政治, 外交

정치의 문명적 갈등과 기원(3) - 유교 문명권의 정치思想

이강기 2015. 11. 1. 13:10

정치의 문명적 갈등과 기원
 

유교 문명권의 정치思想 


김석근 / 연세대 정외과 BK21 교수   


아는 바와 같이, 1990년대 들어서 냉전 질서가 해체되고 ??전쟁??과 ??이념??의 이미지가 옅어지면서, ??문명??과 ??문화??라는 요소가 새로운 담론의 주제로 떠올랐다. 우리 사회 역시 한동안 잊고 지냈던―적어도 사회적인 담론의 영역에서는―??유교??와 ??유교 문명권??에 새삼 주목하게 되었다. 시체말로 하자면, 그렇게 해서 유교는 뜬 것이다. 그리고는, 지금까지도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다.



Ⅰ. 유교 르네상스


일찍이 근대화와 자본주의 발전의 장애물로 간주되었던 유교가, 단순한 복귀 차원이 아니라 ??유교 르네상스??를 구가하게 된 데에는, 필시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통으로서의 유교를 고집스레 지켜온 부분이 없지는 않겠지만, 역시 동아시아 신흥공업국(NICs), 네 마리 작은 용(Four Little Dragons:대만, 홍콩, 싱가포르, 한국)의 경제성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유교 자본주의론??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그 연장선 위에서 21세기는 유교 문명권, 아시아문화권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까지 나오기도 했다.


조금 다른 맥락에서 제기된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문명충돌론??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유교 문명권의 활기찬 경제발전이 약간의 경계심을 심어주었다고나 할까. 더구나 그는 서구 문명에 대한 잠재적 위협자로서 ??유교??와 ??이슬람?? 문명권을 설정하지 않았던가. 어쨌거나 유교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키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하겠다. 그의 예측이 실현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는 다른 차원에 속한다. 그의 충돌론을 비판하면서 공존을 설파하고 있는 하랄트 뮐러Harald Mu?ler의 ??공존론?? 역시 서로 다른 문명권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지난 97년 12월 IMF 사태와 더불어 밀어닥친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는 비난은 유교 자본주의론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하지만 거의 동시에 등장한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 논쟁은 유교의 불씨를 되살려 놓았다. 유교는 아시아적 가치의 대표 주자로 여겨지고 있으니까. 그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런 참에, 최근에는 ??유교 민주주의??론까지 등장하고 있다. 급박하게 움직이는 사회과학자들의 ??유교 재조명?? 행보를 후원이라도 하듯이, 인문학도들―지난 날, 유교는 오로지 그들의 몫이었다―역시 유교의 현재적 가치와 미래적 전망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점들에 대한 치유책 내지 대안으로서의 유교를 말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유교는 현재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있다는 수사학적인 예언까지 듣게 되었다.


Ⅱ. 유교 문명권


그렇다면,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문명권, 다시 말해서 ??유교 문명권??은 존재했는가. 그리고 존재했다면, 어떤 국가들이 거기에 포함되는가. 지금은 또 어떤가, 그리고 그들의 앞날은? 이 글에서는 그런 측면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날 흔히 유교 문명권에 포함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국가들은, 이른바 ??동아시아세계??로 불리는 지역의 국가들과 거의 겹쳐지고 있다. 중국(대만), 홍콩, 한국(북한), 일본, 베트남, 싱가포르 등이 포함되겠지만, 시대를 근대 이전으로 국한시키면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정도가 되겠다.1)


그들 지역에 유교가 문화적 공통 요소로 존재했으며, 또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확실히 그 점은 공통점이라 하겠다. 하지만, 굳이 반론을 펴자면, 유교가 그들 문화의 유일한 공통 분모는 아니었다. 인도에서 전해져온 불교, 노장 사상의 전통을 종교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린 도교,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민간신앙(샤머니즘을 포함한)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유교까지 포함한 그들이 역사적으로 중층적으로 얽혀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다양한 양상을 빚어왔다. 그런 얽힘은, 뒤에서 보듯이, 유교의 역사에도 반영되고 있다.


