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삼천리문학 제2집 | |||
호수 | 제2집 | |||
발행년월일 | 1938-04-01 | |||
기사제목 | 春園文章選 | |||
필자 | ||||
기사형태 | 문예기타 | |||
春園의 여러 대표작 가운데 기리 千秋에 호를 가장 빗나는 구절구절을 모아 역거서 이 文章選을 만들엇다. 게속하여 半島諸作家의 作品을 한 분 한 분씩 역거서 追號 긔재코저 하노라. 소설 「無情」의 一節 소설 「麻衣太子」의 一節 소설 「端宗哀史」의 一節 소설 「有情」의 一節 소설 「愛慾의 彼岸」의 一節 소설 「異次頓의 死」의 一節 詩歌 「님」외 4편 紀行 「白馬江上에서」 評論 「文學槪論」의 一節 「三千里文學部」 編 春園著作年譜 大正4년 「어린벗 에게」를 발표 大正5년 「無情」을 每申에 연재 大正6년 「開拓者」를 每申에 발표 大正10년 「嘉實」을 발표 大正11년 「許生傳」을 東亞日報에 발표 大正11년 金剛山 遊記 大正12년 「一說香香傳」 東亞日報에 발표 大正13년 「再生」 (東亞日報) 大正14년 「麻衣太子」 (東亞日報) 大正15년 「端宗哀史」 (仝上) 昭和2년 「李舜臣」 (仝上) 昭和4년 「革命家의 안해」 (仝上) 昭和5년 「삼봉이네집」 (仝上) 昭和5년 「사랑에 多角形」 (仝上) 昭和6년 「흙」 昭和9년 「有情」 昭和10년 「그 女子의 一生」 昭和11년 「異次頓의 死」 昭和12년 「愛慾의 彼岸」 昭和12년 그의 自敍傳 외 신문사설, 一事一言, 문예평론, 수필, 시가 등 수백여편〈232-2〉 著者略傳 明治25년 2월 15일생 출생지 평안북도 정주군 오산면 구사리 현주소 경성부 효자정 175 중학 東京明治學院 대학 東京早稻大學 文學部 哲學科 敎員 定州五山學校, 京城儆新學校 등 8년간 신문기자 東亞日報 10년, 朝鮮日報 1년 여행한데 西伯利亞1년, 上海 2년, 北京半年, 東京 11년〈232〉 春園詩抄 님 山넘어 또 山넘어 님을 꼭 뵈옵과저 넘은 山이 百이언만 넘을 山이 千가 萬가 두어라 億이요 兆라도 넘어볼가 하노라. 海雲臺에서 滄波엔 明月이요, 靑山엔 淸風이라 淸風明月이 高樓에 가득차니 紅塵에 막혓던 胸襟이 豁然開를 바다드 조타하고, 靑山도 조타거늘 바다와 靑山이 한 곳에 되단말가 하물며 淸風明月잇스니 仙境인가. 누으면 山月이요, 안즈면 海月이라 가만이 눈감으면 胸中에도 明月있다 五六島 스처가는 배도 明月싯고. 어이갈거나 어이갈거나 이 淸風 이 明月두고 내 어이갈거나 잠이야 아모 때자랴 밤새도록. 泗?城에서 半月城 깊은 밤에 火光이 어인 일고 삼천궁녀가 낙화암에 지단말가〈233〉 水邊에 푸른 楊柳야 넘어 無心 江山은 조타만은 人物이 누구려나 自溫臺 大王浦에 烏鵲이 깃들이니 지금에 의자왕 없음을 못내슬허 泗?城 宮闕터에 보리밀 누렷tm니 當時 繁華를 어대가 차질는가 동문밧 累累한 무덤에 석양차자 가시오. 弓裔王陵 (三防驛에서 藥水浦 들어가는 路傍에 츩렁굴이 더 핀 石築 陵이 있고 그 아페는 민간에서 치성 들이노라고 지어 노흔 조고마한 祠가 있고 陵아페는 늙은 젓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내 어대로 갈거나 필마단긔로 첩첩 산중에 풍우도 잣다, 천하를 건지잔 뜻은 어이코 시내 딸아 해매는 늙은 영웅아. 가신지 천년에 옛 백성들은 집 한 간 지어노코 탱그려 걸고, 구천에 조는 혼은 날마다 불러는 복 달라 아들 달라 하소연하오 왕릉 겨테 우뚝 솟은 젓나무 웬걸 천년이야 살앗스리랴, 서울로 간다는 소 (三防 藥水浦로 매일 早朝면 10여쌍 수십쌍의 소가 지나간다. 흔히 갈모 쓴 사람들이 소를 몰아 天眞峯(일명 奇角峯) 고개 絶壁으로 올라간다) 깍가 세운듯한 삼방ㅅ고개로 누런 소들이 몰리어 오른다, 꾸부러진 두 뿔을 들먹이고 가는 꼬리를 두르면서 간다. 