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成造記(感想) - 春園

이강기 2015. 9. 15. 22:28
 
 
잡지명 삼천리 제8권 제1호
호수 제8권 제1호
발행년월일 1936-01-01
기사제목 成造記(感想)
필자 春園
기사형태 문예기타

作家點描

新文學運動의 先?者로 不滅할 功績을 끼치고 잇는 氏는 오늘까지 약 20년동안 꾸준히 創作의 붓을 날려 名篇佳作을 만히 나코잇다. 著書로 無情, 開拓者, 再生, 先導者, 許生傳, 젊은 꿈, 端宗哀史, 李舞臣傳, 그 女子의 一生 등. 故鄕은 平北定州 東京明治學院中學部 卒業, 東京早稻田大學英文科 卒業, 定州五山學校長, 東亞日報 編輯局長, 朝鮮日報 副社長 歷任, 現在 同友會 理事, 春秋44, 寫眞은 早大 當時의 春園.

昭和 9년 7月 榮兒는 紅疫을 치르고 나고 廷蘭도 봄철에 紅疫을 치르고 난 뒤로 잘 추서지 아니할 뿐더러 이웃집에 百日咳를 앓는 아이가 잇기 때문에 元山海水浴場에나 가서 한 녀름을 나리라 하고 밤차로 떠나량으로 짐을 끌어내려 할 때에 어멈의 말성을 부려서 元山行을 中止하고 그 이튼날 이왕 묶어 놓은 짐이오 갓가운 少林寺로나 가자고 하야 彰義門 外 少林寺로 나오게 되엇다.
이것이 綠이 되어서 少林寺에서 7월, 8월 두 달을 留하엿다. 나는 英文學과 라틴어를 공부하는 餘暇에 이웃으로 돌아다니다가 삼지동에 터 하나를 發見하엿다. 감나무 박인 154평의 조고마한 밧이다.
이 한 조각 땅이 내 눈에 든 까닭은, 땅이 비록 正南向이 못 되고 東東南으로 傾斜하엿스나 앞에 洗劍亭 개천의 <240> 흐름이 보일* 더러 소리가 들리고 北으로는 北漢의 釋迦峯, 文殊峯, 觀音峯, 普現峯, 地藏峯이 보이고 正面으로 白岳이 案山이 되고 南으로 仁王의 背面이 靈鷲가 날개를 버린 모양으로 雄壯하고도 神秘한 모양으로 앉엇고 또 彰義門外에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水石이라고 할 백사슬의 폭포가 나를 向하고 날아드는 景이 잇슴이엇다. 그 뿐더러 이 터에 서서 앞을 굽어보면 彰義門에서 오는 溪谷이 가장 그 아름다운 全貌를 보이고 彰義門에서 오는 溪流와 내 깁터가 잇는 三池洞에서 가는 溪流가 洗劍亭을 씻어 흐르는 本流에서 合하는 세개 어우름의 一點이 바로 내 집의 마당같이 되어서 이 洞天의 모든 山의 흐름과 물의 흐름이 이 一點에 會合하야 통일의 美를 보엿다.
朴萬千이라는 請負者에게 속아 不少한 돈을 떼우고 집터에서 바위가 나와서 基礎工事에 料外의 經費가 들엇지마는 朴萬千에게 대하야서는 내가 前生에 무슨 빗이 잇는 것으로 치고 바위를 깨트리던 중에는 샘 둘을 얻엇다. 하나는 바로 大廳 뒤요, 또 하나는 舍廊 모통이어서 물이 비록 흔치는 못하나 맛이 달고 빛이 맑으며 많이 먹어도 창하지 아니하고 곧 吸收됨을 發見하엿스며 또 우리 食口가 먹기에 넉넉함을 볼 때에 이 샘을 주신 땅에 感謝함을 들이지 아니할 수 없엇다.
起工한 지 거진 百日에 우리는 담과 마당과 浴室도 아직 끝나지 아니한 채로 새 집으로 옮아왓다. 도배는 끝이 낫스나 琉璃와 遮陽은 이사온 후에야 되엇고 電燈도 그러하엿다.
