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東錫 評論集

禁斷의 果實 - 金起林論

이강기 2015. 9. 1. 18:11

禁斷의 果實

 

     - 金起林論

            - 金東錫

 

   그리하여 그들 둘은 눈을 뜨고 그들이 벌거숭이라는 것을 알았느니라 - 創世記

   여기 絶世의 美人이 있어 얼굴도 가리고 世上없는 男子의 求婚도 다 거절한다면 아니 그 女子를 본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이 女子가 과연 美人인지 아닌지를 누가 證明하느냐. 金起林이 바로 이러한 美人이었다. 그의 裸體커녕 얼굴을 본 者도 없으리라.
   그리하던 起林이「우리들의 八月로 돌아가자」라는 詩를 가지고 얼굴을 나타내자 사람들은「美人」이라고 感歎했다. 獨守空房에서 남몰래 窓틈으로 내다보며 이 男子 저 男子 지나가는 男子들을 批評하던 美人이 窓문을 열고 내다보았을 땐 무슨 曲折이 있을 게다. 解放!그렇다. 8월15일의 感激이 온 世上을 白眼視하던 이 차디찬 美人을 뜨겁게 한 것이었다.


   長詩「氣象圖」와 시집「太陽의 風俗」에도「詩」가 없는 것은 아니로되 起林은「詩」를 남부끄런 것으로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리려고만 앨썼다.

헐덕이는 들우에
늙은 香水를 뿌리는
敎堂의 녹쓰런 鍾소리.

   이는 정녕 美人의 소리로되 美人은 얼굴을 가리고 있다.

삐뜰어진 城壁우에
부러진 소나무 하나....

   이것은 틀림없이 문틈으로 내다 본 風景이다.「氣象圖」가「世界의 아픔」「市民行列」「颱風의 起寢時間」「자최」「病든 風景」「올빼미의 呪文」「쇠바퀴의 노래」의 여덟 폭 그림이로되 그것을 짠 美人의 얼굴은 想像할 수도 없는 사라센의 비단幅 같다.


   모더니스트의 그림은 그러한 것이라고 우길 사람이 있다면 피카소의 그림을 보라. 데포르마숑을 통해서 보이는 西班牙人의 赤裸裸한 情熱 -「情熱」이 語弊가 있다면「人間」이라고 하자. 論理를 가지고는 幾何學的 圖形은 될지 몰라도 繪畵가 될 수 없다. 하물며 詩는 繪畵가 아닌 것을.


   하지만 片石村은 詩는 繪畵라고 主張한다.

 

「聽覺의 文明은 <騎士 로맨스>나 民謠와 함께 흘러가고 視覺의 文明, 觸覺의 文明이 擡頭해서 地上의 面貌를 一變시켰다. 그러다가 立體派의 理論에 依해서 더욱 高調된 造塑의 精神은 다름이 아니라 19世紀 末葉 以來 人類를 掩襲해 온 不安動搖 속에서 安全을 찾는 다시 말하면 造形藝術로서 固定하려는 意慾의 發現이 아닐까?」(「詩壇의 動態」人文評論)

   이리해서 모더니스트 片石村은 金光均의「瓦斯燈」을「成年의 詩」라 추키고 吳章煥의「獻詞」를「靑年의 詩」라 깎아 내렸다.「瓦斯燈」의 詩篇들이「소리조차를 모양으로 飜譯하는 奇異한 才操」의 産物이로되 金光均씨가「雪夜」의 音樂을 잃었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 그러한진 또 모를 일이지만 그만큼「詩」를 喪失했다. 詩가 繪畵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벌써 레씽의「라오콘」이 解決지은 問題가 아니냐. 起林이나 光均의 詩가 繪畵的이 되는 原因은 論理的이 되려했기 때문이다. 宇宙는 흐르는 建築이요 四次元的인 것인데 流動하는 萬象 속에서 二次元的인 繪畵나 三次元的인 立體를 言語로써 構成하려는 것은 現代人이「論理」를 過信했기 때문이다. 起林은 어떤 親한「詩의 벗」에게 「너는 저 韻文이라고 하는 禮服을 너무나 낡았다고 생각해 본 일은 없느냐? 아무래도 그것은 벌써 우리들의 衣裳이 아닌 것 같다.」(太陽의 風俗) 하였지만 韻文아닌 글 卽 散文이 現代를 代辯하기는 하나 그만큼 藝術을 喪失하는 것도 計算에 넣어야 할 것이다. 하물며 論理的 散文이 詩가 될 수 있을까보냐. 論理로 詩를 만들 때 言語의 曲藝가 되어버린다.

