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서양 문명의 비판적 극복을 통한 한국 문명 발전의 원초적 시론
양승태 / 이화여대 정치외교학 교수
문명이란 단순히 ??저기 있는?? 고정된 객체가 아니다. 그것은 문화라고 불리는 주관적 정신활동 총체의 객관적 외양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정신활동 자체를 제약하고 영향을 주면서 스스로가 변화하는 생명체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 문명의 이해는 총체적이고 변증법적 접근을 요구한다. 특히 한 문명의 본원적 성격 및 그것 자체에 내포된 변화의 계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정신사적 원형, 즉 원초적 세계관의 형성과정 및 그것에 함축된 내적 긴장이나 갈등구조를 찾아내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와 같은 세계관의 원형 속에는 神 개념의 형성과 분화?발전과정, 신과 인간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유한한 삶과 무한한 존재인 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노력 속에서 필연적으로 형성되는 시간의식의 표현인 역사관이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기 마련이다.
Ⅰ. 문명과 세계관, 그리고 신(神)?인간?역사의 변증법
비록 거대한 주제에 대한 지극히 간단한 논급이지만, 서양문명의 원천으로서 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에 대한 기초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이 글 역시 그와 같은 세계관적 요소들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이 효율적인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이 글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각 세계관의 원형에 함축된 내적인 긴장관계 및 각 세계관에 있어서 원형과 발전된 형태 사이의 대립과 긴장관계를 설명할 것이며, 일반적으로 이해되듯이 서양문명의 두 원천이 서로 단순히 대립과 긴장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와 같은 관계를 극복하여 근본적으로 종합?통일될 수 있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음을 강조할 것이다. 아울러 정신사적 원천이자 흐름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승화?종합시키느냐의 문제는 현대 서구 문명이 해결해야 할 근본 과제임이 지적될 것이며, 바로 그러한 서구 문명의 피상적 화려함에 압도?도취되어 스스로의 정신사에 담겨 있는 위대한 유산을 ??씩씩하게?? 버리면서 ??새 밀레니엄??이라는 주술적 열병에 걸려 있는 한국인의 정신사적 병리현상에 대해서도 간단하게나마 진단이 이루어 질 것이다.
Ⅱ-1. 헬레니즘 원형으로서의 올림피아 신화:신의 인간화
일반적으로 희랍문화는 서구의 합리적 정신의 모티브로서 또는 서구철학과 과학 및 인간중심적 사고의 원천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와 같은 최고 지성적 문화를 헬레니즘 자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부분과 전체를 혼동하는 것이며 그것의 생성, 발전, 번영 및 쇠퇴과정에 따르는 정신사적 변화의 역동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헬레니즘은 말 그대로 ??헬레네스Helle@nes??로 불렸던 희랍인들의 삶 전체 속에서 변화하고 발전한 역동적인 세계관, 신앙, 가치관 및 삶의 양식과 방법의 총체이며, 희랍의 고급정신 세계 역시 소위 신화적 단계의 헬레니즘이라는 원초적인 정신세계의 승화?발전과정을 통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헬레니즘의 원형으로서의 올림피아 신화의 핵심은 신?인간?자연을 본질적으로 동일한 ??프시케psyche@??―단순히 물체들 사이에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물리력(희랍어로 kratos)과 구분되는 생명력vital power이다―의 표현으로 믿는 데 있다. 이에 따라 그것은 만물에 깃든 프시케의 발전과 완성의 정도에 따라서 자연 전체를 절대적으로 완성된 신으로부터 영웅, 인간, 생물, 무생물에 이르는 위계질서로 파악했던 것이다.1) 이 점은 고대 희랍인들의 다신교적 신앙 역시 다른 모든 고대 민족들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자연세계나 물체를 접할 때 느낄 수 있는 초월적이고 불가항력적인 ??힘??에 대한 외경심에서 출발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만물의 본질로서의 프시케 개념으로부터 소위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의 신앙이 출현하게 된다.2) 호메로스Homeros가 등장하기 이전의 희랍정신사는 자연물을 모방한 종교적 표상들이 계속 출현하면서 자연의 여러 ??힘??들이 神格을 갖게 되는 여러 단계의 변형을 거치는 구체적인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귀결은 결국 일반인들이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고 존엄성을 갖춘 형체로서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의 표상들로 나타났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신의 ??