움머움머하고 련헤 고개를〈234〉 뒤로 돌릴 때에 발을 헷집허, 무르풀 꿀엇다가 무거운 몸을 한 걸음 올리곤 또 돌려 움머 갈모 쓰고 채쭉 든 소 장사야 산ㅅ길이 혐하여 운다고 마라, 떼어 두고 온 젓먹이 송아지 눈에 아른거려 우는 줄 알라. 삼방 고개 洗浦 ?拂嶺 길은 꽃 업시 서울에 다핫네, 사람은 이 길로 다시 올 망정 새끼 둔 고산 땅 소는 못오네. 安邊 高山의 넓은 저 벌은 대대로 네 갈던 녯 터로고나, 멍에에 볏겨진 등의 쓰림은 지고 갈 마즈막 갑시로고나〈235〉 無情 (大正5년에 매일 申報지상에 연재하다. 여기에 抄錄한 것은 그 一節) 영채는 그 동안 여러 기생을 보았다. 그러고 그네들 중에 어떠한 사람이 있는가 보았다. 영채가 「형님」하고 정답게 지내던 자도 수십인이오, 「얘 네더냐」하고 동무로 지내던 자도 수십인이오, 영채다려 「형님!」하고 정답게 따르던 자도 몇 사람있었다. 영채가 평양서 기생이 되어 맨 처음 「형님」하고 정 들인 기생은 계월화 라하는 얼굴 곱고 소리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 때에 평양 화류게에 풍류 남자들의 눈은 실로 이 월화 한 사람에게 모혔다. 월화는 단률도 잘 짖고 묵화도 남지지 아니하게 첬다. 그래서 월화는 매우 자존하는 마음이 있어서 여간한 남자는 가까히 하지도 아니하였다. 그럼으로 퇴마즌 남자들에게는 「교만한 년」 「괘씸한 년」이라는 책망도 듣고 그 소위 어미되는 로파에게는 「손님께 공손하라」는 경게도 들었다. 그러나 월화는 자기의 얼굴과 재조를 높이 믿었다. 그래서 제 눈에 낫게 보이는 손님을 대할 때에는 「솔이 솔이하니 무슨 솔이로만 여겼든가, 천인 절벽에 락락장송 내 기로다, 길 아레 초등의 낫이야 걸어볼 줄 있으랴.」하는 솔이가, 지은 시조를 불렀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월화를 「솔이」라고 별명을 지었다. 실로 월화의 리상은 「솔이(松伊)였었다. 영채가 월화를 사랑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영채의 눈에 월화라는 기생은 족히 렬녀전에 들어갈만하다 하였다. 그러고 「솔이」라는 기생이 어떠한 기생인지도 모르면서 월화가 솔솔이를 이상으로 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그 모양으로 솔이를 리상으로 하였다. 영채가 일즉 월화에게 안기며 「형님! 형님! 저와 솔이와 세 사람이 친구가 됩시다.」 한 일이 있었다. 그러고 나도 반다시 월화 형님과 같이 솔이가 되리라 하였다.〈236〉 월화의 얼굴과 재조를 보고 여러 남자가 침을 흘리며 모혀 들었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는 부자도 있고 미남자도 있었다. 그 사람들은 다토아 옷을 잘 입고 금시게와 금반지를 끼고 아모리 하여서라도 월화의 사랑을 얻으려 하였다. 그러나 월화가 머리속에 그리는 남자는 그러한 경박자는 아니었다. 월화는 리태백을 생각하고 고적(高適)과 왕창령 (王昌齡)같은 성당시대 (盛唐時代)의 시인을 생각하고 양창곡(楊昌曲)과 리도령(李道令)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월화의 주위에 모여드는 남자들 중에는 하나도 그러한 사람이 없고 다만 「돈」과 「육욕」이 있는 사람 뿐이었다. 월화는 어느 료리점 같은 데 불려갔다가 밤이 깊어 돌아오는 길에 영채를 찾어와서는 흔히 눈물을 흘리며, 영채야 세상이 웨 이렇게 적막하냐. 평양천지에 사람같은 사람을 볼 수가 없고나 하였다. 영채는 아직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거니와 대체 「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어니 하였다. 