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東錫 評論集

濁流의 音樂 - 吳章煥論

이강기 2015. 9. 1. 18:08

濁流의 音樂


      - 吳章煥論 -
                     - 金東錫

 

 

   아직까지 人類의 歷史는 濁流였다. 더럽힌 것은 가라앉고 처지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한번도 맑아보지 못한 것이 人類의 歷史다. 히틀러, 무쏠리니, 裕仁의 무리들이 흐려 논 물은 아직도 흐린 채로 흘러가고 있다. 주검이 풍기는 菌으로 말미암아 한 때 人類의 心臟이 크게 뛰던 歐羅巴엔 肺病, 黑死病, 天然痘, 디프테리아가 爛漫하여 美國의 食量을 다 갖다준대도 歐羅巴는 굶어죽게 되었다 한다. 音樂의 나라인 獨逸에서도 이젠 音樂의 音樂인 모차르트가 한 조각 빵만 못하리라. 빵을! 빵을! 아 빵을 다오! 歐羅巴의 人民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그러면 朝鮮의 人民은? 三十六年동안 아니 五百하고 三十六年동안 한번 크게 외쳐 봤을 뿐 말을 못한지 너무 오래기 때문에 이젠 마음놓고 소리 치라 해도 무서워서 말을 못하게 되었다. 굶으면서도 배고프다 아우성치지 못하는 人民들 - 누가 그들의 소리를 代辯할 것이냐. 그들의 소리는 그들 自身의 말밖에는 없다. 당장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는 그들의 欲求는 그들 自身이 밥과 옷을 달라 부르짖을 때 가장 切實한 소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詩나 小說이나 戱曲은 밥과 옷을 장만한 然後래야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방 歷史의 主流는 行動이지 말은 아니다. 行動하는 사람만이 現代史의 主人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人類의 歷史는 濁流다. 파시스트의 총칼에 쓰러진 屍體를 품고 흘러가는 이 피비린내 나는 大河長江 - 맑아지려면 앞으로도 몇 해가 더 걸릴는지, 더군다나 原子爆彈을 가지고 第 三次 大戰을 일으켜서 가뜩이나 흐린 물을 더 휘저어 보려고 虎視耽耽한 무리들이 있으니 걱정이다. 걱정은 걱정이지만 汚機와 混濁은 결국 가라앉아 뒤에 처지고 말 것이며 人類의 歷史는 언제까지든지 濁流로만 있을 것이 아니다.


   허지만 人類의 歷史는 濁流다. 過去 三十六年의 朝鮮歷史는 下水道같은 歷史였다. 더러운 것이 겉으로 떠 올라와 날치던 歷史, 헌신짝이나 떠돌아다니던 시궁창, 물고기들은 물 속에 숨어버린 歷史, 아아 이 시궁창이 겨우 흐르기 시작했거늘 어찌 一朝一夕에 맑은 江을 바랄 수 있으랴.

 

저기 한줄기 외로운 江물이 흘러
깜깜한 속에서 차디찬 배암이 흘러.....
싸탄이 흘러...............
눈이 따겁도록 빠알간 薔薇가 흘러........

   이렇게 吳章煥은「할렐루야」에서 노래했지만 이보다 훨씬 폭이 넓고 물이 거세고 濁한 것이 歷史다.


   그러나 朝鮮詩人 가운데서 章煥만치 歷史의 濁流를 잘 表現한 詩人도 없다. 起林이 가장 把握力이 있는 詩人이로되 그의 論理가 너무 날카로워 歷史를 오리고 저며서 超現實派의 그림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芝溶은 너무 맑다. 송사리 한 마리 없게스리 너무 맑다.


   朝鮮처럼 物質的으로 가난하고 詩人이 많은 나라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이 나비처럼 연약하다. 아름답지만 弱하다. 歷史는 濁流가 되어 滔滔히 흘러예거늘......江언덕에 핀 꽃에 누어 떠가는 구름이나 바라다보는 詩人들 - 그 구름을 歷史의 흐름으로 錯覺하지나 말았으면 좋으련만. 泰俊, 源朝, 南天, 林和를 文壇名簿에서 除名處分한「藝術部落」의 詩人들 - 그들은 꽃다운 胡蝶이다. 濁流 속에서 몸부림치는 물고기를 비웃는 나비들이여! 두고 보라. 時代는 어언간에 흘러 가버리고 그대들은 시들은 꽃 위에서 白日夢을 깨리니 때는 이미 늦어리라. 아름다운 胡蝶.

