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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황제 최후의 날들에 대한 증언(1) - 파르핀 돔닌 문서

이강기 2015. 9. 15. 21:58

니콜라스 황제 최후의 날들에 대한 증언(1) - 파르핀 돔닌 문서

 

 

 

 

 

 

(이 글은 "짜르 비밀 구출계획"이란 책에 나와 있는, 니콜라스 황제 및 그 가족들과 최후의 날들을 함께 한 두 사람의 증언을 옮긴 것이다. 한 사람은 황제의 개인 수행원 겸 집사장으로 전해지는 파르핀 돔닌이란 사람이 썼다는 문서에 미 육군 정보원인 슬로터 소령이 가필한 글이고 다른 하나는 황제가족을 처형한 처형대 대장인 유로브스키가 썼다는 수기이다. - )

 

 

 

Tsar Nicholas II with his wife Tsarina Alexandra (background), the Tsaravitch (2nd from right) and his four daughters

 

 

짜르 니콜라스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네 딸과 아들 알렉세이 

 

 

 

 

 

1. 파르핀 돔닌 문서

 

                                             [1918년 12월12일]
              

 

 

 

              전 짜르 니콜라이 로마노프  최후의 날들
                            
파르팬 알렉세이비치 돔닌, 짜르의 개인 수행원 겸 집사장. 22년간 변치 않고 전 짜르를 섬겨 왔으며, 자진해서 그의 유배에 따라 나섰던, 전 짜르의 시종 내지 집사장인 파르팬 알렉세이비치 돔닌이  전 짜르의 최후의 날들의 생활에 대해 얼마간 매우 흥미 있는 설명을 하고 있다. 파르팬 알렉세이비치 돔닌은 60세인데, 코스트로마 정부 관할지역인 돔닌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이반 수세닌의 후예들인, 이른바 농민 벨로파스치(300년전 로마노프왕조 창건에 공로가 있었던 농민가문) 출신이다.

 

                 

 

 

 

            체코슬로바키군이 진군하기 이전

7월 초순이 시작되면서 매일 에카테린부르그 상공에 비행기 소리가 요란했다. 비행기들은 낮게 날다가 포격을 받곤 했지만 항상 결과는 없었다. 이들 비행기 활동에 대해, 체코군들이 정찰을 하고 있는 것이며 에카테린부르그를 점령하려는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어느 날 저녁 일상적인 정원산보에서 돌아온 전 짜르는 이상하게 흥분하여 마법사 성 니콜라이 초상 앞에서 열정적인 기도를 드린 후 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이것은 전에 없던 일이다.
  "폐하, 저가 옷을 벗겨드릴 테니, 잠옷으로 갈아입고 주무시지요." 파르팬 알렉세이비치가 짜르에게 간청했다. 
  "이보게, 귀찮게 하지 말게, 이제 내가 얼마 더 못 살 것 같은 마음이 자꾸 드네 그려. 아마도 이미 오늘 ------" 전 짜르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폐하, 당치 않는 말씀이십니다."
  전 짜르는 파르팬 알렉세이비치에게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저녁 산보를 하고 있는 중에 그는 우랄관구 노동자-코사크-붉은군대 소비에트대표자 특별위원회가 전 짜르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회합을 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들 말로는, 전 짜르가 탈출하여 체코군 쪽으로 달아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으며, 체코군이 에카테린부르그로 진격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체코군이 "소비에트 정권의 손아귀에서 전 짜르를 탈취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나는 결코 아무 것도....[분명히 삭제한 공란] 모르고 있다네." 라며 전 짜르는 말끝을 맺었다.

 

                 

 

        전 짜르에 대한 관리방식

파르팬 알렉세이비치의 얘기에 따르면, 전 짜르에 대한 유폐규칙은 매우 엄격했다. 그는 신문이나 정기간행물을 사 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주어진 일정한 시간을 초과하는 정원산보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시종들은 일거수 일투족을 내내 감시 받고 있었다. 한번은 늙은 시종인 파르팬 알렉세이비치 돔닌이 잔 짜르에게 보내는 편지를 감추고 있다며 옷을 발가벗기는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
  식품이 매우 모자랐으며, 보통 청어와 감자가 주식이었고, 빵은 1인당 매일 반 파운드 분량으로 지급되었다.

