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잡히는 대로 읽다가 시작한 역사산책
읽을 것이 너무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사촌 형이 무슨 책인가를 열심히 읽다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에 냉큼 펼쳐 보았다. 제목은 두 글자로 된 모르는 한자였지만 본문은 한글이었다. 됐다. 무조건 읽기 시작했다. 그 때는 읽을 것이 너무나 귀했다. 6.25전쟁으로 그나마 좀 개명된 동리의 몇몇 집안에 보관하고 있던 소량의 책들마저도 소실돼 버렸고 궁벽한 산촌고을에 책방이나 책 대여점이 있을 리도 없었다. 책이라고는 학교에서 받아 온 교과서와 동리의 형들이 이따금씩 읍내에서 사오는 <야담>이니 <실화>니 하는 대중잡지, 아니면 면사무소를 통해 나오는 <00공보>, <00행정>이니 하는 기관지가 고작이었다. 그 무렵 나는 읽을 것에 허기져 있었다. 쉬운 것이든 어려운 것이든, 어린이용이든 어른용이든 한글로 된 것이면 무조건 읽어댔다. 책이 많았다면 얼마나 읽었을 것인가.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다.
햐! 그런데 사촌형이 읽던 이 책은 내용이 너무나 달콤하고 아름다웠다. ‘편지틀’(서간체)로 돼 있어 읽기도 좋았다. 지금까지 교과서나 대중잡지에서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제목도 모르는 이 책이 얼마나 좋았던지 밤에 사촌 형이 잠든 틈에 몰래 가져와 이튿날 아침까지 다 읽어버렸다. 그게 이광수의『有情』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였다. 읽을 당시에도 분명 책 이름을 물어 보았으련만 무슨 대답을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이광수가 어떤 사람인지, ‘유정’이 무슨 뜻인지, 소설이 무언지도 모를 나이 탓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나인데도 장편 대중소설에 흠뻑 빠져들 정도로 재미를 느꼈던 것은 <야담>이니 <실화>니 하는 대중잡지들을 자주 읽은 덕분에 나름대로 ‘내공’이 쌓인 ‘올된 소년’이어서가 아닌가 싶다. 내 마구잡이 독서의 시작이었다. 그 나이에 걸맞을 동화책이나 축소판 세계 명작집 따위는 내 주위에 한 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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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의사 지바고』가 노벨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을 때 서방언론들은 다른 해보다 유달리 수선을 떨었다. 러시아혁명을 은근히 비판한 내용도 그렇고, 소련 정부의 압력으로 그가 수상을 거절한 사실이 탄압받는 소련지식인의 이미지와 겹쳐 좋은 기사거리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골 중학생이던 나의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로 크게 떠들어 댔다.
20리 밖에 있는 중학교 근처에 5일장이 서는 장터가 있었고 그 길가에 새로 조그마한 책방이 들어섰다. 아마도 유사 이래 그 고장에 처음 생긴 책방이었을 것이다. 하교 때 그 곳에 들러 이런 저런 책들을 구경하는 것이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의사 지바고』(장세기역, 상권)가 눈에 띠었다. 하얀 설원에 썰매가 외롭게 달리는 표지의 컷부터가 마음에 쏙 들었다. 책값이 그 때 돈으로 500환이었는데 내겐 거금이었다. 비상금을 다 털어도 모자라서 며칠을 벼르던 끝에 친구한테 빌리고 하여 사버렸다. 참조표를 첨부해야할 정도로 외우기 힘든 긴 주인공들의 이름이며 소설의 구성이며 이야기의 전개가 처음엔 영 낯설었으나 눈에 선하게 그리는 배경묘사와 이야기 전체에서 강렬하게 풍기는 서정성에 차츰 매료돼 갔다. 세상을 뒤엎은 혁명 앞에서의 가치관의 혼돈, 이데올로기의 강요로 일어나는 인간의 비극 같은 좀 고차원적인 의미는 그 후 번역판을 바꿔가며 총 세 번을 읽으면서 눈에 들어왔다. 한참 훗날의 얘기지만 영화도 몇 차례나 봤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땐 원작이 주는 감동의 60퍼센트도 주지 않는다며 투덜거렸다. 뒷날 다른 번역판들을 읽어본 후 느낀 점인데 영문중역인데도 장세기 교수의 번역판이 내가 읽은 것들 중에서는 제일 잘 된 것 같았다. 하권을 기다렸으나 끝내 찾지 못했고 부득이 당시 여원사에서 나온 것으로 가름했다. 아무렴 그 후부턴 “제일 감동받은 소설”이 뭐냐고 누가 물을 때면 망설이지 않고 『의사 지바고』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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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중학교 국어책에 실린 어느 수필(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을 뉴턴이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감수성 강한 시절에 입력된 ‘뉴턴’을 ‘스피노자’로 바꾸는 데 꽤 애를 먹었다. 물론 뉴턴도 스피노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엔 분명히 스피노자로 해야 할 것을 뉴턴으로 한 것이다. 꽤 유명한 사람들도 글 쓸 때 이런 실수를 자주 하나보다. 교과서는 어린이들에게 헌법과 같은 것인데 그런 글을 싣다니. 어릴 때 입력된 것은 좀처럼 바로잡기 힘들다는 사실을 이 일로 하여 새삼스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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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성듬성 섞인 한자낱말을 건너뛰며『나의 투쟁』을 읽다가, 성사되기 몹시 힘든 일을 빗댈 때 ‘駱駝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더 힘들다’는 말을 인용하는 법을 배웠다. 