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東錫 評論集

學者論

이강기 2015. 9. 1. 17:48

學者論

  -  朝聞道夕死可矣 - 孔子 -

               - 金東錫

 

   弱하면서도 强한 것이 學者다. 日本이 亡하려고 저이 나라의 左翼學者들을 잡아다 가두고 나중에는 自由主義學者까지 彈壓하게 되니 朝鮮의 學者들도 漸漸 움츠려 든 것은 事實이지만 끝끝내 固執하고 日本帝國主義에 妥協하지 않은 것도 또한 事實이다. 六堂을 비롯해서 日本帝國主義의 御用學者가 된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自身들을 어떻게 規定하는 진 몰라도, 또는 日本人이나 親日派가 그들을 學者라 認定하는 것은 事實이지만 그들이 學者가 아니라는 것은 朝鮮人民이 周知하는 바이다.
   學者란 學問을 生命으로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學問이란 現代에 있어선 科學을 빼놓고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科學을 生命으로 하는 사람만이 學者가 될 수 있는 것이다. 日本의 六法全書를 외웠다거나 三國遺事에도 없는 檀君論을 가지고 學生을 欺瞞하려들거나 美軍政官 한테 英語로 아첨을 잘 하거나 朝鮮을 大韓이라 부르고 西紀대신 檀紀를 쓰는 것만 가지고는 學者는 될 수 없다. 빈그릇(空器)이 소리가 더 요란하다던가. 普通땐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이따금 가다가「反託」이니 무어니 怒號絶叫한다고 學者가 될 수는 없다. 하물며 朝鮮말 한다고 學生을 때리고, 日本的 學問을 主張하고, 學兵이 되라든지 皇國臣民이 되라든지 하는 對日協力을 한 實績만 가지고는 더더군다나 學者가 될 수는 없다. 우리의 政治的 指導者를 따질 때엔 政見이나 利害나 黨派에 따라서 意見의 對立이 있을 수 있으되 學問的 指導者를 規定할 때엔 異論이 있을 수 없다. 過去에도 現在에도 未來에도 科學이 生命인 사람 - 이런 사람이라야 民族의 學問的 指導者가 될 수 있다는 데 對해서는 아무도 反對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科學이란 무엇이냐?
   過去와 現在를 批判하여 새로운 時代를 創造하는 學問을 일컬음이다. 朝鮮은 政治도 經濟도 文化도 모든 것이 있었던 것 또는 있는 것만 가지고는 滿足할 수 없다. 얼마든지 새로운 것을 要求한다. 그것도 남의 것을 受動的으로 받아드림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우리를 위한 우리의 것을 要求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힘으로 科學을 發展시켜야 할 것이다. 이에서 學者의 使命은 革命家의 그것에 못지 않게 重大하다 하겠다.
   眞正한 意味의 學者는 하나밖에 있을 수 없지만 시방 朝鮮에는 이러한 學者 外에 다른 두 가지 種類의「學者」가 있다. 學者로 行勢할 수 있는 資格이라고는 大學을 卒業했다는 것 밖에, 實力으로는 到底히 學者의 대우를 받을 수 없으니까 權勢에 아부하여 學園行政의 實權을 잡음으로 말미암아 敎授와 學生에게 自己를 偉大한 學者로 推戴하기를 强要하는 者 - 이런 者 때문에 學園의 自由가 蹂躪되는 수가 많다. 이런 者는 强權을 가지고 學生大衆을 彈壓할 수는 있을는지 모르나 學生大衆이 이런 者들을 學者로 잘 못 알 念慮는 없다. 