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나의 본 日本 서울(1921년 7월)

이강기 2016. 9. 28. 15:56
개벽 제13호  
발행일1921년 07월01일  
기사제목나의 본 日本 서울  
필자晩松 成琯鎬  
기사형태논설  


나의 본 日本 서울

晩松 成琯鎬

나는 先者 약 20일간의 時日을 費하야 日本 東京을 구경한 일이 잇섯다. 歷路沿景에 대한 소감도 不無하나 此는 관객의 套語에 불과한 바 文字는 一切로 略하고 다못 나의 눈에 비추운 東京을 그려보고저 한다.

나의 눈에 비추운 東京의 표면은 이러하얏다. 爲先 東京市의 도로는 도회 道路로는 華麗廣濶하다는 것보다도 차라리 狹窄不潔하다 하겟다. 물론 이것은 지리 기후상으로 陋濕한 평야이엇스며 風雨 頻作에 因함이라 하겟지마는 적어도 人智가 현상이상으로 자연을 변경하는 능력이 부족함을 표현하는 것일 것이다. 좌우에 나열한 가옥은 1층보다도 2층이상이 전부이고 洋式보다도 和式이 대부분이다. 소수의 양식가옥이 아모리 화려 장엄하다할지라도 그 顔色은 和式의 색채 속에 무텨버리고 말앗다. 그런데 和式가옥의 역사상 혹은 지리상으로 변천된 원인은 그만두고라도 爲先 연약하고 輕美한 것으로는 세계에 제일일 것이다. 연약한 것이 汚穢를 입기 용이하고 輕美한 것이 長久치 못한 것은 물론이다. 우리 朝鮮式 가옥보다도 넘우 軟弱輕美한 것갓다. 그래서 新건축일지라도 바람에 불릴 것갓고 비에 쓸어질 것가트며 또 날로 더럽어 가는 白衣와 갓다. 동시에 全都會의 형색은 화려 장엄보다도 不潔浮輕의 기분이 흐른다. 그래서 四處로 列羅된 점포에 찬란 화려한 貨物이 全市街를 장식하야 노흔 것은 마치 버래먹은 나무에 花가 開한 모양이엇섯다. 그리고 그 貨物을 벌인 각 점포는 그 前面을 전부 열븐 유리창으로 꾸미엇슴으로 그의 점포의 내용은 뮀§게서 능히 다 볼 수 잇게 되엇다. 그래서 觀者로 하여금 深藏한 무엇이 잇는 것가티 보이지 아니하고 전부가 이것 뿐이요 하는 無餘를 광고함인 것가탓다. 물론 冠盖는 모다 洋式이나 그 着衣는 소수가 양복이요 多大數는 廣袖衣의 和服이다. 廣袖衣라는 衣制는 원래 人身을 사실이상으로 體小한 것가티 보이게 하는 것이요 또 矮小한 것은 日本人의 특질인데 게다가 모다 廣袖衣를 着한 것은 軆小한 중에도 더욱 軆小한 것가티 보인다. 그러나 體小한 속에도 潑潑한 생기가 충만한 것갓다. 潑潑한 생기 이것 하나이야말로 東洋에 패권을 가지고 열강과 並肩하게된 骨髓-며 동시에 日本魂의 表顯일 것이다.

이와가튼 表面의 東京은 비록 初見者일지라도 별로 놀래일 것도<62> 업고 화려장엄하다는 생각은 족음도 업다. 그러나 廣大하다는 點은 긍정 아니할 수 업스며 더욱 輕視치 못할 것은 全都會에 충만한 潑潑한 생기이다.
裡面의 東京을 보고자 하엿지마는 나에게는 그것을 보기에 충분한 時日도 업섯스며 兼하야 解得할 만한 眼目도 역시 부족하다. 短促한 시간과 부족한 眼目으로도 見과 聞이 업는 것은 아니지마는 설혹 잇다할지라도 正見正聞이 아닐 것이다. 正見과 不正見은 世評으로 讓하고 그나마 余의 所見을 쓰는 것이 本志임으로 幾許의 所感을 記하랴한다.