 

 

 

 

 

                   황위 계승자

황위계승자인 알렉세이 니콜라이비치는 항상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한 때 각혈까지 했다. 어느 날 저녁, 알렉세이 니콜라이비치는 숨을 몹시 헐떡이고 큰 소리로 울면서 전 짜르의 방으로 달려와서는 아버지의 팔에 쓰러져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 아빠, 그들이 아빠를 쏘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자." 아버지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정하여라, 가엾은 것, 내 아들아, 진정하여라. 엄마는 어디계시냐?"
  "엄마는 울고 계셔요. 엄마에게 진정하라고 말하세요. 엄마가 울기 시작하면 아무도 말릴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일 것입니다. 아빠, 오, 아빠." 알렉세이는 열정적으로 말했다.
  "아빠는 이미 충분히 고통을 당했습니다. 왜 그들이 아빠를 죽이려 하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알렉세이, 너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구나 --- 가서 엄마를 진정시켜라."
  알렉세이는 일어나 나가고 짜르는 성 니콜라이 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오랫동안 기도를 드렸다. 최후의 날들 동안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매우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악몽 때문에 밤중에 일어나는 일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더 이상 자지 않고 나머지 밤을 꼬박 기도로 보냈다.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

이따금씩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를 만나러 가거나 혹은 그가 아내 엘리스를 불러서 만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그가 원하는 대로 만날 수 있었다. 한번은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가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의 방으로 들어와 흐느끼며 말했다.
  "여보, 당신의 마지막 지시사항들을 써 놓으세요. 아무튼 그것이 필요해요. 당신이 쓴 모든 종이쪽지와 서류들을 정리해 둬야 합니다. 편지도요."
  이 말을 들은 후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밤을 새워가며 쓰고 있었다. 그는 많은 편지를 썼는데, 그 가운데는 그의 모든 딸들, 그의 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그의 숙부 니콜라이 니콜라이에비치, 도게르트 장군, 겐드리코프 공작, 올수피에프 백작, 올덴버그 공, 수마르코프-엘스톤 백작, 그리고 여러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었다. 그는 편지를 봉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통신이 소비에트의 통제와 검열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가 보낸 편지들이 "송부불가"라는 연필표시를 하여 되돌아오곤 했다.

 

 

 

 

 

                  고뇌와 상심....

하루 종일 니콜라이 알레산드로비치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엎드려 기도만 드리는 날도 있었다. 관찰이라는 타고난 재능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마저, 전 짜르가 굉장한 고뇌과 상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훤히 알 수 있었다.

 

                  7월 15일 그날

7월15일 저녁 늦게 갑자기 전 짜르의 방에 수비대 인민위원이 나타나 이렇게 통고했다.
  "평민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나를 따르시오. 우랄관구 노동자-코사크-붉은군대 소비에트대표자 회의장으로 갑시다."
  "여보시오, 솔직히 말해 주시오. 나를 지금 총살시키려 데려가는 것이지요?" 애원 조로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물었다.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진짜 죽을 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당신은 지금 회합에 참석해야하오." 수비대 인민위원은 웃으며 말했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희색 군복 윗도리를 걸치고 부츠를 신고 벨트를 졸라매고는 인민위원과 함께 나갔다.
  문 밖에는 두 사람의 병사들이 서 있었다 --- 총을 멘 라트비아인들이었다. 세 사람이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를 둘러 싸 어떤 이유에선지 그의 온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라트비아인 중 하나가 앞장섰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를 뒤따라 가야했고, 그 다음에 공산당 인민위원이,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꽤 오랫동안 - 약 2시간 반 동안 - 돌아오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매우 창백한 얼굴로 턱을 덜덜 떨며 돌아 왔다.
  "여보게 물 좀 주게." 나는 그에게 물을 갖다 드렸다. 그는 즉시 큰 물 컵을 다 비웠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들이 3시간 이내 나를 총살할 거라고 통보 했다네."

