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싶은 詩 모음

가람 이병기의 시조 대표작 모음

이강기 2023. 2. 16. 13:13
 
 

해월의 시조마루/현대시조

가람 이병기의 시조 대표작 모음

채현병 2012. 1. 15. 23:16

 

                         가람 이병기(1891.3.5 ~ 1968.11.29)

                        시조 대표작 모음

 

 

     고향으로 돌아가자

 

방과 곶간들이 모두 잿더미 되고
장독대마다 질그릇 쪼각만 남았으니
게다가 움이라도 묻고 다시 살아봅시다

 

 

            대성암

 

고개 고개 넘어 호젓은 하다마는
풀섶 바위서리 빨간 딸기 파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쪽이 발 끝에 부딪치고
성을 고인 돌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뫼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깊은 바위굴에 솟아나는 맑은 샘을
위로 뚫린 구멍 내려오던 공양미를
이제도 의상을 더불어 신라시절 말한다

 

별이 쨍쨍하고 하늘도 말갛더니
설레는 바람끝에 구름은 서들대고
거뭇한 먼산 머리에 비가 몰아 들온다.

 

 

                 별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 함께 나아오더라

 

달은 넘어 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난초

 

한 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새로 난 난초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침 볕이 발틈에 비쳐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 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孤寂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짓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淨한 모래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微塵도 가까이 않고 雨露 받아 사느니라

 

 

 

                  비2

 

짐을 매어놓고 떠나시려 하는 이 날
어두운 새벽부터 시름없이 내리는 비
내일도 내리오소서 연일 두고 오소서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내리는 비
저으기 말리는 정은 나보다도 더하오

 

잡았던 그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라
매어 둔 짐을 보고는 눈을 도로 감으오

 

 

 

                  계곡

 

맑은 시내 따러 그늘 짙은 소나무 숲
높은 가지들은 비껴드는 별을 받어
가는 닢 은바늘처럼 어지러이 반작인다.

 

청기와 두어장을 법당에 이어 두고
앞뒤 비인 뜰엔 새도 날어 아니오고
홈으로 나리는 물이 저나 저를 울린다.

 

헝기고 또 헝기어 알알이 닦인 모래
고운 옥과 같이 갈리고 갈린 바위
그려도 더러 일가바 물이 씻어 흐른다.

 

폭포소리 듣다 귀를 막어도 도다
돌을 베개 삼어 모래에 누어도 보고
한 손에 해를 가리고 푸른 허공 바라본다.

 

바위 바위 우로 바위를 업고 안고
또는 넓다 좁다 이리 저리 도는 골을
시름도 피로도 모르고 물을 밟어 오른다.

 

얼마나 험하다 하리 오르면 오르는 이길
물소리 끊어지고 흰 구름 일어나고
우러러 보이든 봉우리 발 아래로 놓인다.

 

 

 

                냉이꽃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때 밥을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시도 읊고 싶구나

 

지난봄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 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그 얼마 다를 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태양이 그대로라면 지구는 어떨 건가
수소탄 원자탄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두 송이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한 하소연

 

지루한 고통보다는 차라리 자살이 쾌하다
그 전쟁 끝에 강도는 자주나고
해마다 풍년은 들어도 주려 죽게 되었다

 

 

                갈보리

 

쓰일 듯 쓰일 듯하여 붓은 던질 수 없고
문장만으로 배는 채워지지 않는다.
원컨대 오는 해마다 풍년이나 드소서

 

 

              풀벌레

 

가까이 멀리에서 제서 쌍져울다
외로 울다 연달아 울다 둑 끈쳤다
다시 운다 그 소리 단조하고 같은 양해도

자세 들으면 이놈의 소리 저놈의 소리 다 다르구나

 

 

 

              파랑새

 

파랑새 날아오면 그이도 온다더니
파랑새 날아가도 그이는 아니 온다
오늘도 아니 오시니 내일이나 올는가

 

기다려지는 마음 하루가 백년 같다
새로 이가 나고 흰 머리 다시 검어라
그이가 오신 뒤에야 나는 죽어 가리라

 

 

 

                 볕

 

보릿잎 포롯포롯 종달새 종알종알
나물 캐던 큰아기도 바구니 던져두고
따뜻한 언덕머리에 콧노래만 잦었다
볕이 솔솔 스며들어 옷이 도리어 주체스럽다
바람은 한결 가볍고 구름은 동실동실

 

 

 

                낙화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쌓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박연폭포

 

