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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리북네히트와 로샤 룩셈뿌르그를 追想함, 第7週紀念祭를 마즈면서

이강기 2015. 9. 5. 12:29
   
 
 
잡지명 개벽 제46호
호수 제46호
발행년월일 1924-04-01
기사제목 칼 리북네히트와 로샤 룩셈뿌르그를 追想함, 第7週紀念祭를 마즈면서
필자 白綽 抄譯
기사형태 소식

歐洲大戰의 火盖가 써비아나라 한 청년의 손을 비러서 열닌 후 獨逸의 軍國主義를 비롯하야 각국의 權力階級은 無智와 貧窮속에 내던저 길너오든 無産群을 끄님업시 人間屠殺場으로 모라보내며 모든 사람들은 이른바 조국을 위하야 명예의 죽엄을 辭讓치 안코서 세계의 군데 군데에 피의 바다 고기의 山을 이루고 다 各其 해골의 탑 우에서 正義와 人道를 주장하며 勝戰鼓를 꿈뀔제 獨逸共産主義의 깃대인 칼·리북네히트(칼 리프크네이트)와 로사·룩셈뿌르그는 『無産者에게는 조국이 업다. 無産者의 조국은 오즉 國際社會主義運動이 잇슬 뿐이라』고 부르지즈며 『전쟁에 대한 전쟁』을 일흐키게 되엿슴니다. 그리하야 칼과 로사는 마참내 싸대만 政府의 毒刃에 그 최후를 鮮血로 告케 되니 때는 1919년 1월 15일―. 그후 第三인터내숀낼이 맨처음으로 모스크바에 개최되엿슬 때 世界無産階級에 대하야 가장 기념할만한 이 會議의 劈頭에 出席者 일동은 칼·리북네히트와 로-사·룩셈뿌르그에 대하야 『第三인터내숀낼의 最善의 대표자』라는 찬사를 바치며 일동은 기립으로써 그들을 추억하는 뜻을 표하엿슴니다.
讀者諸君! 이제 나로 하야금 이 兩個의 國際主義의 거대한 기념탑을 위하야, 『第三인터내숀낼의 最善의 대표자』를 위하야 용감하고 强烈한 反軍國主義的 정신과 國際社會主義運動으로 일관된 그들의 피 칠한 歷史를 諸君압헤 展開케 하라.

칼·리북네히트는 無産者가 처음으로 그네들 손에 천하를 차지한 巴里콤뮨이 생기든 1871년에 獨逸社會民主黨의 創立者로 유명한 월헴·리북네히트의<81> 3남 2녀중의 한 아들로서 呱呱의 聲을 擧하엿슴니다. 당시에 國際社會主義에 충실한 그 부친은 普佛戰爭에 대하야 강렬한 반대를 행한 결과 철창의 몸이 되엿섯슴니다.
그는 라이프지히와 伯林 등 大學에서 法律과 經濟學을 연구하야 博士의 학위를 어덧슴니다. 少年쩍부터 열렬한 主義者인 그는 『청년을 衝動식히는 것은 군대를 衝動식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단순무구한 청년노동자의 가슴 속에 反軍國主義的 정신을 집어너어 주기에 그의 心血을 다 하얏슴니다. 主義에 대한 그의 용감과 열심 천재적 웅변과 天生인 개인적 매력은 多數한 혁명적 勞?者의 가슴에 불을 질느지 안코서는 마지 안엇슴니다.