이 집을 지을 새 나는 날마다 아츰이면 와서 해가 진 뒤에야 나려갓다. 아직 감열매가 푸르고 장마가 오락가락하는 심한 더위에 수백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땀을 흘리고 勞役함을 볼 때에 심히 罪悚하고 感謝하엿다. 그들은 비록 意識的으로 나를 위하여서가 아니오 돈을 위하여서 勞役함이라 하지마는 나는 그러케 생각하지 아니한다. 그들의 無意識的인 이 勞役이 其實은 意識的으로 함과 꼭 같은 意味로 나를 위함인 것을 나는 믿는다. 그들의 勞役에 대하야 나는 빗을 진 갓을 自覺함이 正當한 줄을 나는 밋는다. 내가 그들에게서 勞役의 供養을 받을 만한 무슨 功德이 잇지 아니하다면 나는 後日에 이 恩惠를 갚을만한 功德을 세우지 아니하면 아니될 줄을 나는 믿는다. 사람이 意識的으로 하는 일이 멫 가지나 되는가. 우리는 善業이나 惡業을 意識 못하고 짓는 일이 많으며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意識하지 못하는 동안에 因을 짓고 報를 받고 잇는 것이다. <241>
특히 내가 이 집을 짓는데 感謝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분이 한 분 계시니 그는 ?産社主 鄭世權氏시다. 도모지 世上을 모르는 내가 請負業者에게 속는다, 歲月은 가도 집은 아니된다, 하는 것을 내 안해의게서 들으시고 그는 自進하야 내 집 役事를 맡으셧다. 그는 建陽社主로 多年 家屋建築에 經驗을 가진 專門家오. 또 手下에 老?한 匠色을 많이 둔 이라 그에게 役事를 一任한 뒤에는 나는 모든 시름을 놓고 每日 役事를 구경이나 하고 잇섯다. 設計의 一部와 物役所需도 選擇을 專혀 그에게 一任하엿다. 내 집이 이만콤 된 데는 鄭世權氏의 功勞가 가장 크다.
나는 氏의 所有인 嘉會洞 家屋을 全貰로 빌어서 3, 4개월 살앗지마는 氏가 엇더한 이인줄을 잘 몰랏다. 다만 각금 그가 土木 두루마기를 입고 衣服도 다 朝鮮産으로 지어입고 다니는 것과 머리를 밧작 깍고, 좀 검고 뚱뚱하* 嶺南 사투리를 쓰고 말이 적은 사람인 것만 보앗섯다.
나종에 알고 보매 그는 朝鮮을 사랑하는 마음이 極히 깊어서 朝鮮物産?勵를 몸소 實行할뿐더러 ?産社라는 朝鮮物産을 販賣하는 商店을 탑골公園 뒤에 두고 朝鮮産의 衣服次, 洋服次를 ?勵하고 實生活이라는 雜誌를 發行하야 朝鮮物産?勵를 宣傳하는 이 인줄을 알앗다. 또 그는 普通 집장사로 請負業을 하는 것이 아니라 朝鮮式 家屋의 改良을 위하야 恒常 硏究하야 利益보다도 이 점에 더 힘을 쓰는 稀罕한 사람인 줄도 알앗다. 雙窓은 用字보다 完字가 좋다는 것이나 덛문은 在來의 배미리 紙窓보다 用字琉璃窓이 合理라는 것이다. 머름 보다도 合 중방이 實用으로나 淸潔로나 合理라는 것이다. 其他 設計 便所, 마루, 土役材料 등 내가 안 것만 하여도 鄭氏의 改良한 점이 실로 적지 아니하다. 미다지 밑에 굳은 木材를 붙이는 것도 아마 氏의 創意라고 믿는다.
普通 집장사의 집이 것치례만 하고 눈에 안 띄우는 곳을 날리는 것은 公然한 秘密이지마는 내가 몸소 들어본 經驗으로 보건댄 鄭氏가 지은 집은 材木, 盖瓦는 勿論이어니와 塗褙, 장판까지도 꼭 제 집과 같이 세 벌, 네 벌로 하고 土役石築도 完全을 期하야 表裏가 다 진실하게 하엿다. 이것은 그의 참되고 誠實한 人格의 反暎일 것이다.
