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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 재생에의 도전 ......닛산자동차를 재생시킨 카롤로스 곤 사장 자서전

이강기 2015. 9. 9. 11:47

르네상스 - 재생에의 도전

 

    - 닛산 자동차를 재생시킨 카롤로스 곤 사장 자서전

 


 


 

첫머리에

 


 

  르네상스 - 그것은 부흥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는,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문화와 예술이 부흥했던 시대를 가리킨다. 당시의 예술가, 작가, 사상가들은 서양문명의 뿌리를 옛 그리스-로마에서 찾으려 했고, 회화나 문학에서 과학, 철학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로마 양식을 도입했다. 그리스.로마 문화의 부활은 중세 유럽을 지배해 온 신앙의 여러 족쇄들을 단절시켰다.

 

  중세 유럽인들은, 인간은 지상에서는 고통을 강요당하지만, 죽으면 천국에서 영원한 보상을 받는 것으로 믿었으며, 의심 없이 운명을 받아드렸다. [왜 우리들은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고 묻는다면, 그들은 입을 모아 [왜냐하면 우리들이 늘 이렇게 해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의 결정이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도래와 함께 유럽인들은 다시 인간을 존재의 중심에 놓게 되었다. 그들은 그때까지 받들어 온 방법과 확고한 신념에 도전했다. 낡은 도그마를 미련 없이 버리고 사물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사고방법을 체득하는데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예술과 과학의 재발견에, 더욱이 신세계로의 여행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오늘날 닛산자동차에서는 또 한번의 르네상스가 진행중이다.

 

  종래 닛산이 매달려 온 사고방식과 방법은 글로벌시장의 시련과 필연성에 의해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도산의 위기가 찾아 온 것이다. 사원들 대다수가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굴레에 얽매여 효과적인 수단을 강구할 수 없었다.

 

  닛산 리바이벌 플랜(NRP=Nissan Revival Plan)은 경영의 중심에 사원들을 되돌아오게 함으로서 닛산 르네상스의 막을 열었다. 사원들은 종래의 비즈니스 방법의 유효성에 의문을 갖게 되었으며, 안온했던 기분 좋은 전통에 과감하게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 때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되찾았으며, 경쟁이 치열한 자동차시장에서 비즈니스를 전개해 나갈 토대를 재구축 했다. 또한 글로벌전략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손으로 회사의 진로를 개척해나간다는 본연의 업무로 되돌아왔다.

 

  닛산 르네상스는 개혁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진행상의 위험을 감수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회사에 대한 긍지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닛산 르네상스에 대해 내가 수행한 역할은 무엇일까? 이 책을 쓰려고 마음먹었던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이나 전문가로서의 경험에 관해 내가 이렇게나 많은 것을 밝힌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니, 나로서는 책을 쓰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나는 닛산을 부활시키기까지의 나 자신의 인생을 더듬어보려고 마음먹었다. 요즈음 나 개인에 관한 기사나 책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그 내용을 보아하니, 스스로 모든 것을 분명히 밝혀 내가 행한 것에 관한 판단을 독자들에게 맡기고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내려온 결단의 이유와 근거를 꼭 이해시키고싶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책을 쓰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일본이 경기침체로부터 빠져 나와 그의 높은 잠재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작금에 관심을 모으고 있는 논의에 조그마한 공헌을 하고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있는 것, 지금 닛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뭔가 참고가 된다면 다행이겠다.

 

  하지만 이 책은, 이대로만 하면 좋아진다고 하는 절대적인 처방전은 아니다. 기업의 의사결정자에게는 많은 선택사항이 있는 법이다. 닛산 리바이벌 플랜의 접근방법과 수순은 수많은 선택사항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다만 기업재건에 힘을 쏟아 온 나의 경험과 통찰이 일부 일본기업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난문제의 해결에 얼마간의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나는 닛산에 관계하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일본의 여러분들에게,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일을 이해하고 협력하고 지지해 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도 이 책을 쓰게 된 동기 중의 하나다.

 

  끝으로 이 책은 무엇보다도 일본의 여러분들이 널리 읽어주셨으면 하는 생각에서 썼다는 것을 기록해 두고 싶다. 여러분들은 나와 나의 가족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다. 이 책은 말하자면 그 답례이다. 하지만, 일본은, 내가 은혜를 갚을 요량으로 무엇을 한 대도 도저히 갚을 수 없을 정도의 것을 앞으로도 줄 것임에 틀림없다.

 

 

 

                                        카롤로스 곤

 


 


 

르네상스........... 목차

 

 

 

첫머리에...................

 


 

프롤로그 - 내 나름의 방식..............

 


 

I부 - 형성기.............

 


 

1 - 브라질에서 태어나서..............

 

2 - 학창시절...............

 


 

II부 - 미쉐린에서...............

 


 

3 - 이른 아침에 걸려온 전화............

 

4 - 공장에서 배운 교훈.............

 

5 - 브라질 파견.............

 

6 - 인생 최선의 결단.............

 

7 - 하이퍼 인플레이션과의 싸움........

 

8 - 곤 가든.............

 

9 - 미국으로...........

 

10 - 어려운 나날들.............

 

11 - 전기(轉機)..............

 

12 - 정리(情理)를 끊다..........

 


 

III부 - 러노에서.............

 


 

13 - 고민하는 명문기업.............

 

14 - 200억 프랑의 경비절감..............

 

15 - 파트너 탐색...............

 

16 - 일본행 결심.............

 


 

IV부 - 닛산에서..............

 


 

17 - 불타고 있는 갑판.............

 

18 - 경영부재.............

 

19 - 크로스 펑크셔널 팀(cross functional team)...........

 

20 - 닛산 리바이벌 플랜...............

 

21 - 플랜 180.............

 

22 - 글로벌 얼라인스(gloval alliance).............

 

23 - 매니지먼트의 변혁..............

 

24 - 인재야말로 닛산의 강점..........

 


 

V부 - 가족.세계............

 


 

25 - 부모로서............

 

26 - 사고(思考), 언어, 국가..........

 


 

에필로그 - 나의 투쟁은 지금부터다...........

 


 

감사의 글..........

 

일어판 역자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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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 재생에의 도전

 


 


 

       신뢰받는 것만큼 큰 기회는 없고,

 

         기대에 부응하는 것만큼 큰 만족은 없다.

 


 


 

프롤로그 - 내 나름의 방식

 


 

항상 받는 질문

 


 

  나는 곧잘 이런 내용의 질문을 받는다.

 

  [곤씨에게는 어떤 비결이 있습니까? 장애 투성이의 상황을 극복하고, 사람들이 백기를 들고 항복해야할 것 같은 가혹한 환경에서 회사를 바로 세우는 -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어디에선가 훌륭한 선생님으로부터 비결을 전수 받았습니까? 아니면 책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입니까? 제발 곤 방식의 경영비결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경제학은 약간 배웠지만, 비즈니스 스쿨에서 비즈니스나 경영에 관해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대학시절의 전공은 엔지니어링이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스승으로 불릴 만한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누군가 한 사람만 거론할 수는 없는 일이다. 4반세기 가까운 비즈니스 인생에서 나는 유럽, 미국, 일본의 수많은 최고 경영자들과 만났고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바로 이분이 스승]이라고 부를만한 유일무이의 인물이 나타난 것은 아니다. 물론 최고경영자에서 현장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경영에 관해 항상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가르쳐주었다.

 

  주제넘은 얘기지만 기업재건에 관한 것을 어떤 책에서 배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책으로부터 배운 것은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런 종류의 책을 읽을 필요성을 한번도 느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의 업무방법을 아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결국 자기 자신이 실제로 부닥쳐서 이기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경영이라는 것은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닦은 직인(職人)의 손재주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비결 따위는 없고 실제로 자기자신이 보살피고 시행착오를 하고 수많은 중요 결단을 내림으로써 배우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실제경험을 하나씩 쌓아감으로써 경영효과를 높이는 기본적인 툴(tool)을 발견할 수 있으며, 하나 하나의 문제에 도전함으로써 그 툴에 연마가 가해져 명석한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곤 식(式) 경영

 


 

  이것으로는 지나치게 틀에 박힌 얘기라고 낙담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은 알고 있다. 우리들이 듣고싶은 것은 당신이 성공한 이유이다.]고 할지 모르겠다.

 

  확실히 복잡한 방정식으로라도 흑판에 써서 [이러한 경영 방정식에 따르면 당신들도 회사를 재건할 수 있다.]고 보증한다면 기뻐할 지 모르겠다. 또는 [무엇인가 결단을 내릴 때는 행운의 수호신을 달래며 소원을 빌고 있다.]고 말한다면 납득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에게는 이런 종류의 방법으로 만족을 줄만한 답은 없다.

 

  문제는 매우 간단하다. 나는 실제경험을 쌓음으로써 여러 가지 경영의 기초를 배웠다. 그것뿐이다. 그 기초라고 하는 것은 요컨대 문제를 특정하여 우선 순위를 정하고, 여러 레벨에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하는 것이라는, 이른바 비즈니스 스쿨의 경영입문서에 쓰여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곤씨, 경영입문서를 읽으면 누구나 닛산의 사장이 되는 것입니까?]라는 소리를 듣게 될 지 모르지만, 읽는 것만으로는 얘기가 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읽은 것을 실행하여 결과를 도출함으로써 얘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곤 식(式) 경영 스타일]을 이해시키기 위해 내가 아래와 같은 신문구인광고를 읽고있다고 상상해 줬으면 좋겠다. 

 


 

인재모집!

 

  문제점을 안고있는 일본 자동차 메이커의 재건을 청부맡을 사장 모집함. 다문화(多文化) 환경에서의 경영경험을 필요로 함. 성과주의 경영 지향성이 강하고, 회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분석적으로 또는 명확히 설명할 능력이 있는 사람. 문제해결에 있어 부문횡단적인 접근방법을 도입하여 자신이 내린 결단에 책임을 지는 사람. 장기적인 목표를 시야에 넣고 단기목표를 조준할 수 있으며, 위기를 벗어난 상황에서도 조직에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 유모어 센스가 있으면 더욱 환영.

 


 

  이런 조건이라면 나 자신 자격 있는 인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닛산에 왔을 때 나는 바로 지금까지의 인생과 커리어는 모두 닛산에서 수행해야할 역할을 위한 준비였다고 느꼈다.

 


 


 

풀 수 없는 문제는 없다

 


 

  [곤 식 경영스타일]의 진화의 족적을 더듬다보면, 1978년, 미쉐린사의 신입사원으로서 생산현장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던 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려운 문제를 책임 맡고, 가혹한 비즈니스 조건 아래서 사람들과 상황을 관리하는 일에 수완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차츰 [곤 스타일]이 형성된 것이다.

 

  수익을 올리는 회사로 만들기 위해 경영자가 꼭 갖춰야할 덕목은 문제의 핵심을 간파하는 능력이다. 이것은 내가 배운 큰 교훈 중 하나다.

 

  지금까지 경영난에 빠진 회사를 맡을 때, 미리 해결책이 나와있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타개책을 발견하지 못한 적도 한번도 없었다. 이것은 오로지 기능부전으로 이상이 온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사태에 몇 번이나 조우함으로써 어떤 문제에서도 핵심을 간파할 수 있으면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풀 수 없는 문제는 없다]고 하는 격언이 옳다는 것을 경험이 실증한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은, 문제의 전체상을 보지 못하기도 하고, 선입관에 얽매이기도 하고, 전통이나 관습이 장애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경영자들이 실로 많다는 점이다. 그들은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하고, 문제에 접근하지도 못한 체 몸통 없는 계획 작성에만 시종(始終)한다. 이럭저럭하는 사이에 문제는 점점 복잡하게되어 대처할 수 없게 되고 해결에 이르는 길도 더욱 험난해지게 된다.

 

  이런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경영자로서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는 위기감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거꾸로 말하면, 곤씨는 일이 잘 진행되기 시작하면 업무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나의 자세는 이러하다.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위기적 상황에 대응한다. 업무에는 긴장감이 필요하다. 나는 몇 시간만 회사에 모습을 보이고 그 후에는 골프장으로 직행하는 유의 경영자가 아니다. 긴장감은 곤 식 경영스타일의 필수조건이다.

 

  그렇다면 위기가 없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나는 새로운 목표 레벨을 설정하기도 하고, 새로운 도전기회를 주기도 하는 방법으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회사가 이러저러한 형태로 위기의식을 지속할 수 없게 되면, 사원들의 모티베이션이 뚜렷하게 둔화되며 진짜 수익성과 관계되는 큰 것들을 경시하게 될 것이다.

 

  입사하여 얼마 되지 않은 무렵, 최고 경영자로부터 아주 먼 위치에 있었던 나에게는 이런 종류의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방법이 없었다. 회사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을 것이라고 여러 번 느꼈지만, 상사나 동료들 가운데는 고위 레벨에 도달하려는 의욕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경영 톱에게도 사원들을 고무하는데 필요한 리더십이 결여돼 있었다. 긴장감은 톱이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도 내가 몸소 배운 교훈의 하나다.

 

  교훈은 또 있지만 이제 곧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할 작정이다. 여기에는 [곤 식 경영스타일]의 에센스와 그 형성에 여러 가지 의미로 영향을 준 사람들이나 사건들이 등장한다. 이 책을 읽게되면, 나의 지금까지의 인생과 일에 관해, 그리고 프랑스 국적을 갖고있는 브라질 태생의 레바논계 비즈니스맨이 어떻게 하여 일본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로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I부 - 형성기

 


 

1 - 브라질에서 태어나서

 


 

브라질에 이민 온 조부

 


 

  나의 일가 내력은 꽤 복잡하다. 시대는 20세기로 넘어 올 무렵, 친가 쪽 조부인 비샬라가 레바논에서 브라질로 이주했다. 그가 13세 때의 일이다.

 

  북해도의 7분의 1 크기 밖에 안 되는 조그마한 나라인 레바논은 조부가 자랄 무렵엔 오스만 터키 제국의 일부였다. 레바논은 1842년에 기독교 지구와 이슬람교 지구로 갈라져 서로간에 종교적인 증오감이 높았다. 특히 기독교도들의 거주지구 대부분이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생활이 곤궁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집트를 비롯해 아프리카 각지와 북미, 남미, 동아시아 등지로 이민을 갔다. 오늘날까지도 본국에 살고 있는 친족들에 대한 이민자들의 송금이 레바논 경제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조부는 사람들이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산간의 한촌에서 자랐다. 조부의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남미로 이주했다. 마을 사람들은 고향을 등지는 조부에게 브라질에 도착하면 연락해 보도록 마을출신 이민자들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주었다. 이리하여 10대 중반으로 막 접어들고 있을 뿐인 소년은 자신의 손으로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난 것이다.

 

  배는 3개월이 걸려 브라질에 도착했다. 조부는 배의 항적을 불안한 표정으로 응시하면서, 이 곳에서는 과연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이 낯선 나라에서 어떻게 해서 먹고  살면 좋을 것인가 하며, 도망치고싶은 기분과 필사적인 심적 투쟁을 했음에 틀림없다. 교육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받아 본 적이 없어 읽고 쓸 수도 없었으며, 말도 아랍어밖에 몰랐다. 그러나 그는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남아있는 길이라곤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이민으로 브라질 땅을 밟았던 그는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는 것을 자력으로 확인하고 판단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길가에 쓰러져 죽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하찮은 일도 닥치는 대로  했으며, 이 곳 저 곳으로 일자리를 옮겨다녔다. 이럭저럭 하는 사이에 그는 날마다 접하는 브라질인들의 폴투칼어를 알아듣고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성장해 가면서 그는 돈 버는 기회를 포착하는 후각이 몸에 배었다. 이윽고 잡화점을 열어 이웃 농가에서 사입해 온 작물을 팔게 되었다. 그 경험으로 어떤 지방의 농산물을 국내 다른 시장이나 인근 국가로 수출하는 무역업을 할 요량으로 회사를 만들었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를 연결하는 브로커로서 활약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조부는 새로운 비즈니스에 손을 댔다. 당시 브라질정부는 항공회사들에게 국내선 항공망을 정비하도록 장려하고 있었다. 여기에 눈을 돌린 그는 업무확대를 노리고 있는 항공회사 지점들을 상대로 에이전트, 컨설턴트, 중개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를 설립했다. 이것은 가족들을 위한 거대한 일보(一步)였다. 나중에 나의 부친은 조부의 이 사업의 일부를 인계 받게 된다.

 

  조부는 브라질의 한 병원에서 외과수술을 받다가 사망했다. 아직 50대였다. 1940년대 후반브라질의 의료수준은 지금보다도 훨씬 낮았으며 조금만 어려운 수술이 되면 살아날 확률이 반반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유감스럽게도 조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지만, 나는 뇌리에 조부의 얼굴을 생생하게 그려 낼 수 있다. 양친이나 친척들이나 조부의 친구들이 틈만 있으면 조부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그의 공적을 칭찬해댔기 때문이다. 그는 빈주먹으로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일구어 낸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 대기업에 취직하여 큰 조직이나 조직망을 배경으로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고 있다. 이런 오늘날의 성공의 척도에서 본다면 조부의 업적은 그렇게 눈부신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

 

  요즘 세상에서는 겨우 13세의 소년이 배에 올라 생면부지의 나라에 던져져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다는 이야기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세상은 변했어도 조부가 지니고 있던 자질, 즉 결단력과 집중력과 전향적 자세는 오늘날의 인생시련에서도 충분히 통용될 수 있는 것이다.

 


 


 

부친의 결혼

 


 

  부친인 조지는 브라질에서 태어났다. 그를 포함하여 남자 4명 여자 4명의 아이들이 있는 대 가족이었다. 레바논계 브라질인들의 사례에서 흔히 있는 일로 그도 또한 고향에서 살아가고 있는 친족들과의 유대를 유지하기 위해 이따금씩 레바논에 다녀왔다.

 

  어느 해 그는 결혼상대를 물색하기 위해 조부가 살았던 레바논의 고향 마을에 갔었다. 마을 사람들은 처녀 하나를 소개하고, 유서 깊은 가문이며 틀림없이 훌륭한 아내가 될 것이라고 확실한 보증을 했다. 그녀의 이름은 로즈였다. 그녀의 양친은 그녀를 예쁜 장미를 의미하는 로제트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그녀는 젯타로 불리었으며 지금은 젯타 쪽으로 아주 정착돼버렸다.

 

  그녀도 이민가계 출신이었다. 모친의 부친 즉 외조부는 레바논에서 나이지리아로 이민하여 자전거에서 땅콩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상품을 취급하는 무역회사를 만들어 생계를 잇고 있었다.

 

  레바논인 이민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취학연령에 도달할 시점이면 처자를 레바논에 보내고 부친은 외국에 남아 생활비와 교육비를 송금하는 패턴이 그렇게 진귀한 일이 아니다. 모친은 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근처의 프랑스 통치하의 도시에서 태어나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그녀는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그 곳에서 자랐으며, 그 후 외조모와 함께 레바논으로 돌아가 프랑스계 학교에 입학했다. 모친은 소설에서도, 영화나 음식에서도 여하간에 대단한 프랑스광으로서 친프랑스주의자를 자칭함에 주저하지 않았다.

 

  부친과 모친은 레바논에서 만나 서로 마음에 들어 결혼을 결심했다. 모친의 부모님도 이 결혼을 기꺼이 승낙했고, 모친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을 기뻐했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잠시동안이나마 그대로 레바논에 머물렀다. 아마도 부친은 처음부터 브라질에서 결혼생활을 하는 것은 비참할 것이라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당시 부친은 조부의 사업 일부를 물려받았는데, 아마존 지역의 항공망을 개발하는 사업과 관계된 것으로 브라질에서도 오지인 포르토 벨리요라고 하는 도시에 사업체가 있었다. 그 관계로 신혼의 단꿈도 꿀 새 없이 두 사람은 이윽고 이 오지에서 생활하기 시작한다.

 


 


 

열대에서의 생활

 


 

  포르토 벨리요는 브라질 서부, 볼리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론드니아주의 주도(州都)다. 시의 북동쪽을 가로지르고 있는 마디이라 강은 2천 마일 저쪽에서 아마존강과 합류한다. 이 곳은 브라질 북서부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선편으로 국내와 국외시장으로 수송하는 거점이며, 개척자들이나 비즈니스 기회를 포착하려는 사람들이 떼거리로 몰려드는 곳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대자연의 경관이나 장대한 테오토니오 혹은 산 안토니오 폭포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관광지가 되고 있다.

 

  그러나 50년 전의 포르토 벨리요는 발전도상에 있었으며 생활조건이 혹독했다. 가장 가까운 도시와의 교통수단은 주로 열차나 나룻배였다. 기온도 습도도 높았으며, 열대 특유의 질병을 매개하는 모기가 우글거렸다. 강에는 피라니아 물고기가 득시글거려 찌는 듯이 더워도 마음놓고 물에 뛰어들 수도 없었다. 물은 끓인 후 식혀 마셨다. 사람들은 가난에 찌들었으며, 빈곤과 가혹한 생활조건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먹거리나 금품을 구걸하러 다녔고, 임시변통으로 얼기설기 엮어 논 초옥(草屋)이나 노상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1945년 3월 9일, 나는 이 도시에서 태어나 젖먹이 시절을 보냈다. 나는 둘째인데, 세 살 연상의 누이인 클로딘도 이 곳에서 태어났다. 두 여동생인 실비아와 네이라는 나중에 레바논에서 태어났다.

 

  포르토 벨리요 시절의 기억은 거의 없으며, 모친과 누이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밖에 남아있지 않다. 누이 이야기로는, 내가 그녀에 비해 아주 온순한 아기였다고 한다. 누이는 본인 말에 의하면 꽤 발랄하고 수다스런 아이였던 것 같다. 당시 부모님은 어린 누이가 이 곳의 원시적이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놀지 못하도록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러한 때에 내가 태어남으로서 누이는 동류가 생겼다고 매우 좋아했던 것 같다.

 

  부모님은 누이에게 [생수를 마시지 마라! 강 근처에는 가지 말아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당부하곤 했다. 그러나 부모가 아무리 주의를 해도 아이들을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지켜낼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한 살 되었을 때 부모님은 가사나 아이들을 돌보는데 도움을 받기 위해 마을의 한 처녀를 고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처녀는 무심코 어린 아기인 나에게 생수를 먹이고 말았고, 그 바람에 나는 중병에 걸렸다.

 

  의사의 처방약이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몹시 걱정했다. 의사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포르토 벨리오를 떠나 기후가 온화하고 물이 깨끗한 곳으로 이사를 가야한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부친은 사업문제로 이 땅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서로 떨어져 살게 되었다. 모친은 부랴부랴 누이와 나를 데리고 리오데자네이로로 이사를 하여 아들을 돌보았다. 리오데자네이로는 훨씬 위생상태가 좋고, 습도도 낮았지만, 기온은 변함없이 높아, 결국 내 병은 완치되지 못하고 허약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레바논으로

 


 

  이윽고 나의 가족에게도, 부친은 브라질에 남고 모친과 아이들은 레바논으로 돌아갈 때가 왔다. 내가 6살 무렵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 때 부모님은 괴로운 선택을 강요당했을 것이다. 우리들 일가도 고국을 떠난 다른 레바논인 가족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부친을 만나는 것은 그가 레바논에 왔을 때와 우리들이 브라질을 여행했을 때뿐이었다.

 

  서로 떨어져 살지 않을 수 없었지만 가족의 유대는 강했다. 어느 곳에 살아가든 레바논인 가족들에게는 강한 유대가 있다. 가족에 대한 책임, 좋은 부모로서, 좋은 부양자로서의 책임은 무엇보다도 우선시 된다. 이러한 가족관은 레바논인 문화에 깊이 새겨져 있다.

 

  나의 부모님은 지금의 여느 부모들에 비해 훨씬 엄격했다. 누이와 나는 양친이 정해 논 가정 규칙을 착실하게 지켜야 했다. 취침시간이 되면 둘 다 전등을 끄고 침대에 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그나마 엄격하게 일상생활의 예의범절을 가르쳐 몸에 붙게 해 준 덕택으로 내가 규칙 바른 생활습관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기간 내에 여러 가지 업무를 정연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규칙을 강압하는 엄격하기만 한 부모님은 아니었고, 훌륭한 조언자이기도 했다. 부친도 모친도 항상 유익한 충고를 해줬다. 상당히 문제가 되는 행위를 했을 때에는 엄격하게 경고도 했지만, 나의 인생에 말참견을 하여 이러저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라고 하든가, 이러저러한 직업에 취업하라는 등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레바논에서 지났던 유년시절이나 10대 전반의 시기에 가정의 중심은 항상 모친이었다. 그녀는 현실적이고 애정이 넘쳐흘렀다. 과보호는 아니고 스스로 생각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리도록 자유를 주었으며, 필요할 때는 반드시 옆에 있어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었다.

 

  부모님의 아이들을 대하는 방법에는 감사의 말밖에 할 것이 없다. 그래서 나도 내 자식들에게 꼭 같은 방법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부모가 충고하고 이끌어줌으로써 언젠가 나의 자식들도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갈 것이다.

 


 


 

2 - 학창시절

 


 

레바논에서 처음 만났을 때 우리들은 여덟 살이었다. 우리들은 곧 좋은 친구가 되었다. 같은 반이었으며 거의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다녔다. 그는 특히 머리가 좋고 영리한 아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제나 그가 주도권을 행사했으며, 지금도 우리들이 만난다면 그것은 변함이 없을 것 같다. - 쟈드 네메(현재 레바논에서 개업중인 신경외과 의사)

 


 


 

노틀담 칼리지

 


 

  고등학교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속박도 번뇌도 없고, 그만큼 자유로운 때가 두 번 다시는 없다고들 한다. 나의 경우는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레바논 시절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은 10년 가까이 다녔던 예수회 계통의 학교인 노틀담 칼리지에 얽혀있는 추억이다.

 

  10대가 되자 나는 규율을 어지럽히는 문제아가 되었다. 수업이 지루하여 불만스러우면 무언가 장난을 쳐서 수업방해를 하고싶어졌다. 그런 때에는 언제나 앞장서서 무슨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

 

  잊혀지지 않는 일로, 열 한 살 때 나는 머리칼을 길게 기르기 시작했다. 예수회계통 학교에서는 남학생들의 머리칼 길이를 정한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예상대로 한 선생님이 다가와서 말했다.

 

  [곤군, 군의 장발을 보고 있노라면 나 자신의 신앙에 회의감이 드는군. 혹시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고 하는 설이 맞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야.]

 

  나는 앞 뒤 생각지 않고 죠크로 응수했다.

 

  [하지만 선생님, 선생님을 보고 있으면 인간은 원숭이로 퇴화하고 있다는 설 쪽이 옳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선생님에게 유모어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어지간히 화가 났던지 나는 방과후에 남는 벌을 받았다.

 

  이런 식의 철없는 장난이나 죠크로 나는 문제아의 낙인이 찍혔다. 실제로 졸업앨범 사진 밑에 편집위원들이 [카롤로스 곤 - 장래 남미 게릴라 두목?]이라는 익살스런 코멘트를 달아 놓았다.

 

  퇴학처분을 받지 않은 것은 나의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경쟁의식이 특히 강했다. 무엇이든 경쟁하는 데는 꼭 참가하여 대체로 좋은 결과를 거뒀다. 학교에서는, 노력하여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학생을 평가하고 있었으며 좋은 성적을 올리는 학생에게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나는 아마도 다른 학생 이상으로 관대한 처우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공부를 할 때에는 단정히 앉아서 끝까지 해내고 집중력도 있었다. 숙제를 끝낼 때까지는 놀지 않았다. 마치 몸을 책상에 묶어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누이에게 놀림을 받았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해야할 일에는 진지하게 열심히 들러붙는 아이가 되었다.

 


 


 

신부(神父)의 가르침

 


 

  다행스럽게도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우수한 선생님들이 많았다. 훌륭한 선생님은 수업에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다. 나는 수업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어려운 것을 간결하게 설명하는 선생님들을 존경했다. S.J. 라구르 바오로 신부가 그런 분이었다.

 

  그는 고령의 예수회 신부로서 프랑스 문학에 경도해 있었다. 그에게는 학생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부추기어 끌어내는 희한한 재능이 있었다. 시를 가르칠 때는 억양을 잔뜩 넣어 정열적으로 낭독했다. 시어(詩語)와 운(韻)이 우리들 학생들의 귀에 기분 좋게 가득 울려 퍼져 시어에 들어있는 아름다움과 정감이 전해져 왔다.

 

  라구르 바오로 신부는 그 후의 나의 인생에 충분히 영향을 미치는 교훈을 주었다. 모든 일에는 명료성과 간결성이 필요하다는 교훈이다. 또한 올바른 인생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도 가르쳐 주었다.

 

  [아마추어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프로는 명료성과 간결성을 찾는다.]

 

  [우선 귀를 맑게 하라. 생각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가능한 한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어떤 일도 간결하게 하고, 스스로 하겠다고 한 것은 꼭 끝까지 해내야 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과제를 주었으며, 프랑스문학에 대한 정열을 학생들과 공유하고 싶어했다. 시도, 비즈니스나 인생도, 어떠한 것도 정열을 갖고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핵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가르쳐 주었다.

 

  나는 교육에 걸고있는 그의 열의에 감동했다. 그는 순수하여 꾸밀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레바논 젊은이들에게 일생의 양식이 되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기 위해 고국 프랑스와 결별하고 이국 땅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만족감 외에는 어떠한 보상도 없이 이국의 교단에 선다는 것 - 특별히 그런 길을 택하고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시의 학생들 속에서도 어른들 속에서도 없었을 것이다. 왜 그에게는 그러한 것이 가능했는지, 나에게는 그의 모든 것이 수수께끼였다.

 

  라구르 바오로신부는 나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에게 프랑스 문학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내가 열 네 살 때로, 이제 막 인생의 본보기가 됨직한 인간을 찾기 시작하는 나이였다. 그는 분명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 인간에게 자신이 구하고 있는 여러 특성이 모두 갖춰져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인간들을 만나며 각각의 장점을 배우고 취해, 그리고 그것을 재구성하고 자기 속에 짜 넣어 독자적인 개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가 나에게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30년이나 지난, 내가 일본에 온 이후였다. 그는 많은 교훈을 주었다. [이해하기 쉬운 사람이 되라. 명료한 말로 설명하라. 하겠다고 말한 것은 반드시 완수하라]. 어느 것 하나 닛산의 재생을 목표로 뛰고 있는 나의 자세에 반영되고 있지 않는 것이 없다. 라구르 바오로 신부는 15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가르침은 지금도 내 맘속에 살아 있다.

 


 


 

에꼴 폴리테크니끄로

 


 

  인생의 방향은 사소한 우연이나 행운에 의해 변하는 특성이 있다. 돌이켜 보면 나에게도 인생의 방향을 변하게 하는 몇 번인가의 전환점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빠리의 에꼴 폴리테크니끄(국립이공과학교)에서 엔지니어링의 길을 택한 것도 나 자신의 의지 때문이라고 만은 할 수 없었다. 대학진학을 위한 프랑스행을 전후하여 몇 가지인가의 상황이 겹쳐진 것이다. 내가 비즈니스 세계에 들어가게 된 경위를 살펴보자.

 

  예수회 계통의 학교에서 보낸 마지막 3년간 나는 의욕적으로 공부에 매달려, 톱 클라스의 성적을 올렸다. 다가오는 졸업을 앞두고 나는 좋은 학교에 진학한다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고, 최고의 교육을 받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프랑스의 대학을 택할 것인지 미국의 대학을 택할 것인지 큰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결국 프랑스를 택하게 된 데에는, 프랑스어를 할 수 있었다는 것, 어머니가 프랑스 국적이었다는 것, 레바논에서 프랑스 문화에 젖은 것, 그리고 예수계 학교에서 프랑스식 교육을 받아왔다는 것 등의 영향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프랑스행을 지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프랑스의 교육제도를 알고 있었으며, 바까로레아(대학입학자격)의 조건도 채우고 있었다.

 

  미국으로 가게 된다면 MIT(매사츄세츠 공과대학)에 진학할 맘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교육제도를 잘 몰랐던 데다가 학비가 비쌌다. 프랑스의 교육제도는 보다 개방돼 있었으며, 성적이 우수하면 학비를 내지 않는 사람들도 받아주었다. 그 바람에 대학에 진학한다면 프랑스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를 선택한 나는, 다음으로 이공계 대학과 비즈니스 스쿨 중 어느 쪽으로 진학해야 하는 가로 고민했다.

 

  나에게는 프랑스 유수의 비즈니스 스쿨인 오오또 에튜드 꼬메르시아르(HEC=경영대학원)를 졸업한 여덟 살 연상의 종형(從兄)인 랄프 쟈자아르가 있었다. 여덟 살이나 나이가 많은 종형이라고 했지만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랄프는 은행에 다녔는데, 빠리에 아파트를 갖고 프랑스인 여성과 결혼했다. 나는 그의 솔직하고 자신만만한 인품 자체가 성공의 심볼이라고 동경하였으며, 나도 랄프처럼 되고싶어 같은 비즈니스 스쿨에 입학하여 비즈니스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에게 이력서를 보내고, 그가 졸업했던 HEC입학을 목표로 하는 준비학급을 택하고싶다고 했다. HEC는 에꼴 폴리테크니끄 등과 함께 그랑제꼬르(고등전문대학)로 불리고 있다. 나는 바까로레아(대학입학자격)에 합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대학이라면 무시험으로 진학할 수 있었지만,  그랑제꼬르인 HEC에 진학하는데는 준비학급에서 2년 정도 공부한 후 어려운 입학시험에 합격해야만 했다. 그는 즉시 내 이력서와 성적증명서 등의 서류를 제출해 주었다.

 

  그런데 준비학급의 교장은 나의 서류를 대충 훑어보고는, 수학성적이 뛰어난 것 같은데 비즈니스 스쿨에는 모처럼의 재능이 쓸모 없게된다고 종형에게 충고했다. 종형도 나에게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프랑스의 시스템에 비추어 그렇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평가기준에서는 우선 처음 고려하는 것이 수학, 다음이 물리, 그 후에는 어느 과목도 동일하다.

 

  랄프로부터, [마테마티끄 슈페류르(수학전공 코스)]에 신청하겠다, 에꼴 폴리테크니끄의 준비 코스다]고 알려와, 나는 놀람과 동시에 약간 맥이 풀렸다. 준비학급의 이름은 상 루이, 교사(校舍)는 기숙사도 완비된 스타니슬라스교(校)였다.

 

  마음이 완전히 비즈니스 스쿨에 가 있었기 때문에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아 낙담하고 있던 나에게 종형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렇게 침울해하지 마라. 교장선생님은 엔지니어링이 싫으면 도중에 비즈니스 쪽으로 바꿔도 좋다고 말했다. 우선 수학 점수가 좋은 바람에 그렇게 됐다. 싫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도 상관없다고 약속해 주었기 때문에 염려할 것 없다.]

 

  그렇다면 별 문제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해 보지요.]

 

  이렇게 하여 나는 준비학급에 진학했는데, 첫 3개월은 지옥이었다. 빠리에서 생활하면서 본격적인 프랑스어 수업에 적응하느라 정진해야했기 때문이다. 성적이 형편없어 클래스에서 가장 나쁜 부류에 들고 말았다. 첫 3개월의 성적을 보고 나는 매우 조바심이 났으나 아무튼 수학코스를 계속 열심히 공부하여 성적을 올리려고 마음먹었다.

 

  처음에 생긴 차질은 내가 클래스의 꼴찌에 머무는 학생이어서는 안 된다며 분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3개월 동안에 성적이 올라갔고, 1년 후에는 에꼴 폴리테크니끄 특별준비 코스에 거뜬하게 합격할 수 있었다.

 

  프랑스 최고봉의 이공계 그랑제꼬르(고등전문대학)인 에꼴 폴리테크니끄는 프랑스 엔지니어들의 메카이다. 이곳은 프랑스 육군 관할 하에 있는 유일한 기술계 대학으로 순조롭게 입학만 되면 그날부터 일정한 급료까지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스스로 학비를 염출해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매력적인 곳이다. 이 학교는 나폴레온이 창설했는데, 역사도 길고 여러 가지 특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꼴 폴리테크니끄 재학 중에도, 뒷날 에꼴 데 민(국립광산학교) 재학 중에도 나는 나의 장래에 대한 걱정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학교를 졸업하면, 흥미를 가진 중요 직장에 얼마든지 취업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공부에만 열중하였고, 어떤 미래가 열릴지는 되어 가는 형편에 맡기려고 생각했다.

 


 


 

칼체 라딴에서 보낸 나날들

 


 

  빠리에서는 내내 칼체 라딴에서 생활했다. 역사의 향내가 나는, 예술가나 지식인이나 보헤미안적인 생활방식과 연고가 있는 땅이다. 내가 다녔던 3개의 학교 - 상 루이, 폴리테크니끄, 에꼴 데 민은 모두 빠리의 이 협소한 구역에 있었다.

 

  수업에 나가기도 하고, 미술관을 방문하기도 하고, 연극을 보기도 하고, 외국에서 온 유학생들과 어울리기도 하며 나는 7년이나 이 일대에서 살았다. 그래서 그 곳의 어떤 골목도 상점도 환히 기억해낼 수 있다. 학창시절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으면 싶은 것들도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 시절의 생활을 상세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면학에도 놀이에도 푹 빠졌던 칼체 라딴에서의 생활은 문화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대단히 풍성한 것이었다.

 

  에꼴 폴리테크니끄 시절에는 과외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축구를 하기도 하고 아메리칸 테이블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아메리칸 테이블이라는 것은 교내에 설립된 조그마한 모임의 이름이었다. 월 2회, 빠리의 미국인 유학생들과 회합을 갖기도 하고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문화나 정치 이야기, 공부에 대한 얘기 등을 나누기도 했다. 이 저녁 모임은 서로 다른 문화를 갖고있는 사람들에게 만남의 자리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국인 유학생들과는 저녁을 먹는 동안에는 영어로 얘기했지만, 그 이후에는 프랑스어로 얘기하고 마음 편하게 어울려 다니며 파브(pub - 서양식 대중술집) 등에 몰려가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하며 즐겼다. 나는 저녁모임에 나가기도 하고 우르르 거리를 쏘다니기도 하는 가운데 많은 미국인들의 친구가 되었다.

 

  덧붙여 말하면, 내가 처음으로 영어를 배운 것은 레바논에서 예수회 계통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그 학교에서는 아랍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영어를 배웠는데, 프랑스에 올 즈음까지는 교과서식 영어는 할 수 있어도 유창하게 회화를 할 정도는 못됐다.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갑자기 어휘가 생각나지 않아 말이 막혀버렸다. 레바논에서는 수업 이외에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잡지나 신문, 노래 가사 등을 통해 가능한 한 영어와 가까워지려고 했지만, 그 무렵 나의 주요 언어는 프랑스어와 아랍어와 폴투칼어였다.

 

  에꼴 폴리테크니끄에서도 영어수업이 있었는데,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공부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도 수업 이외에서 실천적인 영어를 배울 기회는 적었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영어를 사용한 것은 아메리칸 테이블의 저녁 모임 때뿐이었다.

 

  그렇게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윽고 에꼴 데 민의 졸업이 목전에 다가왔다. 졸업 후 진로로서 나는 빠리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프랑스 교육제도에서는 에꼴 폴리테크니끄나 에꼴 데 민 등의 그랑제꼴에 합격하면 다른 학교에도 무조건 입학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새삼스레 수고를 하지 않아도 경제학 석사과정이나 박사과정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된다. 나는 아직도 공부하고싶었으며 학창생활이 굉장히 즐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장래 무엇을 하고 싶다든지 하는 생각 같은 것은 결코 하지 않았다.

 


 


 


 

II부 - 미쉐린에서

 


 

3 - 이른 아침에 걸려온 전화

 


 

곤씨의 성공배경에 있는 강한 끈기, 정열,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고방식, 그리고 진보적인 노동관은 그의 학창시절 때부터 감지되고 있었다. [언젠가 자네는 위대한 CEO가 될 걸세]. 교실에서 그에게 이렇게 말을 걸었던 생각이 지금도 정겹게 떠오르고 있다. - 지르베르 프라드(에꼴  데 민 드 빠리의 교수)

 


 


 

끌레르몽 폐랑으로의 초대

 


 

  비즈니스 세계로의 첫걸음은 에꼴 데 민의 졸업이 가까워왔던 1978년 3월 어느 날 아침 일찍 걸려온 전화로 시작됐다. [아침 일찍]이라고는 해도 학생 입장에서의 이야기다. 실제로 전화벨이 울렸던 것은 아침 8시 반이었다. 그 때 나는 빠리의 아파트에서 아직도 단잠에 빠져 있었다.

 

  학생이라고 하면 으레 밤늦게까지 자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통념이 있었다. 그 무렵의 나도 야간형(型)으로 심야 무렵부터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침대에 들어가는 것이 상례였다. 아침 8시 반에 일어나는 생활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화는 수화기를 들 때까지 계속 울렸다. 잠이 덜 깬 소리로 전화를 받자, 상대방 남성은 강한 스페인 사투리의 프랑스어로 피다르고라고 자기 이름을 밝혔다.

 

  [미쉐린 그룹에 근무하는 사람입니다.]

 

  갑자기 잠자리에서 막 일어난 나에게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쩜 이렇게 이른 아침에 미쉐린에서 전화가 걸려온 것일까?

 

  [리오데자네이로의 리셉션에서 곤씨의 누이를 만났는데 그분한테서 에꼴 폴리테크니끄를 나온 동생 얘기를 듣고 이렇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누이인 클로딘의 이름이 나옴으로써 나는 일단 무슨 말인지는 이해를 하게됐다.

 

  [미세린은 브라질에서 대형 프로젝트에 착수하고 있습니다.]며 그는 계속했다. [곤씨의 누이에게 폴투칼어를 할 수 있고 브라질이라는 나라를 잘 알고 있으며, 프랑스의 대학을 나온 엔지니어를 찾고있다는 말을 했더니, 귀하얘기를 꺼내면서 바로 소개할만한 그런 분이라고 말씀하셨기에 전화를 올린 것입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이건 에꼴 데 민에 다니는 누군가의 장난전화임에 틀림없다, 누구의 목소리일까 하고 친구들 이 사람 저 사람의 얼굴을 떠 올렸다.

 

  [어떻습니까, 우리 회사의 브라질 프로젝트에 힘을 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시간 닿는 대로 한번 끌레르몽 페랑의 본사까지 와 주실 수 없겠습니까? 직접 만나 뵙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필요한 경비는 모두 우리 쪽에서 부담하겠습니다.]

 

  나는 여기까지 듣자, 이것은 잘 꾸며진 장난질이다, 누군가가 미쉐린에서의 면접을 구실로 나를 끌레르몽 폐랑에 가게끔 하려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실제로 곤씨의 누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우리 회사는, 귀하는 물론 귀하의 인맥에도 대단한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나의 신원을 조회할 수 있도록 나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드릴 테니 그럴 맘이 계시면 꼭 전화하십시오.]

 

  나는 즉시 신원을 조회하여 전화의 주인이 이름을 밝힌 대로의 인물임을 확인하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거절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면접하러 가더라도 손해볼 것은 없겠지.]

 

  1개월 후 나는 끌레르몽 폐랑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이 열차가 나를 아득하게 먼 세계로 데려가는 것이 될 줄은 그 때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입사조건

 


 

  1978년 당시 미쉐린 그룹의 CEO(최고경영책임자)는 프랑소와 미쉐린이었다. 미쉐린의 이름을 널리 세계에 알리고, 유럽의 지역 플레이어에 지나지 않았던 미쉐린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장본인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회사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는 성장지향, 제품지향성이 강하며, 천성적인 위엄을 갖추고 있었고, 인간과 인간의 자질에 대해 꾸준히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가 누구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는가는 옆에서 보아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사내에서의 권한이나 책임의 소재는 조직구조보다도 인간관계나 신뢰관계에서 나왔다. 실제로 미쉐린에서는 회사내부에 들어와 일 해보지 않는 한 조직도를 보고서는 누가 핵심자인지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소와 미쉐린 바로 그 사람이 미쉐린의 북미, 남미, 아시아에서의 사업 확대전략을 결단하고 추진한 당사자였다.

 

  이 무렵 미쉐린은 1981년 조업개시를 목표로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 주에 2개의 공장을 건설하는 중이었다. 칸포 그랑데의 타이어 공장과 레젠데의 스틸 케이블 가공공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위해 미쉐린은 어떻게 하든 브라질과 브라질 언어에 정통하고 프랑스 대학을 졸업한 엔지니어를 구해야만 했다.

