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일본역사교과서의 韓國史 記述과 韓國史像

이강기 2015. 9. 11. 11:44

 

일본(日本) 역사교과서(歷史敎科書)의 한국사(韓國史) 기술(記述)과 한국사상(韓國史像)
-현행(現行) 1986년도판(年度版) 고등학교(高等學校) 일본사(日本史) 교과서(敎科書)를 중심(中心)으로-
 
이명화(李明花)*
 
1. 머 리 말
   
2. 일본(日本)의 교과서(敎科書) 검정(檢定) 실태
     
3. 고대(古代) 한국관계(韓國關係) 기술(記述)
  1) 미생문화(彌生文化)와 비조문화(飛鳥文化)
  2)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와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
     
4. 중세(中世) 한국관계(韓國關係) 기술(記述)
  1) 몽고(蒙古)와 왜구(倭寇)
  2) 임진왜란(壬辰倭亂)
5. 근대(近代) 한국관계(韓國關係) 기술(記述)
  1) 정한론(征韓論)과 강화도수호조약(江華島修好條約)
  2) 임오군변(壬午軍變)과 갑신정변(甲申政變)
  3) 방곡령(防穀令)·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과 한일합병(韓日合倂)
  4) 3·1운동과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5) 일본(日本)의 대륙침략(大陸侵略)과 강제징용(强制徵用)
     
6. 맺 음 말
   
   
 
1. 머리말
 
  일본(日本)은 고대(古代)로부터 한국(韓國)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성장(成長), 발전(發展)한 나라이다. 두 나라는 상대국(相對國)에 영향을 주면서 서로의 역사(歷史)를 발전(發展)시켜 왔으므로 각자의 국사(國史)를 기술할 때 상대국의 역사를 제외시킨 채 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근대(近代)로 들어오면서 한 나라는 제국주의(帝國主義) 대열에 끼여 식민지(植民地) 통치국(統治國)으로서, 또 한 나라는 제국주의(帝國主義)의 지배(支配)를 받은 피통치(被統治)의 식민지(植民地)로서의 역사(歷史)를 갖게 되었다. 이제 35년간의 식민지시대(植民地時代)는 막을 내려 많은 시간이 흘렀고, 각자 독립국(獨立國)으로서 공존(共存)하고 있으나 현재도 식민지시대(植民地時代)의 후유증은 여전하며 양국민 간에도 사이에 가로 막힌 장벽을 헐지 못하고 있다. 서로가 반성해야 할 점이 많으나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일본인들의 망언은 한국민의 감정을 계속 자극함으로써 감정 차원에서의 극복이 좀처럼 쉽지 않다. 아니 오히려 일본인(日本人)들의 한국사왜곡(韓國史歪曲)의 정도가 심각하여 한국(韓國)이 일본에 대해 너무 우호적이고 해이해진 것이 아닌가라는 반성(反省)마저도 일고 있다.
  일본인(日本人)들의 오늘날 역사상(歷史像)은 전전(戰前)에 형성된 아시아 제민족(諸民族)들에 대한 탈아론적(脫亞論的) 우월의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고, 특히 한국인(韓國人)에 대한 편견(偏見)과 왜곡(歪曲)된 역사상(歷史像)은 꽤나 그 뿌리가 깊어 단순히 고쳐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일본(日本)의 한국인(韓國人)에 대한 우월 의식을 넘어선 편견과 멸시감의 조성은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화(近代化)에 성공하고, 곧 이어 아시아 대륙(大陸)으로 침략(侵略)을 개시하였던 그들의 전쟁 역사(戰爭歷史)와 때를 같이 한다. 이 과정에서 상대민족(相對民族)에 대한 편견과 멸시감을 불어 넣고, '야만 상태에서 문명으로의 구원'이라는 침략(侵略)의 당위성을 찾은 것이다. 이를 주입시키는 도구로 학교교육(學校敎育)이 이용되었고 정신 교육(精神敎育)을 통한 철저한 세뇌화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대물림 되어 체질화(體質化)되었다.
  전전(戰前)의 한국사(韓國史)는 일본(日本) 관학파(官學派) 사학자(史學者)들의 의도적인 연구로, 정체사관(停滯史觀)·타율사관(他律史觀)이 그 전체상이었다. 이제 민주주의(民主主義) 교육(敎育)이 실시되고 있으나 국민의식(國民意識) 저변에 콘크리이트되어 자리잡은 왜곡상(歪曲像)은 좀처럼 시정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전(戰前)에 일본인(日本人)들의 역사의식(歷史意識)과 사관(史觀)은1) 역사학자(歷史學者)들에 의하여 많은 문제가 제기되고 비판을 받았으며, 아울러 역사학계(歷史學界)의 발전(發展)은 한국사(韓國史)가 내재적(內在的)으로 주체적(主體的)으로 발전해 온 역사(歷史)과정이었음을 밝혀 냄으로써 식민주의사관(植民主義史觀)이 얼마나 허구에 찬 왜곡된 역사상(歷史像)이었는가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노력은 한국(韓國)에서만 아니라 일본학계(日本學界)에서도 진행되었다.일본(日本)의 한국사연구자(韓國史硏究者)들은 일본(日本)의 한국역사(韓國歷史) 연구 자세와 그것이 교육에 미쳤던 영향에 대해 반성하고, 한국사학(韓國史學)의 올바른 평가와 정립을 위해 힘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노력은 한국과 한국민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학문적 진실과 양심에 따른 것이며, 일본역사학(日本歷史學)의 발전(發展)을 위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가장 활발한 활동은 기전외(旗田巍)를 리더로 한 일련의 소수 역사학자들로서, 이들 일본인(日本人) 학자(學者)들과 재일(在日) 한국인(韓國人) 학자(學者)들이 의욕적인 연구활동(硏究活動)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은 과거의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 성과(成果)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특히 왜곡된 한국관(韓國觀)의 시정(是正)과 새로운 한국사상(韓國史像)을 정립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2) 특히 강재언(姜在彦)·김달수(金達壽)·이진희(李進熙) 등 재일한국인(在日韓國人) 역사학자(歷史學者)들은 왜곡(歪曲)된 한국사(韓國史)를 바로잡기 위해 의욕적인 연구 활동을 계속, 1975년 이래《삼천리(三千里)》잡지를 통해 한국관(韓國觀)을 새롭게 정립시키고 있다.3) 아울러 한국사 연구 못지 않게 민족적(民族的) 차별(差別)과 편견(偏見)의 극복을 위해 일선의 교육자(敎育者)들도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日本) 역사(歷史) 교과서(敎科書)의 왜곡(歪曲) 문제는 검정(檢定) 시비와 함께 일본(日本) 국내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로부터도 거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교과서(敎科書)의 기술이 학문연구(學問硏究) 수준에 못미치고 있으며, 특히 한국(韓國) 관계 기술은 연구성과(硏究成果)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채 전전(戰前)의 역사관(歷史觀)에서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교과서(敎科書) 파동을 몇 차례 거치면서 약간의 어휘 변화와 내용의 첨가가 가해졌을 뿐 전전(戰前)의 황국사관(皇國史觀)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교과서(敎科書) 곳곳에서 여전히 대국중심(大國中心), 지배자중심(支配者中心), 강자중심적(强者中心的) 세계관(世界觀)이 엿보이며. 전전(戰前)의 진화론적(進化論的)인 약육강식(弱肉强食)·적자생존(敵者生存)의 자연 법칙(自然 法則)을 인간역사(人間歷史)에 그대로 적용하는 사관(史觀)에 머물러 있음을 본다. 이러한 세계관(世界觀) 형성에 한국(韓國)에 대한 멸시(蔑視)가 이용되어 건전한 세계관(世界觀) 형성에 장애를 주고 있으며 이에 더더욱 한국사상(韓國史像)의 왜곡(歪曲)은 쉽게 시정되지 않는 것이다.4)
  본고(本稿)는 당대의 교육 경향은 바로 그 시대의 바로미터라는 이해 안에서, 현행 1986년판(年版) 일본(日本) 고등학교(高等學校) 일본사(日本史) 교과서(敎科書)에서의 한국(韓國) 관계 기술을 분석해 본 것이다. 먼저 일본(日本)의 지배(支配) 권력(權力)의 역사상(歷史像)이 국민(國民) 교육(敎育)에 어떠한 식으로 힘을 미치고 있는가를 일본(日本) 교과서(敎科書) 검정(檢定) 과정을 통해 보고, 이어 한국 관계 기술을 통하여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황국사관(皇國史觀)이 어떻게 기술되어 교과서(敎科書)에 나타나 있는가를 지적하고자 한다.
  본고의 전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문제되는 한국 관계 기술을 표로 만들어 각 교과서를 함께 비교할 수 있도록 항목별로 나열해 보았다. 그리고 교과서 문장은 되도록 그대로 직역하였고 문제가 되는 부분을 지칭할 때는 고유로 매긴 번호로써 기재하였다. 본고를 작성하는데 참고된 교과서는 모두 11책으로 자유서방(自由書房),《요설일본의 역사(要說日本の歷史)》와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상설일본사(詳說日本史)》만이 '85년판(年版)이고 모두’86년판(年版) 교과서(敎科書)이다.
 
 
 
 
2. 일본(日本)의 교과서(敎科書) 검정(檢定)
 
  1986년 6월 국제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 '교과서(敎科書) 왜곡(歪曲) 사건(事件)'은 일본의 침략을 받은 경험이 있는 아시아 제국(諸國)의 항의와 비판을 받았음은 물론, 일본 국내의 역사학자, 교육자들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성명을 통해 문부성(文部省)의 교과서 검정에서 오는 역사 왜곡을 합심하여 규탄하였다. 이 성명에서 역사학자들과 교육자들은 일본인의 침략의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역사를 왜곡하여 일본 국가를 고의로 미화하려고 하며, 구미(歐美)·일본(日本) 중심의 역사관(歷史觀)에 입각하여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민들의 내재적(內在的) 역사 발전의 인식을 방해하고 편견과 우월감을 보여 주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규탄한 것이다.5) 이처럼 그 파문이 국내외적으로 드높아지자 '정부 책임으로 고친다'는 정부 견해를 발표하여6) 파란은 일단락되었다.
  이처럼 일본의 교과서 왜곡 문제를 야기시킨 교과서 검정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그 실정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검정이란 민간(民間) 출판사에서 집필진에 의뢰해서 교과서가 집필되면 문부성(文部省)에서 이를 검토하여 교과서로서 적합한지의 여부를 심사하는 것으로, 그 과정은 일체 밀실(密室)에서 비공개로 진행되어 매년 검정 때마다 사회과(社會科) 역사분야(歷史分野)는 시비(是非)가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현 일본의 사회과 역사과목은 초·중·고등학교 과정에서 교육하며,7) 역사과 교재로서 교과서는 검정(檢定)에 합격한 것만을 일선 학교에서 교과서로 채택할 수 있다. 검정(檢定)은 '교과용도서(敎科用圖書) 검정조사심의회(檢定調査審議會)'와 문부성(文部省)의 '교과서(敎科書) 조사관(調査官)'이 하도록 되어 있다. 조사관(調査官)은 47명(86년도 현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에 의해 교과서 심사가 이루어지고 심의회(審議會)는 이를 감독하는 감독관의 기능을 하는 모임이다.
  일본에서는 각 학교에서 어떠한 교과서를 선정할 것인가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보 제공의 목적으로, 보통 매년 7월 1일부터 10일간 교과서 전시회가 열린다. 출판사에서는 이 전시회가 있기 전인 봄, 가을에 출판사 이름과 집필자 이름이 가려진 '흰표지 본'이라 부르는 원고본을 문부성(文部省)에 제출하게 된다. 제출된 원고본을 교과서 조사관이 검토하고 심의회의 의견을 듣는데, 여기서 검토된 것은 '조건지시(條件指示)'라 하여 A,B 의견으로 나누어 시정을 지시한다. A의 의견은 반드시 개정해야 한다는 명령으로서의 수정 의견이며, B의견은 고쳐 쓰는 편이 좋겠다고 요청하는 개선 의견인데, 이를 지시할 때 편집자와 집필자를 불러 밀실(密室)에서 비공개적으로 하도록 되어 있다. 지시된 사항을 근거로 집필자들은 다시 개필(改筆)하여 '내사본(內査本)'을 제출하고 이것이 검정에 통과하면 교과서 전시회용의 견본이 작성되어 전시회에 전시되는 것이다.
  이 검정 과정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철저히 비밀로 진행되며 만일 수정 의견과 개선 의견에 승복하지 않고 원고본 대로의 기술을 고집할 경우 불합격 처분을 받게 된다.8) 이렇게 되면 책을 출판하지 못하게 되므로 출판사에 전적으로 불리해져, 대부분은 시정 의견을 그대로 반영한 교과서로서 출판되는 것이다.
  그러면 좀 더 교과서 검정의 실태를 확실히 인식하기 위하여 실교출판(實敎出版) 발행, 고등학교《일본사(日本史)》의 경우를 보도록 하자. 집필자 직목효차랑(直木孝次郎)은 검정 과정을 겪으면서 다음과 같이 검정 실태를 폭로하였다.9)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원고본에 천황(天皇) 사후(死後)라 기술한 부분을 몰후(沒後)로 수정하도록 지시하고 천황에 대해서는 죽음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대화개신(大化改新)'에 대한 원고본에는 "이 조(詔)는 일부 쓰여진 것만이 아니고《일본서기(日本書記)》편자에 의한 위작(僞作)이라 하여 대화개신(大化改新) 그 자체의 존재를 의심하는 설이 있다"라는 기술에 대해 수정 의견에서 중요한 설이 아니므로 삭제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즉《일본서기(日本書記)》의 기술을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의견은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이다.
  한일관계 부분 중 4∼5세기경 기술에서 원고본은 "대화(大和)정권은 변한(弁韓)의 땅을 임나(任那)라 칭하고 그 일부를 세력하에 두려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개선 의견에서 "그 일부"를 빼고 "세력하에 두었다"로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 한 부분을 놓고 볼 때도 단어 하나에서도 일본의 세력을 과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조사관(調査官)의 역사상(歷史像)을 보여 주고 있다 하겠다.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에 대한 기술을 보면, 본래 원고본 각주에서 "비문(碑文) 중 왜(倭)가 신묘년(辛卯年)(391)에 조선에 침입하여 백제·신라를 복속시켰다고 해석한 부분이 있지만 그를 포함하여 종래의 해석에 잘못이 있다는 설(說)과 비문(碑文)이 명치(明治)시대에 일본인 손에 의해 고쳐져 변하였다라는 설(說)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수정 의견에서는 "그를 포함하여" 이하를 삭제하라고 지시, 결국 교과서에는 "오랜 풍화로 읽을 수 없는 부분이 여러 군데 있으며, 비문 해석에 여러 설이 있다"라는 막연한 표현으로 기술하게 되었다.
  근대사 부분에 오면 교과서 조사관들의 왜곡된 역사상은 한층 더 발휘된다.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과 '3·1운동'부분을 보면, 원고본에 "혹독한 헌병 정치 아래에서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의 명목으로 농민으로부터 토지 몰수가 행해진 조선에서도 독립기운이 강해져 1919년 3월 1일 경성(京城)에서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짖는 집회, 데모가 일어나 곧 바로 조선 전토에 파급되었다."라고 기술한 데에 대한 수정 의견으로 "혹독한 무단정치(武斷政治) 아래서 실시한 토지조사사업 결과 대부분 농민이 토지에 관한 권리를 잃어버린 조선에서도 독립의 기운이 높아져 1919년 3월 1일 경성(京城)에서 조선 독립을 선언한 집회가 일어나 데모와 폭동이 조선 전토에 파급되었다."라고 개정토록 하였다. 다른 부분을 차치하고라도 민족의 신성한 독립 운동을 '폭동'이라는 말로 대치하도록 지시하고 있는 문부성(文部省) 조사관(調査官)의 수정 의견에서 그들의 역사인식(歷史認識)과 역사상의 정체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원고본에 "일본 군대와 경찰의 탄압으로 조선인 7,000인 이상이 살해되고 다수의 교회가 소실되었다."라고 한 기술에 대하여 조사관(調査官)은 조선인 7,000인 이상이 살해되었다는 확실한 사료가 없다는 의견을 달아 결국 "군대·경찰에 의해 폭동은 엄하게 탄압되었다."로 개정되었다. 이처럼 그들의 침략상을 은폐하려는 기만에 찬 수정 의견은 이뿐만 아니다.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당시 한국인(韓國人) 학살 기술 부분의 원고본에는 "조선인 약6,000인, 중국인 약 200인이 살해되었다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살해된 사람의 수는 근거가 확실치 않다는 수정 의견을 제시, 결국 "조선인 수천인 중에 중국인도 살해되었다."로 개정, 문제의 요점을 흐리고 있다.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신사참배(神社參拜)에 대한 부분에서는 원고본에 "조선, 대만에서도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이 강행되었다."라는 기술의 각주에서 "조선에서는 조선인의 민족적 독자성을 부정하고 일본어의 강요, 성명을 일본식으로 고치는 창씨개명(創氏改名)·신사(神社)의 설치와 참배 강제 등을 행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조사관(調査官)은 일본어를 강요한 것은 학교 교육에서 뿐이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은 강제한 것이 아니다. 그 증거로 약 2할의 사람이 이에 응하지 않았고, 또한 창씨개명(創氏改名)은 민족성을 빼앗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근대적(近代的) 사회(社會)를 조성하려는 즉 동성불혼(同姓不婚)의 구폐를 바로 잡으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등 어불성설(語不成說)의 구실을 붙여 개정할 것을 지시하였다. 명(名)만이 아닌 씨성(氏姓)까지 고치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은 한국인(韓國人)에게는 조상의 뼈를 팔아 넘기는 일과 다름없는 모욕으로 2할의 사람이 이에 응하지 않은 것은 강제가 아니었다는 구실이 될 수 없으며 씨명(氏名)을 목숨보다 중히 여겼던 한국인의 저항이 그만큼 극렬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서 해석했어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번잡스러운 감은 있으나 직접 교과서를 집필하고 문부성(文部省)의 검정(檢定)을 받아 집필 개정을 부당하게 강요당하였던 교과서 집필 저자의 폭로의 글을 통해 교과서 검정(檢定) 실태(實態)를 살펴 보았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교과서(敎科書) 검정(檢定)이란 일본인의 침략(侵略)의 역사(歷史)를 은폐하고 침략주의(侵略主義)에 정당성(正當性)을 부여 하고 있는 문부성(文部省)의 저의가 적용되는 과정인 것이다. 이제 이러한 의도를 올바로 직시하여, 큰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을 것 같은 단어 하나 표현 하나가 피교육자에게 영향을 주고 나아가 국민의식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다. 바로 이로부터 왜곡된 역사 해석과 역사상이 은연 중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한 예를 더 들어 82년 6월에 외교 문제로까지 확대되었었던 '침략(侵略)인가 진출(進出)인가'하는 문제를 놓고 보자. 일본의 중국으로의 침략(侵略)을 검정 불합격의 압력 아래에서 강제에 의해 침략(侵略)이라는 글귀를 없애고 진출(進出)로 수정 지시하였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던 것이다. 문부성(文部省)이 침략이라는 단어를 굳이 피하려는 논거를 보면, 첫째, 19세기 열강의 중국 '진출'과 중·일전쟁에서 일본의 '침략'과의 용어를 통일한다라는 점과 둘째, 역사 교육에서 객관적 태도가 중요함에 비추어 '진출(進出)'·'진공(進攻)' 등 보다 객관적인 표현을 사용함이 교과서에 어울린다는 점을 들고 있다.10) 일본 문부성의 용어 교체는 그다지 문제 삼지 않아도 될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진출(進出)이라는 용어에는 국가나 민족이 버려지고 지역 등의 비인격적인 대상만이 목적어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상대에 대한 침략의 의지나 행위의 주체인 일본이나 일본인들이 소실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의 대륙 침략이 한국인과 중국인에 자행된 범죄 행위가 아니라 일본 민족이 대륙으로 진출하여 민족의 팽창을 이룩했다라는 해석으로 유도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는 단순한 검정 문제에서 제기된 과거 역사 기술의 왜곡만이 아닌, 현재와 미래와 연결되고 있는 중대 문제인 것이다.
 
 
 
 
3. 고대(古代) 한국관계(韓圈關係) 기술(記述)
 

  고대(古代) 일본사(日本史)에서의 한국에 관한 기술은 한(韓)·일(日)간의 문화(文化) 교류사로서 간략히 취급되고 있는데 일본사 교과서 안에서 한국사 기술은 한정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관계사 안에서 한정된 기술이나마 피교육자들에게 어떠한 역사상을 투영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이제 일본사 교과서에서의 고대(古代) 부분에 등장하는 한국사 관계를 항목별로 나누어 검토하려 한다.

1) 미생문화(彌生文化)와 비조문화(飛鳥文化)

  도작(稻作) 농경이 한반도에서 시작된 것은 기원전 6∼5세기 경이며 일본은 3세기 가량 늦은 기원전 3세기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의 도작(稻作)은 그 원류는 중국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오랜동안 재배 기술과 경험이 충분히 성숙되어 한국화된 후 일본 열도에 전해진 것이다. 일본의 도작 농경이 한반도 도작 농경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은 고고학(古考學) 발굴 유물을 통해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11)
  한편 금속 문화의 경우를 보면, 한국은 늦어도 기원전 8∼7세기에 청동기 문화를 형성하여, 이미 비파형 동검·동부·다뉴세문경이 등장하고, 6∼5세기로 들어오면 비파형 동검은 세형 동검으로 발전하고 소동탁(小銅鐸)을 비롯한 각종 청동제 제기(祭器)가 등장하고 있다.12)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의 농경 문화와 금속 문화는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는 한군현(漢郡縣)과는 무관하게 일찍부터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사 교과서에서 다뤄지고 있는 미생문화(彌生文化)는 한문화(漢文化)의 전적인 파급에 영향을 받았고 한반도(韓半島)는 대륙문화(大陸文化)를 단순히 일본에 전달해 준 교량의 역할만을 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전반적 추세이다.(1,3,6,7,9,10) 즉 일본의 수도(水稻) 경작과 금속기 전래는 한사군(漢四郡)이 한반도(韓半島)에 설치되면서 대륙(大陸)의 문화가 전래되고 이것이 한반도라는 문화 경유지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 발전적인 문화로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는 식이다. 이러한 교과서 중에도 도래인(渡來人)의 문화 발전의 기여를 적극적으로 위치시키는 기술도 있지만(2,6,7) 미생문화(彌生文化)가 한국 문화의 영향으로 발전했다는 기술을 할 때는 '이다'의 확정 사실을 서술하는 표현이 아닌, '생각된다' '추측된다'라는 식의 간접 표현을 쓰고 있다.(2,4,10,11) 한편 도작(稻作) 농업이 종래부터 일본에 거주한 원주민들에 의해 시작되어 번성하였고 여기에 한국의 도래인(渡來人)의 역할이 적지 않다라는 식의 각주를 달고 있는데(10), 이는 도작(稻作) 농업이 일본 민족의 독자적인 문화이며 도래인은 다되어 있는 기반위에 참여만 하였다는 식의 해석으로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무시한 왜곡 기술이라 하겠다.

