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東錫 評論集

新戀愛論

이강기 2015. 9. 1. 17:47

新戀愛論

 

부르는 나와 따르는 너의 情이로다 - 古本 春香傳

                - 金東錫

 

   「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쇠사슬에 묶이었던 李朝의 女性은 戀愛가 무언지 알기 前에 며느리가 되고 시어머니가 되고 시어머니의 시어머니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당나귀를 타고 달랑달랑 장가들러 오다가 장난꾼들이 던지는 재 꾸러미에 놀라 떨어져서 코를 훌쩍거리며 들어오는 나 어린 新郞을 맞이하여 新婦는 첫날밤부터 性의 不滿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 또 참아야 한다. 忍從! 이것이 李朝 五百年의 婦德이었다.
   그래서 李朝가 낳은 아들 가운덴 샌님이 많다. 義務的으로 껴안는 夫婦 사이에 탐스런 아들이 생길 까닭이 없지 않느냐.
   봄바람에 나무 가지가 싹트듯이 부풀어오르는 젓 가슴에 戀情이 싹트고 處女도 모르는 사이에 탐스런 肉體가 되어 무르녹는 綠陰 속에서 한 쌍 꾀꼬리가 노래하듯 속삭일 수 있는 男性을 만날 때 비로소 健康한 結婚生活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男女의 結合이란 自然 속에서도 가장 自然스런 現象이다.

萬象을 껴안아 붙드는 者
「그대」며「나」며, 그 自身을
껴안아 붙들지 않는가?
위에 하늘이 둥글고 아래
땅이 굳건히 놓여있지 않은가?
그리고 久遠한 별들이
다정한 빛을 던지며 오르지 않는가?
그리고 내가 마주 그대를 보며
一切가 그대의 머리와 가슴으로 몰려와서 보일 듯 말 듯이 永遠한 神秘가
그대 곁에 떠돌지 않는가?
그대의 크나큰 가슴을 그것으로 채워라, 그래서 그 氣分을 祝福받을진댄
그것을 幸福이라 하든! 愛情이라 하든! 사랑이라 하든!