 

  끌레르몽 폐랑에서 나는 피다르고와 만났는데, 그는 나를 3인의 미쉐린 관계자에게 소개시켰다. 그들은 2일간에 걸쳐 나 자신과 장래 목표 등에 대해 번갈아 가며 질문을 했다. 이들로부터도 그들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어떤 것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에게 입사해 줬으면 좋겠다며, 내가 결국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의 제안서를 수일 내로 우송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학창생활을 중단하고 취직하고싶은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입사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보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경제학 박사과정으로 진학할 예정이었으며, 피다르고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즐거운 학창생활을 구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빠리로 돌아 온 후 곧 미쉐린으로부터 제안서가 왔다. 내용은 한가지 점을 제외하고는 불만이 없었다. 그 한가지 점이란, 기본적인 연수기간이 끝나면 나를 R&D(연구개발)테크니컬 센터에 배속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기술판에서 커리어를 쌓을 생각이 없다고 통보했다.

 

  [미쉐린에 취직하고픈 마음이 드는 것은 브라질에서의 프로젝트를 도와주기 위해 곧 브라질로 가게 된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R&D 테크니컬 센터 보다 제조분야에서 출발하고싶습니다.]

 

  교과서를 배우기도 하고 실험을 하기도 하며 7년간 학생으로서 생활해 온 나는 이제 다시 약간 실무적인 것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제조분야는 거기에 안성맞춤이다.

 

  회사의 전체상을 손쉽게 아는 데는 제조부문이 걸맞은 장소라고 생각했다. 공장노동자나 기술자, 감독관, 공장장 등 여러 직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쉽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뒷날 공장노동자로 일하면서 그 곳이 제조부문 자체 및 현장에서 톱 매니지먼트까지의 회사전체의 업무나 문제를 파악하는 데에 안성맞춤의 장소라는 것을 알았다.

 

  미쉐린 측은 내가 R&D에의 배속을 거절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와 같이 엔지니어링에 관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R&D 테크니컬 센터를 희망하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테크놀로지나 엔지니어링에 흥미가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 되겠지만, 연구소에서 출발해 가지고는 회사의 전체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취직얘기도 이것으로 끝나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놀랍게도 회사측이 제조부문에서의 출발을 승낙해 왔다.

 

  내가 1971년부터 7년간이나 엔지니어링 공부를 해왔던 것을 고려하여 회사측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정말로 제조분야가 좋다고 생각합니까?]

 

  [물론입니다.]고 나는 다소 망설임을 느끼며 대답했다. [비즈니스 현장이야말로 출발점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 나는 이것으로 경제학박사학위 취득의 길은 물 건너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곡절 끝에 나는 1978년 9월에 미쉐린에 입사했다. 조건은 불만이 없었고 면접 때 만났던 사람들은 모티베이션이 높고 개방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브라질에의 전근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4 - 공장에서 배운 교훈

 


 

공장노동자로서의 출발

 

 

 

  업무시간에 늦지 않는 것 - 이것은 미래의 매니저에게 요구되는 최저조건의 하나다. 나는 입사 첫날, 신입사원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의 개시시각에 여유를 갖고 출근할 예정이었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5분 지각하고 말았다. 같은 날 입사한 동료인 필립 베르뉘는 입만 벙긋하면 그 때의 지각 얘기를 끄집어낸다. 자명종 시계는 출근시간 10분전으로 맞춰 놓았지만, 그 무렵에는 아직도 [학창시절]의 버릇을 완전히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첫 출근 때의 지각이라는 오점은 다행스럽게도 나의 커리어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입사하여 3개월간, 우리들 신입사원들은 회사의 역사나 조직구조, 사업내용 등에 관해 배우고, 문제해결능력 강화를 위해 일련의 훈련을 받은 후 각각 다른 공장에 배속됐다.

 

  미쉐린은 프랑스 기업 가운데서는 이색적인 존재다. 신입사원은 반드시 생산현장에 배속된다. 그 누구든, 어느 대학을 나왔든, 우선 공장에서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일을 하게 된다. 대졸사원들은 곧 자신들이 관리직이나 상급직을 맡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선 공장노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일하고 나서인 것이다.

 

  내가 배속된 곳은 끌레르몽 폐랑 근교의 루 쀼이였다. 거기서 나는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오전근무, 오후근무, 야간근무라고 하는 3 교대제 근무에 임했다.

 

  그 때의 내가 받은 쇼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하튼 나는 7년간이나 학창생활에 젖어왔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으며 수업이 없으면 정오까지 침대에서 뒹굴기도 했다. 공장 노동자로서 일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생활 패턴을 강요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1일 8시간 노동, 오전 근무 때에는 아침 5시 출근에 맞추기 위해 4시에는 일어나야 한다(학생이라면 침대에 있을 시간이다). 2시간 일하고 휴게시간이 오면 직장 동료들과 함께 조반을 먹는다.

 

  처음에는 나이 많은 종업원과 함께 일했다. 나에게 기계 사용법을 가르치는 것이 그의 업무였으며, 그를 보조하는 것이 나의 업무였다. 그는 전형적인 농촌출신 프랑스인으로서 아침에는 베레모를 쓰고 등산용 백을 둘러메고 출근한다. 등산용 백 안에는 와인 1병, 바케트 빵, 치즈, 소세이지, 담배 1갑이 들어 있다. 그리고 나에게 그날 해야할 업무를 지시하고 기계 사용법을 설명해 줬다.

 

  첫 대면하는 날 그는 나의 업무에 관해 얘기해 주었다. 얘기 도중에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의 눈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에게 또 한가지 특별한 임무를 주려고 하네. 즉 감독관이 오는지 감시하는 일인데, 그의 모습이 보이면 즉시 나에게 일러주게. 담배 불을 꺼야하니까.]

 

  작업현장에서 음식을 먹거나 끽연은 금지돼 있으며 전용장소가 지정돼 있는데, 이 선배는 공장의 취업규칙 등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현장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놀라운 일에 틀림없지만, 아직 젊은 연수생에 지나니 않았던 나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견책 받지 않도록 망을 보아주는 일, 그것이 입사 후 나에게 부과된 최초의 중요한 임무인 셈이었다. 이윽고 나는 예의 그 감독관이 특별한 경우 외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1차 교대 8시간 동안에 한번만 나타나 작업의 진척상황을 체크하고, 종업원들과 얘기를 주고받으며 작업태도를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현장 사람들은 감독관이 언제쯤 나타나는지 알고 있으며, 나타날만한 시간에 맞춰 작업을 조정했다. 감독관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루 모베 땅(惡天候)]으로 불리었으며, 그가 모습을 보이면 종업원들은 [조심하라! 악천후 접근 중]이라고 속삭이곤 했다.

 

  이 공장에서는 반년간 일하며, 기계 사용법, 현장 사람들의 업무, 관리방식 등 여러 가지를 배웠다. 감독관은 이따금씩 모습을 보였을 정도였으며, 공장장은 더욱 만날 기회가 적었다. 그의 등장은 흡사 로마 교황이 모습을 드러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며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경영에 관한 최초의 교훈

 


 

  당시의 체험을 돌이켜 보면, 관리자가 현장상황을 파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생산현장에 대한 경영자 측의 인식이 현장 실상과는 거리가 멀어, 나는 관리자의 역할에 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종업원들은 스스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왜 하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체, 그저 할당된 일을 묵묵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위로부터의 지도나 훈련도 거의 없었고 의욕적으로 매진하는 일도 없었다.

 

  연수의 일환으로 나에게는 인스트럭터가 붙어서 생산현장에서 사용되는 여러 가지 기계에 대한 상세한 기술적 지식이나, 공장에서의 수순이나 규칙을 가르쳐 주었다. 근무시간이 끝나면 나는 매일 1시간씩 트레이닝 세션(training session)을 받았다.

 

  어느 날의 일이다. 나의 경력을 알고 있던 인스트럭터가 자기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자신은 이 회사에서 출세하고싶으며, 수학실력이 뛰어나면 틀림없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나는 승낙했다. 그 바람에 취업 후 1시간씩의 트레이닝 세션은 30분으로 단축되었고, 나머지 30분은 수학교습에 사용되었다.

 

  나는 이 경험에서 종업원들이 마음속으로 지식이나 교육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으며 설사 알고 있다고 해도 대응하려고 하지 않았다. 종업원들이 출세를 하기 위해 회사에 가장 공헌할 수 있는 훈련을 얼마나 간절히 요구하고 있는지 이 때 정말 통감했다.

 

  나는 생산현장의 현실과 경영자 측 인식과의 갭이 침체한 노동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느꼈다. 감독관이나 공장장이 종업원들과 함께 현장을 창조해가지 않으면 경영자측은 회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 현장의 잠재적인 생산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면 회사 경쟁력을 높이는 적절한 수단을 현장에 도입할 수 없게 된다.

 

  현장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관찰한 것, 그들이 업무나 장래의 포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알게된 것이 나로선 몸으로 체험한 경영에 관한 최초의 교훈이었다.

 


 


 

승진계단을 오르다 

 


 

  처음에 배속된 루 쀼이에서 공장노동자로 반년간 일한 후 나는 감독관으로 다른 공장에 배속되어 6개월간 또 다시 같은 근무 시프트로 일했다. 이 때 나는 사무실에 앉아있지 않고 가능한 한 현장에 나가있었다. 종업원들이 노상 소리를 질러대는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어 그들이 보다 효율적인 작업을 하도록 지도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 반년이 지나자 나는 감독관에서 품질관리 엔지니어로, 그리고 곧 이어 현장 매니저와 여러 직무를 맡았다. 그 후, 성장궤도를 달리고 있던 미쉐린이 현장이 늘어감에 따라 새로운 경영요원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2년간 류 뿌이의 공장장을 역임했다.

 

  류 뿌이에서의 경험은 자극이 가득한 유익한 것이었다. 약관 26세, 최연소의 내가 약 7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굴삭기나 덤프 트럭용의 대형 타이어를 제조해 내는 공장의 톱이 된 것이다. 브라질에서 태어나 레바논에서 의무교육을 받은 나는, 순수한 프랑스인이 아니었기에 공장 사람들과 서로 이해일치를 이루는데 시간은 걸렸지만, 업무를 추진하는 외에 호감이 가는 인간관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충분한 의사소통을 꾀할 수 있었다. 그 성과는 업적향상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당시 미쉐린 상층부에서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는지는 알 방법이 없지만, 이 공장에서의 업적을 근거로 나를 끌레르몽 폐랑에 도루 불러들이지나 않을까 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본사는 나에게 잠시 R&D 테크니컬 센터에서 일하는 것이 어떠냐고 타진해 왔다.

 

  이미 제조분야에서 3년간을 보냈던 나는 이번만은 입사할 때처럼 그 제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다 프랑소와 미쉐린 CEO는 유난히 R&D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연구개발분야에서의 경험 없이는 장래 미쉐린 그룹에서 큰 공헌을 할 수 있는 인재가 육성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 제의를 쾌히 승낙하였고, 농업용 트랙터, 덤프트럭, 굴삭기와 모든 대형차용 타이어를 일괄하여 담당하게 되었다. 주고객은 케터필러, 고마츠, 죤 디어, 러노, 어그리컬쳐였다. 1984년 나는 대형차용 타이어의 R&D 테크니컬 센터 소장으로 취임했지만, 그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새로운 상황이 나의 인생을 변화시키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 - 브라질 파견

 


 

하이퍼 인플레이션의 나라로

 


 

  나는 진작부터 프랑스에서 학업을 끝내면 브라질에 되돌아갈 작정을 하고 있었다. 미쉐린에서 입사제의가 오고 브라질에서의 프로젝트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도 브라질에 돌아가 일할 수 있는 것에 마음이 동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업무만 이해하게 되면 곧 브라질로 건너가 머지않아 현장 소장이나 공장장의 지위에 오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 무렵에 바라던 최고 목표였다.

 

  그런데 회사의 의향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 프랑스에 체류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일이 순조롭게 되느라고 회사는 내가 프랑스에서 커리어를 쌓는 것을 바랬던 것이다. 생각보다 프랑스 근무가 길어졌지만, 프랑스에서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브라질에 가서의 일이 바람직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플러스가 되었다. 회사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1985년, 30세 때, 나는 프랑소와 미쉐린 CEO의 직속으로 남미사업을 통괄하는 COO(최고집행책임자)로서 브라질에 부임했다.

 

  브라질 부임은 몇 개인가의 조건이 겹친 결과였다. 1978년 미쉐린은 브라질의 트럭 타이어 시장에 현지공급용 제조공장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브라질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조업시작은 1981년이었지만, 시작하자마자 사업이 암초에 부닥치고 말았다. 알기 쉽게 말하면 막대한 손실을 입었던 것이다. 제품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도, 고객들에게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원인은 브라질이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타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브라질을 휩쓴 인플레이션은 1980년대 중반에는 실로 연율 1천%에 달했다. 인플레이션율이 이렇게까지 높은 나라에서는 보통의 방법으로는 아무래도 회사경영이 불가능하다. 미쉐린이 브라질에 파견한 경영간부들 중에는 고인플레이션, 고금리에 직면하고있는 기업의 조타수 경험을 한 사람이 없었다.

 

  미쉐린 브라질은 정상적인 경제상태라면 흑자가 예상되었으며, 생산도 매우 순조로워 보였다. 실제로 여러 가지 지표는 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거대한 손실을 입은 것이다.

 

  프랑소와 미쉐린과 그의 고문들은 신속하게 대응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누구를 파견할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라지고 굉장히 많은 논의가 오가고 있었다.

 

  재정담당 팀은 프랑소와 미쉐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보시는 것처럼 우리들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것은 브라질에 정통하고 고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처방법을 알고있는 사람

 

외에는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때 참석하고 있던 이란계 프랑스인 CFO(최고재무책임자)인 샤이드 누와라이가 [카롤로스 곤을 파견합시다.]고 나의 이름을 들먹였다.

 

  인사담당 책임자인 장 끌로드 뛰르낭이 즉시 반론을 폈다.

 

  [그는 아직 29세, 아니 30세니까 - 아무래도 너무 젊습니다. 확실히 입사이후 잘 해 오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신출내기입니다. 이런 중대한 상황에 그를 파견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프랑소와 미쉐린은 모든 의견을 곰곰이 듣고는 잠깐 시간을 끈 후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거의 다른 선택사항이 없는, 절박한 상황 아래서의 결단이었다. 프랑소와 미쉐린은 나를 COO로서 브라질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브라질 COO를 자신의 직속으로 둔다고 선언했다. 결국 그는, 내가 곤란을 극복하고 남미사업을 호전시킬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선택된 3가지 이유

 


 

  뛰르낭의 우려는 당연했다. 나는 입사한지 아직 7년밖에 되지 않았다. 확실히 루 쀼이의 공장장, 대형차용 타이어의 R&D 테크니컬 센터 소장으로서 그 나름대로의 좋은 결과를 내고 있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비즈니스 환경 아래서의 이야기다. 7년이라고 하는 짧은 실적으로는 2개의 공장과 2개의 고무농장을 갖고있는 남미에서 9천명 가까운 종업원을 거느리고, 더욱이 문제가 산적해 있는 3억 달러의 사업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3가지 점에서 유리했다.

 

  하나는 젊음이다. 강아지는 패기가 있어 위험이 박두하고 있어도 걱정하지 않는 법이다. 나도 리오데자네이로에 돌아간다는 것만으로도 기쁘기 한량없었다. 태어난 고향에서 큰 사업을 맡게된 것이다. 그것은 너무 매력적인 일이었다. 친구들은 [보통수완으로는 안 될걸. 이것저것 모두 망쳐버리는 것 아닐지 몰라]하며 위협했지만, 막상 본인인 나는 완전히 돌아갈 작정을 하고 있었다.

 

  붕괴위기로 절박한 형편에 처한 대기업의 COO로서 자기가 태어나 자란 나라로 개선한다는 것은 비유해 보건대 멋있는 요트를 기증 받고 이런 통고를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앞길에는 폭풍의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항해할지 자네에게 일임한다. 연안을 항해해 가든, 미지의 거친 바다로 항해해 가든 자네가 결정해야할 일이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 임무는 오직 하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바로 젊다는 것이 강점이다. 시련을 맞게되면 전력을 다해 극복할 것이다. 태풍이나 파도에 대한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항구를 나가 돛을 올리면 된다. 당연히 요트의 조종법은 알고 있어야 하지만, 나는 마음속에 은밀히 언제든지 출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젊음을 무기로 내가 배를 저어 나아가는 곳에는 보통의 태풍이 불고 있는 게 아니었다. 미쉐린의 어느 누구도 아직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상황, 극도로 불안정하여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 아래 있는 나라로 파견되는 파이오니아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극적인 것이었다.

 

  두 번째 유리했던 것은, 하이퍼 인플레이션 아래서의 기업운영 경험 자체는 없지만, 몇 번이나 브라질을 오간 덕택으로 몸으로 브라질의 인플레를 체험했다고 하는 점이다. 브라질이 항상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어려움을 겪어온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인플레리션으로 매사에 대한 통제가 되지 않을 때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예금을 인출하여 항상 현금을 소지하고 있었다. [오버 나이트]라 불리는 은행예금이 등장하고 있었다. 급료는 인플레이션에 맞춰 한 달 사이에 2배로 인상됐다. 미디어들은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레스토랑에서 손님이 음식을 주문할 때 음식값 계산부터 먼저 한다고 보도했다. 식사를 끝내고 나면 이미 가격이 올라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좌우지간, 인플레이션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살아가는데 어떤 타격을 줄지, 나에겐 예상되는 바가 있었다. 또한 브라질 사람들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별일 아니라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렇게 심각하다고는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장기간 인플레이션과 함께 살아왔던 것이다.

 

  세 번째 유리한 점은 나의 제 1 언어가 폴투칼어였다는 점이다. 브라질에 부임했을 즈음 언어소통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프랑스어 사투리가 있다고 지적을 받았지만, 브라질을 장기간 떠나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전혀 장애가 없었다.

 


 


 

백지의 기분으로

 


 

  본사 뿐 아니라 미쉐린 전체를 훑어보아도 브라질에서 미쉐린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나에게 정확히 보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미쉐린이 손실을 내고 있다는 것, 영업이익이 적자라는 것, 고금리로 채무가 계속 불어나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지만, 전체적인 상황은 현지에 날아가 보지 않고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브라질에는 무언가가 해결책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해결책을 빨리 찾아내어 전력을 다하여 실행으로 옮기는 것이 가능할 지 어떨지가 열쇠가 된다. 프랑스를 출발할 때에 확신이나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걱정도 하지 않았다. 구태여 말하자면 자신감과 불안감이 교차하고 있는 심경이었다.

 

  프랑스를 출발할 시점에서 구체적인 계산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완전히 백지 상태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것은 그 후 미쉐린 북미지역 CEO로 부임했던 미국에서도, 러노로 근무처를 옮기고서도, 물론 일본의 닛산에서도 똑 같았다. 새로운 업무를 맡을 때에는 선입관을 가지지 않고, 항상 백지상태로 시작하는 것이다. 곤 식 경영스타일에는 이 하나의 조건이 확실히 들어있는 것이다.

 


 


 

6 - 인생 최선의 결단

 


 

나는 처음 카롤로스를 만났을 때부터, 이 사람 밖에 없다, 함께 인생을 걸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꼭 같은 기분이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내가 10세 연하로 아직 성인이 된지도 얼마 되지 않은 점도 있어, 그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처음부터 그를,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더 크게 성공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리타 곤

 


 


 

브리지 토너먼트를 한 후

 


 

  브라질에 건너간 나는 어떻게 해서 하이퍼 인플레이션 아래서의 사업을 본 궤도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가? 그것을 얼른 알고싶어하는 독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여기서 잠깐 나의 사생활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런 것에 흥미 없는 독자들은 이 장을 건너뛰어도 괘념치 않겠다.

 

  브라질에 건너갔던 1985년 전후시기는 나의 사생활면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아내 리타를 만난 것이다. 그때까지도 여자친구들은 많았고 그 가운데는 진지하게 교제를 한 여성도 있었지만,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은 리타였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9월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그 날 나는 끌레르몽 폐랑으로부터 그렇게 멀지 않는 리용에서 개최된 브리지 토너먼트에 친구인 베르나르 데르마와 함께 참가했다. 2인 1조로 나서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반장난으로서가 아니라 아주 진지하게 게임을 하는 타입이고 같은 팀이 된 베르나르도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어떻게 된 셈인지 우리 팀은 참담한 성적으로 끝났다.

 

  진지한 플레이어라는 것은 일단 졌을 때, [오늘은 기회가 좋지 않았다. 이 다음에는 이겨야지.]하며 가볍게 흘리지 않고, 어떤 한 수, 어떤 사인, 어떤 카드가 나빴는지 자세하게 돌이켜 보고 패인을 밝혀내려고 한다. 험악한 무드까지는 아니었지만, 우리들도 어느 쪽이 실수를 한 것인지 열을 내어 따졌다. 어느 쪽이 [그래, 나의 미스였는지도 모르겠다.] 등으로 양보할 기미는 둘 다 없었다.

 

  시합 후에 우리들은 우리 둘 다의 친구인 파아드 아비아드 집으로 저녁식사를 초대받았다. 그는 레바논인인 죠슬린 코르다피와 결혼하였는데, 그녀가 만든 레바논 요리는 일품이었다. 그때까지 몇 번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 그날 우리들에게 그의 집은 마치 우리 집처럼 편안히 쉴 수 있는 장소였다.

 

  집에 도착하여 인사를 나눈 후 나는 죠슬린의 옆에 어린 여성이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수집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죠슬린은 [동생 리타예요. 오늘 레바논에서 막 도착했어요.]라고 소개했다.

 

  처음에 우리들은 서로에게 조심조심 질문을 주고받으며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리고, 프랑스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약간 당황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윽고 프랑스에는 약학공부를 하러 왔다고 약간씩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인즉 내 쪽이 마음이 들떠 있었다. 머리 속이 아까 끝난 브리지 게임의 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식사 중에도, 왜 그 게임에 졌는지, 어디서 잘 못된 것일까 하고 베르나르와 계속 얘기를 주고받았다.

 

  리타는 그런 두 사람을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후 그녀로부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집중력 있는 외곯수로 생각했다]고 말했는데, 칭찬하는 것인지, 빈정거리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레바논 규수

 


 

  여러 가지 의미에서 리타는 매력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의 나는 그것을 깨달을 만큼의 [집중력]이 없었던 것 같다. 그녀는 레바논 양가의 규수로서 아직 어리고 장래에 대한 기대로 가슴 벅차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만난 저녁에 무언가가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은 전혀 없었다.

 

  뒷날 두 사람의 관계는 천천히 깊어지고 있었다. 우리들은 거리를 걷고, 음악회에 가고, 식사를 하는 가운데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레바논 출신이라는 것, 여러 언어에 통달하고 있었던 것 등으로 친밀감이 느껴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윽고 나는 그녀가 나이에 비해 몹시 어른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1975년에 시작된 레바논 내전을 체험한 그녀는 아직 어린 나이에 수많은 고통과 비극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녀는 어느 때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레바논에서 나는 카롤로스와는 전혀 다른 체험을 했어요. 내전이 한창인 때 줄곧 그 나라에서 살았기 때문이지요. 살해당한 친구도 있었고,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트럭에 몸을 던진 친구도 있었어요. 비참한 사건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어요. 그리고 아주 어려서부터, 이대로 단념해야 하나, 아니면 스스로 책임을 지고 뜻 있는 인생을 목표로 살아가야 하나라는 결단을 강요당했어요. 훨씬 안정된 다른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나의 당찬 성격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에요. 카롤로스와 대등하게 된 것도 가혹한 체험 덕분이에요.]

 

  우리들의 관계는 아주 진지한 것으로 발전해 갔으며, 1985년에 미쉐린이 나의 브라질행을 결정했을 때 결정적인 전기가 찾아왔다. 이대로 교제를 계속할 것인가, 헤어질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나는 그녀에게 프로포즈했다.

 

  나와 결혼하게되면 그녀는 일단 자신의 공부를 단념하고 브라질에서 생활해야된다. 언어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녀가 브라질에서 공부를 계속하기는 어려웠다. 그녀가 폴투칼어를 말하게 된 것은 결혼하고서였다.

 

  또한 당시 미쉐린 브라질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도 그녀에게 있어 결혼은 큰 도박이었다. 하이퍼 인플레이션 와중에서 회사가 언제까지 계속 유지될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그녀가 승낙해 주었다. 그녀에게 프로포즈한 것은 나로선 인생 최선의 결단이었다. 그녀도 그 결단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식은땀 흘린 결혼식

 


 

  우리들은 브라질로 출발하기 직전에 시청 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직장 동료인 필립 베르뉘와 그의 처 엘렌느가 증인을 서 주었다. 나는 결혼식을 위해 카메라를 사서 필립에게 촬영을 부탁했다.

 

  식전에 리타가 필름이 들어있느냐고 묻기에, 내가 급하게 서둔 데다가 전무후무할 정도로 긴장하고 마음이 들떠 있어 [그렇다]고 대답했다.

 

  필립은 우리들이 시장 앞에서 결혼서약을 하는 것이라든지, 신랑신부와 시장, 참석자 전원의 장면 등을 촬영해 주었다. 사진은 웨딩 앨범에 철하여 머지 않아 태어날 아이들에게 보여줄 작정이었다.

 

  식이 끝나 시청을 나온 우리들은 점심을 겸하여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피로연에 가서 또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필름이 뭔가 잘 못되었다고 느꼈다.

 

  [카롤로스, 정말 말하긴 싫지만, 카메라에 필름이 들어가 있지 않았어요.]

 

  [뭐, 뭐라구!]

 

  리타는 이 때 미리 뭔가 좀 이상한 것을 느꼈음에 틀림없지만, 이미 때가 늦었고 결혼식이 끝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하더라도 벌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들은 다시 한번 식장으로 도루 들어가 결혼식 사진을 새로 찍었다. 설사 낮잠을 잤다고 해도 저지를 수 있는 일일까? 시장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별 수 없이 리타와 내가 카메라 앞에서 결혼서약을 되풀이했으며, 모두들 웃음보를 터뜨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결혼식 사진이 한 장도 없다고 하는 사태는 모면하게 되었다.

 

  그렇게 황망한 가운데 우리들 두 사람은 브라질로 날아갔고, 나는 미쉐린의 남미사업을 재건한다고 하는 어려운 업무에 도전하게 되었다.

 


 


 

7 - 하이퍼 인플레이션과의 싸움

 


 

곤씨의 뛰어난 점은 뭐니뭐니해도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다는데 있다. 어느 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은 인간에게 귀를 두 개 만들어 줬으며, 입은 하나밖에 주지 않았다]. 아마도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 것에 말하는 것의 2배의 시간을 건다는 의미일 것이다. - 카티아 모꼬 다 코스타(브라질 닛산 제너럴 매니저)

 


 


 

왜 적자인가?

 


 

  브라질에 부임하는 나를 맞이한 것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갖고,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의 경영, 더욱이 연율 1천%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우롱 당하고 있는 조직의 경영이었다.

 

  종업원의 태반은 브라질 인으로서 대부분 젊은이들이었다. 경영 팀은 주로 유럽인들과 브라질인으로 구성돼 있었고, 리오데자네이로의 주력공장은 스페인인이, 또 하나의 공장은 브라질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홍보부문과 법무부문 책임자는 브라질인이, 마케팅.판매부문과 재무부문 책임자는 프랑스인, 두 군데의 고무농장 책임자도 프랑스인이었고, 인사부문책임자는 독일인이었다.

 

  이만큼 다채로운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힘을 합해 살아남는 길을 모색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우선 다루어야할 것은 문제를 특정(特定)하는 작업이었다.

 

  [여러 지표가 흑자를 내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시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미쉐린은 적자에 허덕이고 있는가?]

 

  나는 우선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꽤 시간을 써가며 각 공장과 딜러들을 방문하고, 현장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이곳 저곳을 체크하며 돌아다녔다. 이윽고 나는 누구 한 사람도 문제의 소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른 부서나 부문의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지 않으면 직무를 초월한 크로스 펑크셔널리티(cross functionality)로 문제해결에 나서려고 하는 자세도 없어지는 것이다. 예컨대, 영업담당자가 [우리 회사는 재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제조담당자가 [가격이 오르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면 재무 담당자는 [그 사람들은 돈이란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내뱉고는 몹시 화를 내며 사무실을 뛰쳐나가고 있는 꼴이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비난하고 있었다.

 

  직무의 차이를 뛰어넘어 전체가 같은 테이블에 앉아 브레인 스토어밍(brain storming = 각자가 아이디어를 내놓아 최선책을 결정하는 창조능력 개발법 - 옮긴이)을 행하여 하나씩 대응책을 입안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이것이 크나큰 장애물 중 하나였다. 또 하나의 장애물은, 그렇게 하기 위한 교육이나 훈련을 하고 있을 시간적 여유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크로스 펑크셔널한 팀을 당장이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하이퍼 인플레이션 아래서의 기업운영에는 신속성이 필요했다.

 


 


 

우선 순위를 특정하는 노력

 


 

  회사의 현황을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 나는 수량적으로 문제를 이해하려고 여러 가지 데이터나 정보를 수집했다. 브라질에 부임할 때 나는 끌레르몽 폐랑에서 함께 일했던 재무의 필립 비앙델을 동반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문제를 숫자로 명확하게 표시하여 문제해결과 우선 순위 특정에 필요한 수단을 명시하는 수량모델을 작성했다.

 

  우리들은 연간 1천%의 인플레이션율 이외에 극단적인 고금리에도 직면하고 있었다. 당시 브라질의 실질금리는 연간 35%, 이른바 명목금리는 물경 1천 35%에 이르고 있었다. 수량모델로는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며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 명확치가 않았다.

 


 

  1. 거액의 부채 때문에 지불을 더 이상 증가시킬 수 없다. 필요 불가결한 자산만 남기고 사업에 직접 관계가 없는 자산을 매각하여 부채의 일부를 줄인다. 모든 투자에 세심한 주   의를 기울인다. 시제품이나 제품재고를 갖지 않는다.

 

  2.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생산코스트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치솟고 있는데, 브라질 정부가 가격통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제품가격을 독단으로 인상할 수 없었다. 가격에 관해 정부와 은밀히 절충하고, 한 달에 한번 비율로 가격조정을 했다. 가능하면 일주일에 한번 조정하고싶을 정도였다. 가격통제를 실시하는 정부당국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한다. 가격조정이 이틀 지연되면 숨통이 막힐 정도의 절박한 상황이었다.

 

  3. 월간 30%라고 하는 높은 인플레이션 경제아래서는 딜러에 대해 60일 후의 대금지불이라고 하는 조건을 인정할 수 없다. 현금이 손에 들어올 때에는 화폐가치가 제품출하 때의 50% 이하로 줄어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제품출하 때의 지불, 가능한 한 출하 전의 선불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4. 노무 코스트를 컨트롤할 것. 하이퍼 인플레이션의 영향은 대다수 젊은 층 종업원들의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브라질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앙등하고 있는 생활비로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들은 매월 임금을 조정하고, 노동조합 대표들과 임금을 둘러싼 절충을 계속해 나갔다. 바로 수년 전까지 그들과 같은 입장에서 일했던 나로서는 공장노동자들의 기분을 이해했고, 브라질에서 태어난 나에게는 그들의 불안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회사의 현황과 살아남는 대책을 설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하여 이 상황을 타개하고싶었다. 다행스럽게도 인원감축은 실시하지 않아도 됐다.

 


 

  우선 순위로 말한다면 이런 모든 것에 앞서, 계속적으로 원료수입허가를 받아낼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기록해야겠다. 고무나무의 원산지가 브라질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고무액을 추출하는 나무, 학명으로 베아 브라질리엔시즈는 옛날 어느 때 일제히 치명적인 병균에 전염되었고, 얄궂게도 브라질은 천연고무의 태반을 수입에 의존해야했던 것이다.

 


 


 

보이는 세계와 현실세계

 


 

경제가 극도의 혼란으로 타격을 받고있는 시기에 경영자에게 필요한 것은 빈틈없는 감시와 분석이다. 나는 브라질에서 현황을 측정하는 것의 중요성, 핵심 사항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을 통감했다. 이것은 브라질에서 얻은 최대의 교훈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월간 30%의 비율로 상승하고 있는 인플레이션 경제에서는, 돈을 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도 실제로는 자기도 모르는 새 적자를 보고있을 가능성조차 있었다. 정확한 현황파악을 위해서는 숫자의 의미를 항상 올바르게 해석해야한다. 인플레이션의 마술에 우롱 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들은 브라질통화와 미 달러화 2개의 계정체계를 만들어 사업운영을 했다.

 

  숫자가 가르쳐주고 있는 현실은, 비유해 말하자면 수정구(水晶球)를 통해서 보는 세계다. 하이퍼 인플레이션 아래서 그것은 어렴풋한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보는 사람이 일그러진 모습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여 본래의 모습 그대로 치환해야 한다. 거기에 당연히 있어야 할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수정구의 구조를 알고 있으면 자신의 눈에 비치고 있는 것이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흐트러져 있는 직소 퍼즐(jigsaw puzzle) 조각을 원 위치로 끼워 넣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재구성 작업은 항상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눈에 비치는 정경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현실의 재구성에 태만하지 않는 것, 이것이 하이퍼 인플레이션 아래서의 효과적인 수단이다.

 


 


 

취해야할 수단은 모두 취하라

 


 

  하이퍼 인플레이션 아래서는 눈 한번 깜빡하는 사이에 한 달이 일주간으로, 일주간이 하루로, 하루가 한 시간으로, 시간의 척도가 축소된다. 고인플레이션과 고금리는 차분하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 점에 대해 내주 경에나 회합을 갖는 것으로 검토해 보자.] 하는 따위의 유장한 말을 할  여유가 없다. 문제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해결하고 그 자리에서 결정해야한다.

 

  약관 30세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있는 대기업을 맡은 나는 온갖 일을 다했다. 재고의 적절한 관리, 시기 적절한 원료수입, 거래조건과 지불조건의 재점검, 제품의 가격조정, 공장의 생산성 향상, 품질관리, 노동조합과의 절충, 사원들의 모티베이션 향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주의력을 연마하고 취해야할 수단을 강구했다.

 

  혼란한 상황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행중인 사항을 전해주는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나는 사무실에서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수시로 공장을 둘러보고, 영업, 공장노동자, 딜러 등, 회사와 관계가 있는 여러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 회사의 고무농장에도 가보고, 우리 회사가 처한 복잡한 상황을 숫자나 도표, 간단한 모델을 사용하여 설명했다.

 

  이런 여러 가지 노력의 결과는 이윽고 연차 보고서에서 나타났다. 부임한 1985년과 86년은 적자였지만, 87년이 되어서는 흑자로 전환하고, 88년에 미쉐린 브라질은 미쉐린 그룹 계열회사 가운데서 최대 이익을 올렸다.

 


 


 

위기 속에서의 리더십

 


 

  지금까지 나는 미쉐린 브라질 시절의 이야기를 공개한 적이 없다. 독자들도 최근의 미쉐린 브라질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를 출판물 등을 통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3가지다. 우선 브라질이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미쉐린이라는 회사가 다른 국제적인 기업과 비교하여 말수가 적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매상고 3억 달러 정도의 작은 회사의 동향이 세계경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자신의 비즈니스 인생에 있어서 브라질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며, 비즈니스 세계에서의 중요한 일보였다.

 

  브라질의 황량한 비즈니스 환경은 외부에서는 헤아려 알 수가 없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적어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났던 1945년 이후 북반구 여러 나라에서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타격을 입은 경험이 없다. 미국은 이런 종류의 인플레이션을 체험하지 않았으며, 일부 연배의 독일인들을 제외하면 유럽 사람들도 거의 체험하지 않았다. 일본도 제 2차 세계대전 직후의 한 시기를 제외하면 마찬가지다. 중증의 인플레이션 세례를 받지 않았으면, 그런 어떤 행동약식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젊음과 준민성(俊敏性)이다. 브라질에서는 사람을 피로하게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브라질에서의 경험은 유달리 가혹한 것이었지만 보답도 컸다. 나는 신속하게 생각하고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맡았던 젊은 매니저였다. 그 시절에 나는 스피드와 정확한 분석의 중요성을 배웠다. 지연시키기, 차후로 미루기, 결단을 위한 회의소집이라고 하는 사치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 경험이 매니저로서의 나를 성장시켜주었다. 나는 자신의 결단이 모든 종업원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알았다. 아무튼 잘못되면 사원들도 다함께  적자의 바다에 빠지는 것이다. 위기상황 아래서는 사원 모두가 최고경영자에게 방향성을 보여주는 리더십을 발휘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된 것이다.

 


 


 

8 - 곤 가든

 


 

고무나무의 일생

 


 

  위기상황 속에서 전력을 쏟았던 브라질 시절에 나에게 잠시의 평안을 주는 것은 고무농장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미쉐린은 브라질의 바이아주와 마토그론 주에 각각 광대한 1만 헥타르의 고무농장을 갖고 있다.

 

  나무 사이를 걸어가며 노동자들이 헤베아(라텍스를 포함하고 있는 우유빛깔의 수액)를 채취하는 모습을 둘러보는 것이 즐거웠다. 헤베아는 가류(加硫)라고 불리는 과정을 거쳐 고무가 되는 것인데, 고무나무의 자연재배 사이클은 흥미 깊은 것이었다.

 

  고무농장을 경영하려고 결심하면 물론 우선 토지를 구입해야한다. 그 후 1년 걸려 토지를 갈아엎고 기름진 토양을 만든 후 그 다음 해에 파종한다. 헤베아를 채취할 수 있게 자라는 데는 7년이 걸린다. 채취기간은 7년째부터 시작, 25년이나 26년째까지 가능하다. 이 시기가 지나면 나무를 잘라내고 다시 파종해야한다. 이른바 투자기간 7년, 생산기간 18년에서 19년이다.

 

  식물재배에는 위험이 따른다. 병균이나 여러 가지 질병으로부터 나무를 지켜야 하며, 기후나 자연재해로 큰 피해를 볼 수도 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저온장애가 발생하기도 하고, 들불이나 산불이 발생하면 전멸한다. 공들여 큰 나무로 키워온 시간과 투자가 일순간에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고무나무재배 방법을 배워 그 재배사이클을 관찰함으로써 비즈니스 전반에 통하는 여러 가지 교훈, 또한 위험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고무나무 재배 사이클을 단축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프로세스라고 하는 것이 있으며, 이것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로세스의 개선은 필요하며, 하나의 단계를 가능한 한 조기에 완료하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어느 한 단계에서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모든 단계를 순서를 존중하여 착실히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급한 성미로 프로세스를 생략하면 제대로 될 수가 없다.

 

  비즈니스도 프로세스를 무시하여 무언가 하나의 목표, 예를 들면 시장 점유율 확대만을 맹목적으로 달성하려고 하는 단순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닛산 부임 초기에, 일본에서 닛산의 시장 점유율이 언제부터 늘어나기 시작하느냐고 묻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우선 프로세스를 정확히 밟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고 코스트 체질을 개선하고 채무를 줄이고, 제품개발에 투자하고, 브랜드를 확립하고, 마케팅이나 영업을 정비하고, 유통망을 활성화하여 합리화한다. 우선 순위에 따라 이러한 것에 착수하여, 계획했던 것을 모두 완수한 후에 점차로 시장 점유율의 성장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단계를 거치지 않고 예컨대 에누리 판매나 판매마진의 증액 등으로 시장점유율의 확대만을 노린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스피드는 비즈니스 필수조건의 마지막 요소다. 요즘처럼 변화무쌍한 세상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처음인지도 모르겠고, 하이퍼 인플레이션 아래서는 스피드가 중요하다고 말한 것과도 일견 모순되지만, 중요한 것은 스피드 그 자체가 아니다. 허둥거리지 말고 강한 인내심을 갖고 적절한 타이밍으로 프로세스에 필요한 단계를 모두 밟는 것이 중요하다.

 

  2년째 되는 어린 고무나무에서 헤베아를 채취할 수는 없다. 7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사이클이라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여도, 그것은 상관없는 일이다. 아무리 발버둥질 쳐도 7년이 되지 않으면 고무는 채취할 수 없으며, 25, 26년이 지나면 잘라 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사결정의 또 한가지 요소

 


 

  비즈니스의 궁극적인 목적은 부의 창출이다. 우선 순위의 설정, 목표확립, 기업전략의 특정이라고 하는 수속을 밟는 것은 어느 것도 경쟁력과 수익력을 북돋우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미쉐린 브라질을 이끌어 오는 가운데 나는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즉 수익 이외의 요소에 근거하여 결단을 내려야 할 때도 있다는 점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당시 미쉐린은 브라질에 2개의 고무농장을 갖고 있었는데, 하나는 아주 생산성이 높고, 다른 하나는 생산성이 높지는 않았으나 매우 아름다웠다. 생산성이 높은 쪽은 정지(整地)된 평탄한 토지에 고무나무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라나 자못 인공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에 반해 생산성이 낮은 쪽은 자연 그대로여서 경관이 기막혔다. 이곳은 처음에 파이어스톤 타이어 & 라버사가 소유하고 있던 농장을 사들인 것으로 고무나무 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심겨져 있었다.

 

  한 쪽은 생산성이 우수하고 다른 한 쪽은 경관이 뛰어난 것이다. 그런데 자연의 아름다움과 특성을 갖춘 후자의 생산성을 올리는 데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리들은 여기서 생산성과 경관이라고 하는 상반하는 난제에 봉착했다. 문제해결에 나선 사람들은 농장에서 일하는 종업원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우리들의 해결책은 획기적이었다. 말하자면, 생산하기 위해서만 태어난 것 같은 농장에, 뛰어난 경관이 생산성에 어려움을 주는 농장(그 때문에 파이어스톤이 매각했음에 틀림없다)이 경쟁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하는 인식에 입각하여 그 갭을 최소한으로 메우려고 맘먹었다. 그리고 경관이 뛰어난 농장에서 물리적, 생물학적, 화학적인 이유로 헤베아를 채취하는 고무나무 재배에 사용하지 않는 광대한 구획을 유효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생각한 것이다.

 

  우리들은 그 엄청나게 넓은 빈터에 여러 종류의 수목과 식물을 심기로 했다. 브라질은 수목의 종류는 풍부하지만, 우려되는 것으로 절멸의 위기에 처하고 있는 종도 많다. 그래서 이 토지에 브라질 원산의 여러 수목을 한 종류씩 심기로 했다. 나는 이 아이디어에 정신없이 덤벼들었다.

 

  브라질 원산 수목의 원종(原種)을 보존하는 계획에 브라질 정부가 원조를 약속했다. 정부는 무엇을 심고 무엇을 잘라낼지, 경관을 어떻게 변화시킬 지에 대해 엄격한 관리를 했지만, 계획단계에서는 호의적으로 필요한 허가를 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들은 식림을 시작했다.

 


 


 

무형의 자산

 


 

  물론, 나무를 심는 것만으로 농장의 생산성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도 알고 있다. 그러나 많은 나무를 심는 것으로 이 지방의 기후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광대한 토지에 가득할 정도로 많은 나무를 심으면, 이윽고 이 일대가 온통 녹색으로 변하고 강우량이 증가하며, 공기가 깨끗해지게 된다. 그런 변화는 실제로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리들은 그 변화에 만족하고, 그것이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관리자들의 유대를 깊게 만드는 작용을 했다.

 

  지금까지도 물론 이 농장의 생산성이 다른 농장을 따라잡은 것은 결코 아니다. 만일 내가 단기적인 수익성만을 생각하여 결단을 내렸다면, 농장의 코스트 절감을 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했더라면 노동의욕의 저하라고 하는 의미에서 회사에 마이너스로 작용했을 것이다. 농장 팀은 모든 정력을 기울려 생산적인 토지활용법을 찾아내려고 했다. 확실히 식림은 수익면에서는 회사에 은혜를 베풀지 않았지만, 절멸의 위기에 처한 수목의 보존, 그리고 이 지방의 기후와 환경개선에는 큰 역할을 했다. 거기에다 더욱 중요한 것은 회사와 노동자들과 경영 팀의 사이에 심적 유대가 생긴 것이다. 이것은 무형의 자산이며, 미쉐린으로서는 아주 귀중한 장기적인 자산이다.

 

  아름다운 경관은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 브라질을 떠난 얼마 후, 어떤 농장 관계자가 편지를 보냈는데, 식림한 구역을 친애의 정을 넣어 [곤 가든(garden)]으로 부르고 있다고 썼었다. 이것은 나로선 지금까지 받은 보수 중 최고의 것이다.

