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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황제 최후의 날들에 대한 증언(2) - 유로브스키의 1920년 수기

이강기 2015. 9. 15. 21:57
니콜라스 황제 최후의 날들에 대한 증언(2) - 유로브스키의 1920년 수기

2. 유로브스키의 1920년 수기

 

[1918년] 7월16일 페름으로부터 로마노프 일가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담고있는, 사전 합의된 암호로 된 전보 한 통이 왔다. 처음(5월)에는 니콜라이 재판에 회부할 작정이었지만, 진격해 오고 있는 백군들 때문에 이 계획이 무산됐다. 16일 저녁 6시, 필리프 골로스체킨이 명령집행을 지시했다. 시체를 실어갈 트럭 한대가 자정에 도착하게 돼 있었다. 6시에 황실가족들과 같이 있던 소년[레오니드 세드니요프]을 그들과 분리시켰는데, 이것이 로마노프 일가 사람들과 그 종복들을 굉장히 당황하게 했다. 심지어 의사 보트킨이 와서 왜 그 아이를 불러냈느냐고 물었다. 체포됐던 그 소년의 삼촌이 도망을 쳤다가 다시 되돌아 와 조카를 보고싶다고 하기에 불러 낸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튿날 그 소년을 그의 출생지(툴라 지방으로 기억된다)로 보냈다. 자정에 오기로 한 트럭이 제 시간에 오지 않고 새벽 1시 반에야 도착했다. 이것이 명령집행을 지연시켰다. 형을 집행할 12명(라트비아인 5명 포함)의 수비대 병사들을 선발하여 각자 연발권총을 휴대토록 하는 등 자정까지 모든 것이 준비돼 있었다. 라트비아인 2명은 소녀들(공주들)의 사살을 거부했다.
  트럭이 도착했을 때 로마노프 가족들과 종복들이 모두 잠들어 있었다. 보트킨을 깨웠고 그가 나머지 사람들을 깨웠다. (부하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로마노프 일가 사람들을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옮겨야 한다. 위층에서 일을 벌이다간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을 깨울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반시간 안에 옷을 입었다. 벽에 회반죽 바른 나무를 붙인 방 하나를 미리 아래층에서 골라([탄환이] 튀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방안의 모든 가구들을 치워놓았다. 경비병들이 다음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로마노프 일가 사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사령관(유로브스키)이 몸소 가서 그들을 아래층에 있는 그 방으로 안내했다. 니콜라이(황제)는 알렉세이(황태자)를 두 팔로 안아 옮기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조그마한 베개와 작은 소유물들을 들고 왔다. 빈방으로 들어서면서 알렉산드라 폐도로브나(황후)가 말했다.
"이런! 의자 하나도 없잖아요? 한 사람도 앉지 말라는 거예요?"
사령관은 의자 두개를 가져오도록 했다. 니콜라이는 알렉세이를 의자 하나에 앉히고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가 다른 의자에 앉았다. 사령관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한 줄로 서도록 명령했다.
