基督의 精神
- 金東錫
거짓 預言者를 경계하라. 그들은 羊의 탈을 쓰고 그대 앞에 나타난다. 허지만 속으로 그들은 피를 빨려는 늑대이니라.
시방 朝鮮의 基督敎徒들은 - 新敎이건 舊敎이건 - 바리세가 되어 간다.「바리세」란 헤부리아 말로「分裂派」를 意味하며 메시아와 그의 再臨은 力說하면서 基督을 否定한 者들이다. 꼭 마찬가지로 시방 朝鮮의 基督敎徒들은 大韓과 그 復活만을 主張함으로 말미암아 民族統一에 分裂을 가져왔다. 또 現代의 基督이라 할 수 있는 愛國者들을 바리세가 로마의 代官 폰시오 필라투스 한테 모함했듯이 美軍政에다 中傷하고 있다. 朝鮮의 共産主義者들이 當한 日帝警察의 惡刑은 決코 예수가 짊어진 十字架 못지 않았다. 예수가 弱小民族이오 被壓迫民族이던 猶太民族을 위하여 荊冠을 쓰고 피를 흘린 革命家이었던 것과 진배없이 朝鮮의 共産主義者들도 民族解放을 위하여 스스로 나서서 거꾸로 매달리고 물을 먹고 가죽조끼를 입고 피를 흘린 革命家들이다. 이러한 愛國者들을 辱하는 韓人基督敎徒들은 基督의 精神을 背叛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主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것은 셍키비치의「쿠오바디스」의 有名한 대목이지만 暴君 네로가 무서워서 로마를 避해 달아나는 베드로에게 주는 警告인 同時에 어느 때고 어느 나라에서고 海外 亡命客보다 國內 革命家가 더 愛國者라는 좋은 敎訓이기도 하다.
「백합꽃이 어떻게 사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그들은 애써 일하지 않고 길쌈하지 않느니라. 그러나 내 너희들에게 이르노니 솔로몬의 영화로도 이 꽃의 하나만치 옷 입지 못하였느니라. 만약 하느님께서 오늘은 들에 있고 내일은 아궁이에 들어갈 풀을 이렇게 옷 입히실 진데 너희들은 얼마나 잘 옷 입히시겠느냐? 아 너희들은 믿음이 적은 자인저」(누가복음 XII, 7-28)
이것을 한낱 貴族詩人의 觀照나 觀念論者의 超越이라고 본다면「新約」을 거꾸로 解釋하는 것이 되고 만다. 民族의 運命이 어찌되든 私利私慾에 눈이 어두워 진 무리들을 警戒하는 이 말을 그 때 그 現實과 遊離시켜서 文面만 가지고 解釋하는 것은 너무나 形式的인 誤謬이다. 이 대목은 오늘날 빈틈없는「人生의 批判」이 될 것이다. 民族의 指導者라 自稱하는 사람들이 돈 모을 궁리부터 한다. 말은 좋다. 政治에는 돈이 必要하다고. 허지만 그 돈은 政治家가 잘 먹고 잘 입고 個人的 權勢를 얻으려 사람을 買收하라는 돈은 아닐 게다. 몇 사람 自己들 만이 朝鮮民族을 解放할 수 있다는 驕慢한 생각에서(마음으로 겸손한 자는 진복자로다!) 가난한 民族의 돈으로 名譽와 地位와 權力을 꾀하는 者들이여「누가복음」第十二章을 다시 한번 읽어 보라.
「너희들은 차라리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은 그대들에게 저절로 생기리다.」
거듭 말하거니와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은「資本論」에 이른바「自由의 王國」을 意味하는 것이다. 朝鮮民族이 「機能에 應해서 勞動하고 必要에 應해서 消費하는」民族이 되게스리 만들어 놓는다면 그대들처럼 神通한 機能이 없는 양반들도 幸福하게 될 수 있을 것이 아니냐. 그러나 돈 모을 걱정보다 民族을 解放할 걱정을 하라고 예수가 가르치는 것이다. 허긴「하느님의 나라」로 引導한다고 얼토당토않은 大韓民國으로 끌고 가는 似而非 基督敎徒들이다.
