에 대한 것이 아니고 좌파에 대한 숙청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47년 8월 12일 새벽에 좌파에 대한 일제 검거령이 내립니다. “싹 잡아들여” 이렇게 된 것이지요. 첫날 경찰에 잡혀 들어온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이어성이란 사람인데 이어성은 이태백의 형님이고, 이어성 백남훈 유영준 같은 사람들이 1차로 검거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번 싹 잡아들이면 끝나야 하는데 경찰은, 여기서 활동을 중단하지 않고 연이어서 좌파검거를 벌입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고, 조선 작가동맹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이 “이래선 안되겠다” 하면서 38선을 넘게 됩니다. 임하도 이때 넘어가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게 재미있는 것이 머냐면, 임하와 오장환이 같이 월북을 하게 되는데 오장환은 평양에 가서 활동을 하고 임하는 해주에서 자리 잡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6.25때까지 해주에서 있었다는 것이지요. 해주라는 지역이 왜 핵심지역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38선 이남하고도 연결이 되기 쉽고 여기서 책이나 신문을 만들어서 비밀리에 서울에 뿌릴 수 있다, 하고 이야기 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또 이원조라는 언론인이 그때 황해도에 문화부장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해주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임하가 오장환과 같이 올라가서 활동을 하게 되는데 제가 관심 있는 것은 임하보다는 사실은 오장환입니다. 이 오장환이 시인 서정주와 함께 시인문학을 같이 움직이던 30년대에 시의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시를 잘 쓰던 사람입니다. 또 이 오장환의 시는 임하의 시가 ‘종로네거리의 순이야’ 이런 것과 달리 상당히 아름다운 시를 많이 썼던 사람입니다. 제가 낭송은 잘 못하는데 오장한의 시 한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아.이런 시도 있었구나. 참 아름답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느끼게 되실 겁니다. 이 시 제목이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The last train" 마지막 기차라는 시입니다.

저무는 역 뒤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야.
개찰구에는 못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
병든 역사가 화물차에 실려 간다.
대합실에 남은 사람들은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며
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 목 놓아 울리라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이 너의 등에 지도처럼 펼쳐져 있다.

이 “The last train" 이라는 오장한의 시는 떠나는 기차를 바라보는 슬픔도 함께 가져가 버려라~ 하는 아름다운 시의 한편입니다. 또 오장한의 시중에 ”모촌“ 이라는 시가 잘 알려져 있는데요, 이 시가 과연 공산주의 활동을 했을까, 고 사람들이 의심할 정도로 아름다운 시입니다. 한번 읽어 드릴 테니까 들어 보십시오. 저녁노을이 지는 시골 동네라는 뜻입니다. ”초라한 지붕 ??어 가는 추녀위에 박 한통이 세었다. 밤서리 차게 내려앉는 밤, 싱싱하던 농군이 사그러 불던 밤, 지붕 밑 양주는 밤새워 싸웠다, 양주는 새 박아지를 뀌어들고 썩어가는 초가집을 작별 하였다” 모촌 이라는 시입니다. 시골의 풍경이 담담하게 쓰여 있는데, 과연 이 사람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게 되며 바뀌게 될까요.

8.15가 나자마자 오장환이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시를 읽으면 지금 북한에서 쓰고 있는 시의 원형적 형태가 보일 것입니다, 8.15가 되자마자 오장환은 병든 서울이라는 시를 하나 발표하는데 오장환의 시 세계가 무산계급으로 가기 위한 신호탄 같아집니다. 여기서 한 부분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외친다, 우리들은 이것을 얼마나 이것을 바랬더냐, 아,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나라” 저무는 지붕위에 호박이 널려있고... 이런 향토적인 서정시를 Tm던 사람이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라는 식의 얘기를 터트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오장환의 변화에 대해 깜짝 놀라게 되고... 오장환은 8.15이후 내가 바라던 것은 조선의 완전한 계급혁명이었다고,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선택한 나라로 갈 수 밖에 없게돼죠. 8.15이후 테러가 심해지고 삼일절 같은 날은 양쪽이 갈리어 서로 시위를 하게 되는 폭력적인 충돌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시의 기능이 바뀌어 나가게 됩니다.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현장으로 나가게 되는 형식을 갖게 됩니다,