그가 부리는 木手, 泥匠, 塗褙匠, 琉璃匠, 遮陽匠을 다 經驗하엿거니와 대개 다 眞實한 사람들이어서 役事監督에 잔소리할 것이 없는 것을 볼 때에 나는 더욱 鄭氏의 人格을 尊敬하지 아니할 수 없엇다. 朴萬千같은 이름 높은 狹雜輩는<242>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내가 이 집 役事에 써 본 다른 사람들에게 비겨볼 때에 鄭氏 앞에 모인 사람들은 다 딴 種類 사람인 것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엇다.
鄭氏에게 오는 匠色들의 風紀도 많이 改良이 되어서 일하는 동안 술 먹으러 다니는 것이라든지 主人더러 술값을 달라 賞給을 달라 하는 것이라든지 비록 日工으로 할 境遇에라도 都給때보다 懈怠한다든지 하는 弊風이 거의 없엇다. 다 믿엄성이 잇엇다. 朝鮮民族의 모든 部門에 잇어서 다 이만콤만 改良되면 民族的 能率이 무섭게 增進되리라고 여러 번 나는 늣겻다. 한 사람의 人格의 힘이 이처럼 影響이 큰가를 늣겻다. 이것도 내 집 成造에서 얻은 큰 所得 중에 하나다.
다음에 내 집을 짓기에 功이 많은 이는 金書房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본래 朴萬千의 앞으로 온 사람이지마는 朴이 다라난 뒤에 因해 내 집 일을 보앗다. 힘이 내 집터 일에 모이는 사람들 중에 第一이오 눈설미도 第一이엇다. 그가 곡광이를 들고 땅을 파도 어너 일군의 三倍나 하고 무거운 것을 드는 것이나 집어 던지는 데는 力學을 잘 利用할 만한 머리가 잇섯다. 힘이 많으면 마음이 純하기가 쉬운 法이언마는 그는 힘이 세인 것과 같이 재조도 많앗다. 그는 고앙과 뒷간을 제 손으로 짓고 土役도 왼만한 泥匠이에 지지안코 石築도 잘 쌓고 무엇을 窮理해 내기를 좋아하엿다. 술과 담베는 먹지마는 참 되어 믿분 사람이엇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본래 全羅北道 任實 사람으로 그의 先親은 自?車 線路를 가지고 43간이나 되는 집을 쓰고 살앗다 하며 近年에 致敗하야 自己도 農場도 하여보고 電氣會社의 人夫도 되어 보앗다고 하며 昨年에 重病을 앓고 난 뒤로 근력이 半이나 줄엇노라고 한다. 今年에 23세다. 그는 내 집 役事가 끝나기까지 木手, 泥匠, 石手, 人夫監督 등 거의 萬能일ㅅ군으로 휫두루 일을 하엿다. 그런데 그것이 다 처음 보고 하는 일이라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어머니가 저를 위해서 婚處를 구하엿다는데 왼채 집을 하나 얻어야 婚姻을 하겟다고 하겨요. 그런데 120원이면 3간 全貰집을 하나 얻을 수가 잇대오. 늙으신 어머니 게실 집 걱정이나 아니하게 되면 저는 恨이 없겟서요.」
이러한 말을 하엿다. 그는 18세부터 5년간 山戰水戰을 다 하엿건마는 純實한 天性을 잃지 아니하엿다. 그의 마음에는 柔軟한 魂이 잇엇다. 그의 母親은 寡婦된 뒤에 다른 寡婦들과 協力하야 절 하나를 짓고 佛敎를 믿는다고 한다. 그 母親의 宗敎的 精神은 얼는 보기에 <243> 頑强한 듯 그에게 柔軟한 慈悲心의 씨를 심근 것이엇다. 나는 鄭世權氏는 이 사람을 알아보리라. 하고 金書房을 紹介하엿다. 사람은 類로써 相從하는 것이라, 善人은 善人끼리 惡人은 惡人끼리 모이는 法이다. 그 追逐하는 類를 보아서 그의 善惡을 分辨할 수 잇다고 함이 참이라.