◇ 비조문화(飛鳥文化)

1
《개정판신일본사(改訂版新日本史)》
일학습사(第一學習社)
  도작(稻作)은 중국 대륙 남부에서 조선 반도 남부 들을 거쳐 우리 나라(일본)에 전해졌으며, 금속기는 처음에는 조선제가 현저하다가 이윽고 중국으로부터도 가져왔다. 이러한 대륙문화는 기술이나 실물만의 전래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도 전래하여 새로운 문화 형성에 역할이 컸다.
2
《삼성당일본사(三省堂日本史)》
삼성당(三省堂)
  일본에 전해진 농업은 중국 중남부·산동반도·조선남부 등에서 일어난 수도(水稻) 농업이었다. 또한 미생문화(彌生文化) 시대에 사용되었던 석호정(石扈丁)과 편인석부(片石斧) 등도 중국·조선에서 널리 볼 수 있는 형식 이다. 후에 도작(稻作)과 동시에 직물(織物) 기술도 전해했다. 이를 직접 일본에 전한 것은 주로 조선 남부에서 집단적으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조선 남부의 것과 같은 형식의 지석묘가 북구주(北九州)에서 자주 발견되고, 서일본 미생시대(彌生時代) 전기 묘지에서 발견되는 인골의 평균 신장이 승문(繩文)시대 인골과 비교하여 크고, 조선인 신장에 가까운 것 등에서도 엿볼 수 있다.
3
《일본의 역사(日本の歷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기원전 3세기쯤 일본 열도에는 구주(九州) 북부에 수도(水稻) 경작과 금속기·미생토기(彌生土器) 사용을 특징으로 한 미생문화(彌生文化)가 성립하였다. 그것은 강력한 한민족(漢民族) 세력이 동방에 펼쳐지는 시기였으며, 아마도 이 전후로 조선 반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도래하여 종래 거주하고 있던 사람과 혼혈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4
《일본사개정판(日本史改訂版)》
실교출판(實敎出版)
  기원전 3세기에 중국에서는 진(秦)이 국가를 통일하고, 이어 일어난 한(漢)은 강력한 국가제도를 확립함과 동시에 조선에도 낙랑군 등의 4군을 설치하여 세력을 신장하였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변동 가운데 일본에는 기원전 3∼2세기경 수도농업(水稻農業)과 금석기 사용을 특색으로 한 새로운 문화가 구주(九州) 북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수도(水稻) 농업은 중국의 중·남부에서는 일찍부터 시작되었으나 이 기술을 직접 일본에 전파시킨 것은 조선 남부에서 온 도래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조선 남부와 같은 형식의 지석묘(支石墓)가 구주(九州)북부에 있는 것과 미생시대(彌生時代) 전기 묘지에서 승문(繩文)시대인 보다도 신장이 큰 인골이 발견된 것이 이를 시사하고 있다.
5
《고교일본사(高校日本史)》
삼성당(三省堂)
  기원전 3∼2세기경 수도(水稻) 경작이 북구주(北九州)에 전해졌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이미 진(秦)에 이어 한(漢)이 강대한 통일국가를 세우고 있었다. 그 앞선 문화는 점차 주변 제지역으로 번져 점차 중국 대륙의 남부와 조선의 문화와 함께 일본 열도로 전해졌다.
6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학교도서주식회사(學校圖書株式會社)
  …기원전 202년에 중국을 통일한 한(漢)은 무제(武帝)시대에 조선을 정복하고 낙랑군 이하의 4군을 두었다. 조선인은 그 남부에서 도작(稻作)을 발달시키고 일본에 금속기와 도작(稻作)을 전해 주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금속기 문화와 도작(稻作)을 중심으로 한 미생문화(彌生文化)는 먼저 북구주(北九州)에 전해졌다. 그에따라 조선 남부에 분포한 지석묘가 북구주(北九州)에도 퍼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산구현(山口縣) 토정(土井)ケ빈(濱)의 미생문화(彌生文化) 전기의 집단 묘지에서는 조선인에 가깝게 보이는 체격의 인골이 상당히 발견되고 있다. 후기 승문(繩文) 시대인은 조선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선진문화(先進文化)를 받아들이는 한편, 북구주(北九州)에서 미생식(彌生式)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등, 이주자의 영향을 받으면서 새로운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하였다.
7
《개정일본사(改訂日本史)》
동경서적주식회사(東京書籍株式會社)
  …한은 조선반도 북부에 낙랑군 등의 4군을 두고 지배하였다. 중국의 높은 문화의 영향을 받아 주변 제민족은 여러 특색을 띤 문화를 낳았다. 일본에서도 기원전 3∼2세기경 주로 조선남부에서 구주(九州)북부에 도래한 사람들에 의하여 도작(稻作)과 금속기의 기술이 전해지고 새로운 문화가 일어 났다.
  (주) 이 무렵은 조선 남부와 같은 형식의 청동기와 지석묘가 구주(九州)북부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또한 도작의 전파에 대해서 중국 남부 지역에서 직접 구주(九州)로의 경로를 거쳤다고 하는 설이 있다.
8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청수서원(淸水書院)
  …기원전 108년 한(漢)의 무제가 조선에 낙랑군 등의 직할 식민지 4군(郡)을 두었던 사실도 있어 한(漢)문화가 점차 일본에도 파급되었다.…미생문화(彌生文化)의 기본적인 특색은 외래 문화인 수도(水稻) 경작이 행해지고 청동기와 철기의 금속기가 사용되었던 점이다.
  (주) 중국과 조선 반도 남부에서 재배되어 한파에 견디는 용으로 개량된 품종이 경작 기술과 농업 의례와 함께 일본에 전해졌다.
9
《요설일본의 역사(要說日本の歷史)》
자유서방(自由書房)
  …이 시대에도 마제 석기가 사용되고 있지만 중국에서 발달하여 조선 반도를 거쳐 새로이 전래된 금속기가 점차 이에 대신하였다.
  (주) 한왕조(漢王朝)는 기원전 108년 조선 반도에도 세력을 뼏쳐 낙랑국 등을 설치하엿으므로 여기에 한문화(漢文化)가 전래되어 그 영향이 일본에도 미쳤던 것이다. 정련(精鍊), 단철(鍛鐵) 기술은 한대 이전에 화중(華中) 지방에서 조선반도 남부에 전해졌고 그것이 일본에 전해졌다는 설도 있다.
10
《신일본사(新日本史)》
삼성당(三省堂)
  …한민족의 세력이 그 주변에 미쳐 일본에서도 그 문화 영향이 미쳤다. 기원전 3∼2세기 전후하여 비로소 금속기 사용과 수전(水田) 경작을 주로한 농업 기술이 전해져 쌀 생산에 기초를 둔 농업 사회가 발생하였다.
  (주) 도작(稻作) 농업의 번성은 일본 열도에 종래부터 거주한 사람들에 의하여 일어났지만, 한편, 조선 남부에서 농업 기술을 갖고 도래한 사람들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11
《상설일본사(詳說日本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미생문화(彌生文化)는 거의 동시에 재래한 청동기·철기·직물 등 중국에 기원을 둔 요소가 많다. 그러나 구주(九州) 북부의 지석묘가 조선 남부의 것과 같은 계통의 것이라는 점에서 생각하면, 미생문화(彌生文化)는 조선 남부에서 형성된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성립된 것이라 추측된다.
  (주) 청동기는 주로 무기, 제기, 장신구로서 사용되었다. 동검, 동모, 동과는 처음에 실용 무기로 조선에서 재래되었는데, 점차 편평(扁平)에서 대형물이 국내에서 생산되었다.

◇ 비조문화(飛鳥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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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신일본사(改訂版新日本史)》
제일학습사(第一學習社)
  대화(大和)조정이 조선 반도에 거점을 두고, 또한 중국 남조에 사자(使者)를 보낸 것에 의하여 대륙의 앞선 문화가 우리나라(일본)에 유입되었다. 고분의 부장품에서 그러한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한자가 우리나라에 사용된 실례(實例)는 5세기부터 나타나고 있다. 6세기에는 불교가 백제에서 대화(大和)조정에 전래되고, 유교를 비롯한 여러 학문·기술도 대륙에서 전래되었다. 대륙 문화를 수용할 때 대륙에서 온 도래인의 역할이 컸으며 율령국가가 되면서 그 자손은 중용되었다.
  비조문화(飛鳥文化)는중국의 남북조, 조선 반도의 백제·고구려의 앞선 문화를 우리나라(일본)에 도입하여 국내에 우수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것도 대륙에서 온 도래인의 힘에 의한 바가 크다. 비조문화(飛鳥文化)는 그리이스·서아시아 등지의 영향도 볼 수 있다.
2
《삼성당일본사(三省堂日本史)》
삼성당(三省堂)
  대화(大和) 정권은 조선·중국의 우수한 문화, 특히 일본과 정치적 결속이 강한 백제 문화를 열심히 받아들였다. 그 때문에 조선의 기술자와 농민이 도래하여 무기와 농구·공구 등의 철기와 토기의 생산, 양잠과 견직물, 마구·장신구 등의 금속 공예, 말의 사육 등 각종 기술이 전해졌다.
  …6세기에 전해진 불교는 중앙 호족과 도래인을 중심으로 퍼졌지만, 7세기 전반에는 대화(大和)의 비조(飛鳥)지방과 반구(斑鳩) 지방을 중심으로, 불교를 기조로 한 비조문화(飛鳥文化)가 번성하였다.…소아씨(蘇我氏)가 건립한 비조사(飛鳥寺)(법흥사(法興寺))를 시작으로 많은 사원이 세워졌다.
  (주) 비조사(飛鳥寺)는 발굴에 의하면 고구려 등에서 보이는 가람(伽藍)배치를 가졌고 백제계의 기와가 사용되고 있는 점이 통한다.
3
《일본의 역사(日本の歷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조선 반도나 중국과의 교섭이 빈번해지고 대륙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이들의 대부분은 반도에서 전란을 피해 온 사람들이지만 조정은 자진해서 그들을 받아들였다. 5세기 까지 진씨(秦氏)·한씨(漢氏)가 도래하고, 5세기말에는 백제가 고구려의 압박을 받자 그곳 지역 사람들이 도래하였다. 이들 사람들을 조정은 귀화인(歸化人)이라 불렀다. 이들은 기내(畿內) 주변에 거주하던 조정의 문필(文筆)·재정(財政)들의 행정실무, 기직(機織)·단야(鍛冶)·무기(武器) 제조·제도(製陶)·토목·건축 등 생산 부분과 동물 사육 등 분야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6세기가 되면 중국 남조의 새로운 문화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 백제왕은 남조의 유교·의(醫)·역(易)·력(曆) 등의 학문과 함께 불교를 우리나라(일본)에 전하였다.
  …이 시기의 문화는 중국 남북조와 조선 3국의 문화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비조문화(飛鳥文化)라고 불려진다. 이 시대 사원의 당탑(堂塔)은 고구려·백제와 공통성이 강하고 불상으로는 안작조(鞍作鳥)가 세웠다는 법융사(法隆寺) 금당의 석가 3존상은 중국 북조와 고구려의 기법을 전하고, 중궁사(中宮寺)의 반가사유상은 남조와 백제계 기법을 전하고 있다. 또한 광융사(廣隆寺)의 반가사유상은 직접 신라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4
《일본사개정판(日本史改訂版)》
실교출판(實敎出版)
  4세기 말경부터 조선과의 교섭이 빈번해지면서 조선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도래인)이 늘어나 기직(機織)·금속 공예·제도(製陶)·건축·통목 공사 등의 새로운 기술과 말의 사육, 승마법 등이 전해졌다. 문자의 지시도 도래인에 의해 전해지고 대화(大和)정권은 문필에 능한 사람을 등용하여 정치·외교에 필요한 기록·문서의 제작과 재정상의 실무를 담당케 하였다.
  (주) 조선에서 도래한 유력한 씨(氏)로는 동한(東漢)·서문(西文)·진(秦) 등의 제씨(諸氏)가 있어 기록과 문서에는 동한씨(東漢氏), 서문씨(西文氏)가 재정에는 동한씨(東漢氏)·진씨(秦氏)가 등용되었다고 한다.
  …이들 사원(寺院)에는 당시의 우수한 불상조각·회화·공예품이 전해오는데,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양식을 받아들인 작품이 많지만 그 중에는 그리이스·페르시아·중앙아시아 및 조선 문화의 영향도 보인다.
5
《고교일본사(高校日本史)》
삼성당(三省堂)
  …조선 중국에서 새로운 기술 외에 불교신앙·문자·서적을 몸에 지닌 사람들이 다수 도래하여 해외의 신문화와 사상을 전하였다.…대화(大和)조정도 도래인을 등용하여 기록·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는 사부(史部)와 재정 출납을 담당하는 장부(藏部)에 종사케 하였다. 또한 5경박사를 두어 유교를 가르치고 나아가 의(醫)·역(易)·력(曆) 등의 학술도 배우기 시작하였고 불교도 6세기 중엽에 전래되었다.
  …이들 새로운 기술과 사원의 어떤 면에서는 백제·고구려 문화의 강한 영향이 인정된다.
6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학교도서주식회사(學校圖書株式會社)
  …비조문화(飛鳥文化)를 대표하는 불상과 공예품도 다수 만들어졌다. 일본 최초의 귀족적인 불교문화는 중국 남북조 문화를 대체로 서아시아·인도·그리이스 등의 문화와도 관계를 갖고 있다.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은 지(紙)·묵(墨)·회구(繪具)를 만들고, 백제의 승려 관륵(觀勒)은 역법(曆法)을 전하였다.
7
《개정일본사(改訂日本史)》
동경서적주식회사(東京書籍株式會社)
  …또한 부장품도 마구(馬具)·갑주(甲胄)와 금속제 장신구 등이 대부분이고 대량의 철제 무기도 출토되고 있다.
  (주) 중기 고분에서 조선 전래의 마구와 무기가 대량으로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북방 기마민족이 조선반도를 거쳐 일본열도에 침입하여 지도자가 되었다고 추정하는 설이 있다.
  …5세기에 이루면 대화(大和) 왕권은 조선과 중국의 앞선 문화를 받기 위하여 일본에 이주해 간 도래인을 많이 환영하였다. 이들은 철제 무기와 농구·공구·수혜기(須惠器)로 불리우는 경질(硬質)의 도기(陶器), 양잠과 고급 견직물, 마구와 장신구 등 금속 세공 및 말의 사육 등 각종 새로운 기술을 전하였다.
  일본에는 옛부터 전해진 고유의 문자가 없었으나 한자가 전래되어 도래인이 사부(史部)로서 궁정의 기록과 외교 문서 등의 작성을 맡았다. 이처럼 도래인이 대화(大和) 정권 발전에 맡은 역할은 컸다. 6세기에 이르면 높은 내용을 갖은 문화가 전래되고 또한 백제를 비롯한 조선의 여러나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다. 조선에 전해진 불교는 도래인 등을 통하여 일본에도 전해지고 있는데, 6세기 전반에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으로부터 불경과 경전이 궁전에 전해졌다.
  …비조사(飛鳥寺)·법륭사(法隆寺) 등은 비조문화(飛鳥文化)를 대표하는 사원으로 그 조영(造營)을 지도한 사람은 주로 조선에서 도래한 공인이었다.…이들 사원과 불상등에는 중국의 남북조 시대의 중국 문화를 백제 등 조선 3국을 통하여 섭취하고 그 위에 쌓아올린 것이다.
8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청수서원(淸水書院)
  도래인은 고급 직물·자기·금속 공예·농업·토목·건축·문필·기록 등 많은 분야에 우수한 기술을 전하여 일본의 문화와 산업발달에 크게 공헌하였다. 대화(大和) 정권은 도래인을 금직부(錦織部)·도부(陶部)·단야부(鍛冶部)들의 작업 직단을 조직하여 등용하였다. 도래인 중에는 진씨(秦氏),한씨(漢氏)처럼 대화(大和)정권의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재정 등에 관련하며 후에 호족으로서 성장한 집단도 있다. 또한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한자와 유교·불교·의(醫)·역(易)·력(曆)등의 학술·종교·사상도 일본에 전하였다.
  …중국 남북조 시대 문화를 섭취하여 국제성이 강한 점이 특색이다.
9
《요설일본의 역사(要說日本の歷史)》
자유서방(自由書房)
  조선 반도로의 출병(出兵)과 중국과의 교섭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조선 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많은 도래인이 내왕하며 우리나라 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미 4세기초경에 고구려에 멸망한 낙랑군 유민의 다수가 우리나라(일본)에 도래하였다. 이들은 동한씨(東漢氏)·진씨(秦氏)라고 칭하며 중국의 기계 기술 등을 전하고 그 자손은 문필과 무예·산업에 공헌하였다.
  …5세기 경에는 한자가 우리나라(일본)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한자를 사용하여 조정의 기록 등을 작성한 것도 도래인이었다. 백제에서 왕인이 오고, 논어 등 책을 헌상하고 이어 오경박사가 왔다라는 전설은 같은 5세기경 유교 전래를 전한 것일 것이다. 같은 무렵 역학(易學)·역학(曆學)·의학(醫學) 등의 학문도 전해지고 이어 불교가 전해졌다. 6세기 중엽경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 불상과 불전을 조정에 헌상한 것이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해진 시기라 하겠다. 이들은 조선 반도 제국(諸國)에서 전해진 것이므로 우리나라의 고대문화는 조선반도의 문화에 입은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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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본사(新日本史)》
삼성당(三省堂)
  …백제가 일본의 원조를 구하고 일본에 불교와 유학을 전한 것은 문화사상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538년에 전래된 불교는 처음에는 일찍부터 도래인과 접촉하고 있던 소아씨(蘇我氏) 등 호족이 숭배하고 있었다.
  (주) 6세기 전반에 백제에서 5경박사가 도래하였는데 일본인이 유학을 배우게 된 것은 이 무렵부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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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일본사(詳說日本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조선 반도로의 진출에 의해 일본으로 이주해 간 사람들(이른바 귀화인)도 많았다. 대화(大和)정권은 이들 사람들 중 특수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금직부(錦織部)·한단야부(韓鍛冶部)·도부(陶部) 등으로 부른 전업자(專業者)을 조직하여 기내(畿內)와 그 주변에 거주시켰다. 그들은 우수한 기술을 갖고 관개와 토목 공사에 종사하고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외에 각종 산업을 발달시키고 대화(大和) 정권의 세력을 강화하는데 공헌하였다. 문화 발달에서도 지배자 사이에는 문자 사용이 시작되었는데, 한자를 사용하여 기록·출판·외교문서를 작성한 것도 처음에는 이들 귀화인이었다.
  (주)《기기(記紀)》에는 왕인(王仁)·아지사주(阿知使主)·궁월군(弓月君) 등 귀화인 도래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자손은 서문씨(西文氏)·동한씨(東漢氏)·진씨(秦氏)를 칭하고 문필·기직(機織)에서 조정에 출사(出使)하였다.
  …비조(飛鳥)문화는 고분 문화로서 새로이 백제·고구려 등을 통하여 전래된 중국 남북조 시대의 문화 영향이 더해진 것이다.

  일본 교과서의 대륙(大陸)에서 온 도래인은 대부분 한반도에서 집단 이주한 자들로 미생문화(彌生文化)는 이들 도래인이 북구주(北九州)에 청동기 문화를 정착, 발전시킨 것으로 그곳에서 발굴되는 토기(土器)·묘제(墓制)·청동기(靑銅器)·철기(鐵器)·인골(人骨)의 장신화(長身化) 등에서 한반도에서 이주한 도래인의 문화라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 즉 도래인의 문화는 중국 문화와 깊은 관련성을 가지면서 한국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교과서에서 한문화(漢文化)의 파급만을 강조하고 한반도로부터의 문화 이식의 사실을 왜소화하고 추측화한 기술을 한다는 것은 전전(戰前)에 한국 사회를 '정체 사회이며 자주성이 없다'라는 왜곡된 한국사상(韓國史像)의 연장이라 하겠다.
  일본(日本)의 비조문화(飛鳥文化)는 일본(日本) 고대문화(古代文化)의 획기적인 발전상(發展相)을 보여주는 문화(文化)로서 이 문화(文化)를 꽃피우고 이끈 중심 인물과 문화(文化)의 성격은 삼국시대(三國時代) 한반도(韓半島)에서 일본(日本)으로 이주한 도래인(渡來人)과 그들로부터 전래된 고분문화(古墳文化)와 불교문화(佛敎文化)이다.
  한반도(韓半島)로부터의 도래인(渡來人)들은 각종 무기(武器)와 농구(農具)·공구(工具)·마구(馬具)·장신구(裝身具) 그리고 토기(土器)·철기(鐵器) 등의 제작(製作) 기술과 양잠(養蠶)·토목(土木)·건축(建築)·말 사육 등 새로운 기술을 일본(日本)에 전하였고, 이러한 생산기술(生産技術) 외에도 4세기 중엽 백제(百濟) 근초고왕(近肖古王)때 아직기(阿直岐)는 일본(日本)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일본(日本) 태자(太子)에 한자(漢字)를 가르쳤고 박사(博士) 왕인(王仁)은《논어(論語)》와《천자문(千字文)》을 전하고 일본인(日本人)들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쳤다. 무녕왕(武寧王) 때에는 오경박사(五經博士)인 단양이(段楊爾)·고안무(高安茂)가 유학(儒學)을 전하였고, 성왕(聖王) 때에는 오경박사(五經博士)·역박사(易博士)·역박사(曆博士)·의박사(醫博士)들이 각기 학문(學問)을 일본(日本)에 전수하였다. 또한 노리사치계(奴唎斯致契)를 통해 불교(佛敎)가 전해졌다. 고구려(高句麗) 영양왕(陽王)때 혜자(惠慈)는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어 불법(佛法)과 학문(學問)을 가르치고, 담징(曇徵)은 오경(五經)과 지묵(紙墨)·맷돌의 제작 방법 등을 가르치고 회서(繪書)에도 뛰어나 지금은 불타버린 법륭사(法隆寺)의 금당벽화(金堂璧畵)도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영류왕(榮留王) 때 혜관(慧灌)은 일본(日本) 삼론종(三論宗)의 시조(始祖)가 되었고 이어 도징(道澄)도 삼론(三論)을 강(講)하여 일본 비조시대(飛鳥時代) 불교(佛敎) 발전(發展)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교과서는 한 군데도 없다.
  간단하나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삼국(三國)으로부터 도래(渡來)한 한국인(韓國人)들이 일본(日本)의 생산력(生産力)과 기술발전(技術發展), 그리고 학문(學文), 사상(思想), 종교(宗敎) 등 문화발전(文化發展)을 주도한 주인공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日本) 교과서(敎科書)에서는 구체적인 역사인물(歷史人物)의 문화(文化)전래를 전설인 양 하여(9,10) 처리하고. 비조문화(飛鳥文化)가 한반도(韓半島)로부터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서 꽃 피워진 사실을 되도록이면 왜소화시키려는 흔적이 역역하다. 그리하여 도래문화(渡來文化)의 영향을 기술할 때 '대륙문화(大陸文化)' 혹은 '대륙(大陸)에서 온 도래인(渡來人)' 혹은 막연히 '도래인(渡來人)'이라 하여(1,3,5,8,10) 비조문화(飛鳥文化)를 담당한 도래인(渡來人)의 출처를 확실히 밝히지 않고 있다. 한반도(韓半島)로부터 도래(渡來)한 사실을 인정하고 기술한 교과서를 보면 '반도(半島)에서 피해 온 사람들을 자진해서 받아들였다'(3)라는 식으로 마치 큰 은혜를 베풀어 한반도인을 수용한 것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한국인(韓國人)으로서 일본(日本)에 도래(渡來)하여 정치적으로 유력한 위치에 있으면서 문서(文書)·재정(財政)의 일을 관장하였다고 하는 진씨(秦氏)와 한씨(漢氏)에 대해서도 '5세기까지 진씨(秦氏)·한씨(漢氏)가 도래(渡來)하고 5세기 말에 백제(百濟)로부터 도래(渡來)가 시작되었다'라는 식의 기술은(3) 중국으로부터 도래한 듯한 인상으로 유도하려는 저의라 하겠다.
  비조문화(飛鳥文化) 서술에서 받아지는 역사상(歷史像)은 중국(中國)의 남조문화(南朝文化)가 삼국(三國)을 통하여 일본으로 전래된 것으로, 단지 한반도(韓半島)는 교량(橋梁)의 역할만을 수행한 것으로 인식(認識)을 주고 있다.(3,7,11) 중국 외에 영향을 받은 외래문화(外來文化)로는 서아시아, 인도, 그리이스를 들고 있는데,(6,8) 이처럼 광범위하게 외래문화(外來文化)의 영향을 기술하면서 아예 한반도로부터의 영향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백제(百濟)·고구려(高句麗)의 영향을 기술할 때 '어떤 면에서는'이라는 식으로 한정된 표현을 사용,(5) 궁색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반해 한반도(韓半島)로부터의 도래인(渡來人)의 새로운 기술(技術) 전래와 그 후손들에 의하여 일본(日本)의 문화(文化) 발전이 있었음을 기술하고 있는 교과서도 있다.(2,4) 그러나 아직도 일본(日本) 고대문화(古代文化)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도래문화(渡來文化)의 의미를 일본사(日本史) 안에서 인정하기를 꺼리고 애써 중국문화의 영향 만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전반적인 교과서 기술 추세라 하겠다. 종전의 이러한 역사상(歷史像)은 중국 문화에 압도되어 문화를 수용했을 뿐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할 수 없었다고 한 타율성(他律性)의 연장이라 하겠다.
  이러한 대부분의 일본(日本) 교과서(敎科書)대로의 논리를 따른다면 삼국시대(三國時代) 한반도(韓半島)는 문화(文化)는 없고 인간(人間)만이 존재한다. 문화의식(文化意識)이 전혀 없는 한반도인(韓半島人)들은 단순히 물건만을 몸에 지닌 채 일본으로 도래하여 물건만을 양도했다는 식으로 밖에는 해석되지 않는다.
  문화(文化)란 발전한 곳으로부터 그보다는 낮은 수준의 지역으로 흐르게 된다. 일단 문화(文化)가 타(他)지역으로 전래되면 그 지방의 독특한 환경과 어울러져 새롭게 탄생되어 간다. 한국인들의 도래문화(渡來文化)는 한국인의 것이며, 그 문화의 주인공인 한국인들이 일찍이 대륙 문화를 발전적으로 소화하고 자기화한 것으로, 이러한 기반이 닦여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로의 이식(移植)이 가능했던 것이다. 만일 이러한 차원에서 문화 수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일본 문화 역시 그 독자성을 인정 받지 못할 것이다.