인간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의미 있는 자연현상의 발견,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 새로운 사회관계 혹은 도덕관념의 형성에 따라서 각각 이에 상응하거나 이를 상징하는 신들이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서 생성?출현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희랍판 전국시대??가 끝나고 도시국가체제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B.C. 8세기 경, 이러한 과정의 절정은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Hesiodos 등 위대한 문학가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들은 인격화된 수많은 신들의 상호관계를 정립하고 신들의 질서를 체계화함으로써 마침내 우주탄생의 기원 및 역사에 대한 설명과 세계관의 체제를 갖춘 제도화된 종교로서의 ??올림피아 신화??를 탄생시키게 되었다. 제우스를 정점으로 하여 자연과 인간사회가 통일된 우주질서는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의 ??잘못된?? 시대를 극복하고 모든 자연 및 사회질서가 조화kosmos를 이룬 완벽한 시대로 신화적으로 정당화되었으므로, 그와 같은 신적 질서의 일부로서 인간들은 완벽한 시대의 신이 부과한 자연질서와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이자 스스로를 보존하고 행복을 찾는 길이라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 일생의 화두로 잘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는 본래 이 시기 델포이Delphoi의 아폴로 신전 입구에 새겨져 있던 경구로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분수를 알고 신의 명령에 따르라는 것이었다.3) 이것은 고대archaic 헬레니즘의 세계관을 가장 간결하게 축약시킨 말이었다. 그와 같은 신적 질서, 즉 엘리아드Eliade가 말하는 ??신에 의해 직접 부과되고 신의 의사가 聖顯hierophany된??4) 상황이 곧 헬레니즘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기독교에 의해 대치될 때까지 희랍세계뿐만 아니라 로마세계의―주로 신의 이름들만 변형된 채―세계관, 또는 토속신앙, 국가종교, 이데올로기로서 존속하였다.
Ⅱ-2. 헬레니즘의 정수, 희랍철학:??신화에서 철학으로의 이행??
헬레니즘의 위대성은 그와 같은 ??원형??의 상태에만 머무르지 않은 데 있다. 상업의 발달에 따른 생산양식의 변화, 다른 문화, 이질적인 사회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새로운 지식?정보나 이질적인 가치관의 유입 등의 원인에 의해 기존 고대사회의 안정성이 동요하게 되었을 때, 희랍의 지식인들은 그와 같은 세계관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헬레니즘의 원형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발전시켰다. 이른바 ??신화에서 철학으로from myth to philosophy??의 이행으로 정형화되어 표현되는 희랍 ??고전시대classical period??의 개막이 그것이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헬레니즘은 한차원 높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또한 고급 또는 엘리트 헬레니즘 문화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서양 정신사뿐만 아니라 인류 정신사 전체의 창조적 발전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그와 같은 희랍철학의 정수, 곧 헬레니즘의 정수로서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철학이 등장한다.5)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그의 유명한 격률 ??너 자신을 알라??에 내포된 아이러니에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잘 알려져 있듯이 그것은 도덕적 완성의 핵심으로 자기반성을 강조한 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의 아이러니는 바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률 자체를 향한 데 있다. 종교의 이름으로 제시되는 ??너 자신을 알라??, 즉 ??인간 자신의 한계와 분수를 알고 신의 명령에 따르라??는 명령은 ??전통이나 기존의 종교적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도전하지 말고 그것들을 묵수하라??는 뜻이 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이름으로 ??너 자신을 알아서 무엇하랴??를 강요하는 종교라는 이름의 세속적 권위에 대한 비판과 도전을 시도했던 것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한편으로는 전통과 종교의 이름으로 일방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기존 정치적 제도적 권위에 도전하는 의미로 사용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권위나 제도에 대해 무반성적 독단이나 자기확신 위에서 행동하는 인간들, 즉 정치가나 종교가, 문학가 등 당대에 똑똑하다는 사람들을 상대로 경고하였던 것이다. 특히 초월적 세계에 대한 부정적 태도와 철저한 세속주의적 지향 태도를 지닌 직업적 ??지식인??이자 개인교습가들, 곧 소피스트들에 대한 경고였던 것도 사실이다.
