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東錫 評論集

孔孟의 勤勞觀

이강기 2015. 9. 1. 17:55

孔孟의 勤勞觀


   - 知識階級論 斷片 -
      

                      - 金東錫


   周易을 가지고 人間의 運命을 占치는 것은 꼭 윳가락을 던져서 運數의 吉不吉을 따지는 것이나 매일반으로 그냥 遊戱라고 보면 눈감아 줄 수도 있는 것이지만 二十世紀에 있어서 이것을 정말「宇宙의 書」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는 상투쟁이일 것이다.


   허지만 周易을 버리더라도 다음과 같은 대목만은 남겨두고 싶다.

 

   「上不在天, 下不在田」

 

   知識階級의 本質을 이 以上 簡單明瞭하게 把握한 말은 古今東西에 없을 것이기 때문에 -.   封建社會의 貴族처럼 또는 商品社會의 資本家처럼 하늘에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農民이나 勞動者처럼 땅에나 工場에 있을 일이지 知識階級은 하필 그도 저도 아닌 새중간에 끼어 있느냐 말이다.


   그래서 封建社會에선 貴族의 食客이 되고 商品社會에선 資本家의 珠板이 된 것이 知識人의 運命이었다.


   허지만 그때나 이때나 知識人이 勤勞의 貴한 것을 모르는 배 아니다. 藤文公이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물으니 孟子 가로되

 

「民事는 허술히 할 것이 아니올시다. 詩에 가론

그대여 낮이면 갈대를 버히고
밤이면 새끼를 꼬아서
빨리 그대의 지붕을 덮어라.
그리고 나서 百穀을 씨뿌려라

 

하였으니 百姓이란 먹을 것이 넉넉해야 마음이 넉넉하고 먹을 것이 넉넉지 못하면 마음도 넉넉지 못한 것이니 마음이 넉넉지 못하고 볼 말이면 마음이 비틀리고 꼬부라져서 무슨 짓은 안 하겠사오리까. 그런 것을 罪를 저지른 뒤에야 잡아서 형벌 한다면 백성을 그물 쳐 놓고 고기 잡듯 하는 것이 아니오리까.」

 

   옳은 말이다. 李朝의 샌님들은 왜 이런 唯物論을 배우지 못하고 儒敎를「明哲保身」의 道具로만 썼던고. 허긴 丁茶山 같은 實學 - 요새 말로 하면 唯物論 - 의 大家가 없는 바는 아니로되 - .


   孟子의 井田說은 幼稚한대로 經濟學이다. 이것을 繼承하고 發展시켰더라면 儒敎는 그 面目을 달리 했을 것이다.


   그러나 孟子는 결국 封建主義의 代辯者였다. 食客이 별 수가 있겠느냐.「勞心者治人, 勞力者治於人, 治於人者食人, 治人者食於人, 天下之通義也」라 하였으니 말이다. 知識人은 언제고 아는 체 하지만 언제고 그 時代의 制約을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社會意識은 社會存在의 反映이니까 - .


   「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의「士」가 知識人을 意味한다면 이 命題는 成立하지 않는다. 왜냐면 知識人의 代表者요 孟子의 스승인 孔子도 無恒産이면 無恒心이었으니 말이다.

 

「佛힐이 부르매 孔子가 가고자하니 子路 가로되 언젠가 先生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좋지 못한 일을 하는 者에겐 君子는 섞이지 않는 것이라고. 그런데 시방 佛힐이 中牟에서 叛亂을 일으키고 先生님을 請하니까 先生님 가시려함은 어찌된 셈입니까, 하니 孔子 가라사대 그렇다 내가 그런 말을 한 일이 있지. 허지만 내 어찌 됨박처럼 매달려 먹지 않고 살 수 있겠느냐.」(論語陽貨)

 

   孔子도 됨박처럼 먹지 않고 대발려 있기만 할 수 없었거늘 其餘의 儒生이랴. 그러한 李朝의 샌님들이 勤勞階級을 쌍놈이라 壓迫한 것은 時代의 罪過로 둘리더라도 日本帝國主義 三十六年동안 그러했고 解放된 오늘날 오히려 그 고약한 버릇을 行使하려는 封建主義者가 있으니 事態는 딱하다.

