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東錫 評論集

批判의 批判

이강기 2015. 9. 1. 17:52

批判의 批判


   - 靑年文學家에게 주는 글 -
                 - 金東錫

 

   文學을 위한 文學 - 이는 한 때 靑春의 誤謬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誤謬이다.


   허지만 그대들 靑春의 過誤가 文學의 範疇를 逸脫할 때 응당 社會的인 批判을 받아야 할 것이다.


   「美는 眞理고 眞理는 美다」한 浪漫詩人 키이츠처럼 藝術至上主義를 떠들고 實踐하는 限 그대들은「永遠한 時間을 向해 呼吸하는 文人」이 될 수도 있다. 허지만 僧舞의 멜로디나 黃土의 빛깔만이「朝鮮의 얼」이라고 盲信하는 나머지 그대들 純粹文學派를 빼 놓으면 나머지 文人은 다「文學精神을 蹂躪하고 다시 나아가 思潮와 政局에 對한 淺薄한 解釋과 躁急한 判斷으로 말미암아 直接間接으로 祖國과 民族의 解體와 破壞에 汲汲할 뿐」(靑年文學大會宣言)이라 斷을 내린 것은「思潮와 政局에 對한 淺薄한 解釋과 躁急한 判斷」이라 아니할 수 없다. 文學은 그대들이 主張하는 永遠性을 가져야하는 同時에 時代性도 가져야 할 것이 아니냐. 다시 말하면 純粹文學 卽 詩만이 文學이 아니오 時代文學 卽 散文도 文學인 것이다. 勿論 偉大한 文學은 詩와 散文을 渾然한 一體로 한 것이라야 하지만 로마는 一朝一夕에 되는 것이 아니다.


   過去 三十六年동안 朝鮮의 事實을 支配한 것은 日本帝國主義였기 때문에 時代文學이 成立하기가 困難하였다. 그래서 文學家들은 事實에서 逃避하여 남몰래 象牙塔을 建設하려했다. 散文을 主張하던 崔載瑞가「日帝」와 野合하고 詩를 固執한 鄭芝溶氏가 끝끝내 文學家의 節介를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 決코 偶然이 아니다. 東里와 玄民이 네가 무슨 純粹냐 내가 더 純粹지 하고 純粹文學을 가지고 說往說來하던 때가 있었지만 結局 절간으로 달아나 숨어버린 東里가 大東亞文學者大會에 나간 玄民보다 賢明했다. 다시 말하면「日帝」 밑에서는 純粹文學 卽 詩가 朝鮮文學의 主流이었던 것이다. 東里의 小說은 보다 더 直觀的이오 玄民의 小說은 보다 더 槪念的인 것을 比較해 보면 日帝時代에 누가 더 純粹했느냐 하는 것은 저절로 結論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朝鮮에는 八.一五의 革命이 왔다. 金東里氏는「朝鮮文學의 指標」(靑年新聞)에서 朝鮮文學의 現段階를「革命의 段階」라고 規定하였다. 그러면 시방 朝鮮에 있어서 革命이란 무엇이냐? 金東里氏를 비롯해 이른바 靑年文學家들이 두려워하는 프롤레타리아 革命의 段階가 아니라는 것은 同感이다. 아니, 事實이다. 封建地主와 親日勢力이 아직껏 朝鮮經濟의 主權을 쥐고 있는데 프롤레타리아 革命이 될 말이냐. 부르조아 데모크라시의 나라를 만들려 해도 朝鮮民族은 한참 陣痛을 겪어야 할 것이다. 입으로만 떠드는 自由와 平等이 아니라 정말 自由와 平等이 人民에게 許與되려면「日帝」와 野合해서 朝鮮人民을 搾取하던 封建地主와 親日勢力이 人民과 和光同塵하여 人民과 더불어 이마의 땀으로 사는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냐. 朝鮮民族이 解放되려면 僧舞를 잘 춘다든지 巫女圖를 잘 그린다든지 하는 것이 先決問題가 아니라「日帝」三十六年동안 壓迫과 搾取를 當하던 勞動者, 農民, 勤勞知識人 等 이른바 朝鮮의 人民이 먼저 物質的으로 自由로운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빵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니라.」하고 그대들은 主張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들 文學靑年들의 意識이지 決코 朝鮮民族의 精神은 아니다. 朝鮮民族은 시방 政治的 經濟的 自由를 달라는 것이지「日帝」에 빼앗기었던 땅이나 工場이 어찌되든 詩나 읊으고 小說이나 쓰겠다는 精神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대들이 하도 民族精神, 民族精神하고 念佛 외우듯 하니 말이다. 民族의 土地와 工場이 어찌되든 내버려두고「文學의 尊嚴」이니「文學의 市民」이니,「純粹의 精神」이니「個性의 文學」이니 하면서 무슨 大端한 民族精神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냐. 그대들의「宣言」말마따나「農夫는 農事에 盡力하고 商人은 商道에 誠實하며 工人은 工業에 邁進할 거와 같이 文人은 또한 文學分野를 지켜야 할 것이다.」 허지만 文學家 中에 朝鮮文學보다도 朝鮮民族의 問題를 더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文學에서 脫線한 것을 그대들은 흉보지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인 줄이나 아는지. 왜냐면 그대들은 民族보다도 文學을 위하는 나머지 民族的인 過誤를 犯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文學家同盟의 幹部들을 念頭에 두고「三千萬同胞가 全部 다 政治家로 나서야만 할 必要가 없음은 分明하였다」(宣言)한 듯 한데 文學家가 自己의 生命인 文學을 버리고 政治에 나섰다면 그들이 돈이나 벼슬 때문이 아니는 것이 明白한 以上 그들의 愛國心을 稱讚은 못할지언정 辱할 것인가. 靑年들은 率直하고 勇敢해야 할 것이다. 왜 떳떳이 主張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政治도 모르고 經濟도 모른다. 그것은 政治家에게 一任한다. 우리는 文學밖에 모르니 文學만 하겠다.」
라든지,


