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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잡혀간 담양田氏의 후손이 다나카(田中)란 姓을 쓰게 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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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8월의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駐日한국대사로 임명된 金永善 대사는 日帝 때 경성제국대학을 나와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 충남 大德군수를 지냈다. 金 대사가 대덕군수이던 시절,
뒷날 일본수상을 지낸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가 작은 건설회사 사장으로 대덕郡에 와 있었다. 다나카는 그때 金 군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金 대사는 張勉 정권 때는 재무부 장관이었다가 5.16 군사혁명 이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색된 韓日관계를 풀기 위해
그때 수상이던 다나카씨와 친면이 있던 金永善씨를 일본대사로 임명했다. 이때 김영선씨의 동향 후배 L씨가 도쿄에 갔다가 金 대사가
다나카 총리의 私邸(사저)에 초대 받았을 때 동행했다. 저녁 식사 자리였다. 두 사람은 옛날 이야기를 했는데, 이때 다나카 총리가 놀라운 토로를
했다고 한다. 자신은 담양(潭陽)田씨라고 하더란 것이다. 조선조 시절에 담양田氏 12대손이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하면서 한국에 대한 친근감을
표시하더라고 기억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담양전씨(潭陽田氏)의 시조 전득시(田得時)는 고려 때 담양(潭陽)에 오랫동안 살아온
향리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는 현량과(賢良科)로 천거되어 의종 때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역임하고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졌고, 담양을 食邑으로
받아 본관으로 삼고 世系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12세손이면 대강 임진왜란이 난 1592년 무렵이다. 임진왜란 때 잡혀간
담양田氏의 후손이 다나카(田中)란 姓을 쓰게 된 것인가? 日帝 때, 담양전씨 가운데는 창씨개명을 할 때 田中으로 바꾼 분들이 더러 있다(예:
田鳳德=田中鳳德). 물론 다나카의 이런 실토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일본의 몇 몇 거물 정치인들은 한국인들을 私的으로 만났을
때 "우리 조상은 한국인이다"고 말했다는 증언이 있다. 일본인들 가운데 "나는 조선에서 도래한 집안 출신이다"는 의식을 가지고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이런 집안의 비밀을 공개적으로 말하진 않는다. 2년 전 나는 결혼식 피로연에서 일본의 70代 CEO를 만나
명함을 교환한 적이 있다. 그의 姓은 아라이(荒井)였다. 아라이씨는 "우리 조상은 아라가야 사람이었다. 일본에 건너가서 발음이 비슷한 아라이로
改姓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아라가야란 安羅가야를 가리킨다. 즉 지금의 경남 함안에서 융성했던, 伽倻(가야)연맹체의 한 국가였다. 아라가야는
신라에 망했고, 亡國의 지배층은 동맹국인 倭로 많이 건너갔다. 나는 咸安趙氏이다. 아라이씨에게 "고향사람끼리 만났다"고 농담을 했다.
일본 서해안 시마네 출신의 타케시다(竹下) 전 총리는 한국인 보좌관을 두고 있었는데 사석에서 가끔 "내 몸 속에는 조선 왕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본 天皇은 姓이 없는데 皇族들은 가야金氏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天皇家가 가야계통이란 說은
근거가 있다. 일본인의 민족적 구성을 70%는 대륙계, 30%는 남방계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여기서 大陸系란 한반도를
거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이들을 가리킨다. 서기 676년에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성하여 한반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전엔 한반도, 일본, 중국,
만주, 몽골 사이에 민족이동이 활발했다. 그 이후에도 한반도에서 전쟁이나 대기근이 생기면 먹고 살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는 倭軍에게 잡혀간 이들이 수만 명이었다. 유럽 대륙에서 영국으로, 유럽과 영국에서 미국으로 민족이동의 물결이 이어졌던 현상과
비슷하다. 한민족과 일본족의 뿌리는 상당히 중첩된다. 둘 다 主力이 몽골고원에서 살다가 수천년에 걸쳐 東進한 몽골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속에서 이해한다면 다나카 가쿠에이가 담양田氏 집안 출신이라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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