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가는대로

"허준"을 보고 화가 난 이유

이강기 2015. 9. 9. 10:12

 

 

"허준"을 보고 화가 난 이유   

 

 

(2000.7.13)

 

얼마 전에 종영한 드라마 "허준"이 그렇게도 인기가 좋았다며 별 어울리지도 않는 후렴잔치까지 벌이는 것을 보고 왠지 짜증이 나고 울화가 치밀었던 기억이 난다. 더러 감동한 시청자들이 사이버 토론장에까지 그 감정을 묻혀오고 주연 배우 몇 몇은 돈방석에 올라앉았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거둔 드라마에 대해 나는 왜 이렇게 엉뚱한 감정에 빠지고 있었을까? 인기에 편승해 방영횟수를 늘이느라 전혀 돼 먹지 않은 짜집기식 스토리 전개로 역사를 왜곡한 것에 화가 나서 그랬을까? 그런 것도 같다. 또 그렇고 그런 드라마를 만들어 놓고는 무슨 명작이나 되는 것처럼 의기양양해 하는 스탭진들에 어이가 없어 그랬을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더 깊은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허준" 같은 드라마가 대단한 인기를 거둘 수 있는 우리의 풍토(문화)에 짜증이 나고 울화가 치민 것이다. 들리는 얘기로는 무슨 한의계통 협회에서 "허준"의 방영을 더 늘이도록 로비까지 했다고 하는데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허준"이 한의학에 대한 시청자들의 신뢰감과 인기를 한껏 올려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묘하게도 의사들의 폐업사태까지 겹쳐서 허준의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희생정신이 일부 시청자들에겐 눈물이 나도록 감동을 주기도 했을 것이다. "일부의 시청자들"이라고 한 이유는, 허준을 너무 비현실적이고 작의적으로 그린 것에 대해 역겨움 비슷한 것을 느낀 시청자들도 있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결코 한의학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한의학은 우리 나라에 신의학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명실상부하게 국민들의 건강을 책임졌고 지금도 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특히 침술은 그 신묘한 효능에 일부 서양의사들도 감탄을 한다는 글을 읽은 적도 있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한의학에 묻어있는 신비주의적 내지 주술적인 요소이다. 물론 이것은 한의사들이 만들던가 조장한 것은 아니고 중국과 한국에서 태고시절부터 조성되어 연연히 이어져 온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한의학이 그 득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본래 문자를 써서 하는 표현에 과장이 심한 중국인들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도 싶다. 중국인들은 편작(篇鵲)이나 화타( )의 전설적인 얘기에서부터 진시황의 불로초에 이르기까지 고대에서부터 명의나 불로장생에 대한 관심이 유달랐던 것 같고, 그러한 사고가 그대로 우리 나라로 전이된 것 같다. 일찍이 유일신앙이 뿌리를 내리고 내세관이 강한 중동이나 서양인들에 비해 만신신앙에 현세를 중히 여기는 동양적 특성이 "명의"를 많이 배출하고 불로장생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여준 게 아닌가도 싶다.

 

언젠가 신문을 보니까 세계 녹용생산량의 90%를 한국인들이 소비한다고 했다. 호주에 한국 녹용수출전용 사슴목장이 생긴지가 오래고, 별 쓸모가 없던 앨라스카나 시베리아의 말만한 사슴 뿔이 한국인들 바람에 대단한 소득원이 된지도 오래다. 동남아 보신관광이란 말도 이미 고전적인 용어가 돼 버렸고, 70년대 중동 건설 붐 때 공룡새끼 같이 생긴 사막의 큼직한 도마뱀들이 수난을 당하던 일도 이미 전설에 속하게 됐다. 건강식품이란 이름의 오만가지 "영약"들이 흘러 넘치고 있으며 버젓한 광고로 혹은 구전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중국의 땅꾼들이 한국인들의 건강을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살모사나 능구렁이 잡이에 나서고 있고, 앨라스카 에스키모들이 해구신 채취에 여념이 없다. 국내의 웬만한 산들은 오소리, 너구리, 고라니, 심지어 야생 고양이까지 잡기 위해 깔아놓은 올가미와 덫으로 길 아닌 곳은 사람들이 함부로 다니기조차 위험해졌다. 이 모든 진풍경이 장수와 정력에 환장들을 한 한국사람들 때문이다. 문제는 학계나 언론계 및 정부에서도 과학적인 연구와 분석을 통해 그것들의 비과학성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장수와 정력에 대한 한국인들의 신비주의적 내지 주술적인 믿음을 불식시킬 생각은 않고 일회성 단속이나 고발에 그치던가 때로는 오히려 조장하기까지 하고 있는 점이다. 아침저녁으로 시골 현지룰 중계하는 TV프로를 보고 있노라면 이게 특산물을 소개하는 것인지 무슨 보신용 건강식품을 선전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무슨 무슨 성분이 많아 건강에 좋고, 또 정력에도 좋다"는 말을 예사로 해댄다. 한번은 무슨 곤충전문농장이라며 TV에서 소개를 하는데 알고 보니 온갖 곤충과 굼벵이를 말려서 가루로 내어 암에 특효라며 파는 사이비 약장사 소개였다. 리포터는 그걸 버젓이 선전해주고 있었다.

