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東錫 評論集

詩와 自由

이강기 2015. 9. 1. 22:35

詩와 自由


    - 金東錫

 

   朝鮮을 사랑한다면서 朝鮮말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朝鮮말을 사랑한다면서 朝鮮의 詩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詩는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말이올시다. 그러므로 朝鮮의 詩를 사랑하는 마음은 아름다운 朝鮮말을 사랑하는 마음이며 그것은 또 아름다운 朝鮮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詩人 兪鎭午氏가「누구를 위한 벅찬 우리의 젊음이냐?」라는 詩를 읽고 警察에 拘禁되었을 때 朝鮮文學家同盟이 抗議한 뜻은 아름다운 朝鮮의 詩가 짓밟힐까 저어해서, 다시 말하면 朝鮮의 詩와 말과 民族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抗議文 말마따나 詩人이 詩를 읽다가 警察에 붙들려 간 일은 日本 帝國主義 暴政下에도 없었습니다.


   詩는 散文과 달라서 象徵的인 말을 즐겨 쓰기 때문에 그 意味는 解釋하기에 따라서는 正反對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詩란 트집을 잡으려면 얼마든지 트집을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萬若 日本의 警察이 詩를 가지고 朝鮮의 詩人을 彈壓했더라면 잡혀가지 않았을 詩人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自由가 없는 民族의 詩에는 반드시 反抗精神이 숨어 있는 것인데, 그것을 꼬치꼬치 집어낸다면 日本 帝國主義에 抵觸되지 않는 詩는 없었을 것입니다.


   朝鮮을 植民地化하고 朝鮮民族을 奴隸로 만들려던 日本 帝國主義者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벌써 그것만으로도 充分히 그것이 朝鮮의 詩가 아니라는 것은 證明됩니다. 强弱의 差는 있을지언정, 積極的이냐 消極的이냐 하는 差異는 있을지언정, 象徵의 度가 다를지언정, 그것은 朝鮮의 詩人이 노래한 것이고 그것을 朝鮮의 讀者가 즐겨하는 詩인 바에야 日帝에 對한 反抗精神이 없을 수 없습니다. 意識的으로 政治的인 것을 抽象해버리고 純粹의 象牙塔을 固守한 鄭芝溶氏의 詩에도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오오 異國種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카페 푸랑스」

 

   日本 帝政下에 朝鮮사람이「나라가 없다」고 말할 自由가 있었습니까? 日本 女給보고「異國種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할 自由가 있었습니까? 그러나「카페 푸랑스」라는 이 詩는 人口에 膾炙하였을뿐 아니라 日本警察은 鄭芝溶氏를 잡아다 가두지 않았습니다.


   詩는 民族의 呼吸이며 이 숨구멍을 막아버리면 民族은 큰 몸부림을 칠 危險性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그러했는지 또는 모르고 그러했는지「日帝」는 朝鮮의 詩를 敬而遠之한 것입니다. 日本人을 통털어 朝鮮말로 읽고 朝鮮 現代詩를 理解하는 者는 한 놈도 없었습니다. 또 圖書課나 高等係에서 朝鮮의 思想을 일일이 왜놈에게 告해 바치는 朝鮮人도 朝鮮詩를 理解하는 者는 없었습니다.(朝鮮詩를 理解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데서 왜놈의 종노릇을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朝鮮의 詩가 다른 思想의 分野보다 自由로운 表現을 가질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詩가 무엇인지 몰라서 日本警察이 詩人을 잡아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例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금은 이미 이 世上에 없는 情熱의 詩人 相和가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하고「開闢」第七十號에서 노래했을 때 檢閱에 눈이 벌건 왜놈들이나 그들의 走狗가 천치바보가 아닌 以上「빼앗긴 들」이 왜놈에게 빼앗긴 朝鮮을 意味한 것을 몰랐을 理 萬無합니다. 그런데도 그 때 警察은 이「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詩人을 잡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것이 詩였기 때문에 그 內容이 어떻게 되었든 내버려 둔 것이리라 그렇게 理解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日前에 어떤 官吏의 말이 吳章煥의 詩는 危險하다 하였다는데, 또 그 사람은 詩를 잘 안다고 자랑한다는데 日帝時代에 쓴 章煥의 詩는 더「危險」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만 例로 들지요.(더 많이 必要하신 분은 詩集 獻詞를 읽어보십시오).