초점을 ??유교?? 자체에 국한시킨다 하더라도, 그것이 안고 있는 내포와 외연은 무척이나 넓고 깊다. 2천여 년에 걸친, 유교의 역사를 한마디로 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그런 단순화는 일찍부터 이루어져 왔다. 막스 베버Max Weber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기독교의 다양한 분파에 대해서 그토록 섬세하게 구분했던 그는, 유교에 대해서는 그저 뭉뚱그려 다루었다. 그러면서 퓨리터니즘과 유교를 대비시켰다. 비교는 잘못된 그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교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으며, 또 그와 더불어 특성을 달리해왔다. 2500여 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교는 실로 다양한 모습을 연출해왔다(Xinzhong Yao 2000). 공자와 맹자의 원시유학, 신유학Neo-Confucianism으로서의 주자학, 주자학과 더불어 근세유학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양명학, 그리고 청나라 시대에 유행했던 考證學의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공자, 맹자의 원시유학과 주자학 이후의 신유학 사이에는 연속성과 아울러 단절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공자와 맹자는, 당연히 ??불교??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理氣論 역시 후대의 산물이었다.


또한 유학사 전체를 일별해보면, 유교의 사회적 위상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유교는 한대에 이르러 정통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지만, 그 후 사상계의 헤게모니를 불교와 도교에 넘겨주게 되었다. 주자학의 성립은, 그 같은 이단 배척 작업이 성공적으로 진척되어, 유교가 다시 주도적인 담론으로 올라섰음을 알리는 일대 사건이기도 했다. 거칠게 말해서 주자학은 불교와 도교의 장점(특히 우주론과 형이상학)을 받아들임으로써 만들어낸 새로운 사유체계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확실히 ??신유학Neo-Confucianism??인 것이다. 이후 (양명학이 등장했지만) 담론과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주자학의 권위가 계속 이어졌다.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 한, 불교와 도교의 존재는 그대로 용인되었다.


게다가 유교가 포괄하고 있는 (사상의) 내용만 하더라도, 단순하고 일상적인 禮儀作法예의작법에서 고도의 철학성을 지닌 형이상학, 그리고 종교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層次층차와 局面국면을 보여주고 있다. 흔히 간과되곤 하지만, 유교는 ??禮敎性예교성??으로서의 유교와 ??宗敎性종교성??으로서의 유교라는 두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유교에 대한 비판은 거의 대부분 사회윤리, 즉 ??예교성으로서의 유교??를 겨냥한 것이었다. 전체를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일부분에 국한시켜 비판과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리고 유교 문명권에 속하는 국가들 사이에도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중국에서 태어난 유교는 일종의 ??외래사상??으로 각지에 전파되어 갔다. 그리고 그 지역의 토착적인 사유와 ??갈등??하고 ??융합??하면서, 고유한 색채를 지닌 한국 유교, 일본 유교, 베트남 유교를 형성하게 되었다. 유교 문명권의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명제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 결과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의 유교(주자학)는 서로 다른 양상을 보여주게 되었다. ??中?日?韓?越의 유교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孝?忠?純(혹은 正 또는 名)?義라 할 수 있을 것??이다(坪井善明 1992, 143~145).


그 같은 특성은, 유교와 유학자가 갖는 사회성이라는 측면과도 관련되어 있다. 지배층의 존재양태와 관련해서, 일본의 유교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 한국, 베트남과는 달리 일본의 지배계급은, 두 자루 칼을 찬 무사(사무라이)들이었다. 유학적인 지식을 지닌 독서인으로서의 文人과는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일본 유교가 ??忠??이라는 덕목을 강조하게 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게다가 엘리트 충원 양식으로서의 과거제가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학문과 정치 영역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 둘은 별개의 다른 영역으로 존재했다. 학문은 사회적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修己治人수기치인??, ??治者의 학문??으로서의 유학이 제대로 기능할 수 없었던 것이다(김석근 2000). 이렇게 본다면, 유교라는 일정 부분을 공유하면서도, 시대와 국면에 따라서 ??단절성?? 내지 ??특수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 하겠다.