 

아마도 한국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건강식"을 많이 섭취하고 "영약"을 많이 먹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건강하고 오래 살고 또 "정력이 세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가까운 일본인들에 비해서도 평균수명이 훨씬 낮고 노후 질병률도 높은 것으로 듣고 있다. 건강과 장수는 고른 음식물 섭취와 청결한 생활환경, 그리고 의료, 양로 등 사회보장시설의 완비에 있는 것이지 그까짓 과학적 증명도 제대로 안된 "건강식""영약"을 많이 먹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통계는 갖고있진 않지만 아마도 이런 사이비 식품과 약품에 들어가는 비용이 가히 천문학적일 것이다. 그 돈이 과학적인 건강정책에 사용되면 필경 평균수명이 일본을 따라잡고도 남을 것이며 우리의 의료수준이 최 선진국 수준에 이르게 될 것이란 생각도 든다.

 

더욱 통탄스러운 일은 각종 중환, 특히 암으로 시한부 생명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소위 "비의학적 약품의 무더기 투여"이다. 실제 치료제로 팔고 있으면서도 건강식품으로 포장을 하기 때문에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고 있다. 말기간암으로 죽어 가는 지기의 최후 몇 개월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의사가 6개월이라는 "선고"를 내린 후 가족들과 주위 가까운 사람들은 "신비의 영약"을 찾아 "3천리 강산"을 누비고 다녔다. 뽕나무 버섯이 기막힌 효험이 있다하여 강원도 어느 산골을 단걸음에 달려가 진짠지 가짠지도 모르는 것을 1 킬로그램에 수십 만원씩을 주고 사오기도 하고, "육각수"라는 "영험의 물"을 사기 위해 왼 서울 장안을 뒤지기도 하고, 다이아몬드 가루를 환부 바깥 쪽 가슴에다 붙이면 좋다하여 익산의 인조다이아몬드 공장을 찾아가 사정사정하여 샘플을 얻어오기도 하였다. 또 고찰의 지붕 위에 난 무슨 종류의 버섯이 좋다하여 어느 허름한 절 지붕에 올라가 이상한 풀을 뜯어와 먹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굼벙이 가루, 동충하초가루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종류의 "영약"들을 구해 먹였다. 결국 환자는 선고가 내려진지 3개월만에 지성으로 애쓴 보람도 없이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는데, 나중에야 깨달은 일이지만 그런 "독소들"을 투여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몇 개월은 더 버텼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슬픔에 이성을 잃고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어진 가족들과 이들을 노린, 돈에 눈먼 사기꾼들이 함께 벌인 해프닝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영약"에 대한 한국인들의 강한 신뢰감, 이른바 신비주의 내지 주술심리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산삼이 수백 수천 만원에 팔리고 있는 사회 분위기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배울 대로 배우고 도무지 그런 사기꾼들 말에 속아넘어가지 않을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들도 일단 극한상황에 몰리면 이성을 잃고 그런 신비주의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애달픈 일은, 이번엔 죽은 그 지기의 동생이 또 간경화 초기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고 안식구들이 옛날에 형에게 먹이던 "영약"들을 또 마구잡이로 투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형의 경우를 옆에서 지켜보며 사기꾼들에게 놀아난 것에 분개해 마지않던 바로 그 사람들이 바로 그 사기꾼들에게 다시 펑펑 돈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여러 경우의 실패담을 들려주고 또 바로 형의 경우도 있지 않느냐며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병원에서 주는 약만 먹여서는 도무지 불안해서 못 견디겠고 또 누가 그러는데 그런 약들을 먹고 완쾌됐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병원에 들어가는 돈보다 그런 사제 약에 들어가는 돈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멀쩡한 사람들이 앓고 있는 이 "중병"을 어떻게 치유해야 한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장수와 정력, 그리고 죽어 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사이비 "건강식""영약"에 대한 신비주의와 주술적 심리를 불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사회분위기는 치유와 불식은커녕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오히려 더 극성을 떨고 있는 것이다. "허준"이 절정의 인기를 끈 이유도 바로 이런 풍토(문화)때문이었고, 그래서 짜증이 나고 울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하기야 전통문화 장려차원이라면서 무당과 점술가들을 TV에 출연시켜 명사행세를 하게 하고, "전설의 고향", "전설따라 삼천리" 따위의 귀신 얘기를 줄기차게 내보내고, 보신에 들어가는 돈이 천문학적인 숫자에 이르는 사회에서 드라마 하나 가지고 시비를 거는 일 자체가 웃기는 일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