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東錫 評論集

基督의 精神

이강기 2015. 9. 1. 17:58

基督의 精神

 

         - 金東錫

 

거짓 預言者를 경계하라. 그들은 羊의 탈을 쓰고 그대 앞에 나타난다. 허지만 속으로 그들은 피를 빨려는 늑대이니라.


            - 馬太福 第七章 十五節 -

 

 

   시방 朝鮮의 基督敎徒들은 - 新敎이건 舊敎이건 - 바리세가 되어 간다.「바리세」란 헤부리아 말로「分裂派」를 意味하며 메시아와 그의 再臨은 力說하면서 基督을 否定한 者들이다. 꼭 마찬가지로 시방 朝鮮의 基督敎徒들은 大韓과 그 復活만을 主張함으로 말미암아 民族統一에 分裂을 가져왔다. 또 現代의 基督이라 할 수 있는 愛國者들을 바리세가 로마의 代官 폰시오 필라투스 한테 모함했듯이 美軍政에다 中傷하고 있다. 朝鮮의 共産主義者들이 當한 日帝警察의 惡刑은 決코 예수가 짊어진 十字架 못지 않았다. 예수가 弱小民族이오 被壓迫民族이던 猶太民族을 위하여 荊冠을 쓰고 피를 흘린 革命家이었던 것과 진배없이 朝鮮의 共産主義者들도 民族解放을 위하여 스스로 나서서 거꾸로 매달리고 물을 먹고 가죽조끼를 입고 피를 흘린 革命家들이다. 이러한 愛國者들을 辱하는 韓人基督敎徒들은 基督의 精神을 背叛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앙드레 지이드는「田園交響樂」에서「新約」에는 빛깔의 觀念이 없다 했지만 그것은 예수나 그의 弟子들에게 藝術家的인 感覺이 缺如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新約」의 思想을 中世紀的인 非肉體的인 非感覺的인 것이라 斷定한 지이드, 그는 第二次大戰에 勝利를 얻은 佛蘭西人이었기 때문에 弱小民族이오 被壓迫民族인 猶太의 指導者 예수와 및 그의 宗徒들의 心理를 理解할 수 없었던 것이다. 로마兵의 槍劍이 번득이고 民族叛逆者 헤로드王의 아들들이 로마의 金鷲(취)를 믿고 得勢하여 石頭頑固派의 國粹主義者 바리세와 사두개와 權勢를 다투어 民族은 四分五裂되고 民族性은 나날이 더럽혀 갈 때 이 民族을 求해 보겠다고 나선 것이 救世主 예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때의 秘密警察과 拷問은 歷史上에도 有名한 것이다. 예수가 海外로 亡命하지 않고 끝끝내 國內에서 鬪爭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革命家的 情熱 못지 않은 卓越한 그의 知性 때문이다. 民族을 위해 한 놈이나 두 놈 죽이고 自己도 죽거나 海外로 달아나는 것도 愛國者이지만 民衆 속에서 民衆과 더불어 가진 屈辱과 가진 壓迫을 참아가면서 그 民衆을 사는 길로 이끌어 나가다가 마침내 十字架에 못 박혀 죽은 예수는 더 큰 愛國者가 아니겠느냐.

 

 

 「主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로마로.」

 

   이것은 셍키비치의「쿠오바디스」의 有名한 대목이지만 暴君 네로가 무서워서 로마를 避해 달아나는 베드로에게 주는 警告인 同時에 어느 때고 어느 나라에서고 海外 亡命客보다 國內 革命家가 더 愛國者라는 좋은 敎訓이기도 하다. 