그는 간 질환을 갖고 있었습니다. 오장환, 북에 47년에 올라가 48년이 되니깐 러시아로 요양을 보내주게 됩니다, 그만큼 영향력이 있던 사람이이지요. 최근 북에서 만든 오장환의 시집이 발견되었습니다, 오장환이 모스크바로 여행을 가서 썼던 시집인데 문화 전선사에서 1950년 5월 25날 출간되었습니다. 소련 기행시집인데 미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6.25때의 전쟁자료를 모아놓는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면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집이 발견된 이유는 서울을 북한 분들이 접수하게 되었는데 시집을 들고 서울에 내려와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게 되었다, 모스크바에 가서 49년 7월에 이 사람이 시를 썼다. 이런 시가 있다는 식이였습니다.

“레닌이시여, 오늘 당신이 누워계시고 스탈린이시여, 당신에게 주는 영광의 모스크바 하늘에는 우리의 영광인 깃발이 달렸습니다. 오, 조국과 떨어진 먼 곳에서 제나라 깃발을 날릴 수 있는 이 기쁨”... 모스크바에 있는 북한 대사에서 휘날리고 있는 깃발을 보며 감격한 내용입니다. 모스크바에서 우리나라의 깃발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 모스크바는 스탈린과 레닌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흥분을 하게 되는것이죠. 그 전까지 향토적 서정을 노래하던 시인이 북한에서 이렇게 바뀌게 됩니다. 참 묘하지요. 그쪽에서는 잘 쓴 시인데 우리가 보기에는 별 내용이 없는 것 같죠. 북한의 관점에서 굉장히 잘 쓴 시고 북한의 시 문학의 전범과 같은 형태가 됩니다,

요즘 북한에서 쓰는 시들이 오장환의 시를 넘지 못한다고 합니다. 물론 북한에서 가장 대표적인 시는 조기천의 시입니다. 다음 주에는 조기천의 백두산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조기천보다 오장환의 시가 전형이라는 것은 조기천이라는 사람은 러시아에서 온 소련 교포입니다. 그러니 와서 얼마나 한국말을 잘 했겠습니까? 백두산이라는 시는 북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시입니다. 그만큼 조기천의 백두산은 중요한데 그보다도 어떤 전형적인 틀을 만들어 낸 사람은 오장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앞으로 벌어질 흥미진진한 조기천 때리기, 조기천의 백두산을 과연 조기천이 썼을까, 모두들 조기천이 썼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지 않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해 보겠습니다, 오장환과 임화 얘기를 가지고 먼저 얘기한 것은 다음 주에 조기천의 얘기가 시작한다는 예고탄 이었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월북 작가, 오장환과 임화.(2화)  


역사의 진실
역사의 진실 김용범입니다.
지난 시간에 저희들은 오장환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장환과 임하 이야기를 한 이유는 해방 후의 북한 문단에서는 두가지 경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남쪽서 올라가 남로당 계열의 작가들과 북쪽에 잔류하고 있던 작가들이 합쳐지는 그런 과정을 겪게 되고 북쪽의 일부의 작가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이념에 따른 남북한 문학의 분리가 시작됩니다. 실질적인 분단 상황이지요.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은 1947년입니다. 1947년은 대단히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중요한 시기라고 하냐면 음향 사건을 빌미로 하여 원산에서 만들어진 동인지 음향이 철저한 비판을 받게 되고 그 중의 한 분이 월남을 하시게 되십니다. 그 분이 최근 돌아가신 구상 선생님이십니다.

