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友 朴元煥 遺稿詩

어제 그리고 달따러 간 오늘

이강기 2015. 9. 2. 08:40

어제 그리고 달따러 간 오늘

 

       - 박원환

   1

숲이여 기억하는가
온 동리 개들 컹컹 울리는
캄캄한 겨울 밤

바람에 흔들리는 불빛 따라
사랑이 흥건한 어머니 등에 업혀
첫눈처럼
돌아오는 어제들

아직도
거기는
찬란한 햇볕 들판을 뒹굴고

덩쿨마다
이름 모를 꽃들
신비로운 빛깔로 향기 뿜으며
피었다 저버리고 있겠지.

   2

까치 떼 울음 청청하던
아침마다
동창 열어 젖히시고
향냄새 같이 잔잔한 염불로
합장하시던 우리 할매

봄마다 염주 심으시고
여름 내내 불심 가꾸시어
가을 그늘 아래
어린 우리 무릎에 눕혀
염주 알 꿰시던 전설은
이 텅 빈 집 마당 가득하여

여기저기 들리는
낮으막한 어머니 음성
사랑방 아버지 큰기침 소리
울며 웃으며 싸우는 동생들
놀자고 소리쳐 부르는 친구들 목소리

무성한 쑥밭으로 자라는 나의 어제들

   3

얼어붙은 오리길
양지바른 토담 아래
철둑 아래
어린 봄나물처럼
옹기종기
햇볕 쬐며쬐며 가던
학교 길

하늘은 고드름 열리고
겨울보리 푸르른 들판
가도가도 멀리 앉은 학교
빨갛게 언 아이들

지각하여 벌서도
해바라기처럼 햇볕 안고 자꾸자꾸 웃었지.

   4

누가 들었을까
논바닥 얼음판을 깨고 뒤집을 때마다
박하 냄새처럼 쏟아져 나오는
울음나라 음악소리

흰 꽃관 쓴 왕녀들 원무가
내 무지개 울리는 풍경소리처럼
슬픈 환상을
수정 목걸이 꿰던 나의 겨울

   5

소죽 솥 아궁이에서 머슴이 퍼담아 준
활활 타는 놋화로 앞에서
우리는 설레이는 생의 행복이나
점점 사그라지는 젊음
차디찬 재로의 죽음과 절망은 알 수 없이
인절미, 밤 구워 먹으며
춘향이 놀이, 옛날 이야기
초롱불 심지 돋우고

강처럼 북풍 지나는 대밭
마른 고춧대에 부서지는 부엉이 올빼미 울음
문풍지 떠는 아랫목
무우 구뎅이서 갓 파온
우리의 흙 묻은 꿈들은
초가집 처마 속 참새잡이 불빛처럼
내일이 비치는 불안과 예감
들판의 추위와 고독을 알 수 없었지.

   6

문득 잠깬
캄캄한 섣달 밤중
엿고으는 불빛에 비치는 어머니 옆모습에
내 잠은
달디 단 엿으로 고아지고
대청마루 가득한 콩강정 깨강정, 유과, 약과처럼
달콤한 슬픔은
밤새도록 내 한 살을 지으시는 어머니 바느질 함 속
눈물 같은 비단 헝겊조각, 자, 무쇠가위, 실패, 골무, 바느질 쌈
색색가지 색실들의
멀고 먼 나라 냄새

   7*

신귀신 돌아다닌다는 섣달 그믐밤
댓돌마다 신 감추고
가문 구석구석
정성 밝히시던
흰 옷 입은 어머니
광에도 우물 속에도
대낮같이 환한 우리의 희망들
청동 풍경 울리는
대청마루
싸늘하게 앉아 계신 할머니
묵은 세배 줄지어 선 새댁들 비단 옷자락 스치는 소리

솜이불처럼 따습던 그 밤 자락
색색가지 별 빛 둘둘 말다가 눈 뜬 아침
새하얗게 센 밀가루 눈썹보고
커다랗게 웃고 선 설날
자주 옷고름에 얼굴 싸고
툇마루 끝에서 세배 드리면
사랑방 가득 웃음소리.