2)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와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

  전전(戰前) 일본 교과서에 한국 관계 기술에서 큰 위치를 차지한 것은 신공황후(神攻皇后)의 삼한정벌(三韓征伐)이었다. 신공황후(神攻皇后)가 신라를 정벌하여 신라가 항복하고, 그 결과 한국의 문물과 인간이 일본에 도래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정벌에 이어 대화(大和) 정권이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 사이에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여 가야 지방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두고 거의 2세기에 걸쳐 한국의 남부를 식민지적 지배를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 일본의 교과서 그 어디에도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벌(三韓征伐)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이 얼마나 허위에 찬 거짓인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아직도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양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전전(戰前)에는 '조선 출병과 지배'로서 국위(國威)를 발양(發揚)하고 황실(皇室)의 어위덕(御威德)으로서 예찬되어, 식민지 지배는 필연적인 역사계승이라는 황국사관(皇國史觀)에 입각한 이데올로기적인 의도로 취해진 대표적인 왜곡역사상(歪曲歷史像)이다.
  현재 가야(加耶) 문제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문제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설치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존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성격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있음을 지적하여 다른 해석을 가하고 있다.13) 한편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설치를 증명해주는 사료로서 들고 있는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도 다각적인 면에서 재해석이 가해지고 있는 이즈음 일본사 교과서에서는 종래 "백잔신라구시속민유래조공이왜이신묘년래도파백잔○○라이위신민(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羅以爲臣民)(백제와 신라는 본시 속민(屬民)이었으므로 조공을 하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辛卯年)(391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무찌르고 그로서 신민으로 삼다)"의 해석을 그대로 소개(2, 3, 7, 8, 11)하여 한국측 사료에 의한 과학적인 증명의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1880년 참모본부(參謀本部)에 의해 비문 해독이 행해졌고, 이것이 고대사연구(古代史硏究)의 기초가 되었음이 밝혀져 비문에 관한 근본적인 검토의 필요성이 주장되고. 참모부(參謀部) 밀정 주내경신(酒景信) 등에 의하여 비문 자구에 석회를 도배하여 비문 자체를 날조했다는 폭로도 있어 비문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성이 높아졌고14) 아울러 4∼5세기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재구성하기에 이르렀다.

◇ 임나(任那)·광개토대왕비문

1
《개정판신일본사(改訂版新日本史)》
제일학습사(第一學習社)
  …대화(大和)조정은 조선반도 남부에 진출하여 임나(任那)를 거점으로 고구려와 대항함과 동시에 우수한 문화와 철자원을 구하였다. 그러한 사실은 호태왕(광개토왕)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임나(任那)는 562년 신라에 의해 멀망되었고 대화(大和) 조정은 조선 반도의 거점을 상실하였다.
2
《삼성당일본사(三省堂日本史)》
삼성당(三省堂)
  4세기초에 낙랑군을 멸하였다. 또한 조선 남부에서는 한인이 거주하고, 마한·변한·진한으로 나누어져 각기 많은 소국으로 나눠져 있었다. 백제는 마한의 소국군을 통일해 그 북방의 구대방군을 지배하에 두고, 또한 진한 제국(諸國)은 신라에 의하여 통일되었다. 이리하여 오랜동안 중국 왕조의 조선에 대한 직접적 지배는 끝났다.
  …4세기 후반이 되면 대화(大和) 정권은 여러번 조선 남부를 침입하고, 변한 제국이 분립하여 통일이 늦어지고 있던 임나(任那) 지방에 세력을 뻗었다. 대화(大和) 정권의 군세는 한때 고구려와도 교전하였다. 백제는 대화(大和)정권과 결탁하여 고구려 세력에 대항하였다. 한편, 신라는 점차 국력을 충실히 하여 백제·임나를 공격하게 되었다.
  (주)…비문에 의하면 391년부터 404년에 걸쳐 고구려는 왜의 군대와 교전하였다.
3
《일본의 역사(日本の歷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4세기초 중국에서는 위·오·촉의 뒤를 이은 진(晋)이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받아 강남(江南)으로 이동하고 조선반도에서도 낙랑군·대방군이 멸망하고 고구려·백제·신라가 병립하였다. 그러나 조선남부의 가라(加羅)(임나(任那))로 불리는 지역에서는 소국분립(小國分立)의 상태가 계속되어 대화(大和) 왕권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4세기 후반부터 백제와 통교하여 신라를 누르고 고구려와도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4세기 이래 대화(大和) 왕권은 고구려와 치열히 싸웠는데,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 광개토왕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주)(고구려 광개토황 비문 종래설)
4
《일본사개정판(日本史改訂版)》
실교출판(實敎出版)
  …4세기에 들어오면 마한에서는 백제가 진한에서는 신라가 일어나 각기 소국을 통일하여 건국하였고, 백제는 후에 대방군을 멸망시켰다. 이 이후 조선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3국이 대립하고 4세기 말에는 고구려가 남하하여 세력을 과시하여 백제·신라 2국을 압박하였다. 이 기간의 사실은 고구려 호태왕의 공적을 기록한 비문에 의해 알려졌다.
  (주) 비문에 새겨진 비석은 414년에 압록강 중류 북안(北岸)의 퉁구에 세워졌다. 비문 중 왜(倭)가 신묘년(辛卯年)에 조선으로 침입하여 백제, 신라들을 복속시켰다고 해석되는 부분이 있는데, 오랜 풍화로 읽을 수 없는 곳도 있으며 비문의 해석에 여러가지 설이 있다.
  …4세기말부터 5세기에 걸쳐 대화(大和)정권은 백제와 연합하여 통일이 늦은 변한 땅을 거점으로 신라에 침입하고 고구려와도 싸웠다고 생각된다. 대화(大和)정권은 그 후에도 백제와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고, 또한 변한 땅을 임나(任那)라 칭하여 세력하에 두었다. 5세기 이래 조선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대립이 계속되었는데, 6세기에는 백제·신라가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국가적 통일이 늦은 임나(任那) 지방에 세력을 뻗쳤다. 대화(大和)정권도 이전부터 이 지방 일부를 세력하에 두었으므로 여러차례 출병하여 세력 유지에 노력했으나 6세기 중엽에 신라는 대화(大和)정권 거점의 땅을 빼앗아 임나(任那)의 주요 부(部)를 영유하였다.
  (주)「日本書記」에서는 그 거점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또는 관가(官家)로 부르고, 562년 신라에 의하여 멸망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부(日本府)라는 말은 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관가(官家)로서 불려졌다고 생각한다.
5
《고교일본사(高校日本史)》
삼성당(三省堂)
  5세기말부터 6세기에 이르면 대화(大和) 국가는 국내외에 심각한 국면을 맞이하였다. 475년 백제의 수도는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이는 백제와 결탁한 임나(任那)의 제소국(諸小國)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대화(大和)국가 조정에도 중대사였다.
  (주) 조선 남부 낙동강 하류의 가라(加羅)로 불리던 제소국(諸小國)의 총칭, 조선 남부에서 특히 이지역은 구주(九州)와 대화(大和)와의 사이에 옛부터 교류가 있어서 대화(大和) 국가의 세력도 미치고 있었으므로 백제·신라 항쟁의 촛점이 된 5세기 중반부터는 사자(使者)가 빈번히 왕래하였고, 대화(大和) 국가는 임나(任那)를 구원하기 위해 관인과 군대를 파견하였다
6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학교도서주식회사(學校圖書株式會社)
  4세기 후반이 되자 대화(大和)정권은 백제와 결탁, 임나(任那)로 불리운 변한(弁韓) 제국(諸國)을 확보하여 고구려 호태왕(好太王)과 싸웠다는 사실이 고구려 호태왕비에 기록되어 있다.
  (주) 압록강 중류 북안에 있는 호태왕비(好太王碑)는 414년에 세워져 그 간의 사정을 잘 전해주고 있는데, 비문의 정확한 해석이 충분치 않아 아직 검토가 필요하다.
7
《개정일본사(改訂日本史)》
동경서적주식회사(東京書籍株式會社)
  …중국 내부가 분열하여 조선을 지배할 힘이 약해지자 중국 동북부를 거점으로 한 고구려가 조선 북부에 세력을 신장하여 4세기초 낙랑군·대방군을 멸망시켰다.
  …4세기 후반이 되면 고구려 세력이 남으로 뻗어 백제를 침공하고 또한 신라의 세력도 강해지면서 백제는 대화(大和)정권과 동맹하여 고구려와 신라에 대항하려 하였다. 고구려 광개토왕 비문에 의하면 대화(大和)정권은 군대를 조선반도에 두고 고구려와 싸웠다고 볼 수 있다. 이 무렵부터 대화(大和)정권은 가라(加羅) 지방에 세력을 펼치고 그 세력하에 들어있는 지역을 임나(任那)로 불렀다.
  (주)(고구려 광개토왕 비문 종래설)…임나(任那)는 본래 조선반도 남단에 있었던 소국의 이름이나 대화(大和) 정권은 여기를 거점으로 가라제국(加羅諸國)에 세력을 펼침으로써 그 세력하에 두어 본지역을 임나(任那)로 불렀다.
8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청수서원(淸水書院)
  4세기초부터 5세기에 걸쳐 조선에서는 강대한 고구려의 남하로 백제·신라는 위험에 처해 있었다. 신라가 고구려와 맺었고, 백제는 왜와의 동맹으로 지원을 구해 양국 사이에 국교가 열리고, 4세기말 왜는 백제의 구원에 응해 조선에 출병하여 고구려와 전쟁하였다.
  (주) 왜와 백제와의 국교는 칠지도(七支刀)의 명문(銘文)에 의하면 369년경 시작되었다고 생각되는데, 이 명문(銘文)의 해석에는 제설(諸說)이 있다.   (고구려 광개토왕 비문 종래설)…로 읽는 부분이 있어 왜의 조선 진출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근년에는 다른 해석도 있다.
9
《요설일본의 역사(要說日本の歷史)》
자유서방(自由書房)
  …한편 일본은 임나(任那) 지방인 가라제국(加羅諸國)에 영향력을 갖고, 옛부터 임나(任那)의 조(調)라 칭하는 공납물(貢納物)을 받고 있었지만, 임나(任那)지방의 가라(加羅)제국은 신라 백제로부터 압박을 받아 점차 562년에는 신라가 가라제국(加羅諸國)의 태반을 정복하였다. 그 때문에 조선반도에서의 대화(大和)조정의 영향력은 크게 후퇴하였다.
  (주)《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가라(加羅)제국의 하나인 안라(安羅)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대화(大和)조정의 출선기관(出先機關)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학설을 부정하는 학설도 있다.
  …중국은 점차 남북조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때문에 조선반도에서 한민족(漢民族)의 세력이 쇠퇴하고, 조선반도 북부에서는 고구려가 낙랑군을 멸하고…
  …조선반도에서 우수한 문화와 철(鐵)자원을 구하고 있던 대화(大和) 정권은 백제의 요청에 의해 신라와 싸우고, 조선반도 남단의 소국가군을 세력하에 두고 이를 임나(任那)라 불렀다. 나아가 북방의 고구려와도 싸웠는데 그 사실은 고구려 호태왕비에 기록되어 있다.
  (주)…비의 4면에 문장이 새겨져 있는데, 오랜 풍화로 읽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왜군이 침공한 부분을 읽는 방법에는 이설(異說)이 있고, 또한 비문을 고쳤다는 설도 있다.
10
《신일본사(新日本史)》
삼성당(三省堂)
  …조선 북부에서 중국 동북부에 걸쳐 일찍이 퉁구스족이 건설한 고구려국이 있고, 낙랑군 땅올 합하여 세력이 강해졌다. 압록강 북안에 남아있는 광개토왕 비문에는 4세기 말에서 5세기에 백제와 결탁한 왜 군대와 전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비문을 읽고 거기서 어떠한 사실을 읽는다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요즈음 학계에서는 견해가 분분하다.
  (주) 종래는 이 비문에서 391년 왜가 바다를 건너서 백제 등을 복속시키고 고구려와 전쟁했다고 알려져 그 이전에 구주(九州)북부까지 대화(大和)정권의 통일이 완료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후 백제 등을 복속시킨 것은 고구려라고 읽어야 한다는 설과 왜(倭)는 대화(大和)정권이 아니라는 설 등 다양한 견해가 나오고 있다.
11
《상설일본사(詳說日本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조선에서는 고구려가 백제를 압박하고 신라도 또한 국가 기구를 정비하고 강대해져 임나(任那)·백제에 압력을 가하고, 신라도 또한 국가 기구를 정비하고 강대해져 임나(任那)·백제에 압력을 가하게 되었다. 백제·임나(任那)와 정치적 관계를 갖고 있던 대화(大和)정권은 군대를 보내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502년 임나(任那)의 관가(官家)는 멸망하고 말았다.
  (주) 종래 변한(弁韓) 땅 임나(任那)에 대화(大和)정권의 세력이 미쳐 관가(官家)를 두고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를 부정하는 설과 왜(倭)의 5왕을 구주(九州) 정권의 왕으로 보는 설도 나오고 있다.
  대화(大和)정권은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조선반도에 진출하여 반도 남단 가라(加羅)(임나(任那))의 제소국(諸小國)에 그 세력의 거점을 두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 비문에는 4세기말에 왜가 조선반도를 진공하여 백제·신라를 침범하고 고구려와도 전쟁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왜(倭)는 대화(大和)정권 세력을 말하는 것으로 대화(大和)정권은 우수한 생산 기술과 철(鐵)자원을 조선반도에서 구하여 국내 통일을 강화하는데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주)(고구려 광개토왕 비문 종래설)

  이와 함께 광개토왕 비문에서 보이는 왜(倭)는 대화(大和)조정인가하는 의문점과 일본의 고대 국가 출범 시기에 대한 의문점이 뒤따랐다. 일본내에서 고대 국가의 출현은 6세기 후반 7세기 무렵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인데, 그렇다면 고대 국가로 출발하기 2세기 전의 후진 왜(倭)가 선진 한반도의 우수한 철기 문화를 누르고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논리가 과연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묻고 싶다. 86년도판 교과서는 그래도 일전에 움직일 수 없는 역사 사실로서 기록된 기술에 비해 이견이 일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는데, (4, 8, 9, 10, 11) 일례로 삼성당판 가영삼랑저 일본사(三省堂版 家永三郎著 日本史) 교과서를 들어보면, "4세기로 들어오면 대화(大和)정권 세력은 조선 반도에 진출하여 소국가군인 채로 있는 변한을 영토로 하고 여기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두고 391년에는 군대를 보내 백제(百濟)·신라(新羅)를 복속시켰다. 조선 반도를 정복한 대화(大和)정권은 반도(半島)의 부(富)와 문화(文化)를 흡수하여 그 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화하여 국내 통일은 이에 의하여 현저히 촉진되었다."라고 단정적으로 기술했는데, 86년판은 재검토의 여지를 보여주고 있고,(10) 아울러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역사적으로 기정 사실화하는 점에 미약하나마 이견이 있음을 소개하고 있는 교과서가 보인다.(4, 8, 9, 10, 11) 그러나 대부분 제설(諸說)의 내용은 소개하지 않고 있으며 더욱이 일관되지 못한 점은 대부분의 교과서(종래 해석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고 있는 교과서를 포함)들이 4, 5, 6세기 경 동아시아의 판도를 보여주는 지도에 가야(加耶) 지방을 버젓이 임나(任那)로 표기하고 있으며, 심지어(4세기말 조선)이라는 제목에서는 신라·백제보다 크게 영토를 표기 하기도 하여(2, 8, 9) 마치 시각적으로 임나(任那) 존재를 호소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가라(加羅) 지역 표시 옆에 임나(任那)라고 병기하여 지도상에서는 임나(任那)를 기정 사실로서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대부분 교과서들이 전전(戰前)의 "조선반도로의 진출과 지배"라는 면의 시각을 갖고 있던 차원에서 대화(大和) 정권의 발전이라는 면으로 단원을 정리하고 있는데, 여전히 "조선반도로의 진출"(7, 19)이라는 단원을 설정, 팽창주의적·침략주의적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낙랑군 멸망을 기술하면서 "오랜 동안 중국 왕조의 조선에 대한 직접적 지배가 끝났다"라고 하여 한반도 전역이 중국의 식민지로 있었던 것 같은 역사상을 심어주고 있고,(2) "중국내부가 분열하여 조선을 지배할 힘이 약해지자…(7) "한민족 세력이 쇠퇴하고,(9) 라는 이유로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켰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문장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하지만 한국인의 힘의 성 장과 대항의 역사를 무시하고 중국이 분열되어 힘이 약해졌기 때문에 어부지리(魚父之利)로 얻은 이득이라는 타율사관(他律史觀)에 뿌리를 둔 역사 기술이라 하겠다.

