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東錫 評論集

小市民의 文學 - 兪鎭午論

이강기 2015. 9. 1. 18:13

小市民의 文學

 

     - 兪鎭午論 -

                - 金東錫

언젠가 玄民은「봄」이라는 短篇集 出版記念 祝賀會 席上에서 春園의 祝辭에 바로 뒤이어 答辭해 가로되,

「나는 우리 先輩들처럼 朝鮮文學에 플러스한 것은 없을지 몰라도 또한 그들처럼 마이너스를 하고싶지 않다.」

하였다. 이것은 春園에게 쏜 화살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우리의 聽覺에서 사라지기 前에 玄民은 두 번이나 朝鮮文壇을 代表하여 이른바 大東亞文學者大會에 나가서 명백히 마이너스되는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내용을 이 자리에서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지만 -.

「지식계급이라는 것은 이 사회에서는 이중삼중 사중 아니 칠중 팔중 구중의 중첩된 인격을 갖도록 강제되고 있는 것이다. 그 많은 중에서 어떤 것이 정말 자기의 인격인가는 남 모르게 저 혼자만 알고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라고 玄民은「金講師와 T敎授」속에서 知識階級인 自己를 辯護했지만 事實 세상에서 그의 正體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를「同伴作家」라고도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를「共産主義者」라고도 하지만 다 그를 몰라보고 하는 소리다.
   玄民이 秀才인 것은 事實이다. 第一高普 出身 中에 試驗點數를 제일 많이 딴 사람이요 '삘려드'도 高點者요 그의 短篇「나비」가 말하듯 그가 맛 본 知識도 한 두 가지 꽃에 그치지 않는다. 바둑도 두고. 허지만 무엇보다도 玄民을 規定하는 事實은 그가 兩班階級 出身이라는 것이다. 그의 머리맡에는 언제고 兪氏 一門의 族譜가 있고 그 모든 傳統을 깨뜨리기 위하여 그것을 본다는 表情으로 손님에게 내 보이기도 한다. 발에 물 안 묻히고 물고기 잡으려는 그의 文學的 態度는 결국 따지고 보면 그가 李朝 兩班階級의 나쁜 버릇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서 原因하는 것이다. 希臘의 知性을 가지고도 힘드는 일은 奴隸에게 맡겨두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무리들이 아테네로 通하는 길을 散步하며 對話나 일삼았기 때문에 形而上學을 낳았을 뿐 이렇다 할 生産的인 思想을 낳지 못했거늘 20世紀에 族譜를 들추적거리는 샌님이 小說을 쓰다니! 어떤 빠아의 女給이 玄民의 小說을「說話的」이라 斷定한 것이 興味있지 아니한가.

「說話的이 뭐냐고요? 人物의 말과 行動이 저절로 이야기가 되게스리 創作하지 않고 作家의 頭腦가 이야기한다는 것이 너무나 明白한 小說을 說話的이라고 그랬습니다.」

   果然 그렇다.「가을」이라는 短篇을 보라.「또는 杞壺의 散步」라는 副題目이 붙었지만 이 散步조차 實地로 한 散步가 아니라 머리 속에서 한 觀念的 散步다. 그러기에 漢詩가 다섯 번이나 나오고 英詩가 나오고 習作時代의 原稿가 길게 引用되고 하는 것이 아니냐. 허긴「華想譜」는 玄民의 觀念이 一大 長篇小說을 이루고 있지 아니한가. 觀念만 가지고 小說을 쓸 수 있는 玄民은 自己의 觀念을 過信한 나머지 蘇聯엘 가 본 일도 없이 앙드레 지드의 「蘇聯旅行記」를 辯護하다가 코를 잡아 뗀 일이 있다. 그때 玄民의 글을 한번 다시 꺼내 본다면 오늘의 情勢에 비추어 玄民의 正體를 뚜렷이 들어낼 것이지만.
   玄民에게 왜 당신은 文學을 專攻하지 않고 法學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서슴치않고

「사회조직의 비밀을 알고 싶어서」(上海의 記憶)

라고 대답할 것이다. 春園이 民族을 위하여 小說을 쓴다고 떠들어대던 것이 病이듯이 玄民 또한 共産主義者인체 하는 것이 病이다.「看護部長」만 하더라도「다무라 기요꼬」를 一人稱으로 하는 短篇인데,「나」와「K」라는 두 사람은 왜 퉁그러져 나와 있느냐.「無明」에서도 春園의 꼬리가 보이듯 玄民의 短篇에서도 그의 꼬리는 나타나고야 만다. 여우가 암만 도술을 잘 부려도 꼬리만은 감추지 못한다던가. 學藝社에서 出版한「兪鎭午 短篇集」을 보면「스리」에다 註를 달아 가로되 「原作에는 此間에 各各 數行이 있으나 省略하였다」하였으니 省略한 - 또는 削除當한 - 數行이 얼마나 大端한 觀念인지 몰라도「스리」는 小兒病者의 作品이오 註는 더더군다나 小市民的인 蛇足이다.