영채는 어린 생각에 「나는 리형식이가 있는데」하였다. 월화는 점점 세상을 비감하게 되었다. 그가 영채에게 당시를 가르치다가 흔히 영채를 꼭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영채야, 네나 내나 웨 이러한 조선에 났겠나냐」하였다. 그 때에 영채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러면 어대 났으면 좋겠소?」하였다. 월화는 영채의 어린 것을 불상히 여기는드시 「너는 아직 모르는고나.」하였다. 월화는 한 당시대 강남에 나지 못한 것을 한하였다. 탁문군은 자기 언마는 봉황곡으로 자기를 후리는 사마상여의 없음을 한하였다. 월화의 생각에는 하날이 대동강을 내시매 모란봉을 또 내섰으니 계월화는 대동강이 되려니와 누가 모란봉이 되어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그 그림자를 부벽루앞에 빛이리오 하였다. 월화는 조선 사람의 무지하고 야속함을 원망하였다. 더구나 평양남자에 일개 시인이 없고 일개 문사가 없음을 한하였다. 그가 나이 이십이 되도록 한 번도 자기의 뜻에 맞는 남자를 만나지〈237〉 못하고 슬픈 마음과 세상을 경멸하는 비우슴으로 옛날 시를 읇고 저 도시와 노래를 짖기로 유일의 벗을 삼었었다. 그러고 영채를 사랑하야 친 동생같이 귀애하며 시 읽기와 시 짖기를 가르치고 마음이 슬플 때에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채에게 자기의 회포를 말하였다. 그러할 때마다 영채는 「형님!」하고 월화의 가슴에 안겨 울었다. 일즉 어느 연회에 평양성내 소위 일류 인사들과 일등 명기가 일제히 모였다. 이른 여름 바람 잔잔한 모란봉 및 부벽루가 그 회장이었다. 그 때 월화가 영채에게 「얘 영채야 너는 보나냐.」하고 한 편 구석에 끌고 가서 귀속말을 하였다. 「무엇이오?」하고 영채는 좌석을 돌아보았다. 월화는 영채의 귀에 입을 대이고 「저기 모힌 저 사람들이 평양에 일류명사란다. 그런데 저 소위 일류명사란 것이 모도다 허수아비에게 옷 입혀 놓은 것이란다.」하고 다시 기생들을 가르치며 「저것들은 소리와 몸을 팔아먹고 사는 더러온 게집들이란다.」하였다. 그 때에는 영채가 열다섯살이었다. 그럼으로 전보다 분명하게 월화의 말하는 뜻을 알아들었다. 그러고 「참 그렀소.」하고 조고마한 고개를 깟딱 흔들었다. 이러한 말을 할 때에 어떤 양복입은 신사가 우스며 월화의 곁에 오더니 목에 손을 얹으며, 「얘 월화야 어찌 여기 섯나냐.」하고 끌고 가려한다. 이 신사는 그 때에 한창 월화에게 미첬던 평양 일부 김윤수의 맛아들이니 지금 나이 삼십여세에 여태껏 하여온 일이 기생의 일 밖에 없었다. 월화는 무론 이 사람을 친히 여겼다. 그래서 이 사람앞에 서도 「솔이 솔이 하니」를 불렀다. 이 때에 월화는 넘어 불쾌하야 「웨 이러시오」하고 몸을 뿌리첬다. 뒤에 알아본 즉 이 때에 이 좌석에 월화의 마음을 끄는 어떤 신사가 있었더라. 그는 어떠한 사람이며 그와 월화와의 관게는 장차 어찌될는고 그 연회로서 돌아오는 길에 영채는 월화를 따라 청루벽 밑으로 산보하였다. 그 때에 마참 평양 패성중학이라는 학교의 학생 사오인이 청루벽 바위 우에 서서 유쾌하게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구비지는 대동강이 둥두렷한 모란봉이〈238〉 릉라도를 싸고도니 웃줄울줄 춤을추네 청루벽에 걸어앉어 청춘의 더운 피를 가는 물아 말을 들어! 네게부처 보내고저. 월화가 영채의 소매를 당기며, 「얘 저 노래를 듣나냐.」 「매우 좋습니다.」 월화는 한 숨을 쉬며, 「저 속에 시인이 있기는 있고나.」하고 산연히 눈물을 흘렸다. 영채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다만 청루벽 우에서 노래 부르던 학생들을 보았다. 