        * 시인 자신은 연작시의 구분 표시를 여기까지 밖에 남기지 않았다.

오정이 지나도록 차례 지내고 나면
온 동리 윷놀이 판
술 취한 웃음소리
널 뛰는 색동저고리
새해 아침은 멀리멀리 연으로 띄워지고
은화같은 기쁨
쩔렁이며 제기차던 정월

아이들이
연줄처럼 따라나서는 걸림패

징소리, 꽹과리 소리
빨강 노랑 색색가지 종이꽃 모자
마당 구석구석
지신지신 지신 밟고
대보름 밟으면
마당 가득 떡국냄새
도장에서 인심 퍼내는 소리.

초롱불 밝혀
오곡밥 오색 나물 차려
뒷 대밭 첫 새벽 휘둘러
훠이 훠이
참새 떼 쫓으시던 어머니
아직도
내 아픈 밤을 흔드는 그 음성

호도, 잣, 밤, 콩강정
눈뜨지 않은 새벽 머리맡에서
부스럼 깨물고

채들고 집집마다
찰밥 조밥 수수밥
사랑을 얻어다
디딜방아 머리에 앉아 먹고

달뜰 녘
기쁨에 뺨 붉은 아이들
동산에 달집 지어
솔잎 꺾어 내일을 쌓아
황소 같은 대 보름달 떠오르면
온 동리 합창하여
새 삼밭에 불지르고

쥐불 돌려 휘황하던 밤
달빛에 물들은 치마 자락 펄럭이며
수십 번 합장하시던
할머니, 어머니
무슨 소원이 그리 많았을까.

다리 밟고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웅성대던 밤
아이들은
밤새도록 돌아가지 않고
수박밭 참외밭 도둑놀이
논두렁같이 긴 밤을
푸른 달빛 먹으며
강강수월래

철둑너머
예배당 종소리 들리는
양지바른 쪽마루에 앉아 바라보던
다듬이질 잘 된
명주 같은 하늘
북 치고 장고 치고

영동할매 내려오신다고 비바람 불던 2월
어머니 세월이 다 그으름 앉은 부엌에
푸짐한 소원상 차려
소세불 태우시던
그 겨울은 아직도 내 생의 질그릇 구워내는 아궁이

새 무우 밭 콩밭이랑 지나
햇볕이고 팔락이는 다섯 살 박이
빨강치마 색동저고리 달려오는 봄

푸른 바람
풍금 타는 보리밭에서
하루종일 같이 놀던 노고지리
하늘은 왜 못 가나
나는 왜 날개가 없노

깜부기 뽑아먹던 깜둥이 입으로 서로 마주 웃던
연두빛 못자리판 같은
단발머리 친구들

치마폭 가득 쑥 뜯어
사금파리 소꿉놀이
하루 해 다 토담 뒤로 숨어

건너 솔밭
도깨비 불 무서워
울며울며 돌아오던 뒷 뇌매기 들판

아직도
유령처럼 울부짖는 바람
보라빛 너울 휘날리며
달려오는 달과 별, 풀, 벌레
타관사람 사랑하다 봄 아지랑이 자락에 숨어 쫓겨난
이웃 처녀 전설이 살고 있겠지.

뚫어지고 부서진 탱자나무 울타리 고치고
겨울을
가지치기 끝난
우리 배밭 배꽃들은 은빛 궁궐
기집 죽고 자식 죽고 수해 만나 논밭 전지 다 잃고
나 혼자서 어예 할꼬

마을 뒷산 구슬픈 뻐꾸기 울음
눈물 글썽이며
숲으로 숲으로 헤매다
화롯불 속처럼 불타는 산딸기 한 주먹 머금고
한 마리 사슴처럼 노래하며 달리던
나의 여린 나이에
진눈깨비처럼 퍼붓던 아카시아꽃, 배꽃 이파리들
호미 든 어머니 구리빛 미소에
산다는 뜻을
어렴풋 알기 시작했을까

소 타고 나무하러 간 머슴 나뭇단 위에
붉은 물 뚝뚝 떨어지는
참꽃 다발
초배기 가득 가재가 오물오물
동생은 소죽솥에 발갛게 구워먹고
입술에 붙이고 머리에 꽂고
나는 꽃잎 씹으며 참꽃되어
봄 아지랑이로 춤추었지.

