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孟의 勤勞觀
- 金東錫
「上不在天, 下不在田」
知識階級의 本質을 이 以上 簡單明瞭하게 把握한 말은 古今東西에 없을 것이기 때문에 -. 封建社會의 貴族처럼 또는 商品社會의 資本家처럼 하늘에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農民이나 勞動者처럼 땅에나 工場에 있을 일이지 知識階級은 하필 그도 저도 아닌 새중간에 끼어 있느냐 말이다.
「民事는 허술히 할 것이 아니올시다. 詩에 가론 그대여 낮이면 갈대를 버히고
하였으니 百姓이란 먹을 것이 넉넉해야 마음이 넉넉하고 먹을 것이 넉넉지 못하면 마음도 넉넉지 못한 것이니 마음이 넉넉지 못하고 볼 말이면 마음이 비틀리고 꼬부라져서 무슨 짓은 안 하겠사오리까. 그런 것을 罪를 저지른 뒤에야 잡아서 형벌 한다면 백성을 그물 쳐 놓고 고기 잡듯 하는 것이 아니오리까.」
옳은 말이다. 李朝의 샌님들은 왜 이런 唯物論을 배우지 못하고 儒敎를「明哲保身」의 道具로만 썼던고. 허긴 丁茶山 같은 實學 - 요새 말로 하면 唯物論 - 의 大家가 없는 바는 아니로되 - .
「佛힐이 부르매 孔子가 가고자하니 子路 가로되 언젠가 先生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좋지 못한 일을 하는 者에겐 君子는 섞이지 않는 것이라고. 그런데 시방 佛힐이 中牟에서 叛亂을 일으키고 先生님을 請하니까 先生님 가시려함은 어찌된 셈입니까, 하니 孔子 가라사대 그렇다 내가 그런 말을 한 일이 있지. 허지만 내 어찌 됨박처럼 매달려 먹지 않고 살 수 있겠느냐.」(論語陽貨)
孔子도 됨박처럼 먹지 않고 대발려 있기만 할 수 없었거늘 其餘의 儒生이랴. 그러한 李朝의 샌님들이 勤勞階級을 쌍놈이라 壓迫한 것은 時代의 罪過로 둘리더라도 日本帝國主義 三十六年동안 그러했고 解放된 오늘날 오히려 그 고약한 버릇을 行使하려는 封建主義者가 있으니 事態는 딱하다.
「인제는 우리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데 하필 여덟 시간 勞動制냐, 열 시간도 좋고 스무 시간도 좋지 않느냐.」
그들은 이렇게 堂堂히(?)「八時間 勞動制」를 批判한다. 말은 좋다. 그러면 그대들은 왜 하루의 여덟 시간은 그만두고 한 시간도 힘드는 일을 하지 않느냐. 술 먹고 政談이나 하는 것은 勞動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야 할 것이다. 三千萬이나 되는 朝鮮民族이 맘과 힘을 合하여 하루의 여덟 시간 勞動을 한다면 三千里江山은 몇 해 안 가서 樂園이 될 것이 아니냐. 손발에 흙 묻히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시방 서울에 모여서 다 저 잘났다고 한마디씩은 떠들어대고 있다. 그래서 서울은 政治的으로도 全鮮을 通하여 제일 反動的이다. 知識人이 있는 대로 다 모인 서울이 政治路線을 바로 걸어가지 못하는 原因은 그들이「下不在田」이기 때문이다. 知識人은 손발을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衣食住에 있어서 事大主義일뿐 아니라 政治的으로도 갈팡질팡 영문을 모르는 것이다. 歷史란 언제고 손발을 움직이는 사람과 더불어 움직이는 것이다.
「子路가 孔子와 더불어 旅行을 하다가 뒤떨어졌더니 지팡이에 대광우리를 뀌어 어깨에 멘 老人을 만나 물어 가로되 老人께서는 우리 先生님을 못 보시었습니까 하니 老人이 가로되 손발을 움직이지 않고 五穀을 區別할 줄도 모르고 무슨 先生님이람, 하고는 지팡이를 꽂아놓고 김을 매는지라 子路는 공손히 서서 기다렸더니 老人은 子路를 데리고 자기 집에 가서 머무르게 하고 닭을 잡고 수수밥을 해서 대접을 하고 또 두 아들을 불러 인사하게 하였더라. 子路가 孔子를 찾아 뵈옵고 자초지종을 아뢰니 孔子 가라사대 隱者로다 하고는 子路로 하여금 다시 가보라 하니 老人은 간 곳 없더라.」(論語微子)
孔子는 自己를 無爲徒食者라 辱한 老人을「隱者」라 하였고 子路를 다시 한번 보낸 뜻은 한번 만나고자 꾀하였음이리라. 헌데 子路는 닭고기와 수수밥 얻어먹은 신세도 잊고 - 이불 속에서 활개치듯 - 「欲潔其身而亂大倫」이라고 그 老人을 그 老人 없는 데서 辱했으니 속이 좁은 인텔리라 아니 할 수 없다. 果然 孔子는 그 老人을 어떻게 生覺하였을까? 論語는 「子曰 隱者也. 使子路反見之」하였을 뿐이니 二千五百年 뒤 우리가 어찌 그 속을 알 수 있으랴. 다만 바로 前에 있는「長沮章」을 보아 推測할 따름이다.