 


 


 

9 - 미국으로

 


 

카롤로스 곤의 성공비결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기본적인 매니지먼트 컨셉트를 실행으로 옮기는 수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매니지먼트 원칙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에게는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힘이 있다. - 필립 클란(닛산 부사장)

 


 


 

프랑소와 미쉐린으로부터 온 전화

 


 

프랑소와 미쉐린으로부터 문제의 전화를 받은 것은 1988년 5월의 일이었다. 미쉐린 브라질이 아주 건전한 이익을 올리고 있고, 채무도 거의 일소된 무렵에 미쉐린은 북미시장에의 신규진출을 차기 목표로 정했다.

 

  [브라질 쪽은 잘 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는 말을 꺼냈다. [그런데 북미사업에 대해선 데, 현 CEO 후계자로서 자네를 미국에 보낼까 하고 생각하고 있네.]

 

  나는 그의 이야기 내용에 놀랐다. 회사가 나의 북미로의 이동을 고려하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브라질인으로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폴투칼어를 말할 줄 아는 엔지니어였다. 아마도 회사로서는 브라질 사업에 꼭 필요한 인재였을 것이다. 또한 브라질에 온 지 아직 3년 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브라질에서의 업무를 마음에 들어 했으며, 가족과 친구들과의 생활도 즐거웠다. 브라질을 떠난다고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쉐린 본사 사람들은 브라질에서의 나의 업무방식을 보고 아무래도 빠른 속도로 출세가도를 달려 꼭대기까지 오를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프랑소와 미쉐린으로부터 전화가 오기 3개월 전에도 앞일을 생각해 볼만한 징조 같은 것이 있었다.

 

  동료이며 친구이기도 한 베르나르 바두봉쿨이 출장으로 브라질에 왔었다. 일이 끝나면 우리들은 친구끼리의 잡담을 즐겼다. 그 때 그는 미쉐린 브라질에서 사업을 호전시킨 공적으로 북미 톱 자리에 자네를 선임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것은 34세라고 하는 연령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일소에 부쳤다. 그런 자리의 후보는 나보다도 훨씬 경험이 풍부하며 장기간 회사에 공헌해 온 인물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절대로 자네가 될 걸세.] 그는 내가 내년까지 북미 톱으로 발탁된다고 장담하며 최고급 레스토랑에서의 만찬을 내기로 걸겠다고 했다. 나도 반장난의 내기는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악수를 하면서 말했다. [그래 내기 걸었다!]. 3개월 후 나는 브라질에서 그에게 [자네가 이겼다. 만찬에 초대하마. 레스토랑은, 자네가 이겼으니까 자네가 결정하게.]하고 전화를 걸었다. 후에 그가 말한 바에 의하면, 내부정보가 새어나와 알게된 것이 아니고 직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를 놀라게 한 전화에서 프랑소와 미쉐린은 확대중인 북미사업의 새로운 전망을 말해주었다. 당시 미쉐린은 유니로얄 굿리치사(社)인수를 위한 절충에 들어가 있었으며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 그것을 인수하게 되면 회사는, 기존의 북미 미쉐린과 유니로얄사를 통합하여 사업전체를 재편할 예정인데, 강력한 경쟁력을 가진 기업으로 재편하는 프로세스 전체를 지휘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수화기 저쪽에서 그는, 가장 중요한 북미시장에서 미쉐린은 지금 아주 중대한 도전에 나서고 있으며 꼭 자기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고 열변을 토했다.

 

  나는 다시 행운의 상황이 가져온 새로운 기회의 입구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이번에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나는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청했다.

 


 


 

편도 비행기표

 


 

  미국으로 건너가 거기서 인생의 한 시기를 지난다. 그것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미쉐린 북미 본사가 있는 사우스 케롤라이나 주의 그린빌에는 출장으로 몇 번인가 발걸음을 한 적이 있다. 넓은 거리, 커다란 건물, 거대한 쇼핑몰,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경관, 친절해 뵈는 사람들, 나는 인구 6만 정도의 안전하고 한적한 이 도시가 마음에 들었다. 자극적이고, 컬러풀하고, 때로는 거칠어, 결코 안전한 도시라고는 말할 수 없는 인구 600만의 리오데자네이로의 잡다한 혼돈과 그린빌은 전혀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브라질을 떠나겠다는 결단은 개인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괴로운 것이었다. 레바논과 프랑스에서 학교생활을 보내고 있을 때도, 언제나 양친과 자매들, 소꿉친구들이 살던 리오데자네이로의 집에 돌아오는 꿈을 꾸고 있었다. 레바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사람들은 마음으로 나를 받아주었지만, 내가 브라질로부터 온 아웃사이더, 이방인인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브라질에서의 학창시절과 미쉐린 시절을 통해 나는 내내 브라질에 강한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남미사업의 COO라고 하는 말이 나왔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가까스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브라질에 건너온 나는 리오의 이파네마 해안에 면한 아파트에서 리타와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수영도 하고, 친구들과 비치 발레이 볼로 흥겹게 놀이도 하고 해변을 산보하기도 하며 아웃 도어 놀이를 만끽했다. 브리지 놀이도 즐겼다. 처의 브리지 솜씨는 아주 뛰어나 우리들은 곧잘 리오데자네이로의 브리지 클럽에 나갔다. 브라질은 몇 년간이나 브리지 게임의 세계 챔피언을 배출하고 있는 나라로서 우리들이 발걸음을 했던 클럽에서는 참신하고 공격적인 솜씨로 브리지를 하는 챔피언들이 모여들었다.

 

  리오에서 첫 아이 캐롤라인이 태어났다. 젊은 우리들은 이제 막 태어난 딸과 함께, 손녀를 아주 좋아하는 조부모와 백모들의 이웃에 살고 있었으며, 만족스런 가정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나로선 그런 생활을 집어던지고 미국으로 갈 결심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업무 면에서 보면 미국행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유리한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일단 브라질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 두 번 다시 이곳에서 살아가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쓸쓸한 현실을 예감하고 있었다. 양친을 방문하던가 업무로 방문하는 일은 있겠지만, 이제 가면 고향과는 영영 이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리오로부터의 비행기표는 편도표와 다름없었다.

 


 


 

새로운 환경에의 적응

 


 

  결국 나는 1989년, 미쉐린사로선 유럽 이외에선 최대 규모인 미쉐린 북미사업의 CEO가 되었으며, 유니로얄 굿리치와의 통합이라는 업무에 매달리게 되었다.

 

  미쉐린 브라질로부터 미쉐린 북미로 옮김으로써 전혀 다른 비즈니스 환경과 직장환경에 순응해야했다. 사업규모도 대단한 차이가 있었다. 북미는 미쉐린 그룹 전체 매출액의 35%를 차지하고 있었다. 빗대어 말한다면 작은 요트를 조종했던 내가 갑자기 항공모함을 조종하게 된 것이다.

 

  브라질 시절, 전략상의 의사결정이나 사업운영에서 나는 대폭 재량권을 부여받고 있었다. 프랑소와 미쉐린 직속으로서 사업도 놀랄 만큼 훌륭하게 바로잡아 놓았기 때문에 본사가 개입하는 일은 없었으며, 본사 사람들이 어깨너머로 엿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미쉐린 본사는 유니로열 굿리치와의 통합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미쉐린은 지금까지 이런 종류의 기업인수를 직접 다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본사사람들은 합병얘기에 자신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진척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사로부터의 개입 정도가 브라질의 경우와 차이가 나는 것은, 물론 사업규모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 하나, 나의 관찰로는, 본사 사람들은 혼란한 상황 아래서는 경영을 현지 사람들에게 위임하고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말참견하는 것은 상황이 좋게 진행되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하여간 나는 그러한 본사 태도에 순응하여, 개입해와도 마음에 두지 않기로 했으며,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개입을 단호히 거부하려고 결심했다.

 

  본사로부터의 개입에 길들여지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 점을 제외하면, 나는 미국과 브라질의 비즈니스환경의 차이에 빠르게 순응할 수 있었다.

 

  브라질에서는 하이퍼 인플레이션과 고금리의 영향하에서의 조타수가 되어 정부담당자들과 가격조정 절충을 빈번히 하고 일상적인 정부 개입과 투쟁해야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정부의 개입에 신경질이 되는 일도 없었으며 가격통제도 없었다.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시장이었다. 브라질처럼 높은 전직.퇴직률에 고민할 필요도 없고, 특히 사우스 케롤라이나 주에서는 안정된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 나라에서는, 고객만족과 경쟁이라고 하는 비즈니스 본래의 두 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나의 기업경영 어프로치는 북미에서 180도 전환했다. 이 새로운 어프로치는 나에게 유익한 것이었다.

 


 


 

아드모아 공장을 덮친 회오리바람

 


 

  유니로열 굿리치와의 통합에 대해 말하기 전에, 조금 앞선 얘기가 되지만, 본사의 의향을 묻지도 않고 독단으로 결단했던 사례를 얘기해보고자 한다.

 

  사건은 1995년 5월에 일어났다. 오클라호머주 아드모아의 타이어공장이 회오리바람의 직격탄을 맞아 거의 5천만 달러의 피해를 입은 것이다. 이 공장은 유니로열 굿리치 인수의 일환으로 취득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종업원 거의가 구 유니로열 굿리치의 사원들이었다.

 

  회오리바람이 습격한 것은 일요일 오후였다. 밤에 나의 스탭진들과 홍보 및 사내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짐 모던에게 아드모아 공장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피해정도를 알게 되었다. 짐은 피해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급거 아드모아로 날아갔고, 월요일 아침에 그린빌에 돌아온 즉시 나에게 보고했다.

 

  [어떻게 하면 원상복구를 할 수 있을지?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입니다. 벽은 허물어졌고 기계나 설비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으며, 아무튼 처참한 피해입니다.]

 

  그의 추정으로는, 잔해를 정리하여 조업을 재개하기까지는 1년 반정도 걸릴 것 같다고 했다. 마음속으로 나는 1년 반의 생산불능은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생산을 아드모아로부터 다른 공장으로 옮기느냐의 여부를 곧 결정해야했다.

 

  하지만 생산을 옮기게 되면 회오리바람으로 직장이 파괴되어 낙담하고 있는 아드모아 종업원들은 일자리까지 잃게 된다. 그들은 미쉐린이 회오리바람의 피해를 공장폐쇄와 생산업무 정리통합의 구실로 이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상황에서 공장을 폐쇄시킬 생각은 없었다.

 

  짐이 조사보고를 해 온 2일 후에 나는 아드모아로 향했다. 공장재건에 필요한 코스트와 기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짐의 말대로 마치 전쟁터의 한 복판에 들어온 것 같았다. 즉시 공장장들과 피해정도에 대해 의논하고, 전원이 잔해철거작업과 재건에 나서면 조업재개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드모아 체재 중에 나는 이번 재해로 공장관계자들이 실직하는 우려는 할 필요가 없다는 성명을 신문에 발표했다. 성명을 냄으로서 종업원들은 용기를 가지고 재건작업에 의욕을 보였다. 경영 톱으로부터 종업원에 이르기까지 공장관계자 전원이 일치 단결하여 부흥에 진력했던 것이다.

 

  아드모아의 재난을 거치면서 내 맘속에 확고한 신념이 생겼다. 리더는 스스로 현장에 나와서 부하들을 마음으로 염려하고 기둥역할을 해주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가혹한 상황에서는 특히 그것이 아주 중요하다. 입에 발린 말로 무슨 소리를 해도 종업원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공장재건 결단과 관련하여 나는 프랑소와 미쉐린에게 의논할 필요는 없었다. 그와의 사이에는 오랜 신뢰관계가 있었으며, 아드모아와 같은 상황에서 그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지 내가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을 중요시하는 경영자였다. 만약 장기전략의 일환으로서 공장폐쇄를 시야에 넣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시점에서 미쉐린 본사가 공장 재건자금을 내놓기를 머뭇거리리라는 의심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다.

 

  아드모아같은 상황에서는 본사의 반응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않고 독단으로 특별히 대응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 공장은 겨우 13주만에 재건되어 조업재개에 들어갔던 것이다.

 


 


 

10 - 어려운 나날들

 


 

상원의원을 앞에 한 바로 그 순간 요구사항을 입에 올리지 못하는 CEO도 있지만, 그의 경우는 전력을 다하여 목적을 달성하고 만다. 그 스스로 필요하다고 확신하여 보증해 준 것은 부하들을 위해 꼭 완수해 주었다. - 짐 모톤(전 미쉐린 북미 제너럴 카운셀러, 현 북미닛산 부사장)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업무

 


 

  1990년 미쉐린은 유니로열 굿리치의 100% 인수에 성공했다. 북미에의 전략적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미쉐린으로서는 경영상태가 악화된 이 회사를 인수.합병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전략은 조리 있게 진행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두 회사를 통합한다고 하는,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업무는 나의 손에 맡겨졌다.

 

  더욱이 타이밍이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나빴다. 1990년대 초기의 불황으로 미쉐린 그룹은 적자로 전락하였으며, 1990년부터 93년에 걸쳐 적자총액이 18억 5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이렇게 불황이 한창인 때 우리들은 사업통합 프로세스를 추진하였고, 여러 각도로부터 일제히 밀어닥친 문제들을 당장 해결해야만 했다.

 

  문화가 다르고, 비즈니스 철학도 실천방법도 대조적이며, 무엇보다도 경영스타일이 정면으로 상충하는 2개의 회사를 통합하는 것은, 조심스럽게 얘기한다고 해도 아주 힘드는 작업이었다.

 

  미쉐린은 가족회사로서 극도로 유럽색 - 오히려 프랑스색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지만 - 이 강한 글로벌 기업이었다. 제품과 기술과 품질을 중요시하고, 때로는 단기목표를 내거는 일은 있어도 기본적으로는 장기목표에 기초하여 경영되고 있었다. 법적으로 말하면 미쉐린은 [주식합자회사]인데, 이것은 손실이 생길 경우 책임이 공동사주(共同社主)들에 있기 때문에 사주들 자신의 자산을 매각하여 보전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주주들이 불만을 느껴도 공동사주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으며, 주주의 불만소리가 무언가의 변경이나 개선에 반영되는 일은 거의 없다. 사내에서는 공동사주들이 모든 권한을 장악하고 있다.

 

  한편, 유니로열 굿리치는 북미시장을 중심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극히 미국적인 기업이다. 시장 지향적이며 단기적인 이익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고, R&D에는 지나치게 힘을 쏟지 않았다. 이번 4반기에 이익을 올리지 못하면 다음 4반기에는 확실히 올려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의 부침(浮沈)을 경험하기도 하고 확장과 성장을 목표로 해 왔던 미쉐린과는 대조적인 위험성을 느끼게 했다.

 

  두 회사의 기업문화 차이는 1990년대 초반의 불황으로 현저하게 드러났다. 유니로열 굿리치에서 온 사람들은 미쉐린이 수익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에 놀라며, 자동차 메이커에게 OEM으로 공급하는 타이어(신차 조립용품 시장) 개발에 힘을 쏟는 이유를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개인고객들을 위한 교환용 타이어(서비스 부품시장)의 경우가 수익성이 높으며, 거기에 조준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다.

 

  한편 미쉐린은 유니로열 굿리치의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에 당혹감을 느꼈다. 시장을 보는 눈도 다르게 느껴졌다. 미쉐린은 [OEM시장을 위한 신제품을 투입하는 것은, 브랜드명(名)을 침투시키고, 서비스 부품시장을 확립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결혼

 


 

  2개의 회사가 하나로 되는 것은 2개의 문화가 결혼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곧잘 [서구세계]라는 말을 듣는데, 한마디로 서구세계라고 해도 거기에는 여러 가지 문화가 있다.

 

  일반적으로 미국인은 개인의 업적에 관심이 있지만, 프랑스인은 고용보장을 중시한다. 미국인은 숫자를 중시하고 이익지향성이 강하며 재빨리 핵심에 다가가려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인은 매우 분석적이며, 사항이나 문제를 여러 가지 관점에서 논하고, 양보다는 질, 업무수행보다는 전략을 중요시한다.

 

  미쉐린 북미와 유니로열 굿리치가 통합되면, 실제로 스타일이 다른 3개의 매니지먼트 팀이 함께 업무를 하게 된다. 이른바 100% 미국인으로 구성된 유니로열 굿리치 팀, 미국인과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미쉐린 북미 팀, 그리고 미쉐린 본사의 프랑스인 팀이다.

 

  프랑스와 미국의 비즈니스맨은 서로 신뢰하고 경의를 표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프랑스인은 미국인에 대해 비즈니스에 대한 자세가 아주 케쥬얼하여 보스에게도 허물없이 대하고, 마구 닥치는 대로 리스크를 무릅쓰고, 안이하게 일을 추진하며, 어마어마한 목표를 내걸고는 아득히 먼 지점에서 좌절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느끼고 있다. 미국인의 말을 들어보면, 프랑스인들은 쌀쌀맞고, 회사의 격이나 지위만 마음에 두고 있고, 특히 엘리트의식이 강하고, 리스크를 회피하는 방법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마음이 초조하여 안달하기도 하고, 발끈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을 냅다 내뱉으면서도, 서로간의 차이를 뛰어넘어 공통점을 찾으려고 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목표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두 회사의 통합 과정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미쉐린에 대해서는, 좀 더 이익을 중시해야하고, 성과에 연동된 보너스와 같은 인센티브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유니로열 굿리치에 대해서는, 방향성은 틀리지 않았지만 전략이나 R&D나 투자를 경시해 온 것이 재정난의 원인 중 하나였다는 것도 알았다.

 

  또한 복수(複數)의 문화로 이루어진 기업의 경영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교훈을 얻었다. 프랑스식이든 미국식이든, 어느 쪽인가의 경영 스타일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은 미쉐린 북미시절에 내 맘속에 깊이 새겨진 교훈이다. 어느 쪽도 회사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뭔가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두 회사의 장점을 잘 융합시키는 것이 가능하면 미쉐린 북미는 보다 강력한 경쟁력을 가진 기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회사의 어느 특성을 취할 것인지 결단을 내릴 시기가 온다면, 객관적 내지 공평한 태도로 임할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오늘 날 미쉐린 북미는 당시보다도 시장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신차 조립용품과 서비스부품시장의 균형도 개선되고 있다. R&D는 중시되고 있고, 이익이 예상되기까지 그 나름대로의 긴 세월이 걸리는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도 증가하고 있다. 한편은 인수한 회사 또 한편은 인수된 회사였지만, 두 회사는 서로간에 여러 가지 플러스적인 영향을 주면서 합치한 것이다.

 

  이러한 기브 앤 테이크의 과정에서 프랑소와 미쉐린은 시종 양사를 대등하게 취급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유니로열 굿리치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나에게 충고해 주었다. [그들에게 미쉐린 산하에 들어와 잘 되었다고 생각하도록 하라.]였다. 

 


 


 

경영 팀을 하나로 하다

 


 

  통합 과정에서 내가 최초로 단행한 것은 양사의 경영 팀으로부터 하나의 팀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통합에 필요한 구조조정이나 조직재편을 지휘하는 외에 단일 경영 팀을 만드는 것이 불가피했다. 처음부터 하나의 경영 팀이 중심이 되어 전략을 명확하게 컨트롤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우리들은 두개의 회사로부터 하나의 회사를 만들어내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이쪽 저쪽에서 전략을 제안해서는 수습이 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각각에게 의사결정권한은 주었지만, 회사방침이나 가이드라인, 중요한 목표 등은 모두 중앙 경영 팀이 결정했다.

 

  경영 팀에게는 최우선적으로 해야할 2개의 과제가 있었다. 마케팅과 판매에 대한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는 일과 전사적인 사업재구축이었다.

 

  새 전략을 수립하는 것은 흥미진진한 작업이었다. 미쉐린 제품은 싱글 브랜드, 즉 미쉐린 타이어뿐이었다. 유니로열 굿리치는 멀티 브랜드 기업으로 유니로열, BF 굿리치, 그리고 사유(私有) 브랜드나 제휴 브랜드의 제품도 시장에 내보내고 있었다. 유니로열 굿리치 인수로 미쉐린은 강력한 단일 브랜드의 마케팅과 판매전략에서 멀티 브랜드 전략으로 옮겨야 했다.

 

  멀티 브랜드의 제품라인을 시장에 내놓으려고 할 때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간결한 대응을 해야 한다.

 

  우리들이 직면했던 것은, 하나의 시장에서 복수의 브랜드를 어떻게 자리매김 하느냐, 어떻게 차별화 하느냐, 자동차 메이커들에게 어떻게 판매하느냐, 신차 조립용품 시장과 서비스 부품시장 양쪽에 가격설정을 어떻게 하느냐, 그리고 유효한 채널 전략을 어떻게 수립하느냐는 문제였다. 그와 관련하여 미쉐린 고객 가운데는 독립계 딜러, 그리고 시어즈, 월마트, 몽고메리 우즈 등의 양판점, 코스트코 등의 회원제 디스카운트 스토어가 포함돼 있었다.

 

  우리들은 최종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간단히 설명하면, 4개의 브랜드 - 미쉐린, 유니로열, BF굿리치, 제휴 브랜드 - 의 판매를 하나로 통합하고, 이것을 양판점 담당이라든지 독립계 딜러 담당이라고 하는 방식으로 채널별 팀으로 재편성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채널별로 제품의 차별화가 가능해졌다.

 


 


 

중구난방의 해결책

 


 

  인수한 시점에서 유니로열 굿리치는 적자였다. 이 때문에 통합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는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했다. 이 때도 중앙에 설치된 하나의 경영 팀이 해결에 나섰다. 어느 공장을 폐쇄해야할 것인가, 어느 유통 센터를 통합해야할 것인가, 어느 하청업자를 제외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들은 항상 수익력이 근실하게 높은 회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관점에서 답을 도출해야만 했다.

 

  처음에 우리들은 타스크 포스를 만들어 이 과제에 대처케 했는데, 결국 타스크 포스도 단일기능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양사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의논을 했지만, R&D는 R&D만, 마케팅은 마케팅만, 제조부문은 제조부문만의 담당자들로 구성되는 타스크 포스였다.

 

  구조조정 비용이 1990년부터 93년까지의 3년간에 걸친 불황기에 미쉐린 그룹이 입은 적자를 크게 증가시켰다. 경기가 후퇴하고 많은 기업들이 전문성 높은 종업원만 남겨 규모를 축소하려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미쉐린만은 북미시장에 대한 대규모적인 투자를 하느라 비명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3년간, 그 가운데서도 특히 1993년은 나의 커리어에서 가장 괴로웠던 시기였다. 통합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되었지만, 과연 이 고경(苦境)을 회사가 탈출할 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튼 참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구조조정의 시기를 놓친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으로 불안에 떨기도 했다.

 

  나는 상황을 호전시키고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가장 빠른 페이스로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최대의 난관은, 미쉐린 자체가 종래의 비즈니스 방법을 재인식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갖고있는 기업이 지금까지 회피해온 문제에 직면해야하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이 문제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우선 각 부문 자체의 문제에 매달려 해결책을 찾아내려 했다. 그리고 대책에 뭔가 진지성은 보이지만, 그 부문만을 위한 해결책일 뿐, 회사 전체 문제에 대한 핵심에 다가서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오른 손과 왼손이 따로 놀며 서로 간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체 점토를 반죽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각 부서나 각 부문이 각각 제멋대로 움직이는 사태는 브라질에서도 몇 번이나 보아왔다. 미쉐린 북미에서도 그와 똑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직무가 다른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서 각각 다른 관점으로 같은 문제나 기회에 도전케 할 필요성을 통감했다.

 


 


 

크로스 펑크셔널 팀의 탄생

 


 

  이리하여 탄생된 것이 크로스 펑크셔널 팀(CFT)이었다. 이것은 회사가 직면한 문제를 여러 가지 시각에서 검토.분석하려고 하는 절박한 필요에서 생겨났다. CFT라고 하는 발상이 어디에서 생겨났는지 정확히 대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학교에서 배웠던가 책에서 읽은 것은 아니다. 나는 오직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한 것뿐이다.

 

  각 부문에 스며있는 [옛날부터의 사고방식이나 관습]을 바꾸기 위해서는 부문이나 직무의 벽을 초월하여 각 분야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활발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자리가 분명 필요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는 고객이나 주주를 만족시키는 성과는 생겨나지 않는다.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당시 미쉐린은 타이어제품에 특히 엄격한 규격을 마련하고 있었다. 품질을 무엇보다도 중시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일에는 간혹 도를 넘는 경우가 있다. 품질을 중시하는 나머지 어느덧 필요이상으로 많은 규격을 만들고 만 것이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R&D나 마케팅이나 제조부문 사람들을 모아서 해결책을 찾아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그때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함께 일한 경험이 없었다. 과거에 미쉐린 그룹이 이런 방법으로 문제를 풀려고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회사가 감히 생각도 못한 능력을 이끌어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마케팅, 판매, R&D, 제조라고 하는 각각 다른 기능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서 CFT를 결성한 것이다.

 

  나는 CFT 각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 회사는 품질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재의 규격이 요구하고 있는 품질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지, 과잉품질에 빠지고 있지는 않은지 어떤지 재검토 해야한다.].

 

  우리들은 논의를 해 가는 가운데 카본 블랙이나 합성고무, 천연고무의 공급자들에게 의견을 구하기도 하고, 구매담당자와 기술자와 물류담당자를 모아놓고 여러 거지 질문을 했다. 천연고무 함유율이 80%나 필요한지, 비용면을 생각해서 합성고무 비율을 약간 증가시키는 것이 어떤지, 항상 최고급 천연 고무를 사용할 필요가 있는지, 2급품이나 3급품을 조금 섞는다면 품질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등등에 대한 질문이었다. 옛날에는 이런 종류의 의문이 나온 적이 없었다.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는 CFT를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CFT가 있으면 고객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제조부문, 구매부문, R&D 부문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지를 여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CFT가 막다른 상황이나 역부족한 상황을 타개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부문의 사람들을 모아서 특정한 과제 - 예컨대 경비절감, 품질향상, 리드타임 단축, 수익개선 등 - 를 준다면, 그 후에는 그들이 크게 힘을 발휘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물론 최고경영자에게, 지금까지 물들어 있던 낡은 생각과 단호히 싸울 결의가 있어야 이것이 가능해진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CFT에 대한 아이디어는 나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실행으로 옮기는 결단은 내가 내렸지만, 아이디어 자체는 시간을 들여가며 많은 사람들과 논의를 되풀이하고 브레인 스토밍(brain storming)을 행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논의하는 와중에 부문 자체와 직무 자체의 문제만 해결하려고 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얻을 수 없다는 것, 부문과 부문 사이, 직무와 직무 사이에 바로 미지의 마력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CFT는 각부문의 대표를 모아서 단지 미팅을 열고 현상보고를 하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CFT는 문제와 기회의 여러 측면을 세부적인 내용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검토하는, 극히 조직적 내지 발본적(拔本的)인 프로세스다. CFT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기존의 조직이나 매니지먼트가 그들의 제안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한다. 크로스 펑크셔널 팀(CFT)라고 하는 명칭은 미쉐린 북미의 경영위원회 회의에서 탄생된 것이다.

 


 


 

고로(苦勞)의 성과

 


 

  1994년에 미쉐린 그룹은 2억 4천 720만 달러의 순익을 올려 가까스로 흑자로 전환했다. 그것은 여러 요인들이 합쳐진 결과였다. 경기가 호전되고 시장이 숨을 다시 쉬기 시작한 것이다. 미쉐린 자체도 시장점유율 주도형에서 이익주도형으로 옮겨가고 대폭적인 경비절감에도 성공하고 있었다. 경비절감은 CFT의 직접적인 성과였다. 멀티 브랜드 전략도 궤도에 올랐다. 모든 이런 요인들이 겹쳐 흑자화에 성공한 것이다.

 

  그 이후 미쉐린 북미는 성장궤도에 올라 수익이 증대됐다. 잉여생산능력도 이제는 풀 가동하고 있었다. 1995년에는 북미시장에의 신규진출과 수익력 강화를 위해 생산을 확대할 필요가 생겼음이 확실해졌다.

 

  그해 6월, 나는 사우스 케롤라이너주에 10억 달러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1990년의 유니로열 굿리치 인수 이후의 대규모 확장계획이었다. 미쉐린이 처음으로 사우스 케롤라이너의 땅에 북미 본사를 설립한 것은 1975년이었다. 그 이후 미쉐린은 이 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투자발표에 즈음하여 나는 신문 인터뷰에 답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즈니스를 시작하기 위한 환경, 뛰어난 직업훈련이나 기술훈련, 그리고 주 정부의 협력이, 우리 회사가 일관되게 이 주를 투자의 제일 후보로 내걸고 있는 이유다.]

 

  이제서야 회사는 확장 모드에 들어가고, 나는 이때 10년만에 처음으로 건실한 비즈니스 환경에서 회사운영에 종사할 수 있었다. 통합 과정은 신속하게 진행되었으며, 시장은 회복하고, 회사는 이익을 올려 성장하고 있다. 나는 지금부터는 잔잔한 파도를 타는 항해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1 - 전기(轉機)

 


 

미쉐린은 가족회사이기 때문에 결국은 곤씨에게 별도의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이 확실했다. - 필립 베르뉘(미쉐린 경영위원회 멤버)

 


 


 

새로운 공동사주(共同社主)

 


 

  나는 미쉐린에서의 나 자신의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사내에서는 예상할 수 있는 제일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다. 미쉐린이 가족회사인 이상 더 높은 지위는 바라볼 수 없었다. 프랑소와 미쉐린과 이미 2명의 공동사주가 톱의 지위에 올라 있으며, 프랑소와 미쉐린 은퇴 이후에는 아들인 에드와르 미쉐린이 부친의 자리를 인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소와 미쉐린은 아들을 미쉐린 북미의 나의 팀에 맡겨 후계자로서의 훈련과 준비를 시키고 싶으니 받아줄 수 없는가 하고 타진해 왔다. 나는 승낙했고 1993년부터 94년에 걸쳐 그와 함께 일을 했다. 그에게는 북미의 트럭용 타이어부문을 맡겼다. 그는 북미지역의 생산 전체를 통괄하고, 트럭용 타이어의 판매 밑 유통을 담당했다.

 

  당시 그는 아직 30세가 되지 않았지만 매우 의욕적이고 유능했다. 우리들과 함께 일을 함으로서 여러 체험을 하고, 많은 것을 배웠음에 틀림없다. 유니로열 굿리치와의 통합 과정을 함께 헤쳐나갔기 때문에 미쉐린 북미가 극복한 문제나 미쉐린의 기업문화에 기인하는 문제도 잘 이해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어떤 일도 솔직히 이야기하였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좋았다. 그는 나의 CEO로서의 권한도 보스로서의 권한도 존중해 주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후계자로서 부친의 지위를 인계 받는다. 그것은 나를 포함하여 회사의 누구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1995년, 프랑소와 미쉐린은 인계준비를 위해 아들을 프랑스로 불러들였다. 세습기업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아들은 자신의 시대가 오면 독자적인 방향성을 명확하게 내세우려고 한다. 에드와르 미쉐린의 경우도 그러했다. 미쉐린이라고 하는 회사가 지나치게 지역성이 농후하다고 느끼고 있는 그는 북미, 아시아, 유럽이라고 하는 지역별 사업전개가 아니라, 승용차용 타이어, 트럭용 타이어, 불도저 등의 대형기계용 타이어라고 하는 제품 라인별로 조직을 재편하여 글로벌 비즈니스를 전개할 작정이었다.

 

  미쉐린 그룹은 회사재편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룹의 주요 최고경영자들도 이 분석에 참가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그 결과 미쉐린은, 제품 라인별로 9개의 전략적 사업 유니트, 그룹 전체의 경영관리업무 전반을 담당하는 11개의 서비스 부문, 지역별로 업무를 조정하는 4개의 지리적 지역, 세계 전체의 제품개발을 담당하는 하나의 테크놀로지 센터로 재편됐다.

 

  나는 미쉐린 그룹 최고경영위원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룹 전체 총 매출액의 약 55%를 점하는 승용차.소형트럭용 타이어 사업 유니트를 통괄했다. 북미지역을 담당하는 미쉐린 북미의 CEO도 지금까지처럼 겸임했다. 미쉐린 측은 내가 미국에 강력한 인맥을 갖고 있는 것, 그리고 그린빌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을 배려하여 우선은 미국에 체재하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클레르몽 폐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기가 오고 있음이 확실했다.

 

  1996년 1월, 미쉐린의 재편이 발표되었다. 신문은 내가 최고경영위원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린빌에는 [당분간] 체류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최고경영위원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당분간] 미국에 체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자명했다. 끌레르몽 폐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확실했다.

 


 


 

리타의 각오

 


 

  아내인 리타에게는 어떤 일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왔다. 그녀는 생활과 업무 양면에서 나의 파트너다. 업무로 곤란에 직면할 때는 객관적인 입장에 있는 그녀에게 이야기한다. 그녀가 결코 입이 무겁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내가 이야기한 내용이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갈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아무래도 끌레르몽 폐랑으로 돌아가게 될 것 같다고 하자 그녀는 몹시 놀라서 평정을 잃으며 이사는 싫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아내의 기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그린빌을 대단히 좋아했다. 이곳은 미국 남부의 조그마한 활기 넘치는 도시로 국제적인 비즈니스에 적합한 곳이다. 차로 가야하는 정도의 거리에 아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 가까운 한적한 주택가에 집도 샀다.

 

  가족도 이곳에서 늘었다. 브라질에서 이사해 올 때는 아이는 장녀인 케롤라인 뿐이었지만, 1989년에 차녀 나딘이 태어나고, 1992년에 3녀 마야, 그리고 1994년에 장남 앤소니가 태어났다. 그린빌은 우리들에겐 고향이라 불리는 장소가 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웃이나 학교에 친구들이 많았다. 리타는 이곳의 생활을 즐겼다. 그녀는 그린빌을 사랑하여 언제까지나 이 곳에 살고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래 살아 정이 든 곳을 떠나고 친구들과 이별하는 것은 가슴이 터질 정도로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고민도, 앞으로 미쉐린에 남으면 일어나게 될 문제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전개될 사항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나와 프랑소와 미쉐린의 친밀한 관계도 알고 있으며, 장래 에드와르 미쉐린이 톱의 자리에 앉을 시점에 일어나게 될 사태도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의 미련도 동시에 접으려는 듯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사임하는 쪽이 당신을 위하는 길이 될 것 같군요. 전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당신은 아직 젊고 무언가 다른 일이 있을 테니까요. 이사 가기로 해요. 끌레르몽 폐랑 이외라면 어디든지 상관없어요.]

 


 


 

헤드 헌터(head hunter)에게서 온 전화

 


 

  미쉐린은 일할 보람이 있는 회사였다. 나에게 출세 길을 열어주었고 경영자로 오를 기회를 주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프랑소와 미쉐린이 이끌고 있는 미쉐린사는 제품과 시장점유율과 성장을 중시했지만 꼭 이익을 최우선시한 회사는 아니었다. 그 바람에 과거에 셀 수도 없이 수익성 저하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그래서 미쉐린은 경비 절감책의 일환으로 조기퇴직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관리직 대부분을 56세에 정년퇴직 하도록 했다. 정년 후에도 회사에 남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 때는 다른 관리직과의 관계가 어색해지곤 했다.

 

  그런 방침은 정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나 자신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회사의 재정난을 덜기 위해 부득이 퇴직시키지 않을 수 없다니 - 그런 형태로 사직하는 것은 참으로 싫었다. 나는 힘껏 일하고 능력이 닿는 한 최고정점에까지 오른 후 은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어차피 결단을 내릴 시기가 온다고 느끼고 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그렇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회사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미쉐린을 사임하기는 어렵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미쉐린 그룹은 강렬한 개성을 가진 기업이다. 사원들은 강한 유대로 연결된 하나의 가족이며, 감정적인 레벨에서 결속하고 있다. 일단 입사하면 정년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했다. 중도퇴사는 말하자면 마을의 규정을 어기려는 것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점을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확실한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던 1995년 7월 어느 날, 빠리의 헤드헌터(인재 스카우트 담당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귀하에 관한 여러 기사를 읽었습니다. 미쉐린에서 굉장한 실적을 올렸더군요. 지금은 미국을 거점으로 활약하고 계시군요.]

 

  나 자신이나 나의 지금까지의 업무에 관해 여러 가지를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전부터 나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꼭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싶은데 시간을 낼 수 있는지요? 귀하에 대해 좀더 알고싶어서...]

 

  이야기하는 중에 그도 에꼴 폴리테크니끄 졸업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출신교가 같다보니 대화 중에 모교의 교수들이나 당시 학생들에게 공통으로 알고 있는 얘기들이 많이 나오기도 하여, 나에게도 그의 진지한 태도가 전달돼 왔다. 업무상의 일로 조만간 프랑스에 가야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에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와는 레스토랑에서 만났고, 식사를 하면서 학교시절 이야기나 비즈니스 전반에 대한 이야기 등 별 시답잖은 세상사에 대한 얘기들을 나눴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나의 경력이나 현재의 업무에 관해 구체적인 질문을 해 왔다. 마지막으로 그는 나의 흥미를 자아낼만한 업무얘기가 있으면 전화하겠다고 말했고, 우리들은 악수를 하며 헤어졌다. 그 때는 그저 가볍고 즐거운 잡담, 그런 수준이었다.

 

  그 후 1년 가까이 기별이 없었는데, 이듬해인 1996년 3월이 되어 전화가 걸려왔다.

 

  [꼭 얘기를 나누고싶은데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업무 건으로 상담하고싶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업무에 만족하고 있으며 미쉐린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막 시작되고 있다고 말했다.

 

  [아주 중요한 얘깁니다.]

 

  나는 그의 어조에서 절박성을 느끼며 무언가가 있구나 싶었다.

 

  [지금까지 귀하는 대형 납품회사(supplier)에서만 일을 해 왔는데, 자동차 메이커 일에도 흥미를 가지고 계시지 않을까 하여 전화를 걸었습니다.]

 

  납품회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동차 메이커는 구름 위의 존재였다. 그는 내가 자동차광이며 기계광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손바닥을 모두 뒤집어 보이지 않는 한 섣불리 의논에 응할 수는 없었다.

 

  [그런 얘기뿐이라면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나는 그가 얘기하는 자동차 메이커의 이름과 고려하고 있는 지위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만나지 않겠다고 반복해 말했는데, 그는 이런 얘기는 내밀한 것으로서 전화로는 얘기할 수 없다고 우겨댔다. 나는 마침내 끌레르몽 폐랑에서의 회의 후 빠리에서 그를 만나기로 약속했다.

 

  빠리의 레스토랑에서 그는 모든 얘기를 해 주었다.

 

  [상대는 러노입니다.]고 그는 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루이 슈바이쳐<러노의 CEO>가 넘버 투 맨을 찾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넘버원의 자리도 꿈만은 아닐 것입니다.]

 

  헤드헌터는 이런 방법으로 얘기를 꺼냈다. 흥미를 일으키기 위해 상대의 자존심을 몹시 부추겨대는 것이다. 나를 위해 준비해 논 것은 회사의 중요한 분야를 모두 통괄하는 넘버 투의 자리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진작부터 자존심을 부채질하여 나의 행동을 좌우하려고 하는 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 때도 [이런 이야기는 약간 할인해서 듣는 편이 좋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설득력이 있었다. [루이 슈바이쳐에게는 이미 귀하에 대한 얘기를 해 놓았습니다. 그가 귀하를 만나보고 싶어하기 때문에 귀하의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면접일을 잡을 작정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것으로 결정됐다고 생각했다. 러노는 프랑스의 굉장히 유명한 자동차 메이커로서 본거지는 빠리였다. 어차피 프랑스로 되돌아간다면 빠리로 이사하는 것이 좋다. 아내도 끌레르몽 폐랑의 시골에서 살아가기보다는 빠리 쪽을 좋아할 것임에 틀림없다.

 

  [알겠습니다. 면접에 응하지요.]

 


 


 

이른 아침의 면접

 


 

  루이 슈바이쳐와의 최초의 면접이 아침 8시에 있었다. 이 시간대를 설정해 옴으로써 그의 생각에 대해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기업의 CEO를 아침 일찍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다고 하는 것은 그 인물이 그 일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을 만날 때의 첫 인상은 언제까지나 마음속에 남아있으며, 그 후 그와의 인간관계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그의 말씨는 조용하면서도 분명했고 논리적이며 솔직했다. 덕분에 나는 처음부터 편안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와의 대화는 기분이 좋았고, 이야기해 갈수록 러노가 지향해야할 방향성에 대해 그가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나에게 많은 질문을 했고, 나도 많은 것을 물었다. 나는 그의 인품, 러노라고 하는 회사, 그리고 넘버 투 맨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알았다. 그는 러노의 현 상태에 관해 명석하고 간결한 분석을 하며, 내가 수행해야할 역할에 관해 정확하게 설명해 주었다.

 

  약 1시간 정도 이야기를 한 후 마지막으로 그는 또 한 사람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물론 승낙했다. 그 사람은 루이 슈바이처와 나와의 얘기가 결말이 나면 내가 업무인계를 받아야 할 넘버 투 맨이었다. 나는 그 사람과 간단하게 몇 마디 주고받고 헤어졌으며 그 길로 공항으로 직행하여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면접은 성공적이었다. 루이 슈바이쳐는 나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면접이 있은 지 2일 후 문제의 헤드헌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상대방은 마음에 들어하고 있습니다. 귀하께서는 어떻습니까?]

 

  [조건 나름입니다.]고 나는 대답했다. 미쉐린을 사임하고 러노로 옮기려는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제 약간 이야기의 결말을 내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건교섭은 빠르게 진행됐다. 사실은 물질적인 조건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작정은 아니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를 구체적으로 실증하기까지는 이 쪽에서 요구조건을 내걸 수는 없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논할 필요가 있었던 유일한 조건은 시기에 관한 것이었다. 루이 슈바이쳐는 가능한 한 빨리 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빨리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어 하루 빨리 팀에 합류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회사를 사임할 적기(適期)

 


 

  회사를 사임할 적기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전 단계에서는 설사 러노로부터 얘기가 있었다고 해도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북미사업의 재건을 맡겼던 회사의 신뢰에 보답하는 것이 나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1990년에는 (회사)인수의 해였으며, 91년과 92년은 재편의 해였다. 93년에는 이익이 감소하고 시장이 얼어붙었다. 94년이 되자 호전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95년 시점에서는 아직도 해야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어느 해를 생각해봐도 사임할 때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임해야할 시기는 사임해도 지장이 없는 시점, 바꿔 말하면 무엇인가 미완성으로 있는 것을 달성한 시점에 단호하게 사임해야한다. 화재로 타고 있는 집을 내버려두고 달아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러노로부터 권유를 받았을 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전직해야한다면 바로 지금이 사임할 시기다. 장래로 미루기라도 한다면 시기를 놓치고 말 것이다.]

 

  1996년 7월 나는 루이 슈바이쳐에게 최종적인 결론을 전했다.

 

  [가겠습니다.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사임결심이 섰을 무렵 특히 마음을 짓누르는 일이 하나 남아있었다. 프랑소와 미쉐린에게 사의를 전하는 일이었다.

 


 


 

12 - 정리(情理)를 끊다

 


 

프랑소와 미쉐린

 


 

  1978년 입사 이후 내가 미쉐린에서 걸어온 길에는 일관되게 프랑소와 미쉐린의 영향이 농도 짙게 반영돼 있다. 순수한 프랑스인이 아니었던 나는 프랑스인 동료 사원들 가운데서 아마도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을 것이다. 또한 브라질 프로젝트에 착수하고 있었던 관계로 회사 상층부는 나의 성장과정에 특히 주목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프랑소와 미쉐린은 회사의 중심이다. 중요한 포지션에 대한 최종적인 인사권은 모두 그가 장악하고 있다.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그는 일찍부터 나에게 주목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것 또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본사 상층부의 나에 대한 평가 가운데는 프랑소와 미쉐린의 주의를 끌만한 무언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출세가도의 제 1보를 내디뎠을 때 나는 아직 26세였기 때문이다.

 

  루 쀼이의 공장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나는 입사 후 겨우 3년 밖에 되지 않았다. 공장장은 일반적으로 근속 20년 이상의 베테랑 사원이 취임하는 지위였다. 공장장을 거쳐 수년만에 나는 미쉐린 브라질의 COO로서 브라질에 부임했다. 당시 30세, 미쉐린 창사이래 최연소 COO였다.

 

  본사에 들러 브라질사업에 대한 진척상황을 보고할 때면 그는 이야기를 다 들은 후 충고해 주곤 했다. 때로는 나의 의견에 머리를 갸웃하는 일은 있어도 말참견을 하며 나의 판단을 불문곡직 철회시키려고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는 현지에 있는 나를 신뢰하고 지원해 줬다. 그는 흔히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알고 있는 제일 효율적인 방법으로 일을 추진하게. 그리고 결과를 제출해 주게. 만약에라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 이유를 알려주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주게. 무엇이든지 내게 못할 말이 없지 않은가?]