학생들은 여전히 노래를 부르는데 두루막 자락이 바람에 펄펄 날린다. 영채도 어째 자연히 그 학생들이 정다운 듯 하고 알 수 없는 설음이 가슴에 떠오르는 듯 하야 월화의 억개에 업데어 월화와 함께 울었다. 월화는 영채를 안으며, 「영채야, 저 속에 참 시인이 있나니라.」하고 아까 하던 말을 또 한다.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일다. 그것들은 먹고 입고 게집 희롱하는 것 밖에 아모 것도 없는 것들이니라. 그러나 저 학생들 속에 참 시인이 있나니라.」 이 때에 학생이 또 다른 노래를 부른다. 새벽 빛이 솟는다 땅우에 만물이 해가 오른다, 기뻐 춤을 추노나 천하 사람 꿈꿀 제 하날을 우러러 나만 일어나 슬픈노래 부르네 월화는 못견듸어 하는 듯이 발을 동동 굴렀다. 영채다려, 「얘 저기 올라가 보자.」 그러나 이 말이 끝나기 전에 학생들은 모자를 버서 두루고 저 편 고개로 넘어가고 말았다. 월화는 길가 돌 우에 펄석 주저 앉어서 아까 학생들이 부르던 노래를 십여차나 불러보았다. 영채도 자연히 그 노래가 마음에 드는 듯하야 월화와 함께 십여차나 불렀다. 그러고 월화는 한참이나 지금 학생들 섯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학생들은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로부터 월화는 더욱 우는 날이 많게 되었다. 영채는 월화와 함께 울고 틈이 있는대로는 월화와 같이 있었다. 영채는 더욱더욱 월화에게 정이 들고 월화도 더욱더욱 영채를 사랑하였다. 열 다섯 살이나 된 영채는 차차 월화의 뜻을 알게〈239〉 되었다. 뜻 알게 될사록 월화의 눈물에 동정하게 되었다. 영채도 점점 미인이라는 일홈과 노래 잘하고 단률 잘 짖는다는 일홈이 나서 영채라는 오늘 아츰에 핀 꽃을 제가 꺽그리라 하는 사람이 많게 되었다. 그리하야 일즉 월화가 부벽루에서 하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부벽루 연회이래로 월화의 변하고 괴로워하는 모양을 보매 어린 영채도 월화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을 짐작하였다. 영채도 이제는 남자가 그리운 생각이 나게 되였다. 못보던 남자를 대할 때에는 얼굴도 훅군훅군하고 밤에 혼자 자리에 누어 잘 때에는 품어줄 누구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나게 되었다. 한 번은 영채와 월화가 연회에서 느께 돌아와 한 자리에서 잘 때에 영채가 자면서 월화를 꼭 껴안으며 월화의 입을 마초는 것을 보고 월화는 혼자 우스며 「아아 너도 깨었고나-네 앞에 설음과 고생이 있겠고나」하고 영채를 깨와, 「영채야, 네가 지금 나를 꼭 껴안고 입을 마초드고나.」하였다. 영채는 부끄러운 듯이 낯을 월화의 가슬에 비비고 월화의 하얀 젓꼭지를 물며 「형님이니 그렇지」하였다. 이만큼 영채도 철이 났음으로 월화의 눈물에는 반다시 무슨 뜻이 있으리라 하였다. 그러고 물어볼까 하면서도 자연히 제가 부끄러워 물어보지 못하고, 다만 영채 혼자 생각에 아마 월화가 그 때 청루벽에서 노래 부르던 학생을 생각하는 게로다 하였다. 영채의 눈에도 그 청루벽에서 노래 부르던 학생의 모양이 이치지를 아니한다. 무론 길에서 청루벽을 바라보면 그 우에 선 사람의 얼굴의 륜곽이 보일뿐에 눈과 코도 잘 분변치는 못하겠으나 다만 거륵한 듯한 모양과 깨끗한 목소리와 뜻있고 아름다운 노래가 두 여자의 가슴을 서늘어케 한 것이라. 