다음에 우리집 役事에 일을 많이 한 사람 중에 鄭書房이라는 사람이 잇다. 그는 門 안에 사는 사람으로서 집터 開土를 할 때붙어 내 집 일을 하엿다. 그는 보기에 弱하게 생겻다. 마르고 뼈도 가늘고 나이는 40을 많이 넘지 아니한 모양이지마는 一生에 무거운 짐을 지기에 어깨가 굽고 눈알이 쑥 나왓다. 그러나 그는 누구에 지지 아니하게 힘드는 일을 잘 하엿고 또 주추방에 다질 떄에는 소리를 먹엿다. 그러케 청도 좋지 못하고 또 덕담도 녁녁지는 못하나 모인 사람들 중에는 고작이엇다. 혹 안 오는 날은 앞 개천에서 빨래방망이질을 하는 것을 보니 어느 큰 집 행랑사리를 하는 모양이엇다. 보통학교 4년까지 댕긴 아들을 일ㅅ자리를 못 얻어 주어서 노 걱정이엇다. 그의 열네살 먹은 딸은 뉘집 아이보는 일을 한다고 하는데 月給은 없고 먹고 얻어 입기만 한다고 한다.
「저 하나 먹고 입는 것만 해도 어딈니까.」
하고 그는 滿足한드시 내민 눈알을 굴렷다.
鄭書房은 붉은 무늬잇는 보재기ㅅ조각에 싼 양자긔변또 그릇을 둔 채로 웬 일인지 다시는 오지 아니하엿다. 아마 主人집 김장무 씻기에 밭븐 것이나 아닌가, 그러치 아니하면 날이 차지니까 그 쿨록거리던 기침이 더한 것인가. 아침이 되면 그의 모양이 눈에 선하다.
다음에 우리집 役事에 일하던 사람 중에 特色잇는 이는 石手 朴先達, 木手 金先生, 毛軍 덕선이, 정국이, 노서방, 또 통질장이 노서방- 이러한 이들이엇다.
석수 朴先達은 영감님이라고도 하고 朴령감이라고도 하엿다. 그는 今年에 還甲을 지낸 이다. 키가 크고 누구나 젊은 사람을 보면 言必稱 이놈이오 막걸리를 좋아하고 떠들기와 욕지거리를 좋아하고 뽑내고, 그러나 뒤가 물르고 늙엇지마는 아직도 긔운이 壯士여서 항상 젊은이들의 無氣力한 것을 痛罵하엿다.
「우리가 젊엇슬 적에는 하는 것은 엇던 老人이든지 다 하는 말이지마는 朴령감은 정말 힘이 壯士여서 只今 宮井洞에 잇는 다리의 돌欄干을 혼자서 지고 자하문을 넘엇고 少林寺의 돌부처님을 3원에 都給으로 맡아서 40리밖에서 혼자 지고온 것은 事實이라고 다른 사람들도 <244> 承認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하다.
「여섯목도? 여섯목도로 그것을 들어.」
하고 朴先達은 돌을 깨트리다 말고 허리를 펴면서 뽑내엇다.
그러나 朴先達은 自稱하는 바와 같은 一流石手는 아니엇다. 그는 성미가 겁겁하고 우락부락하나 뒷심이 없는 것과 같이 못쓸 바위돌을 깨트려 내는데는 相當하지마는 재조를 부리긔나 조심해서 할 일은 맡길 수가 없엇다. 그는 年前에 少林寺 築臺를 都給으로 맡아서 쌓은 일이 잇는데 役事를 막 마치고 工錢을 막 받아들고 나오랴고 할 때에 우루루 하고 그 石築이 묺어져 버렷다는, 이 동네에서는 相當히 有名한 이야기가 잇는 사람이다. 젊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하고 놀려먹으면 朴先達은 苦笑하엿다.
「선다님 정말 그랫서요?」
하고 누가 무르면,
「그랫서 그랫서, 빨리만 하리니깡.」
하고 自服하엿다.
「朴先達 自身의 말에 의지하면 그는 朝鮮八道를 무른 메주 밟도록 하엇다.
「平壤, 江西, 三和, 龍岡, 蔚珍, 三陟, 平海하며」
曾遊의 地를 내려 섬기는 것을 들으면 그 고을 이름들의 順序가 어지간이 맞는 것을 보와 다 다녀본 것은 事實인 듯하고 또 砲兵隊에서 밥 세 그릇 먹고 힘 그 중 많이 쓰기로 下士까지 올라가서 열여섯 名이 못 끌어 올리는 大砲를 혼자서 끌어 올렷고- 이러한 말도 다 事實인 듯하다.