현행 도덕상으로 본 日本은 평등도덕보다도 계급도덕이 우세이고 단체적 도덕보다도 개성적 도덕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엇다. 원래 洋의 東西를 불문하고 太初로부터 現今까지의 문화발전의 大是는 계급도덕이 평등도덕으로 진행되어 가는 것뿐이며 現今까지 뿐아니라 미래 영원까지도 亦然할 것이다. 그럼으로 今日에 絶呌하는 소위 평등도덕이라는 것도 역시 절대의 평등이 아니요 압흐로 얼마던지 평등에 평등으로 진행될 여지가 무궁한 것이다. 결국 평등이라는 것은 현재는 물론 이 世間의 끗업는 미래까지를 아울러 통하야 最善 且 最公正한 것을 이름일 것이다. 日本도 역시 昔日 봉건시대의 純專制, 즉 極端의 계급도덕으로부터 維新時代에 入하며 一大의 斧銊을 自加하야 新도덕을 건립하야써 今日에 미처온 것이다. 그 新도덕이 금일까지 이르기에는 外來의 風潮가 多少의 변동을 주지 아니한 것은 아니겟지마는 新도덕을 수립하엿다는 것은 亦是 昔日의 혹독한 계급도덕 우에 외래의 신풍조로써 가미한 것뿐이요 근본으로 개조된 것은 아니다. 원래 사회 진보라는 자체가 그러한 것이라 人性의 본질로 因襲되어온 것을 全然 파괴하고 딴 것을 건립하지 못하는 것임으로 因하야 소위 新도덕이라는 자체도 계급도덕의 骨子가 隱然히 무텨잇서 왓다. 그뿐아니라 維新이 벌서 半百의 年條를 가지게되엇슴으로 新도덕이란 것도 이제는 또 舊殼을 쓰게 되엇다. 외래의 風潮가 업는 것은 아니겟지마는 그 舊殼을 新鮮케 하기에는 넘우 능력이 부족한 듯하다. 또한 그뿐아니라 四圍列國에서는 개조운동이 爭起하야 男女의 평등을 주장하고 노동의 평등을 絶呌하야 急激의 勢로 新도덕을 건립하게 되엇다. 그러나 日本은 舊殼을 依然히 늒�집어쓰고 全세계를 대하는 것가티 보인다. 如何間 금일의 日本은 현대적은 아니다. 평소에 생각하던 것과도 딴판 틀리는 日本國이다.

이러한지라 官民이 불평등이요 남녀가 불평등이요 빈부가 불평등이다. 관리는 인민을 下視하기 土芥가티 하고 인민은 관리를 尊視하기 天帝가티 한다. 딸아서 관료가 今日가티<63>그 직권을 남용하는 것도 아마 이러한 官尊民卑에서 基因된 것이 아닌가 하엿다. 잡지 신문에 연속 기재되는 高官大爵의 瀆職사건이 모다 이것을 표현함일 것이다. 사회와 국가도 分業으로 조직된 것이다. 그러하다하면 官僚라는 것도 국가 생존에 대한 分業의 一役軍이다. 관료뿐만아니라 鑛産의 鑛夫도 村間의 農氓도 海邊의 漁夫도 어느 것이던지 국가 생존에 사회조직에 一役軍되기는 일반일 것이다. 그러면 同一한 役軍으로 혹 尊하며 혹 卑하다는 것이 是認할만한 合理라하기 불능하다. 如何하던지 日本은 官尊民卑의 國이라 적어드 列國에 비하야 尤甚한 것갓다. 官民의 懸殊가 이러할 뿐아니라 남녀간이 또한 불평등이다. 男은 女를 奴僕視하고 女는 男을 主人視하야 兩個 異性의 對等的 인격의 결합이 아니요 女는 男의 부속품이다. 이것은 如干 朝鮮의 男女에 比할 것이 아니다.