파우스트가 마르가르테에게 주는 이 말은 어느 時代고 妥當한「戀愛觀」이다.
   比컨대 靑春은 新綠과 같다. 그 속에서 꽃도 필 것이오 열매도 맺을 것이다. 또 新綠은 그 自體가 目的이오 꽃은 열매를 위하여 피고 열매는 더 많은 新綠을 낳기 위하여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 自然의 倫理일딘댄 이 倫理를 거꾸로 세워서 新婦를 媤父母에게 犧牲으로 바친 李朝의 封建社會가 나날이 시들어 드디어 沒落하고 말았다는 것은 不自然이 낳은 悲劇이었다.
   不自然! 그렇다. 朝鮮에는 아직도 너무 많은 不自然이 男女 사이에 가지가지 不美스런 關係를 빚어낸다.
   時調文學에서 이렇다 할 戀愛觀을 엿볼 수 없듯이 現代 朝鮮文學에서도 참다운 戀愛觀을 發見하기 困難한 것은 朝鮮民族은 五百年동안 戀愛한번 변변히 해보지 못했다는 것을 意味하는 것이 아닌가?「林巨正傳」엔 戀愛가 있으되 李朝的 에로에 흐르고 만다. 早婚 때문에 또는 封建的 家族制度 때문에 夫婦 사이에 渾然한 精神과 肉體의 結合을 가져보지 못한 李朝의 兩班들은 舍廊놀음에서 그들의 變態性慾을 滿足시켰던 것이다. 점잖은 개 부뚜막에 오르는 格으로.....
   春園의「사랑」은 모르면 몰라도 아마 古今東西에 제일 가는 그릇된 戀愛觀의 表現일 것이다. 俗된 男女가 껴안으면 血液에서「아모르겐」이 나오고 聖스런 男女가 껴안으면「아우라몬」이 나온다는 春園, 그는 꽃다운 處女하고 한 방에 잤는데도 껴안지 않았다고 그의「自敍傳」에서 자랑삼아 말했지만 아마 껴안고 잤더라도 春園의 血液엔「아우라몬」이 分泌되었을 것이다. 이「사랑」이 잘 팔리는 小說 중에도 베스트셀러였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물며 이 小說을 읽고 그 主人公 安賓같은 春園의 품안에 안기어 보았으면 하는 聖스런 處女들이 생겼다는 말을 들을 때 春園의 罪惡은 申旽의 그것보다 더 크다 아니할 수 없다. 春園의 文學은 戀愛도 虛僞의 戀愛觀을 그 놀라운 筆致로 철딱서니 없는 男女에게 들 씌웠던 것이다.「사랑」과 좋은 짝이 되는 것이 毛여사의「렌의 哀歌」다.
   참다운 戀愛가 없이 좋은 戀愛文學이 있을 수 없다. 하물며 處女하고 한 방에서 자도 아무 일 없고 女子와 껴안아도「愛의 素」인 아모르젠이 아니라「金」을 意味하는 아우라몬이 피에 섞이게 되는 春園같은 聖人들이 小說을 썼다는 것이 朝鮮文學을 病들게 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善男善女의 피를 不純하게 만들었다.
   眞實을 들어내는 것이 文學이다. 潛在意識까지도 파고 들어가 表現하는 것이 文學인데 自意識에다 몇 겹으로 옷을 입혀 體面을 차리기에 볼일을 못 보는 朝鮮의 文學家들 - 그들이 封建主義를 벗어버리려면 아직도 멀었다. 수집어서 그런지 점잖아서 그런지, 그들이 무슨 체하는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천둥벌거숭이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一般社會人士랴.
   醜聞 때문에 얼굴을 붉히고 말문이 막혀야 할 女史가 詩(?)로서 扮裝하고 플라톤의 使徒인양 행세하는 朝鮮文學이다.「무엇이 그 女史를 그렇게 만들었느냐?」朝鮮의 社會通念은 아직도 너 나 할 것 없이 封建主義인데 양키이즘 - 爛熟한 資本主義 - 에 心醉한 나머지 불에 뛰어드는 하루살이가 되고 만 것이다. 우리는 이런 女子를 辱하기 전에 우리의 封建意識을 淸算해야 할 것이다. 허지만 自己의 戀愛生活과는 얼토당토 안 한 戀愛詩를 쓰는 女流文士의 猛省을 바라는 것은 새로운 朝鮮의 文學과 戀愛를 휘하여 마땅히 있어야 할 自己批判이다. 뒤로 호박씨 깐다는 말이 있다. 假面을 쓴 戀愛文學을 掃蕩하기 전에는 健全한 戀愛觀이 樹立될 수 없다. 물론 假面없이 戀愛하고 文學할 수 있는 社會를 出現시키는 것이 先決問題이지만 - .