「長沮와 桀溺이 나란히 밭을 갈고 있는데 孔子가 지나다가 子路를 시켜 나루를 묻게 하니 長沮 가로되 저 말고삐를 쥐고 있는 者가 누군가 하니 子路 가로되 孔丘올시다. 가로되 魯나라 孔丘인가. 가로되 그렇습니다. 가로되 그 사람이면 모르는 게 없다면서 나루도 알 터이지 함으로 桀溺에게 물어보니, 가로되 자네는 누군가. 가로되 仲由올시다. 가로되 그러면 魯나라 孔丘의 무리가 아닌가. 대답해 가로되 그렇습니다. 가로되 온 世上이 大河長江처럼 滔滔히 흐르거늘 누가 거기다 손을 댈 수 있으랴. 사람을 避하는 孔丘를 좇아 다니느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 사는 우리를 좇아 다니느니만 못하리라 하고는 씨 뿌린 데다가 흙을 껸지면서 모른 체 하는지라, 子路가 孔子께 아뢰니 孔子 憮然히 탄식하여 가라사대 그렇다고 새나 짐승과 같이 살수도 없지 않으냐 내가 人間들과 같이 살지 않으면 누구와 같이 살 것이냐, 天下에 道가 있다면야 나도 뭐 구태여 애쓰지 않으련다.」
孔子는 政治家였다. 知識人의 나갈 길은 技術이나 政治밖에 없다. 孔子는 陶淵明처럼 逃避하지 않고 하물며 屈原처럼 絶望치 않고 끝끝내 自己의 힘으로 中國社會를 經倫해 보겠다는 信念이 있었다. 이 一面이 孟子에 있어서는 더욱 强調되어 治國의 根本을 經濟政策에 두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은 오늘날 우리 인텔리겐챠도 본받아야 할 것이다.
精神勞動者! 말은 좋다. 허지만 더 많은 生産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오 歷史發展에 이바지하는 것도 없는 精神이 무슨 勞動이란 말인가. 機會主義者에 지나지 않는 知識人들이 新聞雜誌를 가지고 政治를 左之右之한 데서 朝鮮政界는 더욱 混亂에 빠진 것이다. 政黨背景 있는 新聞 두서너 개를 빼 놓으면 나머지 言論機關의 擧皆가 어찌도 요리 댓뚱 저리 댓뚱 하는지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될 지를 모르는 것이 서울 市民이다. 新聞을 보지 못하는 農夫나 勞動者들이 꾸준히 朝鮮의 갈 바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서울양반」들이 갈팡질팡하는 것은 먼저도 말했거니와 反動分子의 테러와 謀略策動이 가장 甚한 곳이 서울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더 큰 理由는 知識階級의 動搖가 甚하기 때문이다. 그들만 泰山喬嶽의 姿勢를 取할 수 있었더라면 朝鮮民族 統一戰線은 벌써 完成되었을 것이다.
孔子 가라사대 내 아무 말도 아니하련다. 子貢이 가로되 先生님이 아무 말씀을 안 하신다면 저 같은 놈은 무슨 소리를 하겠습니까. 孔子 가라사대 하늘이 무어라 말하더냐. 그래도 四時는 가고 百物은 生하나니, 하늘이 무어라 말하더냐.
無言實行! 이야말로 시방 朝鮮知識階級에게 주는 가장 좋은 敎訓일 것이다. 서울의 바람이 너무 세서 바르게 姿勢를 取하여 行動할 自信이 없는 인텔리겐챠는 農村으로 가라. 또는 工場으로 들어가라. 거기서 한 三年 默默히 있다면 반드시 朝鮮民族의 指導者가 될 素質이 있다고 認定받을 것이다. 그 때엔 벌써 나쁜 意味의 인텔리 根性도 淸算하였을 것이 아닌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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