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읍지 | |
(2004년 3월, 초등교 동창회 홈페이지) 요즘 수도이전 문제로 나라가 몹시 시끄러운데 문득 내 고향 의령이 새 수도 후보지가 됐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다. 우선 기뻐 어쩔 줄 몰라 할 고향 사람들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리 됐다면 비단 의령 사람들 뿐 아니라 이웃 군(郡)들인 합천, 창령, 함안, 진양 사람들도 살판났다고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그들뿐이랴. 경상도 전체가 들썩했을 것이다. 마치 지금의 충청도처럼.... 그런데 이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헛된 공상인 것 같다. 의령이 반도의 아래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설사 충청도 한가운데 있었다 해도 지금과 같은 자연조건으로선 아예 수도이전 후보지 명단에도 못 들어갔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대체로 한 나라의 도읍지가 될만한 곳들은 풍수지리학적으로 그에 걸맞은 여러 조건들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풍수지리란 좌청룡 우백호가 어떻고 안산과 주산이 어떻고 하는 묏자리용 풍수지리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자연환경이란 의미의 풍수지리를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옛날에 도읍지를 정할 때에는, 궁전과 관청을 짓고 관리들과 일정한 수의 백성들이 집을 지어 은거할만한 땅으로 수해가 나도 물에 잠기지 않고 물이 잘 빠지는 넓은 들이 있는가, 평화시에는 수운(水運)으로 이용하고 유사시엔 방어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긴 강을 끼고있는가, 사통팔달 교통이 편리하면서도 외적을 막기에 용이한 곳인가, 성을 쌓아 위급시에 얼른 피할 수 있는 분지형 산이 주위에 있는가, 그리고 백성들이 삶을 지탱하고 생산성을 높여 나라의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비옥한 넓은 평야가 이웃해 있는가 등등을 따졌다. 실제로 옛 도읍지들인 경주, 김해, 공주, 전주, 부여, 서울(하남 위래성 및 한양) 등을 둘러보면 과연 이러한 요건들을 대략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의령은 어느 모로 따져봐도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강이 있긴 하나 그것을 끼고 있는 넓은 평야가 없다. 산이 있긴 하나 성을 쌓아 군사를 둔칠 만한 요새가 없다. 오히려 쓸모 없는 산들이 중첩돼 있어 교통의 장애만 되고 강이 양쪽으로 흘러가고 있어 외적을 불러들이기 쉽고 수해가 들면 그나마 있는 좁은 들판들마저 죄다 물에 잠기고 마는 척박한 환경이다. 이런 곳에 어느 창업자가 나서서 도읍을 정하려고 하겠는가? 실제로 2000여년 전 삼한(三韓)시대에 진한(辰韓) 변한(弁韓) 영역이었던 지금의 경상도 땅에는 소국(小國)들이 24개나 있었으나 그들 중 어느 것도 의령을 본거지로 삼은 국가는 없었다. 의령 주위에 있는 소국들만 대략 살펴보면 이웃 칠원에는 접도국(接塗國)이 있었고, 가야에는 안사국(安邪國)이 섰다가 뒤에 아라가야(阿羅伽倻)로 발전했고, 창녕에는 불사국(不斯國) 혹은 비화가야국(非火伽倻國)이 있었다. 진주 거창 산청에는 백순시국(百淳是國)이, 하동의 곤명.곤양면에는 군미국(軍彌國)이, 하동 악양면에는 반로국(半路國)이, 고성엔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이, 밀양엔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 삼가엔 사이기국(斯二岐國)이, 초계엔 산반해국(散半奚國)이, 합천엔 다라국(多羅國)이 있었다. 이들 나라들은 작은 것은 6,7백호, 큰 것은 4,5천호 되는 규모였는데 훗날 대부분 6개의 가야국에 편입됐다가 결국 모두 신라 혹은 백제에 병합돼 버렸다. 결과적으로 이들 소국들이 보다 큰 나라에 병합됐다는 것은 이들 지역들이 소국을 세워 일정기간 지탱하기는 가능했으나 대국으로 발전하기에는 미흡한 자연환경이었다는 뜻도 되겠다. 여담이지만, 지금의 전라도와 충청도를 아우르는 마한(馬韓) 땅에는 2000년 전에 모두 54개의 소국들이 있었다고 하니 주로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그 당시엔 그 지역이 경상도 지역보다 사람살기에 더 적합하여 인구가 더 많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나라들이 섰는데도 유독 의령을 기반으로 한 나라는 없었으니(다만 의령이 삼가의 사이기국에 속해 있었다는 기록은 있다), 옛 사람들의 눈에도 의령은 도읍지를 정할 만한 지역으로 비치지 않았거나 혹은 자생적으로 하나의 국가가 탄생할 정도의 인구를 부양할 만한 환경이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굳이 옛날을 따질 것 없이 지금도 그 흔한 공업단지 하나 없고 고속도로 하나 지나가지 않은 땅이니 현 위정자들의 눈에도 의령은 지정학적으로 별로 중요하게 비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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