투명한 오정
연두빛 새 꽃신 씻는 5월
창포, 궁기 삶은 물에
오월을 머리감고 피마자 기름 발라
소나무 잎 번쩍이는 뒷산에서
흰 구름 박차며 하늘 문 열던
그네 따라
단오절 진홍댕기 같은
우리 나이도 자라갔지.

기적 울리는 철로에 귀대고
멀리서 달려오는
내일이 오는 소리에 팔랑개비 돌리던
학교 길 오리길
새 한 마리 울지 않는 여름 땡볕
어느 밭에
진문둥이 숨었을까
끝도 없는
밀 익는 냄새, 보리 익는 냄새
쑥쑥 키 자라던 아이들
철교 아래 돌무더기 안에 모여 앉아

햇무우 뽑아먹고
침목에 노을빛 깔고 수수 달래 오디 콩 잔치상 차려
마음 속 끝없이 흐르는 꿈 강물 미역 감으며
쫓아오는 시간을 향해
웃으며 손 흔들어
물고기처럼 우리는 푸덕거렸지.

감 꽃 목걸이 걸어주시던 할머니
치마폭 가득한 옛날 이야기 숲으로
지금은 오래 전
별 되어 간 어린 동생 분홍밭에
처음 흙 묻혀
걸음마 시키면
석류꽃 웃으며 손뼉치던
고추밭 둑에 앉았던 시간

아홉 살 적 여동생 태어나던 날
문 걸고 내다보지 않던
아버지 헛기침 소리
돌아앉은 할머니 눈에서 떨어지던 눈물 때문에
어머니는 죄인 되고
나는 미운 오리새끼 되어
어느 큰물 진 여름 도랑물에 빼앗긴
꽃신 한 짝 찾아
아지 못할 강가로 강가로 헤매던 나.

검게 타는 여름
소작인들 고소에
멀쩡한 논들 다 빼앗겨
하늘 바라보며
한 숨쉬던 아버지 흰머리

모심기 날 받아서는
바짝 마른 쟁기 끝에
부서지고 부서져
다글다글 보리밥덩이 넘어가지 않아
나는 장독 뒤 찔레꽃 되어 탔지

한 방울 한 방울 빗방울 떨어진다.
온 식구 맨발로 마당 복판에 서서
두 손바닥 펴
갈라진 가슴 푹푹 젖어들고
아버지 모시 주적삼이 흠뻑 젖어 들도록
우리는 자꾸 웃었다.
그날 밤 우리는
제일 큰 수박 쩍쩍 갈라
달디단 최초의 평화를 먹었지.

이른 아침
노오란 장다리 밭
이슬 파도 헤치며
곤한 나비 나비 잡아 내 날개 달고
흰 도화지에 그리던 하늘나라 갈려던
내 날개는 언제나 풍장돼 버렸지.

밤마다 몰래 장터로 가
한숨쉬며 바라보던
유성기 소리 징소리
현란한 곡마단 깃발
왜 그렇게 눈부시게 펄럭였을까
지금껏 탐하다 간직지 못한
그 모든 것들 살고 있을
내 슬픈 비밀한 요술경에는
한 다발 분홍 꽃다발처럼
하늘 날고
외줄 타는 소녀
붉은 치마 입은 원숭이
불붙은 우산 쓰고 공 굴리던 난장이

송진 따 껌 씹던 솔밭
소는 마음대로 고삐 끌며 풀 뜯고
쑥 부벼 코 막고 귀 막아
멱감는 아이들
웅덩이 퍼 내어
미꾸라지 잡는 아이들
논바닥 휘저으며 논고동 잡는
진흙 투성이 아이들
삘릴리 삘릴리
물오른 버들피리 불던 하루가
금관악기 울리며
붉게 타는 노을 속으로 아이들 신발들이 합창하여 꽈리 불며
배부른 소 몰고 돌아오던
지당 솔밭
요령소리, 웃음소리 아이들 부르는 어머니 음성
슬프도록 멀리 멀리 적시는
저녁 안개

지붕마다 푸른 연기 피어오르고
동리 개들 서로
컹컹 짖어 대던
낡은 사진첩 속 빛 바랜 언어들.