 

 

 

 

 

                처형 사유의 공식 통고

우랄관구 노동자-코사크-붉은군대 소비에트대표자 회합이 전 짜르의 출석 아래 열리고 있는 동안 전 짜르는 "조국과 자유를 수호하는 연맹"이라는 이름의 비밀조직에 의해 반혁명음모 혐의로 약식 재판에 회부되었다.
  반혁명당원들은 세계대전과 대학살, 기근, 실업, 수송망의 와해, 독일군의 진격 등이 원인이 된 이 모든 어려운 상황들이 전적으로 소비에트정권 때문이라고 격렬하게 비난을 퍼부으며, 소비에트정권에 저항하도록 대중들을 선동하여 노동자 농민혁명의 숨통을 조이려하고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의 조직은 모든 비 소비에트 정치 당파들을 참여시키려 하고 있다. 이 집단은 뚜렷하게 황제파를 자처하는 당파들은 물론 사회주의 당파들과도 결합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약식재판에 제출된 자료들은 반혁명조직의 간부들이 이들 일단의 좌파와 우파 사이의 전술에 대한 관점의 불일치 때문에 그(짜르)의 명령을 충분히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자료들은 이 반혁명음모의 최고 지휘자로 짜르와 개인적으로 친한 도게르트 장군을 추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조직에는 또한 크라포트킨 공작의 대리인들, 참모부 대령인 셔카르트[에카르트], 엔지니어인 린스키[렐린스키 혹은 시드니 렐리] 와 기타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싸벤코프[사빈코프] 역시 이 조직과 직접 연락을 하고 있는데, 그가 군사 독재자로서 새 정부의 수반으로 상정되고 있다는 믿을만한 이유들이 있다. 이들 모든 지도자들은 매우 강력한 음모를 꾸며 왔다. 모스크바 투쟁 그룹에는 나중에 사마라로 전속될 약 700명의 장교들이 있다. 사마라에서 그들은 시베리아로부터 대러시아를 분리하게될 이른바 우랄전선을 결성할 목적으로 연합국들로부터 지원병들을 기다릴 것이다. 식량부족으로 기근사태가 벌어진 후에, 그들은 먼저 소비에트 정권을 전복하고 다음 독일을 향한 진격에 공감하는 모든 사람들을 동원하기로 되어 있다. 이 음모에는 인민 사회주의자들, 우파사회주의 혁명당원들, 그리고 때로는 입헌민주당원들과 완전히 융합되는 활동을 하고 있는 멘셰비키들과 같은 사회주의 정파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서류상의 증거들이 있다. 이 조직의 참모장은 듀토프 장군 및 데니킨 장군과 직접 연계돼 있다. 수일 전에, 듀토프장군의 도움을 받아 소비에트 정권의 손아귀에서 전 짜르를 탈취하려는 하나의 새로운 반혁명 음모가 발각됐다.
  그 외 현재까지, 전 짜르 니콜라이 로마노프는 개인적으로 친구인 도게르트 장군과 비밀교신을 계속했음이 입증됐다. 도게르트는 그의 편지에서 짜르에게 풀려날 준비를 하도록 격려하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에 비춰, 그리고 또한 짧은 시간 안에 에카테린부르그로부터 철수하기로 한 우랄관구 노동자-병사-붉은군대 소비에트 대표자들의 결정에 기인한 곤란한 상황에서, 특히 전시기간이라는 관점에서 전 짜르를 보호하기 위해 더 이상 수고를 한다는 것은 절대로 옳은 일이 아니며 오히려 유해한 것이다. 그래서 우랄관구 소비에트는 전 짜르를 지체없이 처형하기로 결의했다.
  "평민 니콜라이 로마노프, 나는 당신이 최후를 정리하는데 3시간의 여유가 있다는 것을 통보하오."  우랄관구 소비에트 의장은 전 짜르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경비병, 니콜라이 로마노프를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감시해." 하고 병사에게 명령했다.