또한 음향 사건을 계기로 북한 문학의 최선봉에 서게 되는 평론가가 있는데 그가 바로 백인준입니다. 이 백인준과 함께 북한에서 가장 절창으로 인정받고 있는 작품인 백두산이 1947년에 발표됩니다. 남북한 관계로 봤을 때 1947년은 바로 그 동안에는 물밑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던 자유민주주의 계열의 문학작품과 공산작품이 선명한 로선을 가지고 각각 새로운 자기나름의 길로 가는 그런 분기점이 되는 시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47년에 새롭게 들어나는 세사람의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는 바로 월남을 하게 되는 구상,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선의 푸쉬킨이라고 얘기할 정도의 극찬을 받고 있는 시인 조규찬, 그리고 최근까지 가장 혁혁하게 수령 형상화 문학을 주도했던 백인준의 대두 이 세가지가 1947년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문학에서의 가장 큰 덩어리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조규천부터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남쪽에 사시는 분들이 조규천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988년까지 남쪽에서는 북한에서 최고라고 얘기하던 조규천의 시 백두산을 거론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작품이 있었는지조차도 몰랐고 또 조규천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우리나라에 백두산이 소개된 것은 월북한 작가들에 대한 88년도의 7?19해금조치가 생기자마자 실천문학이라는 잡지에서 88년 올림픽이 있던 그 겨울호에 북한문학 걸작선이라는 작품이 수록되면서 그 작품 중에 조규천의 백두산이 실리게 되면서, ‘아! 이 백두산이 북한에서 얘기하던 그 백두산이구나‘라는 것이 알려지게 됩니다. 불과 몇년이 안되었지요. 이런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고 또 그전까지 이 책을 들을 수도 없었고 이야기하는 것조차 거의 금기사항이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북한 최초의 수령 형상화 문학의 시작이 조규천의 백두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죠. 해방 된 뒤부터 6.25까지를 북한에서는 문학사를 구분할 때 평화적 건설시기라고 이야기합니다. 북한 정권이 수립되서 가장 초창기의 시기겠죠. 문학사를 표현할때도 평화적 건설시기라고 얘기하는데 이때 참가했던 사람이 바로 조규천입니다. 조규천은 한반도에 살지 않았었고 워낙은 러시아 즉 시베리아로 이민을 갔던 이민 가정에 속합니다. 이 사람이 옴스크가 있는 고리키 사범대학을 마치게 되고 1937년에 중앙 아시아로 조선 사람들이 다 넘어가게 되지요. 우스리스크나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살던 사람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가 됩니다. 이 속의 한 사람이 되겠지요. 워낙에 고향은 회령사람인데 중앙아시아로 넘어가서 조선사범학교에서 2년간 교원역할을 합니다. 옴스크에 있는 고리키 사범대학을 마치고 중앙아시아에 가서 카레이스키들 즉 고려인들을 가르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쪽 기록에 의하면 그당시부터 시작활동을 했다고 합니다만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던 사람인데 해방이 되면서 바로 북한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소련군과 함께 진군을 하게 되는 거지요.

소련군이 진군하면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여러명이 있는데 당적으로는 허가이가 있겠고 군에서는 유성철이 들어오게 됩니다. 유성철 얘기는 제가 잠깐 드린바가 있습니다만 문화 예술 쪽에서는 조규천이 새로 건설되는 북한 정권에 참여를 하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한반도 내에서 이루어진 문예활동 사항에 대해서는 전혀 이름을 알 수 없었던 사람 조규천이 나타났다 바로 이렇게 보면 됩니다. 이쪽에 참여하자 마자 조선신문의 문예부에 근무하게 되는데 1946년에 두만강을 보고 서정시 두만강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위 얘기하는 백두산이 1947년에 만들어집니다. 이 시에서는 여러장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안에 빨치산들의 투쟁얘기들이 나오는데 맨 앞부분 서시가 바로 이 시에서 압권입니다. ' ‘오 조상의 땅이여 오천년 흐르던 그대의 혈통이 일제의 칼에 맞아 끊어졌을때 떨어져 나간 그 토막 토막 얼마나 원한의 선혈로 뒹굴었더냐’ 라고 시작됩니다. ‘조선의 운명이 철성판위에 올랐을 때 몇 만 지사들이 밤길을 더뎌 백두의 밀림을 찾았더냐 가랑잎의 쪽잠도 그리웠고 사지를 문턱인 듯 넘나드는 이 그 일이냐 산아 조정의 산아 말하라 해방된 이땅에서 뉘 인민을 위해 싸우느냐 뉘 인민을 위해 첫머리에 섰느냐’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조규천의 백두산의 머리글 서시입니다. 사람들에게 그 이전의 시들에서 보여주지 못한 넘출 넘출하는 장시형태의 시를 보여주면서 백두산이 바로 이런 조선의 운명이 칠성판(즉 관속의 널을 의미함) 올랐다는 것은 관속의 일제 강점을 당했을 때 몇만명의 지사들이 강을 건넜고 백성으로 숨어들어서 이쪽에서 투쟁을 시작했다라고 문을 여는 서시가 됩니다.