Ⅲ. 유교와 근대화:분화와 다양성



19세기에 전개된 西勢東漸서세동점 현상은 ??유교 문명권??에 충격과 동시에 변화를 가져다주게 되었다. 무력의 절대적인 우위 앞에,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는 위기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에 겪게 된 다양한 경험은, 각 국가별로 유교가 갖는 사회적 위상 자체를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여기서는 1) 근대화, 2) 제국주의, 3) 사회주의라는 세 변수가 유교 문명권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었는가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고자 한다.


1) 근대화


근대 서구 세계와의 만남과 충격은 유교 문명권에 대해서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무력의 우위를 뒷받침해주는 서구 문명 그 자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안겨줌과 동시에, 유교를 비롯한 전통 문화 전반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반성의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자연히 근대 서구 문명은 분명한 기준으로 간주되었고, 나아가 진보와 발전의 모델로 여겨지게 되었다. ??과학??, ??자본주의??, ??민주주의??는 서구 문명의 엣센스로 여겨졌다. 거의 반사적으로,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도록 한 전통 사상, 특히 유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전개되었다. 유교에 대한 비판은 내부에서 터져나왔다. 유교는 ??사람을 잡아먹는(食人)?? 가르침(名敎)으로서 ??타기되어야 할 것?? 그리고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중국의 경험에서 그런 비판의 한 극한을 볼 수 있다.


주된 비판의 준거는 ??근대성Modernity??과 ??자본주의 발전Capitalist Development?? 두 가지라 할 수 있겠다. 유교는 근대화와 자본주의 발전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방해하는 걸림돌쯤으로 여겨졌다. 막스 베버가 제시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사이의 ??선택적 친화력??이 이론적인 뒷받침을 제공해주었다. 유교 내지 유교적인 것들은 가능한 한 빨리 극복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유교를 해체하는 것이 곧 ??근대??를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여겨졌다. 다시 말해서 非유교적이거나 反유학적인 것, 그것은 곧 근대적인 의식에 가까이 가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자본주의 萌芽맹아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열심히 경주되곤 했다(김석근 1999).


그 시점에서는 ??근대화modernization??와 ??서구화westernization??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서구를 따라가는 것, 그것이 곧 근대화라 생각했다. 그 둘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전통과 근대라는 이분법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화 이론??(나아가서는 정치발전론)이 그런 상황을 정당화하고 또 합리화해주는 역할을 했다. 전통과 근대가 서로 모순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근대??라는 시대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그런 시점에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실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일본의 근대화 체험은 위에서 서술한 내용에 들어맞지 않는다. 일본의 근대화가 갖는 특성, 특히 유교와 관련해서 갖는 특수성을 그대로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유교 문명권의 분화와 다양성에 대해서 갖는 의미는 크기 때문이다.


유교 문명권 내에서 일본은 ??위로부터의 혁명Revolution from above??인 明治維新을 통해 근대 민족국가를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亞流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한 유일한 국가였다. 그 과정에서 국내의 급격한 계급, 계층 변화를 수반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서구화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했지만, 얼마 후 전통적인 요소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었고, 그것은 근대 天皇制텐노오세이 형성 과정에 적절하게 반영되었다. 그들은 ??天皇텐노오?? 절대주의를 ??國體코쿠타이??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코쿠타이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國學코쿠가쿠??는 물론이고) 유교까지 동원했다. 외형상으로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근대적인 법치국가를 표방했지만, 인민들 상호간의 관계를 권리와 의무로 규정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유교에 주목하게 되었다. 상하관계와 상호간의 관계를 규율해가는 세속윤리로서는, 역시 유교가 적절했기 때문이다. 1890년 공포된 ??敎育勅語??는 거의 모두가 사서오경에서 따온 구절들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것은 유교적인 덕치주의를 원용한 것이었다. 일본의 경우, 유교가 근대국가를 정비하고 이념적인 기초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특히 대내적인 인간관계 및 사회적 규범의 존재양태를 규율하는 윤리로 작용하게 됨으로써, 다른 국가들과는 다른 측면을 보여주게 되었다(김석근 2000).