   「新約」이 지이드의 말마따나 鮮明한 빛깔을 지니지 못한 理由는 그것이 羅馬兵 親羅派 民族叛逆者 앞에서 堂堂히 떠들어 댄 基督의 言語인 탓이다. 象徵! 極度의 象徵만이 놈들을 避하여 民衆의 가슴속으로 스며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新約」은 思想으로선 迂遠하고 間接的인「詩」가 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天堂」의 觀念만 하더라도 오늘날 無識한 基督敎徒가 말하듯 個人이 死後에 가는 곳이 아니라 猶太民族이 解放되어 잘 살 수 있는 歷史的 未來를 象徵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現在는 비록 弱하고 억눌린 民族이라도 반드시 幸福하게 살 수 있는 時代가 온다는 思想이다. 그래서 루낭은「예수傳」에서「天堂」을 이렇게 讚美했다.「天堂」의 思想은 世界史에 가장 빛나는 象像이다. 왜냐하면 黃金時代를 過去에다 두는 民族은 많았지만 未來에다 두고 기다린 民族은 猶太民族밖에 없다. 日本帝國主義의 强壓 밑에서 韓龍雲의 民族主義가「님의 沈默」이라는 詩集의 形式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듯이 예수의 被壓迫民族 解放思想은「天堂」이라는 象徵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一言以蔽之하면,「新約」은 詩다. 그러나 詩를 위한 詩가 아니다. 民族을 위한 詩였다. 따라서 極度로 知的인 詩다. 民族을 생각할 때 구름의 玉色이나 꽃의 唐紅이 抽象된 것이다. 그래서 지이드는「新約」엔 빛깔의 觀念이 없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新約」과 中世紀를 聯結(連結?)하는 것은 잘 못이다. 中世紀의 暗黑은 아리스토텔레스의 形式論理만 가지고 天堂을 構成하려다 肉體와 現實과 自然을 喪失한 暗黑이지만「新約」의 暗黑은 로마帝國의 말발굽에 짓밟혀 피를 흘리면서도 光明을 摸索한 暗黑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백합꽃이 어떻게 사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그들은 애써 일하지 않고 길쌈하지 않느니라. 그러나 내 너희들에게 이르노니 솔로몬의 영화로도 이 꽃의 하나만치 옷 입지 못하였느니라. 만약 하느님께서 오늘은 들에 있고 내일은 아궁이에 들어갈 풀을 이렇게 옷 입히실 진데 너희들은 얼마나 잘 옷 입히시겠느냐? 아 너희들은 믿음이 적은 자인저」(누가복음 XII, 7-28)

 

   이것을 한낱 貴族詩人의 觀照나 觀念論者의 超越이라고 본다면「新約」을 거꾸로 解釋하는 것이 되고 만다. 民族의 運命이 어찌되든 私利私慾에 눈이 어두워 진 무리들을 警戒하는 이 말을 그 때 그 現實과 遊離시켜서 文面만 가지고 解釋하는 것은 너무나 形式的인 誤謬이다. 이 대목은 오늘날 빈틈없는「人生의 批判」이 될 것이다. 民族의 指導者라 自稱하는 사람들이 돈 모을 궁리부터 한다. 말은 좋다. 政治에는 돈이 必要하다고. 허지만 그 돈은 政治家가 잘 먹고 잘 입고 個人的 權勢를 얻으려 사람을 買收하라는 돈은 아닐 게다. 몇 사람 自己들 만이 朝鮮民族을 解放할 수 있다는 驕慢한 생각에서(마음으로 겸손한 자는 진복자로다!) 가난한 民族의 돈으로 名譽와 地位와 權力을 꾀하는 者들이여「누가복음」第十二章을 다시 한번 읽어 보라.

 

 「너희들은 차라리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은 그대들에게 저절로 생기리다.」

 

   거듭 말하거니와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은「資本論」에 이른바「自由의 王國」을 意味하는 것이다. 朝鮮民族이 「機能에 應해서 勞動하고 必要에 應해서 消費하는」民族이 되게스리 만들어 놓는다면 그대들처럼 神通한 機能이 없는 양반들도 幸福하게 될 수 있을 것이 아니냐. 그러나 돈 모을 걱정보다 民族을 解放할 걱정을 하라고 예수가 가르치는 것이다. 허긴「하느님의 나라」로 引導한다고 얼토당토않은 大韓民國으로 끌고 가는 似而非 基督敎徒들이다. 


   聖堂이나 禮拜堂이 現實에서 超然한「象牙塔」이 된다면 그는 基督의 精神에 좀은 어그러지지만 그도 좋다. 허지만 서뿔리 神父나 牧師가 政治에다 발을 들여놓고서 信徒大衆을 過去로 떠다박찔른다면 基督의 精神을 全然 叛逆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大韓이 封建主義 朝鮮인 것을 그들은 모를 理 없건만 어쩌다「大韓人」들만 섬기느냐 말이다.