플라톤의 위대한 철학체계로 구체화되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당시 희랍의 정신사적 상황에 대한 비판적 극복의 시도였다. 그것은 전통적인 신관 및 종교생활, 전통적인 도덕과 가치, 전통적인 학문을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비판하고, 새로운 종교?학문?이념을 제창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나타나는?? 사조나 생활양식?태도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전통적 자연철학과 신비주의의 전통 및 소피스트의 이념에 대한 지양?종합의 시도였다. 그러한 비판과 종합의 결과로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철학은 이성의 주체로서 스스로 능동적인 사유작용과 판단의 존재로 인간을 파악하되, 그 주체성은 자기반성을 통해 스스로의 한계를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세계를 지향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또한 인간의 욕망이나 쾌락은 그 자체의 가치가 부정될 이유는 없으나, 그것의 진정한 실현이나 즐김은 이성의 통제하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제도적 종교가 설파하는 ??신의 존재에 대한 이성적 접근의 불가능성??이나 ??계시??의 영역 역시 신과 관련된 기존의 관념이나 제도, 관행의 의미에 대한 철저한 검토와 비판적 사고활동이 이루어진 후 최후에 도달할 수 있는 정신의 경지이지, 결코 기존의 종교적 권위나 이념, 사고체계에 대한 ??겸허하고?? 맹목적인 수용과 순응이 자동적으로 가져오는 관념은 아니라고 보았다. 자연과 사회에 대한 진정한 지식 역시 스스로 지식이라고 생각하거나 안다고 믿는 것들의 성립근거 및 한계에 대한 비판과 끊임없는 깨달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자??였다.
기존의 제도나 관념을 비판적으로 지양?극복하려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삶의 태도가 일반 시민들, 특히 대중적 가치관과 의식수준이 지배적이 될 수밖에 없는 민주정하의 ??민주시민??들에게 비판의 대상이자 귀찮은 존재로, 더 나아가 아테네의 公敵이 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는 희랍 역사상 처음으로 처형당하는 지식인이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처형은 헬레니즘의 역사에서 지식인과 정치?사회적 권력, 그리고 대중 사이의 긴장관계가 첨예하게 된 상황의 표현이며, 헬레니즘의 정신사가 이제 지식인의 그것과 권력 및 일반대중의 그것으로 이원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다만 그러한 이원화는 완전히 분리?독립된 것이 아니라 공존 속에서의 대립 및 상호작용이라는 긴장관계 속에서의 변화와 발전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세속사회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 플라톤에 의한 아카데미의 설립이 중세의 대학으로 다시 재현되었듯이, 세속권력 및 제도종교와 현실에 바탕을 두되 세속성을 지양하고 초월성을 추구하는 학문 사이의 긴장관계가 최초로 제도화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될 수 있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이후 플라톤의 아카데미학파, 아리스토텔레스의 뤼케움Lyceum학파,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의 견유학파Cynics 및 제논Zenon의 스토아학파에 의해서 분화?변천을 보인다. 또한 反소크라테스 입장에서 데모크리토스Democritos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의 전통을 계승하여 무신론적이면서 현세적 행복을 강조한 에피쿠로스Epicuros의 쾌락주의 역시 또 다른 정신사적 흐름을 이룬다.
B.C. 4세기 중반 이후의 희랍세계의 쇠퇴는 곧 세속사회와 지식인 사회 사이에 존재했던 건강한 긴장 관계가 쇠퇴했다는 것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지성과 학문이 세속성에 종속되거나 아니면 그것에서 도피하면서 사변활동 자체에 안주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히 올림피아 신화적 세계관이 점차 생명력을 잃어가면서 새로운 정신적 피난처를 갈구하는 일반 대중들에게 구세주로서의 철인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후기 스토아주의는 점차 세속적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간다. 서구 정신사의 두 축으로서 헬레니즘과 유대주의로서의 헤브라이즘이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시기이다.