아마도 히틀러가 의회무용론을 강조하기 위해 의회가 국민들의 진정한 의견을 국정에 반영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빗대어 말한 구절에서가 아니었던가 싶다. 성경에서 나오는 얘긴 줄도 모르고 그저 속담인 줄만 알았다. “옳지, 이걸 운영위원장선거 의견발표회 때 써 먹어야지. 그런데 駱駝라는 게 뭐지? 응, 이건 아마 밧줄을 의미할거야. 바늘구멍이란 말이 있으니 틀림없이 밧줄일거야.” 그래서 내 의견발표문에 “여러 학생들의 의견을 정확히 학생자치회에 반영하기란 밧줄을 작은 바늘구멍에 끼기보다 더 어려울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들어가게 되어 낙타가 갑자기 밧줄로 둔갑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빈약하기 그지없는 독서와 태부족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운영위원장 후보자로서 유식한 체를 하려니 결국 이런 희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 무렵 농촌에서 간혹 열리는 웅변대회 원고엔 동서고금의 명언들을 엉터리로 인용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그 뒤 그것이 낙타의 ‘오역’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생각만 하면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한데 이야기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내가 ‘번역’한 ‘밧줄’이 ‘원천적으로’ 옳았다는 것을 뒤늦게 그것도 몇 십 년이나 지나서 알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9장24절과 마가복음 10장25절의 낙타와 바늘구멍 이야기 속에 나오는 ‘낙타’가 실은 ‘밧줄’의 오역이었다는 것이다. 번역자가 아랍말의 gamta(밧줄)를 gamla(낙타)로 혼동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원, 세상에 이런 일이! 그렇다고 중학교 시절의 선생님들과 학생들을 다시 불러 놓고 “사실은 이러 이러해서 내 말이 옳았다”고 새삼스레 설명할 수도 없고..... 문제는 또 있다. 오역이 분명한데도 “신성한 오역”이라나 뭐라나 하면서 성경에서는 그냥 ‘낙타’로 사용한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내가 ‘번역’한 ‘밧줄’은 역시 틀렸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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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 현대문(국어)을 가르치던 P 선생님은 늘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다방면에 걸쳐 아는 것이 많았고 학생들에게 인기도 좋았다. 나중에 어떤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옮겨가셨다. 고어를 가르치던 C 선생님은, 남독은 오히려 사람을 버릴 수도 있으니까 중요한 책 몇 개만 골라(그런데 이 ‘중요한 책‘을 어떻게 고르는 지에 대해선 말씀하지 않으셨다) 책장이 너덜너덜해지도록 파고드는 것이 제일이라고 하셨다. 뒤에 들으니 어느 대학에 가 계셨다. 어느 선생님 말씀이 옳은지 알 수 없었다. 두 분 모두 자기 방식만 이야기 한 것이다. 그냥 읽고 싶은 것 찾아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마구잡이로 많은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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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상급반 때 후배 하나가『데미안』을 읽고 자기의 인생관이 바뀌었다며 입에 침을 튀겨가며 감동을 쏟아냈다. 평소에 차분하던 사람이라 그의 유별난 찬사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좋은 책이었나? 이상하게도 그때까지 나는 헤세의 소설은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당장 도서관에서『데미안』을 빌려와 읽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도무지 감흥이 오지 않았다. 혹시 내가 건성으로 읽었나 싶어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역시 무덤덤했다. 분명 내게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입학시험에서 1등한 사람이 읽고 무지하게 감동했다는 책인데 이럴 수가 있나. 문득 섹스피어의 작품을 명작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던 톨스토이 생각이 났다. 그도 혹시 자기가 잘 못 읽었나싶어 다시 읽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며칠 후 만난 그 후배에게『데미안』을 언제 읽었냐니까 고교2년 때라고 했다. 그러면 그렇지. 독서에는 개인차도 있지만 시기도 있는 법이니까. 대학시절에 읽은『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좁은 문』이 별로 감동을 주지 못한 경우와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 ‘연애소설’(『유정』)에 빠지고 중학교 때『의사 지바고』를 읽고 감동 먹은, ‘끓지도 않고 넘쳐버린’ 사람에게, 더욱이 대학 상급반 학생에게『데미안』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 * * * * 긴 방황 끝에 시작한 역사산책 학교 문을 나서 20여 년간 ‘외도’를 한 후 다시 ‘책’에게로 돌아 왔을 때 제일 먼저 찾은 것이 역사관련 책들이었다. 고고학과나 사학과를 택하지 않은 걸 늘 후회해 온 터라 이제 그 부문의 책이나 실컷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외도’기간에 우연히 고대문명 발상지들을 자주 드나들었던 것도 그런 생각을 하는 데 한 몫 했다.