   基督의 精神은「마태복음」第 二十二章에 다음과 같이 要約되어 있다.

 

「마음과 영혼과 정신을 다 바치어 너의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
「너의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다시 말하면 宇宙를 無目的인 混沌으로 보지 않고 有目的인 調和라 믿어 疑心치 않으며 人間社會에 있어서는 愛他主義를 主張하는 것이다. 로마 帝國에게 蹂躪을 당하여 - 朝鮮이 日帝 밑에 그러했듯이 - 民族叛逆者와 謀利輩와 敗北主義者가 나날이 늘어가고 人民은 塗炭에 빠져 헤맬 때 그 속에서도 宿命論者나 虛無主義者가 되지 않고 民族의 解放과 宇宙의 攝理를 믿은 基督이 超人的인 信念의 所有者이었던 것은 否認할 수 없다. 그리고 그의 信念이 그가 가까이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옮아간 것은 事實이다. 그러나 單純한 動物的인 信念만 가지고는 猶太의 國內革命勢力을 形成할 수 없었을 것이니 예수의 革命家的 情熱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이시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 (「마태복음」27-48)하는 絶望의 소리가 일찌감치 그의 입에서 튀어 나왔을 것이다. 十字架에 못 박힌지 아홉 시간 만에야 苦痛을 참다못해 이 소리를 크게 부르짖은 예수는 徹底한 理性人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民族叛逆者 헤로드의 무리와 保守派 바리세들이 예수를 로마 軍政에 올가 넣으려고「로마 皇帝」에게 稅金을 바치는 것이 오롯한 짓입니까 아닙니까?」하고 물어 본 일이 있다.(마가복음XII 11). 그 때 形便으론 예수는「예스」라 할 수는 없고「노」라 할 수도 없었다. 왜냐면 民族을 로마의 羈絆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革命的 指導者로서 稅金을 바치는 것이 옳다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稅金을 바치는 것이 그르다 하면 그 놈들이 일러바쳐서 당장에 死刑을 당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돈 한푼을 가져 오라 해서 그 돈에 로마 皇帝의 肖像이 있는 것을 가리키며,「씨이저의 것은 씨이저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로 바쳐라」한 것이다. 


   이 말이 가지는 意味는 政治家로서 예수가 非凡한 頭腦를 가졌다는 것과 生命의 威脅을 느끼면서도 秋毫도 妥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一見 政治는 로마 軍政에 一任하고 自己는 하느님이나 모시는 宗敎家처럼 行勢한 예수의 하느님은 猶太民族의 自由를 意味한다는 事實을 잊어서는 基督의 精神을 把握할 수 없는 것이다.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어질라」한 것이 예수의 言行을 端的으로 表現한 것으로「늑대 속에 있는 양」같은 그로선 가장 賢明한 길이었다. 뱀같이 슬기롭지 못할진덴 로마兵이나 民族叛逆者나 政敵에게 넘어갈 것이오 비둘기처럼 어질지 못할진덴 被壓迫人民이 뒤따르지 않을 것이다. 弱小民族의 指導者란 참으로 어려운 運命을 타고 나왔다 할 것이다.
   現代精神은 科學을 土臺로 한다. 그러므로「新約」에 나오는 奇蹟이 문제꺼리다. 빵 다섯조각과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5,000名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빵의 奇蹟」(마태복음 14, 마가복음 6)을 어떻게 解釋할 것인가. 神父나 牧師는 이것을 그냥 그대로 덮어놓고 믿으라 한다. 말은 좋다, 奇蹟이라고. 그러니 奇蹟을 믿으라고. 그러나 奇蹟이란 무엇이냐. 배가 고프면서 배가 부른 척 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적은 數의 빵과 생선을 가지고 많은 數의 사람을 배부르게 하고도 더 많은 數의 빵과 생선이 남았다는 이「數」는 無視할 수 없는 것이다. 이 數字를 念頭에 두지 않고 奇蹟이니 믿어라 우기는 것은 예수를 魔術師라 主張하는 것이나 매일반이다. 우리는 눈앞에 魔術師의 魔術을 보고도 奇異히 여기지 않는 現代人이어든 二千年 前 일이랴. 그러므로 似而非 基督敎徒들이 어떻게 主張하든「빵의 問題」는 다음과 같이 解釋하는 것이 가장 옳은 把握일 것이다.