 
 
 
 
4. 중세(中世) 한국관계(韓國關係) 기술(記述)
 
  

일본사(日本史)에서 중세(中世)에 해당하는 시기의 한국사(韓國史) 관계 서술은 매우 빈약하다. 중세(中世)로 들어오기 전 통일신라(統一新羅)와 발해(渤海)에 관한 기술이 있으나 너무도 빈약하고 왜곡이 심하다. 신라(新羅)가 삼국(三國)을 통일(統一)한 후 빈번한 사절(使節) 왕래와 문화(文化) 교류가 활발하였으나 모든 교과서가 당(唐)과의 문화(文化) 교류만을 강조하여 견당사(遣唐使)의 파견만을 기술하고, 견신라사(遣新羅使)의 파견으로 문화(文化)를 교환했다고 기술한 것은《삼성당일본사(三省堂日本史》한 곳 뿐이다. 그리고 신라(新羅)는 일본(日本)이 조공국(朝貢國) 혹은 종속국(從屬國)으로 대우했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8세기에만 보아도 견당사(遣唐使)가 5번 왕래할 때 견신라사(遣新羅使)는 15번 왕래하여 거의 3배나 더 빈번히 교류를 갖고 있는데도 신라(新羅)와의 문화(文化) 교류를 언급 하지 않음은 그 영향을 아예 무시해 버리려는 처사이다. 일본(日本)이 사절을 파견하여 신라(新羅)의 법률(法律) 지식과 통치(統治) 기술, 제도 등의 문화 수입에 노력하였음을 교과서에 반영해야 할 것이다. 한편 교과서(敎科書) 왜곡(歪曲) 중에 정도가 심한 것이 발해(渤海) 부분이다. 일본(日本) 교과서(敎科書)에서 <7∼9세기 동아시아>라는 주제로 제시된 표에 발해(渤海)를 당(唐)의 최대 영역 안으로 집어넣어 발해(渤海)를 당(唐)나라로 표시한 것이다. 발해(渤海)가 일본(日本)에 보낸 국서(國書)에 "복고려지구거(復高麗之舊居) 유부여지유속(有扶餘之遺俗)"15) 이라 했듯이 발해(渤海)는 고구려(高句麗)의 계승 의식을 분명히 하였으며, 실제로도 고구려(高句麗)의 옛 영토 대부분을 장악한 우리 민족국가(民族國家)인 것이다.
  신라(新羅)가 고려(高麗)에 의해 멸망하고 발해(渤海)가 거란(契丹)에 의해 멸망하면서 우리 민족(民族)의 통일(統一)은 실질적으로 고려(高麗)에 의해 달성되었다. 일본(日本)과 한국(韓國)은 모두 중세(中世)로 들어서도 두 나라의 관계는 고대(古代)의 문화(文化)교류 관계에서 처럼 그다지 활발치 못하였다. 따라서 교과서(敎科書)에서 한국(韓國)의 중세(中世)는 문화(文化)의 공백기를 맞게 된다. 일본사교과서(日本史敎科書)를 통해서는 한국 중세의 역사(歷史)를 학습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중세(中世)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한국은 원(元)나라에 굴복하여 원(元)나라와 함께 일본을 공격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

1) 몽고(蒙古)와 왜구(倭寇)의 침입

  13세기 몽고가 세계적인 대제국을 형성하고 대륙 끝의 동아시아 지역까지를 정복하기 위하여 한반도에 침략을 개시, 처음 고려(高麗)를 공격한 것은 1231년으로 끈질기게 대항하는 고려(高麗)를 침범하기 위해 30여년간 계속 공격해 들어왔다. 고려(高麗)는 몽고가 처음 침략해 들어온 이듬해부터 수도를 강화로 옮기고 본격적인 방어 태세로 들어가고 육지 내에서는 민중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적극적인 저항을 하였다. 그 후 1258년 항복을 하고 이듬해 강화를 맺었다. 그러나 끝까지 항복하기를 거부한 삼별초군(三別抄軍)들은 남해 진도와 제주도로까지 밀리면서도 항전을 계속하였고, 1273년에야 진압되었다. 이리하여 몽고가 고려를 침입해 온 이래 42년만에 완전 항복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의 항전은 원(元)이 아시아를 점령하려는 침략 계획에 큰 차질을 주었고, 42년만인 1274년에 비로서 일본을 침공하게 된 것이다. 고려의 대항으로 소비한 전력(戰力)이 일본으로의 침략의 결집력을 약화시키는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16)

◇ 몽고(蒙古) 침략

1
《개정판신일본사(改訂版新日本史)》
제일학습사(第一學習社)
  …1274년 원(元)과 고려와의 연합군은 대마(對馬)·일기(壹岐)를 침범하고 박다만(博多灣)에 상륙하였다.…원(元)의 두번째 침입의 실패 이유는 경험이 없는 바다를 넘어 전쟁한 것에 있고, 원에 정복된 고려와 남송 등의 사람들의 저항 때문이었다.
2
《삼성당일본사(三省堂日本史)》
삼성당(三省堂)
  …1274년 원군(元軍)은 고려의 병선을 징발하고 3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대마(對馬)·일기(壹岐)를 거처 북구주(北九州)로 공격해 왔다.
  (주) 이때 원정군은 2군으로 나누어져, 원·고려군 4만으로 이루어진 동로군(東路軍)과 남송의 징발병 10만으로 이루어진 강남군(江南軍)이었다.
3
《일본의 역사(日本の歷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국호를 원(元)이라고 고친 몽고 군대는 고려군과 연합하여 1274년 대마(對馬)·일기(壹岐)를 침범하고 구주(九州) 북부의 박다만(博多灣)에 상륙하였다.
4
《일본사개정판(日本史改訂版)》
실교출판(實敎出版)
  …원(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집요하게 저항한 고려 왕조의 무신인 최씨 정권을 무너뜨려 이를 정복시키고, 일본에 대해서도 여러번 사자(使者)를 보내 조공을 요구하였다. 일본에서는 집권 북조시종(北條時宗)이 이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1274년에 징발된 고려군과 함께 약 3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먼저 대마(對馬)·일기(壹岐)를 점령하고 나아가 북구주(北九州)의 박다만(博多灣)을 점령하였다. 막부(幕府)는 구주(九州)에 영토를 갖고 있는 어가인(御家人)을 각지에서 동원하였으나 화기(火器)를 갖고 집단전을 꾀하는 원(元)·고려군(高麗軍) 때문에 고전하였다. 그러나 폭풍우가 휘몰아쳐 원·고려와 병선에 큰 손해를 주었기 때문에 가까스로 난(難)을 피할 수 있었다.
5
《고교일본사(高校日本史)》
삼성당(三省堂)
  …1274년 원(元)은 고려군과 연합하여 북구주(北九州)를 습격하였다.
6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학교도서주식회사(學校圖書株式會社)
  …원은 복속된 고려군과 함께 병선 900여 척, 병사 3만 인을 거느리고 대마(對馬)·일기(壹岐)를 침범하고 박다만(博多灣)에 상륙하였다.…  1281년 원군(元軍)은 동로군(東路軍)(원·고려군)과 강남군(江南軍)(남송군이 주력)을 이끌고 4,000여 척의 병선과 14만의 병력으로 구주(九州) 북부를 습격하였다.
  (주) 고려는 여러번 원군(元軍)이 침입하여 13세기 중반에 왕은 결국 원에 굴복하였다. 고려의 민중은 이에 저항하였는데, 이때 받은 고통과 피해는 매우 컸다.
7
《개정일본사(改訂日本史)》
동경서적주식회사(東京書籍株式會社)
  …1231년부터는조선반도에도 침략을 개시하였다. 고려는 강화도에 이주하여 저항했지만 1259년 결국 굴복하고 몽고의 속국이 되었다.
  …쿠빌라이는 남송 정복을 행하는 한편, 조공을 재촉하는 국서를 고려를 통하여 일본에 전하였다. 외교 권한은 조정에 있었으므로 막부(幕府)는 조정에 국서를 보냈으나 조정은 형식적으로 답서를 쓸 뿐이었기 때문에 막부(幕府)는 국서를 수리하지 않는 것으로서 강경히 거부하였다…. 여러 번 요구를 거부 당한 원은 1274년 겨울 고구려군을 거느리고 대마(對馬)·일기(壹岐)를 침범하였다.
8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청수서원(淸水書院)
  …문영(文永)의 역(役)에서 원(元)은 복속한 고려병과 함께 3만 군으로 대마(對馬)·일기(壹岐)를 침입하여 박다(博多)에 상륙하였다.…원은 후에(3번째) 일본 원정을 기도하였는데, 고려와 베트남 지방의 반란으로 실행할 수 없었다.
9
《요설일본의 역사(要說日本の歷史)》
자유서방(自由書房)
  …1274년 원(元)은 고려와의 연합군 약 3만 인을 거느리고 대마(對馬)·일기(壹岐)를 침입하고 박다(博多)로 내습(來襲)하였다.
10
《신일본사(新日本史)》
삼성당(三省堂)
  (주)고려는 30년간 저항한 후 복속하였는데, 그 후도 고려 인민의 저항이 계속되어 일본 원정의 기지로 사용하려 한 쿠빌라이의 의도는 순조롭게 실현되지 않았다. 이는 원의 일본 원정 실패 요인의 하나였다.
  (주) 문영(文永)의 역(役)에서는 원·고려 연합군 3만여를 이끌고 공격해 오자 이에 대해 막부(幕府)는 구주(九州)를 비롯한 서구(西口)의 어가인(御家人)을 동원하여 이를 맞아 토벌하였다.
  홍안(弘安)의 역(役)에서는 14만병(원·고려군 4만, 남송의 징집병 10만)이 침입하여 2개월에 걸친 공방(攻防)이 벌어졌다.
  (주) 원은 3회의 일본 침략을 계획하였는데, 강제적인 동원에 저항한 고려·중국 등의 여러 인민 투쟁도 있어 결국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
《상설일본사(詳說日本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원(元)은 징발한 고려 군사와 연합하여 1274년 대마(對馬)·일기(壹岐)를 침범하였고, 대거 구주(九州)북부 박다만(博多灣)에 상륙하였다.…원(元)의 여러번에 걸친 침입 실패는 바다를 넘어 싸워보지 못한 몽고군의 약점을 나타낸 것이며, 정복된 고려와 남송인들의 저항에 의한 바도 있었지만, 막부(幕府)의 통제하에서 주로 서구(西口)의 무사가 잘 싸운 것에 큰 이유가 있다.
  (주) 특히 고려는 30년에 걸쳐 몽고군에 저항한 후 복속하였고, 그 후도 음양으로 저항을 계속하였다. 쿠빌라이는 일본과의 교섭과 일본 공격에 고려를 이용했지만 원에 대한 고려의 저항의 계속은 일본 원정에 장애가 되었다. 또한 그간 남송, 베트남에서 원에 저항하려는 움직임도 3번째 침입을 단념케 한 원인이 되었다.

◇ 왜구(倭寇)

1
《개정판신일본사(改訂版新日本史)》
제일학습사(第一學習社)
  …14세기 중기 이후 구주(九州)의 뇌호(瀨戶)와 내해(內海)의 주민도 무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조선과 중국 연안 지방에서 약탈을 일삼는 자가 있어 왜구(倭寇)로서 두려워 하였다.
  …조선반도에서는 1392년 왜구 토벌로 이름을 날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웠다.
  …무역항 3포에서는 일본인 거류지가 세워졌다.
  (주) 조선의 내이포(乃而浦)·부산포(釜山浦)·염포(鹽浦)를 삼포라 한다. 일본인 거류민도 많았다. 1510년 무역 제한 문제 등으로 거류민이 대마종씨(對馬宗氏)의 응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삼포의 난)
2
《삼성당일본사(三省堂日本史)》
삼성당(三省堂)
  14세기 중엽부터 구주(九州)·뇌호(瀨戶) 내해 연안의 무사와 상인은 고려와 중국으로 진출하여 무역을 일으켰다. 이들은 무역이 순조롭지 못할 경우 자주 약탈을 일삼아 왜구라는 이름으로 불러졌다. 대륙에서는 원(元)이 멸망하고, 1368년 한(漢)민족의 명(明)이 세워지고 고려가 멸망하였으며, 1392년 이씨 조선이 세워졌다. 이들 나라는 일본에 왜구의 단속을 요구하였다…그 후 왜구의 침임이 계속되었으므로 1419년 조선은 왜구의 본거지로 생각된 대마(對馬)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조선으로의 침략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고 무역은 계속되었다…1510년 삼포의 난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일조(日朝)무역은 쇠퇴되었다.
3
《일본의 역사(日本の歷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이러한 동아시아 제지역에서 국가 건설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시에 해상을 무대로 활동하는 상인단이 있었다. 그 출신은 구주(九州)와 뇌호(瀨戶) 내해 연안의 토호 상인들로, 그들의 일부는 무역이 잘 되지 않으면 해적적인 행동을 하여 왜구(倭寇)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씨 조선의 건국과 이성계는 이 왜구 격퇴에 이름을 날려 후에 고려를 쓰러뜨렸다.
4
《일본사개정판(日本史改訂版)》
실교출판(實敎出版)
  …북구주와 뇌호(瀨戶) 내해 연안의 주민들도 선단(船團)을 조직하여 무역에 종사하고 때로는 왜구(倭寇)가 되어 대륙 연안을 황폐하게 하고 쌀과 사람을 약탈하여 중국과 조선을 곤경에 빠뜨렸다.…조선에서는 고려 말기에 왜구를 제압하여 명성을 얻은 이성계가 1392년에 고려를 무너뜨리고 이씨 조선을 건국하고 일본에 대해서도 왜구의 금지를 요구하였다.…그후 1419년에 조선군이 왜구의 본거지 대마(對馬)를 습격한 적도 있지만 양국의 무역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1510년 삼포의 난이 일어나면서부터는 일조(日朝)무역은 쇠퇴해졌다.
5
《고교일본사(高校日本史)》
삼성당(三省堂)
  …대륙과의 무역은 많은 이익을 가져왔으므로 구주(九州)와 뇌호(瀨戶) 내해 연안 등의 호족과 상인은 활발히 대륙과의 무역을 행하였다. 이들 중에는 왜구라 하여 무역이 순조롭지 못하면 해적화하여 조선 반도와 대륙 연안을 황폐케 하는 자가 많았다.…한편 왜구의 피해를 유독 받았던 조선에서는 고려가 멸망하고, 왜구 격퇴에 공이 있는 이성계가 1392년 이씨 조선을 건국하고 일조(日朝) 간에 대마종씨(對馬宗氏) 관할하에 무역이 개시되었다.
6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학교도서주식회사(學校圖書株式會社)
  …겸창시대(鎌倉時代) 무렵부터 구주(九州)·뇌호내(瀨戶內) 방면의 연해 토호·민중이 무장 함대를 조직하여 조선·중국 연안을 습격, 쌀과 사람을 약탈하고 무력을 배경으로 강제 상행위를 하였다. 중국·조선에서는 이를 왜구라고 불렀다…왜구에 시달린 조선은 1419년 그 본거지로 생각된 대마를 습격하였다.…1510넌 삼포의 난이 일어나 후에는 쇠퇴하였다.
  (주) 일본인이 많이 거주했던 내이포(乃而浦)·부산포(釜山浦)·염포(鹽浦)를 삼포라 한다. 그 거류 일본인이 특권 축소에 항의하여 일으킨 반란.
7
《개정일본사(改訂日本史)》동경서적주식회사(東京書籍株式會社)
  …구주(九州)·뇌호(瀨戶) 내해 연안의 유력한 무사와 어민도 조선과 중국으로 배를 보내 무역을 행하게 되었다. 그들은 무역을 이용하여 침략을 일으키기도 하여 왜구(倭寇)로 불려지고 있었다.…조선 반도에서는 1392년 고려를 멸망시키고 이성계가 조선국을 세우고 의만(義滿)에게 국교 개시와 왜구 금압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1492년 왜구의 근거지를 대마(對馬)로 생각하고 대군을 일으켰고 곧이어 조선은 대마(對馬) 수호(守護) 종씨(宗氏)를 통하여 무역항을 부산포 등 3개 항으로 지정하고 서일본 각지에서의 무역선 내항을 통제하도록 하였다.…그러나 조선이 너무도 통제를 강화했기 때문에 1510년 3포의 일본인 거류민은 폭동을 일으켜 한때 무역이 정지되었다.
8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청수서원(淸水書院)
  …14세기 중엽부터 구주(九州)와 뇌호(瀨戶) 내해의 무사단에는 집단을 이루어 조선과 중국 연해에 출몰하여 무역의 이름을 빌려 약탈·폭행을 일삼는 자가 있었다. 이들은 조선과 중국인들에겐 왜구로 불려져 두려워하였다.…1392년 왜구 토벌에 공적이 있는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이씨 조선을 건국하였다. 조선은 왜구를 진압하기 위하여 조선에 정주시키고, 일조(日朝)무역을 대마종씨(對馬宗氏)에게 중개시키는 등 무역에 통신부(通信符)를 사용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주) 1419년 조선은 대마를 왜구의 본거지로 보고 약 1만 7천의 병사로 습격하였다.
9
《요설일본의 역사(要說日本の歷史)》
자유서방(自由書房)
  …14세기 중엽부터 왜구(倭寇)가 고려를 침입하여 관미(官米)와 인민(人民)을 약탈하고 나아가 중국 대륙에까지 행동 범위를 뻗었다. 고려와 뒤를 이은 조선도, 원을 멸망시킨 명도 왜구 대책에 고심하여 무력으로 대항하는 한편, 사절을 일본에 보내 금압(禁壓)을 요구하였다.…조선에서는 왜구의 근거지를 대마(對馬)라고 생각하였으므로 1419년 대군을 이끌고 대마(對馬)를 공격 하였다. 조선은 그 후 대마(對馬)의 종씨(宗氏)에게 도항자를 통제시키고 평화로운 통상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1510년 삼포난 후 양국민의 무역은 점차 쇠퇴하였다.
  (주) 일본인 거류지가 된 삼포의 일본인이 조선의 무역 통제에 반대하여 일어났다.
10
《신일본사(新日本史)》
삼성당(三省堂)
  …겸창(鎌倉) 말기에서 남북조 동난기에 서일본 연안의 주민이 조선 반도와 중국 연안에 배를 대어 무역을 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무역이 순조롭지 않을 경우 자주 침탈하였으므로 왜구(倭寇)라는 이름으로 그 지방 사름들로부터 불려졌다. 고려 왕조의 멸망도 왜구가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정도였고, 그 격퇴에 공이 있던 이성계가 1392년 조선 왕조를 열었다.
11
《상설일본사(詳說日本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이러한 동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구주(九州)와 뇌호(瀨戶) 내해 연안의 토호 상인이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의 일부는 무역이 순조롭지 못하면 해적적 행위를 보여 왜구(倭寇)라고 불려졌다.
  …이씨 조선은 왜구 격퇴에 이름을 날린 이성계에 의하여 건국되었으므로 명과 같이 강력한 왜구(倭寇) 금지를 요구하였다.…1419년 조선군은 왜구(倭寇)의 본거지로 생각되는 대마(對馬)를 습격한 사건도 있었으나 그 후 여전히 무역은 순조로이 계속되었다.
  (주) 14세기에 활동한 전기 왜구에 비해 16세기 후기 왜구는 일본인보다도 중국인 등이 많았다.

  그러나 교과서(敎科書)에서는 몽고의 일본 침략에 고려(高麗)가 일익을 담당한 것 같은 역사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즉 대부분의 교과서들은 1274년 원(元)과 고려(高麗)가 연합하여 일본을 공격하다가 퇴패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1,3,5,6,8,9,10) 교과서(敎科書) 기술대로라면 고려(高麗)는 원(元)에 쉽게 복속된 후 비자주적으로 원(元)에 협력하여 일본을 침입했다는 역사상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17) 한편 원(元)의 일본 침략의 실패 원인을 기술하면서 몽고 침략에 대항한 고려 민중들의 저항이 일인(一因)이 되고 있음을 지적한 교과서도 있다.(1,8,10,11) 사실을 전달하는 표현력은 약하지만 그나마 일본의 전전(戰前) 교과서(敎科書)에서 신(神)의 보호로 신풍(神風)이 불어 일본을 몽고의 침략으로부터 구원하였다고 하는 신화적인 역사 기술에 비해 보면 객관적인 역사 기술에로의 진전이라 하겠다.
  한편 13세기 초부터 성행하던 왜구(倭寇)에 관한 기록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타난 것은 1223년이다. 그 이후로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왜구(倭寇)는 한반도의 모든 연해 지역과 중국의 연해 지방을 습격, 살륙과 약탈을 거듭하여 민중 생활에 큰 피해를 주었다.
  이들 왜구(倭寇)는 가족(家族)과 무사(武士)들, 상인(商人)들로 조직된 노략질을 일삼는 전문 해적단이었다. 그러나 일본(日本) 교과서(敎科書)에서는 소단원을 외교(外交)와 무역(貿易)이라는 제목(題目)의 주제로서 다루면서 왜구(倭寇)는 국제(國際) 외교(外交)와 무역(貿易) 관계에서 부정적으로(무역(貿易)이 순조롭지 못할 경우) 일어난 부수적인 문제로서 취급하여 그 침략성(侵略性)을 은폐하고 있으며,(2, 3, 5, 10, 11) 왜구(倭寇)라는 단원으로 기술된 것은(3, 4) 뿐이다.
  한편 이들 왜구(倭寇)의 세력을 은근히 일본인(日本人)의 진취성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왜구(倭寇)의 침입 때문에 고려(高麗)가 멸망하고 왜구(倭寇) 섬멸로 명성을 얻은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조선(朝鮮)이 건국되었다고 기술함으로써 왜구(倭寇)세력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요컨대 일본(日本)의 정식 군대도 아닌 민간(民間)들의 집단이 국가(國家)를 멸망시킬 정도라는 것이다.(1,3,4,5,8,10,11)
  조선(朝鮮)이 건국된 후 일본(日本)에 왜구(倭寇)의 단속을 요구하고 양국에서 통신부(通信符)를 사용하여 무역토록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고, 왜구(倭寇)에 대한 직접적인 회유책을 쓰기도 하지만 왜구(倭寇)는 여전히 근절되지 않았다. 특히 대마도(對馬島)는 왜구(倭寇)의 창궐이 가장 심한 곳으로 마침내 1419년 세종(世宗) 때에 이종무(李從茂)를 시켜 대마도(對馬島) 정벌을 단행하는데 교과서(敎科書)의 대부분이 "대마도(對馬島)를 왜구(倭寇)의 본거지로 생각하고" (2,6,7,8,9,11)라는 표현을 하여 마치 본거지가 아닌데도 조선(朝鮮)이 침략했다라는 식의 기술을 하고 있다. "왜구의 본거지 대마도(對馬島)"라 기술한 곳은 한 곳 뿐이다.(4)

2)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에서 1597년에 걸쳐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수길(秀吉)의 조선 정벌"이라는 말로 왜곡되어 조선침략을 장거(狀擧)·무용(武勇)으로 미화하였다.18) 이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관한 많은 연구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원인을 수길(秀吉)의 망상에 가까운 영토욕과 전국 통일 이후 대명(大名)들의 군사력을 밖으로의 전쟁에 소모케 하려하고 대명(大名)들의 불만을 영토 확대로써 해소시키려 하였다고 밝혀졌다. 그러나 이러한 침략의 사실을 기술하고 있는 교과서는 드물다. 그나마 본문 내용이 아닌 각주에서 미약하게 설명하고 있으며,(4, 8) 그 외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원인을 전전(戰前)에 그들이 교과서에 기술했던 그대로 '명의 정벌을 위해 조선에 길을 빌린다(정명가도(征明假道))'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1, 2, 4, 6, 8, 10) 일본의 정명가도(征明假道)의 요구를 조선이 배타적으로 거절했기 때문에 일본은 부득이 침략했다는 식이다. "명을 정복한다라는 명목으로"(5)라는 명목상을 구실이라는 점을 보여 주고 있기는 하나 대부분 당시의 대의명분임을 내세워 자기 기만적인 슬로건을 역사 사실인양 기재함으로써 여전히 일본의 봉건적 침략과 팽창주의의 참모습을 가리고 있다 할 것이다.