칼 리프크네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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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은 獨逸의 軍國主義가 전국을 지배할 만한 政治的 세력이 되여가는 것과 獨逸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싸홈은 軍備 兵役 及 戰爭에 대한 격렬한 반대운동과 병행하지 안으면 안될 것을 간파하게 되엿슴니다. 그리하야 1904년에 뿌레-몌레에서 개최된 民主黨 大會에서 그는 獨逸은 다른 나라와 가티 兵營內에서 宣傳할 수 업슴으로 無産靑年들에게 軍國主義가 살인과 파괴 이외애는 아모 것도 업는 것으로 깁히 인상을 주어야 된다고 說道하엿슴니다. 1906년에 맨하임에서 열닌 獨逸靑年社會主義團?大會에서 그는 軍國主義에 대한 강연을 하엿는대 그 강연의 내용이 그 이듬해 『軍國主義와 反軍國主義』라는 유명한 冊子로써 出現하엿슴니다. 얼마 아니되야 책자가 압수되는 동시에 체포되야 반역죄로서 18개월의 징역 선고를 바덧슴니다. 이 사건의 公判은 전국의 이목을 끌게 하엿고 법정에서 理路整然한 그의 대담한 변론은 노동계급에게 가장 유효한 軍國主義의 宣傳이 되엿스며 카이젤 자신도 法廷의 모양이 어떠한가를 떨니는 손으로 受話器를 들고 일일히 보고를 드럿다 함니다.
未久에 伯林勞?者는 在獄中인 칼·리북네히트를 普魯西議會의 議員으로 選擧하엿슴니다. 1912년에는 그는 또 카이젤의 膝下인 폽담으로부터 帝國議會에 選出하야 愛國的 主戰派의 諸新聞이 무기회사에 조종되는 것과 그들의 회사는 외국으로부터 무기의 주문을 밧기 위하야 더욱이 主戰論을 唱道하야 외국을 위협하는 것과 獨逸, 英國, 墺地利 기타 列强諸國의 資本家의 利害는 愛國主義의 고취 戰爭熱의 勃興과 완전히 일치되는 것을 明細히 的確히<82> 드러내여 資本家階級의 肝膽을 써늘케 하엿슴니다. 黨內의 소위 健全分子인 싸데만 一派의 隱然히 혹은 公然히 忌憚업시 행하는 中傷과 謀陷을 바드면서 칼과 밋 그 同志들의 不撓不屈의 강렬한 노력은 청년간의 非戰的 氣分은 나날이 농후케 되야 마참내 開戰 당시에는 獨逸 각지방의 청년단체는 社會民主黨의 태도를 맹렬히 반항하야 해산을 당한 단체도 적지 안엇슴니다. 리북네히트가 창립한 國際靑年黨도 격렬히 전쟁을 반대하엿스며 開戰 당시에 交戰諸國의 非戰的 少數者間에 근근히 一條의 국제적 통신의 路를 扶持하기는 실로 이 靑年黨이엿슴니다.

로사룩셈뿌르그는 1865년에 露領 波蘭 왈소市 어느 中産家에서 낫슴니다. 彼女는 年少時에 獨逸에 留學하엿스나 혁명운동에 열심으로 從事하엿슴으로 因하야 露國官憲에게 붓들녀 넘어가게 되매 瑞西로 망명하엿슴니다. 그곳에서 彼女는 학업을 계속하엿스나 그 동안에도 獨逸同志와 音信을 끈치 안엇스며 彼女는 獨逸로 다시 도라오기 위하야 당시의 露國婦人主義者의 慣用手段을 모방하야 어느 通逸學生과 法律上 명의로만 결혼하고 獨逸에 歸化하엿슴니다. 그리하야 未久에 彼女는 社會黨部內에서 有數한 學者 宣傳者가 되엿슴니다.
로-사는 社會黨이 창립한 『社會主義學校』에서 처음에 맑스經濟學의 강의를 擔任하얏섯는대 그 강의의 草稿가 『資本集積이란 책이 되엿스며 또 波蘭의 産業的 進化』라는 책을 著作하얏는내 그것은 맑스主義에 의하야 時事問題를 해설한 것이외다. 로-사는 黨의 機關雜誌와 新聞에 쉬지안코 雄筆을 들넛스며 항상 정치와 경제문제의 진행에 대하야 깁히 注意하며 通透하게 관찰하엿슴니다. 1905년에 로-사는 『總同盟罷工』이라는 著書를 내여 社會民主黨의 宿弊인 불철저한 평화적 改良主義를 공격하고 혁명적 수단으로서 總同盟罷工을 論하엿슴니다.
彼女는 키가 적고 등이 좀 굽으며 몸새가 간앏슴니다. 용모는 미려한 편은 안이나 그의 고결한 인격과 발랄한 才氣는 아모리 냉담한 사람일지라도 5분간만 對座하면 그를 후리고야 맘니다. 彼女는 博覽强記하야 理論家가 만흔 社會黨內部에서도 특히 맑스학자로서 한 高地를 점령하고 잇섯슴니다. 또 그의 銳利痛烈한 연설과 파리한 얼골에 타오르는 듯한 검은 眼光은 청중의 마음을 쥐엿다 폇다 하엿슴니다.<83>