   예수는 自己 먹을 빵을 群衆에게 나누어주라고 弟子에게 命했다.
  
  「예수는 제자들을 자기한테 오라 해 가로되 나는 저 무리들을 가엽게 여긴다. 왜 그런고 하면 사흘동안이나 나를 따라다녔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까. 그러나 도중에서 기진해 쓰러질테니 굶주린 체로 돌려보내고 싶지는 않다.」(마태 15章32節)

 

   예수도 사흘 굶주린 끝이리라.「사람들이 하도 오고가고 해서 밥 먹을 틈도 없었기 때문에」宗徒들만 데리고 배를 타고 남몰래 사람 없는 곳을 찾아간 것인데(마가 6章 31-2) 사람들은 벌써 알고 險路를 뛰어서 앞질러 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나 이때나 民衆의 指導者란 이렇게 밥 먹을 時間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民衆과 더불어 사흘을 굶었을 것이다.「너의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가르친 예수가 굶주린 大衆앞에서 혼자만 먹을 수 있었겠느냐. 그래서 弟子에게 命하여 가지고 다니던 빵 다섯 덩어리와 생선 두 마리를 群衆에게 놓아 주라 한 것이었다. 예수가 아무리 現實을 無視한 詩人이었기로소니 빵 다섯 조각과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5,000명이나 되는 굶주린 大衆을 배부르게 할 수 있다고 믿었을 理는 萬無하다. 다만 굶주린 大衆을 앞에 놓고 혼자만 먹기가 딱하여 배를 타고 逃亡하다시피해서 사람 없는 곳을 찾아간 것인데 끝끝내 群衆이 따라다니니까 自己는 굶을 셈 잡고「良心」을 배불리기 위하여 自己의 빵과 생선을 群衆에게 나눠준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는 군중더러 풀 위에 앉으라고 명하고는 그 빵 다섯 덩이와 생선 두 마리를 그의 제자에게 주니 제자는 다시 군중에게 주었더니라.」(마태 4의19, 15의 35-6, 마가 6의 39-41)

 

   여기에서 비로소 奇蹟이 나타난 것이다. 예수 自身이 群衆 때문에 빵을 가지고도 食事를 하지 못하고 機會를 기다렸듯이 群衆 속에도 빵을 가지고도 먹지 않고 있던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 혼자만 먹고 남은 빵을 가지고 있던 者도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거기 모인 群衆은 - 예수까지도 - 혼자만 먹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것이 自然이다. 배고픈 것은 人間도 늑대에 진배없다. Homo Homini Lupus!(人間은 人間에 대하여 늑대)라는 터머스 헙스(토마스 홉스)의 말은 이런 境遇엔 참으로 眞理라 아니할 수 없다. 허지만 예수는 普通人間이 아니었다. 萬人의 師表가 될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배고픔을 참고 最後의 食量을 群衆에게 놓아 준 것이었다. 예수를 指導者로 알고 좇아 다니던 무리들이 이에 感動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보통 때 같으면 서로 덤벼 뺏고 야단이 날텐데 예수의 感化를 받아 - 「너희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서로 서로 謝讓할 뿐 아니라 되래 감추어 두었던 빵과 생선을 내 놓은 것이었다. 그래서「女子와 어린애들은 빼놓고」5,000名이나「良心」을 배부르게 하고 열 두 광주리가 남은 것이었다. 이것은 確實히 奇蹟이다. 猶太는 弱小民族이오 被壓迫民族이었기 때문에 利己主義로 흘러가고 甚한 者는 民族 叛逆者가 되어 가는데 거기서 굶주린 群衆이 서로 서로 먹을 것을 사양하고 감추어 두었던 것까지 誠出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奇蹟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奇蹟을 시방 朝鮮도 바라고 있다. 그러나 朝鮮의 基督敎徒들은「大韓」은 모시고 섬기면서 自己네들이 감추어 가지고 있는 物質은 民族 앞에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도 무슨 예수敎徒라는 것이냐. 基督의 精神을 저버리고 무슨 예수敎徒라 하는 것이냐. 말은 좋다.「사람은 빵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다.」고. 그러나「舊約」의 有名한 文句는 돈 많은 사람들을 訓戒한 말이지 가난하고 피를 빨린 勤勞大衆에게 神父나 牧師나 基督敎指導者들이 說敎할 때 利用하라는 말은 아니다. 스스로「빵」을 장만하기에, 아니 좋은 집과 財産을 장만하기에 汲汲한 者들이 어찌타 입으론 굶주린 大衆에게「빵」을 생각지 말라는 것인가. 特히 朝鮮의 土着 부르조아지들이 大衆의 意識을「빵」以外의 것에 쏠리게 하려는 것은 행여나 자기네들이 감추어 가지고 남몰래 먹으려는 빵과 생선을 뺏으려 덤빌까 겁내서다. 허지만 安心하라. 勞動者와 農民은「이마의 땀」으로 빵을 求하는 사람들이다. 그대들처럼 大統領이 되고싶거나 高臺廣室에서 놀고먹으려는 사람들이 아니니. 빵을 달라. 일을 해 줄게 빵을 달라. 이들의 이 至極히 謙遜하고 正當한 要求를 들어줄 수 없거든 아예 指導者될 생각을 말라.


