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 얽힌 이야기 | ||
명(命)이 길어진다는 점쟁이 말을 좇아서 낳자마자 강기리(광주리)에 담아 시렁에 잠깐 얹어 놓는 바람에 아명(兒名)이 "강기"가 됐다. 이런 별난 출생의식(出生儀式)을 거친 아이가 우리 마을에서 둘이 있었고 따라서 "강기"란 이름의 아이도 둘이 되었다. 그래 어른들이 구별하기 쉽도록 한 아이는 동리 위쪽에 산다 하여 "웃 강기", 다른 아이는 아래쪽에 산다하여 "아랫 강기"로 불렸다. 나는 "아랫 강기"였다. 어릴 땐 이 "강기"란 이름이 얼마나 듣기 싫었는지 내 또래들 중 누가 나의 "민적"(호적) 이름을 뻔히 알면서도 "강기야" 하고 아명으로 부르면 대 답도 잘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님의 한없는 사랑이 담긴 정겨운 이름이건만 그 땐 왜 그렇게도 천해 보이고 듣기 싫었는지 모르겠다. 생기는 대로 다 낳아도 몇 녀석 건지기가 힘들었던 시절, 장수(長壽)에 대한 부모님들의 한 맺힌 소망 때문에 우리 마을에서도 강기 외에 붙두리, 타앙께(무슨 뜻으로 지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혹시 똥개란 의미의 造語인 蕩犬을 탕개로 발음한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닐까싶다), 진찬이, 차돌이... 등등 "귀신들도 외면할 만큼 천한" 아명들이 많았다. 호적(그 때는 곧잘 "민 적<民籍>"이라고 했다)에는 항렬자를 넣은 "귀한" 이름을 버젓이 올려놓고도 집에서는 절대 로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혹시 귀신이 그 소리를 듣고 샘을 내 잡아갈까 봐서다. 그래서 아이들은 호적명(戶籍名)을 "학교에서 부르는 이름", 아명(兒名)을 "집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정의했다. 아명을 짓는데도 남녀 차별이 뚜렷했다. 여자아이에게는 아명을 아예 따로 지어주 지 않고 그냥 이름자 끝 자만 따서 "자야", "순이", "옥이", "숙이", "조야", "연이"...로 불렀다. "귀함의 척도면"에서 사내아이보다는 한 등급 낮다는 표시였다. 여자아이들 역시 이 끝 자로 불리는 이름들, 그 중에서도 특히 "자야", "순이", "연이"로 불리는 것을 듣기 싫어한 아이들이 많았다. 너무 흔해서 천해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사람 하나도 어릴 때 "자야"로 불리는 것이 창피해서 여러 사람들 있는 데서 누가 "자야!" 하고 부르면 못들은 측 딴전을 피운 적도 있다고 했다. 축구로 출세를 하고 아들에게까지 대물림한 차범근의 아들 이름은 "차두리"다. 어떤 교향악 단 지휘자 이름은 "금난새"다. "김불꾼"이라는 한글운동가도 있고, "정끝별"이라는 시인도 있 다. 물론 이들 이름들은 우리말 이름짓기 바람이 분 이후 자기들 나름대로는 굉장히 잘 짓는 다고 지은 이름들이겠지만, 이들 이름들 역시 옛날 우리가 어렸을 적이라면 다들 천한 이름 이라며 듣기 싫어했을 것이다. 앞서의 "강기"나 "붙두리", "진찬이", "차돌이" 등과 그 작명동 기만 다를 뿐이다. 요즘은 세계화 바람이 불어 이름을 지을 때도 영어나 다른 외국어로 발음하기 좋아야 한다는 점도 참작이 된다. 차범근이 독일 프로축구계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 외국 아나운서 의 중계에서는 항상 "차붐"으로 소개되었다. 빠른 말로 중계를 해야하는 그들에겐 "차범근"을 제대로 발음하기가 무척 어려웠던 모양이다. 아마도 차범근은 이 "설움" 때문에 자식 이름을 외국어로 발음하기 좋게 아예 "차두리"로 짓기로 작심했을 것도 같다. 이처럼 옛날에 천히 여겼던 그 숱한 아명들이 오늘날 비슷한 이름들로 되살아나고 그리고 외국어로 발음하기도 아주 좋은 것을 보면 우리의 옛 부모님들에게 무슨 선견지명 비슷한 것 이 있었던 것도 같다. 우리들이 호적에 올리는 한자로 된 중국식 이름들은 외국인들에겐 아마 도 세계에서 가장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들일 것이다. 진짜 중국사람들의 이름들은 모양만 우 리네 것과 같을 뿐이지 외국인들이 발음하기에는 우리 것보다 훨씬 수월하다. 