◇ 임진왜란

1
《개정판신일본사(改訂版新日本史)》
제일학습사(第一學習社)
  수길(秀吉)은 이미 1585년 경부터 대륙침략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1587년 대마종씨(對馬宗氏)를 매개로 조선에 대하여 입공(入貢)과 명(明)을 정복하기 위한 선도(先導)를 요구하였다. 조선이 이 요구를 거절하자 명 정복의 준비를 개시하여 비전(肥前)의 명호옥(名護屋)에 전진 기지를 설치하고, 1592년 15만여 대군을 조선에 보냈다. 일본군은 전쟁 처음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투가 장기화됨에 따라 조선 수군과 명의 원군, 각지 의용군의 반격을 받아 명과의 화평 교섭을 개시하고 일단 철병하였다. 그러나 강화가 성립되지 않자 1597년 재차 조선에 출병했는데, 전국은 불리해졌다. 바로 다음해 수길(秀吉)이 병사했기 때문에 일본군을 철병하였다. 문록(文祿)·경장(慶長)의 양역(兩役) 과정에서 조선의 문화·기술 등이 일본에 전해졌지만 결국 조선 민중을 고통에 몰아 넣고, 막대한 전비와 병력의 소모는 풍신(豊臣) 정권의 붕괴를 앞당기는 한 원인이 되었다.
  (주) 동활자 인쇄 기술이 전해지고, 또한 출진했던 제대명(諸大名)이 연행하고 돌아온 도공(陶工)들에 의해 당진소(唐津燒)·유전소(有田燒)·살마소(薩摩燒)·추소(萩燒) 등이 시작되었다.
2
《삼성당일본사(三省堂日本史)》
삼성당(三省堂)
  …수길(秀吉)은 국내 통일이 진행 중인 1585년 경부터 명의 정복을 계획하고 구주(九州) 평정을 통하여 태세를 정비하고, 1587년 대마종씨(對馬宗氏)를 매개로 조선에 입공(入貢)을 요구하였다. 조선인이 요구를 거부하자 1592년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전국(戰局)은 처음에 일본군에게 우세하였으나 후에 불리하게 되어 1598년 수길(秀吉)이 병사하자 일본군은 철병하였다. 이렇게 16만의 대군을 동원한 조선 침략이 실패로 끝나고, 군사적·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입은 대명(大名)들 사이에 큰 대립이 일어났다.
  (주)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조선 민중의 봉기와 명의 원군으로 공격이 저지되고 또한 수군의 열세에 의하여 보급이 단절되었다.…조선에서는 이 전쟁을 임진(壬辰)·정유왜란(丁酉倭亂)으로 부르며 그 피해가 격심했다는 것이 후세에 구전되었다.
  수길(秀吉)의 조선 침공에 종군한 무장(武將)들은 다수의 도공(陶工)을 연행하고 돌아와 영내(領內)에서 도기(陶器)를 제작시켜서 각지에 제도업(製陶業)이 일어났다. 또한 이때 동활자 인쇄술도 전해져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에도 목판활자의 인쇄가 시작되었다.
3
《일본의 역사(日本の歷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그러나 조선에 대해 2번에 걸친 무계획적인 출병을 일으켜 명의 원군과 조선 민중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쳤다. 1598년 수길(秀吉)의 사망으로 전군은 철병하는데, 이 조선 출병의 실태는 풍신(豊臣) 정권이 무너지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조선 출병 당시 제대명(諸大名)이 연행해 온 조선의 도공(陶工)에 의하여 유전소(有田燒)·살마소(薩摩燒)·추소(萩燒)·평호소(平戶燒) 등이 시작되었다. 또한 조선에서 활자 인쇄술도 전해져 많은 서적이 출판되었다.
4
《일본사개정판(日本史改訂版)》
실교출판(實敎出版)
  …수길(秀吉)은 해금(海禁) 정책을 취한 명(明)에 대하여 대마종씨(對馬宗氏)를 통해 조선에 무역 활동 중개(仲介)를 요구하고, 또한 조선의 입공(入貢)을 명하였지만 거부되었다. 그를 이유로 1592년 수길(秀吉)은 비전(肥前)의 명호옥(名護屋)에 본영을 두고 가등청정(加藤淸正)·소서행장(小西行長)을 선봉으로 조선에 대군을 보냈다. 초기 일본군은 연승하고, 한성·평양을 점령하여 일대(一隊)는 두만강까지도 도달하였다. 그러나 조선측의 태세를 회복하고, 의병의 게릴라 활동·수군의 활동·명의 원군 등이 와서 일본군은 고전을 겪었다.…1597년 재차 조선에 출병하였다. 전선은 조선 남부에서 유착하고 이순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이 우세했기 때문에 보급도 곤란하고 고전한 끝에 수길(秀吉)의 죽음을 계기로 일본군은 철퇴하였다.
  조선 침략 결과 조선은 피폐하고 많은 문화재가 전화로 소실되고 명도 쇠퇴한 원인이 되었다. 일본에서도 동원된 무사와 민중을 위시하여 거대한 군사 부담 때문에 사람들은 고통을 받았다. 또한 풍신(豊臣) 정권의 기반이 약해졌다. 불행한 형태의 문화 교류이지만 대명(大名)들이 가지고 온 목면 종자가 면 재배를 확대시키고 연행한 조선인 도공(陶工)이 일본 각지에서 도소(陶燒)를 시작하였고, 활자인쇄 기술이 전해졌다.
  (주) 수길(秀吉)은 조선뿐만 아니라 명의 정복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이 출병의 이유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전국동란(戰國動亂)에서 통일로의 움직임 안에서 국내에 쌓인 정력을 대외적으로 돌리려는 데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5
《고교일본사(高校日本史)》
삼성당(三省堂)
  …1592년 일본군은 명을 정복한다는 명목으로 십수만의 군세로 조선을 침략하여 명의 국경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즉각 명군의 공격을 받고 조선 수군에게 보급로를 차단 당하였으며 조선 민중의 봉기에 부딪치자 정전 협정을 맺었다. 이후 일명(日明) 교섭은 강화 조건의 엇갈림으로 결렬되고, 수길(秀吉)은 1597년 재차 조선에 출병하였다. 이번에는 목표를 조선 남부의 점령에 두고 있었지만, 일본군은 남부 연안에서 거의 진격하지 못하고 비참한 전투를 계속한 후 다음해 수길(秀吉)이 사망하자 정전(停戰)하였다. 수길(秀吉)의 조선 침략은 대규모적인 동원에 의하여 국내를 피폐시켰다.
6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학교도서주식회사(學校圖書株式會社)
  …또한 조선에 대하여 수길(秀吉)에게 복종할 것과 명으로의 침공(侵攻)의 선도(先導)에 설것을 강요하였다. 조선이 이 강요를 거절하자 1592년 수길(秀吉)은 스스로 비전(肥前)의 명호옥(名護屋)으로 가서 조선에 대군을 파송하였다. 가등청정(加藤淸正), 소서행장(小西行長) 등을 선봉으로 한 약 16만의 일본군은 처음 우세로 곧바로 한성을 정복하고 평양으로 나갔다. 여기서 수길(秀吉)은 대규모의 대명(對明) 정복 계획을 발표하는데 일본군은 수군의 열세와 명(明)의 원군(援軍)과 조선 각지에서 봉기한 민중에 의한 의병의 저항으로 보급로가 차단되고 극심한 병량난(兵糧難)에 빠졌다. 그 때문에 장군들 사이에 불화가 일고 전국(戰局)이 불리해졌으므로 명(明)과 강화하여 일단 군사를 철수하였다. 그러나 수길(秀吉)은 강화 조건으로 조선 남쪽 4도(道)의 활양을 요구하는 등 강력한 방침을 거두지 않은 것에 대해 명(明)나라 측은 수길(秀吉)을 '일본 국왕에 봉한다'라는 국서를 보내왔다. 이 때문에 교섭이 깨지고 수길(秀吉)은 1597년 두번째 조선에 출병하였다. 제2차 출병도 전국(戰局)은 일본군에 불리하였고, 거기에 바로 수길(秀吉)이 병사하였기 때문에 그를 기회로 일본군은 곧바로 철수하였다. 광대한 전비와 인원을 동원하여 강행한 조선 출병은 전장(戰場)이 된 조선 민중에게 큰 희생을 주었으며 풍신(豊臣) 정권도 무엇하나 얻은 바 없이 그 재정적 기초와 대명(大名)들에 대한 통제력을 약화시키게 되었다.
  (주) 일본군은 조선 침략 사이에 엄청난 수의 조선 병사와 민중을 살상하고 많은 조선 민중을 포로로서 일본에 연행하고 불상·경전 등의 문화재와 민중의 사재를 약탈하였다.
7
《개정일본사(改訂日本史)》
동경서적주식회사(東京書籍株式會社)
  …또한 명(明)과 무역의 부활을 시도한 수길(秀吉)은 명(明)과의 중계를 조선에 의뢰하고 그것이 거부되자 1592년 스스로 비전(肥前)의 명호옥(名護屋)으로 향하여 대군을 출범시켰다. 원정군은 평양 등지에까지 진출하지만 장군들 사이에 불화와 수군(水軍)의 열세, 또한 조선 의민군(義民軍)에 의한 저항과 명의 원군 등으로 전국(戰局)은 바로 불리해졌다. 강화 교섭이 이루어지면서 수길(秀吉)은 일단 군대를 철수하지만 교섭이 성립되지 않자 1597년 재차 출병하였다. 다음해 수길(秀吉)의 죽음을 기회로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그 두번에 걸친 출정을 문록(文祿)·경장(慶長)의 역(役)이라 한다. 막대한 전비와 많은 병력을 소비한 이 출병의 실패는 대명(大名)들 사이에 대립을 일으키고 풍신(豊臣)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결과가 되었다.
8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청수서원(淸水書院)
  …명(明)과의 국교를 열려다 실패하자 조선에 정명(征明)의 선도를 맡을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이 이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1592년 수길(秀吉)은 조선으로 출병하였다. 수길(秀吉)의 군사는 한성(漢城)을 점령하였으나 이순신이 거느린 수군과 명의 원군(援軍), 나아가 각지의 민중 의용군의 반격으로 고심하여 강화(講和)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를 성립시키지 못하자 1597년 재차 출정하였는데, 전국(戰局)은 호전되지 않고 1598년 수길(秀吉)의 죽음을 계기로 철병하였다. 이 전쟁에서 서구대명(西口大名)이 연행한 조선의 도공들은 살마(薩摩)·추(萩)·유전(有田) 등에 고도의 제도(製陶) 기술을 전하였다. 또한 동활자의 인쇄술도 조선으로부터 전해졌다.
  (주) 이 전쟁 사이에 조선에서 활자 인쇄술과 많은 서적이 전해지고 또한 대명(大名)들이 조선의 도공을 연행해 돌아와 유전소(有田燒)·살마소(薩摩燒)·추소(萩燒) 등의 요업이 각지에 생겼다.
  (주) 조선 출병의 배경에는 수길(秀吉) 자신의 영토욕과 함께 국내에 영토를 확장할 수 없는 대명(大名)들의 불안을 밖으로 향하게 하고, 호상(濠商)들의 해외 무역으로의 욕망이 있었다.
9
《요설일본의 역사(要說日本の歷史)》
자유서방(自由書房)
  …1592년 조선이 입공(入貢)과 정명(征明)의 안내를 거부하자 약 20만 대군을 조선에 보냈다. 수길(秀吉)의 군사는 처음에는 조선의 요지를 제압하였지만 조선 의병의 봉기와 명군의 구원군이 오고 일본 수군의 열세로 전국은 점차 불안해져 명(明)과의 사이에 화평(和平) 교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화의(和議)는 실패로 끝나고 1597년 재차 출병(出兵)하여 조선 남부를 점령하였지만 수길(秀吉)이 죽자 전군이 철수하였다. 전후 7년에 걸친 전쟁을 통하여 조선의 사람과 기술이 일본에 들어와 학문, 활자인쇄요업 등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결국은 헛되이 조선 민중을 괴롭혀 원한을 사고, 또한 출병 장사의 피로를 초래하여 풍신(豊臣) 정권의 붕괴를 앞당기게 되었다.
10
《신일본사(新日本史)》
삼성당(三省堂)
  …수길(秀吉)은 명(明)에 대해서는 관백(關白) 취임 직후부터는 정복을 생각하였으므로 착착 국내에 동원 태세를 갖추는 동시에 조선에 대해서는 복속과 명으로의 선도(先導)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이에 응하지 않아 1592년 수길(秀吉)은 명(明)을 토벌하려고 길을 조선에 요구하며 17만의 대군을 보냈다.…강화(講和)에서 감합무역(勘合貿易)의 부활과 조선 남반부 활양 등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길(秀吉)은 1597년 재차 조선에 병력을 보냈다. 그러나 작전이 활발히 진행되지 않고 다음해 수길(秀吉)의 죽음으로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이 전쟁 때문에 수길(秀吉)에 의한 제대명(諸大名)에의 군사력 동원과 물자 조달이 팽대한 양에 달했고, 국내의 인민을 피폐시켰으므로…조선인민은 일본병사들에게 식량 등의 약탈을 당하였고 포로로서 일본으로 연행되었으며, 불상·도자기·금속활자를 가지고 가는 등의 피해를 당하였다.
11
《상설일본사(詳說日本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수길(秀吉)은 후에 명(明)과의 무역 부활을 시도하고 또한 대마종씨(對馬宗氏)에 명하여 조선국왕의 입공(入貢)을 요구하였는데, 조선이 이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1592넌 조선에 출병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의민군(義民軍)의 저항, 일본 수군의 열세, 명의 원군 등 때문에 전국(戰局)은 생각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그간에 있었던 화의(和議)도 결실을 거두지 못했으므로 1597년 재차 출정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수길(秀吉)이 죽었기 때문에 전군이 철병하고 7년에 걸친 조선 출병은 대외적으로는 조선과 명의 반감을 사 국내적으로는 풍신(豊臣) 정권이 무너지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주) 이 전쟁 때 조선에서 활자 인쇄술이 전래되고, 또한 출진했던 제대명(諸大名)이 조선의 도공(陶工)을 연행해왔기 때문에 유전소(有田燒)·살마소(薩摩燒)·추소(萩燒)·평호소(平戶燒)·고취소(高取燒) 등이 시작되었다.

  이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역사를 배우면서 중시해야 할 점은 한국민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역사와 전쟁이 양국 국민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특히 침략에 대응한 의병들의 활약과 수군의 활약을 기록하고 있는 점은 종전에 일본군이 승승장구 조선의 전토를 휩쓸다가 수길(秀吉)의 사망과 함께 전쟁이 종식되었다는 식의 기술에 비해 진전된 점이 있다. 그러나 모든 교과서가 여전히 수길(秀吉)의 죽음에서 종전의 계기를 보려고 한 점은 변함이 없다.
  7년간의 무모한 침략은 양국민들 사이에 커다란 상흔을 남겼다. 부질없는 전쟁으로 전장(戰場)이 된 조선은 재산, 인명, 문화재의 약탈·소실, 농경지의 황폐화 등으로 기본 생존력마저 위협당하는 곤혹을 치렀다. 이러한 한국민의 피해 사실을 그나마 언급하고 있는 교과서는 드물다.(1, 4, 10) 아울러 일본 민중에게 끼친 피해를 언급하고 있는 교과서는 더욱 없다.(4) 이 전쟁으로 인해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풍신(豊臣) 정권만이 무너지고. (1, 2, 6, 7, 11) 전쟁 당시 조선에서 연행해 온 도공들에 의해 고도의 도자기 제조 기술이 전해지고, 동활자 인쇄술이 전해짐으로서 일본의 학문과 활자 인쇄, 요업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기술하였다.(1, 2, 3, 8, 9, 11)
  이러한 서술은 침략 전쟁이 양국간에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가져 왔는가라는 교훈이 아닌 일본에서는 자국의 희생과 시련은 없고 오히려 기술과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결론을 유도함으로써 팽창주의와 침략적 이데올로기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교과서의 단원 설정에서도 볼 수 있다. 크게 두가지로 '조선 침략'(2, 4, 5, 6, 10)이라고 잡은 것과 '대외 정책'(1, 7, 8, 9, 11)이라고 잡은 것이 있는데, 후자의 경우 대외 정책의 일환으로서 조선을 침입했다고 하는 의식으로 자리잡힐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하겠다. 심지어는 '수길(秀吉)의 통일 정책'(3)이라 하여 조선으로의 침략이 수길(秀吉)의 국내 통일은 물론 한반도로까지 통일을 꾀하려 한다는 팽창주의적 역사상을 심어줄 우려가 있는 것이다.

 
 
 
 
5. 근대(近代) 한국관계(韓國關係) 기술(記述)
 
  한일(韓日)간의 근대사(近代史)는 제국주의(帝國主義)의 침략 역사와 이에 대항한 식민지(植民地)의 투쟁 역사로, 피지배국의 역사는 침략자의 행위를 미화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역사 연구가 행해져 왜곡되어야만 했다. 이제 압박과 피압박의 물리적 관계는 청산되었으나 서로 관계는 아직도 이전 틀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제 교과서(敎科書)에 나타난 근대(近代)부분은 어떠한 역사상(歷史像)으로 나타나 있는가를 보자.

1) 정한론(征韓論)과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우리는 앞서 중세(中世) 왜구(倭寇)들의 해상 활동이 무역을 구실로 한 약탈과 살륙의 해적 행위였음을 보았다. 수길(秀吉)의 조선침략(朝鮮侵略) 후 잠잠했던 일본(日本)에서는 덕천막부(德川幕府) 말기부터 해외진출(海外進出) 내지는 경략론(經略論)을 주장하여 또다시 침략 사상이 대두하였다. 그 중 좌등신연(佐藤信淵)(1769∼1850)은 그의 일련의 저서들을 통하여 해외침략론(海外侵略論)을 제기하는데, 특히《우내혼동비책(宇內混同秘策)》에서 노골적인 침략관(侵略觀)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만국(世界萬國) 가운데 일본(日本)이 공격하여 얻기 쉬운 토지는 중국(中國)의 만주(滿洲)보다 더 쉬운 곳은 없다.…이미 달단()을 취득한 이상 조선도 중국도 계속해서 도모(圖謀)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한 바 있고 또한 명치정부(明治政府)의 주역을 맡은 목호효윤(木戶孝允)과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스승인 길전송음(吉田松陰)(1829∼1859)은 서양(西洋)과의 교역으로부터 잃은 것을 아시아 침략에서 메꿔야 한다는 침아(侵亞)를 주장하는데, 그가 1855년 옥중에서 그의 형에게 보낸 <동지일치(同志一致)의 의견(意見)>이라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신의(信義)를 이적(夷狄)(서양(西洋))에게 잃어서는 안된다. 다만 장정(章程)을 엄히 하고 신의(信義)를 두터이 하며 그 사이에 국력(國力)을 배양하여 취(取)하기 쉬운 조선(朝鮮)·만주(滿洲)·중국(中國) 을 꺾어 복수(服隨)시켜, 교역(交易)으로 러시아와 미국에 잃은 바를 토지(土地)로써 조선(朝鮮)과 만주(滿洲)에서 보상받아야 한다.

  이러한 침략주의적(侵略主義的)인 사상은 그의 제자들인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수행자들에 의해 정한론(征韓論)으로 계승되었다. 정한론자(征韓論者)들은 암창패시(岩倉貝視)·목호효윤(木戶孝允)·대촌익차랑(大村益次郎)·대구보리통(大久保利通)·서향륭성(西鄕隆盛)·판원퇴조(板垣退助) 등으로, 정한(征韓)을 실행함으로써 불평사족(不平士族)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게 하고, 안으로는 신정권(新政權)의 권리를 확립하고 밖으로는 조선(朝鮮)을 제압하여 구미제국(歐美諸國)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것이다.

◇ 정한론

1
《개정판신일본사(改訂版新日本史)》
제일학습사(第一學習社)
  …조선에도 국교를 요구했으나 쇄국 정책을 고수하고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암창사절단(岩倉使節團)의 유수(留守) 정부를 지휘하고 있던 서향륭성(西鄕隆盛)은 무력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갖고, 정부내에서는 사족의 불만을 밖으로 돌릴 의도도 있어 정한론이 일어났다. 1873년 귀국한 암창(岩倉)·대구보(大久保)·목호(木戶)들은 내치 우선을 주장하고 칙재(勅裁)로서 정한의 기도를 중지시켰다. 이 때문에 서향(西鄕)을 비롯한 판원퇴조(板垣退助)·후등상이랑(後藤象二郎)·강등신평(江藤新平) 등 정한파 참의는 사임하고 정부는 분열 상태에 빠졌다.
  …시위 행동 중의 일본 군함이 포격된 것을 계기로(강화도사건) 일본은 강경한 태도로 불평등한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를 체결하고 조선 진출의 발을 들여 놓았다.
2
《삼성당일본사(三省堂日本史)》
삼성당(三省堂)

  1868년 정부는 조선에 국교 재개를 요구하였지만 조선은 일본 개국에 반발하고 일본의 조선에 대한 의도를 경계하여 쇄국 정책을 고수하였다. 정부 내부에서는 대조선 정책을 둘러싸고 논의가 분규하고 정한론이 주창되었다.
  …일본은 1875년 9월 강화도 사건이 일어난 것을 기회로 강경한 태도를 취하여 다음해 3월 조선에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를 체결하였다. 일조수호조규는 조선을 개국시키고 영사 재판권을 일방적으로 인정하도록 하는 등 조선에 대해서 일본이 서양제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과 같은 것이었다. 결국 일본은 조선에 일본 수출입품의 관세를 무과세로 하는 것을 승인토록 하였다.
  일본의 군함 운양호가 정부의 명을 받고 청국으로 운행 중 음료수를 구한다는 이유 아래 조선의 한성 부근의 요새 지대인 강화도에 접근하였으므로 수비병과 격돌하였다.