   시방 朝鮮은 2,000년 前 猶太와 꼭 같다. 바리세와 사두개가 있고 軍政이 있고 헤로드의 무리가 있고 유다까지도 있다. 그러면 果然 누가 예수이냐?

 

   「너희들은 그들이 맺는 열매로써 그들을 알 수 있으리라.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며 엉겅키에서 무화과를 거두는 일이 있느냐. 그와 매 한가지로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좋지 못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느니라.」(마태 7의 16-7)

 

   시방 朝鮮에는 民族을 혼자 사랑하는 체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다. 特히「反託」을 云云하여서 가장 愛國者인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허지만 말만 가지고는 愛國者가 될 수 없을테니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기 前에는 그들이 무슨 나무라 斷定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 가운덴 뒤론 民族의 피땀을 긁어모으면서 우리 앞에 나타날 땐 羊의 탈을 쓰고 나오는 거짓 豫言者가 있다. 이 羊'의 탈을 쓴 늑대를 警戒하라.


   유다는 銀錢 서른 닢에 買收되어 자기의 스승이오 民族의 指導者인 예수를 팔아먹었다. 首弟子 베드로까지도 닭 울기 前에 세 번이나 예수를 否定했다. 그리하여 바리세와 사두개의 무리들은 예수를 로마 軍政官 폰시오 필라투스에게 넘겨 十字架에 못박기를 要求했다. 필라투스는 罪없는 예수를 死刑에 處하기는 차마 良心의 苛責를 받았다. 그러나 保守主義者들과 民族叛逆者들은 예수를 十字架에 못박기를 强要했다. 필라투스는 이 暴徒들이 무서워서(마태 27의 24) 예수를 그들이 하는 대로 내맡겼다. 그리하여 이「極烈分子」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붉은 옷을 입힌 뒤에 머리에다 가시 冠을 늘러 씌우고는「猶太人의 王」이라 놀리면서 얼굴에 침을 뱉고 다시 옷 벗기고 매질하여 골고다의 언덕으로 끌고 가서 十字架에 못박아 매달았던 것이다.


  日本帝國主義 밑에서 果然 누가 예수이었더냐. 머리에 가시 冠을 쓴 者 누구이며 붉은 옷을 입은 者 누구이냐. 그리고 이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이 예수를 十字架에 못박은 者 누구이냐.
   시방 大韓基督敎徒들은 2,000년 前 猶太의 基督만 내세우고 알짱 朝鮮의 基督을 否定한다. 그것은 바리세들이「舊約」의 메시아만 내세우고 눈앞에 있는 예수를 否定한 것이나 꼭 마찬가지 것이다. 우리는 弱小民族이오 被壓迫民族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弱小民族이오 被壓迫民族인 猶太를 解放하려다 놈들에게 붙잡히어 十字架에 못 박혀 죽은 革命家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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