그 청년들은 아마 무심하게 그 노래를 불렀으련마는 아직 「진실한 사람」, 「정성있는 사람」, 「희망있는사람」,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보지 못하던 그네에게는 그 학생들의 모양과 노래가 지극히 분명하게 청신하게 인상이 바킨 것이라. 영채는 가만히 그 노래 부르던 학생들과 지금껏 같이 놀던 소위 신사들을 비교할 때에 아모리 하여도 그 학생이 정이 든다 하였다. 영채는 근래에 더욱 가슴속이 서늘하고 몸이〈240〉 간질간질하고 자연히 마음이 적막함을 깨닫는다. 월화가 물끄럼이 자기의 얼굴을 볼 때에는 혹 자기의 속을 꿰뚤너보지 아니하는가 하야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월화도 영채의 마음이 점점 익어옴을 깨달었다. 그러고 자기의 과거를 생각하매 영채의 장래에 설음이 많을 것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월화는 영채가 잘못하야 세상에 석기기를 두려워하는 모양으로 항상 「영채야 지금 세상에는 우리의 몸을 의탁할만한 사람이 없나니라.」하고 옛날 시로 일생의 벗을 삼기를 권하였다. 영채는 월화의 눈물에 뜻을 알려하였다. 그러다가 마참내 알 기회가 이르렀다. 하로 저녁에는 월화가 영채를 찾어와서 연설구경을 가자고 한다. 그 때에 평양에는 대성학교라는 새로운 학교가 일어나 사방으로서 수백명 청년이 모여들고 대성학교장 함상모는 그 수백여명 청년의 진정으로 앙모하는 선각자이였다. 함교장은 매주일에 일차식 대성학교내에 연설회를 열고 아모나 와서 방청하기를 청하였다. 평양사람들이 혹은 새로히 말을 들으리라는 정성으로 혹은 다만 구경이나 하리라는 호기심으로 저녁후면 대성학교 대강당이 터지도록 모여 들었다. 함교장은 열성이 있고 웅변이 있었다. 그가 슬픈 말을 하게되면 청중은 모다 눈물을 흘리고 그가 기쁜 말을 하게되면 청중은 모다 손벽을 치고 쾌하다 부르짖으며 그가 만일 무슨 악한 일을 꾸짖게 되면 청중은 눈꼬리가 찢어지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의 말하는 제목은 조선 사람도 남과 같이 옛날 껍더기를 버서바리고 새로온 문명을 실어들여야 할 일과 지금 조선 사람은 게으르고 기럭이 없나니 새롭고 잘사는 민족이 되랴거든 불가불 새 정신을 가지고 새 용기를 내어야 한다는 것과 이렇게 하랴면 교육이 읏듬이니 아달이나 딸이나 반다시 새로온 교육을 바다야 한다 합니다. 영채도 함교장이란 말도 듣고 함교장이 연설을 잘한다는 말도 들었음으로 월화를 따라 대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아못쪼록 검소한 의복을 입었으나 얼굴과 태도를 속일 수가 없으며 또 량인이 다 지금 평양에 이름난 기생이라 모이는 사람들 중에 손가락질하고 속은속은 하는 것이 보인다.〈241〉 월화와 영채는 회중을 헤치고 들어가 저편 구석에 가지런히 앉었다. 어떤 사람은 일부러 등을 밀치기도 하고 발을 밟기도 하고 혹 제 손으로 두 사람의 손을 스치기도 하고 혹 어떤 사람은 월화의 겨드랑에 손을 넣는 자도 있다. 월화는 「너희는 기생이란 것만 알고 사람이란 것은 모르는구나.」하고 영채를 안는 듯이 압세우고 들어간 것이라. 부인게에는 연설을 들을 자도 없고 들으려하는 자도 없으매 별로 부인석이란 것이 있지 아니함으로 남자들 앉은 걸상 한 편 옆에 앉었다. 함교장이 이윽고 부인이 있음을 보더니 어떤 학생을 불러 무슨 말을 한다. 그 학생이 의자 둘을 가저다가 맨 압줄 왼편 끝에 놓더니 두사람곁에 와서 은근히 경례를 하면서, 「저편으로 와 앉으십시오.」하고 두 사람을 인도한다. 두 사람은 기생된 뒤에 첫 번 사람다운 대접을 받는다 하였다. 이윽고 학생들이 들어와 앉는다. 월화는 저 학생들이 자기를 보는가하고 가만히 학생들의 동정을 보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모다 정면한대로 깟딱도 아니하고 앉었다. 