날마다 黃昏이 채여주는
電燈의 勳章을 번쩍이며

   이 얼마나 놀라운 才操냐. 그러나 結局 그것은 才操에 지나지 않는다. 날이 저물면 전깃불이 들어온다는 것을 論理的으로 뒤집었을 뿐, 美人은 종시 얼굴을 나타내지 않는다.「氣象圖」가 帝國主義의 批判인 것은 事實이지만 레닌의「帝國主義論」같은 本格的인 批判이 아니오 新聞記事를 가지고 몇 번 재주를 넘은 遊戱的 批判이다. 그것을 片石村 자신이 意識치 못했을 理 없다.

「대체 子正이 넘었는데 이 미운 詩를 쓰노라고 벼개로 가슴을 고인 動物은 하느님의 눈동자에는 어떻게 가엾은 모양으로 비칠까?」

   따지고 보면 片石村은 禁斷의 果實을 따먹은 知性人이라 詩마다 自意識이 퉁그러져 나온다. 詩人으로서 詩를 否定하는 그는 詩를 科學이라고 우겨대기도 했다. 數字가 없는 科學, 方程式이 없는 科學은 自然科學은 아닐 게다. 그러면 그의 詩는 무슨 科學에 屬하는 건지. 自意識의 科學이라고나 할까.


   要컨대 金起林의 詩가 純粹하지 않는 것은 自意識의 雜音이 너무 많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起林은 詩가 무엇인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詩에 滿足할 수 없었던 것이다. 「詩」란 발가벗고 에덴동산을 散步하는 아담과 이브다. 善惡果를 따먹은 現代人이 自己를 송두리째 내 뵈는 詩를 쓰기란 至極히 困難한 일이다.


   그러나 8월15일의 解放이 奇蹟을 낳았다. 美人이 드디어 얼굴을 내밀었다.「우리들의 八月로 돌아가자」는 片石村이 쓸려고 맘먹으면 언제나 쓸 수 있는 詩인데도 점잖은 體面에 知性을 自負하느라고 가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인젠 體面을 차릴 때가 아니다. 또 진정 科學을 내세우려거던 詩를 아예 버리고 科學者가 되라. 또 詩를 繪畵라 主張하는 것도 詩를 위해선 害롭다.「意味의 音樂」이 詩의 本質일진덴 音樂을 無視하는 詩가 꾸준할 수 있으랴. 언젠가 李源朝氏가「詩의 故鄕」이라는 片石村에게 주는 글에서

 

「나는 現代詩를 생각할 때 前世紀에서 받은 것도 없고 다음 世紀에 넘겨줄 것도 없는 한 개의 斷絶된 狀態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언젠가 <現代詩의 混亂>이란 작은 글 가운데서 現代詩가 諧調를 잃어버린 것은 現代人이 感情의 調和를 가지지 못한  때문이라고 한 일이 있습니다마는 諧調란 것이 본래 音樂的인데 比해서 現代詩가 너무나 繪畵的인 이미지를 追窮한 나머지 마침내는 韻文이 아니어도 좋다는 汎濫한 結論에까지 이르지 않았는가 합니다.」