「S신문 기자 K는 요전에 나를 보고 뿌치 뿌르라 매도하였다. 그 말이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골 일가들은 우리 집을 <부자집>이라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면 나는 당당한 뿌르 계급의 한 사람이다. 허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의 우리 집 살림살이란 영국이라는 나라 좀 넉넉한 석탄광부의 그것만도 못한 것 같이도 생각된다. 그렇다면 나도 푸롤레타리아의 한 사람일 것도 같은데 -」(스리)

  이 어인 觀念의 유회이뇨. 그러나 이것을 兪鎭午氏 自身의 自畵像이라 보면 이 以上 그의 本質을 喝破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百餘石하는 - 그의 말이니까 - 生産手段을 가지고 있으되 아들딸이 여섯이나 있어,「資本論」의 眞理는 알되 더 편히 살고싶기는 하고. 이리해서 그의 遺傳과 環境과 反應의 三角形은 玄民을 옴짝달삭 못하는 小市民으로 만들고 만 것이다. 玄民이 唯物論者인 것은 事實이로되 妻子를 먹여 살리겠다는 唯物論이오 文學者로선 그의 主義主張은 正體不明이다. 그는 身邊小說「가을」에서 이 사실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그 때 그는 아직 무슨 주의도 사상도 아무 것도 모르고 오로지 문학을 지망하는 열정에 타는 소년이었다. 집에는 상당한 재산도 있고 부모도 두분 다 계셨다. 그때의 그 열정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재산은 부모는 다 어디로 갔는가. 모든 것이 다 한 때의 꿈이었던가.」

   한마디로 말하면, 禁斷의 열매를 따먹어 自意識이 생기기 前 玄民은 詩人이었다. 그 때의 記憶이「滄浪亭記」같은 詩味가 넘치는 作品을 낳았다. 또 그는 늘 입버릇처럼, 警察이 家宅搜索을 할 때 뺏어간 네卷이나 되는 詩原稿가 있었으면 인스피레이션의 샘이 될텐데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警察이 앗아간 玄民의 詩가 어느 水準에 達한 것인지는 몰라도 世上이 알기에 그는 詩人이 아니라 徹頭徹尾 散文家이다. 그리고 散文家가 父母가 없다고 재산이 없다고 한숨만 쉴 것인가. 玄民의 살림살이가「좀 넉넉한 석탄광부의 그것만도 못한 것 같이도 생각된다」한 英國에서도「진정한 예술가는 아내를 굶게 하고 아들딸을 헐벗게 하고 칠십된 노모가 그를 먹여 살리느라 고생을 하게 한다」는 말이 버나드 쇼의「人間과 超人」의 舞臺에 오르는 것이어늘 쪼들린 조선의 현실에서 글을 써서 大家族을 배불리 밥 먹이고 뜨뜻이 옷 입히겠다는 것은 그 自體가 벌써 非現實的인 觀念이다. 玄民은 그것을 잘 아는지라 普專의 敎授가 되고 科長이 되었었다. 허긴 그에게는 學者的인 一面도 있다. 日本帝國主義 밑에서 憲法과 行政法을 講義했으니까 그렇지 그가 左顧右視하지 않고 機能을 發揮할 수 있는 學問을 했었더라면 큰 學者가 되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金講師와 T敎授」의 金講師는 城大豫科에서 法制와 經濟를 講義하던 兪講師요 그 때 多田이라는 敎授가 있었다.(T는 그의 이니셜이다). 기타 校長室의 位置에 이르기까지 城大豫科 그대로다. 다시 말하면 이 小說은 玄民 自身의 體驗을 그대로 小說化했기 때문에 朝鮮文壇에서 리얼리즘을 確立하는 功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玄民의 體驗은 여기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아니 몇 걸음 後退한 것이나 아닐까.「大東亞文學者大會」를 前後한 그의 過誤는 不問에 부친다 하더라도 그의 生活과 思想은 作品에서 深化擴大된 것을 아직 보지 못했다.「나비」는 精巧한 作品이로되 한낱 땐스와 같은 作品이오「滄浪亭記」는 아름다웁되「詩」지「散文」은 아니다. 그리고 보니 玄民은 結局 講師요 敎授며 科長이 그의 本質이었지 文學人이 아니었던가.