Ⅲ-1. 헤브라이즘의 출발자 모세: 유일신과 윤리공동체 관념의 등장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세계사를 통해서 그 유례를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역사적으로 초라한 민족이던 유태민족이 세계사적 민족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정신사적 계기는 위에서 서술된 헬레니즘의 범세계화 과정, 특히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일반 대중들을 영적으로 구휼하여 줄 수 있는 초월적인 구세주 사상이 점차 보편화 되어가는 정신사적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예수 사후 기독교가 헬레니즘 세계까지 포섭하여 범세계적 종교로 확대될 수 있었던 상황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앞에서 기술한 헬레니즘의 정신사적 배경과 함께6) 근본적으로는 유태교 자체의 ??신인간역사관?? 속에 헬레니즘적 세계관 및 철학과 융합될 수 있는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점이 두 흐름의 접점 상황에서 변증법적 발전을 가능하게 한 요소이기도 하다. 이 점은 먼저 모세의 ??신학??이 갖는 혁명적 성격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모세를 통해서 유태인들은 비로소 절대자, 유일자로서의 신 관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지적될 수 있다. 《구약》은 유태인의 기원을 아브라함에서 찾지만, 사실상 ??절대적 존재로서의 신?? 관념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모세에 와서 가능했다. 왜냐하면 이전 조상들이 단순히 계시된 신의 의사와 명령을 수동적으로 전달받고 준수하는 인물들이었던 데 반해 모세는 〈출애굽기〉 3장이 증언하듯이 신의 정체에 대해 적극적으로 묻고 신의 이름이자 본질로서 ??나는 나??7)라는 혁명적인 진술로서 절대자로서의 관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절대자로서의 나는 바로 ??나이다(I am)??라고밖에 자기의 본질을 밝힐 수 없는 모세의 야훼신앙 속에 이미 유일자 또는 절대자로서의 신 관념이 뚜렷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자연물의 인간적 표상으로서의 신 개념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을 압도하는 일방적 ??힘??으로서의―유대 민족의 신 이름은 ??야훼??보다 오히려 힘을 의미하는 ??엘로힘??이 더 일반적이었다―신 개념을 넘어섰다는 점에서도 혁명적이다.
둘째, 모세의 ??神約covenant??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와 같이 ??신약??의 주체로서 선민의 표상을 할례라는 사적이면서도 소극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또 단순히 한 민족의 조상이 아니라 ??보편적 통치자??로서 신과 계약을 맺었다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필연적으로 도덕적?사회적 율법의 실행과 함께 공동체적 이념과 질서의 확립이라는 적극적인 윤리적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혁명적 성격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십계명〉과 함께 제시된 〈출애굽기〉 20장~40장의 상세한 법률체계에서 보듯이 이것은 ??신약??을 통한 인간사에의 신의 개입은 이제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 차원의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이제 개인이 신약의 주체가 아니라 ??유태민족??이 주체로 등장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신학적 차원을 떠나서 유태민족으로서 통일된 세계관과 역사의식, 규범체계를 갖추게 됨을 의미하며, 민족종교의 확립 및 그러한 신앙의 구체적인 실천규범으로서 율법의 제정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셋째, 더욱 중요한 것은 모세 신약의 바로 이러한 혁명성 속에 유태민족 특유의 ??일방향으로서의 시간one-way time?? 개념 및 ??구원의 역사?? 개념이 본질적인 내적 긴장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모세 ??신약??에 나타나는 신이라는 존재의 절대성과 신의 의사가 구현되는 구체적이고 상대적인 상황 사이에 본질적으로 긴장관계가 존재하며, 도덕성의 본질상 인간이 단순히 신의 명령에 수동적으로 따르고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에 기인한다. 