「片石村兄! 詩의 故鄕은 兄이 앞서 부르짖던 모더니즘의 군호가 아니라 우리 여러 사람이 다 같이 느끼는 이 心情의 世界 - 거기는 <共同墓地>이기도 하고 <못 가>이기도 한가 봅니다」(文章)

 

라고 한 것은 正鵠을 얻었다 하겠다.
   片石村이 音樂에 滿足할 수 없는 理由는 事實인즉슨 딴 데 있다. 그는 언제고 行動人이 되고싶어 하는데 音樂이 行動의 原理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난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자넨 또 무엇땜에 예까지 왔나?」
「괴테를 찾아다니네.」
「괴테는 자네를 내버리지 않았나?」
「하지만 그는 내게 생각하라고만 가르쳐 주었지 行動할 줄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네. 나는 지금 그게 가지고 싶으네」(氣象圖)

   日本帝國主義의 彈壓 밑에서도 이렇게 行動하고 싶어했거늘 하물며 昨今의 片石村이랴. 허지만「우리들의 八月로 돌아가자」는 知識人이 느낀 幻滅의 悲哀였다. 詩는 늘 앞을 바라보아야지 뒤돌아다보면 돌이 된다는 이야기처럼 危險하다. 八月의 興奮을 가지고 朝鮮의 革命을 完遂할 수 있다고 생각할 片石村이 아니지만 詩人으로선 그럴 법도 한 일이다. 때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라. 論理와 體面을 가지고 詩가 될 수는 없다.


   詩로선 純粹하지 못했던 片石村이 人間으로선 가장 純粹한 사람의 하나였다는 데는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精神을 차리는 그의 知性이 가르친 바일 것이다. 이리해서 知性은 그에게 뗄 수 없는 本質이 되어버렸다. 詩와 科學 - 이 矛盾을 어떻게 止揚하느냐 하는 것이 앞으로 片石村이 걸머진 課題일 것이다.


   「新朝鮮報」에 12월29일부터 사흘동안 連載된 長詩 - 事實은 그렇게 길 것도 없지만 -  「世界에 외치노라」는 詩와 科學의 問題를 한번 다시 되풀이 한 것 같은 印象을 준다. 아니 事實로「氣象圖」의 再版이다. 勿論 그때보다 더 切實하게스리 시방 世界는「帝國主義」의 威脅을 느끼고 있으니까 이 怪物을 批判하는 것은 時代的 要請이다. 하지만,

 

  帝國을 떠받치던 骸骨의 서까래도 기둥도「화로불에 던져라 어서 사뤄버려라」했으니 이「화로불」은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는 모르되 戰爭은 벌써 끝나지 않았느냐.

한 것은 詩人의 너무나 希望的인 觀測이라 아니할 수 없다. 美英加 三國이 原子爆彈을 가지고 蘇聯에 대하여 이른바「原子爆彈 外交」를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을 말하며 11월17일에 모스크바에서 發表된 키르자노프(Kirsanoff)의 詩「來日」이

原子彈이 우리에게
수수께끼로 남게 하지 말지며
우라니움의 魔術的 原子에다
創造的 靈魂을 부어 넣어리라.

고 노래한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이 詩가 片石村의 詩와 다른 것은 蘇聯에는 原子爆彈을 硏究하는 團體가 五十이나 있어서 一萬名이나 되는 科學者가 硏究에 全力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前提로「來日」이라는 詩가 나오는데 詩人 혼자서 世界에 외친댔자 달걀로서 原子爆彈과 싸우자는 格이 된다. 不然이면 도야지에게 던지는 珍珠의 꼴이 되고 만다.


   片石村이여, 진정 帝國主義를 批判하려거던 經濟學者가 되든지 政治家가 되라.「詩」도 內面으로부터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것이니 詩人도 行動人인 될 수 있다. 허지만 知性의 曲藝같은 詩는 詩도 아니오 科學도 아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