‘82년이었던가, 바빌론 성문 앞 간이박물관에 전시돼 있던 6,000년 전 호박목걸이가 하도 정교하고 아름다워 한참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함께 간 동료와 “우리 조상들은 저 시절에 뭘 했을까?”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속에서 돌촉 화살로 곰 사냥하고 있었겠지” 하는 대화를 나누며 실없이 웃던 일이 생각난다. 비교역사학을 공부해 보면 참 재미있겠다 싶은 생각이 그 때 문득 들었다. 그 호박목걸이에 대한 인상이 얼마나 깊었던지, 2003년 미국이 이락을 침공하면서 고대 유물들이 마구잡이로 약탈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갑자기 그 목걸이 생각이 간절하여 “바빌론의 그 목걸이도 털렸을까?”라는 제목의 낙서로 어떤 잡지 홈 페이지에 이렇게 올린 적이 있다. “20여 년 전/바빌론 이쉬타르 성문 앞 허름한 간이박물관에 / BC4000년에 주인 떠나보내고 / 홀로 남겨져 쓸쓸해 뵈던 그 호박 목걸이 /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목에 걸고 나가면 / 밀라노 어느 장인 솜씨냐고 / 보는 여인들마다 침을 삼키며 감탄을 연발할 것 같은 / 너무너무 정교하고 아름답던 그 목걸이 / <이게 6천 년 전 인간의 솜씨라니!> / 도무지 믿기지 않아 한참이나 사람을 붙잡아 놓던 / 먼지 뽀얀 유리 곽 속의 그 목걸이 / 그 목걸이도 이번 난리 통에 털렸을까? / 불쌍하고 아까워라! /............/ 혜초도 보고 감탄했을 바미안의 그 입 쫙 벌리게 하는 석불은 / 쾅쾅 대포 쏘아 박살내고 / 예수님 태어나기 수천 년 전 그 전설 같은 문명의 자취들은 / 백주에 먼저 본 놈들이 털어가 버리고 /......./ 참 잘들 논다 / 이게 어디 문명세상이냐 / 개판이지(2003년 9월14일, 에머지).”