3
《일본의 역사(日本の歷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쇄국 정책을 고수하고 있던 조선에 대해서 강력히 개국을 요청하고, 이를 거부하던 서향륭성(西鄕隆盛)·판원퇴조(板垣退助) 들은 무력을 이용해서라도 조선을 개국시키려한 정한론을 주장하였다.
  …1875년 조선 서안 강화도 부근에서 조선으로의 시위 행동을 위해 측량을 행하고 있던 일본군함이 포격을 받은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은 조선에 압력을 가해 다음해 일본측에 유리한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를 체결하고 조선을 개국시켰다.
4
《일본사개정판(日本史改訂版)》
실교출판(實敎出版)
  …이 사이 서향륭성(西鄕隆盛)·판원퇴조(板垣退助)를 중심으로 한 유수(留守)정부는 내정상 개혁도 진행하고 있었는데 정한론을 주장하고 1873년에 일본측의 개국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조선으로의 서향(西鄕) 파견을 결정하였다. 귀국한 암창(岩倉)·대구보(大久保)·목호(木戶) 등은 국제 관계의 분규를 두려워하여 내치 우선을 주장하고 천황의 재가(裁可)에 이어진 서향(西鄕) 파견을 뒤엎었다. 그후, 정부는 1875년에는 조선의 강화도 부근엔 침입한 일본 군함이 포격을 당한 것을(강화도사건) 기회로 조선을 군사력으로 개국시켰다. 이 결과 다음해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강화조약)가 성립되고 일련의 대륙 진출이 시작되었다.
5
《고교일본사(高校日本史)》
삼성당(三省堂)
  …조선에서는 일단에서 신정부 수립을 고하고 새롭게 국교를 열 뜻의 국서를 전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구미제국과 일본의 의도를 경계하고 엄중하게 쇄국 정책을 고수했으므로 국교 수립 교섭은 결렬되었다. 한편 정부에서는 1871년 조선의 지배자가 상국으로 의존하고 있던 청국과 대등한 일청수호조약(日淸修好條約)을 체결하였다. 조선과의 국교 교섭이 진전되지 않은 채 암창(岩倉) 들이 부재 중인 정부에서는 1873년 군사력을 배경으로 사태를 타개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또한 서향륭성(西鄕隆盛)을 사절로 조선에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으나 구미 시찰에서 돌아온 대구보리통(大久保利通)을 비롯한 암창(岩倉)과 목호효윤(木戶孝允) 들은 이에 반대하여 결국 실현하지 못하였다.
  …다음해에는 일본의 군함을 조선 한강 하구의 강화도 부근에 나가게 하여 조선측 포격에 반격하고 군대를 상륙시켜 포대를 점령하는 등 하여(강화도사건) 이를 계기로 1876년 조선에 불리한 불평등조약인 일조수호조약(日朝修好條約)을 체결하였다.
6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학교도서주식회사(學校圖書株式會社)
  …서향륭성(西鄕隆盛)을 중심으로 한 유수(留守)정부 내부에서는 조선 정부가 쇄국 정책을 고수하고 왕정 복고 후의 일본정부의 국교 재개의 교섭을 완고히 거부하는 것은 무례하다고 판단하여 정한론을 주장하는 입장이 유력하게 되었다. 정한론의 배경에는 대외 출병으로써 전국의 불평사족의 불만을 해소하려 한 의도가 있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1873년 8월 조선 출병의 방침을 정하고 서향(西鄕)을 대사로 파견할 것을 내정하였다. 이에 대하여 구미 시찰을 하고 돌아온 암창(岩倉)·대구보(大久保)·목호(木戶)들은 열강의 실정을 알았으므로 해외 출병을 시기상조라 하여 내치의 우선을 주장하고 이해 10월 서향(西鄕)의 파견을 칙재(勅裁)로 뒤집어 버렸다. 그 때문에 서향(西鄕)들의 정한파 참의들은 바로 하야(下野)하였다.
  …또한 대조선 관계에서는 1875년 9월 조선을 개국시키기 위하여 시위 운동을 하고 있던 일본군함이 강화도 포대에 접근하여 전화(戰火)를 받았다(강화도조약). 이에 대하여 정부는 강경 태도로 조선정부와 교섭하여 다음해 2월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를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의하여 조선은 개국하고, 일본의 영사 재판권을 승인한 불평등조약 아래 놓이게 되었다.…강화도 수비병의 공격을 받자 일본 군함 운양호는 이에 응전하여 격파하고 나아가 병사를 영종도에 상륙시키고, 그 포대를 점령 하였다.
7
《개정일본사(改訂日本史)》
동경서적주식회사(東京書籍株式會社)
  이 사이에도 서향륭성(西鄕隆盛)을 중심으로 한 정부 수뇌에 의해 내정 개혁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으나 외교면에서는 조선에 대해서는 1875년 조선 연안에 접근한 일본 군함이 강화도에서 포격을 당한 것을 계기로 강경한 태도로 개국을 요구하여 다음해 일본에 유리한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를 체결하였다.
  (주) 부산·인천·원산의 개항과 치외법권과 관세 면제 들을 승인케 한 불평등조약으로 일본의 조선 진출 제일보가 된 사건이었다.
8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청수서원(淸水書院)
  …조선과의 관계에서는 국교 교섭이 진행되지 않고 조선 정부가 끝까지 배외적인 쇄국주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자 정부내에서도 강경론(정한론)이 일어나고 서향(西鄕)을 조선에 사절로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를 알고 1873년 귀국한 암창(岩倉)·대구보(大久保)는 북해도 선결론과 내치우선론을 주장하여 서향(西鄕)의 견사(遣使)에 강경히 반대하였다. 그 때문에 서향(西鄕) 파견은 중지되었다.
  …일본(日本)은 1875년 강화도 사건을 제기로 조선에 압력을 가하고 다음해 일조수호조약(日朝修好條約)을 체결하여 개국시켰다.
  (주) 강화도 근해 해조를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일본군함을 파견했을 때 강화도 포대에서 발포를 받아 이와 교전하여 부근의 소도를 점령한 사건.
9
《요설일본의 역사(要說日本の歷史)》
자유서방(自由書房)
  …쇄국주의를 고수하고 있던 조선은 일본의 신정부와의 통교를 거부하였다. 이 때문에 정부 부내(部內)에서는 무력에 의해서라도 개국을 강요하려 한 정한론자가 세력을 얻었다. 서향륭성(西鄕隆盛)·강등신평(江藤新平)·판원퇴조(板垣退助)들의 참의들은 사족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려는 의도도 있어 이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구미 제국을 돌아보고 귀국한 대구보리통(大久保利通)·목호효윤(木戶孝允)들은 내치(內治) 우선의 입장에서 강하게 반대하였기 때문에 정한이 중지되었다. 이를 불만으로 여긴 정한파들은 1873년 정부를 떠났다.
  …1875년 강화도 사건을 일으키고 일본은 조선에 위협을 가하여 다음해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를 체결하였다. 이로 인해 양국간에 국교가 개시되어 부산·인천·원산의 3항이 개항되고 일본은 대륙시장으로 진출할 제일의 계기를 만들었다.
  (주) 일본 군함이 조선의 수도 한성 가까이에 강화도 부근 영해를 침범하여 측량을 실시하고 음료수를 구한다는 이유를 가지고 상륙하려 하자, 동도(同島) 포대의 포격을 받고 교전한 사건.
  (주) 강화도조약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에서 앞서 여러 외국에서 강제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평등한 조약을 조선에 승인토록 하였다.
10
《신일본사(新日本史)》
삼성당(三省堂)
  …서향륭성(西鄕隆盛)은 정한론을 주장하였지만 그 보다도 국내 정비가 우선이라 여긴 암창(岩倉)·대구보(大久保)·목호(木戶)들과 충돌하여 서향(西鄕)외에 판원퇴조(板垣退助)·강등신평(江藤新平)·부도종신(副島種臣)·후등상이랑(後藤象二郎)의 여러 참의들이 1873년 사직하고 하야(下野)하였다. '정한론'이 주장된 배경에는 사족(士族)이 반정부적 기운을 밖으로 돌려 발산하려 한 의향도 가로놓여 있었다.
  …조선과의 통교는 막말(幕末)이래 단절되었으므로 명치(明治)정부는 국교 회복을 제의했는데, 조선에서는 국왕의 부친 대원군이 쇄국주의를 취하여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정한론이 일어났다. 그러나 강화도 사건이 일어난 것을 기회로 1876년에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가 체결되었다. 일조수호조규는 일본인에게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조선에 관세권을 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구미가 일본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주) 1875년 9월 일본 군함이 조선의 영해를 침범해 그 때문에 포격을 당해 일본측도 응전한 사건.
11
《상설일본사(詳說日本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또한 정부는 이웃 나라와 국교를 열려고 조선에 교섭하였다. 그러나 배외 정책을 지키고 있던 조선이 일본의 교섭 태도를 불만으로 여겨 거절하으므로 1873년 서향륭성(西鄕隆盛)·판원퇴조(板垣退助)의 이른바 정한론이 주장되었으나 암창(岩倉)·대구보(大久保)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875년에 강화도사건을 일으키고 다음해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를 체결하여 조선을 개국시키고 대륙으로 진출하는 근거지를 만들었다.
  (주) 강화도 사건은 조선 강화도 부근에서 시위 행동을 하던 일본 군함이 포격된 사건. 일조수호조규는 조선에 불리한 불평등조약이며, 부산 등 2항(인천·원산)을 열고 일본 영사 재판권을 인정하는 것 등이 정해졌다.

   교과서(敎科書)에 정한론(征韓論)은 일본(日本)이 조선(朝鮮)에 국교(國交)를 요구하였으나 조선이 이를 거부함으로 일어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앞서 간단하나마 검토했듯이 정한론(征韓論)은 막말(幕末) 이래 명치초기(明治初期)에 이미 정치론(政治論)으로 발전하고 있었고 전략으로서 이미 확정해 놓고 있었다. 국교교섭(國交交涉)은 정한(征韓)의 구실을 얻으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하겠다.19) 그러나 대부분 교과서(敎科書)가 일본은 우호를 위해 한국에 국교 재개를 요구하였으나 조선(朝鮮) 정부가 배외적인 쇄국 정치를 고집하여 정한(征韓)이 불가피하게 대두되었다는 식의 인식(認識)을 준다. 약하나마 명치(明治) 정부의 정한론(征韓論) 고조의 진위를 사족불만(士族不滿)을 밖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있음을 밝히고 있으나,(1, 6, 9, 10) 정한론(征韓論)의 발생을 1869년(명치 2(明治 2)) 이후로 잡고 있는 점은 같다. 앞으로 일본사(日本史) 교과서(敎科書)는 조선사(朝鮮史)의 왜곡이라는 면에서 보다는 자국의 역사 의식(意識)의 발전을 위해 진실을 학생들에게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한편 일본내 서향(西鄕)을 중심으로 한 정한파(征韓派)들이 조선을 침략하려 했으나 암창(岩倉)·대구보(大久保)·목호(木戶)들이 이를 알고 구미(歐美) 시찰에서 귀국하여 정한(征韓)을 반대하여 정한(征韓)의 기도가 좌절되었음을 기술(1, 5, 8, 9, 11)하여 비정한파(非征韓派)의 세력이 있었다고 하나 사실 일본 정부 내에 비정한파는 거의 전무하였다. 목호효윤(木戶孝允) 같은 이는 "조선에서 사건을 꾸미고 국론을 통일하여 정치적 비판을 딴데로 돌린다."는 철저한 정한파였던 것이다. 단지 정세상 '선내치(先內治) 후정한(後征韓)'을 취한 것이지 결코 정한(征韓)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후정한(後征韓)'으로 미루어왔던 정한(征韓) 계획이 실행에 옮겨진 사건이 1875년 9월의 계획적인 무력 도발인 운양호(雲揚號) 사건이다. 운양호(雲揚號) 사건을 객관적으로 기술한다면 다음과 같다. 조선 해안을 측량 중인 일본군함 운양호가 강화도(江華島) 부근에서 음료수와 땔감을 보급하기 위하여 보트를 육지에 접근시키자 조선 측에서 포격하고 일본이 이에 함포 사격으로 응하고 영종도(永宗島)에 상륙하여 어촌을 불태우고 어민들을 학살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사건의 경위이다. 그러나 우연하게도 강화도 근처에서 물이 떨어졌다는 것이 수상하며 실제 운양호는 물을 보급하지 않은 채 장기(長崎)로 돌아갔다고 한다. 또한 아무런 조약 관계를 맺지 않은 국가에 와서 해로 연구를 하고 측량을 실시한다는 것은 그들이 계획적인 도발을 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교과서에는 시위 행동 중,(1, 3, 4, 5, 6, 7, 11) 청국으로 운행 중,(2) 측량실시 중 음료수를 구하려다.(9)해로 연구 중,(8)에 포격을 당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사 교과서에 기술된 운양호(雲揚號) 사건은 역사의 내면과 진위를 제시하지 않고 있으며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가 사라진 기술을 하고 있다. 왜 측량을 실시하고 시위 행동을 해야 했는가의 해명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교재로서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을 때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은 포격을 받은 피해자가 정당방위로 교전을 하고 피해보상을 요구한, 전혀 침략의 의도를 갖지 않았다는 식의 의식(意識)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2) 임오군변(壬午軍變)과 갑신정변(甲申政變)

  일본 교과서에서 임오군변과 갑신정변은 '한성(漢城)의 정변'으로서 같은 차원에서 다뤄지고 있다. 그것은 침략자의 시각에서 대부분의 역사 사실을 폭동과 쿠데타로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후 일본은 경제적 침략을 단행하여 한국민의 생존권을 위협하였다. 일본은 군함을 배경으로 무력을 과시하면서 국내의 금과 농산물, 수산물 등 생활 필수품은 싼 가격으로, 외국의 수입 섬유류 등은 비싼 가격으로 팔아, 서울의 도시 민중들은 물가 폭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 침략과 함께 일본 정부는 한국을 종속시키기 위하여 군사 개편에 개입하였다. 그리하여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고 군사 교관으로서 일본 육군 소위 굴본례조(堀本禮造)가 초청되어 훈련을 시켰고 구식 군인들과는 큰 차별을 두었다. 1882년 구식 군인들은 봉록미가 13개월이나 밀려 있었고 여기에 타락된 권력이 모래가 섞인 봉록미를 지급하자 경제 침략을 받고 있던 도시의 빈민들과 군인들이 합류하여 일제 침략자와 부패 정권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 임오군변이야말로 일부 군인들의 난동과 폭동이 아닌 민족 투쟁의 선구이며 민중 운동인 것이다. 그러나 교과서 안에서의 임오군변은 친일정책을 취하던 정부와 보수파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일본이 부당한 피해를 본 것으로 하고,(1, 2, 3, 4, 7) 민중운동의 참모습을 보지 않고 권력 투쟁으로만 해석하려 한 기술(8, 10, 11)이 대부분이다.
  또한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은 봉건제를 개혁하여 근대화를 꾀하였던 개화파(開化派)들의 정변으로, 김옥균들은 앞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모범으로 삼아 근대적 개혁을 구상하고, 복택유길(福澤諭吉)과의 친분을 통해 명치정부(明治政府)와 교류를 가졌다. 그러나 일본(日本)은 개화파를 친일파(親日派)로 끌어들여 이용하고자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으나 수구파(守舊派)의 반격으로 곤경에 빠지자, 개화파는 정권 탈취를 구상하여 정변을 일으켰고, 청군(淸軍)의 개입으로 형세가 불리해진 일본은 일체 손을 떼었다. 그로써 3일 만에 신정권은 무너지게 되었다. 복택유길(福澤諭吉) 같은 이는 일본의 세력을 부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무너지자 "조선 인민을 위하여 그 국가의 멸망을 축하한다. "는 망언을 서슴치 않았다. 김옥균 등 개화파(開化派)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은 일본을 자세히 알지 못한 채 일본의 지원을 받고자 한 것과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데에 실패의 원인이 있지만《갑신일록(甲申日錄)》에서 볼 수 있듯이 문벌 폐지, 지세 제도 개혁, 재정, 군제 등의 근대화를 통해 사회 개혁을 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교과서에는 임오군변(壬午軍變) 때와 마찬가지로 갑신정변(甲申政變) 역시도 권력 투쟁으로 정권을 획득하려고 외세에 의존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밖으로의 외압이 치열해지고 있을 때 침략을 배제하고 근대화 개혁을 달성하려고 노력한 그 당시의 자주적인 역사는 일본의 교과서에 의해 철저히 타율(他律)의 길을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1, 2, 3, 4, 6, 7, 9, 10, 11)

◇ 임오군변(壬午軍變)·갑신정변(甲申政變)

1
《개정판신일본사(改訂版新日本史)》
제일학습사(第一學習社)
  일본은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의 특권을 활용하여 조선으로의 경제적 진출을 도모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을 속국시하고 있던 청국은 경계를 강화하였다. 조선 국내에서는 유신(維新) 후의 일본을 모범으로 하여 자국의 근대화를 추진하려 한 친일파와 청국과의 관계를 유지하여 일본의 세력을 배제하려 한 친청파의 대립이 깊어졌다. 거기에 왕족의 권력 투쟁이 더하여 한성에서 2회에 길쳐 정변이 일어났다. 1882년 최초의 정변에서는 당시 친일정책을 취하고 있던 정부에 대하여 국왕의 부친 대원군이 난을 일으키고 일본인 군사교관을 살해하고 일본공사관을 불태웠다. 이때 일청 양국이 간섭하여 난을 진압하고 일본은 조선 정부에 손해배상과 군대 주둔을 강하게 요구 하여 승인시켰다.(임오의 변) 그 후 조선의 정권은 친청파가 주도하였다. 이에 대하여 친일파는 1884년에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아 쿠테타를 일으키고 독립 정권을 세우려 하였지만 청국군에 제압되었다.(갑신의 변)
2
《삼성당일본사(三省堂日本史)》
삼성당(三省堂)
  일본은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를체결한 이래 영사 재판권과 무관세 특권을 이용하여 대조선 무역을 확대하고 조선의 내정개혁에 관여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이에 대하여 청은 일본의 조선 진출을 저지시키기 위하여 조선의 반일파의 원조를 구하고 있었다. 1882년 7월 한성에서 정부에 반대한 군대의 반란이 일어나 그 화살이 일본으로도 향해 일본 공사관이 반일파에 습격되었다(임오군란).
  이후 조선에서는 청과 맺은 정권의 유지를 꾀하는 사대당과 일본을 따라 정치 개혁을 실행하려한 독립당과의 대립이 치열해졌다. 1884년 12월 독립당은 공사관 경비의 일본병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실행하였으나 청군의 공격을 받고 패퇴하였다.(갑신사변)
3
《일본의 역사(日本の歷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명치 초년 조선을 개국시키려던 일본은 열국보다 앞서 세력을 조선에 뻗치고 조선을 속국으로 보고 있던 청국과 대립하였다. 조선 국내에서는 일본과 결합하여 국내 개혁을 진행시키려한 김옥균 일파가 1884년 일본의 원조로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청국군의 출동으로 실패하였다.(갑신사변)
4
《일본사개정판(日本史改訂版)》
실교출판(實敎出版)
  조선을 개국시킨 일본은 1880년 한성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무역을 확대함과 동시에 내정 개혁을 요구하는 민씨 일파를 지지하였다. 그 때문에 민씨 일파에 반대한 국왕의 부친 대원군 일파의 지지를 받은 병사와 시민이 1882년 일본공사관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임오군란)
  그러나 이 사이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는 청국과 일본의 대립이 깊어지고 또한 조선 내부에서도 청국을 종주국으로 한 사대당(事大黨)에 대해 일본과 연결되어 개혁을 꾀하려 한 독립당(獨立黨)이 대두하였다. 독립당은 1884년 청불전쟁을 계기로 일본 수비대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청국군의 내원(來援)으로 실패하였다.(갑신사변)
  김옥군·박영효들 개혁파가 중심으로 청불전쟁에서의 청국 피해를 기회로 청국에 의존하려한 민씨 일파(사대당) 정권의 타도를 계획하였다.
5
《고교일본사(高校日本史)》
삼성당(三省堂)
  …그 위에 1882년에 조선에서 임오군란·갑신정변 등 폭동·쿠데타가 일어나고 조선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일본과 청국의 대립도 격화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 정부는 청국과의 전쟁 준비의 필요를 역설하였다. 국민들 사이에도 조선에의 멸시가 생기고 한편 자유당 등 민권파 안에서도 정부의 대외정책을 지지하고 국권 확장을 주장하는 논의가 많아쳤다.
  (주) 임오군란은 조선의 병사와 도시 빈민의 반정부 반일 폭동이며 청국은 이를 기회로 조선에 군사 개입하고 일본도 사건 후 한성에 주둔하였다. 갑신정변은 김옥균들의 개화파가 청조(淸朝)에 의존하려 한 수구파에게서 정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일으킨 쿠데타이다. 개화파는 일본군을 이용하려 하고, 일본군도 개화파에 호응하였는데 청국군과 정부군의 반격으로 쿠데타는 실패하였다.
6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학교도서주식회사(學校圖書株式會社)
  국내에서 인권 운동이 고조되어 갈 무렵, 정부는 조선으로의 침출(侵出)을 개시하였다. 조선에서는 1882던 7월 일본 군인이 지도한 신군대가 우대되고 있는 것에 불만을 가진 구군대의 병사들이 한성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개국 이후 일본의 경제적 진출에 반발이 더해가고 있던 민중도 가세하여 일본 공사관을 불태웠다.(임오사변) 일본 정부는 곧바로 군함을 파견하여 강경한 교섭을 벌린 후 조선 정부에 손해 배상금의 지불과 공사관 호위를 위한 군대 주둔권 등을 인정받았다. 임오사변 후 청은 일본의 침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조선의 보수파를 지지하고 종속 관계를 강화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일본에 의지해 세력 과대를 꾀하려한 개혁파 김옥균들은 1884년 12월 일본 공사관 수비대의 지원을 얻어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우세한 청군의 반발을 받아 패배하였다.(갑신사변)
7
《개정일본사(改訂日本史)》
동경서적주식회사(東京書籍株式會社)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를 체결하여 무역상 유리한 입장을 차지한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주장한 청국에 대하여 정치상으로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1882년에는 경성에서 국내 개혁파의 군제 개혁과 물가 등귀에 반발한 병사가 봉기하고, 그에 합류한 민중이 왕궁을 포위하고, 나아가 군사 고문 파견 등으로 군제 개혁을 지원하고 있던 일본 공사관을 불태웠다.(임오사변)
  그후 조선에서는 일본의 명치유신을 모방하여 급격히 제도들의 근대화를 꾀하려한 독립당과 종래의 국내 체제와 청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한 사대당의 대립이 격렬해졌다. 1884년 독립당의 김옥균들은 일본공사관 수비대의 응원을 받아 정변을 일으켰는데 청국 군대의 반격을 받아 실패하였다.(갑신사변) .
8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청수서원(淸水書院)
  일본은 조선을 개국시킨 후 무역을 확대하고 내정에도 관여하였다. 조선을 속국으로 둔 청국도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하여 일·청 양국은 조선을 둘러싸고 대립을 더해 갔다. 한편 조선 정부내에서는 국왕 아래 민씨 일족이 실권을 장악하고 지배 계급인 양반내의 개화파를 기용하여 정부와 군대의 강화책을 진행하였다. 개화파는 일,청 양국에 사절단과 유학생을 파견함과 동시에 내정 개혁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국왕의 부친 대원군과 양반내의 보수파는 이에 반대하여 1882년 임오사변을 일으켰다. 그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옥중의 보수파를 석방하고 대원군을 정권에 복귀시켰다. 그러자 개화파는 청군에 출병을 요구하였으므로 청국군이 출동하여 난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천진(天津)으로 연행하였다. 일본 방문 중에 있었던 개화파의 김옥균들은 국권을 청국에 매도하는 것으로 이를 비판하였다. 여기에 개화파는 청국과 맺은 사대당과 이를 끊으려 하는 독립당으로 분열하였다. 이 사이 일본도 출병하여 배상금과 한성 주병권(駐兵權)을 획득하였다.(제물포조약) 이 사변 후 청군은 한성에 상주하고 청국의 민씨 정권에로의 지도력이 강화되었다. 독립당의 김옥균은 일본의 지지를 입어 1884년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갑신사변) 그러나 청군의 출동으로 독립당은 실패하고 김옥균 들은 일본·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일본도 또한 출병하였으므로 일·청 양국의 격돌 위기가 심각해졌다.
9
《요설일본의 역사(要說日本の歷史)》
자유서방(自由書房)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 체결로 일본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조선과의 결속을 강화하였다. 이에 대하여 종래의 관계로 조선을 속국으로 생각하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한 청국은 일본 진출에 강하게 반발하였으므로 조선을 둘러싸고 일청 양국은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일본과의 무역 확대로 물가가 등귀하였으므로 민중의 반일 감정이 높아지고 이러한 중에 1882년 한성에서 군대 폭동이 일어나 일본 공사관을 습격,(임오사변 또는 임오군란) 일·청 양국에서 군대를 파견하였다.
  조선 국내에서는 청국에 의해 정권을 유지하려 한 사대당과 일본의 근대화를 본받아 국정을 개척하려한 독립당이 격렬히 대립하게 되었다. 1884년 독립당은 일본군의 힘을 빌려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실패하였다.(갑신사변)
10
《신일본사(新日本史)》
삼성당(三省堂)
  조선은 옛부터 청국에 신종(臣從)하고 청 또한 조선을 속국으로 여겼기 때문에 일본의 진출을 허락치 않아 조선에서 일·청 양국의 다툼이 일어 1882년, 1884년 2번에 걸쳐 조선에서 사변이 발생 하였다.
  (주) 청에 따르면서 보수정치를 유지하려 한 일파와 일본과 결탁하여 국내를 쇄신하려 한 일파가 항쟁을 벌여 결국 임오의 변, 이어 갑신의 변을 일으켰다. 일·청관계는 급박하였으나 1885년 천진조약을 체결하여 격렬해지는 것을 중지할 수 있었다.
11
《상설일본사(詳說日本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 체결 이후 일본·조선의 관계는 호조되고 있었으나 1882년 임오사변을 경계로 친일적인 개혁파의 세력이 후퇴하고 한국 정부는 일본에서 벗어나 청국에 의존하였다. 이 경향은 1884년의 갑신사변에 의해 더욱 강해져 일본 국내에서는 대청전쟁을 주장하는 자도 나타났다.
  (주) 친일개혁파 김옥균 등 독립당이 일본 공사의 원조하에 일으킨 쿠데타인데 청국 군대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제2차 경성사건이라 한다. 이 사건에서 일련의 수비대가 청국 군대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일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런 식의 기술에서라면 역사에서 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온통 친일파(親日派)와 친청파(親淸派)의 대립이 사건 전개의 기본 흐름이 되고 있다. 교과서에서 일본과 친일파는 한국을 근대화시키고 개혁시키려 한다는 이미지를 주고 있고, 청과 친청파는 한국을 속국으로 여기고 정권만을 유지하려 한다는 이미지를 심어, 이 양자를 묘하게 대립시키면서 기술하고 있다. 또한 수구파(守舊派)와 개화파(開化派)는 민족의 위기를 뒤로 하고 권력 투쟁과 파벌만을 일삼는다는 상을 주고 있다. 이들 정치 세력의 대립은 사상적, 정책적 대립에서 발생한 갈등이지 결코 자주성 없는 괴뢰적 성격은 아닌 것이다.
  한편, 이 부분의 기술을 통해 일본과 친일 세력을 독립과 근대 개혁에 연관지어 은근히 주입하고 있는데, 그 때 당시 일본인들이 독립이라고 주장한 것은 청국의 영향력을 줄이려 한 것이지, 한국의 진정한 독립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청국으로부터 한국을 독립시키고 근대 개혁을 통해 일본화 하는 것은 식민지화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 방곡령(防穀令)·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과 한일합병(韓日合倂)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에서 얻은 관세자주권(關稅自主權)·치외법권(治外法權)을 이용한 일본 상인들의 경제적 침탈은 민중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일본 시장 가격과 비교하여 싼 가격인 미(米)와 대두(大豆)를 주목한 일본 상인들은 이윤이 많은 수출품으로서 본격적인 수출 무역을 전개하였다. 미(米)와 대두(大豆)의 반출이 급증하자 노동력을 팔아 장시(場市)에서 식량을 구입하던 농민들은 3∼4배로 뛴 물가 앙등으로 생활에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일본 상인들이 특전과 군사력의 보호아래 거류지(居留地)로부터 벗어나 생산지에까지 침투하여 미(米)와 대두(大豆)를 반출하자 1889년 함경도 관찰사에 의해 곡물 수출 금지령이 내렸다. 이는 지방관의 행정 권한을 발휘한 것으로 한일간에는 1883년 이미 곡물(穀物) 수출을 제한, 금지할 수 있다는 조약에 근거한 것이다.20) 그러나 일본(日本) 거류지(居留地) 상인들은 외교관(外交官)을 통해 정부에 강력한 압력을 넣어 명령(命令)의 취소는 물론 11만엔의 배상금을 손해배상이라는 명목으로 탈취한 것이다. 곡물 수출 금지를 명령할 수 있는 권리를 확인하는 조치였던 방곡령(防穀令)은 정당한 주권 행사이자 경제적 침탈 행위를 금지시키려한 국민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과서(敎科書)에 기술된 방곡령(防穀令)사건은 단순히 일본 상인에게 손해를 입혔다.(1) 혹은 청(淸)의 세력을 배경으로 부당하게 대일수출금지(2)를 취하였다는 식으로 이해한다. 즉 부당한 손해를 입어 당연한 권리로서 손해배상을 요구했다는 기술인 것이다. 그 외에는 방곡령(防穀令) 사건을 지나치게 객관적으로만 보아 정확한 사건의 경위를 알 수 없도록 기술하고 있다.(4, 6, 8)