여기까지가 전혀 알지 못했던 조기천이 딱 나타났다는 이야기 입니다. 러시아를 방문하다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옴스크에 내려서 조규천을 조선의 푸쉬킨이라 얘기했다 이런 얘기를 드렸습니다. 조규천 얘기와 똑같은 때에 46년도 원산에서 음향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바로 음향이라는 잡지 즉 동인지입니다. 워낙 이 동인지는 원산의 문예총에서 해방 기념 시집을 내달라는 해방기념시집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최근 몇일전에 돌아가신 구상 선생님 작품이 실리게 되고 구상 작품 뿐 아니라 그 안에 실렸던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이 실랄한 비판을 받게 됩니다. 조규천의 백두산이 한 텀이 되면 바로 음향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배척받는 잡지로서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음향이라는 동인지가 46년에 나와서 뿌려지니까 그것을 받아본 북한 평양 쪽의 북조선 문예 총 중앙위원회에서 음향에 대한 결정서를 내게 됩니다. 이게 바로 선명하게 남북한이 이념의 문학으로 갈라지게 되는 계기가 되게 됩니다. 이 결정서에서는 원산의 무척화 동맹을 지적하면서 지도가 필요하다며 몇가지 조치를 취하게 합니다. 음향의 발매를 금지를 시키고 평양에서 검열관을 파견해서 음향을 만드는 과정을 조사하고 거기 수록된 작가들에게 자기 비판 그러니까 자아 비판을 하고 사상 검열을 실행했다고 결정서를 내리게 됩니다.

그 결정서가 나오자마자 바로 백인준이 평론을 시작하는데 ‘건설기 예술은 건국을 위한 투쟁 무기로 현실을 전형적으로 묘사할 것을 논한다’ 이것이 바로 첫줄입니다. 그 얘기를 하고 백인준은 일제 봉건적이고 반민주주의를 청산하고 그 다음에 제일 중요한 얘기를 합니다. ‘문학예술은 인민에게 복무해야 한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문학예술은 인민들의 정서를 반영해야 한다’ 이런 얘기가 되는 것이겠죠. 북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공산주의 문학의 문화예술의 기본은 ‘당성’ ‘노동계급성’ ‘인민성’ 이렇게 얘기하는데 바로 인민성에 대한 얘기가 나오게 되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음향에 들어간 시를 보면서 ‘타락적이고 세기말적이고 유폐적이고 반동적 관념’이라고 비판을 합니다. 백인준은 거기에 실린 작가들에 대해서도 하나씩 하나씩 지적을 하여, 강호는 ‘말세적이고 유폐적이고 주관적인 감상성’을 가지고 있으며, 박경수는 ‘현실도피적, 개인 환각적, 반인민적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구상 선생의 글은 ‘밤이나 길이 강호와 박경수의 특성을 겸한다’ 즉 양쪽 특성을 다 겸한 것이 바로 구상 선생의 시라고 하니까 구상 선생님은 갑자기 갑갑해지게 됩니다.

문제는 인민성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유 중에 재미있는 이유가 나오는데 무엇이냐 하면, 음향이란 향기가 뭉쳐있다는 한문 글자입니다. 비판한 것 중에 음향이라는 잡지가 제일 실랄하게 인민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받은 것은 ‘음향’이라는 제목부터 잘못 됐다는 것입니다. 왜 제목이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편집체제에 있어서 비판받았습니다. 혁명적으로 이 잡지 표지를 붉은 색으로 했다던가 전투적으로 했다면 모르는데 화가 이중섭이 좀 점잖게 그린 표지에 대해서 편집 태도가 봉건적 양반틀을 담고 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조선 건국의 정열을 강조하고 일제 세기말적 유폐적 태도를 청산해야 한다’. 이렇게되자 작가들은 할말이 없어지게됩니다. 바로 구상 선생님이 특히 지적을 받았던 부분이 저희들이 봐도 어렵지만 악날하게 비판을 받았습니다. ‘노정(길거리로 가는 과정)이 변방에 이르면(바닷가로 가게 되면) 안개를 생식하는 (생으로 먹는) 짐승이 된다’. 이 길이라는 얘기입니다. 이 길이 끝까지 가다 보면 바다와 마주치게 되면 그 바다에 안개가 이렇게 오지 않습니까? 길이 안개에 잠긴다는 표현인데 이걸 이렇게 어렵게 쓴 것이죠. 노정이 변방에 이르면 안개를 생식하는 짐승이 된다.

