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시인 천상병 - rlarbxo

이강기 2015. 10. 1. 21:49

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 - 시인 천상병

 

동가식서가숙가난을 사랑한 '낭인'

마산중 5학년때 등단서정시 분야 큰획

지인 집 떠돌며 막걸리값 '수금' 일삼기도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 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내가/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강물' 전문)

 

천상병은 자신의 직업을 버젓이 '가난'이라고 시로 쓴 사람이다. 그는 가난에 대한 수치심은 버린 지 오래 되었다. 1930년 태생지는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 중학교 2년까지 다니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 마산중 5학년 때 담임교사인 김춘수 시인의 영향으로 시인으로 등극했다.

 

'문예'지에 '강물'이란 시가 유치환의 추천으로 발표되었고 52'갈매기'가 모윤숙에 의해 추천 완료되었다. 특히 '강물'은 서정시의 한 전형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 뒤 서울상대에 들어가서는 '나는 거부하고 반항 할 것이다'란 평론으로 추천을 받았다. 불과 몇 년 사이 이른바 2관왕이 된 셈이다. 그 우쭐함이 지나쳤든지 생래적 비위가 좋아서인지 선배 여류문인들에게 손을 내밀기 시작한 것이 병이 되었다. 큰 돈도 아니고 1000, 2000원 달라면 안 줄 턱이 없었다. 전반적으로 궁핍해도 인간의 정이 살아 있는 게 문단이다. 평생 그 짓을 하려는 예감에서인지 처음부터 큰 돈 달라고 떼를 썼으면 다들 슬슬 피했을지 모른다.

 

그가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중퇴한 것은 스스로의 천재성에 탐닉하여 글쟁이로 능히 살 수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인것 같다. 당시 동급생보다 학업 성적도 좋았고 이미 졸업만 하면 취업이 예약된 거나 마찬가지였을 때다. 학장이 그런 언질까지 귀띔해줬는데도 흘려버렸다.

 

그에게 누가 물으면 대학 중퇴의 변은 언제나 '별로 배울게 없어서'. 천상병의 동가식서가숙의 낭인 생활은 이미 이때 기약된 숙명이었다.

 

그 무렵은 원고료 주는 곳도 있고 주지 않는 곳이 더 많은 시절이었다. 시로써 밥 먹어 온 예는 그제나 이제나 없는 일이다. 상병은 친구 집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울린다는 것이 과대망상 끼에다 선배 골탕 먹이는 것을 업 삼아하고 다니는 김관식을 비롯한 낭인 박봉우 이현우 등이었다. 술추렴으로 지새우는 게 일과가 되어 버렸다. 이 무렵 대학 졸업반이었던 필자도 그와 처음으로 어울려 다녔다.

 

상병이 어느 날 자신을 평론가로 추천해준 조연현을 친구들과 찾아가 환담하는 도중에 입에 못 담을 욕을 끌어 붓는 사건이 생겼다. 이 사태 이후로 그는 문단 선배들로부터 눈 밖으로 나버린 것이다. 50년대는 문단 인구도 단출하고 일시에 소문이 퍼지던 시절이었다. 이른바 천상병의 기인 행세는 점차 도를 더하여 품목이 늘어 갔다. 친구 집에 기식하던 때다. 집에 돌아와보니 자기 딸아이가 상병의 술잔에 소주를 따르고 있지 않는가.

 

"아무렴 딸아이한테 술까지 따르게 해"했더니 "아무리 기식하는 주제지만 여자 없이 술 못 먹어"했다니 그의 재치의 순발력도 알아 줄 만하다. 그 날로 기식하던 친구 집을 나와야 했다. 그를 가엾게 여긴 여류작가 한무숙이 자신의 집에 기거를 시켰는데 밤늦게 들어 온 그가 자다가 갈증이나 더듬다가 작은 양주병을 통째로 삼켰다. 알고 보니 한 여사가 쓰는 샤넬 파이브의 향수병이었다. 다음 날 측간에서도 향수 내가 진동했다는 그의 익살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낭인 생활에선 한자리에 지그시 머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가 일단 서울에서 특히 명동의 목로나 음악실에서 사라졌다 하면 틀림없이 부산행이었다. 마지막 보루랄까 부산의 고관에 있는 백씨인 주병 댁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병 씨는 특급 열차의 기관사였다. 상병은 그 조카를 무척 사랑했다. 조카자랑을 많이 하고 다닌 것이 지금 생각하면 그의 고독한 생활의 한 반증으로 여겨진다.

 

용돈을 수금할 곳은 서울 보다 많지 않지만 그 가운데 국제신문의 비중이 적지 않았다. 우선 시인 친구로 최계락과 필자가 있기 때문이다. 한번 수금하러 들르면 최계락부터 시작해서 부장석을 한바퀴 돈다. 이미 사내에서는 아무개 부장의 친구라는 걸 다 아니까. 순순히 내 놓는다. 요즘 돈 1000원이 정액이다. 막걸리 한잔 값이다. 잔돈이 없다 하면 큰 돈을 받고 거슬러 주기도 했다. 한꺼번에 많이 받으면 장래성이 없다는 계산이 깔려 있어 그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그가 국제신문사를 출입하는 목적은 이것 말고 2차적인 것이 있다. 일본 신문을 보기 위해서다. 일본 야구광이어서 그 쪽 야구소식을 알려면 아사히나 요미우리 신문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먼지 묻은 신문을 뒤지고 있는 그를 보고 있으면 세상에 저리도 할 일이 없는가 싶었다.