 

깜안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얇은紗 하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그들의 춤은 芝薰의「僧舞」가 如實히 表現했다. 나비의 춤은 아름다운지고.
   허지만 人類의 歷史는 濁流다. 章煥의 詩가 芝薰의 詩처럼 맑지 못한 것은 歷史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저 멀리서 또 이 가차히서도 나의 五腸에서도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

   章煥은 달의 女神(Artemis)에게 이렇게 獻詞한 적이 있지만 章煥 自身이「개울물」속에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自己 속에서도 개울물이 흐르는 것을 意識할 수 있으랴.「藝術部落」의 詩人 같으면「花蛇」나 좇아 다니었을 것을. 꽃의 빛깔과 냄새에 醉한 나비들, 그들이 꽃다님같은 배암의 뒤를 좇고 있을 때 章煥은 歷史의 濁流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에 荊冠쓰기를 自願하는이 어찌 골고다의 靑年 預言者 뿐이었을까.」(人文評論 II 2)

「彷徨하는 詩精神」이라는 散文에서 章煥은 이렇게 宣言했지만 章煥이라는 물고기의 몸부림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나비의 춤보다는 더 괴롭고 슬펐을 것이 아니냐. 斗鎭의「墓地頌」을 읽고 좋다 하면서

「詩란 사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이다.」

한 章煥. 崔載瑞나 兪鎭午가 大東亞文學者大會에 갔다왔다 하던 때의 이야기다. 章煥은 빵을 求하려 勞動판에 들어갔다가 筋膜炎에 걸려서 - 시방은 腎臟을 앓는다지만 - 健康이 좋지 못했는데 象牙塔 二號에 실린「鍾소리」를 썼다. 發表할 수 없는 詩를 쓴 章煥, 詩에도 地下運動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章煥인지라 八.一五의 解放이 그로 하여금「病든 서울」같은 詩를 낳게 하였다. 解放 後 詩가 쏟아져 나왔지만 이 詩만치 時代를 잘 읊은 詩는 없으리라. 章煥은 이 한 篇으로도 足히「濁流의 詩人」이라 할 수 있다.

무거운 쇠사슬 끄으는 소리 내 맘의 뒤를 따르고
여기 쓸쓸한 自由는 곁에 있으나

풋풋이 흰 눈은 흩날려 里程標 썩은 막대 아래 고히 듣히고
드런 발자국 함부로 찍혀
오즉 치미는 미움 낯선 집 울타리에 돌을 던지니 개가 짓는다.
     -「小夜의 노래」

     이렇게 壓迫感을 이기지 못하던 章煥, 아니 朝鮮人民, 그 쇠사슬이 끊어진 刹那의 朝鮮 歷史를 가장 잘 노래한 것이「病든 서울」이다. 章煥은 언제나 時代의 江물 속에 몸을 잠그고 있었기에 이러한「濁流의 音樂」을 把握, 表現할 수 있었던 것이다.
   章煥의 詩를 病的이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朝鮮의 歷史가 病들었기 때문이오 意識은 存在의 反映인 것을 알라. 尙鎔의「南으로 窓을 내겠소」같은 詩를 健全하다고 보면 큰 過誤를 犯할 것이다.

「새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공것은 무척 좋아하는군. 새노래를 어떻게 공으로 듣는단 말인지」

하던 章煥의 말이 생각난다. 事實 有閑階級이 아니고는 새노래를 공으로 들을 수 없을 것이요, 尙鎔이 農夫라면 또 모를까......鍾路 한 복판에 꽃가게를 벌려놨댔자 새가 와서 공으로 노래 부를 것 같지 않다. 尙鎔도 그의 號 말마따나 달빛 비낀 언덕에서 꿈꾸는 한 마리 胡蝶인저!(事實은 그는 나비도 아니다.)