 

  브라질에서의 사업이 흑자화로 성공함으로써 분명히 나에 대한 신뢰감이 높아지고 강해졌다고 생각된다. 1989년에 그는 나를 미쉐린 북미 CEO로 임명했다. 이 때도 나는 35세라고 하는 미쉐린 창사이래 전례 없는 최연소 CEO였다.

 

  미쉐린에서의 18년을 돌이켜 보면, 프랑소와 미쉐린과 나는 업무 면에서 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생각한다. 내가 회사에 공헌한 것, 그의 신뢰에 보답할 수 있었던 것을 그는 착실히 받아들이며 인정해 주었다고 나는 느끼고 있다.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도 상호 이해나 상호 신뢰에 유리하게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측근들이 끌레르몽 폐랑에 없었다는 것도 나에게는 행운이었을 것이다. 옛 속담에도 있는 것처럼 [떨어져 있을수록 생각이 더 나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 보아도 프랑소와 미쉐린은 정말 좋은 분이었다. 기호(嗜好)는 세련돼 있었지만 동시에 실제적인 분이었다. 일상생활에서는 소박한 것을 가까이 하고, 화초를 좋아하며 기르기도 하고, 특히 평범하게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연령이나 국적에 대한 선입관은 전혀 없고, 한번보고 사람을 간파하며 잠재능력을 판단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비즈니스 세계에서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인간으로서의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나는 그로부터, 경력이나 연령으로서가 아니라, 능력이나 기술이나 재능에 기초하여 사람을 대하고 신뢰감을 북돋우는 법을 배웠다.

 


 


 

결단

 


 

  미쉐린가(家) 사람들은 나와 프랑소와 미쉐린 사이에 강력한 유대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본사 상층부에 개입되지 않고도 배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강력한 유대는 사내의 질투심을 부채질한다. 언젠가는 그의 아들과의 사이에 알력이 생긴다는 것은 분명했다.

 

  최고경영자의 자리를 물려받는 아들에게는 어차피 과거를 확실히 단절해야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족적을 새기기 위해 자신과 호흡이 맞는 팀이나 조직을 찾을 것임이 분명하다. 40년에 걸쳐 회사를 운영하고 사내에서 존경을 받아온 인물의 후임자로 앉기 때문에 더 한층 그런 경향이 강해질 것이다. 부친이 물러난 뒤에도 내가 머물러 있다는 것은 그에게 부친의 그림자를 늘 붙어 다니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자문자답을 반복했다. [너는, 보살펴주지도 않은 체 프랑소와 미쉐린의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인정으로 두어두고 있는 것 같은 상태에 만족해하고 있을 작정인가?]. 이것도 과거를 단절해야한다고 생각한 이유 중의 하나다. 여하튼 이대로 나가면 여러 가지 상서롭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으로 보이며 그것만은 피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한 것은 1996년에 들어서면서부터다. 그 해에는 여러 가지 일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미쉐린의 조직이 대폭 개편되어 끌레르몽 폐랑에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아들인 에드와르 미쉐린이 미쉐린 그룹의 CEO 자리를 물려받고, 나에게는 러노로부터 권유가 있었다.

 

  이러한 것 모두가 중첩됨으로서 나는 점점 더 적당한 때가 왔다고 느끼게 되었다. 움직일 때가 왔다, 지금 여기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언가가 깨어진 순간

 


 

  어차피 먼저 프랑소와 미쉐린에게 이야기를 해야했다.

 

  그에게 무엇을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면 좋을지, 나는 몇 주간이나 마음속으로 준비를 했다. 아무튼 그를 마음 상하게 해서는 안되었다. 정직하게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지 어떨지 그 판단이 특히 어려웠다. 이유를 밝히지 않고 물러난다 해도 그에게 나의 진의가 밝혀질 터이다. 마침 좋은 기회에 내가 사임하면, 회사로서도 나로서도 바람직할 것임에 틀림없다.

 

  1996년 7월, 미쉐린 최고경영위원회의 연차 전략 세미나가 끝났을 때, 나는 프랑소와 미쉐린의 방으로 갔다.

 

  마음속으로 되풀이하여 준비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사의를 밝히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만나러 온 목적을 말하자 그는 아연해 하며 말이 없었다. 나는 이유를 설명하고 나의 사직으로 인해 생길 플러스적인 면을 강조하려고 했다. 내가 옮겨갈 회사는 라이벌 회사가 아닌 자동차 메이커라는 것, 회사를 떠난다고 해도 회사가 나의 힘을 필요로 하는 시기에 떠나는 것이 더욱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그리고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해도, 18년간 쌓아 온 관계를 단절한다는 사실을 변명할 수는 없었다.

 

  얘기가 끝난 후 프랑소와 미쉐린과 나와의 사이에 뭔가가 깨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나의 전도를 축하했고 우리들은 이별의 말을 나누었다.

 

  그 이후 나는 두 번 정도 프랑소와 미쉐린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는 그가 러노를 방문했을 때이다. 자동차 메이커를 방문한 이 스플라이어(러노에겐 미쉐린이 타이어를 공급하는 스플라이어다)의 최고경영자는 곧잘 나의 사무실에 들러서는 인사차 왔다며 잘돼가고 있는가 고 말을 걸어왔다. 또 한번은, 1999년 10월, 내가 닛산 리바이벌 플랜을 발표한 직후였다. 그는 돌연 전화를 걸어 나를 격려해 주었다. [항상 자네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네. 지금부터 큰 변화의 시기를 맞을텐데, 자네의 성공은 내가 확실한 보증을 함세.].  그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이 두 번뿐이다.

 

  40년에 걸쳐 미쉐린 그룹의 톱을 맡아 온 프랑소와 미쉐린은 지금도 공동사주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지만 거의 은퇴시기가 가까운 상태다. 그가 항상 배후에서 지켜보고 있으며 용기를 북돋워 준 덕분에, 나는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달성해 왔다. 그리고 그가 나 이상으로 나를 신뢰해주고 있다고 하는 안도감에 항상 그를 버팀목으로 생각해 왔다. 나는 한평생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III부 - 러노에서

 


 

13 - 고민하는 명문기업

 


 

곤씨는 무슨 일을 할 때도, 사람은 간단히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슬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회의적인 견해밖에 없던 사람들이 돌연 태도를 바꾸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어 변혁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들은 놀랄 정도의 변모를 보였다. - 장파티스트 두장(러노 부사장)

 


 

루이 슈바이쳐

 

 

 

  내가 루이 슈바이쳐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의 착 가라앉은 언행, 러노에 대한 깊은 애정, 전략의 정확성에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여러 의미에서 자동차업계에서는 회귀한 존재라고 느꼈다.

 

  그는 1970년에 프랑스 정부의 재무부 통계국 관리로 출발, 몇 개인가의 요직을 거친 후 획기적인 변신을 시도하여 러노로 옮겨온 인물이다. 대형 은행이나 대형 보험회사로의 전직이라는 길도 있음직 했는데 자동차 메이커를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중대한 결심이다. 1986년에 자동차업계로 뛰어든 슈바이쳐는 러노가 안고 있던 여러 난제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1986년의 러노는 도산의 갈림길에 몰려 있었다. 1984년부터 86년에 걸쳐 적자총액은 290억 프랑(약 35억 달러)이 넘었으며, 미국정부가 크라이슬러를 구제했듯이 프랑스정부가 세금을 투입하여 구제금융을 해줬다.

 

  러노가 수익을 올리지 못하는 주요 원인은 국영기업이었던 데에 있었다. 실제로 당시 러노의 사내 풍조는, 이익이 나면 바람직하지만 안 나도 별 것 아니라는 식이었다.

 

  슈바이쳐가 입사했을 당시 러노 자동차라고 하면 조악하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높은 제조 코스트, 종업원 과다라고 하는 문제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사안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시장도 국가가 보호해 주는 국내시장에 한정되었는데, 점점 국가의 보호가 없어지자 외국 자동차 메이커와의 경쟁에 패해 아주 이른 시기에 위기적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당시 CEO였던 레이몽 레뷔는, 이미 후하게 대접을 받아 온 국내시장에만 의존할 수 없는 시기가 오고있다고 생각하고 세계시장진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러노는, 시장이 승자를 결정하는 경쟁의 장이 되고 있는 마당에 타사를 이기지 않고는 가망이 없는 궁지에 몰렸다.

 

  레뷔와 꼭 같은 기업이념을 갖고있던 슈바이쳐는 국제경쟁에서 이기는 데는 고품질의 제품과 신뢰할 수 있는 서비스 제공이 불가결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레뷔나 러노사람들과 함께 회사를 재건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을 단행했고, 그 결과 러노는 1989년에 흑자로 전환, 그 이후 1995년까지 높은 수익력을 유지했다.

 

  1992년 슈바이쳐는 레뷔의 후임으로 CEO 자리를 물려받았고, 민영화와 민간기업 경영원칙에 따른 기업운영이라고 하는 거대한 목표를 내걸었다. 1994년 러노는 정부의 주식보유비율을 53%로까지 줄이는 절충에 성공하였으며, 그해 프랑스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2년 후인 1996년에 정부 주식보유 비율은 44%로까지 감소됐다.

 

  프랑스정부가 거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시피 한 기업에 내가 들어가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정치나 관료의 개입으로 전략이나 계획을 둘러싼 의사결정 권한이 확산되어 희박해지고 때로는 방해받는 것 같은 상황에서는 도무지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러노의 경우, 국가가 여전히 최대주주로 있긴 했지만 보유비율을 줄이는 시기 또는 완전히 철수하는 시기가 어차피 올 것으로 예상됐다. 

 

  슈바이쳐는 이제 민간기업이 된 러노의 CEO로서 위대한 그의 수완을 발휘하였으며 전략입안과 실행에 본격적인 자세로 나섰다. 그의 전략은 다음 2가지를 축으로 한 것이었다.

 


 

  1. 합리화를 추진하고 국내시장의 경쟁력을 제고하며 코스트 효율을 높인다.

 

  2. 유럽시장이 포화상태에 달한 것을 감안, 잠재력을 키워 유럽 외 시장을 개척한다.

 


 

  그는 러노의 성장을 위해서는 유럽 외 시장에의 진출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럽시장이 국별로 분단되어 메이커들이 각각의 자국시장에 군림하던 시대는 끝나고 있었다. 유럽은 규제완화와 시장개방으로 줄달음치고 있었으며 온 세계 자동차 메이커들이 유럽시장 공략을 목표로 덤벼드는 시기가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1996년, 러노는 89년이래 흑자를 유지해 왔던 기조를 깨고 다시 적자로 전락했다.

 

  최초의 면접에서 슈바이쳐는 러노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고 시간을 더 할애해가며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는 궁지에 몰리고 있는 러노의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는 취임과 동시에 내가 직면하게 될 시련이나 과제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 회사는 여러 분야에서 문제를 안고 있지만, 가급적 신속한 대응이 필요한 곳은 코스트 효율의 개선입니다.]

 

  그는 코스트 절감을 위한 단계를 몇 개인가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현재 목표는 2년 후에 생산 코스트를 자동차 1대 당 3천 프랑 삭감하는 것입니다.].

 

  슈바이쳐를 직접 만남으로써 러노라고 하는 회사에 대한 관심이 단숨에 높아졌다. 나는 18년간 스플라이어(공급회사) 업계에 몸담아 항상 자동차를 상대로 한 업무를 해 왔다. 자동차 메이커로 옮긴다는 것은 말하자면 먹이사슬의 최고위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자동차는 분명히 타이어보다 흥미를 자아내는 대상이었으며 나 자신도 자동차를 대단히 좋아했다.

 

  러노로 가기로 결심했던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 러노는 도전해볼 만한 과제에 직면하고 있는 민영화 도상의 기업이었다. 나는 러노에 이끌렸고, 자신이 러노의 재건에 공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화성인, 러노 부사장으로 취임]

 


 

  루이 슈바이쳐가 러노의 2인자 자리에 나를 앉힌 것은 이례적이라고 할만한 결단이었다. 순수 프랑스인도 아니고 정부고관과의 커낵션도 없는, 프랑스 대학을 나온 레바논계 브라질인이 가족회사인 미쉐린으로부터 민영화 도상의 국영기업으로 온 것이다. 오기 전까지 일을 하고 있던 곳은 미국이었다.

 

  어쨌든 슈바이쳐는 두 번 만났을 뿐인 나를 고용하는 데 따른 리스크를 떠 안게 된 것이다. 그의 판단을 의문시하는 소리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내가 러노에 적합하다고 생각할만한 충분한 통찰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러노의 넘버 투맨으로 나의 이름을 발표한 시점에서 큰 도박에 나선 것이다.

 

  이 뉴스가 미디어에 이르자, 신문 제목들은 일제히 “[화성인 카롤로스 곤] 등장, 루이 슈바이쳐는 러노의 재건을 화성인에게 위임하는 도박을 했다”고 쓰고 있었다.

 

  온 세계의 자동차 메이커들을 둘러보아도 나와 같은 케이스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포드나 제너럴 모터즈(GM)가 외부사람을, 더욱이 단 두 차례 만났을 뿐인 사람을 차기 CEO로 보이는 넘버 투 맨의 지위에 앉히겠는가? 그런 일은 여하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슈바이쳐는 전향적으로 전략적 리스크를 받아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가슴속에 확고한 전략이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러노의 성장을 원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국내시장이나 유럽시장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그것을 위해서는 대담한, 한편으로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가 프랑스 국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있다.]

 

  그는, 러노의 세계시장진출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국제경험을 쌓은 실적이 있는 외부인을 톱의 자리에 앉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새로운 사고방식을 불어넣어 새로운 에너지를 주입하기 위해서는 아웃사이더, 이른바 외부인 채용이 불가피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동족교배는 어떻게 해서라도 피하고싶다. 러노 재건 프로세스를 촉진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 회사는 외부사람을 초빙했다.]고 슈바이쳐는 말했다.

 

  러노에 들어간 나는 순수 프랑스인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넘버 투의 자리에 앉았으며, 이곳에서도 최연소 기록을 갱신했다.

 


 


 

3개의 장애

 


 

  내가 러노로 옮긴 것은 1996년 10월이었으며, 정식으로 부사장에 취임한 것은 12월이었다. 슈바이쳐는 취임 때까지의 2개월간, 사내 어디든 마음대로 방문해 보라고 권고했다. 가까운 장래에 내가 부사장으로 취임한다는 정식통지가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방문해도 사람들은 내가 오는 목적을 알고 있었다.

 

  2개월 사이에 나는 러노라고 하는 회사에 대해, 특히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공장을 방문하고 공급회사(부품 및 부분품) 사람들과 대화하고, 유럽의 판매거점들을 돌아보았다. 이것은 문제의 핵심을 파악할 때 내가 늘 취해왔던 방법이다.

 

  내가 꽤 이질적인 사람으로 생각됨직 했지만 어디서도 아주 호의적으로 맞아 주었다. 사람들은 나에 관해 알고 있었으며 업무상의 문제 등에 관해 기탄 없이 이야기해 주었다.

 

  아웃사이더의 눈으로 러노를 살펴보니 성장과 수익성 향상을 방해하고 있는 장애들을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장애는 크로스 펑크셔널리티의 결여였다. 이것이 회사를 망가뜨리고 있는 원인이었다. 이것은 자동차업계 전체가 안고있는 큰 문제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것은 미쉐린 북미에서 OEM공급 고객인 자동차 메이커들을 접했을 때였다. 그 때는 가끔씩 틈새로 살짝 엿봤을 뿐이지만, 러노에 온 이후에는 이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크로스 펑크셔널리티의 결여가 자동차 메이커의 큰 약점중의 하나인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얼마나 회사가 쇠퇴하고 자금과 가능성이 엉망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처음으로 절실하게 느낀 곳이 러노였다.

 

  두 번째 장애는 리스크를 지나치게 두려워한 나머지 무난한 목표밖에 설정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프랑스 특유의 성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쉐린 북미에서 다문화체험을 한 나는 프랑스인들의 사고 속에는 리스크나 돌발적인 사태를 최소한으로 억제하려고 하는 철저한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필요이상으로 면밀한 계획을 수립하게되고, 뜻밖의 사태에 대한 공포심이 지나쳐 결과적으로 소극적이고 낮은 목표밖에 설정할 수 없게 된다. 이래가지고는 회사가 갖고있는 잠재능력이 최대한으로 발휘되지 못한 체 끝나고 만다.

 

  이런 종류의 보수주의는 나의 매니지먼트 이념이나 경험과는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다. 회사도 사원들도 스스로를 뻗어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원들은 보다 대담하게 보다 적극적으로 비즈니스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불가능한 목표를 내걸 정도로 주제 넘는 짓을 해서는 안 되지만, 경험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능력의 한계까지 자신을 끌어올려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장애는, 러노 사원들 대다수에게 보이는 비관주의 내지 회의주의적인 경향이었다. 확실히 내가 러노에 들어간 1996년 당시의 가혹한 상황을 고려하면 회의적으로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앞으로 회사가 살아남을지 어떨지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회사들이 새로운 시장에 과감히 진출하고 있는 가운데 러노는 모습도 변하지 않는 유럽시장만을 시야에 넣고 있었다. 글로벌한 사업전개를 목표로 하여 제휴선을 찾아내는 길도, 후술하는 아메리칸 모터즈나 볼보와의 사이에서의 실패도 있어, 실현에 이르기까지는 아주 아득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특히 그 해의 영업실적이 현저하게 저조했기 때문에 장래에 대한 불안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러노는 과거에 업적향상을 목표로 하여 수많은 우수 아이디어를 실행해 왔지만, 의도한 성과가 나타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과거에 폐기된 아이디어에서도 그것의 실행성과 유효성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있어 채용했다. 그러한 때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반응이 돌아왔다.  [그 아이디어는 3년 전에 시험해 보았는데 좋지 않았습니다.]

 

  이런 종류의 반응은 러노 사람들이 아이디어 그 자체는 중시하면서도 그것을 실행하려고 하는 부분을 경시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들은 아이디어에는 홀딱 반하고 계속 논의해 오면서 막상 실행을 위한 명세는 충분히 검토하지도 않고, 진척상황을 엄밀히 모니터하는 것에도 게을렀던 것이다.

 

  실행이야말로 전부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아이디어는 과제극복의 5%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디어의 좋고 나쁨은 어떻게 실행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나는 사원들에게 이전에 시험하여 좋은 성과를 올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아이디어가 나빴다고 하는 증거는 아니고 실행방법이 부적절했는지도 모른다고 말해주었다.

 

  같은 아이디어를 다시 실행하는 경우 나는 회사전체를 납득시켜야 했다. 아이디어는 신뢰할 수 있는 것이고 이미 한번 실행할 예정으로 있었던 것이며, 다만 이번에는 실행으로 옮긴 후에도 말끔히 추적하고 효과를 측정하고, 기대에 걸맞은 성과를 만들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2가지 트라우마(trauma)

 


 

  인간과 마찬가지로 어느 회사에도 고유의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개성이나 심리상태가 있다. 1996년의 러노는 과거의 실수라고 하는 무거운 짐에 눌려 찌부러져 있는 회사라는 인상을 주었다. 사원들의 사기에 크게 악영향을 준 요인은 2가지다.

 

  하나는 1980년대에 범했던 과오다. 러노는 1980년에 아메리칸 모터즈(AMC) 주식의 46%를 취득했다. AMC는 자금난과 그리고 제품라인을 교체했으나 그 효과가 나지 않아 고통을 겪고 있던 미국 기업이었다. 유일한 희망은 지프차였지만 러노의 미국시장참여 목적은 허무하게도 무너져버렸다.

 

  당시의 러노는 필요한 투자를 할만한 체력이 없었고, 그 계획은 지나치게 무모했다. 레이몽 레뷔는 손실을 각오하고 AMC를 크라이슬러에 매각하고 미국시장으로부터 철수하는 길을 택했다. 이 철수는 러노의 프라이드와 자신감에 큰 타격을 주었다.

 

  두 번째 과오는 1990년대 초반에 일어났다. 1992년 슈바이쳐는 스웨덴의 자동차 메이커인 볼보와의 합병교섭을 시작했다. 그는 러노가 시장점유율이 점점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프랑스 국내시장에 의존하고 있는 것을 우려하여, 보다 큰 시장을 목표로 하는 전략을 전개했다. 이 합병으로 세계 제 6위, 대형 트럭부문에서는 제 2위의 자동차 메이커가 탄생할 터였다.

 

  합병교섭에서는 러노가 계속 우위에 서 있었다. 1992년 러노는 10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한편 볼보는 국내 매출이 급락하고 국외사장에서도 저조했다. 자동차시장 분석가들 사이에서는 합병얘기가 나왔던 당초부터 기업 문화가 지나치게 달라 합병을 걱정하는 소리가 많았다. 프랑스기업과 스웨덴기업이 합치는 것은 와인과 우유를 섞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해석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확고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업간의 제휴에 이런 논거 없는 억측이 으레 따르기 마련인 것은 그 후 러노-닛산 제휴를 둘러싼 보도를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볼보와의 합병교섭에서 가장 크게 장애가 된 것은 언어였다. 러노에게도 볼보에게도 상대의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회의에서는 절충안으로서 영어가 사용되었지만 그래도 통역이 필요했다.

 

  그러나 양사는 서로간의 상위점에 착안한 것은 아니고 서로간 보완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자신의 문화를 상대에게 강요하려고 하지 않았다. 러노는 유럽 남부, 볼보는 북부에서 강력했다. 러노는 소형차를 전문으로 하고 볼보는 대형 고급 세단을 제조하고 있다.

 

  교섭이 난항하는 기미는 없었고 모든 것이 1994년 1월에는 합병이 실현되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합병 후에 탄생하는 새 회사의 조종간은 슈바이쳐가 잡는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우려되는 것으로 러노에게는 민간기업이 갖는 유연성이 결여돼 있었다. 합병승인여부가 주주의 손, 즉 프랑스 정부의 손에 매달리게 되었다.

 

  슈바이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정부가 러노의 매니지먼트에 개입하는 일은 없었지만, 볼보와의 합병은 주주의 결정에 위임됐다. 정부는 기민하게 움직이지 않고 꽤나 신중했다. 정부는 비즈니스 이외의 우려, 주로 정치적인 우려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정부가 개입함으로써 스웨덴의 국민감정이 자극을 받았고 볼보경영진이 결국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볼보의 새 경영진은 러노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상이 사건의 전말인데, 어떤 점에서는 러노도 볼보도 제휴에 필요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러노는 그 때 아직 국영기업이었다. 비즈니스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정치가나 관료들은 기업의 성장이나 수익성을 좌우하는 의사결정을 내리는 국면에서 시장현실을 무시하는 일이 많았다.

 

  볼보와의 합병얘기가 물 건너간 후 슈바이쳐는 지금까지 이상으로 러노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민간기업 원칙에 근거한 경영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합병실패는 다시금 러노 경영진과 사원들의 사기와 자신감을 위협하는 일격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향후 전망에 불안을 갖게 되었다. 성장을 목표로 하여 기획된 2개의 시도가 실패로 끝났으며, 많은 사원들이 이 이상의 성장은 바라볼 수 없다고 느꼈다. 그 이후에는 새로운 아이디어나 어프로치가 제안되어도 회의적인 눈으로 보게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때의 실패는 플러스적인 면도 있었다. 뒤에 들은 얘기로는, 볼보와의 경험이 닛산과의 제휴교섭에서 러노의 자세나 행동을 결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4 - 200억 프랑의 경비절감

 


 

러노의 모든 사람들이 200억 프랑의 경비절감이 실현 가능하다고 단언하는 자신에 가득 찬 인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인물에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 끄레일 마르땅(전 러노 연구원)

 


 

있을 수 없는 숫자

 


 

  내가 러노로 옮긴 1996년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회사가 다시 적자로 전락했던 해이기도 했다. 10억 달러의 손실을 본 러노는 어찌해 볼 방도가 없는 상태에 빠졌다. 미시경영(micro management)을 철저히 한다고 해서 이 상황에서 탈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길을 벗어난 회사를 다시 궤도에 올려놓는데는 점프 스타트 밖에 없다. 그리고 그 후에도 정상적으로 계속 달리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분해검사(overhaul)가 필요했다.

 

  연구, 구매, 제조, 엔지니어링 및 제품계획을 담당하는 부사장으로서 나는 코스트절감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향후 3년간 200억 프랑(약 24억 달러)을 절감하는 계획을 세웠다. 전 사원들에게 지금부터 3년간 구매, 엔지니어링, 제조, 일반관리, 판매 등 여러 부문에서 코스트절감에 몰두해야한다고 설명했다.

 

  사원들 가운데는 처음 이 숫자를 보고 부사장이 실수로 0을 하나 더 붙였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200억이 아니고 20억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카롤로스 곤은 이 업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3년간 200억 프랑 절감이란 아무래도 있을 수 없는 숫자다.]

 

  그런데도 내 계획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무리한 계획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곧 좌절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비판이나 반대의견은, 처음부터 어떤 일을 할 때 으레 따라 다니는 식의 뒷말로 끝났다.

 

  전향적이고 과감한 계획에 마주치면 사람들은 회의적이 된다. 그러나 나는 기가 꺾이지 않고 코스트 절감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도록 호소했다. 계획이 실행으로 옮겨지고 조금씩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반응도 변화돼 간다. [절대로 잘 될 리가 없어.]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생각한 만큼 무리한 계획은 아니었던 것 같아. 약간의 성과는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아.]로 말하게 된다.

 

  사람들은 차츰 회의적인 사고방식을 극복하고 지지자로 변한다. 그리고 그것이 점점 탄력을 받아 지지자에서 참가자로 변모한다. 결론을 말하면, 러노는 2000년 말에 목표인 200억 프랑 절감을 달성한 것이다.

 

  부사장 취임 당초 나는 코스트 절감계획의 선두에 서서 가혹한 경쟁으로 위험에 처해 있던 러노를 유럽이외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군살 없는 호리호리한(lean) 기업, 생산성과 수익성이 우수한 기업으로 재건하려고 했다. 인터뷰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회사의 목적은 코스트 절감 그 자체가 아니고 경쟁력을 키우는 일이다. 그래서 이노베이션의 레벨을 낮추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200억 프랑 절감계획에서 실시하려고 한 것은 기본적으로 다음 5가지 점이었다.

 


 

  1. 잉여생산력을 삭감하고 남은 공장에서의 생산성을 향상시킨다.

 

  2. 코스트 절감 내지 신차개발 촉진책의 일환으로 프로덕트 엔지니어링 기구를 재편한다.

 

  3. 글로벌 시장에서 납품회사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확립하고 기존 납품회사를 300사에서 150사로 줄인다.

 

  4. 주요 플랫폼(車臺)의 수를 5개에서 3개로 줄인다.

 

  5. 제품 이노베이션을 촉진한다.

 


 


 

빌 보르도 공장의 폐쇄

 


 

  코스트 절감계획의 일환으로 잉여생산력의 삭감에도 손을 대야했다. 나는 벨지움의 빌 보르도 공장 폐쇄를 제안했다. 유럽연합(EU)으로 탄생한 통일시장에서는 유럽 메이커와 비유럽 메이커를 합하여 연간 300만대라고 하는 잉여 자동차가 생산되고 있었다.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빌 보르도 공장 폐쇄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유럽시장에서의 경쟁이 격화일로를 걷고있고, 게다가 1999년에 일본 및 아시아 제국의 자동차 메이커들에 대한 관세장벽이 낮아지게 되면 고품질 저가격 자동차의 경쟁에 한층 박차가 가해질 것으로 예상됐다.

 

  러노는 이전에도 빌 보르도 공장 폐쇄를 검토한 적이 있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고려되었다. 하나는, 당시의 전체적인 상황이나 조건이 그 정도로 심각하지 않았다는 점, 두 번째는, 공장폐쇄가 러노의 문제해결에 공헌한다고 하는 확신이 없었다는 점, 세 번째는 당시의 러노가 회사재건을 목표로 한 것이라면 과감한 개혁에도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사원들에게 보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때도 최대주주는 여전히 프랑스 정부였다. 역시 생산삭감으로 직접 영향을 받는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이 공장폐쇄를 지지할 리 없었다.

 

  그러나 적자와 격화하고 있는 시장경쟁에 고통받고 있던 러노에게 점점 본격적으로 공장폐쇄에 적극 나서야할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공장폐쇄는 이것이 처음은 아니고,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에도 프랑스 공장 2개소, 폴투칼 공장 1개소를 폐쇄한 경험이 있다. 그렇지만 빌 보르도 공장의 폐쇄는 러노의 역사에 남을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최종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루이 슈바이쳐였다. 1997년 2월 27일 러노는 빌 보르도 공장 폐쇄를 전하는 짧은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EU에 충격을 주었고 벨지움 국왕 알베르 2세도 공장폐쇄에 대해 사전에 노동자들에게 전혀 설명이 없었다며 러노를 비난했다. 유럽위원회 위원장인 쟈크 산텔은 유럽노동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러노를 고발하도록 노동자들을 부추겼다. 프랑스 정부는 슈바이쳐의 최종결정에 대한 논평자체는 보류했지만 발표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며 그를 힐책했다.

 

  정부안에서나 미디어에서 전개된 논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싸움으로 집약되어갔고, 러노는 자사이익 추구에만 시종하고 노동자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난을 받았다. 노동조합은 3천 500명의 해고에 반대하는 파업을 선언하고 빠리 시가에서 시위를 벌였다.

 

  비난을 집중적으로 받는 처지에 있는 사람은 경영 최고 책임을 맡은 슈바이쳐였다. 그는 결단을 내릴 때 공장폐쇄와 노동력 삭감이 사람들의 분노를 살 것임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가 민간기업의 CEO인 이상, 효율향상과 수익성확보를 전제로 한 결단을 내리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러노는 이미 사회주의적 실험을 행하는 국영기업이 아니었다.

 

  그의 결단은 프랑스정부로부터 러노의 독립을 표명한 것이다. 그는 진작부터 프랑스정부는 어디까지나 주주이며 경영자는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러노는 민간기업 경영규범에 근거하여 운영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경쟁력 유지는 회사의 책임이라고 하는 확고한 신념이 그에게 있었다. 그리고 3개월간에 걸쳐 공장페쇄의 결단을 번복하려한 정치가나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비판에 버텼다.

 

  이리하여 러노는 사원들에게 회사가 공장폐쇄 등의 고통을 수반하는 수단으로 재정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극적인 사건은 왕왕 사원들에 대한 강한 메시지가 된다. 옛날의 국영기업 러노가 공장폐쇄에 의해 경영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공장폐쇄는 사원들에게 결속력을 가져다주었고, 사원들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인내를 배웠다. 러노에 대한 비난은 여전히 강했고 항의와 매도의 표적이 되었지만 최종적으로 러노는 위기를 이겨, 보다 강하고 결속력 있는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회사에 크로스 펑크셔널리티를

 


 

  벨지움의 빌 보르도 공장을 폐쇄한 후 나머지 공장들에 대해서도 생산성 개선을 목적으로 한 일련의 조치들을 취했다. 러노에는 생산능력의 이용률과 생산성이라고 하는 두 개의 문제가 있었다. 이 두 개를 개선할 여지는 충분했기 때문에 생산체제의 조정과 간소화에 의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후에 닛산으로 옮기고 나서 나는 이런 점이 러노와 닛산의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생산성이 세계 최고수준에 달해 있던 닛산에서는 그런 면에서 개선의 여지는 없었다.

 

  이러한 개선과 코스트 절감은 개개의 문제에 사람들이 부문의 벽을 뛰어넘어 매진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엔지니어링 부문의 사원들은 구매나 기타 부문의 사원들과 협력하여 생산 코스트를 절감하는 방법을 검토하고 동시에 디자인, 품질, 실적의 개선을 지향했다.

 

  처음 회사의 여러 레벨에 크로스 펑크셔널리티를 도입하는 일은 획기적인 도전이었다. 부사장인 나는 일반 관리부문이나 재무, 판매는 책임범위 밖이었기 때문에 크로스 펑크셔널리티의 중요성에 관해 타 부문의 사원들을 설득해야 했다. 당연한 일이었긴 하지만 각 부문이나 각 부서의 책임자 가운데는 자신의 영역이 침범되는 것을 우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처럼 팀의 일원에 지나지 않는 입장에서 크로스 펑크셔널리티를 제창하는 것은 어렵다. 진두지휘를 하는 것은 역시 최고경영자가 적임일 것이다. 그의 지시라면 아무도 자신의 영역을 침범 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슈바이쳐는 크로스 펑크셔널리티라고 하는 컨셉트와 200억 프랑의 코스트 절감계획을 지지해 주었다. 때로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으며, 의문점을 캐묻기도 했지만, 이 두 가지를 실행에 옮기는 결단은 그가 내렸다. [아무튼 해 보세.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이 틀림없으니까.]

 

  그는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과거 여러 가지 시도에 실패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했다. 리스크를 감내한다는 것은 자주 옛날 그대로의 쾌적한 업무방법을 미련 없이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만, 회사를 경영한다고 하는 일에는 반드시 따라 다니는 결단이다. 그 때 최고경영자는 사내에 떠도는 회의적인 견해도 극복해 내야한다. CEO라는 사람은 자신의 결단이 예기하는 대로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어야 한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 원칙으로

 


 

  빌 보르도 공장 폐쇄는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했으며, 러노와 공급회사들과의 파트너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닛산과 마찬가지로 러노의 부품조달 코스트는 총 코스트의 60% 가까이 점했다. 러노와 공급회사들과의 관계는 고정화되어, 말하자면 담합상태였다. 양자가 품질개선과 코스트 절감을 위해 협력하는 등의 사례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200억 프랑의 코스트절감 계획을 작성할 때 나는 조달 코스트를 20% 절감하는 방안을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급 베이스에 대폭적인 변혁이 필요했다.

 

  공급회사들과의 관계에서는 불필요한 중복을 피해야 한다. 공급회사들이 업무를 효율적 내지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러노 측에서 해야할 일이 아니다. 이것이 내가 설정한 가이드라인이었다. 공급회사에 대해 단지 [빨리, 싸게 해서 가져오시오]라고 의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회사는 이 문제를 극복하려합니다. 함께 문제해결을 위해 스펙을 결정하고 수순을 확립하고 싶은데 협력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제일 좋은 방법으로 실시해주었으면 합니다. 그것을 위한 원조라면 우리 회사는 아낌없이 할 것입니다.]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형태로 대화를 지속시켜 나가면 공급회사들의 혁신적인 제안을 기대할 만도, 또한 다른 메이커에서 실증이 끝난 해결책을 저가격으로 제공받는 일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컨대 내가 하려고 한 것은 여러 해 동안 출입하거나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한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다 같이 이익을 중시하는 비즈니스 원칙에 기초한 관계로의 전환이었다.

 

  그 효과는 결과가 증명하고 있다. 생산성과 매출액 등 여러 분야에서 개선이 보여, 러노는 일찌감치 1997년도에 흑자화에 성공했다. 실적향상은 회사전체가 나서는 노력과 결의의 보답을 의미한다. 그리고 올바른 방향을 향해 새로운 걸음을 내디디려는 의욕을 회사에 주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러노는 국내시장에 확고한 기반을 확립하고 점점 해외시장으로 진출할 채비를 갖췄다. 성장시키지 않고 회사의 세력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장이야말로 사원들의 모티베이션을 높이고, 빠른 변화를 가져다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무언가의 고차원적인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사원들은 코스트 절감 등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러노에 있어 1997년은 경쟁력 재건으로 분투한 해였다. 우리들은 공장을 폐쇄하고, 개혁이나 구조조정을 위한 여러 가지 조치들을 실시하여 코스트를 절감하고 중요 제품의 판매를 계속했다. 1997년과 1998년 전반기에 러노는 프랑스를 탈출했다. 매력적인 제품을 알맞은 가격으로 제공함으로써 생각보다 빠른 시기에 러노는 다시 일어섰다. 러노 사람들은 성장을 강력히 희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시장에서 싸우는 선수가 될 기회를 잡자.]

 


 


 

15 - 파트너 탐색

 


 

다이믈러 크라이슬러가 닛산과의 제휴교섭에서 물러선다는 뉴스를 듣고 겁먹은 사람들도 있었다. 왜 손을 뗄까? 닛산의 실제 채무와 경영상태가 발표된 숫자보다 심각한 것은 아닐까?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 입 듀플레이(러노 프로그램 디렉터)

 


 


 

다이믈러 크라이슬러 탄생의 충격

 


 

  경쟁력 재건에 분투한 1997년 러노의 유럽시장 매출액은 총 매출액의 85%를 점했는데, 유럽시장의 32.8%는 프랑스 국내시장이 점하고 있었다. 러노는 분명히 다른 시장에의 참여를 고려해야할 시기에 와 있었다. 1998년 러노는 2003년에 세계시장의 4%, 2010년에는 5%의 점유율을 획득한다고 발표했다.

 

  루이 슈바이쳐는 1998년 6월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오토모티브 뉴스 유럽회의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노는 종래와는 다른 새로운 시장과 수요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거기서 확고한 존재가 되기 위한 전략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는 유럽 이외에서는 아직도 충분히 국제적인 지명도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러노는 이미 동구와 러시아에 그의 시장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슈바이쳐는 이렇게 계속했다. [보다 국제적인 진출이라고 하는 것은 역시 아시아에의 진출을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다만 아시아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우리 회사는 아직 모습을 살피고 있는 단계로 구체화하고는 있지 않습니다.]

 

  러노가 구체적으로 아시아시장을 고려하게 된 것은 1998년 후반의 일이었다. 아시아에 높은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다이믈러 벤즈와 크라이슬러의 합병이었다. 이들 두 회사는 1998년 5월에 합병을 발표했다. 이 통합으로 갑자기 자동차업계에 새로운 요인이 야기되고, 비즈니스 방법에 새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어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이믈러 벤즈와 크라이슬러의 합병이 발표됨으로써 모든 자동차 메이커 경영자들은 “앞으로 우리 회사는 저런 거대기업과 어떻게 싸워나가는 것이 좋을까?”하는 큰 숙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러노의 경우는 좀더 단순하게 그러나 더 절박하게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 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최선의 형태로 러노를 보완해 줄 수 있는 어떤 기업과 손을 맞잡지 않으면 활로는 없다고 하는 답을 도출한 것입니다.]

 

  다이믈러.크라이슬러의 합병은 러노의 장래계획이나 오퍼레이션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슈바이쳐의 리더십 아래서 회사의 경영계획작성 그룹은 러노가 택할 수 있는 가능한 선택사항에 대한 검토에 착수했다. 그들은 [누군가와 제휴해야한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성을 모색했다.

 


 


 

살아남기 위한 파트너 탐색

 


 

  볼보에 관해서는 찬반양론이었다. BMW는 어떨까? 프랑스기업들은 독일기업을 고려 밖에 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기업에 대한 가능성은? 일본기업이라면 어떨까? 닛산인가, 미쓰비시인가? 어느 것이 베스트 파트너가 될까? 유럽이나 미국의 기업에 대한 가능성은?

 

  타사와 제휴를 맺을 때 상대방에게 자신을 내맡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어디에서 인수해 줄 것인가?]하는 따위로 생각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 러노는 스스로를 약소기업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또 반대로 [어느 회사를 인수할 것인가?]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래에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파트너십을 맺으려고 한다면, 어디와 결합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할까?]라고 생각했다. 타사와의 제휴를 생각했던 당초부터 일관되게 [공평하고 영속성 있는 제휴관계가 가능한 회사는 어딜까?]하는 태도로 임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다. 프랑스사람들은 토론을 좋아하는 사람들로서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토론을 계속한다. 나는 경영위원회 레벨에서의 토론에 참석했지만, 슈바이쳐가 참석한 경영계획 레벨의 토론도 성황리에 열렸다. 제휴선 후보를 내밀히 탐색하는 움직임도 이곳 저곳에서 보였다.

 

  이윽고, 고려되고 있는 파트너 리스트에서 한 회사 또 한 회사씩 모습을 지워갔으며, 그 수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포드나 제너럴 모터즈(GM)와의 제휴는 분명히 무모했다. 상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또한 러노는 이미 유럽을 기반으로 한 기업, 그것도 지나치게 유럽에 의존해 온 기업이었기 때문에 다른 유럽기업과의 제휴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프랑스 국내의 라이벌인 뿌조 시트로엥과의 제휴에 대해서는 몇 번이나 논쟁을 거듭했지만, 하필이면 프랑스기업과 제휴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기각됐다. 볼보라고 하는 안도 다시 부상했지만, 이것도 [이미 지나간 이야기]라면서 중단했다. 남는 것은 피아트? 그러나 피아트는 러노를 보완하는 타입의 기업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 러노의 제휴선 탐색은 여기서 암초에 부딪쳤지만 이 시점부터 모든 자동차 메이커를 잠재적 제휴상대로 검토하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갔다.

 


 


 

나 혼자 닛산을 추천

 


 

  실은 제휴선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면서부터 나의 머리 속에는 러노가 바라고 필요로 하는 특성을 모두 갖춘 기업이 오직 하나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조건을 갖춘 기업이 오직 하나 있습니다. 닛산입니다. 미쓰비시도 한국기업도, 다른 기업도 머리에서 몰아내 주시기 바랍니다. 닛산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나는 러노에서 닛산 1개 사를 주창한 최초의 사람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98년 7월의 임원회의에서 나는 이렇게 호소했다. [여러분, 우리들은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해야할지도 모릅니다. 일본어 선생을 몇 사람인가 고용해야겠습니다.]. 참석자들은 모두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카롤로스,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제휴선이 없다고 하더라도 너무 성급합니다.].

 

  내가 닛산을 추천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닛산이 이미 글로벌 기업이라는 점, 그리고 미쉐린 북미에서 근무했을 때 닛산의 여러 차종들을 운전할 기회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닛산차를 대단히 좋아했으며 닛산은 고도의 기술을 가진 회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시마”를 운전했을 때, 닛산의 기술에 대한 나의 평가는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테스트 드라이브를 한 것은 초기의 “시마”로서 일본에서 운반해 온 관계로 오른쪽 핸들이었지만 퍼포먼스가 아주 정확했다. 또한 300ZX(페어 레디스)도 좋아하여 몇 번이나 운전했다.

 

  닛산 차를 운전하면서, 이 회사는 “시마”처럼 하이 퍼포먼스 자동차도, 300ZX와 같은 섹시한 자동차도, 센트라(서니)같은 아주 우수한 엔트리 레벨의 자동차도 만드는 회사라는 인상을 받았다.

 

  닛산은 미국에서도 알려져 있으며 아시아에서는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다. 유럽시장에서도 꽤 이름이 통하고 있다. 그리고 닛산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보면 경영상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어, 우리들은, 러노가 닛산에 공헌할 수 있다면 경영면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처음부터 제휴선을 찾을 예정이라면 제휴할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휴할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기업이 닛산이었던 것이다.

 


 


 

두 번 다시없는 기회

 


 

  당시 각 대형 자동차 메이커들은 투자선으로서 닛산은 지나치게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포드의 잭 낫서는 [고생하여 번 자금을, 어느 곳의 그 누군가가 고생하며 진 부채의 반제(返濟)에 충당할 의도 따위는 전혀 없다]고 말했고, 크라이슬러의 봅 룻트도 [닛산에 자금을 투입하는 것은 50억 달러를 컨테이너에 가득 채워 닛산이라고 쓴 라벨을 붙여 바다에 집어던지려는 짓]이라고 일소에 부쳤다.

 

  어떤 형태로도 닛산과의 제휴를 망설이는 그들을 단순히 비난할 수는 없다. 1990년대의 닛산의 재무상황을 일별 하면 누구도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제휴를 진지하게 검토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게 하고 있는 것이다.

 

  러노로서도 닛산에 대한 투자는 엄청난 도박이었다. 그러나 어린 사람이 스타를 꿈꾸는 것이다. 돌다리를 두드리고 건널 여유 따위는 없다. 엄청난 리스크를 필시 떠 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누구도 길이 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러노는 슈바이쳐가 말한 것처럼  [가진 돈 모두를 투입한 것]이다. 일가의 주인이 기회가 왔다고 보고 검소한 노후를 위한 저축이라고 볼 수 있는 집과 대지를 송두리째 투입한 것이다.