 

무거운 쇠사슬을 끄으는 소리
내 맘의 뒤를 따르고
여기 쓸쓸한 自由는 곁에 있으나......
오직 치미는 미움
낯선 집 울타리에 돌을 던지니
개가 짖는다
     -「小夜의 노래」

 

   「무거운 쇠사슬」이 무엇을 意味하는지 그래 왜놈들이나 그놈들에게 일러바치는 것을 職業으로 하는 朝鮮人이 몰랐다고 생각하십니까? 왜놈이란 그렇게 어리석지 않으며 그 놈들이 부리던 朝鮮人들은 더군다나 어리석은 무리들이 아닙니다. 그 놈들에게 默默히 壓迫받은 朝鮮의 人民이 황소처럼 미련했을 따름입니다.


   이러한 奴隸가 된 民族의 運命을 생각할 때 詩人은 自己에게 주어진 自由가「쓸쓸한 自由」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딴 이야기지만 美國의 有名한 思想家 소로오가 黑人에 對한 政府의 奴隸政策에 反對하여 稅金을 내지 않아 警察 留置場에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의 親友 에머슨이 留置場으로 面會가서「왜 자네는 이런 데 와 있나?」하고 물으니까 소로오의 대답이「왜 자네는 이런 데 와 있지 않나?」하였다 합니다. 黑人種이 壓迫받는 것을 참지 못하여 警察 留置場을 오히려 自己들 思想家의 있을 곳으로 안 美國人이 있거늘 하물며 自己의 民族이 他民族에개 壓迫 받을 때 어찌 詩人이 홀로 自由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日本帝國主義에 對한「치미는 미움」을 이기지 못하여「낯선 집」울타리에 돌을 던지니「개」가 짖더랍니다.「낯선 집」은 왜놈의 집이 分明하고「개」는 日帝의 走狗를 意味한다고 解釋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日本警察은 詩人 吳章煥을 붙잡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日本帝國主義가 우리에게 言論의 自由을 주었다는 말은 千萬 아닙니다. 칼을 절거덕거리며 우리들의 집집을 낱낱이 샅샅이 뒤져서 姓을 뺏아 가고 젊은이들을 뺏아 가고 나중에는 숟가락까지 뺏아 간 日本帝國主義도 詩를 트집잡아 詩人을 붙들어 가지는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結局엔 蘇聯으로 亡命하고 말았지만 抱石이

主여! 그대가 運命의 箸로
이 구더기를 집어 세상에 떨어뜨릴제
그대도 응당 矛盾의 한숨을 쉬었으리라
이 侮辱의 탈이 땅위에 나둥거질제
저 맑은 햇볕도 응당 찡그렸으리라
오, 이 더러운 몸을 어찌하여야 좋으랴
이 더러운 피를 어따가 흘려야 좋으랴
主여! 그대가 만일 영영 버릴 물건일진데
차라리 벼락의 榮光을 주시겠나이까
벼락의 榮光을!

 

하고 외쳤을 때 이것은 日本 警察보고「나를 잡아 가두라」는 말과 다름없지 않습니까. 日本의 奴隸로 태어났음을 원통히 여겨 몸부림치는 젊은이, 그 젊은이가 願하는「벼락의 榮光」이 무엇을 意味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래 日本警察이 그 뜻을 몰랐다고 생각하십니까. 허지만 이것이 演說이 아니라 詩였다는 單純한 理由로 警察은 이 詩人의 身體를 拘禁하지 않았습니다. 朝鮮에서 出版된 小說冊 중에서 伏字 많기로 有名한「洛東江」은 드디어 禁書가 되었건만 日本帝國을 떠 엎어버리는「벼락의 榮光」을 울부짖는 이 詩는 詩集「봄잔디 밭 위에」속에 끼인 채 끝끝내 彈壓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日本帝國主義는「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하면서 야금야금 빼앗아 가다가 나중에는 우리의 呼吸과 다름없는 言語까지 뺏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니 詩도 危機에 빠진 것입니다. 그 때 이미 餘命이 얼마 남지 않은 新聞에 林和氏가 발표한「바다의 讚歌」라는 詩가 그것을 잘 말했습니다.