   章煥의 詩가 音樂的인 것을 論難하는 사람이 있다. 音樂的인 것은 現代的인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그렇다. 數字的인 思想이 가장 現代的이다. 허지만 詩는 本質이 宇宙를 한 개의 흐름이요 律動이라 보고 동시에 그렇게 把握하는 것이기 때문에 詩는 어느 時代고 歷史의 音樂이지 토막토막 잘라 논 論理는 아니다.「雪夜」의 音樂을 버리고 起林의 主張대로 繪畵的이 되려다 詩를 喪失한 光均, 그는 그래도 낫다. 숫째 音樂을 無視하고 經濟學 論文 쓰듯이 詩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니 꼭 그래야만 된다고 우기는 自稱 푸로 詩人들. 정말 經濟學을 안다면 그들은 그 詩를 쓰고 있지는 않을터인데, 詩를 끝끝내 固執하려거던 章煥의 詩 - 濁流의 音樂을 배워라. 푸로詩란 農民이나 勞動者가 쓰는 詩를 일컬음이요 農民이나 勞動者가 詩를 쓰려면 시방 朝鮮의 生産力을 가지고는 당장에는 어려울 것 같다. 다시 말하면 農民, 勞動者들도 그대들처럼 冊읽고 글을 쓸 수 있는 나라 卽 社會主義의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냐. 부르조아 民主主義의 革命도 完遂못한 이 땅에서 社會主義 社會의 詩가 나올 턱이 없다. 하물며 意識은 存在보다 하루 뒤떨어진다 하거늘.


   人類의 歷史는 濁流다. 그러나 맑아야 하는 것이 詩人이다. 참 어려운 노릇이다.
   擧世皆濁이나 我獨淸하고 한 것이 어찌 屈原 한 사람의 恨歎이랴. 過去 三十六年 동안 詩人이 春園이나 玄民처럼 이른바 現實 속에 섞였더라면 朝鮮의 詩가 어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라. 푸로 詩人이 됐다가「大東亞詩集」을 쓴 金龍濟의 꼴이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朝鮮詩壇을 死守한 月桂冠은 象牙塔派 詩人 芝溶의 머리에 얹어놔야 하지만, 스스로 맑고 濁流 속에 있으면서 濁流를 노래한 詩人으로는 章煥을 엄지손가락 곱아야 할 것이다. 事實 앞으로 芝溶은 어려울 것이다. 章煥의「指導者」니「나의 길」이니 하는 詩는 詩로선 덜 됐지만 章煥이 언제고 濁流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음을 말하며 따라서「病든 서울」같은 傑作詩가 앞으로도 쏟아져 나오리라 期待할 수 있다.
   그러나 나비의 춤도「고요하고 슬픈 人間性의 音樂」임에는 틀림없다. 章煥 自身도 때로 나비가 된다.

 

고운 달밤에
상여야, 나가라
처량히 요령 흔들며

상주도 없는
삿갓가마에
나의 쓸쓸한 마음을 싣고

오늘밤도
소리 없이 지는 눈물
달빛에 젖어

상여야 고웁다
어두운 숲 속
두견이 목청은 피에 적시여..........
       -「喪列」

濁流 속에 있으면 散文的이 되기 쉽다. 그러니 詩人은 때로 江언덕 꽃에 쉬어 새노래며 구름을 즐기는 것도 좋다. "The Last Train" 만이 章煥의 노래가 아니다.

더욱이 인제야말로 봄이 오려한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李相和의「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朝鮮 最高의 詩로 推戴한 章煥. 아아 그때 봄은 좀체로 올 것 같지 않았더리니 - 八.一五 前해 겨울「心園」이란 茶房이었다 - 인제 진정 봄이 오고야 말련다. 얼어붙었던 朝鮮文壇도 어름이 풀려 흐르려 한다. 실날같던 朝鮮의 詩, 그나마 마저 서리를 맞고 얼어붙었던 朝鮮의 詩가 大河長江을 이룰 때가 반드시 오리라. 그것은 이 봄보다 더 먼 봄이기는 하지만 -.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해라 말을 해다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 답답한 三千萬 朝鮮人民의 마음을 마음껏 노래할 때는 왔다.「朝鮮의 詩壇에서는.....永遠히 集團的인 한 種族의 커다란 울음소리나 자랑을 노래하지 못할 것인가」(「彷徨하는 詩精神」)한 章煥, 이제야말로 그대의 커다란 울음소리와 자랑을 노래할 때는 왔다.「濁流」- 나비들은 歷史를 이렇게 본다 - 「濁流」를 마음껏 노래하라. 朝鮮詩壇이「濁流의 音樂」을 낳을 수 있다면 章煥이 누구보다 期待되는 바 클 것이다.(끝)


'金東錫 評論集' 카테고리의 다른 글

禁斷의 果實 - 金起林論  (0) 2015.09.01
詩를 위한 詩 - 鄭芝溶論  (0) 2015.09.01
金東錫의 "藝術과 生活"을 옮기고 나서  (0) 2015.09.01
基督의 精神  (0) 2015.09.01
孔孟의 勤勞觀  (0) 2015.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