「마음과 영혼과 정신을 다 바치어 너의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
다시 말하면 宇宙를 無目的인 混沌으로 보지 않고 有目的인 調和라 믿어 疑心치 않으며 人間社會에 있어서는 愛他主義를 主張하는 것이다. 로마 帝國에게 蹂躪을 당하여 - 朝鮮이 日帝 밑에 그러했듯이 - 民族叛逆者와 謀利輩와 敗北主義者가 나날이 늘어가고 人民은 塗炭에 빠져 헤맬 때 그 속에서도 宿命論者나 虛無主義者가 되지 않고 民族의 解放과 宇宙의 攝理를 믿은 基督이 超人的인 信念의 所有者이었던 것은 否認할 수 없다. 그리고 그의 信念이 그가 가까이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옮아간 것은 事實이다. 그러나 單純한 動物的인 信念만 가지고는 猶太의 國內革命勢力을 形成할 수 없었을 것이니 예수의 革命家的 情熱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이시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 (「마태복음」27-48)하는 絶望의 소리가 일찌감치 그의 입에서 튀어 나왔을 것이다. 十字架에 못 박힌지 아홉 시간 만에야 苦痛을 참다못해 이 소리를 크게 부르짖은 예수는 徹底한 理性人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民族叛逆者 헤로드의 무리와 保守派 바리세들이 예수를 로마 軍政에 올가 넣으려고「로마 皇帝」에게 稅金을 바치는 것이 오롯한 짓입니까 아닙니까?」하고 물어 본 일이 있다.(마가복음XII 11). 그 때 形便으론 예수는「예스」라 할 수는 없고「노」라 할 수도 없었다. 왜냐면 民族을 로마의 羈絆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革命的 指導者로서 稅金을 바치는 것이 옳다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稅金을 바치는 것이 그르다 하면 그 놈들이 일러바쳐서 당장에 死刑을 당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돈 한푼을 가져 오라 해서 그 돈에 로마 皇帝의 肖像이 있는 것을 가리키며,「씨이저의 것은 씨이저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로 바쳐라」한 것이다.
예수도 사흘 굶주린 끝이리라.「사람들이 하도 오고가고 해서 밥 먹을 틈도 없었기 때문에」宗徒들만 데리고 배를 타고 남몰래 사람 없는 곳을 찾아간 것인데(마가 6章 31-2) 사람들은 벌써 알고 險路를 뛰어서 앞질러 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나 이때나 民衆의 指導者란 이렇게 밥 먹을 時間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民衆과 더불어 사흘을 굶었을 것이다.「너의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가르친 예수가 굶주린 大衆앞에서 혼자만 먹을 수 있었겠느냐. 그래서 弟子에게 命하여 가지고 다니던 빵 다섯 덩어리와 생선 두 마리를 群衆에게 놓아 주라 한 것이었다. 예수가 아무리 現實을 無視한 詩人이었기로소니 빵 다섯 조각과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5,000명이나 되는 굶주린 大衆을 배부르게 할 수 있다고 믿었을 理는 萬無하다. 다만 굶주린 大衆을 앞에 놓고 혼자만 먹기가 딱하여 배를 타고 逃亡하다시피해서 사람 없는 곳을 찾아간 것인데 끝끝내 群衆이 따라다니니까 自己는 굶을 셈 잡고「良心」을 배불리기 위하여 自己의 빵과 생선을 群衆에게 나눠준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는 군중더러 풀 위에 앉으라고 명하고는 그 빵 다섯 덩이와 생선 두 마리를 그의 제자에게 주니 제자는 다시 군중에게 주었더니라.」(마태 4의19, 15의 35-6, 마가 6의 39-41)
여기에서 비로소 奇蹟이 나타난 것이다. 예수 自身이 群衆 때문에 빵을 가지고도 食事를 하지 못하고 機會를 기다렸듯이 群衆 속에도 빵을 가지고도 먹지 않고 있던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 혼자만 먹고 남은 빵을 가지고 있던 者도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거기 모인 群衆은 - 예수까지도 - 혼자만 먹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것이 自然이다. 배고픈 것은 人間도 늑대에 진배없다. Homo Homini Lupus!(人間은 人間에 대하여 늑대)라는 터머스 헙스(토마스 홉스)의 말은 이런 境遇엔 참으로 眞理라 아니할 수 없다. 허지만 예수는 普通人間이 아니었다. 萬人의 師表가 될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배고픔을 참고 最後의 食量을 群衆에게 놓아 준 것이었다. 예수를 指導者로 알고 좇아 다니던 무리들이 이에 感動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보통 때 같으면 서로 덤벼 뺏고 야단이 날텐데 예수의 感化를 받아 - 「너희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서로 서로 謝讓할 뿐 아니라 되래 감추어 두었던 빵과 생선을 내 놓은 것이었다. 그래서「女子와 어린애들은 빼놓고」5,000名이나「良心」을 배부르게 하고 열 두 광주리가 남은 것이었다. 이것은 確實히 奇蹟이다. 猶太는 弱小民族이오 被壓迫民族이었기 때문에 利己主義로 흘러가고 甚한 者는 民族 叛逆者가 되어 가는데 거기서 굶주린 群衆이 서로 서로 먹을 것을 사양하고 감추어 두었던 것까지 誠出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奇蹟이 아닐 수 없다.
「너희들은 그들이 맺는 열매로써 그들을 알 수 있으리라.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며 엉겅키에서 무화과를 거두는 일이 있느냐. 그와 매 한가지로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좋지 못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느니라.」(마태 7의 16-7)
시방 朝鮮에는 民族을 혼자 사랑하는 체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다. 特히「反託」을 云云하여서 가장 愛國者인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허지만 말만 가지고는 愛國者가 될 수 없을테니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기 前에는 그들이 무슨 나무라 斷定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 가운덴 뒤론 民族의 피땀을 긁어모으면서 우리 앞에 나타날 땐 羊의 탈을 쓰고 나오는 거짓 豫言者가 있다. 이 羊'의 탈을 쓴 늑대를 警戒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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