2) 제국주의


서구 세계의 동아시아 진출은 당연히 제국주의 침략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 이들은 근대 세계를 단적으로 상징해준다. 그들은 유교에 대해서도 복잡하고 다양한 영향을 안겨주었다. 무엇보다 제국주의 침략은 종래의 유교를 위시한 전통 문화를 ??파괴??하고 그 위에 강제적으로 본국의 문화를 이식, 독특한 식민지 문화를 만들어냈다. 파괴라는 측면에서는, 베트남의 경험이 단연 두드러진다. 그것은 유교를 담는 문자 체계로서의 ??한자?? 문제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베트남 역시 오래 전부터 한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한자를 중국, 한국, 일본과 공유하고 있어, 한자문화권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한자를 읽는 방식, 즉 音은 서로 달랐지만, 그 의미에서는 다를 바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서로 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筆談필담을 통해 얼마든지 의사소통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선교사에 의해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법이 시도된 이래, 식민정부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그것을 장려했다. 1865년부터 그것을 쓰는 신문에는 보조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식민정부는 목적을 달성했으며, 한자는 1918년에 치러진 마지막 과거 시험 후에 완전히 쓰이지 않게 되었다(Leon Vandermeersch/ 福鎌忠恕譯 1987, 146).


그런 변화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다음과 같은 지적은 극히 시사적이다. ??베트남에 있어서 한자의 放棄는 인텔리 계급을 일거에 전통 문화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러나 그 결과는 국가 전체의 선진 국가들 수준에로의 비약의 실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베트남 엘리트 계급에 개개인으로서의 서구 문화에 대한 완전한 동화의 길을 연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엘리트 계급 그 자체를 뿌리뽑힌 풀처럼 만들어버렸다. 프랑스 식민지주의의 시대에 다른 문화의 수용에 있어서 그것만큼 눈부신 개인적 성과, 그 정도의 좋은 실례를 종주국 프랑스에 제공했던 식민지는 없었다. 그러나 그 성과는 국민적 환경으로부터는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던 것이다.??(ibid., 169)


지난 97년 여름, 몇몇 친구들과 베트남에 갔을 때, 모두가 나서서 한자를 찾아보려고 했었다. 결국 두 군데서 한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는 사원, 다른 하나는 장의사. 일부러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무슨 뜻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문자해득률이 거의 90%에 달하는 베트남에서, 현재 한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0.01%가 채 안 된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한자 문제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덧붙여 둔다면, 현재 중국은 簡字體간자체, 대만은 전통 한자체, 한국은 국한문 혼용체(한때 한자철폐운동이 있었다), 북한은 국어전용, 일본은 가나와 한자 혼용이라는 서로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역설적으로, 거기서도 근대화가 가져다 준 분화와 다양성을 읽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제국주의가 유교를 포함한 전통 문화를 오로지 ??파괴??했던 것만은 아니다는 점이다. 강제적인 파괴와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 본국의 이익과 식민 통치를 위해서 일부러 ??왜곡??시켜 ??온존??하게 하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서,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의도적으로 방치해두거나 아니면 적대적인 독립운동 세력으로 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취한 고도의 전략이기도 했다. 관련된 조직이나 여러 단체에 후원금이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포섭하려는 공작을 펼치기도 했다. 그 같은 왜곡된 온존이, 앞에서 말한 강제적 파괴와 서로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유교는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저항과 아이덴티티 구축의 기반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 점을 무시할 수 없다. 강한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유교는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적인 정서, 나아가서는 민족주의 운동과 이어지게 되었다. 민족주의 운동의 이념적인 기반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강제적으로 이식된 식민지 문화에 대항해, 저항 문화를 형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조선 유학자들의 의병 및 항일운동과 베트남의 저항운동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베트남이 초강대국 미국에 대항해서 끝까지 싸울 수 있었던 데에는 유교가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도 있다. 유교에 대해 신랄한 비판이 이루어진 중국에서도, 한 켠에는 전통 문화와 유학의 가치체계를 옹호하는 ??현대신유가New Confucianism??가 있었다. 그들의 존재와 활약이 아이덴티티 구축에 크게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최근 유교 르네상스를 불러일으키는 데도 일정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의 유교는 달랐다.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으로 나아감에 따라, 유학 역시 때로는 적극적으로 때로는 소극적으로 동조 혹은 방조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유교는, 코쿠가쿠와 더불어, 일본이데올로기의 중요한 한 측면을 이루고 있었다. ??일본과 일본 민족의 유구함, 國體코쿠타이, 천황제의 우월성?? 등을 강조하는 이른바 ??國民道德論국민도덕론,theories of national morality??에 협조하기도 하고, ??근대의 超克초극??론에 동원되기도 했다.2) 2차 대전 이후의 점령과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유교는 봉건적인 것, 국가주의에 복무한 불순한 것쯤으로 여겨져 심한 비판을 받았다. 거의 반사적으로, 일본에서의 유교 연구는 실증주의적이고 문헌 고증학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오늘날 유교에서 현재적 의미를 찾으려고 하거나 실천적인 운동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거의 없는 것, 그리고 유교 르네상스와 재조명 움직임에 대해 담담한 것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김석근 2000).


