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허영]혼돈의 한국사회
동아일보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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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온통 아노미 상태다. 끝없이 불거지는 대학수학능력시험 부정행위는 한심한 교육정책의 자화상이다. 탈북 주민 간첩행위에 무방비한 정부가 국가보안법과 주적 개념의 폐지를 서두른다. 국회는 절충과 타협의 장이 아닌 싸움터가 되고 있다. 국회 앞에 길게 늘어선 천막 농성장은 건전한 시민 참여의 차원을 넘어 법질서에 대한 도전장으로 변하고 있다. 자신의 지역구 사무실에서 전국공무원노동조합 간부를 붙들어 갔다고 단식농성을 벌였던 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의 행태는 치외법권의 특권의식으로 변질된 노동운동가의 의식구조를 느끼게 한다. 노동현장의 불법 파업은 더 이상 불법으로 인식되지도 않는다.
▼수능부정… 불법파업… 軍괴문서…▼
전공노의 불법파업에 대한 정부의 엄벌 다짐은 날이 갈수록 구두선으로 변하고 있다. 정체불명의 투서 한 장 때문에 군 장성들의 명예와 통솔력이 큰 상처를 입고 있다. ‘개혁’의 전도사들은 헌법이 정한 예산안의 법정 처리기한을 지키는 것보다 엉뚱한 목표에 치중하고 있다. 변변한 국보법 개정안 하나 내놓지 못하면서 물리력 저지만을 꾀하는 한나라당은 이미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를 포기한 상태다. 먹고살기 힘든 국민은 이제 정치를 원망할 기력조차 없다.
대한민국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대통령을 잘못 뽑은 탓인가, 아니면 권력의 단맛에 취한 집권세력이 집권 연장을 위해 음흉한 꼼수를 두고 있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일부 국민이 걱정하는 것처럼 정말 나라를 송두리째 사회주의 체제로 바꾸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것인가. 국민은 답답하고 두려울 뿐이다.
헌정 반세기가 넘는 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우리 국민이지만 지금 상황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다. 나아질 희망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참고 인내하겠지만, 내일은 더욱 어두운 그림자만 어른거리니 정말 죽을 지경이다.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그리고 시장경제질서를 공통의 가치로 헌법에 담아 그것을 실현하려는 집념으로 독재정권에 저항도 하고 명예로운 시민혁명도 해 대통령 직선제까지 쟁취해 오늘에까지 왔다. 그런데 새삼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시장경제질서를 심각하게 걱정해야 하는 현실은 우리 선량한 국민에게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 아닌가.
집권자나 야당은 2004년 세밑에 고백성사 하는 기분으로 역사와 후손 앞에 진실로 떳떳할 수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특히 대통령은 취임 초 내세웠던 구호처럼 ‘국민이 대통령’이라는 생각으로 정치를 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위임받은 한시적인 권력의 한계를 무시하고 국민적 합의도 없는 입법과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천착해야 한다. 아무리 야누스의 얼굴로 비유되는 권력이지만, 합법성을 가장한 권력 속에 혹시 내친 김에 끝장을 보겠다는 생각을 숨긴 것은 아닌지. 만일 그렇다면 ‘4대 개혁입법’ 등의 위장전술로 국민을 속이려 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속마음을 털어 놓고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대통령은 이제 결단해야 한다. 국민 분열과 경제 파탄을 가속화하는 지금의 독선적인 일방통행식 정치는 끝내야 한다. 그래서 국민 전체를 위한 새로운 통합의 정치로 탈바꿈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난 2년처럼 소수 지지 세력만의 대통령으로 남겠다면 최소한, 그들을 끌고 가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래야 국민도 새 희망을 갖든지 강하게 저항하든지, 아니면 체념하고 이민이라도 갈 것 아닌가.
▼통합의 리더십 보여줄 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무리 강한 권력이라도 다수 국민을 외면하는 정치를 하면 반드시 불행한 종말을 맞게 된다는 점이다. 인류가 경험한 이 귀중한 교훈을 새삼 되새겨야 하는 국민의 처지가 처량하다. 그러나 어쩌면 오늘의 극단적인 아노미 상태를 시작으로 또 한번의 역사적인 변혁을 거쳐 머지않아 사필귀정의 진리를 체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막연한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는 국민은 그래도 행복한 것인가.
허영 명지대 초빙교수·헌법학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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