로자 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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彼女는 6개국 말을 통하며 더욱 露, 獨, 波, 佛말은 자유자재하야 國際社會黨 대회에서 각국 대표자간에 항상 通辯의 任에 當하엿슴니다. 그는 또 예술적 취미가 풍부하야 문학과 미술에 대한 造詣가 깁고 더욱히 佛蘭西文學을 愛好하엿슴니다.
로-사는 獨逸社會民主黨員인 동시에 波蘭運動에도 참가하엿스며 엄정한 國際主義的 反國民主義的 社會主義를 표방하는 波蘭 社會民主黨의 일원으로서 애국적인 波蘭社會黨과 싸홈하엿슴니다. 그는 獨逸社會黨의 다수와는 每事에 의견이 달랏지마는 黨으로부터 別立해셔 一派를 別立하는데는 반대하고 끗까지 내부에 잇서셔 내부에서 黨을 개혁하기에 노력하엿슴니다.
25년간을 통하야 룩셈뿌르그와 리북네히트는 어느 때 社會黨大會에든지 또 무슨 토의에든지 서로 提携하야 少數急進派의 列에 참가치 안은 적이 업섯슴니다. 그리고 또 당내의 幹部는 目前의 卑近한 적은 성공을 好餌로 하야 인기와 黨勢를 확장함에 급급하야 姑息的 妥協으로써 생명을 삼음에 反하야 그네들은 一般人氣나 투표수를 係關치 안코서 확신이 잇고 용기와 희생을 내놀만한 일에는 少毫도 주저치 안코 돌진하엿슴니다.

1914년 7월과 8월을 隔하야 歐洲大戰의 戰端이 개시되기 數日前 獨逸社會黨協議會에셔 의원다수가 軍費可決의 贊意를 표하엿스나 리북네히트와 그외 3명의 議員은 『勞?者에게는 조국이 업다. 勞?者의 조국은 다만 國際社會主義運動이 잇슬 뿐이라』고 부르지즈며 격렬히 애국적 社會主義者를 論駁하엿슴니다. 그러나 軍事費가 마참내 議會에 上程함에 當하야는 리북네히트 그 자신도 되나게 압흔 일이나 찬성의 一票를 投치 안을 수 업슬 만콤 그가티 社會黨黨規는 神聖視되엿섯슴니다.<84> 그러치만 그는 投票後 자기의 양심과 背馳되는 黨規에 대하야 반역하지 안이치 못하엿슴니다. 軍事費를 協贊한 자기의 행동을 압흐게 꾸짓고 憤然히 『전쟁에 대한 전쟁』의 渦中에 몸을 던젓슴니다. 12월 議會에 附議된 제2회 軍事費에는 리북네히트 혼자 반대의 표를 投하엿스며 社會主義는 왜 전쟁에 반대하는가 하는 陳述書를 의장에게 제출하엿스나 낭독도 하지 안엇슴니다.
社會黨幹部는 정부로 하야금 殘虐한 침략전쟁을 계속하도록 혹은 勞?爭議를 억압하고 혹은 勞?者間에 主戰的 氣勢를 고취하는 동안에 룩셈뿌르그와 크라라 쎄트컨과 프란취·메링과 리북네히트는 『인터내숀낼』이란 戰爭反對의 잡지를 발행하엿는대 이 잡지는 창간호가 나자 發行停止를 당하엿슴니다. 그리고 로-사와 크라라는 격렬한 非戰運動으로 인하야 옥중의 사람이 되엿슴니라. 리북네히트는 政府와 社會黨幹部에게 憎惡의 초점이 되는 동시에 주위에 잇는 비록 소수일망정 階級的 自覺이 잇는 戰鬪的 分子를 보아서 鞏固한 結束을 하기 시작하엿슴니다. 1915년 12월에 제4회 軍事豫?이 上程함에 당하매 20명의 社會黨議員이 반대투표를 하엿슴니다. 이것이 그뒤에 主戰派와 분리하야 獨立社會民主黨을 조직하엿슴니다.
1916년 5월 1일 리북네히트는 開戰 以來 제2회째 되는 매-데이를 기념하기 위하야 伯林에 勞?者의 一大示威運動을 조직하엿슴니다. 그는 수만의 勞動者 압헤서 大膽果敢한 웅변을 휘둘너 他國의 勞動者에게 향하엿든 武器를 勞?階級의 진정한 적에게 향하야 돌라잡으라고 부르짓자 憲兵떼들은 壇上으로브터 집어낙구어 감옥으로 꺼러다가 느엇슴니다. 軍法會議는 그를 叛逆罪로 모라 2년반의 징역을 선고하고 再審에는 刑期를 4년으로 연장하엿슴니다. 그리하야 2년여나 옥중생활을 지내다가 革命勃發의 數週前 特赦로 출옥하자 리북네히트와 룩셈뿌르그는 서로 제휴하야 모든 冒險을 참으면서 민중운동의 先驅가 되엿슴니다.