 

「인제는 우리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데 하필 여덟 시간 勞動制냐, 열 시간도 좋고 스무 시간도 좋지 않느냐.」

 

   그들은 이렇게 堂堂히(?)「八時間 勞動制」를 批判한다. 말은 좋다. 그러면 그대들은 왜 하루의 여덟 시간은 그만두고 한 시간도 힘드는 일을 하지 않느냐. 술 먹고 政談이나 하는 것은 勞動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야 할 것이다. 三千萬이나 되는 朝鮮民族이 맘과 힘을 合하여 하루의 여덟 시간 勞動을 한다면 三千里江山은 몇 해 안 가서 樂園이 될 것이 아니냐. 손발에 흙 묻히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시방 서울에 모여서 다 저 잘났다고 한마디씩은 떠들어대고 있다. 그래서 서울은 政治的으로도 全鮮을 通하여 제일 反動的이다. 知識人이 있는 대로 다 모인 서울이 政治路線을 바로 걸어가지 못하는 原因은 그들이「下不在田」이기 때문이다. 知識人은 손발을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衣食住에 있어서 事大主義일뿐 아니라 政治的으로도 갈팡질팡 영문을 모르는 것이다. 歷史란 언제고 손발을 움직이는 사람과 더불어 움직이는 것이다.


   孔子는 그래도 孔子다. 自己손으로 自己 빵 問題를 解決하지 못하는 것에 對해서는 自意識을 가지고 있었다.

 

「子路가 孔子와 더불어 旅行을 하다가 뒤떨어졌더니 지팡이에 대광우리를 뀌어 어깨에 멘 老人을 만나 물어 가로되 老人께서는 우리 先生님을 못 보시었습니까 하니 老人이 가로되 손발을 움직이지 않고 五穀을 區別할 줄도 모르고 무슨 先生님이람, 하고는 지팡이를 꽂아놓고 김을 매는지라 子路는 공손히 서서 기다렸더니 老人은 子路를 데리고 자기 집에 가서 머무르게 하고 닭을 잡고 수수밥을 해서 대접을 하고 또 두 아들을 불러 인사하게 하였더라. 子路가 孔子를 찾아 뵈옵고 자초지종을 아뢰니 孔子 가라사대 隱者로다 하고는 子路로 하여금 다시 가보라 하니 老人은 간 곳 없더라.」(論語微子)

 

   孔子는 自己를 無爲徒食者라 辱한 老人을「隱者」라 하였고 子路를 다시 한번 보낸 뜻은 한번 만나고자 꾀하였음이리라. 헌데 子路는 닭고기와 수수밥 얻어먹은 신세도 잊고 - 이불 속에서 활개치듯 - 「欲潔其身而亂大倫」이라고 그 老人을 그 老人 없는 데서 辱했으니 속이 좁은 인텔리라 아니 할 수 없다. 果然 孔子는 그 老人을 어떻게 生覺하였을까? 論語는 「子曰 隱者也. 使子路反見之」하였을 뿐이니 二千五百年 뒤 우리가 어찌 그 속을 알 수 있으랴. 다만 바로 前에 있는「長沮章」을 보아 推測할 따름이다.

 

「長沮와 桀溺이 나란히 밭을 갈고 있는데 孔子가 지나다가 子路를 시켜 나루를 묻게 하니 長沮 가로되 저 말고삐를 쥐고 있는 者가 누군가 하니 子路 가로되 孔丘올시다. 가로되 魯나라 孔丘인가. 가로되 그렇습니다. 가로되 그 사람이면 모르는 게 없다면서 나루도 알 터이지 함으로 桀溺에게 물어보니, 가로되 자네는 누군가. 가로되 仲由올시다. 가로되 그러면 魯나라 孔丘의 무리가 아닌가. 대답해 가로되 그렇습니다. 가로되 온 世上이 大河長江처럼 滔滔히 흐르거늘 누가 거기다 손을 댈 수 있으랴. 사람을 避하는 孔丘를 좇아 다니느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 사는 우리를 좇아 다니느니만 못하리라 하고는 씨 뿌린 데다가 흙을 껸지면서 모른 체 하는지라, 子路가 孔子께 아뢰니 孔子 憮然히 탄식하여 가라사대 그렇다고 새나 짐승과 같이 살수도 없지 않으냐 내가 人間들과 같이 살지 않으면 누구와 같이 살 것이냐, 天下에 道가 있다면야 나도 뭐 구태여 애쓰지 않으련다.」