그러나 여기 또 한 가지 種類의「學者」가 있으니 一生을 學問을 한다고 冊을 많이 읽기는 했으나 學問의 大路를 찾지 못하고 岐路에서 彷徨하면서 自己네들이야말로 學問의 오롯한 길을 걷느라고 誇示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百科全書的인 知識을 가진 사람도 있고 巧妙한 論理를 가진 사람도 있고 高尙한 敎養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科學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前者와 매일반이다. 그들은 學問의 世界를 무슨 꽃동산으로 잘 못 알고 있는 神仙들인지라, 시방 朝鮮의 學園이 꽃동산이기커녕 白蛇와 豹狼이 넘나다니는 쑥밭인 것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眞正한 學者들이 피를 흘리다시피 惡戰苦鬪하여 朝鮮의 學問을 開墾 播種 除草하는 것을 오히려 異端視한다. 이런 神仙들이야말로 學問의 무서운 敵이다. 왜냐면 이런 神仙들을 學生들이 學者로 잘못 알고 뒤따라서 朝鮮의 現實을 떠난 그 非夢似夢의 觀念世界로 들어가 버릴 危險性이 있기 때문이다. 獨逸 觀念論의 影響을 받은 日本의 學者가 朝鮮에다 얼마나 많은 夢遊病者를 길러놨나 하는 것은 앞으로 朝鮮의 學者와 學問을 생각할 때 計算에 넣어야 할 것이다.
   어느 時代고 어느 나라고 學者가 많을 수가 없다. 하물며 大學 하나 없던 日本의 植民地이던 朝鮮이랴. 허지만 不幸 中 多幸으로 다른 先進國에 比하여 비록 數는 적을망정「日帝」의 그 무서운 彈壓 밑에서도 一路 學問의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學問에 살고 學問에 죽으려는 學者들을 우리 民族은 가지고 있다. 大學은 마땅히 이런 學者들을 原始人이 불씨를 간직하듯이 아껴서 젊은 學徒들에게 科學의 方法과 精神과 情熱을 불붙인다면 不時에 朝鮮民族의 손에 炬火가 들려질 것이다. 學問의 횃불! 이 世紀的 光明을 마다할 者 누구냐. 허지만 행여 이러한 불이 붙을까 겁을 집어먹고 불씨를 지닌 學者들을 짓밟으려는 者들이 있다. 暗黑과 罪惡과 頑迷 송에서만 繁昌할 수 있는 무리들 - 封建主義와 日本帝國主義의 殘滓가 光明과 眞理와 進步를 두려워해서다. 政界의 混亂과 經濟의 恐慌과 文化의 蹉跌 때문에 人民大衆이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封建」과「日帝」의 殘滓가 가장 權謀術策을 쓸 수 있느니 만치 그들은 이 混亂과 恐慌과 蹉跌을 整理, 解消, 發展시키려는 科學精神 앞에 戰慄한다. 日本의 獨占資本家와 軍部가 科學精神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科學精神에 徹底하지 못한 自由主義學者까지도 大學에서 追放한 事實을 이들 朝鮮의 反動分子 惡質分子들이 모를 리 없다. 아니, 이들은 그들의 스승인 왜놈이 이 땅에 남기고 간 遺訓을 徹底히 遂行하려는 것이다. 封建的 乃至 日帝的 殘滓가 肅淸되지 않는限 朝鮮學者들의 前途는 荊자의 길일 것이다. 그러므로 朝鮮의 學者들은 硏究와 同時에 鬪爭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元來 科學이란 鬪爭없이는 前進할 수 없다. 갈릴레오가「地動說」을 主張했을 때 地球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舊約聖經을 絶對不變의 眞理라 믿었던 카톨릭 神父들은 死刑으로써 그를 威脅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勇敢했다. 그리고 主張했다.
「그래도 地球는 움직인다.」고.
이 鬪爭的 精神이야말로 科學에서 뺄 수 없는 一面이다. 科學이란 自然과의 鬪爭이오 社會惡과의 鬪爭이오 朝鮮 같은 데서는 무엇보다도 封建主義와 日本帝國主義의 殘滓와의 鬪爭이어야 한다.