「우리는 藝術至上主義者다. 朝鮮民族의 政治的 또는 經濟的 運命이 如何히 되든지 우리는 文學을 하면 그만이다.」

 

   이렇게 主張하는 同志가 모여서 靑年文學家協會를 組織했다면 그 意氣야말로 壯하다 하겠다. 然이나「自主獨立促成」(綱領)을 위해서 純粹文學을 한다는 데는 그대들을 그냥 政治에 無知하다고만 할 것이 아니다. 그대들의 意圖조차를 疑心하지 않을 수 없다. 不然이면 그대들 背後에는 반드시 政治的 人形師가 숨어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純粹, 純粹 하지만 칸트는「純粹理性批判」에서

 

   Anschanungen Ohne inhalt sind blind(槪念이 없는 直觀은 장님이다.)

하였다. 그대들은 詩人의 感覺이나 直觀이나 氣分이나 感情이나 또는 第六感을 過信하는 나머지 民主主義가 어떠니 共産主義가 어떠니 떠들어대지만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格이라는 것을 自覺하라.


   「八.一五 以後 장마 물에 밀려드는 汚物과 같이 處處에 盛한채 오늘과 갖은 罪惡과 醜態 속에서 오히려 덜릴 줄 모르는 그 不汗黨들의 貌樣은 정말이지 우리를 가만히 있게 할 수 없지 않습니까」하고 崔泰應氏는「以北同志」에게 檄文을 썼지만「政局에 對한 淺薄한 解釋과 躁急한 判斷」이라 아니할 수 없다. 八.一五가 되자 親日派, 民族叛逆者까지도 共産主義를 표방하고 나섰던 것은 事實이다. 그러나 歷史는 濁流로되 肅淸의 作用을 한다. 詩人이어, 뮤즈만 信奉할 것이 아니라 歷史를 믿어라. 歷史를 모르고 歷史를 論하는 것은 詩도 모르고 詩를 論하는 것보다 잘 못이 더 크다. 文學家同盟의 幹部들은 歷史 속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或是나「日帝」가 最後發惡할 때 歷史 속에 뛰어들려다 몸을 더럽히고 만 春園이나 요한의 꼴이 될까 憂慮하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杞憂에 지나지 않는다.


   八.一五의 革命은 朝鮮民族을 解放했다. 바야흐로 地球는 통틀어「人民의 손으로 人民을 위한 人民의 世界」가 되려한다. 이러한 歷史의 흐름 속에 몸을 던진 文學家에겐 光榮이 있을지언정 恥辱이 있을 수 없다. 勿論 名譽나 地位나 權力을 바라고 政治에 投身한 文學家가 있다면 그런 者는 글뿐 아니라 身勢까지 망치겠지만......文學家의 生命인 文學까지도 버리고 民族解放의 戰士가 된다면 그런 사람은 行動만으로도 充分히 文學家의 榮譽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朝鮮의 知識人은「事實」을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그것은 儒敎的인 敎養이라든지 놀고  먹던 兩班階級의 버릇이라든지 하는 封建的인 것과「日帝」밑에 더럽힌 朝鮮의 事實을 憎惡하는 良心이 그들을 이렇게 샌님을 만든 것이다. 거기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鼻祖로 하는 西歐的 觀念哲學이 그들의 病을 不治의 것을 만들고 말았다. 靑年文學家 諸公은 이러한 것을 自己批判해 본 적은 없는가. 버트란드 러셀은 一九一九年에「神秘主義와 論理學」이라는 著書에서