   어떤 日本人 心理學者가 卒業期를 앞둔 女學生들에게 테니슨의 戀愛詩「이노크 아든」(Enoch Arden)을 읽어주고 感想文을 써내게 해서 統計表를 꾸민 일이 있는데 거지반 다 異口同聲으로 애니의 立場을 擁護했건만 日本人 女學生 속에 섞여 있던 朝鮮人 女學生들은 애니를 唾罵했다. 動物園의 鶴을 보라. 鶴도 男便이 죽으면 다른 鶴과 結婚하지 않거늘 萬物의 靈長인 人間으로서 바다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 설사 죽었다 하자 - 男便 이노크를 저버리고 필립과 再婚한 애니는 貞操觀念이 없는 女子다. 둘이 다 이러한 意味의 感想文을 썼다. 日本人 女學生 가운덴 生活을 위해서는 애니가 마땅히 再婚해야 한다는 意見이 많았고 甚至於 健全한 性生活을 위하여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意見도 있었다.
   朝鮮 女性의 貞操觀念이 强한 것은 이 心理學者의 報告를 들을 것 없이 自他가 共認하는 事實이다. 허지만 그것이 一種의 封建的 强迫觀念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女性을 閨房에 가두어 두고 男子들이 一方的으로 造作한 倫理가 어느덧 女性의 마음깊이 뿌리박은 貞操觀念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夫婦와 저 夫婦 사이에 區別이 있어야 된다는「夫婦有別」까지도 意識的으로 曲解하여 젊은 夫婦의 사이를 離間한 것이 李朝의 兩班社會인데 結局 犧牲당한 것은 女性이오 男子들은 妓生과 수작하며 公公然하게 蓄妾할 수 있었던 것이다.
   要컨대 朝鮮의 貞操觀念이라는 것은 男子本位의 束縛觀念이었다. 自由에서 울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强한 듯 하되 弱하다. 家族的 監視를 받을 땐 强한 여성도 自由意思대로 行動할 수 있는 境遇에 들어가선 어처구니없이 弱해지는 것이 朝鮮 女性이다. 朝鮮 女性은 쓰개치마를 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親庭에서 또는 媤家에서 一家親戚이 들 씌워준 쓰개치마를 그대로 뒤집어쓰고 살아온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朝鮮 女性은 시방 重大한 危機에 當面했다 아니할 수 없다. 왜냐면 朝鮮이 解放되면 封建主義를 벗어나야 할 것이오 따라서 深閨에 갇혀있던 女性도 自由의 몸이 될 것임으로. 自由란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길인 同時에 빗나가기도 쉬운 길이다.
   사랑 없는 結婚生活은 修女나 賣春婦가 아니면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女性에게 强要한 것이 朝鮮의 封建社會다. 封建主義의 껍질을 벗고 새로운 生活이 비롯하는 마당에 朝鮮에도 많은 노라가「人形의 집」을 뛰어나올 것이다. 그것이 좋건 그르건 한번은 必然的으로 일어날 現象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러한 女性을 붙잡아 가둘 궁리를 하기 前에 그들이 길을 잘못 밟지 않게 하기 위하여 健全한 戀愛觀과 結婚觀을 確立하기에 努力해야 할 것이다.
   「사랑」을 精神的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은「사랑」을 肉體的인 것으로만 느끼는 것이나 매한가지로 危險하다. 肉體없는 精神은 現實과 遊離되며 精神없는 肉體는 現實과 野合한다. 朱耀燮의「사랑손님과 어머니」가 前者의 좋은 例요 李孝石의「花粉」이 後者의 좋은 例다.
   그러나 靈肉이 渾然한 一體가 되는 男女關係란 理想이지 現實에선, 더욱이, 朝鮮같은 現實에선 얻기 어려운 幸福이다. 夫婦本位가 아니고 家長本位의 家族制度이며 經濟力도 家長 혼자서 움켜쥐고 있는 朝鮮에서 結婚이 自由主義에 뿌리박지 못한 것은 當然하지만 젊은이들의 立場에서 본다면 不幸한 環境이다. 理想的 結婚生活은 시방 現實로 보아서는 不可能에 가깝다. 配偶者의 選擇을 自由意思에 맡기더라도 먼발치로 꽃 보듯「미아이」라는 것을 해서 結婚하는 수밖에 別道理가 없는 것이 朝鮮社會다. 自由戀愛란 一種의 桃色遊戱가 되어 있는 것이 朝鮮社會다. 女性뿐 아니라 男子도 하루바삐「人形의 집」을 뛰쳐나와서 그대들의 손으로 빵 問題를 解決하기 위하여 싸우라. 生活의 勝利者만이 戀愛와 結婚에도 祝福받을 수 있는 것이다. 父母의 德으로 無爲徒食하는 靑春男女가 戀愛와 自由를 부르짖는다는 것은 우스운 自己矛盾이다.
