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東錫 評論集

詩壇의 第三黨 - 金光均의「詩壇의 두 山脈」을 읽고

이강기 2015. 9. 1. 22:31

詩壇의 第三黨 - 金光均의「詩壇의 두 山脈」을 읽고


         - 金東錫

 

 

   서울신문 十二月 三日號(1947)에 실린 金光均氏의「詩壇의 두 山脈」이라는 評論은 率直한 告白이라는 데 印象이 깊었다. 그냥 두면 곪아서 부스럼이 될 것을 남김없이 吐露했다는데 對해서 敬意를 表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氏는 魯迅에 依託하여 藝術新聞紙上에서 또는 懷南의「田園」을 中心으로 몇몇 文學家가 모인 자리에서 말한 바 있었지만 이번처럼 露骨的으로 自己의 正體를 드러내 놓지는 않았었다.


   朝鮮의 詩壇을 두 山脈으로 나눈 것은 分類의 原理와 對象이 客觀的으로 存在한다 하더라도 氏의 意圖는 詩壇에는 두 山脈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第三山脈이 있다는 것을 證明하려는 데 있다.


   「民族에 對한 槪念마저 다른 詩壇의 이 두 山脈이 앞으로 어떻게 變形할지 꼭이 모르고 躁急한 結論을 지을 것도 없으나, 나 個人으로는 金起林氏가 말한 "共同體의 發見"과 金珖燮氏의 "詩의 當面한 任務"라는 두 가지 發言이 强烈히 印象에 남아있다.」고 結論한 氏는 明白히 詩壇에 있어서 第三黨을 企圖하고 있는 것이다. 政界에 있어서의 所爲「左右合作」과 같은 路線을 詩壇에서 걸어가고 있는 氏의 正體를 發見하고 놀랄 것은 없다. 氏로 하여금 氏의 길을 걷게 하라. 다만 文學家同盟의 金起林氏와 文筆家協會의 金珖燮氏를 맞붙여가지고 詩壇의 第三黨을 結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氏의 어리석은 企圖를 反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金光均氏가 金起林氏의 뒤를 따라 온 詩人인 것은 事實이다. 그러나 그 逆은 金光均氏의 注文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金起林氏는 벌써 두 山脈中 하나에 屬해 있는 것이다.


   「文學을 最後로 決定하는 것은 亦是 文學者의 生活이란 것을 다시 한번 絶叫하고싶다.」고 한 氏여, 金起林氏가 그대와 더불어 끝끝내 小市民的인 生活을 固執하고, 그대가 찾고자 애쓰는 샛길을 같이 찾을 줄 알았던가. 朴木月, 朴斗鎭, 趙芝薰等 이른바「純粹詩人」을 길러 낸 鄭芝溶氏가 이들 後輩들이「靑年文學家協會」를 組織하여 文學家同盟에 對해서 叛旗를 들었을 때 한 말이 생각난다.


      - 이놈들아 그래 날보고 너희들의 뒤를 따라오라는 말이냐?


   「詩壇의 두 山脈」은 政策的인 面을 덮어두고 본다면 理論을 위한 理論으로선 그럴듯하다. 한쪽 詩人들 보고 藝術性을 높이라고 忠告하고, 또 한쪽 詩人들 보고 時代精神을 把握하라고 忠告한 것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 忠告는 둘 다 한꺼번에 金光均氏가 누구보다도 自身에게 줄 忠告였다.


   다시 말하면 藝術과 時代를 辨證法的으로 把握하지 못하고 岐路에서 彷徨하는 씨는「觀念的인 中庸」에다 自己의 位置를 定하고선 自己야말로 藝術과 時代의 對立을 止揚한 詩人이라고 錯覺하고 있는 것이다. 이 錯覺이 어디서 由因하는 것이냐? 氏가 八.一五 以前의 生活態度를 發展시키지 못한 것과 氏의「藝術」이라는 것이 그러한 生活態度에서 規定된 어떤 一定한 限界의 藝術이라는 데서 생긴 것이다. 比컨대 시방 朝鮮詩壇엔 如前히 올챙인체 滿足하는 이른바 純粹詩人이 있고, 개구리가 되는 課程에 있으므로 올챙이의 꼬리가 남아 있어서 어색한 吳章煥 李庸岳을 비롯한 文學家同盟의 詩人이 있고, 自己는 올챙이면서 개구리인체 올챙이와 아직 꼬리가 달린 개구리를 둘 다 비웃는 金光均氏 같은 詩人이 있다. 누가 먼저 完全한 개구리가 될 것인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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