한국사, 세계사 가릴 것 없이 역사에 관한 것이라면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무슨 박사학위 논문을 쓰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읽고 싶어 읽는 것이다 보니 자연 다독이 되었고,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보다는 그 주제를 증명하기 위해 펼치는 역사적 에피소드에 재미를 붙이는 독서가 되었다. 이런 책들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으로는, 나만갑의『병자 남한일기』(이기석역, 서문문고), 사르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안응렬.최석우역, 한국교회사연구소), 유성룡의『징비록』(이민수역, 을유문화사),『황사영 백서』(윤재영역, 정음사), 박지원의『열하일기』(윤재영역, 박영사), 박재가의『북학의』(이익성역, 을유문화사), F.A, 멕켄지의『대한제국의 비극』(신복룡역, 탐구당), W.E. 그리피스의『은자의 나라 한국』(신복룡역, 탐구당), 이븐할둔의『이슬람 사상』(김용선역, 삼성출판사), 토인비의『역사의 연구』(노명식역, 삼성출판사), 라이샤워, 페어뱅크의『동양문화사』(전해종, 고병익역, 을유문화사) 등이었다. 특히 19세기 말기 서양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이 한국에 관해 쓴 책들은 거의 빠짐없이 흥미롭게 읽었다. 사가들의 열 마디 설명보다도 직접 현장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사람들의 체험기가 당시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훨씬 나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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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내게 준 충격 『징비록』과『병자 남한일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관한 실상을 그 어느 역사책보다도 내게 가장 잘 전해준 책이다. 최근에 읽은『임진왜란과 병자호란』(정약용저, 정해렴역주, 현대실학사)은 이 두 책을 한데 합쳐놓은 것 같았다. 임금의 우유부단, 중신들의 공리공론, 장수들의 무책 무능, 오합지졸의 병사들, 지휘계통의 지리멸렬 등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왜군은 부산에 상륙한지 13일 만에, 청군은 압록강을 건넌지 8일 만에 서울 외곽에 다다랐다. 그냥 무인지경을 내달아 온 거나 다름없었다. 진중에 찾아와 적의 내습을 알려주는 백성들을 걸핏하면 민심소란죄로 죽였다. 진중의 군관이나 병사도 예외일 수 없었다. 험준한 요새인 조령을 버리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신립(申砬)은 적의 동정을 살피고 온 군관이 “적들이 벌써 조령을 넘어섰습니다.” 라고 보고하여 진중이 술렁거리자, “네 어찌 요망한 소리를 하여 군심을 어지럽히느냐”며 목을 베어버렸다. 장수나 군관이 장렬하게 싸우다 죽는 경우보다 도망치다 군율을 어긴 죄로 참수를 당하거나, 자결하거나, 거짓보고나 용렬한 상사에 의한 즉결처분으로 죽는 경우가 더 많을 지경이었다.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은 한강싸움에서 패한 후 부원수 신각(申恪)이 자기를 따라 개성 쪽으로 후퇴하지 않고 양주로 이양원(李陽元)을 따라갔다 하여 명령거역 죄로 임금에게 장계를 올렸고 임금 선조는 즉시 선전관을 보내 그를 참형토록 했다. 실제로 신각은 양주에서 임진란 발발 이래 첫 승리로 기록된 큰 전과를 올렸고 참소한 김명원은 연전연패 중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임금이 급히 사람을 보냈으나 신각은 이미 선전관의 손에 죽임을 당한 후였다. 병졸도 문제였다. 군역명부에 오른 사람들 대부분은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시에 소집되는데 오합지졸이기 일쑤였으며, 군역명부란 것도 엉터리여서 중앙에 집계된 수십만의 대군이 실제로는 그 수의 몇 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그들이 지급받는 무기도 칼은 녹슬어 칼집에서 빠지지도 않는가 하면 활은 좀이 먹어 한 번 당기면 뚝 부러지는 형편이었다. ‘000장군 휘하의 대군’이란 것이 실은 토크빌의 말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대군의 높은 사령부지만 실제로는 뒤따르는 병사 하나 없는 장교단에 불과했다." 이런 형편인데도 목에 힘주고 큰 소리는 잘 쳤다. 인열(仁烈)왕후 장례식 때 조문사절로 왔던 청의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를 전각이 비좁다는 이유로 전상(殿上)에는 오르지도 못하게 하고 따로 빈 장막을 쳐서 제사를 올리게 했다. 그들이 눈치를 채고 복병을 의심하여 달아날 때 길거리의 아이들은 돌과 기왓장을 던지며 야유했다. 심지어 조문하러 온 그들을 잡아 목을 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200여 년간 평화롭게 단일 이데올로기로 유지되어 온 사회여서 그럴까? 