   허지만 朝鮮은 아직도 日本帝國主義의 餘毒과 封建主義의 殘滓로 말미암아 靑春의 自由는 靑春의 힘만 가지고는 얻을 수 없게 되어있다. 戀愛란 生活의 威脅이 없어야 나올 수 있는 나비인데 꽃커녕 밭도 없는 白砂地에 나비가 나올 수 있을까보냐. 그러지 않아도 피를 빨려서 비쩍 마른 朝鮮에서 그나마 피는 - 經濟力을 意味한다 - 日本帝國主義의 殘存勢力과 封建主義者들의 血管에만 흐르고 있으니 靑春男女에게 戀愛하고 結婚할 餘力이 있을 리 없다. 이러한 經濟狀態를 그대로 두고서 靑春男女보고 自由戀愛를 하라면 私生兒를 많이 낳게 되거나 不然이면 日本帝國主義와 封建主義의 殘滓인 사람들의 며느리가 되든지 사위가 되는 수밖에는 없을 것 아니냐. 朝鮮民族의 生命力은 어느 때나 되어야 自由發展의 길이 열리는지 - .
   그러나 靑春은 젊었다는 이 한가지 事實만으로도 祝福받은 存在다. 日本帝國主義와 封建主義의 殘滓가 黃金과 地位와 權力을 독차지하고 있지만 그들은 이미 靑春의 고개를 넘은 落日이다. 그들이 아무리 發惡을 한댓자 時間의 흐름을 거꾸로 흐르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햄릿이 원수인 王의 走狗요, 戀人 오필리어의 아버지인 폴로니어스를 미친척하고 빈정대는 말「여보시오 당신이 만약 게(蟹)모양 뒤로 걸어갈 수 있다면 내 나이와 같아질 것이오.」
   그러나 朝鮮의 폴로니어스들도 歷史에 거슬려 뒤로 걸어가는 재주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무슨 짓을 다 해서든지 歷史의 車輪을 뒤로 돌리려 하는 者들이 있으니 걱정이다. 걱정은 걱정이지만 오래 오래 길게 길게 없어지지 않을 걱정은 아니다. 落日이 떨어지기가 안타까워 西海물을 피로 물들이고 발버둥쳐도 그들의 밤은 오고야 말 것이오 새로운 청춘의 太陽이 金빛 燦然히 東쪽 봉우리 위에 홰치며 솟을 것이 아닌가.
   젊은이들이여 하루바삐「人形의 집」을 나오라. 노라는 女子 혼자였기 때문에 그의 앞길에는 어딘지 모르게 孤獨이 있었지만 男女가 같이 손을 잡고「人形의 집」을 뛰어 나온다면 同伴者들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노라는「女子가 되기 前에 人間이 되기 위하여」過去를 淸算했지만 朝鮮의 젊은이들은 女性이고 男子간에 人民이 되기 위하여 人民 속으로 들어 갈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보다도 日本帝國主義와 封建主義의 殘滓를 父母로 모신 靑春男女에게 주고싶은 말이다. 朝鮮民族이 完全히 解放되어 人民을 위하여 人民의 손으로 人民의 나라를 建設하기 前에는 정말 戀愛의 自由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過去로 하여금 過去의 屍體를 묻게 하고 새로운 時代의 主人이 될 젊은이들은 스스로 生活의 터전을 닦고 주춧돌을 놓고 하기에 힘써라. 그들의 손으로 그들의 經濟生活을 建設하기 前에 自由戀愛를 貪하고자 하는 것은 또 한번 舊 勢力의 奴隸가 되기를 스스로 꾀하는 것이 될 것이다.
   勤勞하는 人民 속에서 自由로운 戀愛가 움터 나올 때 비로소 朝鮮에는 純粹한 生命이 싹틀 것이다.
   그리하여 靑春男女가 新綠처럼 지나간 三冬의 恐怖에서 完全히 解放되어 스스로 生活을 즐길 수 있는 社會가 될 때 朝鮮民族은 無限한 祝福을 約束받을 것이다. 綠陰이 무르녹을수록 꽃과 열매도 탐스러울 것이 아니냐.
   허지만 靑春은 아직도「日帝」와「封建」에 억눌려 冬眠하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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