이제 산에 드니 산에 정이 드는구나
오르고 내리는 길 괴로움을 다 모르고
저절로 산인이 되어 비도 맞아 가노라

 

이 골 저 골 물을 건너고 또 건너니
발 밑에 우는 폭포 백이요 천이러니
박연을 이르고 보니 하나밖에 없어라

 

봉머리 이는 구름 바람에 다 날리고
바위에 새긴 글발 매이고 이지러지고
다만 그 흐르는 물이 긋지 아니하도다

 

 

 

                나오라

 

일즉 임을 여희고 이리저리 헤매이다
버리고 던진 목숨 이루 헬 수도 없다
웃음을 하기보다도 눈물 먼저 흐른다

 

다행히 아니 죽고 이 날을 다시 본다
낡은 터를 닦고 새 집을 이룩하자
손마다 연장을 들고 어서 바삐 나오라

 

 

 

                  처

 

귀히 자란 몸에 정주도 모르다가
이 집 들어오며 물 긷고 방아 찧고
잔 시늉 안한 일 없이 가는 뼈도 굵었다

 

맑은 나의 살림 다만 믿는 그의 한 몸
몹시 섬약하고 병도 또한 잦건마는
그래도 성한 양으로 참고 그저 바꿔라

 

나이 더하더라도 마음이야 다르던가
백년 동안이 만나던 그날 같고
마주 푼 귀영머리는 나보다도 검어라

 

이미 맺은 인연 그대로 잇고 이어
다시 태어나되 서로 바꾸어되어
이 생의 못다한 정을 저 생에서 받으리

 

 

 

              수선화

 

風紙에 바람 일고 구들은 얼음이다
조그만 책상 하나 무릎 앞에 놓아두고
그 뒤엔 한두 숭어리 피어나는 水仙花

 

투술한 전복껍질 바로 달아 등에 대고
따뜻한 볕을 지고 누워있는 蟹形水仙
서리고 잠들던 잎도 굽이굽이 펴이네

 

燈에 비친 모양 더욱이 연연하다
웃으며 수줍은 듯 고개숙인 숭이숭이
하이얀 장지문 위에 그리나니 水墨畵를

 

 

 

                구름

 

새벽 동쪽 하늘 저녁은 서쪽 하늘
피어나는 구름과 그 빛과 그 모양을
꽃이란 꽃이라 한들 그와 같이 고우리

 

그 구름 나도 되어 허공에 뜨고싶다
바람을 타고 동으로 가다 서으로 가다
아무런 자취가 없이 스러져도 좋으리

 

 

 

          저무는 가을

 

들마다 늦은 가을 찬바람이 움직이네
벼이삭 수수이삭 으슬으슬 속살이고
밭머리에 해그림자도 바쁜 듯이 가누나

 

 

 

             오동꽃

 

담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
한두개 소리없이 내려지는 오동꽃을
가랴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아차산

 

고개 고개 넘어 호젓은 하다마는
풀섶 바위 서리 빨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쪽이 발 끝에 부딪히고
성을 고인 돌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메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매화2

 

더딘 이 가을도 어느덧 다 지나고
울 밑에 시든 국화 캐어 다시 옮겨두고
호올로 술을 대하다 다시 생각나외다

 

뜨다 지는 달이 숲 속에 어른거리고
가는 별똥이 번개처럼 빗날리고
두어 집 외딴 마을에 밤은 고요하외다

 

자주 된서리 치고 찬바람 닥쳐오고
여윈 귀뚜라미 점점 소리도 얼고
더져 둔 매화 한 등걸 저나 봄을 야외다

 

 

 

               농촌화첩1

 

웅덩마다 물 괴이고 밤에는 개구리소리
둥산에 숲이 짙어 낮이면 꾀꼬리소리
그 바쁜 마을 집들은 더욱 적적하여라

 

앞뒤 넓은 들이 어느덧 검어졌다
모기와 벼룩 거머리 뜯기다가
겉절인 글무 김치에 보리밥이 살지운다

 

일심은 오려논에 기심이 길어있다
헌 삿갓 베 잠방이 호미 메고 삽 들고
내 일은 내가 서둘러 새벽부터 나간다

 

올마다 호박넌출 그 밑에 가지 고추
비는 오려하는 무더운 저녁날에
똥오줌 걸찍한 냄새 온 마을을 적신다

 

몇만년 걸고 걸은 기름진 메와 들을
갈고 고르고 심고 거두고 하여
일찍이 우리 조상도 이 흙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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