그러나 朴先達에게는 큰 悲哀가 잇다. 그것은 一生에 十數次 마누라를 얻엇지마는 그 마누라들이 모도다 사흘만이면 달아낫다는 것이다. 지금도 母論 홀아비로 단 간 오막사리에서, 自己 말에 의지하면, 冊曆 보아가면서 손소 밥을 끌어 자시고, 일이나 없는 날이면 막걸리로 끄니를 에워서 엇던 때에는 사흘만이나 나흘만에 밥을 지어 자시는 일도 잇다고 한다.
「이 놈이 처가 속이 잇서요? 자식이 잇서요? 돈도 구찬코 집도 다 구찬치오.」
하거니와 그는 과연 방 웃목에 쌀ㅅ가마가 놓인 동안은 일을 가랴고 애를 쓰지도 아니한다.
「이 놈이 얼굴이 못 낫습닛가. 긔운이 남만 못합닛가. 전주 통량에 감투 바처쓰고 한 번 나설레니 보시랍시오. 천하ㅅ 게집의 눈이 다 내게로 모엿지오. 그러치마는 하로ㅅ밤만 지나면 다라난단 말슴이야 <245>
하고 그는 정말 悲愴한 表情을 지엇다. 그에게는 生理的 缺陷이 잇섯다.
그는 엇던 돈 많고 얼굴 잘 난 尙宮의 눈에 들어서 一夕을 같이 하엿다. 그러나 이튼날 아침에 尙宮은
「아이 허울이 앗갑고나 가엽다.」
하고 돈 얼마를 주면서 朴先達의 등을 두드렷다고 한다.
「글세 이런 복통을 할 노릇이 잇습닛가. 내 인제 閻羅大王을 만나면 이 놈아 이 오랄질 놈아, 白晝에 사람을 요모양으로 맨들어 낸단 말이냐, 하고 바지를 벗고 내돌랍니다.」
하며 그는 정말 고의를 벗엇다. 14, 15세의 小兒를 聯想케 하엿다.
「이것이 徹天之恨이올시다.」
하고 朴先達의 얼굴 ?肉은 모도 경련을 니르켯다.
朴先達의 一生은 魯迅의 阿큐와 비슷한 점이 잇서서 人生의 한 標本으로 썩 재미잇는 人物이다. 만일 그의 今生을 決定하는 因이 되는 前生의 業이 무엇인 것과 今生의 그의 業과 願이 엇더한 來生을 가저올 것을 안다 하면 더욱 재미잇슬 것이다.
金木手라는 사람은 키가 훨적 크고 카이제르 수염을 뻐치고 恒常 제 자랑을 하는 사람이엇다. 그의 말에 의하건댄 그는 본래 넉넉하고 文筆잇는 집 子孫으로 일즉 學校敎師 노릇도 하엿다 하며 漢詩도 짓노라고 하엿다. 木手를 배흔지는 4년밖에 아니되지마는 長安에 엇더한 一流 木手라도 自己以上 잘 하는 이는 없다고 하엿다. 그러나 그의 漢詩와 마찬가지로 그리 잘 하는 木手는 아니엇고 鄭世權氏의 評에 의지하건댄 한 3년 큰 데서 치워나면 곧 잘 하리라고 只今도 日工 1원 50전자리 木手는 된다고 한다. 그는 部下 둘을 다리고 와서 自己는 먹통만 들고 깍기나 미는 일은 다 部下에게 시키고 自己는 술 먹으러 돌아다니거나 風月을 지엇다. 그의 말대로 하면 都片手란 이러한 것이오. 이러케 無爲하는 동안에 大經綸을 베프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마치 自己가 數百名 木手를 指揮하는 景福宮 都片手나 되는 것 같이 自處하는 모양이 그의 眉宇에 보엿다.
木手는 燒酒를 먹고 泥匠이는 막걸리를 먹고 塗褙匠이는 藥酒가 아니면 아니 먹으러 들엇다.
人夫들은 日工으로 할 때에는 하로에 스므 짐을 지고 품ㅅ방으로 할 때에는 40여 짐을 지는 사람이 잇섯다.