영채를 보고 가만히, 「얘, 저 학생들은 우리가 보던 사람과는 딴 세상 사람이지?」 하였다. 과연 함교장은 청년을 잘 교육하였다. 설혹 개성을 무시하고 만인을 한 모형에 집어넣으랴는 구식 교육가의 때를 아조 다 벗지는 못하였으나 그래도 당시 조선서는 유일한 가장 진보하고 열성있는 교육가였다. 과연 평양성내에 월화를 보고 눈에 음란한 우슴을 아니띄우는 자는 대성학교 학생밖에 없을 것이다. 학생들도 만일 월화를 본다 하면 「어엿부다.」하는 생각이 날는지도 모르고 「한 번 더 보자.」하는 생각이 날는지도 모르거니와, 그네는 결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저것을 하로밤 다리고 잤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은 두지 아니한다. 또 설혹 그네가 「저것을 내것을 삼었으면」하는 생각이 난다 하더라도 결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무릎에 앉치고 희롱하랴 함이 아니오. 「나의 안해를 삼아 사랑하고 공경하리라.」함이라. 다른 사람들은 월화를 다만 한 작란감으로 알되 그네는 비록 기생을 천히 여긴다 하더라도 그 역시 내 동포여니 내 누이여니 하는 생각은 있다. 이윽고 함교장에 연단에 올라선다. 만장에 박수가〈242〉 일어나고 월화도 두어번 박수했다. 영채는 옳지 부벽루에서 말하던 이로구나 하였다. 함교장은 위엄있는 태도로 이윽히 회중을 나려다 보더니, 「여러분」하고 입을 열어, 「여러분의 조상은 결코 여러분과 같이 마음이 썩어지지 아니하였고 여러분과 같이 게으르고 기운없지 아니하였소. 평양성을 쌓은 우리 조상의 기상은 웅대하였고 을밀대와 부벽루를 지은 우리 조상의 뜻은 컷소이다.」 하고 감개무량한 듯이 한참 고개를 숙이더니 「여러분! 저 대동강에 물은 날로 흘러가니 평양성을 쌓고 을밀대를 짖든 우리 조상의 그림자를 빛외었던 물은 지금 어대 간 곳을 알지 못하되 오직 뚜렷한 모란봉은 만고에 한 모양으로 우리 조상의 발자국을 지니고 섰소이다. 아아 여러분! 여러분의 웅장한 조상에게 받은 정신을 흘러가는 대동강에 부첬는가, 만고에 웃둑소슨 모란봉에 부첬는가.」하고 흐르는 눈물로써 말을 잠간 그치니 만장이 숙연히 고개를 숙인다. 함교장은 여러 가지로 조선사람의 타락한 것을 개탄한 뒤에 일단 더 소리를 높여 「여러분! 여러분은 이 문허저가는 평양성과 을밀대를 다 헐어내여 흘러가는 대동강수에 부처 보내고 우리의 새로온 정신과 새로온 기운으로 새로온 평양성과 새로온 을밀대를 싸흡시다.」하고 유연히 단을 나리니 만장이 박수 갈채성에 한참이나 흔들리는 듯하다. 월화는 영채의 손을 꼭 쥐고 몸을 바르르 떤다. 영채는 놀래여 월화를 보니 무릎우 치마자락에 굵은 눈물이 뚝뚝 떠러진다. 영채도 함교장의 풍채를 보고 연설을 들으매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각이 나서 울면서 월화를 따라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월화의 눈물은 영채의 눈물과는 달랐다. 월화의 눈물은 어떠한 눈물이런고 집에 돌아와 월화는 펄석 주저앉으며 영채다려, 「영채야, 나는 내가 구하던 사람을 찾었다. 나는 부벽루에서 함교장의 풍채를 보고 말을 들으매 자연히 정신이 황홀하여짐을 깨달았다. 그러고 오날저녁 그의 풍채와 말을 또 들으니 내 마음은 왼통 그이게로 가고 말었다. 조선천지에서〈243〉 내가 찾던 사람을 이제야 만났고나」하고 빙긋이 웃는다. 영채는 그제야 월화의 눈물 뜻을 깨달었다. 자기는 함교장을 아버지 같이 생각하였는대 월화는 자기의 정든 님 같이 생각하는구나 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월화의 얼굴을 보았다. 