그것은 어떠한 신약의 이행이나 신이 부과한 계율의 실현에도 그것을 집행하는 인간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신의 의사라는 절대적인 도덕적 판단을 이끌어내느냐, 다시 말해서 신의 진정한 의사가 무엇이냐의 문제와 관련하여 인간의 주체적인 해석상의 논쟁이 끊임없이 지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서 그러한 논쟁은 권력투쟁이나 내전, 국가의 분열로까지 발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절대자에 대하여 타율성과 자율성이 공존하며, 스스로의 잘못된 도덕적 판단에 의하여 죄를 범하지만 다시 그러한 죄의 복속을 바라는 인간 존재의 이중성은 결국 현재의 죄업이 복속되고 현재의 ??타락??한 상황이 신에 의해서 구원받는 절대적인 상황이 미래에 존재한다는 ??일방향??으로의 시간 개념 혹은 역사관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역사관의 도입은 모세에 의해 확립된 절대화된 현실, 즉 신의 의사와 명령이 직접 구현되는 절대적인 신의 왕국이기 때문에 언제나 변하지 않는 정태적인 시간 개념의 변혁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미래에 있을 ??구원된 세계??라는 유태인 특유의 종말론적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그와 같은 종말론은 그들의 역사적 환란기에 무수히 등장했던 예언자들에 의해서 점차 유태인의 정통적인 세계관으로 확립되게 된다. 예수의 출현에 의한 헤브라이즘의 또 다른 측면인 기독교의 등장은 이와 같은 정신사적 발전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Ⅲ-2. 헤브라이즘의 완성 예수: 신의 의사와 인간 도덕성의 일치
솔로몬왕의 사후 B.C. 9~6세기 사이에 전개된 유태민족의 쇠퇴와 멸망이라는 역사적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모세적 세계관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것은 기독교의 탄생과 그 핵심인 예수의 메시지를 통해서 새로운 신관이 탄생함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기독교의 탄생이 예수라는 인물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강렬한 인간적 호소력 및 종교적 메시지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지만 동시에 여기서는 특히 그것이 헬레니즘의 승화와 발전에 힘입은 것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예수의 제자들에 의한 초기 교회의 선교활동이 유태인 사회에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헬레니즘화된 소아시아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희랍 본토 및 로마지역으로 확산되었다는 표면적인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8) 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기본입장이나 ??신의 왕국??의 이념 자체가 헬레니즘의 발전적 승화라는 사실이 양자의 분리 인식이 부당함을 설명해준다.
첫째, 전통 유태교의 율법주의와 관련된 예수의 기본입장이 헬레니즘의 발전적 승화를 통한 완성에 있었다는 점이다.9) 〈마태복음〉(5:17~7:27) 등에서 전하는 예수의 핵심적인 주장은 계율을 준수하되, 그러한 준수의 절대성은 그 계율에 담긴 보편적인 의미, 즉 ??인간의 공동체적 삶의 근본원리로서 사랑과 호혜의 정신이 항상 나타나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곧 도덕적 주체로서의 인간 본질에 대한 강조이며,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복음〉 5:48)라는 언명도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예수의 주장은 절대자에 대한 신앙과 복종의 진정한 핵심이 유한자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끊임없이 극복하려고 노력하면서 절대성을 지향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가장 근본적인 계명으로서 새롭게 제시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10)도 ??사랑agape@??의 의미를 인간이 절대적인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지향으로서의 자신과 타인을 대하는 마음으로 이해할 때 그 역설과 조화를 이룬다고 할 것이다.
둘째, 기독교적 종말론의 핵심으로 제시된 ??신의 나라?? 이념의 역설적 성격 또한 헤브라이즘이 헬레니즘과의 융합 가능성을 증명하는 예이다. 우리말로 ??천국??, ??하늘나라??, ??하느님의 나라??로 번역되는 《신약성서》의 희랍어는 ??basileia(왕국) theos(신)?? 혹은 ??basileia ourano@s(하늘)??이다. 모세의 ??신의 나라??는 신이 선택한 유태민족이 신의 율법을 지키며 그에 따라 신의 보호를 받는 집단으로서의 그것이었다.11) 이 경우 유태민족이 환란을 당하고 있는 이상 환란은 신의 응징일 뿐이고, 왕국은 잃어버린 왕국일 뿐이다. 따라서 유태인의 대안은 죄의 복속을 통하여 새롭게 건설되고 재현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율법주의의 비판적 극복과 함께 기존의 전통적이고 세속화된 ??신의 왕국?? 개념을 넘어서서 자비, 사랑, 관용의 새로운 신 개념과 조화시켰던 것이다.