전쟁이라는 큰 쇼크를 받았을 때 보인 반응 가운데는 한심해 뵈는 것이 한 둘이 아니었다. 척화 한다면서 큰소리치는 모습이 얼마나 허황해 보였는지 황제의 포장소칙(??昭勅)을 전하러 온 명나라 사신(監軍 黃孫民)이 한마디 하고 있다. “귀국의 인심이나 기개가 결코 강대한 적의 침략을 당해내기 어렵다. 황제의 포장소칙이 있다고 해서 청과 화친하는 일을 끊지 마라.” 명나라에 대한 보은 때문에 나라의 존망을 걸고 척화를 하려는데 막상 명에서 온 사신이 청과 화친하도록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 * * * * 읽을수록 점점 늘어나는 궁금증 ‘임나일본부’설을 둘러싼 한일 학자들 간의 이견은 전혀 해소될 기미가 없어 보인다. 무엇이 문젠가 싶어 관련 책들을 사보았다.『일본서기』(전용신역, 일지사),『백제와 대화일본의 기원』(홍원탁저, 구다라 인터네셔널),『고대한일관계사』(김석형저, 한마당),『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김성호저, 지문사),『일본고대사연구비판』(최재석저, 일지사),『가야사 연구』(천관우저, 일조각),『고대 한일관계사 이해』(이노우에 히데오 외, 김기섭역, 이론과 실천) 등이다. 책마다 결론은 뻔했다. 일본학자들은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 했고, 한국한자들은 “없었다” 했다. 우리 측 학자들 가운데는 임나가 한반도가 아닌 대마도에 있었다는 사람도 있고(결국 임나의 존재는 인정한 셈이다), 북한의 김석형 같은 이는 임나일본부가 일본열도 안에 있었으며,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에 진출하여 세운 대소 분국들을 그들의 모국인 고구려·백제·신라가 지배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있었다”는 쪽은 기정사실화 한 듯 느긋하여 말이 적고 “없었다”는 쪽은 무언지 초조감이 보이고 구차스런 수식어를 많이 쓴다는 점이다. “없었다”는 쪽의 광개토대왕 비문 조작설에도 뭔가 허점이 많아 보이고 비문해석에도 좀 억지스런 구석이 있어 보인다. 칠지도의 명문(銘文)해석도 마찬가지다. 뭐니 뭐니 해도 문제는『일본서기』다. 우리의 삼국사기보다 정확히 425년 앞서 만들어진 이 ‘정사(正史)’에 분명히 “있었다”로 씌어 있는 것이다. ‘기록’의 위력이다. 남보다 더 오래된 훌륭한 ‘기록’을 갖지 못한 민족이나 국가는 손해 보기 마련이다. 우리도 4,5세기에 사서를 썼다는 말은 전해지지만 그걸 보존하지 못했으니 안 쓴 거나 마찬가지다. 당당하게 ‘기록’을 들이밀며 주장하는데 누가 당해 낼 것인가. 슬슬 부아가 치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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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중국 관광객이 경복궁을 자금성의 변소에 비유했다 하여 말들이 좀 있었다. 하기야 크고 화려한 궁성만 보아 오던 그들에게 “에그그 궁궐이란 게 왜 이렇게도 작고 초라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눈은 길들이기 나름이니까. 오랜만에 고향집엘 가보면 옛날에 그렇게도 커 보였던 안방이며 마루가 너무 작아 보여 어떻게 이런 곳에서 그 많은 식구들이 살았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중국에서 인기가 대단했다는 <대장금>을 보면 궁궐이 아름답기 그지없고 궁녀들이 쓰는 방도 크고 화려하다. 실제로도 그랬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경복궁엘 가보면 방들이 너무 작은 것에 새삼 놀란다. 정전을 제외하곤 대신들이 앉아서 정사를 논했다는 방들도 숨이 답답할 정도로 작아 보이긴 마찬가지다. 크고 화려한 서구의 옛 궁전들을 보다가 우리의 궁궐을 보면 솔직히 좀 초라해 보인다. 한말에 우리나라에 온 외교관들이나 선교사들에게도 우리의 궁궐은 그렇게 근사해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탈리아 외교관으로 한국에 온 까를로 로제티는 궁궐 대들보나 서까래에 울긋불긋 칠한 단청을 보고 유곽에 들어간 기분이었다고 적고 있다. 우리가 나서 자라온 옛 초가집이나 기와집까지 합쳐 우리의 주거환경에 대해 참으로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다. 그래 이것을 역사적으로 좀 알아볼 생각으로『한국건축의 역사』(김동욱저, 기문당),『일본건축사』(이무희저, 서민사)를 사 보았으나 아직 어떤 주장을 내 놓을 만한 단계까진 이르진 못했다. 중국건축사와 서구건축사에 관한 책을 읽어 본 후 나름대로 ‘우리 주거환경의 세계사적 위치’에 대해 이론을 세워볼 작정이다. 비록 나 혼자 알고 끝날 일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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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벼라 별 것이 궁금하기도 했다. 갑자기 우리나라 사람들이 입는 옷에 단추달기와 주머니 달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몹시 궁금했다. 