황금시대가 노동시대로 변하랴고 搖動이 만흔 금일에 황금만능이라는 氣勢는 東京 全市街에 遍滿하여 보인다. 모든 사물은 황금에서 산출되고 또 황금알에서 全滅한다. 물론 사물의 발생 소멸이 물질정신의 종합체 아닌 것이 업는 것이다. 그러면 황금도 역시 사물조직에 일부분 되는 것은 누구나 긍정치 아니하는 것은 아니겟지마는 황금만능이라는 말은 황금의 능력이 정신을 凌加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日本은 依然한 황금시대의 日本이다. 弱者의 主義와 貧者의 의견은 아모리 공정하다 할지라도 强者와 富者의 前에는 머리를 숙이지 아니치 못하고 富者와 强者의 의견은 설혹 불합리하다 할지라도 貧者의 머리 우에는 절대의 압력이 되고 만다. 그러하야 一個 富者의 의견은 萬人 弱者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잇다. 政派의 主義爭鬪도 결국은 金力爭鬪가 되고 만다. 余는 東京에서 富貴者의 별장 혹은 居宅도 보앗스며 貧民 集住處도 보앗다. 빈민촌을 보다가 부자의 별장을 볼 때마다 可憎타 생각치 아닌 때가 업섯스며 부자의 별장을 보다가 빈자의 거처를 볼 때마다 가련타 생각치 아닌 때가 업섯다. 부자의 별장은 建造의 洋和를 勿論하고 美麗宏壯을 極한 바 조각의 돌일지라도 기름기가 흐르지 아니함 업스며 庭園에는 奇花佳卉가 滿栽되어 四時의 觀賞을 맛갓게 하고 그 廣濶한 것은 公設의 공원과 並肩할만한 것이 도처에 보엿다. 그러치마는 빈민들은 안식할만한 일정한 주택이 업시 이리저리 風前蘆花가티 浮萍을 지을 뿐이다. 무엇으로 보던지 현금 日本은 황금만능이다.

日本의 종교는 佛敎가 他敎보다 首席을 占하엿다. 儒敎는 餘息을 保할 능력까지도 부족한 듯하고 耶蘇敎는 일반 국민성에 不合함으로 발전의 힘이 微少하다. 고로 佛敎의 도덕이 일반을 지배하게 되엇다. 佛敎도덕이 일반을 지배하는<64> 것도 그 敎理의 진실이 그들을 지배케 된 것이 아니요 敎理가 미신으로 변하야 인습적으로 그들의 낡은 머리를 붓잡고 잇는 것뿐인 듯하다. 그래서 그들은 敎理를 강구하야 자신이 敎理로써 사는 것보다도 老女老夫들은 佛像前 投金箱에 돈을 더지고 두손을 싹싹 부비며 福주기를 暗祝하는 것갓다. 老女老夫 뿐아니라 靑年紳士輩도 이러한 일이 허다하다. 물론 자기 行身을 敎理에 합치되도록 힘을 쓰며서 祝福하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라고도 하겟지마는 純虛飾的 因習的 또는 盲目的으로 실행하야 오는 편이 더 만흔 모양이다. 佛像前의 祝福이며 葬儀의 예식이 모다 이러하다. 승려들은 傳布보다도 佛敎的 상인이 되어 버렷다. 즉 佛敎는 형식으로의 생명은 살앗다 할지라도 敎理는 소멸된지 이미 오래인 것갓다.

이 뿐아니라 어떠한 편으로나 미신이 허다하게 유행되는 것갓다. 門前에는 거의 符籍을 그리어 貼付하엿고 古木미테마다 投金箱을 설치하고 香火를 피는 일도 업지 아니하며 上野公園不忍池 엽헤는 石으로써 남녀의 생식기를 맨들어 노코 이것을 숭배하는 일도 보앗다. 이것을 볼 때에 人智가 능히 이러한 野卑한 미신을 제거하기에 부족한 것을 표현함이라고 나는 생각하엿다.