마참내 혁명이 일어낫슴니다. 皇帝가 退位하자 政權은 당연히 無産階級에게 도라올 것이언만 그와는 반대로 최후의 日까지 혁명을 반대하는 社會民主黨의 掌中으로 드러가고 마럿슴니다. 에벨트와 사듸만 一派가 新獨逸共和國의 支配者가 되엿슴니다. 그러하나<85> 民衆은 의심업시 革命的 기분에 動하엿슴니다. 도처 地方政廳의 실권은 勞兵會에 장악되며 宣言과 명령은 『獨逸社會主義共和國』의 명의로 調印되엿슴니다. 정부의 권력은 3명의 社會民主黨員과 3명의 獨立黨員으로 된 評議員의 手中에 잇섯스며 도처에서 일러난 示威運動은 가장 발랄한 變革的 정신을 발휘하엿스며 각처 勞兵會의 결의와 포고는 社會主義 理想實現에 대한 徹底的 急進的 태도를 표시하엿슴니다.
그러나 獨立社會黨도 一般形勢가 不穩하게 되면 聯合國이 다시 獨逸에게 兵器를 향할가 두려워 하야 마참내 素志를 飜覆하고 國民議會 개최에 대한 反對說을 放棄하엿슴니다. 그리고 격렬한 階級鬪爭에는 반대하는 社會民主黨과 타협을 계획하엿슴니다. 그러나 샤듸만 一派가 資本家와 軍閥에게 대한 양보의 정도가 過大함으로 獨立社會黨도 단연히 政府와의 제휴를 끈키로 결심하고 그 黨員을 內閣으로부터 辭職케 하엿슴니다.
이보다 조꼼 前에 혁명정부는 逡巡과 讓步로 일을 삼는 동안 칼과 로사와 스팔타카스團은 獨立社會黨의 내부에 의연히 잇스면셔 당시 政府가 反動革命의 勃興을 袖手傍觀할 것을 공격하엿스며 스팔타카스團은 1. 獨逸社會黨은 즉각 정부로부터 辭職할 것과 2. 反動革命을 助長하고 社會主義 目的을 실현할 意思가 업는 國民議會의<86> 召集을 반대하는 것과 3. 革命政府는 무장을 해제하고 一般勞?階級을 武裝식힐 일과 혁명을 옹호하기 위하야 赤衛軍을 편성할 것과 에벨트 人民委員會를 해산하고 一切의 政治的 권력을 勞兵會 執行委員會로 옴길 일 등 요구를 제출하엿슴니다. 그리고 12월 3일에 개최된 스팔타카스團 全國大會는 獨立社會黨과 一切 관계를 끈코 全會一致로 혁명적 共産勞?黨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엿슴니다.
그러나 시기가 이미 느젓슴니다. 쓰팔타카스團의 반역이 일어낫슬제 獨逸의 無産階級은 이미 새로된 그 상태에 練着되여 革命勃發後 數日 내지 數週間 전국의 人心을 지배하든 사회주의적 氣勢는 안정되기 시작하엿슴니다. 그리하야 최초의 혁명적 動亂과 가티 一切을 깨트려 버릴 뜻한 騷擾의 와중에는 다시 드러가기를 조화하지 안엇슴니다. 이에 社會民主黨은 스팔타카스團에 반감을 갓게 하기 위하야 수단을 擇치 안엇스며 정부는 군대를 發하야 鎭壓에 힘쓸 뿐만 안이라 그 機關新聞에 誣陷的 記事를 滿載하엿슴니다.
叛逆에 실패하고 某處에 潛伏하엿든 리북네히트와 룩셈뿌르그는 1919년 1월 15일 夜에 호텔·에덴으로 護送되엿슴니다. 그리고 다시 모아삣트 未決監으로 넘어가게 되야 호텔·에덴을 출발하는 중 그 門前 으슥한 곳에서 칼과 로-샤는 前後하야 정부의 ?認 秘密命令의 執行者 騎兵 룽게의 곤봉 아래에 昏倒되엿다가 다시 자동차에 실니어 사람업는 곳에서 다시금 慘殺을 당하야 姓名未詳의 길에 내여 버린 송장이 되엿슴니다.

露國의 共産者는 이 兩人을 위하야 모스크바에 기념비를 세웟스며 매년 1월 16일로써 기념일을 삼어 國民一般이 일을 쉬이고 그의 壯烈을 追悼한다 함니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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