예컨대 주은례 를 "주엔 라이"로, 모택동을 "마쩌둥"으로, 등소평을 "덩 샤오핑"으로 읽기 때문이다. 같은 한 자 문화권인 일본도 주로 한자로 된 이름들이지만, 정상형(井上馨)이 이노우에 가오루로 발음 되고 산본오십육( 山本五十六)이 야마모토 이소로꾸가 되는 것처럼 그 발음은 외국인들이 아 주 쉽게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잘 알다시피 우리들의 이름도 본래는 지금과 같지 않았다. 중국식 표기로 따르기 이전의 이름 들은 오늘날의 순한글식 이름들과 닮은 점이 많았다. 혁거세, 이사부, 거칠부, 사다함, 개소문 등이 그러하다. 우리와 같은 조상임이 분명한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한 술 더 떠 "늑대와 함께 춤을", "숲속의 천둥소리", "빗속을 달려" 등으로 아이들 이름을 지었다. 말하자면 우리 부모님 들이 항렬자를 넣고 지어 호적에 올린 "귀한" 이름들은 실은 조상전래의 순수한 우리 것이 아 닌 중국 것 흉내를 낸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항렬이란 것도 이름 짓기에 여간 골치를 썩히는 게 아니다. 죄다 같은 항렬자에 중간이나 끝 자만 다른 것으로 짓다 보니 더 이상 지을 만한 이름이 없어 고민을 하는 부모들도 있고, 또 객지로 흩어져 살게 된 이후에는 집안 아이들 이름을 일일이 챙길 수 없는지라 저마다 부르 기 좋고 듣기 좋은 이름들로 짓다보니 아이들이 좀 많은 집안의 족보에는 한 집안에서도 동 명이인이 수두룩하다. 여기에다 여러 지손(支孫)들 것을 합쳐보면 정말 가관이 된다. 예컨대 내 호적명인 00(웬 일인지 이 이름이 싫었다) 만 해도 세간에 사는 일가 중에도 있고 두곡에 사는 일가 중에도 있다. 이처럼 00이란 이름이 고향에서 여럿 있는 바람에 큰 낭패를 당할 번한 적이 한 번 있다. 1971 년도였던가 복수여권신청을 했더니 남대문경찰서 경무과라며 한번 오라는 것이었다. 그 때만 해도 여권, 특히 복수여권을 발급 받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고 신원조회도 철저하여 흔히 조회 기관에서 본인을 직접 부르곤 하던 시절이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갔었는데, 웬걸 경감 계급장을 단 과장이 큰 서류뭉치를 내 놓더니 다짜고짜 "1959년도에 마산서 부산으로 차를 몰고 가다 사 고를 낸 적이 있지요?" 하며 대뜸 심문 쪼로 나오는 게 아닌가. 한 10여분 총알처럼 퍼붓는 질문 에 별 막힘 없는 대답을 하고 나니 "오라해서 미안합니다.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했다. 옆에서 시종일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좀 나이 먹어보이는 여경 하나는 "틀림없는 줄 알았는데....." 하며 헛짚은 게 못내 아쉽다는 듯이 한마디 거들었다. 아마도 그 여경이 이 "단서"를 발견해 냈 던 모양이었다. 이야기의 자초지종은 이랬다. "경남 의령군 지정면 "유곡리"에 사는 이XX이란 사람이 1959년도에 마산서 부산으로 차를 몰고 가다 사람을 친 후 뺑소니를 쳤는데, 나의 신원 조회 서류상에 본적이 경남 의령군 지정면 봉곡리로 되어 있어 주소상에 "봉"자와 "유"자만 다 르고 나이 차이가 약간 날뿐 이름이 꼭 같으니 틀림없이 동일인물"이라 짐작하고 나를 부른 것 이었다. 1959년이라면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고 자동차 운전은커녕 오토바이도 한번 몰아 본 적이 없을 뿐더러 71년 당시까지도 아직 자동차 핸들 옆에도 가 본적이 없는 처지였다. 의 령군에 유곡면이라는 곳은 있어도 지정면에 유곡리라는 곳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기록 자체에 무슨 착오가 있는 것 같다고만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나왔는데, 그 이XX이가 과연 누구인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아리송하다. (2004.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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