덕선이라는 사람은 얼굴이 동탕하고 몸이 건장하고 말을 잘 하엿다. 그는 工錢을 높이고 짐을 적게 지는 運動을 하는 데는 人夫들 중에 指導者요, 煽動者엿섯다. <246>그는 同盟罷業이라는 手段도 잘 아는 사람이엇다. 그에게는 德보다도 知가 勝한 타잎의 사람이엇다. 또 人夫들에게 發論하야 갈보집에서 한바탕 먹고 노는 추념도 설도하는 사람이엇다.
덕선이라는 사람과 좋은 對照가 되는 이는 노서방이라는 사람이엇다. 그는 여긔서 三十里나 되는 農村에서 農閑期를 利用하야 솟을 지고 와서 집 턱에서 한둔을 하면서 일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러한 버리가 잇는 것만 다행히 녀겨서 아모ㅅ말도 없이 일을 하고 잇섯다. 그러나 그는 마츰대 덕선이의 感化를 받아서 그의 앞잡이의 任務를 하엿다. 덕선이는 子己가 主人의게 致疑 받는 줄을 깨달은 때붙어는 主人이 듣기 싫여할 말은 노書房을 식혀서 하게 하엿다. 노書房은 덕선이 만한 약음이 없 때문에 勇氣잇는 鬪士가 되어서 1개월이 넘을 때쯤 하여서는 가장 말성부리는 사람이 되엇섯다.
정국이라는 사람이 키가 크고 허리가 굽은 사람으로 도모지 말이 없엇다. 그는 滿州로 放浪하야 지지하르에서도 千餘里나 黑龍江쪽으로 들어가 본 사람이라고 하며 本業은 「이다바」라고 한다. 日本 內地人 料理집에 가면 每朔 50원은 받는다고 하야 人夫들은 그에게 特別히 欽?하는 빛을 보엿다.
다음에 池書房이라는 사람이 잇섯다. 그는 낯빛이 검고 몸이 壯大하나 柔和한 빛이 잇엇다. 자랑은 其他 씨름판에서 여러번 판을 막앗다고 한다. 그는 거즛말 할 사람은 아니엇다.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서 100일이나 힘을 써서 내 집을 일운 것이다. 내 집은 이 여러 사람들의 땀으로 일러진 것이다. 나는 그들의 住所와 氏名을 다 알지 못한다. 그러니 娑婆에 逗?하는 동안 이러이러한 일로 만낫다는 것으로도 넉넉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여러 힘이 모여서 열 두간 半이라는 내 弘智山莊이 되엇다. 열 두간이라면 조고마한 집이언마는 나와 같이 德과 福이 다 薄한 사람에게는 이 집도 過分하다는 惶悚한 感이 없지 아니하다.
만일 나만 능히 큰 닭음이 잇을 진댄 이 조고마한 집에도 朝鮮의 모든 賢人을 다 모을 수 잇을 뿐더러 世界의 모든 聖賢과 넓히 말하면 三千大千世界의 諸佛菩薩과 天人阿修羅를 다 모을 수가 잇는 것이다. 나는 인제 43세다. 하로로 말하면 午正이 훨신 넘은 떄다. 이제사 비로소 正道에 눈이 떴으니 늣다고 하겟지마는 이제붙어라도 不退轉의 바퀴를 굴리고저. 나는 이 집을 지을 때에 오직 感謝하고 오직 敬虔하는 마음으로써 하엿다. <247> 내 집을 위하야 짐을 지고 나무를 깍는 이들의 無意識중에 하는 付託- 내게 福을 주오. 나를 苦海에서 건저주오- 하는 付託을 分明히 들엇다. 나는 이 집에서 새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아니되고 참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그러치 못하면 나는 이번 一生을 虛送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나는 새벽에 일어난다. 이번 집은 높아서 지금까지 살던 어느 집에서 보다도 하늘이 많이 보인다. 서울에서 사는 동안에 눈에 보이지 아니하던 星座들도 보인다. 나는 새벽의 별들이 어제ㅅ밤 자기 전에 볼 때 보다 位置를 바꾼 *을 본다. 밤ㅅ새에 일러진 天地의 일의 자최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北辰만이 變함이 없어 그 자리에 잇는 것을 본다. 動中의 靜, 變中의 恒, 多中의 一이 宇宙의 神秘한 統一과 法을 느낀다. 나는 이 때에 空中을 향하야 敬虔하게 절하지 아니할 수 없고 이 宇宙의 한 멤버가 되어 이 神秘와 崇嚴을 늣기는 재주를 타고난 것을 感謝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나는 돌틈으로 솟는 물, 그것은 지난 밤 동안에 긋득이 고엿다. -에 양추하고 세수하고 燭불을 켜놓고 모든 聖人의 名號를 부르고 聖人의 글을 읽는다. 이 때에 나는 모든 罪業을 벗어나서 聖人과 하나가 되고 宇宙와 하나가 됨을 늣긴다. 나는 내 肉體의 制限과 五欲, 六識의 制限을 벗어남을 느낀다.