   大學敎授 中에는 聯合軍이 上陸하자 朝鮮에서 日本帝國主義가 完全히 掃蕩되었다고 思惟하는 者가 있다. 日本人이 물러간 것도 事實이다. 허지만 그들의 파쇼的, 反科學的, 反人民的 精神은 親日派 民族 叛逆者 뿐 아니라 우리들의 精神 속에 남아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官吏는 美國式으로 말하면 公僕이어늘 人民과 敵對하려는 것은 都大體 누구의 主義인가를 알라. 하물며 어디보다도 自由가 保障되어야 할 大學까지도 敎授의 人事를 自己들 官吏의 手中에 넣으려는 手段은 누구의 手法인가를 알라. 自由와 民主主義의 나라 美國人이 이런 것을 朝鮮사람에게 가르쳤을 理는 萬無하다. 敎授와 學生을 통틀어 이른바「國立서울大學校」案에 反對하는 理由도 朝鮮의 大學이 李朝나 日帝 때 모양 官僚의 恣意에 맡겨질까 두려워 해서리라. 現代는 科學의 世紀요 科學은 極度로 發達한 技術을 要하는 것이어늘 法律을 工夫했다는 者들에게 天下事를 통 털어 맡긴 것은 日本式 官僚主義요 民主主義 朝鮮을 建設하는 이 마당에 大學의 問題를 敎授와 學生들은 解決할 能力이 없고 몇 사람 官僚만이 解決할 수 있다는 論理가 都大體 누구의 論理인가를 알라. 多數는 늘 誤謬를 犯하고 小數만이 合法的이라는 論理는 적어도 美國的 民主主義에는 없는 論理일 것이다. 朝鮮의 大學이 朝鮮의 學者와 學生만 가지고는 成立할 수 없다면 朝鮮의 大學은 成立할 수 없는 것이다. 敎授나 學生이 官權을 무서워해서 學園의 自由까지를 犧牲하고 官製大學校에 滿足한다면 그런 敎授나 그런 學生을 가지고 朝鮮의 學問을 建設하기는 틀렸다. 都大體 官僚에게 無條件 服從을 하는 버릇이 日本帝國主義의 殘滓가 아니고 무엇이냐. 적어도 美國民에게는 이런 버릇이 없다. 眞理를 위하여 살고 眞理를 위하여 죽어야 하는 大學敎授와 學生까지 왜놈에게 눌려지내던 그 卑屈한 根性을 버리지 못할진대 民主主義 朝鮮建設은 까마득하다 아니할 수 없다. 破壞的이 아니고 建設的인 일에 있어서 왜 勇敢하지를 못하나 말이다. 그대들은 마땅히 이렇게 主張할 것이다.
「官僚는 官僚의 使命을 다하라. 學問과 學園의 建設은 우리의 使命이니 安心하고 우리에게 맡겨라.」
   허지만 오늘날 大學의 問題는 그렇게 單純하지 않다.「國立서울大學校」案 背後에서 꿈틀거리는 學者가 아니면서 大學敎授가 된 者들의 謀略策動을 警戒하여야 한다. 처음에야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學生들이 이들 敎授를 無條件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이들의 馬脚이 드러남을 따라서 學生大衆은 이들을 排斥하기 시작했다. 허지만 그렇게 簡單히 물러날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정말 學者라면 大學을 弊履같이 버릴 수도 있다. 허지만 이 學者아닌 大學敎授들은 내세울 것은 그래도 學者라는 것 밖에 없는데 大學敎授라는「가다가끼」가 있어야만 學者행세를 할 수 있을뿐더러 野望이나 慾心은 - 學者가 아니기 때문에 - 하늘의 별이라도 딸 것 같다. 그런데다가 權勢에 阿附하고 科學精神을 모르는 一部 無智한 學生들의 支持를 받아서 솔개가 까치집을 뺏고 들어앉듯이 大學을 獨占하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美國의 데모크라시가 그 美德을 자랑하려는 美軍政의 文敎當局이 朝鮮의 學者와 學生을 無視한 似而非學者와 反動學生들에게 보금자리를 提供하기 위하여 一年이나 걸려서 만들어 온 大學을 깡그리 없애고「國立 서울大學校」를 세울까보냐. 