 

 

죽는날까지 가난했던 '자유인'

부산시장 비서 시절 술취해 잦은 통금 위반결국 면직

동백림 사건 연루 고문정신병원 입원중 유고시집 발간

 

1952년 시 '갈매기''문예'지 추천이 완료됐다. 1954년에 한 학기를 남긴 채 대학을 수료한 시인은 살아가기가 막막했다. 외국물 번역도 하고 더러 문학지에 월평도 썼으나 그것은 끼니를 해결하는 정상적인 방편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애써 일자리를 찾아 나설 위인도 못되었다.

 

서울과 백씨가 있는 부산을 오락가락하면서 소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산 오면 자갈치에서 송도까지 왕래하는 도선을 타고 막걸리 한잔에 갈매기를 벗삼아 하루 종일 배에서 내리지 않은 적도 있었다. 배를 내리고 다시 타지 않는 이상 뱃 삯은 한번만 주면 되기 때문이다.

 

보다 못해 국제신문의 최계락 문화부장이 김현옥 부산시장의 공보책임 비서로 옮겨간 옥일성을 설득시켜 김 시장의 공보비서로 밀어 넣었다. 시장이 필요로 하는 각종 행사 때의 축사, 인사말 등을 대필하는 직책이다. 그의 생애에 처음으로 출근하는 업이 생긴 것이다. 그나마도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 같다. 처음부터 어딘가에 얽매이는 게 질색인 데다 상식으로 사는 일에 익숙해있지 않은 탓이다. 당시는 통금시간이 있던 때라 술만 취하면 통금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부산시장 비서라는 직함을 써먹었다. 그러한 사례가 잦다 보니 시장 측근에선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초췌한 행색으로 봐 일선 파출소의 경찰관들이 그를 시장의 비서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자주 있다 보니 그 자리도 오래 유지될 수 없었다. 천상병이 다시 완전 실업자가 되자 부산의 창선동 골목에 있던 할매 빈대떡 집에 무시로 드나들었다. 80가까운 할머니가 살짝 얽은 얼굴로 시인 패거리들을 맞아주었다.

 

시인으로 최계락 한찬식 박재호 강상구 서림환 필자 등, 화가로는 김종식 이석우 등의 발걸음이 잦았다. 천상병은 초면 구면 가리지 않고 어떤 사람들 속에서도 생래의 순덕이처럼 잇 몸을 드러내놓고 넘어갈 듯 깔깔댄다. 자신이 유머도 잘 구사하지만 남이 근사한 익살을 부리면 맞장구를 치며 그렇게 좋아 할 수가 없었다.

 

1967년 그가 느닷없이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의 대학동기 친구가 간첩혐의로 구속되었다. 이 친구로부터 평소 용돈을 얻어 쓴 것이 '간첩의 정을 알고 협박하고 갈취했다'는 죄목이다. 게다가 불고지죄까지 얹었다. 사실 이 사건은 천상병을 몰아넣은 것부터가 날조 조작되었음을 천하에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절친한 친구를 간첩으로 신고하겠다고 협박하여 1주일에 1, 2회씩 술값 100원 내지 500원을 갈취했다니 세상이 웃을 일이 아닌가. 천상병에게 주기적으로 용돈을 주는 사람들이 100명도 넘을 것인데 분명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1960년대 후반 대한민국 법정은 세상이 다 아는 막걸리 값 얻어 쓴 것을 그런 어마어마한 죄목으로 둔갑시키는 게 예사였다.

 

천상병은 정보부에서 너무나 소름끼치는 고문을 당했다. 세 번의 전기 고문에 몇 번씩 까무러쳤다.

 

그는 1년 징역에 3년 집행유예로 풀려나면서 고문을 한 놈을 찾아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나를 이겼으니 이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고문의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져 남부시립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었다. 1971년에 다시 쓰러져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밖의 친구들이 그의 행방불명 기간이 길어지자 죽은 줄 알고 시인 성춘복 등이 유고시집 ''를 출간했다. 이 시집 출간이 기사화됨으로써 그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실이 밝혀져 화젯 거리가 되었다.

 

1972년 옛날과 달리 정신도 몸도 많이 부실해진 천상병은 친구의 누이동생 목순옥을 만나 결혼에 이른다.

 

그에겐 진정 천사 같은 아내였다. 거의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줄 알면서 결혼하여 낭인의 손발이 되어 주었으니 주위의 감복을 살 만했다. 그가 신혼여행으로 부산을 내려와 맨 먼저 필자를 찾았다. 아마 형님댁에 가는 길에 들른 것 같았다. 1988년 의사로부터 간경화라는 진단을 받고 6개월 이상 지탱할 수 없다고 단언했는데 기적적으로 소생되어 1993년까지 살았다.

 

그는 죽어서도 돈 복이 없었던지 그의 장모가 허술한 오막집이다 보니 부의금 800만 원을 숨길 곳이 없어 아궁이에다 감춰 놨다. 이를 모르고 부인이 시신이 추울까봐 연탄을 새로 갈아 넣었다. 부의금 어디 뒀느냐고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아궁이 속에 넣어뒀다고 했다. 급히 연탄을 끄집어냈으나 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간신히 재를 수습하여 한국은행에 사정하여 절반을 현금으로 돌려받았다. 그의 부인은 지금도 서울 인사동에서 천상병의 걸작시 '귀천' 이름을 딴 다방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귀천')

 

[2006/09/03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