  그들이 제자리를 잡았을 때 사령관은 대기시켜 논 처형대원들을 불렀다. 대원들이 들어왔을 때, 사령관은 로마노프 일가 사람들에게, 유럽에 있는 그들의 친척들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정당한 이유 없이 적대행위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우랄[관구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그들을 처형키로 결의했다고 통고했다. 니콜라이가 등을 병사들 쪽으로 보인 체 가족들을 돌아 본 후 마치 정신이 퍼뜩 드는 듯 사령관에게 물었다. "뭐, 뭐라고 했소?" 사령관은 재빨리 앞서 그가 한 말을 반복하고는 병사들에게 사격준비를 명령했다. 병사들은 사전에 각자 누구를 쏠 것인지를 지시 받고 있었으며, 그리고 피를 많이 흘리는 것을 피하고 그들을 더 빨리 해치우기 위해 각자의 심장을 겨냥토록 명령받고 있었다. 니콜라이는 다시 그의 가족들 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약간 흐트러지며 절규했다. 이 모든 일이 몇 초 동안 지속됐다. 곧 사격이 시작됐다. 사격은 2분에서 3분간 계속됐다. 니콜라이는 사령관이 직접 쏜 총에 죽었다.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는 그 다음으로 곧 죽었으며, 다른 가족들도 그런 것 같았다. 총 12명이 사살됐다[실제로는 훗날 11명이 사살됐다고 공식적으로 발표됐다]. 즉, 황제 니콜라이, 황후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 그들의 네 공주(타티아나, 올가, 마리아 및 아나스타샤)과 황태자 알렉세이, 의사 보트킨, 시녀 트루프, 요리사 티호미로프[실제로는 카리토노프], 다른 요리사 하나와 그리고 사령관이 그녀의 성을 잊어버린 시녀 한사람[실제로는 알렉산드라의 개인하녀, 안나 데미도바]이었다. 알렉세이와 그의 네 누이들 중 세 사람, 시녀, 그리고 보트킨이 아직 살아 있었다. 그들은 다시 사격을 받아야 했다. 이것이 사령관을 놀라게 했다. 심장이 과녁이 되었는데도 그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총탄이 어떤 것에 부딪쳐 튀겨 나오고 빗발치듯 온 방안에 튀어 오른 것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이 소녀들 중 하나를 총검으로 찔러 숨을 끊어 놓으려 했을 때, 총검이 그녀의 콜세트를 꿰뚫지 못했다. 이런 모든 일들 때문에 "확인"(맥박점검 등)을 포함한 전 처형과정을 끝내는데 약 20분이 걸렸다.
  그 후 시체들을 옮겨 트럭에 싣기 시작했다. 두꺼운 담요로 시체들을 싸서 피가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게 했다. 바로 이 때 도둑질이 시작됐다. 세 사람의 믿을만한 병사들을 뽑아 시체들을 지키도록 했지만 도둑질은 계속됐다(방에서 트럭까지 시체들을 한 구씩 옮겼기 때문에 가능했다). 훔친 물건 모두가 처형하겠다는 위협 아래 회수됐다(금시계, 다이아몬드가 박힌 담배 케이스 등등이었다). 사령관은 형을 집행하는 일만 하게 되어 있었다. 시체들을 트럭에 옮기는 등의 작업은 예르마코프[에르마코프](어퍼 이세츠크 공장에서 온 노동자이며 당원이고 전에 감옥살이를 한 사람이었다.)동지의 책임이었다. 그는 시체를 싣고 갈 그 트럭을 타고 왔던 것으로 보였으며, 사전 합의된 암호인 "굴뚝청소부"를 사용하여 검문을 통과 한 것 같았다. 앞서, 트럭의 도착 지연으로 처형시간을 늦춰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사령관은 에르마코프의 업무능력을 의심하였고, 그 때문에 그는 모든 작업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기로 작정했다.
  새벽 3시경에 우리는 에르마코프가 준비해 놓기로 한 장소(어퍼 이세츠크 공장 너머)를 향해 떠났다. 우선 시체들을 일정한 지점까지 트럭으로 옮겨가고, 그 이후에는 트럭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말에 실어 최종 목적지까지 가기로 예정돼 있었다. 매장장소는 폐광지역이었다. 어퍼 이세츠크 공장을 지나 3마일 조금 더 차를 몰고 간 후에 한 패거리의 야영객들 - 약 25명 - 과 마주쳤다. 그들은 말을 타고 있거나 말이 끄는 소형 짐마차 등에 타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에르마코프가 매장을 위해 준비해 논 일꾼들(소비에트 요원, 집행위원회 요원 등등)이었다. 그들은 대뜸 "왜 이들을 산 체로 데려오지 않았나?!"며 큰 소리로 외쳤다. 로마노프 일가 사람들에 대한 처형이 자기들에게 위임돼 있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 시체들을 소형 짐마차에 싣기 시작했으나, 그러나 대형 짐마차가 있어야 했었다. 소형 짐마차로 시체들을 옮기기가 몹시 불편했다. 그들은 곧 시체의 주머니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 사살하겠다고 위협하며 보초들을 세워야 했다. 그런데 타티아나, 올가 및 아나스타샤가 어떤 종류의 특수한 콜세트를 입고 있음이 발견됐다. 시체들의 옷을 벗기기로 결정했으나, 여기서가 아니고 매장장소에서 하기로 했다. 그러나 시체들을 매장하기로 한 그 폐광이 어디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점점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사령관은 그 장소를 찾기 위해 말 탄 사람들을 보냈으나 문제의 폐광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아무 것도 준비돼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장작업을 할 삽 따위도 없었다. 트럭이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쳐 박히는 바람에 트럭을 포기해버렸다. 시체들을 담요로 싸서 마차에 실은 후 일렬종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에카테린부르그에서 약 11마일, 콥티아키 마을에서 1마일 되는 곳에 멈췄다. 이 때가 아침 6시 내지 7시경이었다. 숲 속에서 광산투기꾼들이 파 놓은 약 8피트 깊이의 버려진 광갱(鑛坑)이 발견되었다(거기서 한 때 금이 채굴되었다). 그 구덩이는 2피트 높이로 물이 차 있었다. 사령관은 시체들의 옷을 벗겨 모두 태워버리도록 명했다.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말 탄 사람들로 하여금 사방을 지키게 했다.