이판에 國立大學敎授나 學長이나 總長을 해봐야지 언제 해 본담 하는 謀利輩에 진배없는 者들의 野心과 無謀가 背後에 숨어있는 것을 그래 科學精神의 所有者인 敎授와 科學精神의 探究者인 學生이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어리석도다. 科學을 모르는 무리들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權謀術策이여! 또 생각해 보라. 그대들이 朝鮮의 大學을 獨占한다고 - 親日派 民族叛逆者 謀利輩가 朝鮮을 왼통 집어삼키려는 짓과 같이 實現될리 萬無하지만 - 眞正한 學者가 그대들의 종노릇을 하면서까지 大學敎授라는 空名에 戀戀할 것 같으며 學生大衆이 學者없는 學園에서 만날 그대들한테 속고만 지낼 것 같으냐. 그대들이 占領할 수 있는 것은 最大限度가 所謂「敵産」인 大學設備뿐이라는 것을 알라. 기껏해야 空虛한 觀念 속에서 夢遊하는 自稱 學者나 大學에서 靑春을 虛送하려는 學生들이나 거느리고 地位와 虛名에 自慢하려면 그것은 可能할는지 모른다.
   허지만 朝鮮은 이미 李朝의 封建社會도 아니오 日本의 植民地도 아니다. 朝鮮의 學問은 朝鮮의 學問이기를 主張한다. 그것은 한 때 日本에서 御用學者들이 主張하던 日本的 學問이나 시방 朝鮮에서 似而非 學者들이 그것을 흉내낸 朝鮮的 學問을 意味하는 것이 아니다. 朝鮮民族의 손으로 朝鮮民族을 위하여 朝鮮民族의 科學을 樹立할 때 비로소 朝鮮의 學問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科學은 理念으로선 世界에 둘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朝鮮民族의 손에 戰取되지 않는限 朝鮮의 學問이 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朝鮮의 獨立이 理念으로 約束되어 있지만 革命家의 鬪爭없이 實現되기 어려운 거와 매한가지로 朝鮮의 學問은 學者와 學生들의 鬪爭없이는 建設될 수 없다. 天照大神이 日本의 科學精神을 抹殺한 것을 번연히 알면서 檀君을 가지고 武裝하여 大學을 獨占하려는 무리들이 있는가 하면 朝鮮말과 다름없는 말에 지나지 않는 英語를 잘 한다고 大學을 左右하려는 무리가 있고 政黨이나 軍政의 힘을 빌어 天使처럼 大學의 要職으로 下降하려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熱血學生」을 策動하여 眞正한 學者를 내쫓고 獨차지 하려는 무리들이 있는 朝鮮에서 冊이나 읽는다고 노트에 筆記나 한다고 眞正한 意味의 科學의 殿堂인 大學이 이루어질 것 같은가. 學者와 學生은 모름지기 투사가 되어서 이러한 不純分子를 肅淸하고 眞理만이 싹트고 자라고 열매맺는 學園을 建設할 지어라. 싸움이 없는 곳에 勝利가 있을 수 없다. 科學을 勝利의 記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五百하고 三十六年 동안 - 지루한 暗黑이었다. 光明의 불씨를 지닌 學者들이여 불을 켜대라. 數萬의 젊은이들이어 그대들로부터 民族의 希望인 이 불을 받아 스스로 이 땅의 횃불이 되고자 한다.
   머지 않아 三千里江山엔 坊坊谷谷이 그대들이 붙인 불이 붙기 시작할 것이다. 아니, 이미 불은 붙었다. 죽은 사람의 옷을 태우듯 그대들이 붙인 이 불이 封建主義와 日本帝國主義의 殘滓를 깡그리 불살라 버릴 때가 왔다.
   높이 들어라 學問의 횃불! 朝鮮의 學者와 學生大衆의 앞길은 光明에 빛난다. 허지만 우선은 暗黑을 뚫고 가야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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