정치상으로 본 日本은 더구나 余로 하여곰 말할 경험과 상식이 부족함으로 發言의 능력이 업다. 말하는 김이니 단편적 소감의 一端을 並記코저 한다.

정치의 개선도 維新부터 벌서 반백년의 長세월을 가젓슴으로 弊習이 된 것이 不無하다. 반백년간을 진행하는 동안에 勢力者는 세력 증식하기 용이한 일면으로 弱者는 더욱 더욱 위축케 되엇다. 고로 세력자는 세력에 세력을 加하게 되고 弱者는 弱에 弱을 加하게되어 그동안 落後되어버린 것도 不少하고 지금껏 餘命을 보존되어 오는 것도 잇다. 改善初의 同國 각 정파는 국가를 위하는 公正主義 下에서 行한 爭鬪엇슬 것이나 弊習이 점점 만하진 現今은 公正을 求하는 爭鬪보다도 私利의 爭鬪가 不少하고 정치도덕의 실질보다도 법률형식을 유지하여올 뿐이다. 滿鐵事件의 不起訴도 정치세력에 因함이요 각 신문에 기사 금지로 因하야 소송을 제기함도 무엇보다도 정치세력의 惡化를 餘地업시 표현한 것이다.

다시 눈을 경제방면으로 옴기어 農商工의 발전을 본다하면 農業은 거의 상당한 정도에 도달하엿다 할만하다. 水利의 정돈이 완비되어 灌漑가 충분함으로 旱水의 害가 不多하고 耕作의 정리가 精美할뿐 아니라 施肥의 정신이 일반농민에게 보급되어 收穫이 年年 增收된다하며 상업으로 말하면 지금것 진보되어온 것도 長足의 勢로 발전되엇지마는<65> 일반의 심리가 상업으로 집중하는 것갓다. 그럼으로 상업의 장래는 유망하다. 日本은 상업의 日本으로 세계에 揚名하랴는 기세가 보인다. 街路에 즐비한 회사나 조합은 모다 상업을 목적하고 경영하는 것이다. 국제상업으로는 초기의 步調라 하겟지마는 국내상업으로는 벌서 편리할만콤 진보된 것갓다. 공업에 이르러서는 아즉도 초기이다. 창조적 공업은 물론하고 모방적 공업도 아즉 相當하다기 어렵다. 鑛産的 공업은 모르겟지마는 農産的 공업으로 말하면 日本의 공업으로써 자국에 농산을 能히 飽溶할만하다. 적어도 原始工業線을 지나 機械工業線을 진행하는 중이다.