 

  나 개인으로서는 제휴를 위한 움직임이 표면에 떠오른 것에 거의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 [확실히 천재일우의 기회다. 어떤 곤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더라도 그런 기회는 러노 사상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곤란이나 리스크가 얼마만큼 있을 지는 모르지만 러노는 닛산과 제휴해야한다. 성공확률이 설사 20%라고 하더라도 해 보아야 한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러노와 닛산의 궁합이 좋은 것임이 분명했다. 닛산에 관해 숙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다함께 과거 우리가 겪었던 곤란이나 침체를 음미해 보라. 세계적인 톱 기업이라고 하기에는 아직도 역부족한 이들 두 회사가 서로간 궁합이 맞는다는 것은 거대한 톱 기업과 제휴하는 것에 비해 훨씬 사리에 맞는다는 말인 것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인상으로는 러노와 닛산은 비슷해 보이는 문제를 안고있는 완벽한 한 쌍이었다. 닛산측에서도 [러노도 우리들과 같은 길을 걸어왔으며 실적저조, 코스트절감 및 재건을 위한 구조조정을 체험해 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불안이나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러노의 대세는, 닛산과의 제휴는 러노가 유럽 만의 메이커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변화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닛산과의 제휴교섭

 


 

  제휴교섭 책임자인 루이 슈바이쳐와 닛산사장인 하나와 요시카스는 어떠한 형태로 제휴할 것인가를 비밀리에 논의했다. 러노측의 실무레벨 담당자는 제품.전략계획.해외시장 담당 부사장인 죠르쥬 뒤앙이었고, 닛산측의 실무레벨 담당자는 스즈끼 히로시(鈴木裕) 이사(당시)로 이들 두 사람이 제휴의 목적이나 조직구조, 제휴를 둘러싼 많은 복잡한 수순에 대해 논의했다.

 

  이 제휴교섭에서 나 자신은 그렇게 큰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교섭이 막다른 골목에 이를 때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세 번 정도 일본에 가주지 않겠느냐는 요청을 받았다.

 

  첫 번째는 1998년 11월, 200억 프랑의 코스트 절감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들이 수행했던 내용을 일본측에 설명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요청을 받았을 때였다. 닛산측은 러노가 어떤 형태의 원조나 지원을 줄 수 있을지를 알고싶어했다. 6천 430억엔(약 54억 달러)의 자본투입 외에 러노로부터 어떤 원조를 기대할 수 있을지, 닛산이 그 해답을 듣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일본으로 날아가, 우리들이 수행해 왔던 것, 요컨대 200억 프랑의 코스트 절감을 달성하기 위한 프로세스에 대해 설명했다. 구매, 제조, 엔지니어링 등이 포함된 문제에 러노가 크로스 펑크셔널 어프로치로 대처했던 것을 설명하고, 어떤 성과가 나타났는지, 그 성과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닛산 측은 나의 이야기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이 장소에는 닛산의 경영회의 멤버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나의 발표에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회의는 연 3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후에 들은 얘기로는, 그들은 러노 부사장 스스로가 열심히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부사장이 길게 열변을 토하는 일은 없다.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따금씩 말참견을 하고 말수가 적은 의견을 개진할 정도다. 회사의 넘버 투맨이 윗도리를 벗어제치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올리고 스스로 만든 도표를 가리키며 설명한다고 하는 광경이 이채로웠던 것 같다.

 

  3시간 사이에 나의 머리 속은 전하고 싶은 사실과 숫자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모습이 어떤 종류의 감명을 주었는지는 모른다. 이 회의에서 닛산 사람들 가운데서 뭔가가 유발되어 러노의 제안에 무언지 설득력이 있다고 느끼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내가 귀국한 후에도 제휴교섭은 계속되었고, 그 사이에 다음과 같은 장애가 나타났다. 러노측은 당초 법적 측면에 구애되어 제휴조건이나 수속, 양사의 책임 등을 상세하게 열거했다. 그것으로 제휴를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한 지침으로 삼았던 것이다. 한편 닛산 측은 기본적으로 법적 측면에는 그다지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보다 실제적인 작업을 진행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거기서 나는 상호간의 의견차이를 조정하는 제안을 했다. [회사간의 크로스 펑크셔널리티를 확립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곧 크로스 컴파니 팀(CCT)을 조직하자.]고 했다.

 

  닛산 측은 이 컨셉트에 관심을 보였고 두 번째 회의를 개최하면서 나에게 일본에 와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회의석상에서 나는 크로스 평크셔널리티나 CCT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고, CCT는 러노에는 크로스 펑크셔널 팀(CFT)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측은 이 컨셉트에 대해 그렇게 예비지식은 없었지만, 친숙감이 적은 법률용어보다도 [크로스 펑크셔널 팀]이란 용어에 훨씬 마음내켜했다. 이 회의는 교착상태를 자아냈던 큰 장애를 없앴다고 하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그 후 꽤 시일이 지난 후 세 번째 회의가 열렸다. 이것은 양사가 시너지를 만들어낼 분야가 어디인가를 분석하기 위한 회의로서, 나도 참석하여 어떻게 하면 시너지를 만들어낼지를 협의했다. 이 회의는 양사의 신뢰관계를 확립하는 이상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새 자동차 메이커 그룹의 탄생

 


 

  닛산은 러노와 이런 교섭을 진행하는 한편으로 다이믈러 크라이슬러와도 본격적인 교섭을 했고, 포드에도 타진하고 있었다. 러노측은 지나친 기대를 갖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며 추이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실패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던 러노는 높은 기대를 자제하고 있었다.

 

  닛산의 교섭상대로서 이름이 나열된 기업들은 어느 것 없이 러노보다 훨씬 풍부한 자금을 갖고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닛산과의 제휴는 또 하나의 제휴나 합병을 추가하는 것에 불과했으며 그 때문에 투자에 여유도 있었다. 설사 실패한다고 해도 손실을 흡수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자금이 제한돼 있는 러노의 경우는 닛산과의 제휴로 큰 챤스를 만들 계획을 하고 있었다. 제휴에 실패하면 결국 유럽시장에서 막다른 골목에 도달할 것이 분명했다. 닛산 정도로 러노의 시장확대에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 줄 다른 상대는 없었다. 다이믈러 크라이슬러라면 닛산과의 제휴 따위는 허다히 있는 기회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러노에게는 사실상 유일무이의 기회였던 것이다.

 

  닛산의 제휴상대로서 자동차업계나 매스컴에서는 러노보다도 다이믈러 크라이슬러에게 승산이 있다는 견해가 우세했다. 그러나 1999년 3월 11일, 다이믈러 크라이슬러는 정식으로 교섭에서 손을 떼고 그 취지를 적은, 무뚝뚝할 정도의 간단한 성명문을 발표했다. 그 바람에 러노에게 닛산과의 제휴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해 3월 27일, 닛산 사장인 하나와 요시카스와 러노의 루이 슈바이쳐는 러노-닛산 글로벌 얼라인즈의 합의문서에 조인했다. 러노는 계약에 따라 닛산 자동차에 6천 430억엔(약 50억 달러)의 자본투자를 하고, 담보로서 닛산주식의 36.8%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 계약에는 러노가 머지않아 출자비율을 44.4%까지 증가할 수 있는 조항이 포함돼 있다.  

 

  하나와 요시카스 사장은 슈바이쳐와의 공동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조인된 러노와의 글로벌 제휴는, 양사에 강력한 시너지, 즉 상호작용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러한 시너지에는 당사가 장기로 하고 있는 엔지니어링, 고도의 기술개발력, 고품질, 유연성 있는 생산시스템이라고 하는 분야도 포함돼 있습니다.]

 

  성명 속에서 슈바이쳐와 요시카스 사장은, 러노와 닛산이 제휴함으로써 세계 최대규모의 자동차 메이커 그룹이 하나 탄생했다고 말했다.

 


 


 

제휴를 실현시킨 상황과 인물

 


 

  제휴를 둘러싼 교섭에서 논의되는 것은 피가 통하지 않는 관념론이 아니다. 살아있는 현실이며 거기에 관여한 사람들의 생각이다. 상황이 정돈되고 관계하는 사람들의 사고나 개성이 가미되어 마침내 계약이 구체화된다.

 

  상황이나 인물 가운데서 무엇인가 하나라도, 누구인가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교섭은 합의에 이르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일부 이미 언급한 것을 반복하는 셈이지만, 러노-닛산 글로벌 얼라이언즈를 둘러싼 상황과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자.

 


 

러노

 


 

  러노로선 닛산과의 제휴는 장기적인 포지셔닝 전략의 일환이었다. 러노는 장기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대기업과 어떤 형태로든 제휴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조그마한 기업이 큰 기업과 경쟁하려고 한다면, 항상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고, 새로운 과제나 시장의 변화에 뒤쳐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곤혹스러운 것으로서 회사라고 하는 것은 크든 작든 항상 100%의 힘을 발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때 큰 회사라면 방법이 없지 않겠지만, 작은 회사는 그렇지가 못하다.

 

  러노에서는 누구나 제휴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이믈러 크라이슬러가 닛산과의 교섭을 단절했을 때, 닛산과의 제휴에 대해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은 것도 사실이다.

 

  최종적으로 러노는 닛산과의 제휴를 결단했다. 물론 리스크는 알고있는 터였다. 리스크는 있지만 그것을 훨씬 상회하는 기회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닛산

 


 

  여기서 닛산이 제휴상대로서 러노를 선택하게 된 인사이드 스토리를 공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닛산에 근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닛산이 처해있던 상황을 살펴서 다음과 같은 견해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한 자금력을 가진 자동차 메이커가 닛산의 채무를 인수하지 않은 한 닛산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것은 자동차업계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1998년 11월,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와 스탠더드 & 푸어즈는 닛산의 거액의 채무와 깊어지고 있는 일본의 경기후퇴를 이유로 닛산의 신용등급을 인하하는 검토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2월, 닛산이 앞으로 수개월 사이에 다른 자동차 메이커로부터 자본원조를 받지 못하면 닛산의 신용등급을 투자적격 이하로 내린다고 경고했다. 이들 두 신용평가회사는 실제로 닛산의 투자적격등급을 [정크] 레벨(BB 등급 이하의 저등급 채권)로 내릴 예정이었다.

 

  닛산의 자금 사정이 특히 악화됐기 때문에 무디스는 90일 후에 다시 닛산의 신용도를 검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미 닛산에는 러노 이외의 자동차 메이커와 교섭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제휴에 실패하면 도산이라고 하는 굴욕적인 사태를 맞을 형편이었다.

 

  닛산이 러노와의 제휴결단을 내린 것은 그 외의 선태사항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침몰을 면하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닛산은 익사할 단계에 있었다. [누구 있으면 도와줘!]라고 도움을 청할 바로 그 때 유일하게 손을 내민 것이 러노였다.

 


 

루이 슈바이쳐

 


 

  슈바이쳐는 러노 간부로 들어왔을 때부터, 이대로 유럽시장에 타킷을 둬 가지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해외시장에의 진출을 노리고 타사와의 제휴를 모색했다. 닛산과의 제휴 가능성이 구체화한 시점에서 그는 본격적인 교섭에 들어갈 결단을 내리고 하나와 사장과 회합을 가졌다.

 

  다이믈러 크라이슬러와의 교섭이 결렬되어 절망의 심연에 빠져있는 닛산에 대해 러노는 자사에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교섭을 재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슈바이쳐의 대응은 현명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존의 합의문서를 일자 일구도 바꿀 의도가 없다. 계약은 장기적인 신용관계에 근거한 것이다. 조건을 변경시키면, 닛산은 러노가 약점을 기화로 삼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불신감은 언제까지나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하나와 요시카스

 


 

하나와 요시카스는 닛산의 쇠퇴에 깊은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사장 재임기간 중 그는 재건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우선 순위를 바로 세우려고 노력했다. 그는 회사를 구하는 데는 종래와는 전혀 다른 어프로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회사재건을 위해 퇴진도 불사할 각오로 여러 대책을 강구했다. 매스컴이 보도했던 코멘트에서도 밝혀졌듯이 신선한 사고방식을 회사에 불어넣는 데는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인식하고 있었다.

 

  [닛산이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해외 자동차 메이커의 가장 우수한 장점과 완전히 통합하여 당사가 필요로 하는 세계화를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옛날부터 줄곧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1998년 후반부터 99년 초반에 걸쳐 그는 닛산을 구할 힘이 있는 자동차 메이커와 교섭하기 위해 날마다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실질적인 교섭은 약자의 입장에서 행해졌지만, 그는 다음 3가지 점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즉 “(1) 닛산이라는 기업명은 바꾸지 않는다. (2) CEO는 닛산측이 선출한다. (3) 회사재건은 닛산주도로 행한다”였다.

 

  러노와 닛산이 타진을 위해 처음 서로간 특사를 파견했을 때부터 요시카스는 슈바이쳐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슈바이쳐씨는 신뢰할 수 있는 분이다.]고 그는 말했다. 슈바이쳐는 하나와가 거론한 3가지 점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이러한 조건을 그대로 러노-닛산 제휴합의문서에 포함시켰다.

 

  요시카스는 천성적으로 전향적인 자세와 개방적인 발상으로 러노-닛산 글로벌 얼라이언즈의 성립에 진력했다. 나를 COO(최고집행책임자)로 추대했던 사람도 그였다. 그리고 계약조인이 끝나면 닛산의 경영에서 몸을 빼야한다고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도 나에게 귀중한 어드바이스를 해주고 격려해 주고 있다. 그는 특히 인상 좋은 온건한 사람이지만, 어려운 조건으로 다른 회사와의 교섭을 거듭하는 그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에는 존경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합의문서의 조인이 그를 구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그의 닛산-러노 제휴성립을 위한 노력이 보답을 받을 것이라고 느꼈음에 틀림없다. 현재 닛산은 부활 도상에 있다. 1999년 3월 이전의 요시카스는 피로곤비(疲勞困憊)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제휴조인후의 그는 원기로 자신에 넘쳐 있으며, 어깨가 가벼워져 갑자기 환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16 - 일본행 결심

 


 

누가 닛산에 갈까

 


 

  러노에게 닛산과의 제휴 기회가 있음이 확실해진 시점에서 논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러노-닛산 글로벌 얼라언즈가 성립될 경우, 러노는 경영 팀으로 누구를 보낼 것이며 몇 사람을 보낼 지에 대해 논의하는 단계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제휴합의문서 가운데 요시카스는 닛산 사장으로 유임하고, 러노가 파견하는 사람을 COO에 임명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 사람은 닛산에 합류하여 재건 프로세스 전체를 통괄하게 된다. 정부관계자와의 교섭이라고 하는 대외적인 업무는 요시카스 사장이 담당하고 COO는 사내업무나 오퍼레이션에 전념한다.

 

  슈바이쳐의 머리 속에서는 누구를 보낼지를 이미 결정하고 있었다. 그 해 3월 초순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역시 짐작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 일이 성사되면 COO를 맡을 사람은 자네밖에 없네.]

 

  뒤에 들은 얘기지만, 요시카스도 나를 보내주도록 슈바이쳐에게 요청했던 것이다. 그도, 다른 임원들도 내가 참석한 3번의 회의에서 나라고 하는 인간을 판단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요시카스가 이사회에서 COO에 걸맞은 인물이 누구인가고 묻자 [카롤로스 곤]이라고 하는 대답이 나왔다고 들었다.

 

  제휴교섭 초기부터 지원하며 그 경위를 지켜 보아온 나는 두 회사의 제휴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한 업무를 맡을 속셈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슈바이쳐로부터 “자네가 가 주지 않겠는가”하는 요청을 받았을 때 갈 의향이 있다고 답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 전에 저의 아내와 의논하고, 이 상황을 잘 이해시켜야 합니다.]

 


 


 

리타의 이상적인 집

 


 

  이야기는 소급하여, 나의 러노 입사로 가족이 사우스 캐롤라이너주에서 프랑스로 이사한 것은 1996년 12월이었다. 일본행 말이 나왔을 무렵엔 나에게도 아내나 아이들에게도 프랑스로 이사온 기억이 바로 엊그제 같은 생각이 들고 있을 때였다. 나는 러노에 합류하기 위해 한 발 앞서 떠났으며, 리타는 아이들을 데리고 12월에 빠리로 건너왔던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시 그린빌로 되돌아가려는 마음에서 나는 우리들이 살고 있던 집을 그대로 두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적어도 기분 정리가 되도록, 프랑스에는 우선 나 혼자 오고,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뒤에 오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우선 내가 빠리에서 살만한 곳을 알아 본 후에 가족들을 불러올 작정이었다.

 

  그런데 러노행이 10월로 결정됨으로써 이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더욱이, 사우스 캐롤라이너를 떠남으로써 제일 큰 희생을 치르는 아내에게 이사책임까지 사실상 모두 맡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 해 겨울, 유럽은 드물게 보는 한파가 몰아쳐 기온이 섭씨 영하 15도까지 내려갔다. 온난한 지방에서 추운 곳으로의 이사는 기분 좋은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혹한의 겨울은 리타와 아이들의 침울한 기분을 더욱 돋구어 주었다. 리타는 좋아하는 그린빌에서의 생활과, 아이들은 몇 년간이나 다녔던 학교와 많은 친구들과 이별을 고해야했던 것이다.

 

  이듬해인 1997년 4월까지 빠리에서 지났던 최초의 수개월은, 나에게도 가족들에게도 혹독했었다. 그 무렵은 200억 프랑 코스트절감계획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사내에는 회의적인 분위기가 떠돌고 있었으며 공장폐쇄 시기와도 맞물려 있었다. 나는 업무에 매달려 다른 여유가 없는 상태였다.

 

  조그마한 도시에서 대도시로 옮겨 살게된 리타와 아이들은 적응되지 않는 생활에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뉴욕에서 빠리로 온 것이라면 그 정도로 위화감은 없었을 것이지만, 그린빌에서는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아이들은 한가로운 생활 속에서 구김살 없이 자랐다. 그런데 빠리로 이사를 와 보니 그 곳은 서로간 무관심하고 겉치레 인사에도 예의 바르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살고있는 거대한 도시였다. 생활 속도가 빠르고 몹시 소란스러웠다.

 

  빠리로 이사 온 초기에는 전셋집에서 생활했다. 리타는 우리 자신들의 집을 사려고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둘러보고 온 집의 방 배치나 상태 등을 간추려서 보고해 주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도 뭔지 진지하게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구석이 있었으며, 마음속으로 홀딱 반할 것 같은 집은 만나지 못한 것 같았다.

 

  1997년 5월 어느 날,  리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회사에 전화를 했다.

 

  [마침내 찾아냈어요.]

 

  [굉장한 모양이지?]

 

  나도 흥분된 소리로 답했다. 리타는, 그 집이 빠리 교외에 있는 16세기에 지어진 큰집으로 방도 많고 오래되긴 했어도 기초는 튼튼해 보였으며, 내장을 조금 손보기만 하면 살 수 있겠다는 등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약간 성가신 문제가 있어서....]

 

  [성가신 문제?]

 

  나는 예산이 오버된 것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반문했다.

 

  [그 집은 어떤 회사 소유가 돼 있고 팔려고 내놓은 것이 아니에요.]

 

  그녀의 말을 듣고 머리가 복잡해지고 말았다. 팔려고 내놓지 않은 집이라? 그렇다면 사고싶어도 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집 문제는 잊어버리고 다른 집을 찾아보라고 타일렀다.

 

  그런데 리타는 그 집이 잊혀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집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아 갖고싶다면서 늘 그 집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집을 보러 나갔다. 다른 집도 계속 보고 다녔지만, 결국 그녀가 홀딱 반한 그 집에 필적할만한 다른 집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때에 기적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1년 후 어느 날, 리타가 흥분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회사에 전화를 걸어왔다.

 

  [무슨 일인지 알겠어요?]

 

  [무슨 일인데?]

 

  나는 말머리를 듣고는 좀이 쑤셨다.

 

  [그 집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팔려고 내 놓았대요! 우리들이 삽시다.]

 

  마치 계약금을 준비한 많은 경쟁자들이 복덕방에 우르르 밀어닥친 것 같은 말투였다.

 

  뒷날, 그녀에게 이끌리어 집을 보러 갔다. 나도 마음에 들었으며, 즉시 구입하고싶다고 알리고 상대편도 승낙해 주었다.

 

  [개수(改修)는 나에게 맡겨주세요.]

 

  그녀는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잘됐다고 안도하고 있었다. 회사 일로 파김치가 되고 있을 때이지만, 활기 없는 아내가 소망하는 집을 갖는다고 하는 것만은 참아주고 싶었다. 그녀가 큰 희생을 치르고 빠리로 이사온 것도, 그린빌로 되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는 것도 나로선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결국 마음에 맞는 집이 발견됨으로써 점차 그녀는 창조적인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대상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반년동안 집에 관한 한 그녀는 무엇이든지 혼자서 해냈다. 페인트가게, 석재가게, 목수와 연락을 하고, 모든 방의 내장을 지시하고, 커텐이나 카펫을 선택했으며, 간혹 진행상황만 간단하게 보고해 주었다. 그녀 마음대로 집 전체를 뜯어고쳤다.

 


 


 

일본으로의 이사

 


 

  이리하여 1999년 1월 간신히 우리들은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집은 훌륭했으며, 아이들도 마음에 들어했다. 우리들의 새 집으로 이사를 하고 나니 모두들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또다시 이사를 해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닛산과의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에게도 제휴교섭에 대해 알려줬지만, 다이믈러 크라이슬러 쪽이 훨씬 유력한 것 같다고 말했다.

 

  2월말까지 우리들은 새로운 우리 집에서의 생활을 즐겼다. 그리고 1999년 3월 11일 다이믈러 크라이슬러가 닛산과의 제휴교섭에서 손을 뗐다는 뉴스가 날아들었다.

 

  나는 아내에게 전화로 이렇게 말해주었다. [오늘 밤 어디 가서 저녁식사라도 하면서 얘기를 하고싶소. 다이믈러 크러이슬러가 교섭에서 손을 뗐소.]. [그래서 어떻다는 거예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말하자면 경쟁상대가 없어지고 남은 것은 우리 회사뿐이오. 이것은 당신이나 나나 아이들 모두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얘기요.]

 

  이 뉴스를 듣고 아내는 낙심했다. 닛산에 가게될지도 모른다고 하자, 그녀는 매정하게 말했다.

 

  [그렇다해도 이사만은 안돼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기분을 잘 알고 있었다. 1년 반만에 겨우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내어 스스로 진두지휘를 하여 보수를 끝내고 “이제부터...”라고 할 시점에 또다시 이사얘기가 나온 것이다.

 

  한편 다이믈러 크라이슬러가 철수한 후 슈바이쳐로부터 이런 말이 있었다.

 

  [제휴교섭에 성공한다면 자네가 힘을 발휘해 주어야겠네. 자네가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이 제휴는 없었던 것으로 할 작정이네.]

 

  나는 회사냐 아내냐의 진퇴양난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리타는 이사해야한다는 현실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처럼 집 손질에 몰두하기도 했지만, 곧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이해하고, 생각을 일본에서의 생활 쪽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일본학교는 어떨지? 생활하기는 괜찮을지 몰라? 일본 가옥은 협소하다고 듣고 있는데..]

 

  그녀는 러노에서의 이런 제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일본에 가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이해해 주었다. 그녀는 나에게 길을 양보하고 일본행을 승낙했다.

 


 


 

VI부 - 닛산에서

 


 

17 - 불타고 있는 갑판

 


 

닛산사원들에게는 위기의식이 없었다. 그들은, 닛산 정도의 대기업이 도산할 리 없다, 어차피 정부나 은행이 도우려 나설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1997년 11월에 야마이찌(山一)증권이 도산하자, 닛산도 은행으로부터의 대출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 小枝至(닛산 이사겸 부사장)

 


 


 

데쟈부(기시감:旣視感)

 


 

  1999년 3월 나는 정식으로 러노를 떠나 닛산으로선 최초로 만든 COO(최고집행책임자) 자리에 취임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6월에, 도산 위기로 허덕이고 있는 일본의 이 다문화(멀티 컬처) 기업의 COO에 취임했다.

 

  닛산의 COO에 정식으로 취임했을 때 느낀 불가사의한 기분은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기시감(旣視感=dejavu)이라고 해야할지? 동시성(同時性=synchronicity)이라고 해야할지? 그게 아니라면 상상력의 장난이었던 것일까? 아무튼 내 사무실에 앉아있던 어느 날, 왠지 나는 [여기에 전에도 온 적이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었다.(旣視感: 기억의 오류의 특수한 형태로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전부가 과거의 어느 때에 체험한 것과 같으나 그것이 언제였던가는 알지 못하는 의식. 同時性: 천체적 자연시간을 초월하여 종교적 실존이나 순환하는 문화현상이 영원한 곳에서 대면하는 일. 가령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도가 역사의 시간을 넘어서 직접 결부되거나, 문화방면에 있어서 똑 같은 성질의 역사적 사건이 평행하여 되풀이되는 일과 같은, 일상적 시간관념으로는 해득할 수 없는 동시적인 성질의 것. 이상 이희승 국어대사전 참조 - 옮긴이)

 

  [여기]라고 하는 것은 [장소]로서가 아니라 [상황]으로서였다. 닛산에는 수익성의 결여, 과도한 마켓세어 지향, 혼란, 불투명한 책임소재 등 문제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산적해 있었다. 그러나 어느 것 없이 모두 나에게는 매우 친숙한 문제였다. 나는 사무실에 앉아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수업이었다. 회사재건, 조직재편과 구조개혁, 사원들의 의식과 행동의 변혁, 두 가지 기업문화의 융합과 이문화(異文化) 경영 - .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어느 것 하나도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런 복잡한 일에 감연히 대처해야하는 중압감이 풀렸다는 것은 아니었다.

 


 


 

활활 타오르고 있는 갑판

 


 

  닛산처럼 비즈니스나 사업구조가 어떻게 해보기 힘들 정도로 일본문화에 뒤얽혀있는 기업이 근본적인 개혁에 착수하기 위해서는 활활 타오르고 있는 갑판이 필요하다. 자신이 지금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배에 난 화재로 활활 타오르고 있는 갑판에 서 있다고 상상하면 좋겠다. 빨리 탈출하지 않으면 배와 함께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록 가야할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어느 방향을 선택하여 헤엄쳐가지 않으면 안 된다.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에는 활활 타오르고 있는 갑판을 꼭 떠올려야 한다. 닛산은 확실히 불타서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활활 타오르고 있는 갑판에 서 있는 것이다.

 

  닛산의 국내시장 점유율은 1974년의 34%를 피크로 계속 감소하여, 1999년에는 19%까지 떨어졌다. 닛산에서는 전 사원이 시장 점유율, 특히 국내시장 점유율에 주목해 왔다. 그들에겐 시장점유율 자체가 바로 회사가 상승하느냐 하강하느냐를 점치는 지표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시장점유율이 25년 이상 계속 하강선을 그리고 있는 것을 지켜보아 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사기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 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해외시장에서도 닛산의 시장 점유율은 1991년의 6.6%에서 착실히 떨어져 8년간 4.9%까지 내려앉았다. 1998년도 자동차사업에서의 실질이자부채 잔고는 2조 1천억 엔이었다. 이자지불분만도 1천억 엔에 달했다. 닛산이 일정수준의 수익을 올리지 못한지가 10년 가까이 되었다. 1996년도에는 이익을 내었지만 자만할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사원들 누구도 큰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으나, 닛산은 호전의 징조마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리들 닛산 사람들에게 닛산을 부활시킬 책임이 있으며 시간이 많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부활에 공헌할 기회가 사원 전원에게 있으며, 공헌하려하지 않는 사원들에게는 두 번 다시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협박이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결코 협박은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나 자신도 만약 1년만에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면 2년째에도 이곳에 머문다는 보장이 없다고 했다. 실패하면 다른 새로운 계획으로 바뀌어져도 좋다는 등 느긋한 얘기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미 우리들에게는 [성공]이라고 하는 선택사항 이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빗나간 분석

 


 

  2001년 7월 미국인 기자 하나가 닛산을 방문, 닛산 리바이벌 플랜(NRP)에 대한 인터뷰를 신청해 왔다. 그가 주도면밀한 준비를 해 온 [닛산 쇠퇴의 10년] - 그렇게 그가 이름을 붙였다 - 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인터뷰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거꾸로 그에게 닛산 쇠퇴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헛기침을 하며 천천히 손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사전에 준비하고 있던 메모를 보면서 연설을 시작했다.

 

  [닛산의 쇠퇴에는 몇 가지인가의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원인은 일본경제의 버블붕굅니다. 버블이 붕괴됐을 때 닛산 경영진은 80년대의 해외진출로 인해 팽창된 채무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상황에 몰린 것에 정신이 번쩍 든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자산가치가 급락, 불량채권에 휘말린 금융기관들이 도산 위기로 절박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는데, 닛산이 그 한복판에 들었습니다. 닛산이 의지하고 있는 금융기관들은 불량채권으로 자금력을 잃고 있었습니다. 닛산의 경영악화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버블 후 일본 소비자들이 돈지갑 끈을 죄고는 소비활동에 브레이크를 건 점입니다. 자동차 구입대수도 감소하였으며 매출 하강경향은 90년대 말이 되어도 계속됐습니다.]

 

  여기서 그는 한숨 돌리고는 수첩에서 눈을 들어 나의 반응을 살폈다.

 

  완전히 빗나간 분석이었다. 같은 상황에 처했던 도요타와 혼다는 계속적인 성장으로 성공하고 있었으며, 90년대에도 실질적인 이익을 올렸던 것이다.

 

  [우선 계속해 보시오.]

 

  일단 그의 얘기를 전부 들을 때까지는 내 의견을 말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나는 그에게 재촉했다.

 

  [90년대 초반에 닛산 사장은 츠지 요시후미(? 義文)였습니다. 그는 1993년 2월에, 97년도까지는 연결결산 베이스로 흑자를 올리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구조조정안을 발표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신규 채용자 수를 줄이고 정년퇴직자에 대해 인원보충을 하지 않는, 국내 사업장의 노동력삭감조치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이 때의 구조조정 정책의 하나가 일본경제를 진동시켰습니다. 가나가와현에 있는 자마 공장이 폐쇄됐는데, 이것은 일본으로선 전후(戰後) 최초의 대형 자동차공장 폐쇄였습니다. 공장폐쇄는 노동자나 그 가족들의 생활에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자마 공장의 노동자들이 단계적으로 다른 공장으로 이동하는데 1년이 걸렸습니다.]

 

  [츠지 사장을 위시한 닛산경영진은 거액의 채무삭감을 위해서는 아주 대담하고 엄격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차기 사장에게 맡겨졌습니다. 츠지 사장은 1996년에 사임하고 새 사장으로 하나와 요시카즈가 취임했습니다. 닛산경영진의 교체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석상에서 츠지는, 사장으로 있을 때 가장 어려웠던 일이 무엇인가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일은 절박한 위기에 대한 회사내의 의식결여와 싸우는 것이었다.”]

 

  이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놀랐다. 츠지는 분명히 닛산이 직면한 문제의 핵심 중 하나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무엇인가의 행동에 나서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솟았다.

 

  기자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두 번째 원인은, 해외에 진출함으로써 컨트롤할 수 없는 시장동향에 우롱 당하게 된 점입니다. 예컨대 1994년 말의 멕시코 페소화 절하로 1995년 이 시장에서의 매출이 70% 이상 감소된 것입니다.]

 

  그의 어조는 점점 더 열기를 띄어갔다.

 

  [닛산을 더욱 가혹한 상황으로 몰아간 것은 1997년 6월의 아시아 통화위기였습니다. 고정환율제를 포기한 태국에서 바트화가 20% 하락하였고, 그것이 다른 아시아 국가로 비화하여 아시아 통화위기가 발발, 국제 금융시장에 공황상태를 일으킨 것입니다.]

 

  [1997년 10월 28일, 다우공업주 평균주가가 554.26 포인트나 하락, 하루 하락 폭으로는 사상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이 급락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도쿄의 닛게이 평균주가도 325.38 포인트 떨어졌고, 종가는 과거 2년간 최저인 1만 7천 38엔을 기록했습니다. 닛산도 이 영향으로 6억 6천 100만 달러의 주식평가손을 보았으며, 이것이 1998년도 상반기의 손실로 나타났습니다. 동남아시장의 매출액도 격감, 그 해 1월부터 8월까지의 자동차 판매대수는 전년동기의 3만 7천대를 크게 밑도는 9천대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나는 의자에 앉은 체 질리도록 듣고 있었다. 이만큼 많은 미디어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토록 빗나간 분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세 번째 원인은 엔화 절상입니다.]

 

  점점 그의 화법이 강의를 하고 있는 교수처럼 되어갔다. 이제는 닛산의 실적부진을 엔고 탓으로 돌리려는 것 같다. 나는 망연하여 천장을 쳐다봤다. 그는 사뭇 나를 무시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1985년의 플라자 합의 후 엔화는 극적인 엔고로 전환됐습니다. 그 결과 닛산은 생산거점을 해외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으며, 국내공장의 생산력이 남아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1995년에 자마 공장을 폐쇄했던 것입니다. 전후 일본에서 최초의 자동차공장 폐쇄였습니다. 닛산이 엔고로 딜레마에 직면한 것입니다. 이대로 해외생산을 계속하여 국내산업의 공동화(空洞化)가 진행된다면 노동력도 남아돌게 될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대량해고라는 선택은 할 수가 없습니다. 50년간이나 계속해 온 수많은 하청업체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분명한 결말이 없는 기자의 분석에 화가 나서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야기해 준 정보를 종합하여 당신의 의견을 듣고싶소.]

 

  잉여생산력, 엔고, 해외로의 생산이전은 어느 것이든 닛산이 처하고 있던 상황의 일부이며 닛산을 괴롭히고 있던 문제이지만 근본적인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주변 요인들에 불과했다.

 

  나의 질문에 허를 찔렸는지 도수 높은 녹색안경의 렌즈를 통해 보이는 그의 푸른 눈에 곤혹감이 스쳤다. 분명히 그는 자신의 분석이 닛산이 안고있는 문제의 핵심을 찔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더 얕보이고 싶지 않다

 


 

  그의 곤혹감은 닛산 사람들에게 생긴 혼란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들도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현실로부터 올바른 결론을 끌어낼 수 없었다. 이 기자양반처럼 일부의 사실과 정보에 사로잡혀 불완전한 전체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은 그들 자신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기후퇴와 시장변동이 한창인 때에도 수익을 올리는 회사와 그렇지 않는 회사가 있는 것은, 전자의 경영수완이 우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닛산의 근본적인 문제는, 경영진이 방향을 잃었고 수익을 올리기 위해 해야할 일의 우선 순위를 몰랐던 것에 있다. 수익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수익을 올리기 위해 사원들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것도 경시했다. 고객만족에 대한 문제도 중시하지 않았다. 크로스 펑크셔널한 팀워크도 없었으며, 해외진출에 맞춰 상대 국가와의 국민성의 차이를 조정하는 일도 없었다. 더욱이 회사의 장래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을 공유하는 일도 없었고, 업계에서의 놀라운 지적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절박한 위기감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닛산에 합류했을 때 나는 닛산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성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시장점유율의 저하에, 수익을 올리지 못하는 경영에, 팽창하고 있는 부채에 이미 진절머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경쟁회사의 사원들이 호조를 보이고 있는 매출과 고수익의 혜택을 받고있는데 자기들은 싸구려 임금에 감지덕지하고 있는 것도, 얕보이고 있는 것도 이젠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18 - 경영부재

 


 

닛산사람들은 자신들이 속하고 있는 부문 내에서라면 맡은 바 업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지만, 누구도 회사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 小島久義(닛산 이사겸 부사장)

 

 

 


 

커뮤니케이션 부재

 


 

  닛산 부임 초기에도, 지금까지 다른 회사에서 해왔던 것처럼 우선 문제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현장들을 방문, 많은 사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여러 회합에 얼굴을 내밀고, 요구사항을 수락하기 전에 대화를 했다. 또한 공장에도 나가서 생산현장 사람들과 얘기하고, 감독관들과 대화를 한 후에 공장 간부들과 회합을 가졌다. 사원들을 15명인가 20명인가를 모아서 토론을 한 적도 있으며, 1대 1로 만나 차분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공장이나 딜러 사무실, 사내 여러 부문을 돌아보는 현황파악에 나섬으로써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닛산의 누군가가 혹은 어디에선가 잘못을 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이 자신들이 맡고 있는 부문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맡고 있는 부문에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부문과 부문, 직무와 직무간의 유대관계가 완전히 단절돼 있었다. 각 부문의 사원들은 각자 자신들은 목표를 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것은 닛산에 한한 것만은 아니고, 온 세계의 위기에 빠진 기업들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문제이다.

 

  어느 회사 없이 자신들만이 목표를 달성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회사의 상태는 하나같이 나쁘다. 누구도, 자기 개인의 업무 또는 자기 부문에서 취급하고 있는 업무는 잘 돌아가고 있다고 느끼고, 모든 문제의 책임은 다른 부서나 다른 부문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닛산의 모습이었다. 회사가 처해 있는 상황에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것이 위기의식을 결여하게 한 한가지 원인이다.

 

  그와 동시에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사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경영자측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업원들로부터 들었던 전형적인 코멘트는 예컨대 이런 것이었다.

 

  [3년 전, 회사는 설비투자에 X엔이나 투자했지만,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생산능력은 그것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머지않아 시장에서 따끔한 맛을 볼 것이 확실한데도 결국 모델 교체가 보류되었다.]

 

  이러한 의견은 문제를 확인하여 명확하고 타당한 우선 순위를 확립하는 능력이 경영자 측에 분명히 없었다는 얘기다. 그들은 사소한 문제도 중대한 문제도 일색으로 처리했다. 다이아몬드도 돌에 섞어 동등한 무게로 취급했던 것이다.

 

  더욱이 사원들 대부분이 의사결정 절차를 알지 못해, 닛산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어떻게 하여 결정되는 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림의 일부밖에 보이지 않았다. 최고경영자가 행한 의사결정의 배경이나 이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종업원과 경영자와의 사이에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톱의 책임

 


 

  나는 경영자의 책임이라는 것은 회사가 가진 잠재능력을 개발하고 그것을 100% 구현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영자는 회사에 구애받고, 사원들에 구애받고, 회사가 처해 있는 상황에 구애받는 사람이다. 경영자의 책무는 회사와 사원들을 위해 회사와 사원들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시키는 것이다.

 

  가이드라인이나 우선 순위의 설정도 경영자의 책무다. 나의 경영스타일은 어떤 사물을 끝까지 추적 조사하거나 지원하는데 있어 일관성이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사실이 그래 보이면, 가능한 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중요도에 따라서 해야할 일의 우선 순위를 결정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사원들에게도 업무가 확실해 보여, 효과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사장이 하는 일은 회사 내에서 간과된 가치 있는 부분이나 모호한 부분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가능한 한 모든 장소에 빛을 쪼여주고, 최고 경영자가 회사의 모든 분야를 공평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닛산 사원 대다수는 내가 왜 회사운영의 모든 면에서 바닥까지 머리를 디미는 것일까 하고 당혹해 했다. 그러나 나는 미쉐린 입사 초기, 공장에서 일했을 때의 경험에서 경영자가 회사의 현상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회사를 올바르게 이끌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데이터나 정보에만 의존할 생각은 없다고 전 사원들에게 말했다. 현황에 관한 정보를 사원들로부터만 입수하고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 어떤지, 적절한 결단을 내리고 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전체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나의 이런 사고방식에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장은 그렇게까지 세세한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위기적 상황에 있는 회사에서는 사장이 알지 않아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장이라는 사람은 고객만족이나 가치창조에 관계되는 모든 사항에 대해 업무를 촉진시킬 기회나 업무를 방해하는 장애물 등 전체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선 순위의 혼란

 


 

  닛산은 일반관리 부문에서 상당한 경비절감을 행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인사나 통신 등의 분야에서는 과도한 삭감을 강행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경비절감 대상의 대부분이 주변분야였다.

 

  닛산은 세세한 부분에서 여러 가지 경비절감에 노력하고 있었다. 관리직의 경비에도 메스가 가해져, 예컨대 해외 출장 시에 비즈니스 클래스 사용을 억제하기도 했다. 사내에서도 종이나 사무용품의 절약을 호소하고, 냉난방도 과도한 사용을 삼가, 저녁시각 이후에는 끄는 조치까지 취했다. 이런 조치는 실제로는 사원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을 뿐이며 본질적인 문제해결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난방의 설정온도를 1도 내리는 것은 코스트 삭감을 위한 우선 순위 설정으로부터의 도피이다. 냉.난방비를 삭감하는 것도 좋지만, 문제의 핵심에 손을 대지 않는다면 영원히 재정난에서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순위를 정하고 거기에 따라 행동해야한다. 어디에 문제의 핵심이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손익계산서를 볼 필요가 있다. 부품(부분품) 조달 코스트가 총 코스트의 60%를 점하고 있다면, 우선 그 분야를 우선 순위에 따라 철저하게 분석해야한다. 문제를 인식하고 원인을 밝혀내어 비로소 절감계획 작성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경영 톱은 책임감을 갖고 우선 순위가 올바르게 지켜지도록 해야한다.

 

  우선 순위를 올바르게 설정하고 바로잡기 위해서는 두 가지 단계가 필요하다. 첫째, 플래닝(planning)을 중앙집중화 하고, 둘째, 시행할 때 명확한 책임계통을 확립하는 일이다. 사원 전원이 한 점 모호함도 없이, 누가 의사결정을 하고, 누가 실시책임을 맡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두 번째 단계로 닛산은 경영간부들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전에는 누가 책임자인지, 누가 무엇을 담당하고 있는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닛산의 매니지먼트는 복수의 지역, 기능, 프로젝트의 통일성 없는 집합체 같은 것이었다. 전략은 이따금씩 막연하여, 모여든 멤버들이 제 멋대로 전략을 해석하고 제 멋대로의 방식으로 그것을 실행하고 있었다.

 


 


 

비즈니스 원칙으로 되돌아가기

 


 

  우선 순위의 재검토 필요성은 회사 내 도처에 있었다. 예컨대 제품개발부문에서는 개발해야할 제품이 다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금부족 때문에 추진하지 않고 있었다. 시장에 새로운 제품을 내 놓아야 하는데도 사실상 제품화되지 않았다. 인재도 기술도 있었지만 자금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장래를 위한 많은 결단을 내려야 했지만 장기적인 계획을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신차를 내놓을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 국내시장에서의 저조의 한 원인이다. 신차개발이 1년 정도 지연되면 시장에서 엄청난 리스크를 짊어지게 된다. 닛산 차인 “마치”를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일반적으로 승용차는 시장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5년에서 6년 기간으로 모델 교체가 행해진다. 그러나 “마치”는 발매한지 9년이 되고 있었다.

 

  닛산이 신차 개발에서 뒤쳐지게 된 것은 핵심 사업에 집중하지 않았던 결과이다. 닛산은 비핵심 사업의 주식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의 실적에 주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한 때 후지(富士)중공업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동사의 경영이나 전략에 대한 영향력은 제로였다. 주식의 4%, 260억엔 상당을 보유하고 있는 대형주주였는데도 불구하고 후지중공업이 제너럴 모터즈(GM)와의 교섭을 개시했을 때조차 닛산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자금이라면 필요한 신차개발도 가능했을 것이다.

 

  기업경영이나 전략에 대한 영향력 행사는 주주의 특권이다. 주주는 투자에 걸맞은 실적과 결과를 요구할 수 있지만, 닛산은 주주로서의 특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방계 회사에 대해서도 실적이 악화되면 하나로 합쳐 실적회복에 나서던가 경영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조치를 해야하는데 닛산은 일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내가 올 때까지는 그런 사고방식이 닛산에 없었던 것 같다. 닛산은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내가 실적부진을 보이고 있는 방계 회사들의 사장교체를 말하자 심한 저항에 부딪쳤다. 그러나 나는, 당연히 고려해야할 유일한 가치는 [공헌]이며, 전원이 꼭 같은 필드를 꼭 같은 룰로 달리기 시작할 때까지 개혁을 계속할 것이라는 의지를 명확히 보여줬다.

 

  사장으로 있든 평사원으로 있든, 과거에 어떤 지위에 있었든, 과거에 어떤 실적을 올렸든, 그런 것들은 전혀 관계가 없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꼭 같이 적용되며, 닛산에 가치를 가져오지 못하면, 바로 그 때가 내가 회사를 떠나는 날이 될 것이다. 회사에 어떻게 하면 공헌할 수 있을까 - 그것이 전부이다.

 

  방계회사 사장들이 실적이 나쁘면 책임을 물어 실적 좋은 사람과 교체하는 것이 비즈니스 세계의 방법이다. 지금까지 닛산의 방법과는 틀린지는 모르지만, 경쟁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면, 의사결정은 비즈니스 원칙에 기초하여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19 - 크로스 펑크셔널 팀

 


 

곤씨는 각자의 업무와 그 내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각자 업무와 관련된 사항을 물어온다. 그리고 불충분하다고 생각되면 말을 붙여 각자의 업무나 책임을 떠올리도록 해 준다. - 富井史郞(닛산 상무)

 


 


 

해결은 닛산의 손으로

 


 

  닛산이 안고있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회사 내에 있다. 내가 그렇게 확신한 것은 회의에서 어떤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물었을 때였다. 나의 질문에 대해 참석자들로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제안이나 해결책이 나왔던 것이다.