◇ 방곡령(防穀令)·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한일합병(韓日合倂)

1
《개정판신일본사(改訂版新日本史)》
제일학습사(第一學習社)
  천진(天津)조약 후에도 조선은 청국에 접근하고 1889년에는 방곡령을 내려 곡물의 대일 수출을 금하는 등 일본에 대한 정책을 강화하였다. 일본 상인이 손해를 입었기 때문에 정부는 조선에 대하여 강경히 보상을 요구하였다. 1894년에 조선 국내에서는 동학당으로 불리는 배외적, 민족주의적 신조를 가진 집단이 주도하고, 제국주의 침략 배제와 부패 관리의 처벌 등을 요구하는 갑오농민전쟁이 발생하였다. 조선 정부는 청국에 파병을 구하여 난을 끝냈다. 일본은 천진조약을 맺어 조선에 군대를 보내 조선의 내정 개혁을 지도하였다. 이에 대하여 청국은 일본의 철병을 요구하고 일·청양국은 예리하게 대립하였다. 그 대립 중에 러시아와 영국이 개입하여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하였다. 일본과 영국과의 사이에 조약 개정이 성립한 직후 1894년 7월에 풍도충(豊島沖)에서 일청 양국군함이 교전해 8월에 일·청전쟁이 일어났다.…일·러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1905년에 한국을 보호국으로 하여 외교권을 손에 넣고 한성에 통감부를 두었다. 1909년에 초대 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암살된 것을 계기로 다음해 일한병합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을 식민지로서 경성에 조선 총독부를 두었다.
2
《삼성당일본사(三省堂日本史)》
삼성당(三省堂)
  …이보다 앞서 조선에서는 일본 세력 침투에 대한 반발이 강해지자 조선의 대일 정책도 청의 세력을 배경으로 강경해져 조선 무역에서의 일본 비중은 차츰 저하하였다. 1889년 조선 지방관청이 사전 통고 없이 곡물의 대일 수출을 금지하자 일본도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 1893년에 손해 배상 요구를 조선에 하였다. 이에 조선을 둘러싼 일·청 양국은 대립이 심각해졌다.
  1894년 5월 조선에 농민 반란(동학당의 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청은 조선의 요청에 의해 반란 진압을 위해 출병하였고, 일본도 또한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출병하였다. 일청 양국은 조선의 내정개혁 주도권을 둘러싸고 다투어 정세는 긴박하였다. 일본은 러시아 등의 간섭은 받고 있었으나 영국과의 조약 개정이 실현되었으므로 간섭에 대한 영국의 견제를 기대하고 개전의 결의를 굳혔다. 7월 25일 일본 함대는 풍도충(豊島沖)에서 청함대을 공격해 8월 1일 일·청전쟁이 시작되었다.…일·러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한국으로의 침략 정책을 급속히 진행시키고 1904년 2월 일한의정서를 체결하였다. 한국의 안정에 필요한 조치를 취함과 그를 위한 군략상 필요한 토지를 수용하는 것 등의 권한을 한국에 승인시켰다. 결국 8월 제1차 일·한협약에 의하여 한국 정부에 일본이 추천한 고문을 넣어 재정·외교·군사에 걸친 발언권을 획득하였다. 후에 일·러전쟁 결과 미국·영국·러시아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했으므로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하여 그 외교권을 박탈하고 또한 한성에 통감부를 설치,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초대 통감으로 임명하였다. 일본은 계속해서 1907년 7월 제3차 일·한협약을 체결하고 한국의 내정권을 획득하고, 한국 군대의 해산을 명하였다. 그리고 1909년 7월에는 한국을 일본에 병합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해 한국 정부 및 국민 사이에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나 1909년 10월 전통감 이등(伊藤)은 한국인 안중근에게 하얼빈역에서 암살되었다. 일본은 한국인의 저항 진압에 힘씀과 동시에 한국의 병합을 서둘러 1910년 8월 일·한병합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 조선으로 하고 경성에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현역 무관 총독을 임명하였다.
3
《일본의 역사(日本の歷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1894년 조선 정부의 전제 정치에 반대한 대규모적인 농민 반란이 일어나고 청국은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그 진압을 이유로 출병하였다. 일본 정부도 세력 군형을 유지하기 위해 이와 대항하여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 당시 영국과의 조약 개정 교섭이 진행되어 영사재판 제도의 철폐, 관세 자주권의 일부 회복을 내용으로 한 일·영통상항해조약이 조인되었다. 이에 힘을 얻은 일본 정부는 청국에 대하여 강경한 자세를 늦추지 않자 동년 7월말 결국 일·청 양국은 격돌하여 8월 일본은 청국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황색 인종 나라인 신흥의 일본이 백인 대국 러시아에 승리를 거둔 것은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일·러전쟁 말경 손문을 지도자로 청조(淸朝) 타도 혁명을 목표로 한 중국 혁명동맹회가 동경에서 발족된 것으로 상징되는데, 그는 아시아의 민족 운동 고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일본은 열강의 식민지 정책을 모방하여 동아시아에서 세력 확대를 꾀하였다. 일·러 전쟁후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서 통감을 두고, 한국의 외교·내정·군사 실권을 차례로 수중에 넣고 있었다. 한국민은 이에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일본은 군대를 출동시켜 진압하였다. 그리하여 이등박문(伊藤博文) 암살 사건을 초래하고 1910년 결국 한국을 병합하여 일본의 영토로 하고 조선총독부를 두어 식민지 지배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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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개정판(日本史改訂版)》
실교출판(實敎出版)
  …그 후도 일본의 경제적 진출은 계속되어 미(米)·대두(大豆) 등 대량의 농산물을 매점하여 조선 민중의 대일 감정을 악화시켰다.
(주) 1889년 일본의 매점(買占)을 저지하기 위하여 조선 일부에서 곡물의 관내(管內) 이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발포, 그 후 일본이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기 때문에 일조 관계가 악화하였다.
  1894년에 조선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갑오농민전쟁)은 이왕조의 봉건지배에 대한 반발로부터 일본과 구미의 침입에 대한 반대로 발전하였다. 조선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청에 구원을 청하였다. 청국에서 출병 통고를 받은 일본 정부는 즉각 출병하고 조선 정부에 내정개혁과 청국과의 존속 관계 단절을 요구하였다. 이것이 거부되자 일본군은 조선 왕궁을 점령하고 그 압력 아래에서 조선 정부에 천국군의 철퇴를 명하였다. 이리하여 7월 25일 풍도충해전(豊島沖海戰)이래 일·청 양국은 교전 상태로 들어가 8월 1일 청국에 선전포고하고 일·청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러전쟁의 개전 직후 일·한 의정서 체결이래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가 시작되어 나아가 전후의 3차에 걸친 일·한협약에서 한국의 내정·외교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 사이 1905년에, 설치된 통감부의 초대 통감에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취임하였다. 더욱이 동년에 성립된 카스라-테프트 협정과 제 2차 일·영동맹에 의하여 한국을 일본의 세력 범위로 한 것을 미국과 영국에 승인받았다. 이리한 일본 침략에 대해 한국은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1907년에는 헤이그밀사 사건이 일어나고 의병운동이 활발해졌다. 1909년에는 전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당시 추밀원의장)이 하얼빈 역두에서 한국 청년 안중근에게 암살되었다. 일본은 이를 계기로 군대를 증강하고 1910년에 일·한병합조약을 성립시키고, 한국을 일본 영토로 하고 새롭게 설치한 조선 총독부 아래에서 통치하는 것으로 하였다.(한국병합)
  (주) 제1차 협약(1904년)에서는 외교·재정 고문을 한국 정부에 두고, 제2차협약(1905년 을사 보호조약)에서는 외교권을 접수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감독하였다. 제3차 협약(1907년)에서는 한국 군대를 해산하였다.
(주) 한국 황제 고종이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리고 있던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 일본 정책을 국제적으로 폭로하려고 하였다. 그 때문에 일본은 황제를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켰는데, 의병운동으로 불리우는 무장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5
《고교일본사(高校日本史)》
삼성당(三省堂)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지방 관리의 학정과 일본을 비롯한 외국 침입에 반대한 농민 활동이 점차 활발해지고 1894년에는 동학의 조직과 연결된 농민 반란군과 정부군과의 사이에 전쟁 상태로 되어(갑오농민진쟁), 6월초 조선 정부는 청국에 출병을 요구하였다. 이것을 안 일본 정부도 곧바로 일본군을 조선으로 출병시켰다.
  …일·청전쟁의 승리로 천황의 권위는 한층 높아져 가고 동시에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에 대한 우월감이 국민 사이에 번졌다. 한편 조선에서는 전쟁 중에 농민이 재차 각지에서 봉기하여 일본군과 충돌하였다. 1895년 10월 왕비 민씨가 일본 군대와 민간에 의해 왕궁에서 피살되면서 일본에 대한 반감이 한층 커졌다.
  한국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일본 정부는 일·러전쟁이 시작되자 곧 한국 정부에 강제로 일·한의정서를 체결하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토지 수용 등 많은 특권을 승인시켰다. 그후 일본인 고문을 한국 정부에 보내 협정을 체결하였다. 전쟁 후 1905년 11월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이를 보호국으로 하고 한성에 통감부를 두고 한국의 내정 전반을 좌우하게 되었다. 1907년 7월에는 일본 정부의 뜻에 따라 주지 않는 국왕을 퇴위시키고 나아가 행정·사법의 실권을 통감에게 집중케 한 협약을 체결하여 드디어 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하여 무기를 갖고 싸운 의병 투쟁과 언론·출판·교육 활동을 통하여 애국정신을 기르려 한 애국문화계몽운동이 일어났다. 한국 전토에서 번지고 있던 이들 운동은 한국인의 민족적 연대감을 강화시켰다. 일본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함과 동시에 한국의 요소요소에 헌병을 상주시키고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감시하였다. 1909년 10월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하얼빈에서 한국인 안중근에게 저격당해 사망하였다. 이리하여 1910년 8월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여 새로이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현역 육군 대장을 총독으로 한 군사적인 지배체제를 세웠다. 한국은 일본의 상품 수출 시장·식료·원료의 공급지로 됨과 동시에 대륙진출의 군사적 거점으로서 의의를 가졌으며 일본이 영유하는 최대의 식민지가 되었다.
6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학교도서주식회사(學校圖書株式會社)
  이보다 앞서 조선은 일본과 청의 경제적 진출로 곤경에 빠졌다. 1889년 지방 기관 중에는 곡물의 대일 수출을 금지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일본에 대한 자세를 강경화하기도 하였다. 그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일본 상인이 받은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강경한 교섭을 추진해 1893년 최후통첩을 하고 이를 실현하였다. 다음해 1894년 조선에서는 동학의 신봉자를 중심으로 한 농민 반란이 남조선 일대에 퍼져 정부군을 격파하고 세력을 증강하고 있었다(동학당의 난). 이에 대하여 조선 정부가 난의 진압을 청에 요청했다는 소식이 도착하자 6월 일본정부는 곧바로 출병을 결정하고 공사관·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파병하였다. 일청 양국의 군대는 한성 주변에서 대치하다가 결국 7월 25일 일본 군대가 풍도충(豊島沖)에서 청함대를 공격하여 전쟁의 단서를 열고 8월 1일 일본은 청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일본은 일·러 강화조약에 조인하기 직전 카스라·테프트 각서를 체결하고 나아가 일영동맹을 개정(改訂)하고 한국 지배에 대하여 영·미 양국의 승인을 얻었다. 이로써 일본은 전쟁 중 체결한 제1차 일·한 협약, 1905년 11일에 제2차 일·한협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였다. 그에 따라 한성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하고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초대 통감에 취임하였다. 나아가 일본 정부는 한국 황제에 의한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1907년 황제에게 양위할 것을 위협하여 제3차 일·한협약을 체결하고 내정(內政) 감독권을 장악하고 한국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강행에 대해 조선 민중은 각지에서 저항하였지만 일본 군대의 힘으로 이를 진압하고 1910년8월 일·한병합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을 완전히 일본 통치하에 두었다.(한국병합)
  (주) 조선 각지에서 의병 운동이라고 부르던 무장 반란이 일어나고 또한 1909년에는 전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의 독립운동가 안중근에게 암살되었다.
7
《개정일본사(改訂日本史)》
동경서적주식회사(東京書籍株式會社)
  천진(天津)조약 체결 후에도 조선을 둘러싼 일·청 양국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1894년 지방 수령의 압정과 일본을 비롯한 외국들의 경제적 진출에 대하여 동학을 신앙으로 한 단체를 중심으로 한 농민 반란이 조선 남부에서 일어나고 나아가 전토에 파급되었다.(동학당의 난) 조선 정부의 의뢰로 청국이 원군을 파견하자 공사관원과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일본도 출병하였다. 전후 처리를 둘러싸고 일·청양국에 긴장이 고조되면서 동년 7월 25일 양국 해군이 풍도충(豊島沖)에서 포화를 교환하고 8월 1일 일본은 청국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일·청전쟁이 개시되자 민중과 정부와의 항쟁을 중시하고 거액의 군사 예산을 세우고 국민 세론도 전쟁 수행에 통일되었다.
  (주) 그리스도교를 서학이라 부른 것에 대하여 민간신앙을 기반으로 유·불·선 3교를 취하여 만들어진 조선 종교를 동학이라 칭한다. 이 농민 반란은 갑오농민전쟁으로도 불리운다.
  일·영동맹의 개정과 카스라·테프트 협정에 의하여 한국에서의 권익을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승인받은 일본은 포츠담조약 조인 후 한국 지배를 본격적으로 개시하였다. 일·러전쟁 중에 일본인을 정치 고문으로 파견할 것을 승인토록 한 제1차 일·한협약을, 1905년에는 제2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고 한국을 보호국으로서 외교권을 장악하고 경성에 한국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1907년에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나자 한국 황제를 퇴위시키고 제3차 일·한협약을 체결하고 내정 감독권도 장악하고 군대해산을 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 군민(君民)은 격렬한 저항을 보였지만 일본은 군대를 출동시켜 이를 진압하였다. 더욱이 1910년에는 일·한병합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을 일본에 병합시키고,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여 무력을 배경으로 한 식민 지배를 추진하였다.
  (주) 해산을 명령받은 군대를 중심으로 한 의병운동 등의 저항 운동은 그후도 계속되었고 1909년에는 전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하얼빈 역두에서 한국의 독립을 노린 청년에 의하여 암살된 사건이 일어났다.
8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청수서원(淸水書院)
  조선에서는 흉작과 일본 상인의 미매(米買) 독점으로 인해 미곡이 등귀하자 미곡 수출이 금지되는 등 일본과의 마찰이 커졌다. 이때 1894년 봄 친일파 김옥균이 암살되고 조선 남부의 전라도에서 동학이 지도하는 배외적인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갑오농민전쟁) 진압에 나선 청국이 6월에 파병하였으므로 일본도 이어 출병하였다. 일·청 양국은 조선에서의 지도권을 둘러싸고 대립해 결국 7월말 풍도충(豊島沖)에서 전쟁의 단서를 열어 일·청 전쟁이 일어났다.
  일·러 전쟁이 시작된 1904년 2월 일본은 한국과 일·한 협정서를 체결하고 군사상 필요한 토지를 수용하고 8월에 제1차 일·한 협약에서 일본이 한국정부에 추천한 재정·외교·고문을 두고 그 영향을 강화하였다. 1905년 11월 한성에 부임한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제2차 일·한 협약을 체결하고 한국을 보호국으로 하고, 다음해 통감부를 두고 초대 통감이 되었다. 그후 1907년에 제3차 일·한 협약에서 내정권을 얻어 한국군을 해산시켰다. 이에 대하여 한국에서는 민병이 봉기하고 1909년에는 전통감 이등(伊藤)이 한국 청년에게 하얼빈에서 암살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계기로 1910년 일·한 병합을 강행하였다. 새로이 경성에 조선 총독부를 두고 육군대장을 총독으로 임명하고 헌병경찰제도를 설치하고 토지조사와 철도정비를 추진하고 식민지 지배를 실현하였다.
9
《요설일본의 역사(要說日本の歷史)》
자유서방(自由書房)
  …1894년 조선에서 대규모 농민 반란이 일어나고(갑오농민전쟁 또는 동학당의 난),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청국이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이에 대항하여 군대를 파견, 일·청 양국의 대립이 격화하였다. 결국 그 해 8월 일본은 선전포고하였다.
  (주) 당시 러시아·영국·프랑스의 제국(諸國)도 조선에 진출하였으므로 급격한 경제, 사회의 변화가 일어나 조선 국민의 생활을 압박하였다. 그 때문에 농민들 사이에 배외적인 종교가 일어나 카톨릭을 서학이라 한 것에 대해 동학이라 하였다.
  일·러전쟁 결과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적 지위가 열강으로부터 인정되자 일본은 1905년 제2차 일·한협약을 체결하고 한국의 외교권을 차지하여 보호국으로 하고 또한 통감부를 한성에 두고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초대 통감이 되었다. 1907년에는 제3차 일·한협약을 강제하여 내정권도 손에 넣었다. 이러한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에 대해 한국에서는 저항 운동이 일어나고 1909년 전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하얼빈에서 한국인에게 암살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다음해 1910년 일·한병합조약을 맺어 한국을 병합하고 조선을 완전히 지배아래 두고 새로이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10
《신일본사(新日本史)》
삼성당(三省堂)
  조선은 옛부터 청국에 신종(臣從)하고 청 또한 조선을 속국으로 여겼기 때문에 일본의 진출을 허락치 않아 조선에서 일·청 양국의 다툼이 일어 1882년, 1884년 2회에 걸쳐 조선에서 사변이 발생하였다. 그 후로 일본은 조선을 속국이라 주장한 청과 싸워 조선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확립하려고 힘썼다. 1894년 결국 일·청천쟁이 일어나고 그 다음해 전투에서 일본군은 승리를 거듭하였는데 전쟁터가 된 조선에서는 노역, 물자 조달 등에서 인민의 허락을 얻을 수 없던 적이 여러번이었다.
  …전후 일본은 새로이 세력권이 된 남만주 한국의 경영에 박차를 가하였다. 한국에는 통감부를 두고 보호국화하고 한국군민(韓國君民)의 저항을 누르고 1910년 이를 합병하여 조선 총독부를 두고 식민지로서 통치하게 되었다.
11
《상설일본사(詳說日本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천진(天津)조약 체결 후 일본 정부는 조선에 대해 주도권 회복을 기도하고 청국에 대항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기 위해 매진하였다. 그러던 중 1894년 조선 국내에서 배외적인 농민반란(동학당의 난)이 일어났다. 청국 정부는 조선 정부로부터 출병 요청을 받고, 천진조약에 따라 출병을 일본에 통지하고, 일본도 이에 응하여 출병하였다. 일·청 양국은 반란 진압 후 조선 정부 개혁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동년 8월 드디어 일·청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러 전쟁후 정부는 한국의 식민지화의 완성과 남만주에서의 권익 확립에 힘썼다. 한국에 대하여는 전후 차츰 제2차 일·한협약을 체결하여 보호국으로 하고 1910년에는 일·한병합조약에 조인하도록 하여 식민지로서 조선 총독부를 두었다.
  (주) 일본은 일·러전쟁 중에 제1차 일·한협약을 체결하여 고문정치를 승인토록 하였고, 1905년에 제2차 협약에 의해 한국 외교권을 박탈하여 한성에 통감부를 두고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초대 통감이 되었다. 후에 1907년에는 제3차 협약을 채결하여 내정권까지 일본에 빼앗겼으므로 한국민은 거세게 반발하여 1909년 이등(伊藤)은 하얼빈 역두에서 암살되었다.