 

「시방도 英國에서 유클리드를 學徒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챙피한 것이다 할 수밖에 없다.」

 

하였지만 더군다나 어느 나라보다도 物質的 發展이 急先務인 朝鮮에서, 二千年 前에 플라톤의 무리들이 散步하던 三次元的 觀念世界에서 彷徨하는 民族의 指導者然하는 인텔리겐챠가 行勢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朝鮮은 未開한 나라라 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木月처럼

 

내ㅅ사 애달픈 꿈꾸는 사람
내ㅅ사 어리석은 꿈꾸는 사람

 

하고 노래한다면 現實에서 超然한 抒情詩의 世界가 成立한다. 허지만 政治는 民族의 밥과 옷을 장만하려는 것인데 經濟學의 ABC도 모르고 아니, 唯物史觀을 意識的으로 排擊하면서 「純粹文學」을 가지고「獨立促成」을 하려는 것은 不純한 結果를 낳을 것이다. 意圖가 純粹하더라도 結果과 不純하면 그 意圖조차 疑心아니할 수 없다. 나무는 그 열매를 가지고 따진다 하지 않는가. 


   一言以蔽之하면 靑年文學家들은 理想에 불타는 나머지「理想」을「現實」이라 錯覺했다. 朝鮮의 現實은 決코 그대들의 哲學的(?) 또는 藝術的인 頭腦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대들은 濁流밖에서 超然히 濁流를 내려다봄으로 말미암아 濁流를 認識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지만 濁流는 濁流속에 있는 사람만이 정말 그 眞相을 把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들은 그대들만이 깨끗한 듯이 自負하고 있지만 歷史의 濁流는 그대들 神仙을 무지개와 더불어 남겨놓고 그대들이 全然 모르는 딴 方向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特히 金東里氏에게 一言하거니와 八.一五 以前에는 散文을 主張하던 사람이 몸을 더럽혔지만 八.一五 以後에는 詩를 主張하는 사람이 몸을 더럽힐 念慮가 더 많다는 것을 알라. 언젠가 金東里氏는 詩와 散文의 葛藤을 生理的으로 體驗하지 못한 사람은 現代文學者라 할 수 없다고「文章」에 쓴 듯 한 것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氏와 같은 觀念論者에게 이렇게 警告했다.

 

「現代처럼 動搖的인 時代에 公的인 諸問題에 關한 領域에서는 理論家에 지나지 않는 者는 다만 反動側에 있는데 不過하며 또 그러하니까 이러한 諸君은 決코 眞實한 理論家가 아니오 이러한 反動의 單純한 辯護論者일 것이다.」

 