 

  닛산 리바이벌 플랜(NRP)의 작성을 외부 컨설턴트에 의뢰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 한다는 것이다. 몇 번인가 토론한 후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이 계획은 닛산 내부에서 작성한다. 그렇게 하면 이것은 우리들이 세운 계획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것이다 고 가슴을 펴며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작성할까?

 

  대답은 크로스 펑크셔널 팀(CFT)의 설립이었다.

 

  처음으로 CFT를 도입한 것은 1992년부터 96년에 이르는 미쉐린 북미시절이다. 당시 CFT를 실시하는 데는 갓 태어난 미숙한 컨셉트를 뿌리내리게 하기 위하여 제로의 상태에서 가이드라인이나 수순을 만들어내야 했다. 이 때의 경험에서 CFT의 진행방법 모델이 생겼는데, 나중에 러노에서는 1997년부터 99년에 걸쳐 이 모델에 근거한 [이키프 트랜스버즈](equipment transverse =부문횡단) 팀을 빨리 움직이게 했다. 그러나 이 모델은 청년기여서 아직 개량의 여지가 남아있었다.

 

  결국 CFT는 닛산에서 완전한 성숙기를 맞게 된 것이다.

 

  무릇 고객들의 요구는 크로스 펑크셔널한 것이다. 코스트건 품질이건 납기이건 하나의 기능이나 하나의 부문만으로 응해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 회사에서도 최대능력은 부문과 부문의 상호작용 가운데 숨겨져 있다.

 

  그러나 어느 회사에서도 일반적으로 이 숨어있는 능력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CFT는 자연적으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에서가 아니라 직무와 직무의 경계상에 존재한다. 사람들은 경계상의 애매한 부문에는 뒷걸음질치며 접근하려 하지 않는다. 이곳에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CFT 컨셉트를 제도화하여 사내에 뿌리내리게 하는 수밖에 없다.

 

  경영상층부 사람들은 개혁을 목표로 하고 있는 CFT에 꼭 최적임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개혁기운은 경영 톱에 의해서만 초래되어서는 안되고, 여러 레벨로부터 팽배해져 펑펑 솟아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CFT에는 현상을 변화시키고싶어하는 의욕을 가진 유능하고 견식이 있는 인재를 투입해야 한다.

 

  적임자들을 CFT에 모으면, 다음으로 경영자 측과 CFT 사이에 적절한 밸런스를 유지해야한다. CFT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경영자 측은 [그들이 (개혁을) 시행하고싶어 한다면, 우리들과는 무관하게 행하도록 보이는 것이 좋다]며 별로 협력하지 않게 된다. 반대로 경영자 측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CFT는 무언가 제안할 때에 벽에 부딪혀서 되돌아오는 마음이 들어 시간만 낭비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양자의 사이에는 적당한 균형이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우수한 경영자의 요체다. 경영자 측은 CFT로부터 자극을 받아 모티베이션을 가져야 하며, CFT는 과감하게 도전하는 자세를 유지해야한다.

 

  CFT의 원칙 자체는 1992년 처음으로 미쉐린에 도입할 때와 다른 것이 없지만, 상황도 문화도 미국, 프랑스, 일본으로 달라졌기 때문에 실시방법에는 자연히 차이가 있다. 나의 지위나 책임범위도 변했다. 러노에서 나는 경영위원회의 일원에 지나지 않아 어느 정도 양보가 필요했지만, 닛산에서는 나는 최고경영자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시행하며 [책임은 내가 진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다.

 

  여러 의미에서 나는 행운아였다. 그 이유는, 그간 내가 몇몇 회사에서 과감한 변혁을 시행했지만 어느 회사에서도 강한 저항에 부딪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문제점을 안고있는 회사에서는 새로운 방법이나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작업에는 그렇게 큰 저항은 생기지 않는다. 무관심한 사람들이나 반응이 둔한 사람들은 있지만, 정면으로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적다. 방관하기로 작정하는 일은 있어도, 감히 방해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마음속으로는 회사 상황을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찬동하여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결과를 보아가며 찬동에 참가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닛산 사람들은 이미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회사는 빈사상태이며, 기본적인 업무방법을 변화시키더라도 뭔가 해결책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고 하는 지경에까지 와 있었다. 실제로 내가 CFT를 도입했을 때 닛산 내부의 저항은 전혀 없었다.

 


 


 

성역 없음, 터부 없음

 


 

우리들은 모든 사원들을 중심으로 하여 야심적이며 현실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실제적인 행동계획 작성에 착수했다. 계획작성의 열쇠는 스피드였다. 우선 엄밀한 타임테이블을 만들고 엄격한 데드라인을 설정하고 신속하게 인원을 배치해야했다.

 

  이리하여 나의 COO 취임 후 2주일도 채 안된 1999년 7월, 우리들은 9개의 크로스 펑크셔널 팀(CFT)을 만들었다. 각 팀별로 대처할 테마는 (1) 사업발전, (2) 구매, (3) 제조.물류, (4) 연구개발, (5) 마케팅.판매, (6) 일반관리, (7) 재무 코스트, (8) 차종삭감, (9) 조직과 의사결정 프로세스이다. 새로이 리바이벌 플랜 발표 후에 설비투자를 담당하는 10번째 CFT가 추가됐다.

 

  CFT에는 공통 목표를 한가지 설정했다. 그것은 [사업발전, 수익개선, 코스트절감을 목표로 한 계획제안]이었다. 또한 모든 팀은, 성역, 터부, 제약 및 일본.유럽.북미의 문화적 차이에 기인하는 장애는 일체 배제한다는 공통의 룰을 적용했다.

 

  CFT 멤버들에게 행했던 브리핑에서 나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사태가 절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빨리 적절한 해결책을 고안해 내는 것이 [CFT가 무엇보다도 우선해야할 과제]라고 나는 강조했다. 나는 모든 CFT에 대한 기본원칙을 제정했다.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각 CFT는 담당분야에서의 수익개선방법 또는 코스트 절감방법에 대한 검토에 착수했다.

 

  경영위원회에서는 리바이벌 플랜을 최고경영자만의 과업으로 국한하지 않고 전사적인 과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CFT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CFT의 목적은 여러 직무, 지역, 직위의 사람들을 하나의 테이블에 모아 여러 분야에 존재하는 문제와 기회를 모두 철저히 조사하여 문제점을 밝혀내는 것이다. 우리들은 가능한 한 광범위한 리바이벌 플랜을 작성했다.

 


 


 

110일간의 전력질주

 


 

  각 CFT는 10여명의 멤버로 구성되어있었으며, [파일로트]가 논의사항을 종합 정리하는 리더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팀 파일로트와 멤버들에게 CFT의 효용을 완전히 이해시키는 것이 어려웠다. 각기 자신의 직무범위 내에서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각기 다른 부문에서 모여든 사람들과의 논의에 길들여지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점점 스피디하고 효과적인 논의의 필요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CFT에 의한 재건책의 정리.결정 프로세스는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팀 파일로트와 나는 수없이 의견을 나눴다. 그들이 설명을 요구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면, 나는 상세한 설명과 함께 제어와 수정을 가했다. CFT와 나의 대화와 논의는 간단없이 계속됐다.

 

  우리들은 복잡하게 뒤얽힌 격렬한 대화와 논의를 반복했다. 그들은 CFT에는 사명이 있다는 것, 그들이 고안해내는 해결책에 회사의 명운이 결려 있다는 것, 그리고 시간이 제한돼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빨리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이 필요했다. 비판이나 회의의 소리를 가라앉히고, 리바이벌 플랜으로 사람들의 기분을 북돋우기 위해서는 조금씩이라도 좋아져서 빨리 성과를 올려야 했다. 사원들의 한번 해보자는 마음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빨리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피했다. 

 

  CFT는 결단을 내리는 조직은 아니고 제안을 하는 조직이다. 실제로 결단을 내리는 것은 경영위원회였다. CFT에서는 굉장히 많은 양의 논의가 오가고 수없이 회의가 열리고 아이디어와 목표에 대한 검토가 되풀이됐다. 나는 그들이 한층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도록 촉구하였으며 러노측 카운트 파트에 연락을 취해 이들과 대화를 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이 계획작성작업은 팀 내에서 논의하여 3개월이 되면 최후로 그 결과를 보고하는, 그런 유의 업무가 아니었다. CFT는 3개월간 끊임없이 일진일퇴를 반복하고, 회의를 계속하고 계획을 작성하며, 거기에 부사장들과 내가 대응하는 것이다. 작업은 9월말까지 계속되었고, 가까스로 우리들은 신뢰할만한 현실적인 계획의 본체가 이루어졌다고 판단했다.

 

  이 3개월 사이에 CFT에 직접 관계했던 인원수는 200명이었지만, 그밖에도 몇 백 명의 사원들이 계획작성에 기여하였으며, 도합 2천 건의 아이디어가 CFT에서 검토됐다.

 

  일본인 이외 외국인으로 CFT에 관여했던 멤버 수는 적었다. 계획작성에 착수한 것은 7월 1일, 계획을 발표한 것은 10월 18일이었다. 물론 요구에 응하여 조력을 아끼지 않았던 러노 사람들도 있었지만, 실제적인 문제로 해외에 있는 사람들을 여기에 참가시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또한 여름인 7, 8월이라고 하면, 해외에서는 바캉스시기로 유럽인들을 풀 가동시킬 수 있는 좋은 시기라고 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NRP 작성작업에 대한 중책은 거의 일본인 사원들이 담당한 것이다.

 

  나는 진작부터 닛산사람들이 신속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NRP를 스케쥴 대로 완성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필요한 것은 올바른 코스와 방향을 제시하는 것뿐이었다. 가이드라인만 정해지면 그 후에는 사람들이 진행해 주었다.

 


 


 

[누설은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들이 NRP 책정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에 계획발표시기를 알려고 매스컴이 몰려들었으며, 그 시기에 관한 여러 억측들이 난무했다. 매스컴의 관심을 특정한 날로 돌려 질문공세를 피하기 위해서는 발표날짜를 알려줘야 했다.

 

  나는 10월의 도쿄 모터쇼 행사기간 중에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기다리기 지루할 정도의 앞선 얘기가 되지도 않을 것이며, 실제로 계획작성에 이 이상으로 시간이 걸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도쿄 모터쇼에서 계획을 밝힐 것이라고 발표함으로써 매스컴은 닛산이 정말로 개혁안을 발표한다고 하는 확증을 얻게 되었다. 우리들은 10월까지 3개월간 계획작성에 전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매스컴 각사들이 작성중인 계획에 관한 사전정보를 입수하려고 안달했다. 당시 닛산은 중요한 내용이 밖으로 누설되기 쉬운 체질이라는 평판이 있었다. 사실, 이 때도 몇 번인가 누설이 있었다. 나는 이런 종류의 누설은 닛산을 해치는 짓이라고 언명하고 방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나는 사원전원에게 매스컴에 대해 어떠한 누설도 근무규정위반이 된다고 강조하고,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외부에 누설했다는 것이 판명되면 그 사람을 해고시키겠다고 밝혔다. 정식 발표 전에 NRP의 정보가 누설되면, 닛산에 대한 방해활동을 초래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설이 발각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언명은 임원들에게도 철저하게 적용됐다.

 

  누설을 금하는 것은 닛산이 발표할 예정으로 있는 계획이 아주 중요한 것이었고, 그리고 그 프로세스나 내용이나 계획의 배후에 있는 방법 등에 대해 내 입으로 내가 직접 설명하고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보의 일부나 단편이 여러 매스컴에 누출되어 제멋대로의 해석이나 오해가 생기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닛산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자제심을 발휘하여 나의 가이드라인을 지켜주었다. 그 이후 누설은 일체 없었다. 

 

  그리고 NRP는 예정대로 도쿄 모터쇼 개막 2일 전에 겨우 발표할 수 있었다.

 


 


 

20 - 닛산 리바이벌 플랜

 


 

어떤 일도 옛날 것이 아주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목표나 일정 등의 큰 변화만을 두고 말한다면 아무래도 지금 것이 좋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고생이 되더라도 지금의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면, 수확이 많은 미래가 올 것으로 생각한다. - 大久保宣夫(닛산 이사겸 부사장)

 


 


 

발표의 순간

 


 

  1999년 10월 18일, 마침내 닛산 리바이벌 플랜(NRP)을 발표할 날이 왔다.

 

  회의장에는 일본 매스컴들은 물론 해외로부터도 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로 빽빽이 매워진 회의장을 보며 나는 NRP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구나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나는 거기에 없는 수많은 닛산사원들과 관계자들의 NRP에 거는 기대와 불안이 오싹오싹 느껴졌다.

 

  나의 발표는 약 1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발표를 끝내자 회의장은 일순간 고요에 휩싸이다가 곧 큰 박수가 터졌다. 매스컴은 그 내용의 대담성에 놀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계획의 대변성(大變性)을 강조하는 논조뿐이었지만, 그 대변성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들 자신이었다.

 


 

  닛산 리바이벌 플랜(2000년도 - 2002년도) (1999년 10월)

 


 

  <공약(필달목표)>

 

  1. 2001년 3월 31일까지 흑자화 달성.

 

  2. 2003년 3월 31일까지 영업이익률 4.5% 이상 달성.

 

  3. 2003년 3월 31일까지 유이자부채 1조4천억 엔을 7천억 엔으로 감축.

 

  <주요 구조조정책>

 

  4. 2003년 3월 31일까지 총 노동력의 14%인 2만 1천명(일본 국내 1만 6천 500명 포함)을 감축(현재의 14만 8천명에서 12만 7천명으로).

 

  5. 2002년 3월 31일까지 차량조립공장 3개소와 파워트레인 공장 2개소를 폐쇄하고, 국내잉여생산능력의 30%를 감축. 차량 플렛폼 수를 현재의 24개에서 15개로 감축.

 

  6. 2002년 3월 31일까지, 구매 코스트의 20%를 삭감하고, 부품공급사 수를 현행의 1천 145사에서 600사 이하로 감축.

 

  7. 비핵심 사업 계열사의 주식 및 자산 매각.

 

  <자원의 재배치>

 

  8. 2000년도부터 2002년도에 걸쳐 신제품 22종을 출하하며, 브랜드 파워 재건에 노력한다. 기술투자를 늘인다.

 

  9. 연간 투자액을 2천 100억 엔에서 3천 100억 엔으로 증가한다.

 


 


 

과잉생산능력의 감축

 


 

  세계 각지에 점재하고 있는 닛산 제조공장들은 세계에서도 유수한 생산성을 과시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하버 리포트”나 유럽의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니트(EIU)"에서도 매년 실증되고 있다. 러노에 있을 무렵 나는 영국의 닛산 선드랜드 공장을 목표(벤치마크)로 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매년처럼 가장 생산성이 높은 공장으로서 테네시 주에 있는 닛산 스마나 공장의 이름이 거론됐다.

 

  일본 국내의 닛산공장도 생산성이 높기는 선드랜드나 스마나에 필적하고 있다. 그러나 생산성이 높다고 하여 반드시 비용효율이나 전체적 효율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닛산의 사내 제조 코스트의 50%가 고정비였기 때문이다.

 

  1999년도 닛산의 일본 국내 차량생산능력은 최소한 240만대였는데 실제 생산대수는 128만대로, 생산능력의 50% 남짓밖에 가동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종업원이나 가족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공장폐쇄라고 하는 선택사항은 계속 연기되고 있었다. 자마공장 폐쇄에 따른 종업원들의 배치전환이나 이전, 자마에 남기로 한 사람들에 대한 전직지원을 둘러싼 힘들었던 일들이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에 새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닛산은 타협안으로서 공장전체가 아닌 일부 생산라인의 폐쇄로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나에게 의견을 묻는다면, 이런 종류의 타협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줄 것이다. 생산라인의 폐쇄에 의해 부분적인 코스트절감이나 문제해결은 가능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수술로 절제해야할 종양에 진통제를 투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환자는 좋아졌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병이 치료된 것은 결코 아니다. 누구도 여기서 문제가 해결됐다는 따위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은 불안감이 머리를 쳐들어 실직에 대한 걱정이 더해진다. 악순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조부문에 대한 뭔가의 대책을 강구해야한다는 명백한 인식이 있었다.

 

  제조담당 CFT는, 코스트절감 수단의 일환으로 공장폐쇄를 하게되면 어떤 사태가 초래될지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엄격한 현실도 인식하고 있었다. 공장의 수를 줄이지 않고 생산능력 감축량을 각 공장에 균등하게 할당한다는 방법으로는 코스트 경쟁력 약체화가 가속하는 위험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CFT는 차량조립공장 3개소와 파워트레인공장 2개소를 폐쇄하고 코스트경쟁력을 강화한다는 제안을 했다. 전망컨대 이 결과 2002년까지 남아있는 공장의 가동률을 80%까지 높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통을 미루려 한다면

 


 

  1999년 10월 18일 NRP를 발표할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설령 여하한 고통이 따른다하더라도 공장폐쇄는 남은 공장들의 생산성과 비용효율을 현저하게 향상시키는 일 이 될 것이다.]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종업원과 그 가족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하여 공장폐쇄를 NRP의 결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종업원에게 고통스런 체험을 강요하는 결과가 되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문제의 표면적인 잘못만 어름어름 수선하려든다면 훌륭한 결과는 기대할 수 없다. 강력한 해결책을 강구한다해도 생각한대로 성과를 올리기 어려운 경우도 있는 것이다. 부드러운 해결책으로는 부드러운 성과가 고작이다. 결단을 미루며, 앞으로 5년간 온갖 수단을 다 써 보겠다는 따위로 말하는 것으로는, 그 사이에 문제가 악화되어 치명적인 것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들은 3개년 계획의 NRP를 발표했다. 공장폐쇄는 발표 1년 후에 착수했다. 1년째의 목표, 2년째의 목표, 3년째의 목표를 명확하게 내걸었다. 우리들은 일정한 성과목표를 스스로에게 부과하고, 그 성과를 하나라도 달성할 수 없을 경우에는 퇴진을 각오하고 업무에 임했다. 우리들은 필달(必達)목표를 설정한 시점에서 고통을 수반하는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장폐쇄로 종업원들이 빠질 상황에 대해서는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다. 필달목표를 내려잡는 것이 아니라 종업원들의 곤궁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열심히 검토했다. 결국 공장폐쇄 영향을 받는 종업원 수는 총 5천 200명이었다. 그 가운데 3천 480명은 다른 공장으로 옮기고, 420명은 각각 닛산 현지 회사의 타 업무로 돌렸다. 퇴직자는 총 1천 300명, 그 가운데 100명은 정년퇴직, 1천 200명은 그때까지 생활해 온 현지에 남았다. 퇴직자의 재취직을 위해 가능한 한 최선을 다했다.

 

  위기적 상황에서도 하나만은 좋은 면이 있다. 사람들이 전력을 다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NRP 초기에는, 닛산부활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고 함께 협력하며 필사적으로 일했다. 내가 생각한 방식이나 내가 결정한 방법에 전면적으로 찬성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최대한의 프로의식을 갖고 자신의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해 주었다.

 


 


 

고(高)코스트 체질의 해소

 

 

 

  구매 코스트를 재점검하는 데는 프라그마틱한 어프로치로 시종 했다. 닛산의 부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구매코스트는 러노에 비해 훨씬 높았다. 이것은 일본 국내 타 메이커와 비교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구매 코스트의 차이는 때로는 25%에까지 달해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구매 코스트문제는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뱃터리의 적정가격은 이러이러한데, 우리 회사는 아주 높은 가격으로 구입하고 있다. 그 이유를 설명해 주면 좋겠다.]. 철학이나 문화나 습관은 이유가 될 수 없다.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왜 그런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러노에서는 타사의 구매 코스트를 집중적으로 벤치마크하여 작성한 데이터베이스가 있는데, 닛산은 그런 것을 이용하여 타사의 숫자와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구매 코스트문제를 재검토해야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뱃터리나 브레이크, 전면유리등 자동차 제조에 관련된 여러 부품의 코스트를 비교했다.

 

  나는 미쉐린 북미에 있었을 무렵부터 닛산은 타사에 비해 부품 구매 코스트에 후한 회사라고 느끼고 있었다. 닛산에는 타사와 같은 주의력이 결여돼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닛산은 미쉐린의 대형 고객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이상 닛산의 구매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실제로 닛산의 구매코스트 숫자를 목격한 순간 나는 최우선과제가 구매부문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닛산은 부품이나 부분품에 높은 대금을 지불하고 있는 것에 무관심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코스트절감을 위한 조치를 강구하려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구매코스트를 어떻게 삭감할 것인가? 스펙의 변경, 새로운 스탠더드의 도입, 라이벌 회사의 구매방법 검토, 그리고 구매담당자, 엔지니어, 공급회사의 3자 회담이 필요하다. 결국 닛산과 공급회사들과의 협력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때까지 닛산과 공급회사들은 서로 충분히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품질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코스트를 삭감하는 방법을 검토해왔다고 할 수 없다.

 

  엔지니어는 구매담당자들을 한 단계 낮춰 보고 있었으며, 사내에서도 구매담당자가 출세하고 성공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 통례가 돼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구매담당자들의 위상을 높이고, 최종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입장으로 위치 매김을 했다. 엔지니어 측에도 같은 목표를 위해 구매담당자에게 어드바이스를 해주고 지원하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

 


 


 

안일에 젖어 죽음을 기다릴 것인가

 


 

  구매담당 CFT와의 논의에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우리 회사가 지나치게 많이 지불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지금까지 구매를 담당해 온 사람들의 [여태까지 쭉 이 가격으로 해 왔습니다]는 반론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어떻게 해왔는가는 어떻든 좋습니다. 내가 듣고싶은 것은 지금부터 어떻게 할 작정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필이면 특별히 높은 가격으로 구입하는 모순의 한 원인은 공급회사 수가 너무 많다는 점에 있었다. 가령 7개 사의 동판 공급업자들과 거래를 한다면 닛산의 수요를 각 사에 배분해줘야 하기 때문에 1개 사의 생산량을 한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7개 사를 3개 사로 줄이면, 3개 사 각각의 구입량이 증가하여 코스트의 대폭적인 삭감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비즈니스의 정상적인 진행방법이다. 어쨌든 닛산은 공급회사들에게 도가 지나친 대금을 지불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공급회사들을 선별하여 앞으로 3년간 코스트를 얼마나 개선할 수 있는가를 1개 사씩 검토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닛산의 구매 코스트 실태를 구매담당자들에게 알려줄 때도 과거의 방법을 문책하던가 하지는 않았다. 그 보다는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구매라고 하는 업무가 구매부문과 엔지니어링 부문의 공동업무가 되었다. 실제로 엔지니어의 협력이 없으면 구매담당자만으로는 무엇을 구매해야할지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매담당 CFT가 벤치마크 기업보다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면, 동일한 사양의 부품을 타사는 훨씬 싸게 입수하고 있다는 것을 숫자를 보여주며 반복해서 설명했다. 삭감목표는 점차 한 자리수에서 두 자리수로 이행하여 최종적으로 2002년까지 20%의 구매코스트삭감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숫자는 확실히 놀라운 것이지만, 닛산의 경쟁력 부활의 추진력이 될 정도는 아니다. 크게 벌어져 있는 간격을 줄이는 것이 가능할 정도이다. 우리들은 우선 초년도 삭감목표를 8%로 설정했다.

 

  닛산에서는 종래의 공급회사들과의 관계를 재검토하는 선택사항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구매 코스트가 총 코스트의 60%를 점하는 현상에서는 더욱 더 그랬다.

 

  계열회사들과의 관계유지가 중요하다는 의견이 나왔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근거는?] 하고 물으며 회사가 도산 위기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적자와 부채의 바다에서 가라앉고 있는 닛산에서는 최고경영자에서 공장노동자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남김없이 실업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우선시 해야하는가? 오랫동안 거래해 온 공급회사들과 안일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닛산을 구제하는 길일까?

 

  경영자 측에서 보면 답은 명백했다. 수없이 반복했듯이 경영자의 업무는 우선 순위를 결정하고, 거기에 따라 어떤 고통을 수반하더라도 해결책을 도출해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급회사들과의 관계에서 라이벌 회사에게 크게 뒤지고 있다면 공급회사와의 관계 자체를 개혁하려는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공급회사들에게 [조금 더 분발해 달라] 따위로 말하는 것은 우리들의 선택사항 가운데 들어가지도 않는 것이다. 우리들은 공급회사들의 오해를 사지 않으면서 2002년까지 진짜로 20% 삭감목표를 달성할 예정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단호한 결의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다

 


 

  NRP에서는 2002년까지 부품 및 자재 공급회사 수를 현행의 1천 145사에서 600사 이하로, 설비기기 공급회사와 주요 서비스 공급회사 수를 추정 6천 900사에서 3천 400사로 감축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선택되는 공급회사들에게 닛산과의 거래량이 현저하게 증가하는 것을 의미했다. 동시에 경쟁력 있는 세계적인 공급회사들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최고수준의 기술, 코스트, 품질, 납기 등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게 되었다.

 

  또한 NRP에는 [닛산 3-3-3]라 불리는 계획을 세웠다. 3개의 파트너(공급회사, 구매, 엔지니어), 3개의 지역(일본.아시아지역, 북미.남미지역, 유럽.중동.아프리카지역), 3년간(2000년도부터 2002년까지)의 의미다.

 

  이 계획의 목적은 엔지니어와 구매담당자가 공급회사와 팀웍을 만들어 고객들이 요구하는 퍼포먼스에 합치하는 스펙을 만드는 것이다. 많은 공급회사들이 지금까지 반복하여 닛산에 제안하거나 요구해 왔지만 닛산은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앞으로 그들의 얘기를 듣고 서로간에 유익한 대책을 세우겠다고 전했다.

 

  앞서 말했듯이 지금까지의 일을 교훈 삼아 고통을 수반하는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때는 즉시 결연하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하면 피할수록 고통을 연장할 뿐이다.

 

  문제해결에 책임감을 갖고 분명한 어조로 앞으로의 수순과 기대할 수 있는 효과를 설명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자기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이해를 하며 따라올 것이다. 닛산의 위기는 이와 같은 나의 신념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강력한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었다.

 

  “데트로이트 프리 프레스”(1999년 11월 15일자)에 어떤 미국인 저널리스트가 NRP의 영향에 관한 기사를 썼다. 이 저널리스트는 폐쇄가 결정되고 있던 무라야마 공장 주변을 방문, NRP의 영향을 직접 받고 있는 영세 하청업자들과 인터뷰했다. 어떤 하청회사의 나이 많은 사장은 자신의 회사도 타격을 받게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닛산이 재건에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들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번의 새로운 계획(NRP)보다 더 좋은 계획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닛산이 해 온 것은, 계속 다음으로 미루어 약체화로 연결되는 대책뿐이었습니다. 나는 닛산에 대해 강한 존경심과 충성심을 갖고있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하여 곤씨에게 협력하고 지원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닛산이 꼭 다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할 것입니다.]

 


 


 

장래에 투자한다

 

 

 

  아무리 강조해도 충분치 않을 정도지만, NRP의 전체적인 존재의의는 닛산을 계속적인 수익증가를 기대할 수 있는 궤도로 원상복귀 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장래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NRP는 단기적 성과를 노린 코스트 절감만을 위한 계획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많으며, 러노와의 제휴 전부터 있었던 낡은 아이디어를 포장만 바꿨기 때문에 새로워 보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런 의견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NRP에는 그 내용 면에서 보나 수행방법 면에서 보나 닛산이 과거에 수행했던, 또는 시도했던 것과는 조금도 닮은 데가 없는 새로운 사항들이 수없이 포함돼 있다. 그 중에서도 미래의 성장을 위한 대대적인 설비투자를 여럿 병행하여 행하며, 1조엔의 코스트 절감을 단행하고, 5천억엔 상당의 비핵심 기업 자산을 매각하는 것 등은 지금까지의 재편계획에는 보이지 않았다.

 

  2000년 한해만을 되돌아보아도 닛산은 단기적 성과만을 중시한다면 거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몇 개인가의 투자결정을 했다.

 

  첫 결단을 내린 것은 22개의 신제품 투입이었다. 그 중에는 이미 투입된 블루버드실피, 엑스트레일, 시마, 캬라반, 스카이라인, 스테이지아의 7개 차종의 모델 체인지도 포함돼 있다. 22개의 뉴 모델은 NRP의 최후연도가 되는 2002년도에 전차종이 구비될 예정이다. 연도별 분담은, NRP 1년째인 2000년도에 4차종, 2001년도에 5차종, 2002년도에 13 차종이 된다.

 

  신제품개발은 NRP의 핵심이다. 닛산이 코스트절감과 비핵심 자산의 매각으로 핵심 비즈니스에 자금을 집중하려고 하는 점이 분명해졌다. 닛산의 핵심 비즈니스는 자동차의 설계, 디자인, 개발, 제조, 마케팅, 그리고 판매다.

 

  닛산은 기술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엔지니어링에 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그 제 1단계로서 이미 새로운 인재 고용에 나서고 있으며, 현재는 각지에 테크니컬센터를 설립하고 있다.

 

  두 번째는, 2000년에 발표했듯이 브라질의 메르코스루에 3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러노 공장에서 닛산차 제조를 개시하기 위한 투자다. 여기서는 2002년에 프론티어 픽업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또한 미국 테네시주 스마나의 생산능력을 50%, 동 주 데카이드의 파워 트레인 생산능력을 3배로 늘인다고 발표했다.

 

  특히 미국 미시시피주 켄튼에 25만대의 생산능력을 가진 새 공장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생산개시는 2003년 봄을 예정하고 있다. 이 공장건설로 닛산은 대형 픽업트럭과 대형 SUV(스포츠 유틸리티 비이클)시장에의 참여가 가능하게 됐다.

 

  이 이외에도 인도네시아의 관련회사에 출자, 스즈키와의 제휴로 경자동차시장에 참여하였으며, 러노와 공동으로 연료전지 연구개발에 5년간 850억 엔을 투자하는 원대한 결단도 내렸다.

 

이처럼 우리들은 장래의 성장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결정을 했다. 2003년 아니면 2004년까지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성과가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자금, 시간, 인재 등의 자원이 이상과 같은 프로젝트에 투입되고 있는 것이다.

 

  NRP는 장기계획이다. 닛산은 부채액 감축목표 달성을 걱정하지 않고 있으며, 연간 투자액을 2천 400억 엔에서 3천 200억 엔으로 증액하기 위해 비핵심자산의 매각에 나선 것이다. 미래에 대한 투자를 증액함으로써 닛산은 세계시장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강력한 위치를 확보하려 하고 있다.

 


 


 

눈부신 성과

 


 

  NRP에서 설정한 목표에는, 모든 구체적인 수치목표와 글로벌 규모로 그 달성을 위해 책임질 사람이 정해진, 명확한 책임체계가 만들어져 있다. 목표달성의 기한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2000년, 2001년, 2002년으로 1년씩 데드라인을 설정, 신속하게 결단을 내리고 수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계획의 수행이다. 경영위원회 멤버 전원이 NRP의 각 목표를 모니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들은 하나의 팀으로서 여러 지표에 관한 진척상황을 검토했다. 어떤 지표가 적절한 수준에 달해 있지 않으면 가장 빨리 대책을 강구했다. 느긋하게 3개월마다 모여서 진도를 점검하는 따위의 방법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점검작업은 조직적으로 행해져 회사 구석구석에까지 전파됐다. 특히 중요한 목표에 대해서는 진척상황을 요약하여 전 사원들에게 알렸다.

 

  NRP는 여러 분야에서 철저하게 실행에 옮겼으며, 어떤 목표도 설정된 기한 또는 그 이전에 달성시켰다.

 


 

닛산 리바이벌 플랜 진척상황(2001년 3월 31일 현재의 달성 상황)

 


 

<공약(필달목표)>

 

1. 연결 영업이익 2,903억 엔 달성(세후<稅後>최종손익 3,311억엔.

 

2.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 4.75% 달성.

 

  3. 부채액을 9,530억 엔으로 감축.

 

  <주요 구조조정책>

 

  4. 종업원 14,200명을 감축(총 148,000명에서 133,800명으로).

 

  5. 국내 차량조립공장 3개소 폐쇄.

 

  6. 구매 코스트 절감률을 연간목표인 8%를 상회하는 11%를 달성. 공급회사 수를 1,145사에서 810사로 감축.

 

  7. 부동산, 유가증권, 비 핵심 계열사 및 자산 매각(합계 3,410억 엔).

 

  8. 신제품 4종 발표.

 

  9. 투자를 순매출액의 3.7%에서 5%로 증액.

 

10. 메르코스루(브라질)에 3억 달러 투자. 미시시피주 켄튼에 신규 자동차조립공장 건설로 9억 3,000만 달러 투자. 인도네시아 사업에 대한 주식취득과 경영권 취득.

 


 

  NRP의 성과는 2001년 3월 31일에 종료한 2000년도 결산보고에 나타나 있다. 2000년도의 코스트절감은 달성목표를 초과하는 성과를 올렸다. 구매 코스트의 11% 절감은, 달성목표인 8%는 물론 당초의 노력 목표인 10%도 상회하는 숫자다. 부품 및 자재 공급회사 수는 1999년 10월의 1천 145사에서 30% 감소한 810사로, 서비스 공급회사 수는 40% 감소했다.

 

  제조부문에서는 일본국내 차량조립공장 3개소의 폐쇄를 완료했다. 공장폐쇄는 혼란 없이 스무드하게 진행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국내생산가동률은 전년도 7개 공장에서의 51%에서 재편후의 4개 공장에서의 70%로 크게 향상됐다.

 

  NRP의 주요 원칙의 하나인 핵심 비즈니스에 대한 투자를 목적으로 한 재원 확보에 힘을 쏟았다. 자산매각은 투자를 촉진하고 자동차사업관련 유이자 부채를 감소시키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0년도의 부동산, 유가증권, 비 핵심 계열회사 등의 매각자산 현금 총액은 당초 예상액인 2천억 엔을 크게 상회하는 3천 410억 엔에 달했다.

 

  다른 분야에서도 목표를 달성하던가 또는 상회하는 성과를 올렸다. 코스트 삭감은 NRP의 수많은 성과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신형차 도입에 따라 연결베이스로의 매출액이 증가, NRP 초년도의 세후(稅後) 연결 단기손익은 사상 최고인 3천 311억 엔이 되었다.

 

  자동차사업에 있어 연결 실질 유이자 부채잔고는 3천 960억 엔이 삭감되어, 1조 엔을 밑도는 9천 530억 엔이 되었다.

 

  이런 성과가 나타나자 당초 사내에 떠돌고 있었던 회의적인 견해가 점차로 누그러지게 되었다.

 


 


 

내가 놀랐던 일

 


 

  이렇게 NRP는 착실한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곤씨는 간단하게 대처할 수 있는 부분에 손을 댄데 지나지 않고, 앞으로는 지금까지와 같은 성과도 올릴 수 없으며 어려움에 봉착할 것임에 틀림없다”는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다. 반론을 제기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NRP를 발표했을 때에도 그 실현성을 의심하는 소리가 많았고 닛산의 부활 따위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들려오던 터였다.

 

  일본 국내공장의 폐쇄나 계열사의 재점검이 용이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국내시장점유율 감소에 비난이 집중하는 가운데 판매망 정리를 결단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회사를 재건하기 위해 회사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낸 것이다.

 

  닛산사람들이 사고와 행동패턴을 바꾸지 않았다면 도대체 NRP를 발표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며, 하물며 경이적인 성공도 바라볼 수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아직도 닛산 사람들이 경영 스타일의 개혁을 실로 신속히 받아들인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몰론 한 사람도 남김없이 개혁을 받아들였다고는 말할 수 없고, 극히 일부에서 유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도 옛날 방식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고 하는 공통인식은 갖고 있었다. 그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서 있는 갑판이 불에 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할 지 행선지도 모른 채 바다에 뛰어들어 무턱대고 헤엄치기 시작해야 했지만, 그들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2000년도의 성과를 발표했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닛산 리바이벌 플랜은 내가 알고 있는 한 닛산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최고의 재무실적을 올렸다. 닛산은 부활한 것이다. 영업이익도 3배를 넘었고, 부채액은 과거 15년간 최저수준을 기록했다. NRP는 착실히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 우리들은 스스로 이루어낸 성과에 자극 받아 더욱 전진하려하고 있다.]

 


 


 


 

21 - 플랜 180

 


 

곤씨가 오면서부터 매사에 대한 결정과정이 신속해져 업무가 척척 진행되고 있다. 프렛셔(pressure)는 있지만 스트레스는 전혀 없다. 전에는 지금 정도의 모티베이션이나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닛산에 대한 모티베이션을 높인 것이 곤씨가 이룩한 최대 업적이라 할 것이다. - 富井史郞(닛산 상무)

 


 


 

플랜 180

 


 

  닛산은 현재 매력적인 제품을 개발하고 닛산 브랜드를 침투시켜 판매한다는 본래의 업무에 진력하고 있다.

 

  사원들에게 이 업무는, 본래의 고용목적에 적합하다는 의미에서, 구조조정업무 따위보다는 훨씬 일하는 보람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혁신적인 설계를 도안해내고, 마케팅 방법을 고안해 내고 있다. 각기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고생하는 보람이 있는 업무와 씨름하고 있다. 그들 앞에는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닛산의 미래를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들은 닛산 리바이벌 플랜(NRP)의 후속계획인 [플랜 180]을 성안했다. 포스트 NRP의 중점은 성장, 수익성, 부채삭감이다. 180이라는 숫자의 1은 판매대수 100만대 증가, 8은 영업이익률 8%, 0은 부채 제로를 의미한다.

 


 

성장

 


 

  플랜 180은 2005년까지 전 세계시장에서의 판매대수를 100만대 증가시킨다는 목표를 내걸고 있다. 이를 위해 일본 미국 유럽 이외의 일부 해외시장에서의 판매대수 증가를 최우선과제로 삼고있고, 유럽에서는 지금까지와 같이 수익에 가장 중점을 두게된다.

 

  성장력을 강화하는 데는 잘 팔릴 수 있는 신제품 개발이 중요하다. 2003년도부터 2005년까지 3년간 22종의 전혀 새로운 모델을 출하할 예정이다. 아무튼 1년에 7종의 새 모델을 내놓는다는 계산이다.

 

  브랜드력(力)의 회복은 단기간에 달성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제품의 매력을 높이는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들은 확실한 닛산 아이덴티티를 갖고있는 디자인 개발, 고객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독창적인 IT(정보기술) 어플리케이션의 탑재, 최고의 드라이빙 퍼포먼스를 보장하는 파워 트레인의 개발, 경쟁력 있는 서비스에 의한 제품 서포트에 전력을 다할 작정이다.

 


 

수익성

 


 

  두 번째 중점분야인 수익성에 대한 목표는, 자동차업계에서 톱 레벨의 수익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NRP의 신속한 가동은 효과적인 코스트절감을 목표로 한 노력 덕택이었다. 자동차 업계에서 한 단계 높은 레벨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코스트 절감을 계속하고, 구매, 제조, R&D, 판매, 마케팅, 일반관리비 등 모든 분야에서 효율을 향상시켜야 한다.

 

  수익성은 비즈니스의 성장과 계속적인 품질개선노력, 코스트 경쟁력이 서로 작용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닛산은 가장 가혹한 비즈니스 환경에서도 수익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업이 되어야한다.

 


 

부채

 


 

  세 번째 중점분야인 재무자원 면에서의 목표는 닛산을 부채 제로 상태로 유지시키는 일이다. 부채 제로라는 것은 재무상의 제약(制約)이 컨트롤되는 것을 의미한다. 부채 제로를 달성하게 되면 수익성 목표를 만족시키면서 최적의 재무구조 범위 내에서 투자를 유연하게 행할 수 있게 된다.

 

  닛산의 부채액은 1998년의 2조 1천억 엔에서, 1999년 말에는 1조 4천억엔, 2000년 말에는 9천 530억 엔으로 착실히 감소해 왔다. 이대로 나가면 2002년 말 달성 목표인 7천억 엔을 하회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들은 NRP 이후에도 일관되게 오퍼레이션 상의 경쟁력과 건전한 캐시 플로어를 확보할 수 있는 밸런스시트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른바 순부채를 제로에 가깝게 만들도록 노력하는 한편으로 자원의 유효활용과 자금 코스트를 최적화하기 위해서는 차입도 유연하게 실행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플랜 180은 바로 닛산의 다음 단계를 상징하는 명칭이다. 동시에 이 명칭은 90년대에 목표로 하고 있던 방향을 180도 전환한다는 의미로도 통한다. 21세기, 우리들 닛산은 진로를 새롭게 하여 성장, 수익성, 부채제로로 향하고 있다.

 


 


 

환경에 대한 배려

 


 

  이상의 3가지 큰 줄기 외에도 플랜 180은 몇 개인가의 큰 과제와 씨름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플랜에 들어 있는 환경보호규정이다.

 

  환경보호는 앞으로 자동차 메이커들의 제품계획에 점점 더 큰 과제가 될 것이다. 자동차 메이커들이 앞으로도 사업을 전개하고 이 업계에 머물기 위해서는 환경보호가 필수조건이 된다. 저연비(低燃費) 엔진 개발, 유해물질배출량의 감축, 파워엔진용 대체연료에 대한 연구 등 어느 것도 자동차 메이커들에겐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그러나 하이브릿드 카(전기.개솔린 복합형 자동차)에 덤벼드는 고객들이 많지 않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환경보호요소는 반드시 소비자들의 구매의욕과 결부되는 것은 아니다. 배기개스가 가장 적은 하이브릿드 카를 개발할 수 있다면 확실히 높은 평가를 받을 지도 모르지만, 그 이외에 특색이 없으면 잘 팔린다고 단정할 수 없다. 확실히 환경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동차 메이커들에게 환경보호만을 목표로 한 자동차 제작이 요구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소비자들은 우수한 디자인이나 파워, 퍼포먼스, 흥분, 그리고 벨류(value)를 요구하고 있다. 수익에 결부되지 않는 환경친화적인 기술에만 의존한 자동차를 팔 수는 없는 것이다.

 

  닛산은 비즈니스, 사회, 개인 레벨에서 환경문제를 생각하고 있다. 자동차업계 머물기 위해서는 환경친화적인 제품을 시장에 도입해야한다. 비즈니스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회일원으로서 또한 개인으로서, 아이들이나 사회전체를 위해서 환경보호에 매진해야하는 것이다.

 

  환경문제를 피해 가려고 해서는 자동차 업계에서 미래는 없다. 단기적인 이익을 생각하면 환경문제를 무시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자세는 승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첫째로 나는 미래에 관심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런 것처럼 나도 배기물질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염려하고 있다. 그리고 둘 째로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갖고있는 부모라면 아이들의 건강과 성장에 마음이 쓰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문제를 다음 세대에게 억지로 떠맡겨서는 안 된다. 지금 당장 해결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새로운 브랜드 아이덴티티

 

 

 

  닛산은 새 브랜드 구축에도 자원을 투입하고 있다. 전혀 새로운 비쥬얼 아이덴티티(visual identity), 새로운 선전활동, 연간 4천명의 신입사원 훈련 등도 브랜드 재구축의 일환이다.

 

  기업에 있어서 브랜드의 힘은 필수적이다. 타사의 동종 제품과 비교하여 고객들이 그 제품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는가를 조사함으로써 브랜드의 힘을 측정할 수 있다. 예컨대 고객들에게 닛산 브랜드 제품과 아주 유사한 타사 브랜드 제품을 보여주고 브랜드의 힘을 알아낸다. 이러한 고객의 반응으로부터 가격차가 생겨나는 것이다.

 

  브랜드의 힘은 통상 시장 내의 레퍼런스 포인트(reference point)가 되는 타사의 브랜드와 비교하여 조사된다. 조사를 실시한 전체 시장에서 닛산은 브랜드의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 판명됐다. 미국시장에서는 브랜드 힘의 부족으로 인한 가격차가 약 1천 달러였다. 닛산은 미국에서 연간 75만대 이상 팔았지만, 브랜드 힘 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한 시장에서만 눈을 뻔히 뜨고도 7억 5천만 달러의 수익 기회를 놓치고 있을 정도이다.

 

  브랜드 힘은 영속적인 수익으로 연결된다. 왜냐하면 강력한 브랜드가 있으면 고객들에게 보다 큰 신뢰성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브랜드 힘이 있다고 해서 미스가 허용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강력한 브랜드 힘 때문에 신속하게 미스로부터 회복된 기업들이 적지 않다는 것도 확실하다.