  소녀 시체들 중 하나의 옷을 벗겼을 때, 콜세트를 찢어 놓은 탄환 구멍 속에 다이아몬들이 박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주위에 둘러 선 모든 사람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사령관은 즉시, 보초를 서고 있는 몇 명의 말 탄 사람들과 수비대 병사 5명을 남기고는 나머지 사람들을 해산시키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이 흩어져 갔다. 수비대 병사들은 시체들의 옷을 벗겨내 불에 태우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는 여러 가닥의 진주 줄을 합쳐서 만든 온통 진주로 된 벨트를 천 속에 꿰매 넣어 차고 있었다. 소녀들이 목에 라스푸틴의 초상화와 그의 기도문을 새겨 넣은 부적을 걸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다이아몬드들은 즉시 제거됐다. 그것들(다이아몬드로 된 물건들)의 무게가 약 18파운드쯤 됐다. 이 귀중품들은 그 후 알라파에브스크 공장 내에 있는 작은 집들 중 하나의 지하에 묻었으며, 1919년에 도루 파내어 모스크바로 가져갔다.
  우리는 시체들에서 발견된 모든 귀중품들을 몇 개의 가방 속에 넣은 후, 나머지 것들은 불태우고 시체들은 광갱에 던져 넣었다. 이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 몇 개의 귀중품들(누군가의 브로치, 보트킨의 틀니)이 바닥에 떨어졌다. 광갱을 함몰시키기 위해 수류탄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일부 시체들이 손상을 입었고 특정 부분이 떨어져 나온 것이 분명했다. 그 뒤 백군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잘라진 손가락하나를 발견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시체를 이곳에 영구히 둘 계획은 아니었다. 그 광갱은 처음 발견할 때부터 오직 잠정적인 매장지점으로 계획되었을 뿐이다.
  작업을 모두 끝내고 보초를 남겨둔 체 사령관은 오전 10시에서 11시경에(이미 7월17일이 되어 있었다) 우랄[관구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가서 보고했다. 거기서 그는 사파로프와 벨로보로도프를 만났다. 사령관은 그들에게 시체를 묻은 광갱을 발견하게 된 경과를 설명하면서, 자기에게 미리 적절한 매장장소를 물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사령관은 추츠카에프(그 도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로부터, 모스크바 하이웨이를 따라 6마일쯤 되는 곳에 시체들을 묻기에 적당한 매우 깊은, 폐광 광갱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령관은 그 지점을 향해 떠났으나 그의 차가 고장났기 때문에 즉시 그 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는 도보로 [마침내] 그 장소에 도착했으며 물이 가득 찬 매우 깊은 3개의 광갱을 발견했다. 그는 시체에 돌을 매달아 물밑에 가라앉히기로 결정했다. 불편한 목격자들인 수비대 병사들이 거기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카 안전요원들이 탄 자동차를 시체를 실을 트럭과 함께 보내기로 결정했다. 체카 요원들은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조사할 사항이 있다는 핑계로 체포할 예정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사령관은 우연히 길을 따라 다가오고 있는 말 두 마리를 징발하였다. 어쩌다가 억류된 사람들[그 지역 사람들]은 각자 집으로 돌려보냈다. 전체적인 매장작업 준비를 위해 다른 체카 요원과 함께 말을 타고 [에카테린부르그를 향해] 출발했는데, 사령관이 말에서 떨어져 심한 상처를 입었다(그 후 체카요원도 역시 떨어졌다). 만일의 경우 그 광갱 매장을 추진할 수 없게 되면, 시체들을 불사르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황산으로 시체들을 훼손한 후 물이 질펀한 진흙구덩이에 묻어버리기로 결정했다.