 

 

 

 

 

                      마지막 작별인사 

니콜라이 로마노프가 그 회합에서 돌아 온 후 곧 그의 아내가 알렉시스 알렉산드로비치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둘 다 슬피 울었다.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는 때때로 졸도를 하곤 했으며 의사가 불려와야 했다. 그녀는 졸도에서 깨어나자, 경비병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애걸했다. 병사들은, 자비를 베푸는 것은 그들의 권한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제발 조용히 해요, 엘리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매우 낮은 목소리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다. 그는 아내와 아들의 머리 위에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는 전 집사장을 불러 그에게 키스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는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와 알렉세이를 떠나지 말아 주게.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그들 주위에 나 외에는 아무도 없지 않나. 그들을 진정시킬 사람이 아무도 없다네. 나는 곧 하느님이 데려갈 걸세."
  그 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외에 아무도 그와 작별인사를 나누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아들은 다른 다섯 명의 붉은군대 병사들이 우랄관구 소비에트 의장과 다른 두 노동자 요원들과 함께 다시 나타날 때까지 같이 있었다.
  "오버코트를 걸치시오" 소비에트 의장은 단호하게 명령했다. 침착성을 잃지 않고 있던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의 아내와 아들 및 집사장에게 키스했다. 그는 한번 더 그들에게 성호를 긋고는, 그를 데리러 온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당신들의 처분에 맡기겠소."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와 알렉세이는 발작을 일으키며 둘 다 방바닥에 고꾸라졌다. 파르팬 알렉세이비치는 이들 모자에게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시도했으나. 의장이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시오.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되오. 우리가 떠난 후 하도록 하시오."
  "제발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를 동행하게 해 주십시오." 그 늙은 시종은 사정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동행하지 못했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끌려가 버렸다. 7월 15일 밤 어디서 그가  20명으로 구성된 일단의 붉은군대 병사들에게 총살됐는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

 

 

 

                     처형 후

그날 날이 새기 전에 우랄관구소비에트 의장은 몇 명의 붉은군대 병사들과, 의사 한 사람 및 수비대 인민위원과 함께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가 거처했던 방에 다시 왔다. 의사는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와 알렉세이 로마노프를 돌봐줬다. 그런데 소비에트 의장은 의사에게 "그들을 즉시 데려가는 것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가능합니다."
  "평민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와 알렉세이 로마노프, 준비하시오. 당신들은 이곳에서 떠나게 될 것이오. 당신들에게 꼭 긴요한 물건들만 가져가되, 30-40 파운드를 초과해서는 안 되오."라고 의장은 말했다.
  자신들을 억제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이리저리 넘어지면서 어머니와 아들은 곧 떠날 준비를 마쳤다. 의장은 그들이 그들의 사랑하는 사람들(황후의 딸들)에게 작별인사 하는 것 마저 허용하지 않고 내내 그들을 몰아세우기만 했다.
  "그리고 노인장, 당신도 지금 이곳으로부터 멀리 떠나시오. 당신이 섬겨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소."
  "내일 당신들도 이곳을 떠나시오." 의장은 수비대 인민위원을 처다 보며 명령했다.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와 알렉세이 니콜라이비치는 즉시 자동차에 태워져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날이 밝자 수비대 인민위원이 다시 나타나 파르팬 이바노비치에게 즉시 짜르가 사용하던 물건들의 일부를 갖고 방을 나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모든 편지와 서류들은 수비대 인민위원이 챙겼다. 파르팬 이바노비치는 역에서 기차표를 사는 데 곤욕을 치렀다. 역과 기차가 에카테린부르그 시의 귀중품들을 소개시키느라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는 붉은군대 병사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첼리아빈스크 신문 7549 우트로 시베리아는 니콜라이 로마노프의 처형을 확인하는 정부의 특별포고를 보도했다. 짜르의 모든 서류들은 압수됐다.
  그 신문이 언급했던 것처럼, 7월30일에 에카테린부르그에서 10 베르스타(러시아의 里程, 1베르스타는 1.067km) 떨어진 곳에 불에 탄 한 가옥의 재 무더기에서 짜르 가족 소유의 쇠붙이들과 몇몇 짜르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불에 탄 시체들이 발견되었다. 짜르의 실종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관계자들이 이 곳을 다녀갔다. 그래서 로마노프 가족들이 불에 탄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에카테린부르그 시에서 볼셰비키들이 철수할 때 인질로 잡아간 엘레나 페트로브나 대공비, 헨드리코바 백작부인 및 아직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제 3의 사람이 있었다. 인질들의 총수는 80명에 이르렀다. 볼셰비키들은 베르코트리에 방향으로 탈출했다.