월화의 눈섭에는 맑은 눈물이 매첬다. 월화는 다시 「영채야, 너는 그 때에 부벽루에서 부르던 노래뜻을 아나냐. 천하사람 꿈꿀 제 하날을 울얼어 나만 일어나 슬픈노래 부르네 이 노래뜻을 아느냐.」 영채는 아는듯도 하면서도 말할 수는 없어 잠잫코 앉었다. 월화는 영채를 이윽히 보더니, 「왼 조선 사람이 다 자고 꿈을 꾸는대 함교장 혼자 깨어 일어났고나 우리를 찾어오는 소위 일류 신사님네는 다 자는 사람들인데 그 속에 깨여 일어난 것은 함교장뿐이로구나.」 영채는 과연 그럴듯하다 하고 「그러면 웨 하날을 울러어 슬픈 노래를 부르나요?」 「깨여 일어나 본즉 천하 사람은 아직도 꿈을 꾸었지 암만 깨여라 하여도 깰줄은 모르고 잠꼬대만 하니 웨 외롭고 슬프지를 아니하겠니. 그러니까 하날을 울얼어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이지」하고 영채의 손을 잡아 끌어다가 자기의 무릎우에 업데게 하고, 「그런데 나도 역시 하날을 울얼어 노래를 부른다.」 영채는 얼마큼 알아들으면서도, 「웨? 웨 슬픈 노래를 불러?」 「평양성내 오륙십명 기생중에 나 밖에 깬 사람이 누구냐. 모도 다 사람이 무엇인지 하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중에 나밖에 깬 사람이 누구냐. 나는 외롭고나 슬프고나 내 정회를 들어줄 사람이라고는 너 하나밖에 없고나」하고 영채의 등에 이마를 비비며 영채의 허리를 끊어저라 하고 쓸어 앉는다. 영채는 이제는 월화의 하는 말을 다 알아듯는다. 월화는 다시 말을 이어, 「나는 지금 스므살이다. 나는 이십년 동안 찾던 친구를 이제는 찾저 만났다. 그러나 만나고 본즉 그는 잠시 만날 친구요 오래 이야기하지〈244〉 못할 친군줄을 알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만 갈란다.」하고 영채를 이르켜 앉치며 더욱 다정한 말소리로, 「얘, 너와 나와 삼년동안 동기같이 지내었고나 이것도 무슨 큰 연분이로다. 안주땅에 난 너와 평양땅에 난 나와 이렇게 만나여 이렇게 정답게 지낼 줄을 사람이야 누가 뜻하겠니, 이후도 나를 잇지말고 「형님」이라고 불러다고」하면서 그만 울며 쓸어진다. 영채는 월화의 말이 이상하게 들려 몸에 왓삭 솔음이 끼치면서, 「형님! 웨 오날저녁에는 그런 말삼을 하서요?」 하였다. 월화는 일어나 눈물을 뿌리고 망연히 앉었다가, 너는 부대 세상 사람에게 속지말고 일생을 너 혼자 살아라. 넷날 사람으로 벗을 삼아라! 만일 네 마음에 둀œ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거든」말이다. 이런 말을 하고 그 날도 둘이 한 자리에서 잤다. 둘은 얼굴을 마조대고 서로 꼭 안었다. 그러나 나 어린 영채는 어느덧 잠이 들었다. 월화는 숨소리 편안하게 잠이 든 영채의 얼굴을 이윽히 보고 있다가 힘껏 영채의 입술을 빨었다. 영채는 잠이 깨지 아니한 채로 고은 팔로 월화의 목을 꼭 쓸어 안었다. 월화의 몸은 벌벌 떨린다. 월화는 가만히 일어나 장문을 열고 설합에서 자기의 옥지환을 내어 자는 영채의 손에 끼우고 또 영채를 꼭 껴안었다. 짤은 여름 밤이 새었다. 영채는 어렴푸시 잠을 깨어 팔로 월화를 안으려 하였다. 그러나 월화가 누었던 자리는 부엿다. 영채는 깜짝놀라 일어나서 「형님! 형님!」하고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영구히 없었다. 영채는 자기 손에 끼인 옥가락지를 보고 울었다. 그날 저녁때에 대동강에서 낙시질하던 배가 시체 하나를 얻었다. 그것은 월화이다. 월화는 유언도 없었으매 아모도 그가 죽은 리유를 아는 자가 없고 오직 옥가락지를 낀 영채가 홀로 월화의 뜻을 알고 뜨거운 눈물을 흘릴 뿐 그 소위 에미는 「안된 년」하고 돈벌이할 미천이 없어진 것을 원망하고 평양 일부 김윤수의 아달은 「미친년!」