「알트 하이델베르히」

   이렇게「가을」에서 그는 외쳤지만 事實 玄民에게는 學問이 格이다. 敎授會에 내놓지 않고 總長 山田이가 꾸겨 쥐고 있었던 兪鎭午 助敎授案은 드디어 한 階級 올려서 實現되었다. 城大 憲法敎授 적어도 一國의 憲法敎授가 小說을 쓸 틈이 있겠느냐. 우리는 玄民이 T敎授의 身勢가 되지 말기를 빌어마지 않는 바이다.
   玄民의 文學이 藝術로서 失敗한 原因은 그가 小市民이었다는 데 있지만 더 깊은 原因은 그가「自然」을 갖지 못했다는 데 있다.

「나 어린 시절을 경개 아름다운 시골서 보낸 사람은 이런 의미에서 대단히 행복한 사람이다.」
「서울서 나서 서울서 자라난 나는 남들과 같이 가끔가끔 가슴을 조리피며 그리워 할 아름다운 고향을 갖고 있지 못하다.」(滄浪亭記)

   그러나 玄民의 小說은 相當히 人氣가 있다. 朝鮮의 讀者層이 아직껏 小市民的인 인테리였기 때문에 小市民의 文學인 玄民의 小說이 많이 읽혀진 것은 當然한 일이다. 허지만 8월15일을 契機로해서 새로운 時代가 오려한다. 兪鎭午氏 自身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아니, 언제고 그는 時代의 先輩者인 체 한다. 8월16일 밤에 그는 재빠르게「文協」을 組織하고 그 後에 自己는 싹 빠져버렸다. 세상에서는 兪鎭午氏가 오미트를 當했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事實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玄民은 스스로 빠져나간 것이다.
   그러면 玄民은 自己가 主動이 되어 만들은「文協」에서 왜 발뺌을 한 것인가.「어떤 것이 정말 자기의 인격인가는 남모르게 저 혼자만 알고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하는 玄民의 動機를 따질 必要도 없거니와 그가 그 뒤에 城大敎授 詮衡委員이 된 것을 보면 日本帝國主義時代에 自己가 犯한 過誤를 뉘우치는 氣色은 적어도 行動엔 나타나 있지 않다. 누구보다 良心的이어야 할 文學者로서 民族의 自己批判이 가장 要求되는 때에 玄民이 朝鮮 最初의 國立大學敎授를 詮衡했다는 것은 그의 두 번째 輕擧妄動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學者로 轉向할려거던 몇年이고 蟄居해서 좋은 著書를 내놓은 다음에 세상에서 推戴하거든 나서도 늦지 않을 것이오 文學이 끝끝내 目的이라면 더더군다나 憲法敎授가 될 말인가.
   玄民이여, 機會主義를 淸算하라.

 「좌익인이라면 붙들리는 대로 총살해 버리는 지금 왜 별다른 일도 없으면서 나는 서군과 비밀히 만나기를 약속한 것일까. 무엇보다도 나는 아무 일 한 것 없이 아무 이유도 없이 자칫하면 이곳에서 쥐도 모르게 생명을 잃을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그러고 보니 서울 있는 집 생각이 몹시 났다. 지금 어린애를 안고 잠들어 있을 나의 처는 나의 지금 이 꼴을 상상이나 할까?」(上海의 記憶)

이것이 아마 兪鎭午氏의 眞心일진댄 섯불리 政治에 關與를 말라. 政治는 生命을 내거는 舞臺다. 섯불리 小市民이 政治에 나섰다가 겁을 집어먹고 路線에서 빗나가는 때는 그 뒤를 딿던 大衆은 어찌 되느냐 생각만 하여도 위태위태한 것이다. 그러므로 玄民보고 機會主義를 버리라는 것은 政治的으로 左右를 決定하라는 것이 아니다. 文學을 하든지 버리든지 兩斷間 決定하라는 것이다.
   民族良心의 道場인 文壇에 機會主義가 神出鬼沒한다는 것은 새중간에 끼어서 살던 朝鮮이 아니고는 볼 수 없는 非文學的인 現象이다.
   玄民이여「知識의 열매」와「生命의 열매」를 둘 다 慾心내는 것도 좋지만 하나도 못 따먹고 말면 어떻게 그대의 生涯를 辨明할 作定인가. 不然이면 玄民은 벌써 둘 다 따먹었다는 말인가. 玄民이여 小成에 滿足치 말고 우물안 개구리가 되지 말지니 日本帝國主義 强壓 밑에서 우리가「生命의 열매」를 따먹었으면 몇 개나 따먹었겠으며 더더군다나 우리가 따먹은「知識의 열매」는 日本이 毒을 넣어서 우리에게 주던 것이 아닌가. 이미 大學敎授가 되어버렸으니,「강을 넘고 산을 넘고 국경을 넘어 단숨에 대륙의 하늘을 무찌르려는 전금속제(全金屬製) 최신식 여객기」(滄浪亭記)와 같은 敎授가 되어지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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