 

 

 

                     에카테린부르그 역사학협회에서 나온 추가사실

러시아 역사학협회 회원들이 러시아 상원의 비밀문서에서 1905년 10월17일자로 된 "정부 법령집"의 교정지 전체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발표문이 들어 있었다.

 

"우리 대 제국의 수도와 지방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요와 폭동이 나의 가슴을 고통스런 슬픔으로 채우고 있다. 러시아 황제의 행복은 인민들의 행복과 불가분으로 결합돼 있으며, 인민들의 고통이 나를 비통하게 하고 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소동은 주민들 사이에 극심한 무질서를 야기할지 모르며 국가의 단결과 보전에 크나큰 위협이 될 수 있다. 러시아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인민들 사이에 양심을 지키는 기풍을 조성하여 국가 최고의 번영을 위해 모든 계층의 인민들을 철저하게 결합시키고 단결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러시아 제국의 황위를 포기하고 거만한 권력을 내려놓기로 결정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과 떨어지기를 원치 않은 우리는 나의 동생 미하일 아렉산드로비치에게 후계자리를 넘겨주었으며 우리는 그의 러시아의 황위 등극을 축복하고 있다."

 

이 문장 뒤에 니콜라이 로마노프의 서명이 있고 그 맞은 편에 궁내부장관 프레데릭스의 서명이 있다. 일자와 장소는 1905년 10월16일, 노비 페테로호프로 되어 있다.
  이 발표문 밑에는 붉은 연필로 "'인쇄중지' 발행국장 호프미스터 케드린스키"라고 쓰여 있다. 1905년에 상원 발행국장이었던 호프미스터 A.A. 케드린스키는 그 발표문의 인쇄를 늦춘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자세한 얘기를 하고 있다.
"10월16일 저녁 8시에 나는 밀사로부터 프레데릭스 궁내부장관이 보낸 소포 하나를 받았다. 그 소포 속에서 나는 위에 언급된 발표문과, 나에게 다음 호 법령집에 이 발표문을 인쇄해 넣도록 요구하는 궁내부장관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 발표문의 접수가 법무장관을 통한 정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 발표문을 인쇄 담당자에게 보내 인쇄를 준비하도록 하고, 동시에 셔체글로비토프 법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그 서류의 접수를 통보했다. 처음에 법무장관은 오직 인쇄 연기를 지시했지만, 밤 11시에 나는 셔체글로비토프의 특별 위임을 받은 한 공무원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나에게 그 발표문의 원본을 건네줄 것을 요구했으며, 교정지를 상원 문서국에 보내라는 법무장관의 명령을 전달했다."

 

 

 

                      [슬로터의] 비망록

상기 원고는 에카테린부르그 주재 미국 영사가 그 곳 수도원에서 확보한 것이다. 그 수도원은 파르팬 이바노비치가 짜르의 시종직에서 물러난 후 며칠간 머물렀던 곳이다. 그 후 그는 다시 돌아와 이곳에서 몇 주간을 머물렀다. 이 수도원에는 또한 짜르가 유폐된 집에 날마다 우유를 배달했던 수녀가 있었다. 그녀는 7월17일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더 이상 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는 사실 외에 어떤 중요하다싶은 얘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그녀는 황실가족 누구와의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그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실제로 이것은 짜르와 그 가족의 마지막 결말 혹은 처분과 적어도 어떤 관계가 있는, 내가 본 더할 나위 없는 증거의 일부분이다. 그밖에 모든 것은 소문이고 풍문이다. 시체들, 황실가족의 5구의 시체들[황후의 여동생이며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대공의 부인인 엘리자베스 대공비, 콘스탄틴 대공의 세 아들과 폴 대공의 한 아들]이 알로파이베스크에 있는 한 구덩이에서 11월 하순경에 발견되었으며, 엘레나 페트로브나 대공비는 그 때 페름에서 병으로 입원하고 있었다.
   [호머 슬로터 소령의 서명]
   미 육군 보병 소령
   1918년 12월12일, 에카테린부르그.
   미국 원정군 사령부
   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
   1919년 3월29일 기록
   [전시내각 인(印) - 육군참모총장실 - MIL.INTEL.DIV. 일부인(日附印) - 1921년 3월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