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역사적 평가
2000. 3. 27
이세천 선생님
정말 어려운 질문을 주셨습니다. 저가 과연 선생님의 질문에 답을 드릴 수 있는 자격이나 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리고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왜 갑자기 총선을 앞두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역사적인 무게에 대한 논란이 뜨거워졌는지, 또한 저가 왜 이처럼 목에 핏대를 올리며 그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게 됐는지 사실 저자신도 얼떨떨합니다. 어떤 네티즌께서 하도 그에 대한 비논리적인 비난을 해대기에 그게 그런게 아니다는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 점점 확대되어 마치 박정희 숭배자(어떤 네티즌께서는 추종자라고 딱지를 붙입디다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그저 마음속으로 "누가 뭐래도, 박정희는 우리 역사에서 세종대왕과 쌍벽을 이루는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는 좀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었지, 왜 그렇다고 생각하느냐, 그럼 그의 과오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등등에 관한 질문에는 솔직히 확실하게 답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이 선생님, 세종대왕이 여나무 명(정확한 숫자가 기억 안 납니다만)의 부인에 서른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요즘 어린 학생들에게 얘기하면 그들은 어떻게 받아드리겠습니까? 현대적인 해석으로는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 용납이 안될 일이지요. 또 한남자가 서른 두 명씩이나 자녀를 둔다면 그 인구증가율은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사회적 경제적인 면에서도 비난을 받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세종대왕을 평가할 때 절대로 그런 얘기는 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다 몰라서 그렇지 세종대왕 역시 많은 인간적인 과오를 범했겠지요. 마음속으로 범한 잘 못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것이고요.
박 전대통령의 인간적인 과오 내지 권력을 위해 때로는 국민들을 기만했던 과오가 부각이 되는 것은 그가 아직도 우리들에게서 너무 가깝게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와 같이 식사를 하고 얘기를 하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던 사람들이, 그에게서 은혜를 입은, 그에게 원한을 가진, 그의 치세에 대해 불평불만을 하던 사람들이 아직도 펄펄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인 평가는 적어도 한 세대 후에나 한다고 했는데, 그가 하세한지 아직도 20년 밖에 되지 않았지 않습니까? 저의 박대통령에 대한 평가야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에 불과하니까요.
또 한가지는, 박전대통령은 성인군자로서가 아니라 정치지도자로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학교시절 어떤 모임에서, 삼국지에 나오는 수많은 영웅들 중 누가 가장 뛰어난, 그리고 바람직한 지도자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격론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대다수 의견이 조조를 지목했다는 점입니다. 제갈공명을 좋아했던 저는 도무지 그러한 결론에 수긍이 가지 않았지만 그 후 나이를 먹어가며 그 당시 조조 편에 손을 든 친구들의 혜안이 놀라워지더군요. 저는 인간에 중점을 뒀고 그들은 정치에 중점을 뒀기 때문에 답이 달랐던 것입니다. 박정희를 잘 아는 누군가가 있어서 그의 정치적인 과오와 인간적인 과오를 일일이 들추어내려면 선생님이 지적하신 그것뿐이겠습니까?
아이들에게 굳이 영웅으로 만들어 줄 필요야 없겠지요. 아울러 그의 인간적인 과오까지 까발릴 필요도 없을 거구요, 정치적인 공과는 있는 그대로 얘기해줘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박정희를 역사상의 인물로 보지 않고 바로 우리 곁에 있었던 사람으로 계속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문제가 더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또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에서의 그에 대한 평가가 바뀌는 것도 문젭니다. 박정희 신드롬도 막아야겠지요. 오히려 올바른 평가를 그르칠 수도 있으니까요. 지금 선거 때라 '경상도 정권', '전라도 정권'이 도마 위에 오르고 '경상도 정권의 원조' 인 박정권(박정희)이 공방의 대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전혀 바람직하지 않는 일입니다. 저도 어쩌다가 휩쓸리긴 했습니다만 앞으로는 가능한 한 삼가겠습니다. 저는 머언 훗날의 박정희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강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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