조선시대 사극을 보면 남자등장인물들이 중요한 서류를 받아 큼직한 옷소매 안에 쑤셔 넣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옷에 주머니가 없다는 방증이다. 저고리나 두루마기엔 고름이 달려 있고 치마에도 끈이 달려 있으며, 바지도 천으로 만든 끈으로 허리에 질끈 묶었다. 단추나 버클이 달린 허리띠를 사용할 줄 몰랐다는 얘기다. 아무래도 단추나 버클, 그리고 주머니가 달린 조끼를 사용한 것은 서양 문물 덕택인 것 같다. 또 한 가지는 흰 옷에 대한 것이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좀 전만 해도 흔히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 하여 흰 옷 좋아 한 것을 무슨 긍지 비슷하게 여기는 풍조가 있었다. 어린 시절에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일을 하는 바람에 곧 더러워져 꾀죄죄해 보이던 기억과 겹쳐져 누가 자랑스레 백의민족 어쩌고 하면 “참 태평스런 소리도 하시네....” 싶었다. 명절 때나 출타 때를 제외하고 평소에 일반 서민들의 경우, 햇볕에 그을린 새까만 피부에 땟국이나 얼룩으로 더러워진 흰 옷을 걸치고 있는 모습은 굳이 몇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4,50년 전 우리네 농촌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 이전인들 오죽했으랴. 하멜은 그의 표류기에서 한국 사람들은 물을 대단히 증오하여 그들의 모습은 혼혈을 연상시킬 정도였다고 쓰고 있다. 물론 얼굴 이야기지만 옷도 그런 인상을 주는데 한몫 했을 것이다. 흰 옷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소박하고 가난한 살림살이 탓에 어쩔 수 없이 흰 옷을 입은 버릇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상류층의 경우이긴 하겠지만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무희들의 옷매무새며 옷감에 새겨진 무늬들을 보면 그 화려함이 보통 수준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1,500년 전과 비교하여 우리의 전통적인 복식은 그렇게 크게 발전된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여러 가지 의문들을 풀어 볼 요량으로 불랑쉬 페인의『복식의 역사』(이종남외역, 까치)와 이경자의『한국복식사론』(일지사)을 사 보았다. 너무 전문적인 책이어서 그런지(특히 후자의 경우), 내가 바라던 답들을 얻기엔 미흡했다. 내가 원한 것은 문화사적이고 비교사학적인 고찰이다. 이 부문에 관한 책들을 좀 더 많이 구해 읽어 볼 작정이다.
* * * * * ‘70년대 중반까진 소위 ’수출역군‘으로 참 무던히도 쏘다녔다. 큼직한 샘플 가방을 메고 중동의 두바이에서 서부 아프리카에 있는 라고스와 두알라로, 다시 캐나다의 핼리팩스로, 에콰돌의 과야킬로,... 공산국가들을 제외하곤 거의 안 가본 나라가 없다 싶을 정도의 수많은 나라들에 가고 또 갔다. 수출품이래야 초보적인 섬유제품이 고작이었다. 개인당 국민소득 기백 불 할 때였다.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우리 보다 수천 년 앞서 문명의 꽃을 피운 지역들이 그렇게 경이로울 수가 없었다. 70년대 후반기와 80년대 전반기의 중동 건설 붐 땐 중동과 지중해 연안 도시에서 건설 일로 6년여를 보냈다. 그리고 90년대엔 인터넷 컨텐쓰 작업에 또 수년 여를 보냈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경제가 새로운 계기를 잡고 도약을 꾀할 때 마다 꼭 그 현장에 참여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 나이 세대의 특징일 것이다.
그런데 지나온 일이 왜 이렇게 후회스러울까? 왜 헛살았다 싶은 생각이 자꾸 드는 걸까? 내 블로그의 자기 소개란에 “용이 되려다 이무기도 못된 퇴물”이라고 썼더니, 올린 글들을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왜 그런 자학을 하느냐고 댓글을 올린 분들이 몇 분 있었다. 자학이 아니라 솔직한 심경을 표현한 것이다. 예로부터 한 우물을 파라고 했는데 여러 개를 파려다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못 파고 말았기 때문이다. 본래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여 끝을 보지 못하고 20여년을 타율에 의해 질질 끌려 다니다 중도 속도 되지 못한 것 같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어릴 때부터 격에 맞은 정돈된 독서를 하지 못하고 마구잡이 독서를 한 탓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제 뒤늦게나마 내가 하고 싶었던 일과 비슷한 일을 하게 되어 얼마나 다행으로 생각하는지 모른다. (기획회의 178호, 2006.6.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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