 

  닛산에는 매력적인 제품이 여러 개 있다. 미국에서 히트를 친 엑스트라 등은 브랜드 힘이 별로 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있었던 전형적인 사례다. 거꾸로 강력한 브랜드를 갖고 있는 조악한 제품도 많다.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고객에 달렸다.

 

  브랜드에 대한 고객의 인식을 변화시키기까지에는 디자인, 제조, 판촉, 선전 등 여러 분야에서 수년간에 걸쳐 끈기 있게 많은 노력을 계속해야한다. 닛산은 사내 커뮤니케이션에서부터 대외적인 비쥬얼 아이덴티티에 이르기까지 닛산 이미지를 통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항상 참신하고 일관된 닛산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하여 여러 시책을 강구하고 있다. 이것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일이다. 이전에는 각각의 그룹이 저마다 좋다고 생각하는 노력을 해 온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중앙에서 관리하는 일관된 지침이 없었기 때문에 모처럼의 노력이 쓸모 없게 되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전략적 내지 실제적인 견지에서 브랜드 자체를 전문으로 담당하는 그룹을 만드는 것이다.

 

  브랜드 매니지먼트 팀은 브랜드 아이덴티티에 관한 여러 가지 결단을 내린다. 팀의 멤버는 사내의 모든 동향을 체계적으로 관찰하여 브랜드 전략에 모순되는 경우엔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수정을 요구]한다. 물론 그런 결단을 내리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의 역할은 팀 멤버를 뽑고, 닛산 브랜드에 관한 회합에 참가하는 일이다. 브랜드 아이덴티티 완성에 이르는 프로세스에 관한 토론에도 참가하고 있지만, 그 후에는 모두 팀 멤버에 위임하고 있다.

 

  닛산은 브랜드 이미지를 서서히 변화시키고 있다. 때가 지나면 일관성과 통일성이 있는 브랜드 이미지가 확립될 것이다.

 


 


 

22 - 글로벌 얼라이언스

 


 

러노로부터 사장이나 CFO(재정책임자)나 제품기획담당임원이 몰려 올 것이기 때문에 전혀 불안감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빈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실제로 마치 닛산 사원이 아닌가싶게 일하고 있다. - 小島久義(닛산 이사겸 부사장)

 


 


 

이노베이션의 원천

 


 

닛산과 러노가 제휴를 발표했을 때 입이 건 회의주의자들은 일본과 프랑스의 문화충돌이 틀림없이 일어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일본인들은 섬나라 근성이 강해 간단히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닛산은 프랑스 문화가 융합되기에는 지나치게 오래된 관습과 일본중심주의가 만연한 회사이다. 그 외에 닛산에는 프랑스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프랑스인들은 네셔널리즘이 강하며 프랑스문화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러노는 지금까지 프랑스 국내나 유럽시장에서 사업을 했지만, 일본이나 미국시장을 취급한 경험은 없다. 그 외에 일본어를 잘하는 프랑스인은 거의 없다.]

 

  닛산에 오기 전에 닛산과 러노의 문화충돌로 애를 먹게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나 개인은 문화충돌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일관되게 문화의 차이는 전향적인 기회로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으며, 이노베이션을 가져온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도 여러 나라에서 갖가지 문화환경을 체험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의학이나 과학의 세계에서 획기적인 발명이나 발견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사람들이 보통과는 다른 무언가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발명이나 발견은 예상도 하지 않은 무언가를 관찰하는 것에서 탄생된다.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이라면 [왜 차이가 날까?]하고 의문이 들  것이다.

 

  예상했던 것과 실제로 본 것과의 차이가 발견.발명과 이노베이션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 또는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발견.발명으로도 연결된다. 예컨대 프랑스인과 일본인의 경영 스타일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프랑스인들은 개념화의 단계를 매우 신속 내지 명확하게 진행시킨다. 일본인들은 프랑스인들이 개념화하는 속도에 놀람과 동시에, 실행에 필요한 중요한 요소가 무언가 누락돼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걱정한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실행단계에서 시간을 들이며, 개념화단계에서 간과했을지도 모르는 요소가 없는지 어떤지를 확인하려고 한다. 때문에 매니저는 실행단계에서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어떤지를 감시한다. 이것은 라틴적인 특질이다.

 

  한편 일본인들은 개념화에 시간이 걸린다. 그럴 때 프랑스인들은 가끔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일본인들은 어쩌면 이렇게 더딜까 하고 탄식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개념화에 관계하면서 실행계획도 수립한다. 그래서 일단 실행단계에 들어가면 일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하기 때문에, 매니저는 부하의 업무방식을 하나하나 감시하지 않아도 된다.

 

  이처럼 프랑스인들과 일본인들이 서로간 업무처리방법을 이해하면, 체험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각각의 방법에 상찬과 경의를 표하고, 서로간에 높여주고 넉넉하게 해주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차이를 존중한다

 


 

  여기서 잠깐 옛날얘기 하나 하는 것을 양해해 줬으면 한다. 내가 일본인과 진정한 의미에서 처음 접촉한 것은 미쉐린에 있었던 1984년의 일이었다. 그 해 나는 농업용 타이어나 불도저용 타이어등 대형 타이어를 취급하는 R&D 테크니컬 센터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불도저용 타이어의 주요 고객은 캐터필라사와 고마츠사였다.

 

  1984년 고마츠와의 일로 일본에 오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고마츠 사람들과 협의도 하고, 굴삭기의 조립현장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최초의 방일에서 특히 인상에 남은 것은 2가지였다.

 

  하나는 전 종업원이 유니폼을 착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회합은 테이블에 삥 둘러앉아서 했는데,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있어, 내방자에게는 누가 누구인지, 어느 사람이 관리직인지, 눈으로 보아서는 전혀 식별할 수 없었다. 회의 중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주로 젊은 사원들이었고, 상사들은 거의 입을 열지 않고 듣기만 했다.

 

  명함교환을 함으로써 누가 관리직인가는 판명됐지만, 나는 그들 관리직이 거의 입을 다물고 있는 것에 놀랐다. 보스가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은 듣기만 할뿐 거의 입을 열지 않는 프랑스 회의풍경과는 아주 정반대였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공장 오퍼레이션이 아주 심플했다는 점이다. 유럽에서는 생산력과 테크놀로지가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일본에서는 이 두 가지가 실로 간결하게 연결돼 있었다.

 

  나는 고마츠에서 보았던 것에 감명을 받고 귀국했다. 일본의 경영스타일은 구미의 그것과는 달랐으며, 선입관을 가지고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결국 어떤 일도 상대를 존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돼야한다는 것이다. 항상 먼저, 팀을 만든 사람은 유능하며 업무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다고 생각하며 접해야하는 것이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러노에서 나와 함께 닛산으로 갈 사람을 선정할 때 나는 그들에게, 닛산과 닛산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왜 다른 방법을 쓰는지를 시간을 가지고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물론 여기에는 인내가 필요하지만, 차이점을 인식하고, 분석하고, 이해하여 그것으로부터 배울 수가 있으면, 문화적으로 풍성해질 수 있다. 문화적으로 풍성해지면 혁신적인 매니지먼트나 개선을 탄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누구도 혜택을 입을 수 있다.

 


 


 

얼라이언스 매니지먼트

 


 

  닛산과 같은 전형적인 일본기업과 러노와 같은 전형적인 프랑스기업이, 어느 쪽이 오너인지, 또는 어느 쪽이 결정권을 갖고 있는지 따위의 것으로 대립하는 일없이, 협력하고 일치하는 자리를 만드는 방법으로서는, 얼라이언스(제휴)라고 하는 형태가 유일 내지 최선의 것이다.  

 

  얼라인스의 기본합의문서는 기밀유지나 운영의 룰 등의 약속과 함께, 이념의 공유, 상호신뢰, 차이점의 존중, 양사간의 밸런스 등에 대해서도 언급돼 있다. 합의문서는 말하자면 헌법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양사가 얼라인스를 강화하고 서로간 업적향상에 공헌해 가는 것에 대한 기본원칙을 정한 것이다.

 

  의사결정 구조는 기본적으로 양사가 평등하게 참가할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얼라인스의 본체를 관리하는 글로벌 얼라언스 코미티(GAC)는 닛산측 6명, 러노측 6명으로 구성되고, 양사의 CEO가 공동으로 의장을 맡는다. GAC는 공동전략을 정해, 크로스 컴파니 팀(CCT)이 제안하는 협조를 위한 행동 또는 시너지 추구를 위한 행동을 결정한다. GAC는 매월 진척상황을 검토한다. 회의는 기본적으로 빠리와 도쿄에서 개최된다. 위원회에서 사용되는 공통언어는 영어, 제2 언어는 쌍방의 모국어이다.

 

  CCT는 프로젝트나 테마에 따라 GAC가 설치한다. CCT의 업무는 기회에 대한 평가와 양사 간의 시너지 효과를 구체화하기 위한 방법의 제안이다. 현재로는 총 12개의 CCT가 설치돼 있다. 그 중 5개는, 상품기획 및 관련 전략, 차량개발, 파워 트레인, 구매와 공급, 생산이다. 나머지 7개는, 일본.아시아 내평양, 북미.중미, 남미, 유럽, CIS(독립국가공동체) 및 터키.루마니아.북아프리카, 중동,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7개 지역의 마케팅과 판매를 담당한다. 각 팀의 리더는 양사의 어느 쪽이나 맡으며, 차석 리더는 리더를 내지 않은 쪽에서 선발된다.

 


 


 

구매와 생산의 얼라이언스

 


 

  러노-닛산의 글로벌 얼라이언스가 그 동안 올린 성과의 구체적 사례를 살펴보자. 얼라인스는 현재 제 1단계에 들어가 있지만, 이미 제휴 이전의 예상을 상회하는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2001년 4월, 양사는 시너지효과 실현의 일환으로 러노-닛산 공동구매회사(RNPO)를 설립했다. RNPO는 당초 양사의 연간 구입액 500억 달러의 약 30%, 금액으로는 145억 달러를 취급대상으로 하고 있다. 성과가 현저하게 나타나게 되면 곧 70%, 350억 달러 상당으로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공동 프로젝트의 성과가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은 2005년 이후가 된다. 구매결정은 도꾜 또는 빠리의 어느 한 곳에서 일방적으로 내리지는 않고, 양사가 보조를 맞추어 내리게 된다. RNPO는 유럽, 일본, 미국에서 구입활동을 하며, 스탭은 양사 사원으로 구성된다.

 

  러노의 구매부문 담당 임원이 RNPO의 회장겸 매니징 디랙터를 맡고 있으며, 닛산의 구매부문 통괄부사장이 부회장을 맡고 있다. 익제큐티브 제너럴 매니저는 닛산의 구매전략부문의 제너럴 매니저가 맡고 있다.

 

  RNPO의 사업은, 파워 트레인 부품, 차량부품, 서비스 및 자재의 3부문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부문별로 제너럴 매니저를 두고 있다. 3명의 제너럴 매니저는 각각 17명의 글로벌 서플라이어 어카운트 매니저(GSAM)와 17명의 부(副) GSAM으로 이루어진 조직을 통괄한다. 이 3개 부문은 도쿄나 빠리에 GSAM을 배치하는데, 빠리에 GSAM이 있는 경우는 도쿄에 부GSAM을 설치한다고 하는 형태를 취한다. GSAM과 부 GSAM은 각각 특정한 대상품목을 취급하는데, 구매전략의 책정, 공급회사의 선택, 품질.코스트.수송에 관한 러노-닛산 양사 각각의 목표달성에 책임을 진다.

 

  다음으로 생산분야에서 달성되는 얼라이언스 성과를 살펴보자.

 

  2000년 러노와 닛산은 [프로젝트 64]라고 불리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멕시코에 있는 닛산 쿠에르나바카 공장에서 닛산의 생산지원을 받았던 최초의 러노 자동차인 세니크의 생산을 개시하고, 2001년 1월에 발매를 시작했다. 멕시코에서 발매된 이 최초의 컴팩트 원박스 카에 의해, 1986년에 멕시코 시장을 철수했던 러노가 훌륭한 시장복귀를 하게되었다. 제 2탄으로 시장에 등장하는 쿠리오는, 멕시코 중부에 있는 닛산 아그아스카리엔테스 공장에서 생산하는데, 2002년 초반에 발매할 예정이다.

 

  멕시코시장이 선택된 것은 양사에게 이상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양사는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서로 보완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있는 양사는 서로에게 가장 좋은 부문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멕시코에서의 닛산의 과거 경험은 귀중했다. 닛산은 멕시코 시장을 잘 알고 있으며, 고객들의 기대나 요구도 이해하고 있었다.

 

  모칼 혼만이 거느리는, 멕시코에 건너간 프로젝트 팀은 일본인과 프랑스인 엔지니어 22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추가로 빠리와 도쿄에서 130명의 엔니지어들이 백업됐다. 이 프로젝트는 생산활동에서 러노와 닛산간의 시너지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기까지 양사는 프로젝트를 좌절시키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의 시련을 극복해야했다.

 

  프로젝트를 개시함에 따라 그들은 다른 문화의 사람들로 구성된 혼성팀에서 생긴 문제로 충돌하게 되었으며, 커뮤니케이션을 개선할 필요가 절실해졌다. 또한 시너지를 확보하기 위해 생산규정을 융통성 있게 적용해야만 했다. 그 일환으로 자재관계 서류를 프랑스어에서 일본어로 번역하기도 하고, 러노의 데이터베이스에서 닛산의 데이터베이스로 데이터를 전송하기도 했는데, 무엇보다도 계획이나 실행을 둘러싸고 생긴 프랑스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조정해야만 했다. 그들은 끈기 있게 문제를 극복하고 실행 가능한 계획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작업에 사용된 언어는 영어와 스페인어였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한 데에는 멤버들이 양사의 문화를 차량생산을 위해 활용하는 것에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나 자기들의 방법이 우수하다고 생각하던가 단일문화 사고에만 젖어있었다면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이덴티티와 시너지

 

 

 

  제휴에 대한 얘기가 정리되는 시점에서 우리들은 닛산에서도 러노에서도 각각의 아이덴티티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제휴로 인해 그것이 손상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회사에 있어 아이덴티티가 얼마나 중요한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상대방의 아이덴티티를 지켜주면서 시너지를 만들어내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이덴티티를 지나치게 중시하면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일이 어렵게 된다. 거꾸로 시너지만을 중시하고 아이덴티티를 경시하게 되면 모티베이션을 손상하게 된다.

 

  나의 경험으로는, 기업이 가져야 할, 또는 육성해야할 가장 중요한 것은 모티베이션이다. 모티베이션은 회사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 그리고 모티베이션은 아이덴티티와 귀속의식에서 생긴다. 사원들은 자신의 회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회사에 귀속감을 느끼게 해야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잔업을 하던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회사 일에 몰두하지 않는다.

 

  모티베이션의 근원인 아이덴티티가 실종되면, 무사안일주의가 만연하게 되며, 업적에 악영향을 준다. 닛산과 러노의 경우를 두고 말한다면, 사원들은 자신이 어느 쪽 사람인지,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 닛산의 사원인지, 러노의 사원인지, 아니면 어느 쪽도 아닌 상태인지 번민하게 된다. 얼라이언스에는 이런 종류의 양면성을 갖고 들어와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양사의 아이덴티티 유지에 특히 배려하고 있다.

 

  러노와 닛산의 얼라이언스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양사를 연결하는 다리가 아직 건설 중에 있으며, 주의 깊은 감시 아래 아이덴티티의 유지와 시너지의 창조를 지향하고 있다. 러노로부터 닛산으로, 닛산으로부터 러노로 인재가 오가고 있으며, 조금씩 새로운 비즈니스 문화가 창조돼 가고 있는 중이다.

 


 


 

얼라이언스의 미래

 


 

러노와 닛산의 제휴는 상황의 산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러노에서도 닛산에서도 이 제휴를 어느 쪽인가가 강요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닛산이 부채의 반제에 현금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러노는 닛산주식의 36.8%를 구입했다. 닛산으로선 다른 선택방법이 없었다. 닛산을 궁지로부터 구출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러노는 말하자면 글로벌 기업 반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필요했다. 러노가 닛산을 인수했다느니, 닛산이 부활하면 러노 지분을 인수할 예정으로 있다는 억측은, 이 얼라이언스의 주안점을 잘 못 본 것이다.

 

  얼라이언스의 기본합의문서에는, 장래에 닛산이 러노 지분을 취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기재돼 있다. 일본에서 닛산의 러노 지분인수가 언제쯤이 될 지에 대해 핵심을 찌르는 견해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러한 견해에는 약간 신중해 줬으면 하고 충고하고싶다.

 

  닛산에는 아직도 반제해야 할 거대한 부채가 남아있다. 핵심 비즈니스에는 신기술이나 신제품 개발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분야도 수없이 남아있다. 러노 지분을 매입하려고 한다면, 이런 분야에 회전시켜야 할 자금을 쏟아 넣어야 한다. 이 시기에 러노 지분 취득이라고 하는 말을 거론하는 것은 현명하다고 할 수 없다.

 

  러노 지분의 취득이 닛산 일부 사람들의 감정적 문제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비즈니스 세계에 있는 것이며, 감정에 휩쓸리는 결단을 해서는 안 된다. 결단은 가치창조와 우선 순위의 관점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리고 현재 닛산의 최우선과제는 핵심 비즈니스의 재건이다. 언젠가 닛산은 러노 지분을 매입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 결단은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관점에서 행해져야 한다.

 


 


 

23 - 매니지먼트의 변혁

 


 

구조조정이라고 하면 인원감축이나 자산매각과 동의어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지만, 나는, 카롤로스 곤이 사원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구조조정하고 재구축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그 성과는 사내 구석구석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그의 가장 우수한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松村矩雄(닛산 이사겸 부사장)

 

 

 


 

NRP의 본질은 의식혁명

 


 

  닛산재생의 근저에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변화가 있다. 공장폐쇄나 계열사 거래의 재점검 등 수많은 조치는 사고방식 변혁의 결과다. 닛산사람들은 새로운 사고방식에 기초한 새로운 매니지먼트 스타일을 받아들였다.

 

  경영진은 낡았거나 관습화된 의사결정 대신에 객관적인 현상인식과 명확한 우선 순위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임원들은 자신의 책임범위 내에서 임무를 완수하고, 진척상황을 감시하며, 우선 순위에 주목하여 기대되는 성과를 이룰 책임을 지고 있다.

 

  내가 오기까지 닛산 경영진은 회장, 사장, 다수의 부사장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CEO(최고경영책임자), COO(최고집행책임자), CFO(최고 재무책임자)라고 하는 직책은 설치돼 있지 않았다. 하나와 요시카스와 경영위원회는 의사결정의 신속성을 기하기 위해 임원들의 숫자를 37명에서 10명으로 줄이고, 임원들의 톱으로 CEO와 COO제도를 설치했다. 지금은 CEO, COO, EVP(부사장), SVP(상무) 등의 임원직이 설치돼 있다.

 

  여담이지만, 나의 직위에 대해 닛산은 처음에 [제1부사장]이라는 안도 있었던 것 같으나, [제2부사장]이란 직위가 없기 때문에 이상하지 않을까 하는 당연한 의견이 나와 최종적으로 COO라고 하는 직위로 결정된 것 같다. 

 

  닛산 임원들은 닛산 본토박이 그룹과 정부로부터 내려온 사람들이나 은행출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임원 감축정책으로 다수는 내가 취임하기 전에 이미 퇴임했기 때문에 나 개인과는 거의 면식이 없다. 임원 수의 감축도 임원의 새로운 직위도 나의 의향을 반영한 결과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내가 일본에서 최초로 업무를 시작한 경영위원회의 인선은 요시카스가 행했다. 그는 사전에 나의 의향을 물어 왔지만, 어느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던 나는 모두 그에게 위임했다. 닛산이 러노와 힘을 합쳐 새로운 길로 나아가려고 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이 때의 인선은 중요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항상 업무를 인계 받을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려고 명심해 왔다. 취임 후 인사를 일신하여 [자, 심기일전 새 팀으로 출발하자] 따위로 임한 적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다. 사람들을 갈아치우기보다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변하게 하는 것이 내 방식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물론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갈아치운 적도 있지만, 어느 경우도 될 수 있는 한 통상의 인사이동의 수속을 밟으면서 행하려 하고 있다. 정년퇴직으로 비어있는 자리에 다른 매니저를 옮기고, 오랫동안 한 직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다른 부서로 옮겨주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업적이 생각한 만큼 올라가지 않는 상태가 계속된다면, 확실히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매니저로 교체할 것이다.

 

  경영진의 전면적인 쇄신은 플러스적인 면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마이너스적인 면도 크다. 그것은 극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는 매니지먼트 패러다임 쪽을 쇄신했다. 필요한 것은 사내 인사들의 매니지먼트 능력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신념이나 사고방식은 문제삼지 않았다. 그들의 노력이 없다면 닛산부활을 위한 시급한 테이크 오프는 바라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공개한다

 


 

  경영 톱이나 관리직들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데는 투명성이 높고 스피디한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했다. 그런 시스템이 도입됨으로써 닛산 사람들은 그때까지 관례화 돼 익숙해진 계층형 권력구조를 여러 레벨에서 크로스 펑크셔널리티가 필요한 새로운 모델로 전환시켜야 했다. 그리고 여러 레벨의 사람들에게 이 시스템의 도입근거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설명이 필요했다.

 

  우리들은 일치 협력하여 닛산의 현 상황을 파악하고, 명쾌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려야 했다. 이 단계에서는 마음을 열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했다. 이른바 비즈니스의 방법이나 문화적 차이에 대한 선입관, 객관적인 현상파악을 방해하는 사고방식을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위기상황 아래서는 서로간에 숨김없이 상대에게 성실하게 대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기려하지 말고 문제를 바로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후퇴하여 출발점으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다.

 

  이런 우스개 얘기가 있다. 피에르와 히로시가 캐나다에서 헤라지카(북미산 말코손바닥사슴의 별칭 - 옮긴이) 사냥에 나섰다. 두 사람은 소형 비행기를 빌려 목적지로 향했으며 사냥에 신바람이 났다. 해가 저물 무렵 두 사람은 한 마리의 큰 헤라지카를 잡고는 되돌아오려 했다. 조종사는 그 크기에 놀라 [비행기에 싣기에는 너무 큽니다. 이래가지고는 이륙할 수 없습니다.]고 말했다. 그러자 히로시는 이렇게 답했다. [괜찮아요. 작년에도 이만한 것을 싣고 이륙할 수 있었다고요.]. 그래서 그들은 헤라지카를 실었으며, 비행기는 히로시가 보증한대로 이륙에 성공했다.

 

  그러나 수분 후 기체가 소리를 내며 흔들리더니 숲 속에 처박히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다친 사람은 없었으며 세 사람이 기체에서 탈출하자 조종사가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그러자 피에르가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음 알 것 같소. 여기가 지난 해 추락한 곳에서 500야드 정도 되는 곳이군요.].

 

  이 이야기가 말해 주고 있는 것은 불성실하게 문제를 숨기려고 하면 해결하기는커녕 비극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터뜨려서 논의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닛산에 와서 최초로 행한 것이다.

 

  나는 문제의 원인에 대한 나의 견해를 여러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문제는 진보를 위한 기회가 된다, 하나 남기지 말고 샅샅이 뒤져서 닛산의 구석구석까지 확대경 아래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문제를 숨김없이 이야기하지 않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을 때 자신이 희생자가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인 죤 케네스 갈브레이스가 한 아래의 말은 완전히 침체하고 있는 기업의 분위기와 상황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느냐 또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느냐 하는 선택을 해야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증명하는 쪽으로 덤벼든다.].

 


 


 

아웃사이더의 강점

 


 

  외부에서 데려온 사람에게 경영을 맡기는 결단이 닛산의 10년에 걸친 불황을 타개하는 해결책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사고방식을 불어넣고 새로운 에너지를 가져다주는 계기가 필요하다고 통감하고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인재초빙에 의해 경영 스타일의 근본적인 개혁을 감행하고, 사업과 기업 문화를 쇄신하고, 과거의 굴레를 단절해야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아웃사이더를 회사에 맞아들이는 이점으로는, 그 인물이 회사에 대한 선입관을 갖지 않고 들어온다는 점이다. 이 경우의 아웃사이더라는 것은 반드시 외국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아웃사이더라면, 사내 사람들이 관습이나 관례나 인간관계에 생각이 얽매여 본래 당연히 있어야 할 우선 순위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서, 냉정하게 사물을 불수가 있다. 그리고 우선 순위를 바로잡고, 오랫동안 정착돼 온 여분의 쓸모 없는 방법들을 잘라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2001년 초두에 닛산 노동조합과 춘투(春鬪)교섭을 할 때의 일이다. 나는 교섭이 절반쯤 진행되었을 때 그들이 요구하는 보너스 액수를 승낙해줌으로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승낙한 것은 그들의 요구가 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닛산 리바이벌 플랜(NRP)이 주주 뿐 만이 아니라 사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시킬 요량으로 요구액에 [OK]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使)측 교섭단 멤버는 추가로 2주정도 보너스 교섭을 계속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아직 타결해야할 다른 요구조건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왜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특별한 요구는 없지만 앞으로 2주간 대화를 해 가며 결정적으로 집중회답을 해야하는 날까지 기다리는 것이 지금까지의 수순이라고 한다. 요구가 관철되면 교섭을 길게 끌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논의만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우리들에게는 쓸데없는 짓을 할 여유가 없다. 지금까지 이렇게 해 왔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유만으로, 그것도 아무런 부가가치도 없다고 하는 것에 수속을 고집한다는 것은 나로선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앙집중과 권한 위임

 


 

  당초 사원들은 모든 의사결정이 중앙집중화 되는 것이 아닐까하고 우려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2가지 다른 매니지먼트 어프로치를 도입하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조금씩 이해를 하게 되었다. 회사로서의 전략과 우선 순위의 설정, 경영계획, 중요한 목표에 대해서는 권한을 중앙집중화 했다. 의사결정은 경영위원회 레벨과 사장 레벨에서 행했다. 물론 경영위원회도 사장도 사내로부터 올라온 제안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리지만, 최종결정은 어디까지나 톱이 내린다.

 

  비즈니스 플랜의 작성과 중요 목표 설정이 끝나면, 사장은 그것을 부사장과 상무들에게 위임하고, 그 이하는 그들이 책임을 지고 계획을 실현시킨다. 부사장들이 이후에 사장에게 질문하기도 하고 어드바이스를 구하기도 하지만, 나는 일관되게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미시경영)를 거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사원들의 능력을 떨어뜨리고, 업적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특히 업무의 스피드를 지연시키게 된다.

 

  닛산 경영진에게는, 업무의 집행을 부하들에게 맡기는 것은 제약 없는 전면적인 권한이양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켰다.

 

  회사에는 지켜야 할 가이드라인이나 우선 순위나 중요 목적이 있으며 이것이 사원 전원의 활동이나 행동을 이끈다. 명확한 전략이나 가이드라인이나 우선 순위도 없이 권한만을 준다면, 제각기 자기가 좋아하는 제멋대로의 방향으로 진행하게 될 것이다. 이래가지고는 개성도 의욕도 정열도 없는 회사가 되고 말 것이며, 부문간의 충돌이 빈발하고, 영주끼리 싸우는 마치 봉건제 같은 상태가 될 것이다. 이래서는 회사의 업적이 오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전 사원들을 통솔하는 단일 리더십 확립에 노력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들이 ] 추진하기로 결정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권한을 위임했다(억지로 [우리들]을 강조하는 것은, 사업계획과 장기계획은 여러 가지 수준에서 많은 사원들이 관여하는 일이며, 회의나 논의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야하기 때문이다).

 


 


 

의사결정 규칙

 


 

  내가 참석한 어떤 디자인결정 회의를 사례로 들어 이것을 설명해 보자. 중요한 승용차 개발프로젝트로 디자인을 결정하기 위해 참석자 전원이 지혜를 짜 낼 때의 이야기다. 회의 목적은 5개의 디자인 옵션을 2개로 줄이는 것이었다. 그 2개가 다음 회의에 올려져 최종 선택을 하게 된다.

 

  회의에서는 5개의 디자인이 제출되어 참석자 전원이 각 디자인의 메리트와 디메리트를 논의했다. 마지막으로 다른 부문에서 모인 12명이 의견을 내고, 각자 전문적 견지에서 자기가 추천하는 디자인을 발표했다. 참석자들은 디자인, 제품개발, 마케팅, 엔지니어링, 영업 등의 부문에서 모인 사람들이다.

 

  물론 나 자신도 5개의 차량 디자인을 검토하였고, 내 나름의 의견은 갖고 있었지만, 모두의 의견을 듣는 쪽으로 돌렸다. 첫 번째 디자인은 참석자 전원 일치로 즉시 결정됐다.

 

  그런데 2번째로 우수한 디자인을 선택할 단계가 되자, 이번에는 의견이 중구난방이었다. 그래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내가 2번째 디자인의 선택을 생략, 그 자리서 전원일치의 모델을 결정하는 것으로 했다. 이 결단은 전원이 그 디자인을 좋아하고 납득할 수 있는 논의를 행했다고 하는 사실에 근거하여 내린 것이었다.

 

  나는 기분에 따른 결단은 내리지 않는다. 회의에서도, 이런 형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이런 색이나 컨셉트는 싫어한다고 말참견하지 않는다. 업무의 프로세스가 존중되도록 촉구하고 관계된 여러 의견을 듣고, 그리고 확고한 비즈니스 이론에 의해 결단을 내리려고 마음먹고 있다.

 

  의견충돌이 있어 합의에 도달하지 않을 경우에는 사장이 결단을 내리고 그 이유를 설명해주어야 한다. 거꾸로, 컨센서스가 있으면 전원이 거기에 따르는 것이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당연한 일이다. 쓸데없는 시간이나 에너지를 투입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이 정도로 단순 명쾌한 일은 없을 것이다.

 

  예로 들었던 디자인결정 회의는, 사장이라는 사람은 비즈니스의 요청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이야기한 것이다. 사장은 의사결정의 장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고객만족과 수익성을 망각하지 않도록 촉구해야하며, 부하의 의견을 이해하는 동시에 자신의 의견을 확신을 가지고 표명해야한다. 자동차 디자인 회의에서 나는 나의 선호도와는 상관없이 고객의 기호에 근거하여 결단을 내린다. 자신이 그 디자인을 좋아한다면 결단이 쉽고, 좋아하지 않는다면 결단이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결단을 내릴 것이다.

 

  이 균형을 맞추기는 어렵다. 주위의 눈치를 살피기만 하는 이름만의 사장이어서는 물론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배자가 되어 자기의 의견이나 결단을 강제로 관철시키는 것도 잘 못된 것이다. 회사에 있어 최선의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최선의 중간지점을 찾아내는 노력을 태만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문화(multi culture) 기업으로의 변신

 


 

  닛산은 민족적인 문화충돌이라는 문제를 사내에 안고 있었다. 일본 닛산과 미국 닛산 사이에 문화적 알력이 있었으며, 영국인과 스페인인의 충돌이 있었다. 문화충돌이 궁극적으로 가져오는 것은 능력과 에너지의 낭비다.

 

  문화적 다양성을 솜씨 좋게 정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 닛산에서는 사원들의 태도와 행동 그리고 지금까지의 업무방법을 혁신적으로 바꾸어야 했다.

 

  문화의 차이를 실패의 구실이나 변명으로 이용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문화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을 장애로 삼지 않고 스피드 촉진을 위해 활용하기로 했다.

 

  문화의 차이를 응석처럼 받아드렸다면, 그토록 신속하게 NRP를 발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계획의 기본적 내용을 정하고 우선 순위의 확립에 분주했던 것은 주로 일본의 닛산 사원들이었으나, 북미나 유럽 등 세계 각국에 있는 닛산의 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적 차이는 변명의 구실이 되기 쉽다. 언제 나쁜 관습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어떻게 하면 이 퇴로를 차단할 수 있을까? 시대에 뒤떨어진 관습과 존중해야할 문화를 구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관습의 변혁이라면, 문화를 손상시키지 않고 수행할 수 있다. 또한 다른 문화의 융합을 강요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 무리하게 융합시키지 않고 차이를 인정하되 그 차이를 업무의 여러 면에 응용해 가는 것이다.

 

  나는 닛산에서의 문화충돌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회피 또는 적어도 최소한으로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업적중시의 매니지먼트를 행하는 것이다. 명확한 글로벌 비전과 공통의 장기계획을 기준으로 삼아 생각하고 충돌을 중재하는 것이다. 명확한 전략, 정확한 가이드라인과 중요목표를 짜 나가는 중에 나라별로 행동하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

 

  닛산에서는 이런 모든 것을 도입했다. 그 결과 지역별로 독자적인 계획을 작성할 수 있는 멀티 리죠널(multi regional) 기업이, 통합된 글로벌 전략을 가진 멀티 컬쳐(multi culture),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

 


 

  닛산은 일본적인 요소와 일본적인 문화를 가진 회사이지만 정확히 일본기업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미국 닛산의 미국사람들은 닛산이 미국회사라고 말하고 있으며, 영국 닛산의 영국사람들은 영국회사로, 멕시코 닛산의 멕시코 사람들은 멕시코 회사라고 말하고 있다. 누구도 닛산은 자기나라 회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닛산은 글로벌 기업이다. 닛산 자동차의 4분의 3은 해외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현재 주주의 60% 이상이 외국인이다. 사원들의 약 3분의 1도 외국인이다. 세계적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으며, 각국의 자동차시장에 진출하고 있는 닛산에게 어느 나라 기업이냐고 묻는다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닛산은 이전부터 세계 각국 시장에서 사업을 전개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그때부터 글로벌 기업이었다. 그러나 그 운영은 기본적으로 현지기업이 행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 일본, 북미, 유럽 등의 현지 닛산이 각각 독자적 결단을 내리는 업무구조가 되어 있었다. 타 지역의 사업목적에 대해 실질적인 이해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컨대 일본 닛산에서는, 미국이나 유럽의 구매부문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고 잇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점을 통감한 것은 1999년 휴가 때 유럽 닛산 사장과 대화를 나누고서였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

 

  [닛산은 기술지향성이 강한 회사로 시장의 요구는 곧잘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적어도 유럽시장의 요구에는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유럽에 투입해야할 자원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10년, 15년 전을 되돌아보아도 고객들의 입장에 선 마케팅은 충분치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충분했다고 해도 당시의 닛산 자동차의 라인업으로 보아 닛산이 국내지향성이 강한 회사였다는 점을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재빨리 북미와 유럽 닛산의 사장직을 철폐했다. 그 대신 2명의 부사장으로 북미와 유럽의 지역경영위원회(regional management committee)를 통솔케 하고, 매월 일본과의 사이를 왕복하게 했다. 과거 닛산의 경험에서, 지역별로 사장을 두게 되면 본사와 지역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나 정보유지에 문제가 생길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문제는 글로벌한 레벨의 업적을 손상시키는 원인이 된다.

 

  점차로 우리들은 각 지역에 지역경영위원회를 설립하고, 그 지역에서의 의사결정을 강화시켰으며, 오퍼레이션 내지 전략의 책임과 담당을 명확히 하고 각 지역과 본사의 커뮤니케이션 강화와 의사결정의 스피드업에 매진했다.

 


 


 

매트릭스 조직 모델

 


 

  글로벌적이기도 하고 지역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기능적이기도 한 조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경영톱과 매니저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의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이전의 닛산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일본적인 방법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논의가 되어야할 문제를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툭 터놓고 토의하는 것을 경원시 했으며, 해결노력이 무대 뒤에서 진행되었다. 경영위원회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인데도 거기서 명확한 결단이 내려지거나 논의가 되지 않고 결국은 그 문제를 제기한 해당 부문으로 되돌려 보내져,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체 방치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새로운 매트릭스 조직 모델을 도입했다. 닛산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지역을 일본, 북미, 유럽, 기타의 4개 지역으로 나누고 이것을 지역 축으로 했다. 그와는 별도로 직무내용에 따라 닛산을 마케팅.판매, 상품기획, 기술.개발, 생산, 구매, 경리.재무, 인사, 코퍼레이트 서포터 등으로 나누어 이것을 기능 축으로 했다. 이 2가지 축이 교차하고 있는 매트릭스에 따라 세계의 닛산을 운영하고자 하는 것이 매트릭스 조직이다.

 

  이 2개의 축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원들은 2가지 책임(2인의 상사를 모시고)을 지게된다. 1인의 사원은 자신이 속한 지역에서 수익을 올리는 것과 자신이 속해 있는 직무를 글로벌적으로 효율화하여 수익성을 높이는 것의 2가지 책임을 진다. 이러한 조직에서는 극도로 높은 투명성과 틈새 없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여기서, 지역 매니저와 직무를 통괄하는 프로그램 디랙터가 어떠한 토의를 하며 어떠한 결론을 이끌어낼 것인가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지역 매니저는 담당지역의 매년의 수지타산과 그 연도의 달성목표에 책임을 진다. 예컨대 마쓰무라 노리오(松村矩雄) 부사장의 경우, 지역축에서의 담당은 캐나다, 미국, 멕시코를 포함하는 북미사업이다. 그의 책임에는 동 지역의 마케팅과 판매, 구매, 생산 등 모든 업무가 포함된다.

 

  한편 마쓰무라 부사장은 기능축으로는 글로벌 판매.마케팅 부문을 통괄하는 프로그램 디렉터이며, 이 부문의 중장기적인 효율과 개선에 대한 책임자이다. 그 때문에 그와 그의 팀은 적절한 마케팅 전략, 전술, 방법, 새로운 툴(tool)을 고안해 내야한다. 예컨대 향후 5년간 자동차 1대 당 총 유통 코스트의 절감이 그들의 주요 임무이다.

 

  2개의 축에서 어딘가에 문제가 생길 경우, 지역과 직무 사이에 항상 커뮤니케이션이 연결돼 있어야 한다. 마쓰무라 부사장은 자신이 통괄하고 있는 북미사업부와 판매.마케팅 부문 사이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는 자신의 책임범위 내에서 직접 해결에 나설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지역과 타 직무, 예컨대 구매부문과의 사이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 그는 글로벌 구매부문 프로그램 디렉터와 협의해야한다. 예를 들어 2000년도에 그가 유럽담당이었을 때, 유로화 내림세와 영국시장의 경쟁격화로 영업비가 늘어난 것이 원인이 돼 유럽 시장에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그대로 둬서는 유럽시장에서의 수익을 확보할 수 없다고 우려한 마쓰무라 부사장은, 글로벌 규모로 구매부문을 통괄하는 프로그램 디렉터인 고에다 유끼(小枝至) 부사장과 이 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고에다 부사장, 유럽에서의 구매 코스트 절감 목표를 높일 수 없겠습니까?]. 이리하여 두 사람은 고에다의 서플라이어 전략을 손상시키지 않고 마쓰무라의 수익목표가 달성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해결방법을 의논한 것이다.

 

  가령 두 사람이 절충하지 못했을 경우, 이 문제는 경영위원회에 제출되어 사장이 의장을 맡고있는 장소에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가능한 한 코스트 절감과 품질향상, 수익 최대화를 목표로 하는 글로벌 기업을 운영하는 이상 각 레벨, 각 직무, 각 지역에서의 투명성과 정보전달은 필수요소이다. 문제는 신속히 공개하고 대처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지역 매니저가 자신의 책정목표를 달성할 수 없으면, 프로그램 디렉터도 목표를 달성할 수 없게 된다. 목표에 도달할 수 없게 되면, 급료나 보너스는 물론이고 본인의 종합적인 평가에까지 영향이 미치기 때문에 프로그램 디렉터는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이 문제에 대해 지역 매니저와 협의하게 된다. 지역 매니저도 똑 같은 상황이다. 이처럼 현재의 닛산의 조직 모델은, 여러 가지 문제나 대립을 표면화시킴으로써 회사성장을 확실하게 해 주는 해결책을 도출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지 받고 있는 매니지먼트 스타일의 변화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추진하고 있는 폭넓은 매니지먼트 스타일의 일부이다. 일련의 변화는 전 사원들이 알고 있다. 정기적으로 행하고 있는 사내여론조사에서는, 매니지먼트 스타일의 변화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하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닛산은 1998년이래 매년 종업원 3만명(매니저 700명 포함)을 대상으로 사내 여론조사를 실시해 왔다. 최근의 조사는 2000년에 실시됐다.

 

  의사결정, 책임, 커뮤니케이션, 비즈니스 지식에 관련된 질문에 대한 답을 읽어보면, 우리들이 추진하고 있는 것이 사원들에게 이해되고 있고 평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로운 닛산 식 매니지먼트 스타일이 정규의 매니지먼트 스타일로서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기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가장 보수적인 입장인 매니저들조차 협력하고 있다. 중역 전원이 이 새로운 매니지먼트 스타일을 지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물론 전원이 무조건 찬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의문을 느끼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아무도 이전의 매니지먼트 스타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24 - 인재야말로 닛산의 강점

 


 

카롤로스 곤 식대로 하면 누구에도 챤스가 찾아온다. 그에게는 재능을, 그것도 특히 젊은 재능을 발견할 수 있고, 좀처럼 보기 힘든 역동성을 갖고 있다. - 베르나르 바두본쿨(미쉐린 경영위원회 멤버)

 


 


 

강한 인재를 만드는 방법

 


 

  닛산에는 자랑할만한 수많은 장점이 있다. 닛산은 글로벌 기업이며 세계의 정점에 서 있는 생산 시스템을 갖고 있다. 파워트레인 등의 중요 분야에서는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과시하고 있으며, 기술분야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 닛산의 가장 우수한 강점은 인재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긍지가 있다. 러노와의 제휴조인에서 보여준 것처럼 용기와 선견지명을 갖고 있다. 그리고 회사를 어려움에서 구출하고 다시 경쟁력 있는 강한 기업으로 재건하기 위해 공헌하고 분투하여 훌륭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스스로 높은 목표를 내걸고 스스로 채찍질하며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확신을 갖고 단언하건대 타인으로부터 압력을 받아 일할 때보다 스스로 채찍질하여 일하는 쪽이 훨씬 큰 것을 이루어낸다.

 

  나는 미쉐린 시절에 2가지 얻기 어려운 체험을 했다. 하나는, 젊은 나이에 큰 책임을 맡아 완수해 낸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나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교육이나 훈련을 받아 응분의 준비가 돼 있는 젊은이라면 꼭 같은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 누구도 해낼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방법은 다를 지 모르지만 올바른 지도를 받은 젊은 재능이라면 반드시 해 낼 것이다.

 

  두 번째는, 프랑소와 미쉐린이 나에게 전면적인 권한을 주었던 점이다. 그는 몰래 살피거나, 매월 숫자나 뭔가를 세세하게 체크하는 분이 아니었다. 그는 오직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주위 사람들에게 그가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나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이것은 나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몸을 아끼지 않고 업무에 전념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로부터 그렇게 하게끔 하는 강요를 받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아직 젊고 이른 시기에 [자네에게 위임한다]는 한마디로 가혹한 상황에 처넣어진 것이 플러스로 작용한 것으로 생각한다.

 

  [자네에게는 바로 세울 힘이 있어. 가서 바로 세우게. 조언이 필요하면 나는 언제라도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네. 그러나 자네라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네.]

 

  이것은 사람을 움직이고 회사를 통솔하는 방법으로서 실로 적절한 것이다. 전략을 중앙집중화하고, 가이드라인이나 기준을 확립하고, 중요한 목표를 명확히 하고 장기목표를 세운다. 이 작업이 끝나면 마땅히 담당자를 뽑고, 그리고는 그 팀에 바톤을 넘겨주어 달리게 하는 것이 좋다. 하나 하나 말참견을 하고 기웃기웃 엿보며 마이크로 매니지먼트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들의 업무는 그들에게 맡기고 업적만을 팔로우업(follow-up)한다. 적어도 길을 가는 중에 문제가 생길 때에는, 수정 가능하도록 손길을 뻗친다. 그러나 보통단계에서 그들에게 늘 붙어 다니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이 해결할 수 있게 유예를 주고 그들을 신뢰해야 한다. 단도직입으로 만나고, 단도직입으로 큰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목표달성을 촉구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상당한 재량권을 주고 있다. 그런 것을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에 대해 일단 승낙하면, 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일임한다. 일임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 후에는 결과를 기다릴 뿐이다.

 

  업무의 방향이 일단 정해지면, 내가 나서서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가?]고 묻는다. 내가 나타난 장소는 대개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장소이다. 어디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으면 사장이 거기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사장은 심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심판이 아니고 코치처럼 필요에 따라 선수를 서포트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알고 있을 필요는 있지만, 그 방법을 세세하게 가르쳐주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행한 방법이며 현재 닛산에서 행하고 있는 방법이다.

 

  사원들의 업적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들은 포상이나 승격 등의 인센티브 제도를 두고 있다. 이 제도는 필달목표와 노력목표의 달성도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만들어, 사정(査定)이나 포상금, 승격 등은 반드시 이 기준에 따라 시행한다.