하고 자기의 희롱거리 없어짐을 한탄하더라. 그의 시체는 굵다란 뵈에 묵거 물지게군 이삼인이 두루 처메여다가 북문박 북망산에 묻었다. 묻은 날 저녁때에〈245〉 옥가락지 낀 손이 꽃 한 줌과 눈물 한 줌을 그 무덤우에 뿌렸다. 비도 쓀?니세웠으니 지금이야 어느 것이 일대 명기 게월화의 무덤인줄을 알리오. 함교장은 이런 줄이나 알었는지 말었는지. 게월화는 과연 「형님」이었다. 벗이었다. 월화는 참 영채를 사랑하였다. 영채는 월화에게 큰 감화를 받었었다. 영채가 형식을 일생의 짝으로 알고 칠년동안 구든 절개를 지켜 온 것도 월화의 힘이 반이나 되었다. 영채도 생각하기를 리형식을 찾다가 못찾으면 월화의 뒤를 따라 대동강에 몸을 던지리라 하였었다 하다가 우연히 리형식의 거처를 알고 이제는 내 소원을 일웠고나 하였다. 그러나 만일 형식이가 이미 혼인을 하였으면 어찌할까. 혼인을 아니했더라도 내 몸이 기생인 줄을 알고 나를 돌아보지 않으면 어찌할까 하였다. 형식의 거처를 안지가 한 달이 넘도록 형식을 찾지 아니하고 어제 형식을 찾어가서 자기의 신세를 이야기하다가 중도에 끊코 돌아옴도 이를 위함이러라. 형식의 집에서 돌아온 영채는 어떻게 되었는가.〈246〉 端宗哀史 (大正15년에 東亞日報 지상에 발표 여기에 초록한 것은 死六臣의 장면) 여름날 기나긴 해도 인왕산에 거의 올라앉고 대궐 추녀 끝에서는 저녁 까치가 짖는다. 구경하든 여러 신하들도 목아지와 팔다리 힘줄이 돌과 같이 굳어진 듯 하엿다. 성삼문은 형장으로 가는 길로 무사들에게 끌리어 나서고 박팽년, 유웅부, 리개, 하위지의 차례로 끌려 나선다. 삼문은 옛 친구들을 돌아보며 「자네들은 현주(賢主)를 도아 나라를 태평케 하소. 삼문은 지하에 돌아가 옛 임군께 뵈오려네. 자 가자.」 하고 대궐을 나섯다. 영추문(迎秋門) 협문 밖에는 죄수를 실을 수레가 놓이고 죄수의 가족들이 죽기 전 한 번 마지막 보량으로 모이어 섯다. 조그마한 판장문이 열리고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성삼문이 먼저 사람들의 눈 앞에 나서서 그의 눈이 지는 볕에 번쩍할 때에 가족이나 아니나 보는 사람들이 다 소리를 놓아 울엇다. 리개와 하위지 두 사람은 제 발로 거러나오나 성삼문, 유응부, 박팽년, 성승, 박정등은 모도 몸을 마음대로 놀리지 못하여 군사들에게 붓들려 나온다. 삼문은 수레에 오르며 소리 높이 시 한 수를 읊는다- 『擊鼓催人命 回頭日欲斜, 黃泉無一店 今夜宿誰家」 번역하면 이러하다- 「북을 처서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데, 머리를 돌리니 날이 저물엇고나 황천에 주막이 없으니 오늘 밤을 뉘 집에서 잘고?」 다 읊고나니 삼문은 소리와 눈물이 한꺼번에 나리고 보고 듣는 자도 느껴 울지 안는 자가 없다.〈247〉 죽을 사람들의 수레는 삐걱 소리를 내며 륙조 앞 넓은 길로 나서서 천천이 나간다. 수레에 「역적 성삼문」이라 이 모양으로 먹으로 대자로 쓴 긔를 걸고 또 등에도 죄목과 성명을 써 붙이였다. 길 좌우에는 장안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고 모이어 섯다. 「충신들이 죽는고나.」 하는 한탄겨운 속사김이 사람들 사이로 바람과 같이 돌아가고 그 피투성이 된 참혹한 모양이 바로 앞에 지나갈 때에는 다들 입술을 물고 고개를 돌린다. 삼문의 다섯 살 된 딸이 아버지의 수레 뒤를 따라가며 「아버지, 아버지! 나도 가. 나도 가요!」 하고 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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