일반사회의 경제는 적극적이지마는 개인의 衣食에 관한 경제 즉 그의 소극인 절약주의는 참으로 可驚할 일이다. 그의 음식은 참으로 간단하다. 그 우에 더 간단할 수 업다. 白飯은 물론이고 副食物이라고는 소위 「다구완」즉 무김치 몃쪽이면 족하고 그 외에 如干 魚類를 常食하고 육류라는 것은 上等생활자의 식용이 될뿐이다. 의복으로 말하면 木綿이나 綢絲를 물론하고 세탁을 퍽 드믈게 한다. 이것은 흑색인 까닭이다. 여하간 우리의 음식과 의복을 보다가 즉 여자는 衣食의 供饋에 여가가 업슬만치 多食多衣하는 것을 보다가 그들의 節食約衣를 볼 때에 우리의 生活難의 一因은 衣食을 절약치 못함에도 잇다고 생각하엿다. 금번 세계 공통인 財界變動暴風에도 그들의 일반 경제계에는 파급이 甚하엿슴에 불구하고 개인으로는 朝鮮과 가티 그리 참혹한 영향을 不蒙하얏슴은 그 因이 전혀 절약의 정신이 미리부터 助長됨에 在함인 듯하다. 日本의 국민성으로 말하면 물론 島國性 특색인 短氣이다. 그러함으로 容物性이 부족하며 딸아 타인을 포용할 능력이 부족하다. 輒怒輒喜하되 怒할 時에는 불붓듯하며 풀어질 때에는 砂糖녹듯 한다. 生氣를 가진 때에는 뛰는 生魚갓다가도 한번 生氣를 일흔 때에는 그만 다시 餘力을 발휘할 餘地가 업서지고 만다. 그들의 떠드는 노동운동이니 사상문제이니 하는 모든 것이 물우의 거품가티 문득 騷動하다가 문득 까라지고 마는 것은 모다 그들의 민족성으로 나오는 필연의 결과인 듯하다. 현대사조는 청년계와 노년계가 懸殊하다. 청년계는 新思潮가 遍滿하고 노년계는 舊思想이 미트로부터 목까지 充滿하다. 청년이라고 전부 신사조일 것은 아니요 노년이라고 전부 守舊일 것은 아니지만 신사조에 는 청년이 多部分이요 수구에는 노년이 多部分이다. 어느시대 어느민족을 물론하고 新舊가 업는 것은 아니겟지마는 新舊가 잇다할지라도 新은 舊의 産物되고 舊는 新의 原因이 되어 新은 이상적 미래를 상상하고 舊는 旣往의 경험을 확신하는 것이다. <66> 그리하야 新舊가 相須하야 절충적으로 조화됨으로 사회는 딸아서 順境으로 진보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新舊는 상반적이 아니오 변천적이며 진보적이다. 그러나 日本의 新舊는 그러치 안타. 즉 舊라는 것은 벌서 半百年을 진행하여 온 동안에 弊習이 積聚된 그것이요 新이라는 것은 舊에서 産出된 것이 아니라 四圍風潮가 돌연히 불어옴에서 생긴 그것이다. 이와가티 그의 新舊는 그것에서 그것이 나온 것이 아님으로 그 兩者는 심히 相隔하야 절충적으로 조화될 수가 업는 것이다. 舊는 新을 강력으로 박멸하려하고 新은 舊를 傀儡라 하야 파괴하려한다. 그리하야 계급도덕을 파괴하고 평등도덕을 수립하랴한다. 官民을 평등으로 하고 貧富를 평등으로 하고 男女를 평등으로 하려한다. 櫻花의 爛漫도 빈민을 위하야 된 것이 아니요 富貴者만 위한 것이며 團團한 明月도 高樓巨閣에만 비추인다 하는 글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불평을 잘 설명한 것이다. 그리하야 暗中에서 新舊충돌이 격심한 모양이다. 나의 본 바에 의하면 旣往의 日本維新이후로 약 40년간은 물질로나 정신으로나 다가티 진보되는 日本이요 現今의 日本은 정신상으로 腐敗에 瀕한 日本이다. 그 공기를 전환하야 人道의 감격에 충만될 신문화를 건설하여야할 日本人의 책임도 과연 무겁다 하얏다. 그것을 못한다면 日本人의 前途도 한심할 듯십다. 그런데 그들의 민족성의 短氣陜隘은 대외적으로는 여러가지의 反愊�을 買하는 害惡됨이 不無하나 대내적으로는 장점 되는 것이 不無하니 즉 自國을 위하는 모든 일에는 一時의 희생을 不顧하고 능히 공동일치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네가 모든 인류와 협동하야 세계적으로 나아갈만한 性과 德을 가지지 못한 것은 물론이나 自國 自民族의 보호에는 能히 堪耐할 것이다. 그리고 제일 欽慕되는 것은 日本 청년남녀이다. 일반 청년남녀는 顔色에 生魚와 가티 活氣를 띠엇슬 뿐아니라 老衰者보다 體長이 稍大한 것갓다. 이것은 적어도 미래의 日本을 상상할 수 잇다.
최후에 진심으로써 우리형제들에게 하소연코자하는 것은 因循姑息的으로 존재만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요 남과 가티 活生命을 發揮하야써 즉 산업경제나 종교도덕으로나 기타 어떠한 방면으로나 勢에 力에 또 感激에 充滿된 新건설을 行하자 함이다.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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