3) 사회주의


유교 문명권에 속하는 국가들이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라는 변수가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난날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중국, 베트남, 북한의 존재를 떠올려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지난날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유교를 ??반동사상??으로 비판해마지 않았다. 유교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유교의 실질적인 창시자 孔子의 계급(출신) 성분을 따졌으며, 그의 철학이 갖는 유심론적인 측면이 도마 위에 올려지기도 했다. 공자 비판은 그 자체 정치적인 이슈이기도 했다. 사회주의가 상대화되고 유교를 비롯한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전까지, 유교는 어디까지나 비판의 대상일 뿐이었다.


허나 공식적으로 드러난 유교와 사회주의 사이의 긴장과 대립과는 달리 내재적으로는 그들 두 요소가 어떤 형태로든 이어지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유교 사회주의??론이 그것이다(溝口雄三 1989). 베트남에서 天命이라는 유교적인 논리를 빌어 자신들의 사회주의 정권을 정당화했다는 것, 동구권 사회주의나 소비에트연방과는 달리 동아시아의 사회주의국가들―특히 중국과 베트남―이 보여준 시장경제로의 유연하고 연속적인 이행을 설명하는 변수의 하나로서 ??유교 문화권의 전통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유교 윤리 특히 계층적인 질서의식의 영향이 강하다??는 것이 지적되었다는 점(坪井善明 1994, 217~8)도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그와 더불어 80년대 후반부터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유교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하고 싶다. 베트남의 경우, 호치민(1890~1969) 탄생 100주년(1990년)을 기념해 개최한 ??호치민 주석 탄생 백주년기념 국제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논문들에는, 호치민과 유교의 관계에 주목한 것이 많았다. 주요한 논지는 ??호치민은 유교의 긍정적 요소를 흡수하고, 그것을 개조하여 마르크스주의 문화체계 속에 통합시켰다는 것??, ??유교는 베트남 봉건제의 정통적 이데올로기였는데, 그 후에 호치민에 의해서 혁명운동에 보다 잘 봉사하기 위해서 새로운 정신과 의미?내용을 부여받게 되었다. ??황제에 대한 충성??이나 ??어버이에 대한 효??라는 유교의 오랜 윤리관은 바야흐로 각각 ??조국에 대한 충성?? ??인민에 대한 효??라는 의미로 바뀌게 되었다?? 등(坪井善明 1990).


대륙 중국에서도 거의 비슷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현대신유가??의 영향을 받은 ??대륙신유가??가 출현,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학술 분위기와 문화적인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종래의 공자 비판에서 벗어나서, 공자가 중국 문화에 어떤 역할을 했으며, 또 어떤 현대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다. ??반동사상??으로서의 유교라는 인식은 이미 상당한 정도로 불식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유교와 사회주의의 결합, 상호보완, 상호소통 등이 주장되고 있지만, 그 둘 사이의 원초적인 긴장과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것 같지는 않다. 바야흐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나 할까.