 

  인센티브 제도에는 매니저에 대한 스톡 옵션, 개인목표 내지 회사목표의 달성도에 따라 결정되는 보너스 제도, 연령도 성별도 국적도 묻지 않고 업적과 능력만 기준으로 한 승격도 포함돼 있다. 매니저에 대한 스톡옵션과 보너스는 영업이익과 매출액에 직결된다.

 

  어느 레벨 이상의 관리직의 승격에 대해서는, 국내외를 불문하고 반드시 인사자문위원회에서 후보자의 공헌도가 검토된다. 검토에 필히 요구되는 것은 [회사의 성장, 수익, 코스트절감에 대한 공헌도]이다. 후보자가 과거 수년간 달성한 업적, 또는 회사에 가져온 특정의 공헌도가 주요 검토기준이 된다.

 

  성과주의 경영시스템은 사원들이 각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건설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원들에게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이해시키고 최선을 다하게 하기 위해 적절한 훈련을 받을 기회를 준다면, 그들은 장애를 극복하여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자신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도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독자 중에 자동차업계에서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젊은이가 있다면, 닛산을 고려해줬으면 좋겠다. 다만, 느긋한 기분의 좋은 직장에서 매일 동일한 업무를 반복하고 세월이 가면 직위도 올라가는 회사를 바란다면 닛산을 권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직도 공사 중이어서 수많은 난제를 안고 있긴 해도 창조성이나 혁신성을 마음껏 발휘하고, 여러 가지 과업을 달성할 기회를 주는 회사를 찾는다면 꼭 닛산에 와야 할 것이다. 닛산에는 기술력도 있고, 디자이너들도 있으며, 이름도 나 있고, 모든 것이 있다. 그러나 아직 공사 중에 있고, 부활하는 도중에 있으며, 러노와의 얼라이언스를 강화하는 과정 중에 있다.

 

  닛산에서는, 야심과 능력이 있고 일에 몰두하며 어떤 종류의 리스크라도 감수할 의욕이 있는 인재들에게는 커리어를 높이는 기회가 넉넉하게 주어진다. 이곳에서는 낡은 관습을 구축하고 새로운 자세나 새로운 매니지먼트 패턴을 받아들이는 사원들과 함께 일 할 수 있다.

 

  닛산에는 타사로부터의 인재초빙을 방해하는 요소가 전혀 없다. 변혁의 시기, 위기의 시기에는 외국인에 한정되지 않는 아웃사이더 쪽이 우위에 섰던 경우가 많다. 이렇다 할 경험도 업적도 없는 아웃사이더는 논외지만, 사람들과 경쟁할 힘이 몸에 베어있다면, 오히려 아웃사이더 쪽이 변혁에 더 잘 이바지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닛산에 오면 대망의 기회를 찾아 미지의 바다로 배를 저어 나가는 옛 탐험가들처럼 될 것이다. 리스크는 크지만, 인생이나 업무에 대한 수많은 담보물을 마음껏 음미할 수 있다. 완벽을 추구해도 도달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을 지는 몰라도, 추구하는 과정에서 보답이 생길 것이다.

 

  여기서 독자들에게 전직(轉職)을 권할 생각은 아니지만, 오랜 직업인생 가운데서 한 두 번의 진로변경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물론 근무하고 있는 회사를 그만둔다는 결단이 간단하게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나도 미쉐린을 사직할 때에는 몹시 마음이 흔들렸다. 나는 미쉐린에 그냥 머물러 있었다 면 결국 동일한 업무를 반복하게 되고, 도전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도 한정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책하는 마음은 있었으며, 사임하기로 결심할 때까지 긴 시간 자문자답을 반복하게 되었다. 물론 올바른 결단을 내렸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고 있다.

 

  사람과 회사의 관계는 부부관계와 같은 것이다. 외부에서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관계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당사자뿐이다. 때문에 당사자가 결단했을 때는 그것을 존중하는 수밖에 없다. 남을지, 떠날지, 그것은 본인의 문제이다. 사표를 써내든

 

또는 그냥 있든 옆에서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닛산에 온 후 2년 반정도 사이에 닛산을 떠난 사람들도 있지만, 그 숫자는 그 이전과 거의 같다. 떠나는 사람들의 사임 이유 대부분은, 독립하여 회사를 설립한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사업을 일으키기 위해 사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닛산에 머물러줬으면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성공을 빌 수밖에 없다. 용기 있는 결단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런 결단을 존중한다. 그들의 선택이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전체에 있어 올바른 결단이기를 바랄 뿐이다.

 


 


 

경험의 심리적 시간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회사 업적에 얼마만큼 공헌할 수 있는가가 게임의 전부다. 이 게임에 과감하게 도전하여 많은 공헌을 세운 사람에게는 장래 큰 기회를 주어야 한다. 나는 연령, 성별, 출신을 묻지 않으며, 높은 잠재능력을 가지고 기록적인 업적을 남긴 유능한 인재들에게는 항상 경영자로의 길을 개척해 주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닛산자동차 사장에 40대의 일본인이 취임했다해도 나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의 업무에 대한 탁월한 능력, 노하우, 성격은 필요하지만, 그러한 자질은 과거의 업적이나 공헌도를 보면 일목요연하게 판단할 수 있다. 공헌도 이외에서 판단하려한다면 출신대학이나 특정 그룹과의 관계와 같은 주관적인 기준을 갖고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과거의 업적과 회사에 대한 공헌도에 기준을 두어 판단하면 주관적 요소가 줄어들며 당연히 납득할 수 있는 인선이 될 수 있다.

 

  가장 가혹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했는가 하는 것이 인물평가의 유효한 방법 중하나이다. 극도로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능력은 실증됐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인재에 대해서는 점점 책임이 무거운 지위를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또는 유리한 상황에서 밖에 업적을 올리지 못한다면, 그런 능력에는 의문이 남는다.

 

  중시해야하는 것은 연령이나 경험이 아니라 공헌도와 업적의 탁월성이다. 만약 [관리직 연령]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근속연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경험의 밀도, 여러 상황 아래서의 공헌도, 특히 곤란한 상황에서의 공헌도에 근거하여 판단해야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심리적 시간과 물리적 시간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특별히 달성한 것도 배운 것도 머리에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은 공허한 수주간 내지 수개월간이 있는가 하면, 수분 또는 수일에 지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몇 년에 해당하는 농밀한 시간도 있다.

 

  비즈니스도 이와 같이 심각한 상황 아래서 체험한 수년이 확실하게 값어치가 있다. 그것은 아무 어려운 일도 없는 정상적인 상황의 10년이나 15년에 해당된다. 어려움이 많은 곳에 부임할 기회를 주고 있는 회사에서 일한다면 밀도가 농밀한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런 경험은 그 사람의 능력을 높이고 최고의 책임을 부과함으로써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시켜 줄 것이다.

 


 


 

닛산 드림 팀

 


 

  닛산에 오자마자 나는 사원들에게 지금 닛산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의견을 피력해보도록 요청했다. 새로운 경영위원회에 대해 그리고 새로 러노에서 온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들의 불안이나 기대를 알려고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나는 사원들로부터 받은 모든 코멘트를 훑어보았다. 그랬더니 프랑스인들이 온 것에 당혹해하기도 하고, [코스트 킬러]라는 이명(異名)을 가진 카롤로스 곤이 공장폐쇄와 해고를 강행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을 느끼기도 하고, 닛산은 과연 이번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며 우려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도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다.

 

  몇 백 개의 코멘트 중에 인상에 남는 의견이 하나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다른 자동차 메이커에는 회사의 특색을 형성하는 리더가 있다. 예컨대 도요타의 경우 창업자와 그 일족의 특색을 보여주는 단지 도요타만의 것이 있다. 혼다에도 창업자인 혼다(本田宗一郞)의 강한 개성이 숨쉬고 있다. 그러나 닛산에는 사원들 전원이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

 

  이 코멘트가 가슴을 푹 찔러왔다. 닛산에도 자랑할 만한 역사와 선배들이 있지만, 그러나 닛산이라고 하는 강한 개성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확실히 이 지적대로 밖에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현재 닛산은 코어 벨류(core value)의 재구축에 전력을 쏟고 있으며, 코어 벨류에 기초한 우선 순위를 결정하고 있다. 닛산은 강력한 리더십 아래 한 발짝씩 닛산의 특색을 한창 만들고 있는 중이며, 머지 않아 닛산 사원들의 자동차업계에 대한 공헌이 평가받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회사의 개성이 떠오를 것이다.

 

  2000년도에 나는 “오토모티브 뉴스”의 “올해의 경영자(executive of the year)”로 선정됐으며 이듬해인 2001년에도 선정됐다. 2년 연속수상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말하고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매년 이 잡지는 CEO 외에 구매, 제조, 마케팅 등의 부문별 최우수 리더도 선정해, 소위 말하는 자동차업계의 매니지먼트 [드림 팀]을 발표하고 있다. 2001년의 구매부문 최고 경영자에는 닛산의 구매부문 및 유럽부문 통괄 부사장인 고에다유끼(小枝至), 제조부문 최고경영자에는 북미 닛산의 생산담당 부사장인 에미르 핫산이 선정되었다. 이것은 내가 2년 연속으로 “올해의 경영자”로 선정된 것보다 훨씬 대단한 것으로 생각한다.

 

  2001년의 수상직후, 나는 일단의 미국 닛산사원들과 대화를 했다. 그들은 전원 미국인으로서 그 중에는 근속 30년 가까이 되는 사원도 있었다. 어떤 사원은 이렇게 말했다. [닛산에 근무한 이래 우리 회사에서 “오토모티브 뉴스”의 드림팀에 선정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이제 그런 사람들이 나왔으니, 이것은 닛산이 자동차업계에 공헌하고 있다는 인식이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닛산사원이 회사에 대해 자신을 되찾아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원들은 회사의 코어 벨류와 업적에 자극 받아 자기 자신과 회사에 부가가치를 가져다주려 하고 있다. 닛산의 개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러한 사원들인 것이다.

 

  그런데, 내가 CEO에 취임한 후 현재 공석이 되고 있는 COO에 누구를 앉히느냐는 문제인데,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일본인일지 미국인일지 프랑스인일지, 남성일지 여성일지 묻는다면, 국적이나 성별은 업적이나 회사에 대한 공헌도라고 하는 기본적인 기준에 비한다면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경쟁이 치열한 글로벌 시장에서 닛산을 이끌어 가는데 필요한 리더십을 갖춘 적임자를 선임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계속 시간이 걸리고 있으며, 일본인이 선임될 가능성도 충분히 높다.

 


 


 

V 부 - 가족.세계

 


 

25 - 부모로서

 


 

세간에서 알고 있는 카롤로스 곤의 모습과,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아이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에는 아름다운 눈을 한, 엄격성이 전혀 없는 그의 모습이 찍혀있다. 매스컴에서는 터프가이처럼 취급되고 있지만, 실제의 그는 신문에 난 사진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다. 그는 아이들에게는 철저히 다정하게 대하고 있다. - 리타 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닛산 리바이벌 플랜 작성에 착수했던 초기엔 해결책을 찾아내야 하는 문제가 산적해 하루 종일 회의나 토론에 쫓기는 나날이 계속됐다. 그러나 아무리 눈코 뜰 새 없이 바빠도 가족과 보내는 시간만은 반드시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우리 집에는 4명의 아이들이 있다. 케롤라인은 브라질에서 태어났고, 나딘과 마야와 앤소니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네 아이의 교육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엄마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내가 그 태반을 담당한다 하더라도, 나도 집에 있을 때는 가능한 한 도와줄 작정이다. 아버지로서 아이들과 함께 보내고 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쏟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내가 어렸을 때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게임 등의 놀이를 한 것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일단 귀가하면 절대로 집에서 회사 일을 하는 법이 없다. 편지를 개봉하거나 보고서를 읽는다거나 하지 않으며, e메일 체크도 않는다. 회사 일은 모두 사무실에 두고 온다. 리타도 아이들도 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바로 그 순간부터 가족시간이 시작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이들은 나를 닛산 사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동차에 태워 쇼핑을 하러 나가면 무언가 사서 주는 친구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함께 외출할 때에는 [아빠, 이 진과 셔츠를 입어요.]라고 하며, 아이들이 옷을 갖고 나온다. 그리고 앤소니는 재빨리 같은 무늬의 색깔과 옷으로 갈아입고 나선다. 나는 별로 진을 걸치지 않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다르다. 아이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주로 영어로 대화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영어를 쓰고, 프랑스에 돌아갔을 때도 아이들의 영어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영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에서는 친구들과의 대화는 프랑스어로 했기 때문에 집에서는 영어로 대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일본에 와서는, 인터네셔널 스쿨의 친구들과는 거의 영어로 대화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거꾸로 가능한 한 프랑스어도 사용하려하고 있다. 새로이 학교에 일본인 친구들도 있기 때문에 일본어에도 익숙해지려는 것 같다.

 


 


 

판단력을 기른다

 


 

  아이들, 특히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는 애정과 배려가 필요하며, 안정감이나 가정과 학교의 일관성도 확보해 주어야 한다.

 

  나의 직장관계로 우리들은 도합 4회의 이사를 경험했으며 그 가운데 3회는 아이들에게 전학(轉學)을 강요하게 되었다. 사는 고장을 옮긴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큰 부담을 지운다. 나도 아이들도 몇 번인가의 경험 때문에 이웃이나 학교 친구들과 이별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아이들에게 안정되고 자리잡힌 가정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리타와 나는 육아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자녀들 교육에는 자녀들의 판단력을 길러주는 기초를 만드는 일도 포함돼 있다. 그걸 위해서는 사고력을 길러줌과 동시에 그들이 무엇인가를 판단할 때 확고한 기준이 되도록 강한 신념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기준은, 예컨대 죽음이나 질병, 성공, 불상사라고 하는, 인생에 영향을 주는 상황이 가져다주는 감정을 아이들과 공유함으로써 배양될 수 있다. 아이들과 이러한 감정을 공유함으로써 그들이 상황을 해석하고 상황에 대처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

 

  말하기는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어렵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감정적으로 대하기 쉽지만,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도리를 알기 쉽게 말해줘야 한다. 부모는 이런 점을 마음에 새겨서 행동해야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소유물도 애완용동물도 아닌 어엿한 인간이다. 부모에게는 그들을 길러주고, 이윽고 집을 나갈 시기가 와서 그들의 인생을 살아 가야할 때를 위한 준비를 해 줄 책임이 있다.

 

  아이들에게 자신과 꼭 같은 신념이나 가치관을 기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아이들이 차츰 자기 자신의 인생을 찾고 탐구해가도록 이끌어가야 한다. 인생의 여행길에 오를 때에 아이들이 뛰어난 판단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어떤지는, 어떤 의미에서 양육방식의 문제와 직결된다.

 

  리타와 나는, 부모가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이 전해지도록 아이들에게 친밀하게 대하는 한편으로, 그들이 스스로 중요한 것을 판단하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하고 있으며, 이 2가지 접촉방법의 균형을 맞추는 것에 마음을 쓰고 있다. 과보호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아이들의 생활에 세세하게 말참견을 하지 않는다. 부모라면 당연히 아이들이 항상 올바른 일을 하도록 원하고 있지만, 어떤 일도 스스로 하도록 맡겨둔다. 우리들은 아이들의 재량에 맡기는 영역을 주면서 어드바이스나 지도를 하고 있다. 아이들은 언젠가는 자립해 사회로 나갈 것이며, 우리들은 그 때를 대비해 부모로서의 역할을 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 교육에 대해 

 


 

  가정이나 학교에서의 교육은 아이들에게 일생동안 영향을 주는 중요한 것이다. 때문에 우리들은 아이들 교육에 특히 신경을 쓰고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가정에서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어긋나서는 안 된다. 양자의 격차가 지나치게 크면 아이들이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혼란은 자신감 상실이나 회의주의적인 경향을 불러오며 불안감을 가지게 할 것이다.

 

  아이들이 다닐 학교를 선택할 때 우리들은 3가지 점에 유의하고 있다. 첫 번째는 아이들에게 일정한 안정감을 주는 학교라야 한다. 우리들은 학생들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학교나, 가르치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평판을 듣는 학교는 피한다. 두 번째는 교육수준이 높아야한다. 학생들에게 엄격한 요구를 하고 최고의 힘을 발휘하도록 하는 교사가 있는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세 번째는 도덕교육과 가치관을 중시하는 학교여야 한다. 리타도 나도 아이들 교육에는 특히 이런 점을 빠뜨리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우스 캐롤라이너주의 그린빌에서는, 적은 수의 학생들을 뽑아 자상하게 가르치고 있는 사립학교에 아이들을 보냈다. 빠리에서는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다니는 공립의 인터네셔널 스쿨에 다녔다. 빠리에서 학교를 선택할 때 고려해야할 것은 아이들의 영어실력을 유지하는 일과 다문화(多文化) 속에서의 교육환경이었다. 일본에서는, 뛰어난 교육수준을 유지하면서 가정과 모순되지 않는 도덕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학교를 택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기본적인 학문을 전수할 필요가 있다. 교육수준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 교육은 논리적 합리적 사고력을 배양하며, 학생들에게 자기자신을 명확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쳐야한다.

 

  그러나 초.중등학교 레벨에서는 공부만이 아니라 선악이나 진위(眞僞)를 분간하는 것, 자신을 다스리는 것, 노력하는 것, 그리고 노력한 결과에서 배우는 것도 가르쳐야한다. 아이들이 하루의 태반을 보내는 학교가 이런 종류의 교육을 태만히 하면, 아이들은 인생에 필요한 준비를 할 수가 없다.

 

  교사는 학식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훌륭해야 한다. 아이들이 정규 수업에서 배우는 것은 교육전체로 말하면 아주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 교사가 충돌이나 실패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사소한 실수와 몇 번이나 반복하는 실수는 책임 있는 어른이라야만 구별하여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아이들이나 어른이 하는 짓을 그대로 따라 행동하기 쉬우며 그것이 어느 샌가 몸에 배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아이들의 장래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들은 그들이 무사히, 자기답게 성장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우리들처럼 됐으면 좋겠다던가,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물, 또는 그들이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상적인 인물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들에게 말하고싶은 것은 이것뿐이다.

 

  [우리들은 그저 평범한 인간이며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우리들은 우연히 너희들의 부모가 되었으며, 될 수 있는 대로 너희들을 이끌어가고 도와주려 하고 있다. 너희들은 언젠가는 독립한다. 우리들은 그 날을 위해 너희들 스스로를 발전시켜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유일하게 나를 실망시킬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을 때이다. 나는 그들이 능력을 100% 발휘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26 - 사고(思考).언어.국가

 


 

  곤씨는 국적이라는 개념을 초월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국가의식을 계속 가져왔다. 때문에 우리들의 견해가 그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은 무리가 아닌 것이다. 때때로 우리들이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경우에 곤씨가 이 문제를 조금 더 이해해주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 大久保宣夫(닛산 이사겸 부사장)

 


 


 

젓가락질과 매니지먼트

 


 

  1999년 여름, NRP 작성 때문에 격무가 계속되고 있었을 무렵의 어느 날, 나는 회사의 카페테리아에서 일식(日食) 점심을 들고 있었다. 일본에 와서부터 일본음식은 젓가락으로 먹기로 결심한 터라 그날도 나는 젓가락과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젓가락을 사용하는 나의 식사방법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젓가락의 아래쪽을 잡고 어떻게 해서든지 밥이나 반찬을 집으려고 애를 썼다.

 

  식사 중에 내 맞은 편 좌석에는 닛산의 전 사장이며 당시에는 고문으로 있던 츠지 요시후미(?義文)가 앉아서 나의 서투르기 짝이 없는 젓가락질을 보고 있었다.

 

  [미스터 곤, 젓가락을 요렇게 잡아 보세요.]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가 올바르게 잡는 방법을 시범해 주는 것을 보고 있었다. [자, 요런 식으로요!]

 

  그 때는, 고문이라는 사람이 짐짓 바르게 젓가락 쥐는 방법을 지도한다고 나서는 것이 어딘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당시 나의 머리 속에는 기한이 임박한 NRP 작성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사항들이 소용돌이를 치고 있어 젓가락 사용방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는데, 츠지 고문은 끈기 있게 젓가락 사용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의 말대로 해 보았더니 과연 꽤 우아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내 사무실에 그의 비서가 꾸러미 하나를 갖고 왔다. 열어 본즉 젓가락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그림이 들어있었다. 처음에 나는 생경한 마음으로 그 그림에다 눈길을 줬다. 당시 우리들은 회사재건의 발판을 마련하느라 그야말로 천신만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사장들은 쉴새없이 난항을 전하는 뉴스를 갖고 사무실 문을 들락거리고, 구조조정 코스트가 점점 늘어나 닛산은 당연히 부채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고, 개혁은 생각한대로 신속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었으며, 흑자에 대한 전망은 암울하기만 했다. 그런 판국에 책상 위에는 젓가락 올바르게 잡는 방법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된 설명서가 놓여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본인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하겠지만, 그는 인생의 교훈을 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즉 날마다 어떤 문제에 직면하여 분투하려 한다면 일상생활의 디테일을 소홀히 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교훈이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일본인 사회 속에서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일본에서는 가능한 한 일본인들과 다름없이 행동하고 싶어하는 속마음을 내보이고싶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젓가락을 바로 잡는 것은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 사건에서 나는, 식사 때에 젓가락 잡는 법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회사를 이끌어 가는 데 있어 어떠한 사소한 것일지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사고(思考)와 언어

 


 

  나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구사하고 있는 언어의 수를 알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언어로도 충분히 사고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이것은 까다로운 문제이다. 사고 프로세스와 언어를 연결시키는 것은 하나의 언어밖에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 의견이지만(언어학자의 견해는 틀림없이 다를 것이다), 실제의 경우에 사람들은 언어로 사고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사고가 몸에 두르고 있는 의상과 같은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언어는 사고에 형태와 감촉을 주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회의에서 이런 경험을 한다. 이야기에 열중하며 메모를 하는데, 나중에 보면, 그 당시에는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영어와 프랑스어가 혼재돼 있다. 물론 거기에는 참석자가 무슨 언어로 이야기하는가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그 사람이 폴투칼어나 스페인어로 이야기한다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언어로 메모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어였다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처음부터 메모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사고의 형태와 감촉 - 영어든 프랑스어든, 다른 어떤 언어이든 - 이 아주 중요하다. 예컨대 스피치를 할 때, 나는 누군가에게 원고를 준비시켜 받지만, 우선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전해 초고를 써 받아 거기에 손질을 하는데, 한자 한획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의미와 형태와 감촉을 부여한다.

 

  나에게는 어떤 언어로 사고하느냐는 문제는 요점을 벗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언어에 관해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할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 말을 할 때 당신이 선택하는 그 언어로 얼마만큼 의사가 잘 전달됩니까? 메시지는 틀림없이 전달됩니까? 더욱 중요한 것입니까? 당신의 말속에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일본어에 대해

 


 

  유감스런 일이지만, 실제로 일본어 공부를 시작한 것은 일본에 오고 나서이다. 현 단계로서는 간단한 회화 정도를 할 수 있을 정도다. 일본어를 습득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초보의 일본어로는 사장직무도 수행할 수 없고, 업무에 대한 이야기도 할 수 없으며, 회의를 개최할 수도 없다.

 

  그러나 닛산에서 통역을 두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나에게는 매우 불만스런 일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어떤 의미에서 직접적인 것이기 때문에 중간에 무언가를 개재시키면 그 힘이 상실된다. 일본어로 말을 걸어오는데 이해하지 못해 나는 욕구불만에 빠진다.

 

  앞서 술회했듯이 나는, 언어라고 하는 것은 사고(思考)의 의상과 같은 것으로 알고 있다. 사고가 다른 언어로 통역되면 의상에 닿는 손의 감촉이 얼마간 사라질 위험성이 있다. 통역 받는 측 사람에게는 통역자가 전해주는 것 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에는 표정이나 몸놀림 손놀림, 그리고 문화적 측면도 포함되지만, 아무리 숙련된 통역자라도 메시지 전체를 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닛산 사장이라는 입장에서 통역자를 개입시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들이 내가 말한 내용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통역의 역할은 중요하다. 언어력의 수준에 차이가 있으면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오해를 가능한 한 없애기 위해 미묘한 표현법이나 까다로운 표현법은 피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간결하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마음을 쓰고 있다. 통역자의 업무는 메시지의 본질적인 요소를 명확하게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안되면 나의 메시지가 전해진다는 보증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통역이 필요한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인내력을 필요로 한다. 나와 같이 단도직입으로 문제의 핵심에 들어가는 타입의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답변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 통역을 통하는 것은 인내력을 시험받고있는 것 같은 것이며, 상대인 일본인에게도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 지금은 꽤 적응이 되었지만, 통역을 개입시킴으로서 업무의 스피드가 떨어지는 것은 틀림없다.

 

  최근 일본인 청중을 상대로 일본어로 쓰여진 강연원고를 읽는 시험에 도전해봤다. 물론 사전에 어떻게 발음하는지, 어디에 액센트를 두는지 지도를 받았지만, 청중들에게는 통역을 통하는 것보다 잘 전달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방법은 시간도 절약되는 데다가 나의 일본어 공부도 된다.

 

  언제가 될지 짐작도 안되지만, 언젠가는 일본어로 나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날이 올 것이다.

 


 


 

역사에 대한 흥미와 교사에의 꿈

 


 

  어릴 때 장래 무엇이 될 것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역사교사라고 대답했다. 열 네 살 무렵에는 고대사, 현대사, 각국역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역사에 관한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당시의 동급생들로부터는 역사 아니면 지리 전문가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을 들었다. 수학이나 과학 성적도 나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역사공부를 좋아했다.

 

  그 무렵 외조부모도, 전에 살았던 서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주변 지역에 살고있는 부족이나 그들의 습관, 언어, 생활방법 등에 대해 재미있게 얘기해 주었다. 나이지리아의 2개의 큰 부족, 이슬람교도인 하우사족, 기독교도인 이보족 사이의 전쟁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었다. 전쟁이나 유혈참사에 얽힌 이야기는 어린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중세 유럽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읽고 있었던 나는 스스로 십자군을 지휘하여 싸우러 가는 장면을 상상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외조부모가 들려준 이야기는 문화의 충돌로 인간의 목숨이나 재능을 쓸모 없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교훈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세계는 여러 종류의 인간, 문화, 언어로 가득 찬 복잡한 장소이지만, 그 복잡성의 껍질을 벗겨내면, 인간은 누구에게도 미래에 대해 꼭 같이 꿈을 갖고, 꼭 같이 불안을 안고 있다고 하는 단순한 진실이 거기에 있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기에는 그 무렵의 나는 아직 너무 어렸다.

 

  언젠가는 교실 가득히 학생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된 것은 예수회계통 학교에서 만났던 선생님의 영향도 있다. 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아이들의 공부나 생활에 끼치는 교사의 영향력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제일 존경했던 분들은 가르치는 일에 진심으로 열중한 선생님들이었다. 그들은 학생들의 면학에 주의력을 지속시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학생들을 깨우치는 그들의 힘은 유례가 드문 귀중한 것이었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에는 정년이 없다. 따라서 나에게도 언젠가는 교사가 되는 날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어느 해가 되든, 또는 비즈니스 세계는 충분히 숙달했다고 생각하는 시기가 와서 사람들을 가르칠 입장이 되었을 때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대단한 양식이 될 것이다.

 

  가르치는 일과 교육은 나에게는 지금도 중요하다. 나는 여러 의미에서 교사를 존경하고 있으며 많은 대학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현재 나는 사우스 캐롤라이너 대학 자문위원회의 일원이며, 레바논의 베이루트에 있는 프랑스계 대학, 산 요세프 대학과 모교인 에꼬르 데 미누의 이사도 겸하고 있다.

 

  지금까지 교육이라는 것과 인연을 끊어본 적이 없다. 사실, 기업의 최고경영자로서의 업무에도 많든 적든 배우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는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나라

 


 

  나는 아무튼 바쁘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일이 있는 한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현재로서는 은퇴하여 유유자적하게 인생을 즐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 아내인 리타도 내가 일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체념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여러 번의 이사를 경험했다. 여섯 살 때는 브라질을 떠나 레바논으로 갔다. 그 후 몇 번인가 브라질을 방문했지만 이미 정주자로는 간주되지 않았다. 베이루트에서는 열 여섯 살이 될 때까지 10년간 살았다. 그 후 혼자서 빠리로 옮겼고, 1971년부터 78년까지 빠리에서 보냈다. 그리고 미쉐린에 입사하고부터는 일차 브라질로 되돌아가 근무했고, 다음에는 미국으로 갔으며, 러노로 옮기면서 빠리로 되돌아갔고, 지금은 도쿄서 생활하고 있다.

 

  여러 나라에서 생활한 탓일까, 곧잘 이런 식의 질문을 받는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브라질인, 레바논인, 프랑스인, 미국인, 또는 일본인? 자신의 나라라고 느끼고 있는 나라는 어느 나라입니까? 가족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습니까? 자녀들은 자신들이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한 답은, 리타도 나도 전혀 꼭 같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장소를 전부 합친 것이 우리들의 나라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카롤로스도 나도, 지금까지 살아온 고장 전체의 가장 좋은 부문을 우리들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매스컴은 꼭 나를 [브라질 출생의 레바논계]라고 쓰고 있다. 확실히 그러하며, 나는 두 나라에 있는 자신의 뿌리를 중요시하고 있다. 다른 남미제국과 마찬가지로 브라질의 경우도 일단 브라질인으로 태어나면 그후 어떤 나라에서 살더라도,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얻더라도, 한평생 내내 브라질인이다. 한편 나는 프랑스 시민권을 갖고 있으며, 프랑스 여권으로 여행하지만, 실제의 경우 나는 특정한 국적을 의식하지 않는다.

 

  나는 어디가 쾌적한가, 어디가 관대한가 라는 기준으로 생각한다. 같은 브라질에서도 포르토 벨리요나 다른 고장에서 살았더라면 쾌적하다고는 느끼지 않을 테지만, 리오데자네이로를 쾌적한 곳으로 느끼는 것은 양친이 살고 있고, 많은 추억이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면 가족과 보냈던 추억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그린빌과의 인연이다. 아래 세 아이들은 이 곳에서 출생하였고, 리타도 강한 귀속감을 갖고 있다. 빠리가 기분 좋은 곳인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학창시절을 보낸 곳이라는 점, 또한 최고로 즐겁고 풍요로운 독신생활을 체험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도쿄는 일본인들이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주고 있기 때문에 살아가기에 대단히 편한 느낌이다.

 

  우리들이 일본에 살기 시작한 첫해에 아내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여보, 당신을 일본으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해도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닛산과 일본에 흠뻑 빠져 있어, 내가 말해 주지 않으면 자신이 외국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 아내도 일본을 좋아하고 있다. 일본에 오기 전에는, 일본인들은 외국인들에 대해 그다지 친절하지 않는 민족으로 외국인들에게는 살기 좋은 곳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는데, 실제로 와서 보더니 놀라는 것 같았다. 이런 곳이라면 일생 살아가도 좋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아이들도 일본을 대단히 좋아하고 있다. 어떤 나라든지 부모가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이들도 금방 순응하는 것이다. 자주 이사를 해야하는 부모로서는 아이들이 생활한 고장 모든 곳에 뿌리가 있다고 생각해 주면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기분이 좋은 곳이 어딘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실제로 살아왔던 모든 장소, 그 가운데서도 일본이라고 답할 것이다. 나는 다양한 문화를 갖고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그러하다. 내 속에는 여러 가지 문화나 장소가 결부돼 있다. 그래서 자신의 아이들을 일방적으로 역성들지 않는 것처럼 어디가 제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디든 똑 같이 애착이 가며, 비교하는 따위의 짓은 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나 장소가 있느냐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어느 곳이든 나름대로 특별하며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이다.

 

  [우리 고향이라고 느끼는 것은 어딘가?]고 묻는다면, [가족이 있는 곳]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에필로그 - 나의 투쟁은 지금부터다

 


 

  현재 닛산 리바이벌 플랜(NRP)은 반환점을 통과, 마지막 연도가 되는 3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2000년도 결산보고에서 발표한 것처럼, 닛산은 ER(응급실)로부터 회복실로 옮겼지만 아직도 완전히 회복됐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환자의 체온이나 맥박, 혈압 등을 체크하고 치료성과를 확인하여 건강한 몸으로 되돌려놓는 의사 같은 사람이다.

 

  절박한 형편에 처하게 되면 사람들은 생활을 대폭적으로 개선하고,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확실히 구별할 수 있게 된다. 닛산 사람들은 바로 이 과정을 거치고 있다. 그들은 삶을 연장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아차리고,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구별하는, 일련의 우선 순위를 확립했다.

 

  훗날 되돌아보면, 러노와의 제휴나 경영의 다문화 접근, 글로벌한 사업전개 등은 닛산의 역사에 남는 중요한 한 페이지가 될 것이다. 닛산은 격동의 수년을 지난 후 일본 자동차 메이커 가운데서도 이색적인 존재가 되었다.

 

  회사 내에서는 나에게 회사를 완치시킬 힘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하는 소리도 없지 않으며, 결국 종래 방법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경향이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일본인들 가운데서도 닛산의 부활은 일본인 사장의 손으로 수행하는 것이 좋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사실상 닛산의 부활은 일본 닛산사원들의 손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이드라인과 우선 순위와 프로세스를 확립했고, 그것을 그들이 실행한 결과가 2000년도 결산보고인 것이다.

 

  닛산은 1999년이래 먼길을 걸어왔다. 확실히 곤란이 있었지만 극복도 있었던 개운한 여정이기도 했다.

 


 

  나는 수없이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런 결단은 내 맘속의 강한 신념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면 안되었다. 닛산에는 누적된 채무와 손실, 그리고 점점 줄어드는 시장 점유율이 짓누르기 시작하던 과거와 단호하게 결별하는 시기가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나는 다음 3가지를 꼭 달성해야할 최대 목표로 내걸었으며,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달성하지 못할 경우에는 책임을 지고 닛산을 떠날 결심을 하였다. 즉, (1) 2000년도에 흑자화를 달성하는 것, (2) 2002년도에 영업이익률을 최소한 4.5%로 올리는 것, (3) 2002년도에 유이자부채를 7천억엔 이하로 삭감하는 것의 3가지이다.

 

  계획의 신뢰성을 담보하고, 회사 안팎으로 내가 NRP에 전력투구한다고 하는 의기를 보인 이상 이 공약은 중요했다. 톱에 있는 사람이 궁극적인 희생을 치를 각오라면,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면 사임한다.]는 말밖에는 없는 것이다.

 

  나에게는 닛산의 과거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그러나 나는 NRP의 신뢰성을 호소하기 위해 감히 [나 자신의 직위를 건다.]고 하는 표현을 한 것이다. 실제로는 업무상의 책임을 뛰어넘어 나 자신의 경력과 미래 모두를 담보로 내 건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나의 닛산에 대한 공약은 큰 신뢰성을 획득했다. [과연 정말로 닛산을 부활시킬 수 있을까?]며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의 우려와 회의적인 시각을 완전히 불식시킬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 억제시킬 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지금 틀림없이 부활 도상에 있는 것이다.

 


 

  NRP에 착수함으로써 사원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그들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동정을 금할 수 없지만, 닛산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를 최고경영책임자로 선택한 것이다. 닛산의 요구는 회사의 부흥과 도산 위기로부터의 탈출이었다. 감정이나 고뇌를 반영한 의사결정 등은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회사의 세이프가드로서 신뢰했기 때문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기에 프로의식과는 별개다. 감정노출은 사장이 할 일이 아니다. 나의 제일 큰 책무는, 닛산이 생명을 연장하고 성장하여 수익을 올리는 것이며, 이것이 주주나 딜러, 하청업자, 고객, 사원, 그리고 닛산에 매달려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바라고 있는 업무인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계속 존중해 준 것은, 나라면 닛산을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내가 어떤 기분이든, 초밥을 먹든, 가라오께로 가든, 그들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리더십을 기대하고 있고, 나는 그 기대에 응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려운 결단을 피한다면 본래의 임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 된다. 나는 처음부터, 자신의 임무는 하나 뿐이다, 닛산을 신속하게 그리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로 세우는 것뿐이다 는 말을 계속해왔다. 이 일이 완료되면 [가혹하지만은 않은 면]을 보여줄 여유도 생기겠지만, 이 일을 달성하기 위해 매진하는 과정에서는 사원들에게도, 러노에게도, 하청업자들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경영방법에 대해서 외부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비판이 쏟아졌다. [여기는 일본이다. 일본적인 방법을 알아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문화차이의 문제가 아니다. 이 임무를 수행하는 데는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진지한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내 방법은 기존 경영자들에게는 혐오감을 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관점에서 내 방법을 비난하는 것은 엉뚱하게 헛다리짚고 있는 것이라고 반론하고싶다. 비난하는 경영자들은 틀림없이 타협하고 핵심 비즈니스에서 제외돼도 문제없을 만큼의 이익을 올리고 있을 것이다.

 

  손실을 계속 내면서 시장점유율이 계속 감소하고 있는 회사는 기본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올바른 경영의 기본으로 되돌아갔다. 닛산을 통괄하고 있는 입장에 있는 나는 회사를 부와 가치창조의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회사의 성장을 보장함으로써 사원들의 모티베이션을 유지하고 주주들을 즐겁게 하며, 고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책임을 진지하게 수행해나가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NRP에 착수한 것이며, 닛산을 흑자기업으로 만들 수 없으면 사임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런 선언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자신의 신념에 충실히 응하는 것뿐이다. 사장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에 집중하여 끝까지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만일 실패할 때에는 그 결과를 받아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회사든 맡은 바 책임을 등한히 하고 있는 경영자들을 보면 나는 불쾌해진다. 나는 항상 자신의 책임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나 자신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고 있다. [임무를 망각하지 마라. 임무를 망각하면 일을 해도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없다면 어떤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배신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나 자신의 장래에 대해 말들이 많은데, 내가 닛산을 떠나 러노의 CEO로 취임한다는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각국의 매스컴들은 곤씨가 조건이 좋은 GM이나 포드의 제의를 받고 있을 것이라고 까지 보도하고 있으며, 일본 매스컴들은 나의 후임에 일본인 경영자가 취임할 가능성에 대해 쓰고 있다.

 

  루이 슈바이쳐는 은퇴 후 카롤로스 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줄 의향이라고 밝혔지만, 설령 내가 러노로 옮긴다고 해도 닛산과의 고리가 단절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매스컴이 나의 경력을 주의 깊게 살폈다면 한가지 확실한 원칙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곤씨는 일을 미완인체 남겨두지 않는다. 완수할 때까지는 반드시 자신의 눈으로 계속 지켜본다.]는 점이다.

 

  사장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했을 때 비로소 회사를 떠날 수 있다. 이것이 나의 철학이다. 닛산에서는 아직도 목표의 절반밖에 달성하지 못하고 있으며, 최소한 모든 것을 달성할 때까지 나는 남아있을 예정이다. 닛산이 영속적인 수익증가체제를 확보하게될 때까지 돕는 일 이외 지금 나에게는 아무런 계획도 없다.

 


 


 

감사의 글

 


 

  이 책은 내가 처음으로 쓴 것이다. 돌이켜 보면, 책을 쓰는 작업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내가 직면한 갖가지 도전과 같이 크로스 펑크셔널(cross functional)한 업무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시간과 인내, 그리고 많은 헌신적인 사람들의 도움이 있어서 마침내 해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내밀지도 않고 무대 뒤에서 도와주었는데 나는 결코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위해 많은 친구들과 가족, 그리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미쉐린이나 러노의 옛 동료들이 기꺼이 귀중한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나의 기억이나 기록의 애매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 덕택이다. 극히 개인적인 사고 내지 나와는 다른 시각에서 각각의 견해나 생각을 말해줌으로써 그들은 이 책의 완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 셈이다.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특히 무엇보다도 나와 나의 경영 스타일에 대해 기탄 없이 성실한 의견을 제시하며 협력해 준 닛산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표해야겠다. 그들과는 매일 얼굴을 마주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은 다 함께 [닛산에 다시금 성장과 수익을 가져온다]고 하는 같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동료들이다.

 

  바쁜 스케쥴 속에서 책을 쓴다고 하는 어려운 일을 강력하게 지원해 준 미겔 리봐스미크씨, 카미트 J.카베르씨, 다이아몬드사 편집부의 미다츠(御立英史)씨에게도 심심한 감사를 올린다. 그들의 진력이 없었다면 이 책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끝으로 투철한 비평안을 가진 사람이며, 내가 가장 신뢰하고 있는 파트너인 아내 리타의 이름을 거론하고 싶다. 그녀는 항상 나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왔다. 그녀와 아이들, 케롤라인, 나딘, 마야, 앤소니의 애정에, 그리고 그들을 사랑할 기회가 주어진 것에 한없이 감사한다.

 


 

              2001년 10월, 도쿄에서

 

                     카롤로스 곤

 


 


 

일본판 역자후기

 


 

  위기의 시대에 요구되는 것은 강력한 리더십이다. 이 책은 닛산재건의 주역인 카롤로스 곤씨가 자기자신의 경영 스타일이 형성된 족적을 밝힌 것이다. 위기의 상황에서 발휘된 그의 리더십의 실상 속에는 극히 보편적 내지 현세적인 가치가 들어 있다.

 

  근년에 비즈니스 세계 뿐 아니라 경제, 정치, 행정, 교육, 의료, 가족 등 모든 부문에서 제도피로라고도 할 수 있는 폐해가 분출하고 있다. 오늘 날, [불타오르는 갑판]과 [크로스 펑크셔널리티(cross functionality)의 결여]라고 하는, 이 책의 두 가지 키워드와 전연 무관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카롤로스 곤이 경력을 쌓아오는 동안 경험적으로 배양된 개념인 [크로스 펑크셔널리티]라는 것은 그 자체가 해결책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문제해결 가능성을 개척하는 방법론이다. 상황이 가혹하면 가혹할수록 운용하는 측의 모티베이션이 높아지고, 올바른 해결책을 도출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에서 용기를 얻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물론 크로스 펑크셔널리티만 도입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리더의 자질이다.

 

  카롤로스 곤의 리더십은 덮어놓고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유의 것은 아니고, 사람들이 스스로 진로를 찾아내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자질은, 숫자로 마구 밀어붙이는 코스트 킬러, 냉철한 민완이라고 하는 기성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미쉐린 브라질, 미쉐린 북미, 러노, 닛산이라고 하는, 기업문화도 나라도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그가 예외 없이 경영수완을 성공리에 발휘할 수 있었던 요인은, 기성개념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기성개념이라고 하는 것을 갖지 않고 눈앞의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대응하는, 유연하고 탄력성 있는 그 자세에 있다. 그처럼 냉철하고 투명한 아웃사이더, 새로운 국제인이 글로벌 비즈니스를 이끌어나가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 책은 원고집필과 번역을 동시에 진행하는 스릴 있는 과정을 거쳐 완성됐다. 저자가 가필과 수정원고를 계속 보내온 것으로 보아, 가정에 일거리를 갖고 가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하고 있는 그도 이번만큼은 예외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문장은 그의 인품 그대로 힘차고 명쾌하고 심플하며, 시종 사실을 성실하게 전하려하는 자세를 보였다. 번역은 [메시지의 본질적인 요소를 명확히 전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했다.

 

  여러 가지 도움을 준 저자 카롤로스 곤씨, 집필협력자인 미겔 리봐스미크씨와 카밋트 카베르씨, 그리고 다이아몬드사의 미다츠씨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2001년 10월

 


 

               나까가와 하루꼬(中川治子)

 


 


 


 

저자소개

 


 

카롤로스 곤(Carlos Ghon)

 

1954년 3월 9일 브라질에서 출생. 부친은 레바논계 브라질인이며 모친은 레바논계 프랑스인이다. 에꼬르 폴리테크니끄(國立理工科學校), 에꼬르 데 민(國立鑛山學校)을 졸업, 1978년 미쉐린 입사. 1985년, 미쉐린 브라질 COO(최고집행 책임자). 1989년, 미쉐린 북미 CEO(최고경영책임자). 1996년 러노 상급부사장. 1999년 6월, 닛산자동차 COO. 2000년 6월, 닛산 사장겸 COO. 2001년 6월부터 사장겸 CEO. 현재 부인과 4명의 자녀와 함께 도쿄에서 생활하고 있다.

 


 

역자소개

 


 

中川治子(나까가와 하루꼬)

 

무사시(武藏)대학 문학부 일본문화학과 졸업. 미술공예에서 환경문제, 멘탈세러비, 비즈니스 모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적의 번역에 종사. 역서로 “EBay 옥션전략]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