 

詩人의 입에
마이크 대신
재갈이 물려질 때
노래하는 열정이
沈默 가운데
최후를 의탁할 때

바다야!
너는 몸부림치는
肉體의 곡조를
伴奏해라

 

   이 얼마나 沈痛한 몸부림입니까. 林和氏의 詩가 日本帝國主義의 鐵鎖를 끊고싶어 하는 몸부림 아닌 것이 없으되, 이 詩만치 深刻한 몸부림은 없습니다. 詩人의 입에까지 재갈을 물리려는 日本帝國主義는 斷末魔의 發惡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發惡하는 日本警察도 이 詩를 結縛 逮捕하지는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말씀하면 朝鮮의 詩는 日本의 植民地에 태어났음에도 不拘하고 끝끝내 自由로울 수 있었다는 것 같이 들릴 念慮가 있습니다만, 事實은 그런 것이 아니라 朝鮮詩는 自由없는 朝鮮民族이 自由를 그리워하는「꿈」의 表現이기 때문에 設使 詩人의 身體를 拘禁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그의 詩까지 拘束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입니다.


   朝鮮의 詩가 自由를 노래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그러니까 朝鮮民族에게 自由를 주지 않고는 그 詩가 암은 바 帝國主義에 對한 反抗心을 除去할 수 없는 것인데 몇 사람 詩人의 身體를 拘束했댔자 朝鮮民族의 몸부림치는 詩를 拘束할 수 없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精神分析學자 프로이드의 冊에 이런 그림이 있습니다. 罪囚가 잠자는 監房에 東쪽으로 뚫린 鐵窓으로부터 햇볕이 흘러 들어오고 날개 달린 仙童들이 무등을 타고 窓을 넘어가는 光景입니다. 이것은 다시 解說할 것도 없이 獄에 갇힌 者는 獄에서 脫出할 꿈을 꾼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罪囚를 獄에 가둔 사람들은 그 罪囚의 身體만은 拘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꿈까지 獄에 가둘 수 없다는「꿈」의 權威者 프로이드 博士의 學說을 說明하는 그림입니다. 日本帝國主義라는 獄안에 갇혀있던 朝鮮民族이 自由를 꿈꾸는 그 꿈을 왜놈이나 親日派인들 어찌 束縛할 수 있겠습니까. 朝鮮詩는 이러한 民族이 自由를 그리워하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던 노래입니다.

 

「마돈나」밤이 주는 꿈
우리가 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歲月 모르는 나의 寢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세계로
     - 李相和「나의 寢室」

 

   이러한 民族의 꿈을 科學的 方法과 行動으로써 實現하려던 것이 共産主義者입니다. 그래서 日本警察은 共産主義者라면 人跡이 끊어진 山속까지도 토끼사냥하듯 뒤져서라도 잡아 가두었습니다. 共産主義者뿐 아니라 그 사람들과 만난 적만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까지 잡아가 가둔 것입니다. 民族의 自由를 부르짖는 詩人은 그냥 내버려두는 日本警察이 共産主義者라면 虎列刺보다 더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꿈은 암만 꾸어도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그들이 잘 알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입니다. 꿈은 彈壓하지 않아도 危險한 것은 아니올시다. 아니 섣불리 彈壓했다가는 퉁그러져서 危險한 것이 되는 것이 꿈입니다. 萬若 日本 帝國主義가 朝鮮의 詩人으로부터 꿈꾸는 自由까지 빼앗았더라면 남달리 情熱에 넘치는 詩人들이 가만히 있었을理는 萬無합니다. 


   그러나 以上은 日本 帝政時代의 이야기고 시방 朝鮮의 事情은 全然 달라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民族의 自由를 爲하여 科學的 行動을 하는 사람을 危險視하기커녕 讚頌해야 될 오늘의 朝鮮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民族의 自由를 꿈꾸는 꿈에 지나지 않는 詩가 彈壓받을 理由가 어디 있겠습니까. 시방 朝鮮民族은 自由를 꿈꿀 때가 아니라 自由를 위하여 行動할 때입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自由를 꿈꾸는 詩조차 危險視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詩를 너무 모르는 사람이거나 語學的으로는 알되 民族의 立場과 反對되는 立場에서 解釋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상 말씀은 朝鮮사람에게 眞正으로 朝鮮의 詩와 말과 人民을 사랑하는 朝鮮사람에게 드리는 바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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