요즘 젊은이들도 이거 들으면 잘 모를 겁니다. 뭐 욕먹어 싸죠. 왜냐하면 그 당시의 문학적 표현으로는 상당이 잘된 부분입니다. 길이 죽 나가던 길이 바닷가에 가게 되면 안개가 스며들어 길이 지워지는 형상이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근데 이게 보이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데 여러분들이 보이지 않으신다면 저는 좀 답답하네요. 그래서 바로 이 사건을 자아비판하게 되고 바로 그 다음날 출두요구를 하게 되자 구상 선생이 그날 저녁에 보따리를 싸서 월남을 한 겁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자유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문학의 자유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내가 한문을 쓰는 것 내가 사상을 표현하는 것 자체를 이렇게 규탄받고 비판받는다면 누가 그 자리에서 문학활동을 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존재가치를 부여받고 그곳에서 생존하고 싶겠습니까? 그런 생업이 있어서 그런 사람이 아니고 문인들은 바로 자긍심 때문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과정에서 월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규천 같은 경우는 이것이 혁명의 시작이었고 백두 밀영에서부터 바로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시작을 하는 백두산을 씀으로써 그 시대가 요구하는 북한이 요구하는 당대가 요구하는 최고의 작가로 칭송받게 되게 되니까 거기 남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나중에 조규천은 얼마 살지 못하고 한국 전쟁때 여기서 비행기 폭격으로 죽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나옵니다. 조규천의 시가 47년 최초로 나온 시인데 왜 북한에서 지금까지 극찬을 받고 있느냐는 이 부분이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칼바람 눈보라 서리발 날리는 백두산 밀영지’ 홍산골이 거기 무대인데 일제 토벌때 기습을 하고 거기서 육박전이 벌어지고... 다 읽어드릴 수는 없지만 다 이게 시의 내용입니다. 수많은 항일 무장 투쟁 전사들이 그곳에서 죽게됩니다. 그때 용맹한 빨치산인 김대장 즉 공산권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백의민족 흰옷을 입는 무리를 통솔하면서 항일 유격 활동이 시작되게 됩니다. 새로 돋는 별로서 빨치산 김대장이 활약하게 되고 그 활약이 바로 백두산을 근거로 했다 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잠깐 여기 몇 줄 읽어보고 지금부터 제가 왜 북한에서 지금도 이 시를 가장 좋은 시라고 사람들에게 낭송시키는가를 여러분들 알게 될 것입니다. 상당히 표현이 잘 된 구절입니다.

‘절별 사이에 칼바람이 쌓이는 눈이 뚜렷이 그려진 이발자국 어디론지 북으로 북으로 가버린 가엾이 외로운 이발자국 그 누구의 자취인가 어느 뉘인지 북에 왜 갔느뇨 지난밤 힌 두루마기 사람들 설피를 신고 이것으로 꿰어 북으로 갔으니 그 사람들은 몇 백이나 되었느냐 발자국을 남기고간 사람들’

쫓겨가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이들을 구원해주고 있는 사람으로 김대장이 나타나게 됩니다. 백두산의 주인공 그러니까 항일 빨치산의 김대장입니다. 김대장이 나타나면서 철호와 꽃분이의 관계가 들어나고 2,3장이 진행되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여기에서 정리를 합니다. 바로 그 김대장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1947년 조규천으로부터 수령 형상화의 문학형태가 완성되고 시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 후에 북한에서는 모든 작품에서는 수령의 혁명과정을 형상화 하지 않으면 존재치 못하는 그런 시기가 되는 것이고 바로 이 시가 그 틀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오장환이 올라가서 북한의 문학 형식을 완성했다 그렇게 설명드렸고 바로 조규천이 47년에 나타나면서 바로 북한식 문학이라는 것이 시발이 여기에서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북한의 모든 작가들은 모든 백성들은 시인 조귀천의 시를 안 외우고 학교를 다닐 수 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자! 한분은 내려오셨고 한분은 거기 남으셨고 47년도 상황입니다. 그리고 엇그제 구상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월남하셨던 구상 선생님도 돌아가셨고 구상 선생님과과 음향과 음향과 구상선생님의 얘기와 지금 조규천의 얘기를 했습니다. 그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1947년을 기억해주시고 바로 그때 그들을 비판해서 이념적인 잣대를 세운 것이 바로 백인준입니다. 이제 백인준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되게 되신 것입니다. 오늘 조귀천의 얘기는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