한 시간 동안 글을 읽고 暝想을 하고 나면 東天이 환해진다. 나는 한 손에 비를 들고 쓸에질을 하면서 東便을 바라본다. 白岳의 이끝에서 저끝까지가 우리집에서 보면 바로 해와 달이 뜨는 곳이면 한녀름이면 백사슬 瀑布 우에서 해가 뜨고 立冬을 지낸 只今에는 바로 白岳의 꼭대기에서 뜬다. 달도 그러하다.
白岳으로 아침해가 올려뜨랴 할 때에는 釋迦峯에 먼저 黃金色 볏이 비초인다. 그리고는 文殊, 觀音, 普賢에 비초이고 다음에는 仁王山의 등인 靈鷲의 뺨에 비초인다. 그런 뒤에는 紅輪이 내 집을 향하고 떠 오른다. 煤烟도 塵埃도 없는 淸淨한 空中에 아침해가 떠오르는 것을 果然 光名이오 莊嚴이오 美觀이오 偉觀이다.
白岳에 해가 오르면 溪谷에는 뽀야케 안개가 낀다. 그 안개가 日光을 받아서 자주 帳幕으로 變한다. 해가 오를사록 더욱 짙어져서 閭闔의 집들이 아니보이고 오직 溪流의 구비만이 안개가 稀薄한 틈을 타서 紫金色으로 黃金色으로 번적거린다. 그러다가 해가 얼마 올라온 뒤에야 그 안개가 瞬息間에 걷히고 사람들의 가난한 집들과 사람들의 살랴는 努力에 노닥노닥 <248> 完膚가 없이 된 自然이 赤裸裸한 本體를 露出한다. 採石場에서 구들장을 실은 馬車들이 바퀴ㅅ소리를 덜거럭 거리면 물문ㅅ길로 나가고 石手들은 연장 구럭을 메고 지게ㅅ군들은 지게를 지고 자갈 깨트리는 婦女들은 마치를 들고 골작골작에서 나와서 採石場으로 南大門市場으로들 간다. 人生은 勞役의 日課를 始作하는 것이다.
내 집에는 하늘과 별이 豊富한 모양으로 日光과 月光이 豊富하다. 白岳에서 해가 올라 仁王山을 넘어 西山의 海水觀音 뒷 峯을 넘을 때까지 내 집에 든다. 그래서 환하다. 낮에는 불을 떄지 아니하여도 방이 덥다. 나는 日光의 供養을 받는 것이다.
西山의 初生달에서부터 下弦달까지 내 집의 窓과 뜰에 비초인다.
나는 하늘과 별과 日光과 月光과 山色과 水聲을 많이 가진 것을 깃버한다. 階下에 10주쯤 되는 감나무가 잇서서 꽃과 잎과 그늘과 붉은 열매를 준다. 이러고도 서울에서는 5리밖에 아니되는 距離다. 두 움물에서 솟는 맑고 단 물을 마시고 塵埃에 더럽혀지지 아니한 깨끗한 空氣를 呼吸하는 것도 30여년 紅塵生活을 하던 나에게는 큰 福이다. 하물며 볏 잘드는 종용한 방이 聖賢과 詩人 學者의 冊도 읽을 만콤은 잇어서 讀書와 瞑想과 修養의 機會를 얻엇슴에랴. 어린 것들도 無故하고 우리 夫妻와 집에서 우리를 위하야 勞役하는 이들 다 平安하니 더욱 多幸한 일이다. 分에 넘치는 福이다. <249>
<240-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