   우리가 알기에 金東里氏는 詩人的 小說家지 政治家는 아니다. 그런데 氏가 靑年文學家協會라는「自主獨立促成에 文化的 獻身을 期」하는 政治團體를 組織指導한다는 것은 그 哲學的(?)인 意圖는 어찌 되었든 脫線的 行爲라 아니할 수 없다. 政治에는 進步냐, 反動이냐, 民主냐, 反民主냐의 길 밖에 없다.「純粹」라는 샛길이 있을 수 없다.「文學精神」이니「民族精神」이니 하는 抽象的 觀念을 가지고 政治理念을 삼는다면「反動의 單純한 辯護論者」가 되기가 십상팔구다. 不然이면 反動陣營에게 利用 當하고 있는 것이다. 日本이나 獨逸의 非科學的 文學精神과 民族精神이 그들의「祖國과 民族의 解體와 破壞에 汲汲할뿐」이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金東里氏가 잘 알 것이다. 스스로 朝鮮의 로오젠베르그가 되기를 꾀하는 氏에게 衷心으로 忠告하노니 固陋한 民族主義者들의「御用論客」이 되려거든 차라리 붓을 꺾고 칼을 잡아라. 그것이 차라리 右翼靑年다운 氣象일 것이다. 허지만 金東里氏는 右翼이 아니라고 主張한다. 그것은 氏의「右翼」이라는 槪念이 明確하지 않기 때문이다. 共産主義에다 民主主義를 對立시키는 氏의 政治的 水準으로 볼 때 그것은 無理가 아니다. 民主主義라는 槪念은 資本主義나 社會主義나 共産主義를 다 內包하는 外延이 대단히 넓은  따라서 漠然한 槪念이라는 것을 氏는 아는지 모르는지. 美國이 民主主義의 나라인 것도 事實이지만 蘇聯이 民主主義의 나라인 것도 事實이다. 그러므로 朝鮮에서 對立되고 있는 것은 民主主義와 共産主義가 아니라 封建主義 對 民主主義, 日本帝國主義 對 民主主義다. 그러기에 美蘇가 合作하여 朝鮮人民을 북돋아 民主主義의 朝鮮을 建設하려는 것이다. 朝鮮에서 시방 衝突하고 있는 것은 封建主義와 日帝의 殘滓가 聯合軍이 解放해 준 朝鮮人民을 다시 짓밟고 올라서려는 데서 생기는 衝突이다. 勿論 三八 以北에는 崔泰應氏가 憤慨하듯이 極左的 誤謬가 있었을 것이다. 허지만 革命期에는 一時的 混沌이 없을 수 없지 않은가. 그 混沌을 두려워해서 日本帝國主義와 封建主義의 秩序를 그대로 고스란히 維持하란 말인가. 허긴 어떤 親日 檢事는 시방도 - 解放의 軍隊 美軍下에서 - 八.一五 以前에 朝鮮獨立運動을 하다가 이른바 治安維持法에 걸린 사람들을 다시 잡아다 가둘 수 있다고 宣言했지만, 그래 이런 檢事가 主張하는 日帝의 惡法도 그대로 두라는 것인가. 金東里氏는

 

「民族文學樹立의 段階에 있어 特히 省察을 要하는 것은 民族精神이나 朝鮮的 性格과 이즈음에 所謂 <封建的> 惑은 <日帝的>이라는 것과에 對한 槪念的 混線이다. 祖國과 民族의 解體와 破壞를 企圖하는 時流論客들의 所見에 依하면 朝鮮사람이 가진 一切의 過去의 것이나 民族的 文化的 傳統에 屬하는 것은 모두다 <日帝的> 惑은 <封建的> 殘滓라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비라> 論客들의 企圖에 到底히 贊成할 수 없다.」(朝鮮文學의 指標)

 

라 하였지만 氏 自身이「槪念的 混線」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文學家協會」結成때 金珖燮氏가「文學家同盟」의 綱領을 反駁한 論旨도 金東里氏의「朝鮮文學의 指標」와 똑 같은 것을 보면 이분들은 다 詩人인지라 自己네의 藝術的(?) 哲學的(?) 觀念을 가지고「文盟」의 綱領을 曲解한 것이 分明하다. 勿論 兩氏는 그렇지 않다고 우길 것이다. 그들은 베이콘의 이른바 네 偶像 -「種族의 偶像」,「洞窟의 偶像」,「市場의 偶像」,「劇場의 偶像」-을 崇拜하기 때문에 眞實을 科學的으로 把握할 能力이 없다.「文盟」이 내 건

 

一, 日本帝國主義 殘滓의 掃蕩
二, 封建主義 殘滓의 淸算
三, 國粹主義의 排擊

 

이라는 綱領은 먼저 政治的으로 解釋하고 다음에 文學的으로 說明할 것이다. 文學家同盟은 그대들 文學靑年들 같은 藝術至上主義者의 團體가 아니라「自主獨立 促成에 文化的 獻身을 期」하는 團體라는 것을 알라. 日本帝國主義의 殘滓와 封建主義의 殘滓는 國粹主義者에게 阿附하여서 民族의 解放을 遲延시키고 있는 것이 朝鮮의 政治的 現實이다. 萬若 그렇지 않다고 主張하려거든 金珖燮氏나 金東里氏가 文學家協會니 靑年文學家協會니 하는 政治的으로 迂遠한 길을 取하지 말고 堂堂히 政治舞臺에 나서서 政治的 責任을 지고 言動하라. 그렇다고「文盟」에선 民族만 생각하고 文學을 置之度外하는 것이 아니다.

 

四, 民族文學의 建設
五, 朝鮮文學의 國文學과의 提携

 

라는 綱領이 있지 않은가.


   허긴「象牙塔」의 立場에서 批評한다면


   文學家協會는 國粹主義 文學家들의 集團이오 따라서 政治的으로나 文化的으로나 朝鮮의 自由發展을 妨害하고 있다. 勿論 그들은 石頭의 頑固派이기 때문에 自己네들의 役割을 自己批判할 能力이 없다.(그들의 愛國心만은 充分히 認定한다. 허지만 獨逸이나 日本의 指導者들은 愛國心이 없어서 民族을 滅亡으로 끌어넣었느냐. 두렵도다 눈먼 愛國心이여!)