  결국 17일 저녁 8시경에 에카테린부르그로 되돌아 온 후 필요한 물건들 - 등유, 황산 - 을 수집했다. 마부 없이 끄는 짐마차들을 교도소에서 차출했다. 밤 11시경에 떠나기로 계획돼 있었지만, 체카 요원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여 지연되었다. 우리는 17일-18일 밤 12시30분이 되어서야 시체 등을 끄집어내기 위한 로프를 준비하여 광갱을 향해 떠났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 광갱을 사람들로부터 차단시키기 위해 콥티아키 마을 사람들에게, 체코군들이 숲 속에 숨어있어 그들을 수색할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유든 누구도 마을에서 나와 어디로 가서는 안 된다고 발표했다. 누구든 비상선을 넘어올 때에는 현장에서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 동안에 새벽이 왔다(벌써 3일째인 18일이었다). 당장 인근 광산에(당초 목표한 곳으로 가지 않고) 일부 시체들을 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덩이 파기를 거의 끝마칠 무렵, 에르마코프를 알고 있는 농부 하나가 갑자기 말을 타고 나타났다. 그 구덩이를 알아보았음에 틀림없었다. 지금까지의 노력을 포기해야만 했다. 시체들을 (당초 목표한) 깊은 광갱이 있는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마차들이 부실하여 사용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에 사령관은 자동차(트럭 1대와 2 대의 승용차, 1대는 체카 요원용)를 수배하려 에카테린부르그로 떠났다. 짐마차들이 더 일찍 고장나 있었다. 자동차로는 임시매장지역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아직도 무리하게 마차를 사용해야 했다. 자동차 행렬이 도착했을 때, 마차들은 이미 이동하고 있었다 - 자동차 행렬이 콥티아키 마을 인근 0.25 마일 지점에서 마차행렬을 만났다. 우리는 밤 9시 이후에야 전진할 수 있었다. 철길을 넘어 0.25마일을 더 가서 트럭에다 시체들을 옮겼다. (수렁에 빠질만한) 위험한 곳에서는 철도 침목들을 깔아가며 어렵게 차를 몰아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아직도 몇 번이나 곤란을 겪어야 했다. 19일 새별 4시 30분 경에 트럭이 완전히 수렁에 빠져버렸다. 광갱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길이 남았기 때문에, 시체들을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우거나 해야 했다. 동지 하나 - 사령관은 그의 성을 잊어버렸다 - 가 나서서 자기가 불에 태우겠다고 약속했지만, 뒤에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우리는 알렉세이와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의 시체를 불에 태운다는 게, 실수로 시녀[하녀 데미도바]를 알렉세이와 함께 태웠다. 그 후 즉시 불에 탄 유골들을 묻고 그 위에 다시 불을 피워 구덩이를 판 흔적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한편 나머지 시체들에 대해서는 통상의 무덤처럼 구덩이를 팠다. 깊이 약 6피트 가로세로 각각 8피트의 구덩이가 아침 7시경에 완성됐다. 시체들을 구덩이에 쳐 넣고 그들의 얼굴에 - 자연히 시체 전체에 - 황산을 부어 아무도 그들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분해되어 악취를 풍기지(구덩이가 깊지 않았기 때문에) 않게 했다. 흙을 채우고 표면에 관목 덤불을 덮고는 철도 침목들을 깔아 그 위로 몇 번 자동차를 왕복하게 했다 - 구덩이의 흔적이 사라져버렸다. 완전한 비밀을 지킬 수 있었다. 백군이 그 후 이 매장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콥티아키 마을은 에카테린부르그로부터 12마일 떨어져 있다. 철길이 콥티아키와 이 도시 북서쪽 방향에 있는 어퍼 이세츠크 공장 사이의 6마일 지점에서 도로와 교차하고 있다. 매장지점은 그 교차지점에서 어퍼 이세츠크 공장으로 가는 길에 그 공장으로부터 700 피트 못 미친 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