예수가 설파했던 ??신의 왕국??의 진정한 의미12)는 ??죽은 사람의 부활에 관하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본 적이 없느냐?…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마태복음〉 22:32~33)13)라는 구절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결국 예수에게 있어서는 신의 의사를 이해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존재로서 인간의 도덕적 자율성 개념과 세계 내적 존재로서의 신의 개념은 종합되어야만 했고, 신의 의사와 현실적으로 구현되는 인간의 세속질서 및 도덕적 행위가 일치하는 상황이야말로 ??신의 왕국??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신의 왕국??은 진정한 의미에서 도덕성과 공동체의 완성체였으며, 비록 개개인은 유한자로서 존재하더라도 인간성에 내재한 지고의 가치가 완벽하게 실현되면서 신이 부과한 질서와 일치하는 절대적인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Ⅳ. 새로운 한국문명과 단군신화
인간이 도덕적 주체로서 신의 의사와 합일되는 완전한 조화로운 공동체적 삶을 이 세계에서 실현시키는 데 ??신의 왕국??의 본질적인 의미가 있고, 구세주란 다름 아닌 그러한 ??신의 왕국??을 이끄는 존재라고 할 때,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두 세계관은 비록 다른 세계관적 전제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역사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에 있어서 동일한 관점으로 귀결된다. 물론 이것은 영혼과 물질의 본원적 동일성 및 범신론적 전제에서 출발한 헬레니즘, 그리고 영혼과 물질 사이의 배타적 대립 및 절대적인 유일신앙에서 출발한 헤브라이즘이 결코 그것 자체로서 완전한 것이 아니라 자체 내의 한계와 모순을 극복하면서 스스로가 좀 더 보편적인 세계관으로 자기변화를 추구할 때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떠한 세계관도 처음부터 완전한 것은 아니다. 서구문명의 현재가 바로 그와 같은 두 세계관 사이의 긴장과 대립이라는 변증법적 변화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정신사적 배경에 대한 새롭고도 철저한 자기반성적 검토 없이 삶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수단적 가치에 집착하면서 본질적으로 숫자상의 유희에 불과한 ??새 천년??이라는 수사의 주술에 빠질 때 서구문명은 발전이라는 외양 속에 쇠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물론 주체적인 세계관을 확립하지 못한 채 현대 서구문명의 그러한 상황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이 그들이 벌이는 수사의 향연에 탐닉하는 민족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민족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탁월한 세계관을 잠재적으로 향유한 민족이다. 그것은 이 글에서 다룬 원시 헬레니즘이나 원시 헤브라이즘과 비교될 경우에도 그러하다. 단군신화에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존재로서 하느님(桓因)의 개념이 이미 확립되어 있으며, 인간의 탄생도 신이 물건을 제조하는 장인craftsman과 같이 기능하는 것처럼 ??거칠게?? 묘사되지 않는다. 그것에는 ??곰이 백일 동안 쑥과 마늘만을 먹는다??는 지극히 고통스런 자기변혁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인간의 출현을 낮은 차원의 존재가 자기부정을 통한 혁신을 통해서 높은 차원의 존재가 된다는 진화론적이고도 변증법적인 심오한 인식수준을 보여준다.
그러한 세계관과 인간관은 신과 자연 및 인간을 단순히 합일적 존재 혹은 대립적 존재로 파악하지 않고 합일 속의 차이, 연속성 속의 단절이라는 변증법적 발전관계 속에서 인식한다. 자연과의 관계가 그러할진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대립이나 이해관계에 따른 결합과 갈등이 공동체적 유대와 호혜 관계로 대치됨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며, 그것이 이른바 홍익인간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이 완벽하게 실현된 상황은 본질적으로 ??신의 왕국??에 다름 아닐 것이다.
물론 그러한 세계관은 위대한 세계관의 단초이기는 하여도 결코 구체적인 체계를 갖춘 이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미 단군신화로 표현된 세계관 속에 서구의 헬레니즘이나 헤브라이즘을 능가할 수 있는 보편적인 요소가 내재한다면, 그것을 체계적으로 승화?발전시켜서 보편적인 세계관으로 성립시키지 못한 것은 한국 지성사가 민족사 앞에서 책임질 일이다. 그러한 세계관의 핵심적 요소 가운데 하나가 독자적인 시간의식이고 그것은 고유의 연호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표현된다면, 후손에 의해서 ??과감하게?? 폐기되어 버린 ??檀紀단기??와 현재의 ??새 밀레니엄?? 주술의 원천이자 타민족에 의해 세계 보편의 연호로 승화된 ??西紀서기??, 두 연호의 나락과 영광이 바로 이 민족의 정신세계 속에 생생하게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만큼 이 민족의 정신사적 ??헐벗음??을 더 이상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실은 없다고 할 것이다.
(에머지
200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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