새벽마다 풋감 줏으며
치마 자락 흠씬 적시던 순수의 즙으로
내 머리 치렁치렁 걸어
아침마다 동창 열고
포플라 나무 위 까치집 헤아리던 나

우리 과원에는
짙은 여름이 몰려와
청춘이 열매 맺기 시작해
개 몰고 달리던 과수원 골목
갓 깨어난 병아리 떼처럼 계절이 오고갔다.

수밀도 불게 익어가던 봉숭아 밭 지키던 나는
하루종일 단물 철철 흐르는
삶의 과육을 먹고
복숭아 가시처럼
온 가슴 찌르던
분홍빛 아픔에 눈물 흘리며
붉게 타는 노을 밭에 나를 태우며
두 팔이 시도록
내일을 호미 질 하여
산다는 수수께끼를 파내려 했고

별 총총한 밤
개구리 떼 발등 뛰어 넘고
반딧불 날아다니는 밤이슬 내리는 논두렁에 서서
박꽃같이 나를 쳐다보는 하늘을 누가 보았는가
메밀꽃 핀 들판처럼 사물의 이름들 송이송이 봉오리 터지던
그 밤
흐르는 유성처럼
하나 씩 하나 씩
깨우쳐 가던
죽음과 산다는 것

박꽃같이 더욱 나를 쳐다보고 있는 내가 보이고
달밤같이 유난히 목소리 큰 여인들 따라
냇가로 가
풀벌레 소리 이야기 소리
달빛에 풍덩풍덩 목욕하던 밤
나는 고무신 속에 질컥거리는 물소리처럼
보라 빛 환상들을
모깃불 연기에 실려
멀리 멀리 하늘로 갔지
그 보석함 속 같던 하늘로.

태풍 사라호
분홍 갑사치마 기쁨이 날아가고
제사장이 날아가는 추석날 아침
과수원에
이제 막 익기 시작한 과일들
어이없이 얽어지고
앞 뒤 마당
대추 감나무들 뿌리 채 절망과 좌절로 누워
황토 물 쏟아지는
비바람 속에 그냥 서 계시던
아버지
우리는 새 옷을 벗어버렸다.

사랑방 문지방 너머로 내려다보는 아버지
우리 키보다 높은 축담 아래에
죄인처럼 무릎꿇은
백발 노인

우리는 그를 노죽애비라 불렀지
언제나 한쪽 바지가랑이 걷어올려
술 취한 얼굴
누구에게나 우리 어린 것들에게도
뼈 없이 머리 조아리던 그 슬픈 습관
반상이 없어진 세상
그는 몰라 지하에서도 머리 조아리며 살까.

동리사람 햇곡식, 푸성귀 이고 지고
시오리 장터로 가
동리는 텅텅 비어
아이들 하루종일 신작로 가에 서서
해저물기만 기다렸지
아슴아슴 해 저물녘
먼지처럼 뿌연 연기 헤치며
돌아오던 술 취한 고함소리 여인들 이야기소리

어머니가 풀어놓은 장 보따리는
요술보따리
내 꽃신과 새 옷이 나오고
어머니 사랑이 화한 박하사탕 비늘 번쩍이는 생선
금방 따 온 기쁨
싱싱한 자랑으로
호얏불 환한 저녁상

어머니 장롱 정리하는 날
나는 꿈꾸듯
나후타린 냄새 밴
색색 신화 들리는 향기에 취해
먼 이방
상형문자 같은 비단 탐하고 탐하였지
백지에 곱게 싸둔 꽃 버선, 꽃 주머니 들여다보고
나비장식 은 부롯지 은 단추, 금비녀
내 어릴 적 입던 젓 내 나는 옷
오동나무 낡은 장롱 가득한
내 동경과 꿈이 차곡차곡
접혀진 황홀함이여.