이 같은 변화의 저변에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의 몰락과 퇴조라는 요인이 깔려 있다. 그와 더불어 유교 문명권 국가들의 급격한 자본주의 성장과 발전, 그리고 서구에서의 유학 연구와 재조명 움직임 등이 얽혀서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Ⅳ. 내일은 있는가



얼마 전, 알고 지내는 한 일본인 학자가 최근에 내놓은 자신의 저서 《<記號>としての儒學》를 보내왔다. 성균관대학교에서 교환교수로 1년간 연구하기도 했던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최근, ??동아시아의 유학??을 테제로 한 국제회의가 빈번하게 열리게 되어 나도 그런 場에서 일본의 유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일본에서는 그렇게 많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중국, 대만, 한국 같은 지역에서는 대학이나 연구소 주최라는 형태로 많이 개최되고 있다. 그런 국제회의가 동아시아 연구자의 교류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반면 회의에 참석하면서 일종의 ??異和感?? 내지 ??고독감??에 휩싸이는 경우도 흔히 있다. 나와 같은 ??일본사상?? 연구자는 극히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유학이 근세 일본 사회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곧 현대 사회에 유효한 처방전을 제공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만, 한국 등의 많은 연구자들은 이른바 ??신유가??에 속하는 사람들의 ??영향??도 있어서, 어떻게 하면 현재 사회에 유학을 살려갈 수 있는가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澤井啓一 2000, 7~8)


읽는 순간, ??역시나!?? 하는 탄성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이른바 공동학술회의나 국제학술대회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수확은, 오히려 그 같은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정작 문제는, 우리 학자들은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것이겠지만…. 그런데 그런 차이는 구체적인 방법과 방법론에서도 거의 그대로 확인되고 있다.


??다루는 방법에도 차이가 있었다. 일본인의 발표는 일정한 대상을 자세하게 다루고 또한 대상 주변의 역사적인 배경과 관련시켜서 ??사상사??를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한국인 사이에서는 대상을 다루는 것은 훨씬 이론적이고 개념적인, 말하자면 ??철학??이 중심이 되고, 또한 대상의 주변의 시간보다 더 스케일이 큰 시간과 공간의 연관성이 문제가 되었다. 일본에서 유교는 단지 지적?역사적 대상이며 학자는 다만 그 연구자에 불과하다. 사상사 연구자로서 그는 단지 유교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상?종교나 문학을 연구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유교는 단순한 지적 대상이 아니라 아직 살아서 숨쉬고 있다. 학자는 거의 아직도 옛날 유학자의 에토스를 지닌 채 유교적 가치를 책임지고 떠맡으려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더 나아가 유교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이나 지식 같은 것이 한국에서는 일본보다 훨씬 더 사회나 학자 속에서 중심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나에게 들었던 것이다.??(黑住眞 1998, 33)


거의 정확한 느낌과 서술이라 할 수 있겠다. 감히 말한다면, 필자는 그 같은 대비가 ??좋고 나쁨??의 문제는 아니라고 믿는다. 조금은 다른 각도와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또 그럴 때 그 의미가 제대로 파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김석근 2000). 그 자체가 이미 사회학적인 연구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유교 문명권??이란 범주는 정말이지 애매하다. 설령 인정한다 하더라도, 오랜 역사에 걸쳐서 다양한 양상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국가별로 서로 다른 모습을 연출해왔다. 게다가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다시 말해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각각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더더욱 분화와 다양성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것은 유교라는 공통분모를 가지면서도 서로 다른 문화적 유산과 역사적 체험이 한 데 어울려서 빚어낸 역사의 산물이자 동시에 그 자체가 이미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그 누구도 지나간 역사를 되돌릴 수 없다.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전쟁??과 ??이념??이 아니라 ??문명??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조심스레 말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순간적인, 과도기적인 현상일런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전지구화globalization 내지 세계화 추세는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어 있고, 슈퍼파워 미국은 그 흐름을 후원(혹은 관리)하고 있다. ??새로운 동아시아 형성??을 장래의 목표로 제시하면서도, 동시에 미일동맹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주장(田中明彦 2000, 144-5)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읽는다. 오랜 역사를 통해 구축된 공통성과 연속성보다는 짧은 기간에 압축적으로 이루어진 분화와 다양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유교 문명권??,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일종의 ??假想가상의 공간??에 속한다. 냉정하게 말해서, 그것은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편의적으로 이름 붙인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런 유교 문명권에 내일은 있는가. 아니, 있을 수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또 무엇일까.

(에머지 2000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