  한편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반침략(反侵略), 반봉건(反封建) 농민운동(農民運動)인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을 배외적(排外的)인 농민반란(農民反亂)으로 규정하고 있으며,(2, 9, 8, 11) 혹은 반봉건적(反封建的) 농민반란(農民反亂)으로(3) 또한 동학란(東學亂)으로 규정하기도 한다.(2, 6, 7, 9, 11) 포(包)·접(接)이라는 동학(東學)의 조직을 이용하고 포(句)의 책임자들에 의해 농민군(農民軍)이 조직되었으나 대다수는 일반 농민대중(農民大衆)이었다. 따라서 동학란(東學亂)으로 본다면 그것은 종교(宗敎) 차원으로 한정되고 말아 본질적인 성격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의식하여 '농민반란(農民反亂)(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 하여 기술한 곳도 있다.(4, 5, 8, 9) 이처럼 각 교과서(敎科書)마다 용어가 정리되지 않고 있음을 보는데 각 교과서에서는 민중운동(民衆運動)의 차원에서 올바른 성격을 규정해야 할 것이다. 한편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 일어난 원인으로서의 외세(外勢) 세력을 기록하면서 정작 일본(日本)은 슬그머니 빠져 있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의 기치 중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이 '반일(反日)'이었으며 그것은 바로 반침략(反侵略)을 의미하는 것임을 기술해야 할 것이다.
  조일합병(朝日合倂)이 되기까지 한국민(韓國民)은 의병운동(義兵運動)의 무력(武力) 투쟁과 애국계몽(愛國啓蒙)의 문화운동(文化運動)을 양면으로 전개하여 국권(國權)을 되찾으려는 필사적인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교과서(敎科書)에는 투쟁과 저항의 역사를 별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마치 한국인은 나라를 빼앗겨도 순응하고 일본(日本)의 통치를 당연히 받아들인 것처럼 기술하여 빈약하고 허약한 역사상(歷史像)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한일합병(韓日合倂)이 되기까지의 과정 기술에 나타나는 것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에 의해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한국을 보호국으로 하였다(1, 2, 3, 4, 5, 7, 8, 9, 10, 11)는 점의 강조이다. 한국을 보호국으로 한다는 표현은 당시 통감부 설치의 정당화를 위해 일본측이 내걸었던 명분 용어였음에도 그를 역사 가치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하여 피교육자(被敎育者)들에게 연약한 한국을 일본이 보호하기 위하여 통치(統治)를 시작했다는 인식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힘을 배경으로 한국에 여러 조약들을 강제하여 한국의 외교(外交)·내정(內政)·군사(軍事) 등의 주권(主權)을 강제로 박탈했다는 기술이 있으나,(2, 5, 7) 대부분 주권을 '손에 넣다'(1), '접수하다'(4), '장악하다'(6, 7), '차지하다'(9)는 식으로 표현하여 침략성을 은폐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교과서로서 수업을 받는 학생은 합법적으로 조약에 의거, 한국과 합의(合意)하여 합병(合倂)한 것으로 이해하게 되며 실제로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은 "조선인(朝鮮人)은 스스로 나라를 잃은 열등한 민족이라고 느껴진다."21) 라는 한국관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이어 한일합병(韓日合倂)이 되기까지의 경위 설명에서 합병(合倂)의 계기를 대부분 하얼빈에서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의거로 기술하고 있다.(1, 3, 4, 5, 8, 9) 전통감(前統監)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살해됨으로써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하려다 부득히 합병(合倂)하게 되었다는 식이다. 즉 합병(合倂)의 책임을 이등박문(伊藤博文) 살해 사건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한일합병(韓日合倂)은 우발적인 사태로 일어난 것이 아니며 일제(日帝)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된 단계적 조처일 뿐이다. 그것은 안중근(安重根)의 의거(義擧)가 1909년 10월에 일어나지만 일제(日帝)는 1909년 7월 한국을 일본에 병합(倂合)한다는 방침을 이미 결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22) 그러나 이를 지적하여 기술한 곳은(2)뿐이다.

4) 3·1운동과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3·1운동은 대규모적이고 장기적인 한국 전민족의 독립 정신과 자주 역량이 총집결하여 일어난 민중 운동이며 항일 독립 투쟁이다. 3·1운동은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며 한국 민중 내부에 끊임없이 흐르는 독립에 대한 지속적인 사상과 투쟁의 발로이다. 3·1 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의 5·4 운동을 비롯한 아시아 제국(諸國)의 반제국주의 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이와 같은 민족의 독립 운동을 일본 교과서에서는 '만세소요(萬歲騷擾)' 혹은 '폭동(暴動)'으로 기술하였는데, 82년(年)의 교과서왜곡(敎科書歪曲)에 대한 항의 이후 3·1 독립운동으로 정정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만세 사건' '3·1 사건'으로 명명하고 있는 곳도 있다(7, 9, 10, 11).

◇ 3.1 독립운동

1
《개정판신일본사(改訂版新日本史)》
제일학습사(第一學習社)
  (5·4운동) 조선에서도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부르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주) 최후의 조선 국왕 고종 장례 2일 전 3월 1일 경성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독립 만세를 부르는 민중 데모가 일어나 조선 전토에 번졌다.
2
《삼성당일본사(三省堂日本史)》
삼성당(三省堂)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도 민족 해방 요구가 높아지고 세계적인 민족 자결 풍조 안에서 1919년 3월 독립 만세를 부르는 민족 운동이 발발하였다.(3·1운동) 원(原)내각은 이를 진압한 후 조선 총독의 현역 무관제를 고쳐 문관(文官)으로 하고 무단통치에 수정을 가하였으나 조선 민족의 독립운동은 그 후도 그치지 않았다.
3
《일본의 역사(日本の歷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5·4운동) 또한 민족자결의 방침에서 폴란드 등의 독립이 승인됨에 따라 조선에서도 민족 독립을 꾀하는 운동(3·1운동)이 고조되어 일본은 군대를 출동시켜 이를 진압하였다.
4
《일본사개정판(日本史改訂版)》
실교출판(實敎出版)
  혹독한 무단 정치하에서 토지조사사업이 실시되고 많은 농민이 토지를 박탈 당한 조선에서도 독립의 기운이 강해져 1919년 3월 1일 경성(현 서울)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집회와 데모가 일어나 독립 투쟁이 조선 전토에 파급되었다.(3·1 독립운동)
  (주) 정부는 내지(內地)로부터도 군대를 증파하여 독립 투쟁을 가혹히 탄압하였다.
5
《고교일본사(高校日本史)》
삼성당(三省堂)
  …1919년에는 조선에서 만세를 부르는 3·1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은 한국병합 이래 엄격한 군사적 통치 방침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어 중국에서도 21개조 요구의 취소와 산동성 권익 반환을 일본에 요구한 5·4운동이 전국에 번졌다.
  (주) 독립운동이 조선 전토에서 일어나 탄압에 의한 사망자는 약 8,000인에 달하였다.…(5·4운동)…
6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학교도서주식회사(學校圖書株式會社)
  …대외정책에서는 영·미 양국과의 협조를 기본 방침으로 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병합 이래 군대와 경찰력을 배경으로 추진된 식민지 정책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3·1독립운동으로 폭발하였다. 1919년 3월 1일 지식인, 학생들이 경성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하자 이에 호응하여 민중은 독립 만세를 부르고 전시(全市)에서 시위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곧 조선 전토로 번져 총독부는 군대와 경찰로 이를 진압하고 조선인 사망자는 엄청난 수에 달하였다.
  (주) 일본 관청 기록에서는 약 2,000인으로 되어 있지만 박은식 저「조선독립운동지혈사」에서 23,470인으로 되어 있다.
7
《개정일본사(改訂日本史)》
동경서적주식회사(東京書籍株式會社)
  …(5·4운동)…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추진되고 있던 조선에서는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민족 자결의 국제 여론에 힘입어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지식인과 학생들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자극된 독립 운동이 순식간에 조선 전토에 번졌고 총독부는 무력을 사용하여 이를 진압하였다.(3·1 독립운동 또는 만세사건)
  (주) 600개소 이상에서 민중이 일어나는 등 독립 운동은 성하였는데, 4월중에는 거의 진압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그 후도 끊이지 않았다.…또한 조선에서는 3·1 운동 등에 대응하여 이제까지의 식민지배의 무단적인 정책을 완화한 자세를 보여 주었다.
  (주) 조선 총독의 무관제는 문·무관 병용으로 개선되었다. 또는 한글로 된 신문 발행과 일정 범위 안에서 정치 의견 발표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8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청수서원(淸水書院)
  대전중 연합군이 전쟁 목적을 민주주의 옹호에 둔 점, 특히 월슨이 민족자결의 원칙, 영토의 귀속을 그 영토에 거주하는 민족의 주체적 선택에 맡겨야 할 것을 주장한 것은 유럽의 소국의 독립을 촉구하고, 아시아·아프리카의 식민지 제민족에게 독립의 꿈을 주었다. 1919년 3월 1일 조선 경성에서는 전 국왕의 장의를 계기로 학생, 지식인이 독립 선언을 발표하고, 모여 있는 사람이 이에 합류하여「독립만세」를 제창하고 시위 행진을 하였다. 이 운동은 곧바로 전토에 파급되어 약 200만 인이 참가하여 6개월이나 계속되었다. 원경(原敬) 내각은 이를 무력으로 탄압하고 조선 상주군을 배로 증강하였다. 그 후는 무단적 통치를 고쳤고 일본에 의한 학교 교육을 행하는 등 동화정책을 추진하였다.…(5·4운동)…
  (주) 3·1운동 : 조선 218군데 211군에서 봉기가 있었고 일본군의 탄압에 의한 사망자는 약7,500인, 구속자는 약47,000인이라 한다.(조선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함. 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사망자 2,000인 기소자 약 10,000인.
9
《요설일본의 역사(要說日本の歷史)》
자유서방(自由書房)
  조선 총독부는 조선인의 권리, 자유에 혹독한 제한을 가하고 또한 대규모적인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광대한 토지를 관유지로서 정하였으므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조선 인민의 강력한 저항이 계속되었다.
  (주) 후에 황민화 정책의 이름 아래 신사참배와 일본풍의 성으로의 개명(창씨 개명) 등이 강요되고 또한 학교와 관청 등에서는 조선어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주) 1919년 3월 1일에는 독립 만세를 부르고 조선 민중의 독립 시위운동이 일어나(3·1 독립운동 또는 만세사건이라 한다) 군대, 경찰에 의하여 탄압되었다.
10
《신일본사(新日本史)》
삼성당(三省堂)
  제 1차 세계대전 종료 후 민족자결주의가 파급되어 동아시아 식민지·반식민지 제민족간에도 해방의 요구가 높아졌다. 일본은 조선 병합이래 토지조사를 행하고 그 결과 소유권의 관념이 확실히 발달하지 않은 조선인 중에는 토지를 잃은 자가 많았다. 이 때문에 조선인 사이에 일본 지배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1919년 3월 1일에 만세사건(3·1독립운동)으로 불리는 운동이 발발하여 조선 전토에 번졌다.…(5·4운동)…
11
《상설일본사(詳說日本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주)…1919년 5월 4일 학생에 의한 반일 시위 행진이 일어났다.(5·4운동) 또한 조선에서도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구하는 3·1사건이 일어나 일본의 동아시아 정책은 크게 전환되었다.

◇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1
《개정판신일본사(改訂版新日本史)》
제일학습사(第一學習社)
  (주) 진재의 혼란 중에 여러 유언이 퍼져 다수의 죄없는 조선인과 노동 운동가들이 학살된 사건이 일어났다.
2
《삼성당일본사(三省堂日本史)》
삼성당(三省堂)
  (주) 인심 불안 중에「조선인 폭동」의 유언이 유포되어 다수의 조선인이 관헌, 민중에서 살해 되었다.
3
《일본의 역사(日本の歷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주)…이 대혼란 중에 "조선인 폭동'기 유언이 퍼져 이에 불안을 느낀 경찰과 군중 손에 다수의 조선인이 살해되었다고 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4
《일본사개정판(日本史改訂版)》
실교출판(實敎出版)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진재가 발생, 경(京)·빈(濱)지대는 파괴되고 불황에 고심하던 일본 경제는 큰 손해를 당하였다. 대혼란 중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전해져 이를 믿었던 민중과 군인·경찰의 손에 다수의 조선인이 학살되었다.
  (주) 병합후 조선에서 생활할 수 없었던 조선인이 도래하여 심한 민족 차별 아래에서 토목·탄광 노동 등에 종사하였다. 조선인 수천 인 외에 중국인도 살해되었다고 한다.
5
《고교일본사(高校日本史)》
삼성당(三省堂)
  민중 운동이 고양되고 있던 1923년 9월 관동대진재가 돌발하였다. 진재에 의한 대혼란 중에 민족적 편견에 찬 유언에 혼란해진 민중이, 일부에서는 관헌도 참가하여 엄청난 수의 조선인과 일부의 중국인을 학살하였다.
6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학교도서주식회사(學校圖書株式會社)
  …혼란의 와중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유언이 유포되어 자경단과 관헌 등에 의하여 6,600여 인에 달하는 조선인이 살해되었다.
7
《개정일본사(改訂日本史)》
동경서적주식회사(東京書籍株式會社)
  관동대진재는 지진 발생 후의 화재가 피해를 확대시키고 그 혼란은 인심을 동요시켰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인과 사회주의자가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이 번져 다수의 조선인과 사회주의자 대삼영(大杉榮) 들이 학살되었다고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8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청수서원(淸水書院)
  …재해의 피해는 동경(東京)·횡빈(橫濱)을 중심으로 화재로 인해 아주 컸으며, 경제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사망자, 행방불명자가 14만에 달하고, 또한 혼란 중에 조선인 폭동의 유언(流言)이 퍼져 다수의 조선인이 관헌과 자경단에게 살해되었다.
  (주) 자경단 :「조선인이 우물안에 독을 넣었다」라는 등의 유언이 유포되자 이를 사실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죽창,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고 통행인을 검문하여 조선인을 습격하였다. 그 때문에 살해된 조선인은 약6,000인이라 알려져 있다.《한국독립운동사》에 의함. 내무성조사에서는 가해자 판명에서 조선인 231인, 중국인 3인(人) 등으로 되어있다.
9
《요설일본의 역사(要說日本の歷史)》
자유서방(自由書房)
  …1923년 9월에 관동진재가 발생, 동경(東京)·횡빈(橫濱)을 중심으로 커다란 피해가 생겨 경제계는 더욱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주) 대진재의 혼란 중에 종종 테러가 발생, 다수의 죄없는 조선인과 노동운동가들이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무정부주의자 대삼영(大杉榮)들도 헌병대에 살해되었다.
10
《신일본사(新日本史)》
삼성당(三省堂)
  (주) 고향에서 생활할 수 없었던 조선인 다수가 생존을 위해 일본에 거주하였는데, 그러한 동향에 대한 불안이 관동대지진재 때 조선인 폭동 유언을 만들어 내어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11
《상설일본사(詳說日本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주) <사진설명> 대진재는 큰 혼란과 불안을 일으켜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다수의 조선인과 사회운동가가 살해된 사건도 일어났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5·4운동이 일어날 즈음 조선에서도 3·1운동이 일어난 것처럼 서술하거나 아예 5·4운동에 부수적인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1, 3, 6, 7, 11) 5·4운동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영향을 받은 북경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반제국주의 민족 운동이다. 5·4운동 당시 중국 민중들이 3·1운동에 대하여 내린 평가와 영향들은 5·4운동에 관한 원사료에서 무수히 볼 수 있다.23) 일본 교과서들은 아시아 민족 운동을 기술할 때 더이상 3·1운동을 왜소화시켜 평가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편 3·1 운동에 대한 기술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한국민의 저항과 피해에 대하여 좀 더 성의있게 기술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교과서는 3·1 운동이 일어났다, 조선 전토에 번졌다(1, 3, 6, 7, 8, 10)라는 식으로 하여 마치 3·1운동이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사에는 담당 주체가 없으며 더욱이 통치에 대한 민족 저항의 역사를 갖지 못한 무능한 민족인 채로 있는 것이다.
  또한 3·1운동이 발생하자 일본이 한민족에게 가한 피해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는 곳은 얼마 없다.(5, 6, 8)《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의하면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시위 집회 회수 1,542회, 참가 인원 2,023,098명, 피살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피검자 46,948명, 일제가 방화 소각한 피해는 교회 47동, 학교 2동, 민가 715호이다.24)
  일본 관헌 측 자료는 의식적으로 줄여 기록하였을 것인데도, 3월 1일부터 1920년 3월 1일까지의 통계를 보면 피살자 7,645명, 부상자 45,562명, 피검자 49,511명, 방화 소각 피해는 교회 59동, 학교 3동 민가 724호로 되어 있다.25) 따라서 피해상은 위 통계보다도 훨씬 크고 심각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교과서에서 3·1운동의 피해상을 기술하고 있는 곳은 드물어(5, 6, 8) 정확한 피해상을 알 수 없으며, 더욱이기 출전까지 밝히고 있는 곳조차도 통계 숫자가 정확치 않아 다분히 3·1운동의 진실된 역사상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923년, 경제공황(經濟恐慌)으로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은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으로 큰 타격을 입는다.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고, 화재가 일어나 재해로 인해 경제의 피해가 심각하였고 여기에 민심이 흉흉해지자 관헌(官憲)측에서 고조된 민중의 불안 의식을 배설할 배출구로서 한국인을 이용하였다. '한국인이 우물안에 독을 넣었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완전히 날조된 유언비어(流言飛語)를 의도적으로 유포시켜 일반 민중에게 편견과 공포심을 부추겼다. 한국인에 대한 민족적 편견에 사로잡혔던 군대와 경찰과 민중은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여 눈에 띄는 대로 한국인을 살해하였다. 지진 후에 한국에서는 북성회를 비롯한 청년 단체들이 조선박해사실조사회(朝鮮迫害事實調査會)를 구성하여 조사를 실시하였고 일본인 중에도 길야작조(吉野作造)·금자양문(金子洋文)·강구환(江口渙)·영정류태랑(永井柳太郎)이 진상을 규명하기도 하였다. 이 때 조사된 보고에 의하면 한국인 6.600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6, 8)
  이러한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당시 한국인 학살의 내용은 대부분 각주 부분에서 기술되고 있고 교과서에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과 한국인 학살 사건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의 정확한 진상을 기술하지 않고 단순히 '조선인 폭동'이라는 유언(流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1, 2, 3, 4, 6, 7, 8, 10) 이제 진상이 정확히 밝혀진 이상, 사건 기술에서 자연발생적(自然發生的)인 재난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유도된 사건이었음을 밝혀 역사가 주는 교훈을 바로 직시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26)

5) 대륙침략(大陸侵略)과 강제징용(强制徵用)

앞서 교과서 검정 실태를 검토하면서 침략(侵略)의 본질을 은폐하려 하는 한편, 그들의 팽창주의를 은근히 과시하려 한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교과서에 제시된 각 주제의 지도를 보면 자신들이 침략으로 일시 확보한 지역을 자신의 영토인양 자랑스럽게 표기하고 있음을 볼 때, 침략주의 사관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본다. 교과서에서 지도를 통해 교육적인 효과를 많이 거둔다. 기술 부분보다는 시간과 공간적인 개념 파악에 빠른 이해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사(日本史) 교과서에는 지도를 통해 과연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가라는 점에서 의문을 자아내게 하는 부분이 있다.
  각 일본사 교과서에 한국의 영토가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표를 통해 보자.

일본 교과서의 한국 영토 표시

교과서명

지도주제

한국영토표시명구분(색)
1
《신일본사(新日本史)》
제일학습사(第一學習社)
○중일(中日)전쟁 일본영토(日本領土)
○제차 세계대전 무렵의 세계 일본영토(日本領土)
2
《일본사(日本史)》
삼성당(三省堂)
○열강(列强)의 중국진출(中國進出)
일본(日本)의 세력범위
○베르사이유조약시 일본(日本) 판도 일청(日淸)전쟁 이전의 일본영토(日本領土)
○중(中)·일(日) 전쟁의 전개 일본(日本)의 식민지
○태평양전쟁의 전개 1942년(年) 일본(日本)의 세력권
3
《일본의 역사(日本の歷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일본영토(日本領土)의 변천과 그 면적 일한병합(日韓倂合)조약으로 영유(領有)(1910)
○중(中)·일(日)전쟁 요도 (일본(日本)과 동색(同色))
○태평양전쟁 요도 (일본(日本)과 동색(同色))
4
《일본사개정판(日本史改訂版)》
실교출판(實敎出版)
○워싱턴회의 후 일본영사(日本領士) 1910년(年) 병합(倂合)
 
○중일(中日)전쟁 관계 요로 (일본(日本)과 동색(同色))
5
《고교일본사(高校日本史)》
삼성당(三省堂)
○태평양 전쟁 1942년 일본의 세력권
(일본(日本)과 동색(同色))
6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학교도서주식회사(學校圖書株式會社)

○열강(列强)의 중국침출(中國侵出) 관계 약도

일본(日本) 세력 범위

○중(中)·일(日)전쟁 요도 (일본(日本)과 동색(同色))
7
《일본사(日本史)》
동경서적주식회사(東京書籍株式會社)
○중국(中國)에서의 열강(列强)의 세력 분야 일본(日本) 세력 범위
○중(中)·일(日)전쟁 요도 (일본(日本)과 동색(同色))
○제1차 세계대전 무렵의 세계 (일본(日本)과 동색(同色))
○제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세력 범위 1910년 병합(倂合)
8
《고등학교일본사(高等學校日本史)》
청수서원(淸水書院)
○중(中)·일(日)전쟁 요도 1931년의 일본령(日本領)
9
《요설일본의 역사(要說日本の歷史)》
자유서방(自由書房)
○태평양전쟁 요도 일본의 세력권(일본(日本)과 동색(同色))
○베르사이유조약 후의 일본영토(日本領土) 1910년(年) 병합(倂合)
10
《신일본사(新日本史)》
삼성당(三省堂)

○열강(列强)의 중국영토(中國領土) 진출

일본(日本)의 세력 범위

○베르사이유조약 후의 일본(日本) 판도 1910년(年) 병합(倂合)
11
《상설일본사(詳說日本史)》
산천출판사(山川出版社)
○일본영토(日本領土)의 변천 1910년(年) 병합(倂合)
○중(中)·일(日)전쟁 요도 (일본(日本)과 동색(同色))

  각 교과서에 당시 주제에 맞게 시대적 상황을 잘 전달해 주기 위해 제시된 지도는 침략주의를 반성한다기 보다는 조그만 섬나라가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당당히 세력권 안에 넣었다고 과시하고 있는 듯 하다. 각 주제에서 지도상에 그려지는 한국은 아무런 범례의 제시 없이 일본(日本)과 같은 색으로 표시하기도 하고, 혹은 '일본(日本)의 세력 범위' 혹은 '일본(日本)의 영유(領有)'로서, 그리고 아예 범례(凡例)에 '일본(日本)의 영토(領土)'라고 기재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세력권을 보여 주는 주제하의 지도에서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유독 한국만을 일본과 동색으로 표시하여 보여주고 있어 아직도 일본이 한국을 자신의 영토로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