   靑年文學家協會는 文學만 위하려다 民族을 害할 念慮가 있다. 왜냐면 그들은 單純하기 때문에 單純치 않은 사람들에게 利用 當할 念慮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百年戰爭」때 佛蘭西를 救援한 잔느 다르크의 입을 빌어 버나드 쇼翁은 民族보다 文學을 所重히 여기는 文學靑年에게 이렇게 警告했다.

 

「佛蘭西는 피를 흘리고 쓰러져 가는데 우리 아버지는 날보고 羊이나 지키라고 때리고 야단이었어요.」

 

   朝鮮에 있어서 시방 가장 時急한 것은 日本帝國主義 殘滓의 掃蕩과 封建主義의 淸算이다. 그러지 않고는 美國과 같은

 

데모크라시의 나라로 發展할 수는 없는 것이다. 金東里氏는 美國的인 데모크라시를 蘇聯的인 데모크라시보다 優越하다 하니 말이다.(事實은 蘇聯은 進步的 民主主義라야만 하지만, 卽 朝鮮엔 朝鮮現實의 反映인 民主主義라야만 하지만.)


   文學家同盟은 民族만 생각하다가 文學을 소홀히 한 느낌이 없지 않다. 文學家는 文學을 通하여 民族을 위하도록 努力해야 할 것이다.「機能에 應해서 勞動」한다는 原則에서 볼 때 詩人은 詩로 小說家는 小說로 評論家는 評論으로 日本帝國主義를 掃蕩하고 封建主義를 淸算하고 國粹主義를 排擊해야 할 것이다.


   허긴「日帝」밑에서 文學家가 그 機能을 發揮할 수 없었듯이 南朝鮮의 經濟的, 政治的 土臺가 依然히「日帝」와「封建」의 殘滓를 掃蕩하지 못하는 限「機能에 應해서 勞動」할 수 없다.「農夫는 農事에 盡力하고 商人은 商道에 誠實하며 工人은 工業에 邁進해야 할거와 같이 文人은 또한 文學分野를 지키어 各自의 作品世界에 充實함으로써 文學을 <神>이나 <黃金>이나 惑은 <黨派>나 其他어떠한 努力에도 隸屬시키지 않고 文學은 文學으로서의 尊嚴을 確保」하는 것이 좋은 줄 모르는 文學家가 어디 있겠느냐. 그러나 시방 朝鮮現實에선「商人은 商道에 誠實」할 수 있지만 文人은 文學에 誠實할 수 없다. 시방 서울서 文人이 文學만하고 밥을 먹을 수 있을까? 物質的 自由없이 精神的 自由는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靑年文學家 諸公보고 商道에 誠實하여 謀利를 한 然後에 - 어떤 詩人 모양 - 文學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朝鮮文學이 自由發展할 수 있는 나라가 되도록 實踐運動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 靑年文學家들도「文盟」에 參加하는 것이「文學의 尊嚴」을 確保하는 捷徑일 것이다.


   勿論 靑年은 精力이 남으니까 일부러 迂遠할 길을 取하여도 좋다. 그대들이「神」이나「黃金」이나 惑은「黨派」나 其他 어떠한 努力에도 隸屬하지 않고 純粹한 情熱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서로 갈려 올라가도 봉우린 하나
피 흘린 자욱마다 꽃이 피리라.
          - 朴斗鎭「새벽 바람에」

 

허지만 그대들이 詩나 小說을 쓸 동안 밥을 누가 먹여주느냐가 問題이다.

 

봉우리엘 올라서면 바다가 보이리라.
찬란히 트이는 아츰이사 오리라.

 

허지만 그 봉우리에 올라서기 前에 빛나는 解放의 아침을 보기 前에, 그대들이 굶어 죽을까 저어한다. 그 弱點을 알고「神」이나「黃金」이나「黨派」가 손을 뻗칠까 두려워한다.

 

어느 날에사
어둡고 아득한 바위에
절로 임과 하늘이 비치리오
        朴木月 -「임」

 

   「임」은 임만이 임이 아니다. 人民大衆이야말로 그대들의 임인 것이다. 그대들이 朝鮮의 人民的 詩人이 되는 날 이 모든 懷疑의 안개는 걷히리라. 그러나 그것은 一朝一夕에 되는 것은 아니다. 靑年文學家들이어 많이 苦悶하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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