소풍날 아침
육중한 열 두 대문 파안대소하는
첫 남동생 태어난 날
처음으로 어머니는 웃으셨고
나는 배 두 알 들고
들꽃 되어 들길로 들길로 걷다가
저녁 까치처럼 대추나무에 올라앉아
하늘에 비친 내 얼굴 보았지.

바람이 계절을 넘기고
툭툭 무겁게 과일 떨어지는 소리
설fp임과 기쁨 뛰는 가슴
과수원 처녀들 웃음소리 노래소리

여름이 다 가기 전에
과일은 벌써 다 익어
나는 가지에 달린 채
줄줄 흐르는 새벽의 과육 한 입 베어 물고
내 영감의 밭을 갈고 시의 열매를 익혀갔지

샘물에 목을 적시고
샘물에 비친 세상을 보았지

앞 뒤 들판 황금파도 헤치며
소달구지 타고
봄비처럼
햇살처럼
내 사랑하던 사람들이 손 흔드는
객지 공부 떠나던 길목
포풀라 가로수마다
은화 잎 번쩍이는 목소리

감이 익고
은행 익히는
눈물처럼 슬픈
태양과 하늘 바람에
머리카락 날리며
하얗게 빨아 다린 꽃 보따리 안고
타향 바다를 항해 시작한 나
무수한 네 잎 클로바 찾아
외로움 갈피 갈피 끼워 넣어
언제나 긴 종이등불 행렬 따라
푸른 자갈 밟고 걸어오는 서라벌 금관 쓴 전설들

내 빛나는 생각의 가지마다
물오르고 새 순 돋아 오르는 꿈들
무겁게 들고 돌아오던 밤마다
거인처럼 컹컹 울리는
내 발자국 소리 무서워
흠씬 젖는 동구 밖
우리 대문 앞 희미하게 손짓하는 등불 빛
화롯불 위 된장냄새
밀창마다 비치는 다정한 그림자
소여물 냄새들이
외로움에 찌들린
어깨치고 보따리 받아주는
활활타는 소죽솥

아, 4월이 빛나는 철로를 걸으며
너는 시인이 되라시며
갈대바람같은 목청으로
노래 가르쳐 주시던 육촌 오빠
젊은 여름날 감춰둔
장미꽃 한 송이 찾아
육중한 가문에 목매달고
바람처럼 떠나고 떠나던
오빠가
흰머리 날리며 웃고 계신
내 고향.

사랑방 안방 활짝 열리며
맨발로 뛰어나오는 반가움들

할머니 방 문설주 사이로
살살 얼음 열어 가는 솔바람 소리
두터운 할머니 사랑 덮고
아랫목에 누우면
배, 연시, 곶감, 떡, 엿
실패에 실 풀리듯 풀려 나오는
할매사랑

구시월 시단풍 자는 잠에 극락왕생 데려가소서
아침마다 동창 열고 합장하시던
당신 죽음에 못질하던 소리
휘날리는 만장
흰 국화꽃 상여 따라
내 유년을 데리고 떠나서
한 삽 한 삽 이승에 뿌려온 인연
고목으로 무성히 자라고 자라는
당신은 흙 되고
마음 터 물려받은 우리 어머니
박 속처럼 희고 입술 붉은 나이
구리빛으로 그슬려
언제나 눈물 참고 참으며
육간 대청
그득한 생활을 꾸리시고

불구 어린 동생 안고
박쥐 떼 날개 치는 처마 아래
운명을 거미줄 치며 사셨지

마디 굵은 손으로
이월 영동할매 내려오는 날
동백기름
흰 옷 푸새 냄새 같은
소세지 태우고 태우며
조앙과 삼신전에 손 비비고 비비던 어머니
당신은 제비나라 왕자의 동상입니까

팔월 한가위
참봉댁 정자에서 놀던 아이들
등 너머 고구마 밭 서리 나선
귀뚜라미 울음 영롱하게 짜는 보리밭 들판
망보던 나는
달빛이 무서워 도망 왔지
불도 켜지 않고 웃고 웃으며
한 소쿠리 다 먹고 먹던 사과 빛 같은 소녀들을

금박 박힌
어제의 추석을
장롱 밑에서 꺼내보는 오늘
달은 아직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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