 

   孔子는 政治家였다. 知識人의 나갈 길은 技術이나 政治밖에 없다. 孔子는 陶淵明처럼 逃避하지 않고 하물며 屈原처럼 絶望치 않고 끝끝내 自己의 힘으로 中國社會를 經倫해 보겠다는 信念이 있었다. 이 一面이 孟子에 있어서는 더욱 强調되어 治國의 根本을 經濟政策에 두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은 오늘날 우리 인텔리겐챠도 본받아야 할 것이다.


   허지만 知識人이 大衆 속에 들어가지 않고 政治家가 되려는 것은 危險千萬한 일이다. 孔子나 孟子도 大衆的 地盤이 없었기 때문에 이 君主 저 君主를 찾아다니며 顧問 노릇 밖에 못하였거늘 現代에 있어서 勤勞大衆의 公僕이 될 覺悟가 없이 知識人이 政界에 나선다는 것은 벌써 反動을 意味하며 事實 反動陣營에 붙고 마는 것은 결국 목구멍이 捕盜廳인데 그는 資本家처럼 生産手段이 넉넉한 것도 아니오 勞動者처럼 제 손으로 벌어먹을 수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許行의 무리는 요새 인텔리만큼 어디에 가 붙을 줄 몰라서 굵은 배잠뱅이를 입고 집신을 삼아 신고 돗자리를 짜 가며 손수 땅 파먹고 있었을까. 知識人들은 自己의 觀念을 과신하는 나머지 自己가 進步的이라고 믿고 있지만 進步的이기커녕 反動的이 되지 않으려 앨써도 反動的이 되기 쉬운 것이 東西古今의 인텔리가 지니고 있는 宿命이다. 露西亞革命 前後의 知識人이 얼마나 反動했나를 보라. 아니 實例를 옛날이나 딴 나라에서 들 것 없이 朝鮮의 인텔리겐챠를 보라. 朝鮮의 新聞雜誌가 바람에 불리는 갈대와 같은 것도 그 土臺인 知識階級이 이리 쏠렸다 저리 쏠렸다 하기 때문이다. 新聞雜誌가 反動이 되는 反面에는 反動分子의 테러가 숨어 있는 것이 事實이지만 그 보다도 더 根本的인 原因은 新聞雜誌를 가지고 먹고살려는 知識階級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입으로 또는 活字 위에서 무어라고 떠들어대든지 간에 妻子를 肉體의 땀으로 먹여 살릴 수 없는 이른바「精神勞動者」이기 때문이다.

 

精神勞動者! 말은 좋다. 허지만 더 많은 生産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오 歷史發展에 이바지하는 것도 없는 精神이 무슨 勞動이란 말인가. 機會主義者에 지나지 않는 知識人들이 新聞雜誌를 가지고 政治를 左之右之한 데서 朝鮮政界는 더욱 混亂에 빠진 것이다. 政黨背景 있는 新聞 두서너 개를 빼 놓으면 나머지 言論機關의 擧皆가 어찌도 요리 댓뚱 저리 댓뚱 하는지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될 지를 모르는 것이 서울 市民이다. 新聞을 보지 못하는 農夫나 勞動者들이 꾸준히 朝鮮의 갈 바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서울양반」들이 갈팡질팡하는 것은 먼저도 말했거니와 反動分子의 테러와 謀略策動이 가장 甚한  곳이 서울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더 큰 理由는 知識階級의 動搖가 甚하기 때문이다. 그들만 泰山喬嶽의 姿勢를 取할 수 있었더라면 朝鮮民族 統一戰線은 벌써 完成되었을 것이다. 


   特히 新聞人이 인텔리 中에도 세상 돌아가는 것에 對해서 敏感하다. 그러나 同時에 어느 쪽에 붙어야 有利하다는 打算이 빠른 것도 病이다. 그래서 判斷이 너무 재빠르기 때문에 悠久한 歷史의 發展에 대해선 소를 만난 鷄刀와 같이 날이 서지 않는다. 歷史는 生産力과 더불어 發展하는 것인데 直接 生産力의 要素가 되지 못하는 저널리스트들은 歷史의 發展을 直接 體驗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라리「行有餘力則以學文」이라 한 孔子의 實踐的인 一面을 본받든지「朝聞道夕死可矣」라 한 그 熾烈한 眞理探究의 精神을 본받든지 한다면 朝鮮의 知識階級도 進步的 役割을 할 수 있을 것이다. 論語커녕 맑스, 엥겔스, 레닌도 無不通知라는 知識人이 있을지도 모르나 現實을 지배하지 못하는 知識이 맑스, 엥겔스, 레닌의 어느 著書에 숨어 있다는 말인지 몰라도 實踐的으로 朝鮮民族의 解放을 위하여 풀러스 한 것이 없는 사람은 안다고 뽐내는 그 姿勢가 벌써 反動側에 기울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朝鮮에서 누구보다 深刻한 自己批判없이 새 나라의 일꾼이 될 수 없는 分子들이 知識階級이다. 마음에 없이 목구멍이 捕盜廳이어서 또는 身邊의 危險을 느껴서 그리됐다 하더라도 朝鮮의 젊은이들을 왜놈의 兵丁 만드는 데 또는 그놈들의 工場에다 徵用보내는 데 積極的으로 協力했으며 철모르는 어린이들을 皇民化하는 데 努力했으며 勞動者 農民을 속여서 搾取하는 데 援助를 아끼지 않은 日本帝國主義 行政機關에 있던 인텔리겐차는 勿論이려니와 言論敎育機關에 있던 知識人으로 스스로 한번 自己를 매질 해 봄도 없이 名利를 위하여 염치 불구하고 날뛴다는 것은 知識階級 自體를 위하여 痛嘆할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知識이란 比컨대 칼과 같다. 칼이 더럽혔을 땐 씻으면 된다. 그리고 칼은 그것을 쓰는 사람에 따라 殺人强盜의 칼이 될 수도 있고 活人正義의 칼이 될 수도 있다. 知識人이어 스스로 이 칼을 義로운 데 쓸 勇氣가 없거든 차라리 奸惡한 무리에게 빌려주지나 말라. 그것조차 제 손으로 빌어 먹을줄 모르는 知識人에겐 어려운 일이다. 孔子도 이 知識人의 悲哀를 깨달았음인지 論語「陽貨」에서 다음같이 意味深長한 述懷를 하였다.

 

 孔子 가라사대 내 아무 말도 아니하련다. 子貢이 가로되 先生님이 아무 말씀을 안 하신다면 저 같은 놈은 무슨 소리를 하겠습니까. 孔子 가라사대 하늘이 무어라 말하더냐. 그래도 四時는 가고 百物은 生하나니, 하늘이 무어라 말하더냐.

 

   無言實行! 이야말로 시방 朝鮮知識階級에게 주는 가장 좋은 敎訓일 것이다. 서울의 바람이 너무 세서 바르게 姿勢를 取하여 行動할 自信이 없는 인텔리겐챠는 農村으로 가라. 또는 工場으로 들어가라. 거기서 한 三年 默默히 있다면 반드시 朝鮮民族의 指導者가 될 素質이 있다고 認定받을 것이다. 그 때엔 벌써 나쁜 意味의 인텔리 根性도 淸算하였을 것이 아닌가.(끝)

 


'金東錫 評論集' 카테고리의 다른 글

金東錫의 "藝術과 生活"을 옮기고 나서  (0) 2015.09.01
基督의 精神  (0) 2015.09.01
批判의 批判  (0) 2015.09.01
學者論  (0) 2015.09.01
新戀愛論  (0) 2015.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