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짱에 대한 추억
사람들은 ‘남봉사’ 마누라를 난짱이라 불렀다. 그녀를 왜 난짱이라 불렀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본래 ‘짱’이란 말은 이찌로짱, 안짱(형), 도우짱(아빠) 처럼 친밀감을 나타내고 싶은 사람 호칭 뒤에 붙이는 일본말(ちゃん)이었는데,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얼짱’ ‘몸짱’ 하며 주로 “최고”란 의미로 짱자를 함부로 쓰는 이상한 바람이 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짱’은 일본말에서 온 것이 아니라 ‘長’이 음변(音變)한 것이란 그럴듯한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일본어의 ‘짱’이든 한국어의 ‘짱’이든 난짱은 ‘짱’자를 붙일만한 여자는 못되었다. 푸시시한 머리숱이 부석부석한 흰 얼굴을 반쯤 덮고 있고, 늘 땟국이 꾀죄죄하게 흐르는 걸레 같은 옷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며, 몸을 약간 앞으로 구부린 채 팔도 흔들지 않고 땅을 쿵쿵 굴리며 걷는 걸음걸이부터가 벌써 정상이 아니라는 느낌을 들게 하는 여자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농이라도 던지면 상대가 안면이 있는 사람일 땐 히죽히죽 웃음으로 답을 하고 낯설어 뵈는 사람에겐 들었는지 말았는지 그냥 무표정한 얼굴로 땅만 내려다보고 걸어가기만 했다. 나는 난짱이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어릴 때 이웃에서 살며 ‘남봉사’ 집 마당(그 무렵엔 지서 앞 ‘홍상’집 뒤편에서 살았다) 양지쪽에서 아이들과 함께 소꿉놀이를 한 적도 있는 이에게 물어보니 “와았나!(왔냐?)”하는 인사정도는 하더라고 했다.
이런 마누라에 비해 남봉사는 단지 앞을 못 보는 장애자일 뿐 모든 게 정상인 사람이었다. 그들의 가까운 친척이 한 사람도 없는 것으로 보아 어디 먼 객지에서 외롭게 흘러들어온 사람들임이 분명한데 어떻게 우리 고향에 와 살게 되었는지 그 내력을 아는 사람들은 이미 다 고인이 된 터라 지금으로선 알아볼 방도가 없다. 부부간 나이차이가 아버지와 딸 사이만큼 나는 것을 보고 남봉사가 의지가지없는 불쌍한 계집아이를 주워 와 딸처럼 기르다가 어느 새 부부사이로 변한 거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가까운 이웃 동리에 잔치가 있는 날이면 ‘남봉사’는 난짱을 앞세우고 어김없이 참석했다. 아침저녁 난짱이 바가지를 안고 다니며 빌어먹고 사는 형편에 잔칫집은 모처럼 맛난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일 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한 절호의 기회였다. 그 시절(50년대)엔 유리걸식하는 거지 떼와 한센병 환자들이 엄청 많아 누구 집에서 길흉사가 있다 하면 귀신같이 알고 떼거리로 몰려들었다. 어떤 소문난 부잣집 장사 날엔 300여명이 장지에까지 몰려와 장지 문상객보다 그들 숫자가 더 많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봉사’가 사는 동리와 반 마장쯤 떨어진 우리 동리에는 특히 그들 내외의 행차가 잦았다. 그런데 두 사람이 지팡이를 양 끝에 쥐고 땅을 쿵쿵 굴리는 자세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좀 우스꽝스러웠다. 마치 영화에 나오는 심봉사와 뺑덕어미가 지팡이를 양 끝에 잡고 몸을 흔들어대며 걸어가는 모습과 어딘지 닮은꼴이었다. ‘남봉사’가 보통 걸음걸이로 천천히 가고 싶어도 지팡이를 잡고 앞에서 이끄는 난짱이 이상한 걸음걸이로 가고 있으니 자연히 따라 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간혹 동리의 ‘악동’들이 그 우스꽝스런 모습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곁에 몰려가 깔깔거리기도 하고,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해 살금살금 뒤쪽으로 가 여럿이 한꺼번에 고함을 꽥 지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남봉사’는 걸음을 딱 멈추고 사방으로 지팡이를 세차게 휘두르며 아이들에게 온갖 악담과 욕설을 퍼부었다. 희번덕거리는 눈,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그의 악담을 더욱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어린 생각으로도 참으로 기이하고 안쓰럽던 것은 그럴 때 보여주는 난짱의 태도였다. 아이들이 곁에 와서 놀려대고 남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도 난짱은 고개를 약간 숙인 듯한 본래 모습 그대로 일이 다 끝날 때까지 그냥 가만히 선 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뺑덕어미 반쯤만 되는 여자였더라도 ‘남봉사’가 나서기 전에 자기가 먼저 아이들을 야단치고 위협하여 쫓아버렸겠지만, 난짱은 전혀 그러지를 못했다. ‘남봉사’가 가자하면 가고 서자하면 설 뿐이었다. 말하자면 ‘남봉사’의 눈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여자였다. 반편도 성은 내는 법이다. 오히려 참다 참다 터뜨리는 그 울화통이 더 무서울 수도 있다. 그러나 난짱은 옆에서 ‘난리’가 벌어졌는데도 다소곳한 자세로 눈을 내려 깔고 내내 그냥 서 있기만 했다. 난짱이 성을 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들 했다.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아침이었다. 얼마나 추웠던지 문고리에 세수를 한 손이 쩍쩍 얼어붙었다. 아마도 1952년(임진년)이었던 것 같다. 그 해 여름 삼남지방에 사상 유래 없는 가뭄이 들어 대 흉년이 든 해였다. 우연히 방문을 열고 나가다가 마당 가운데 비렁 바가지를 움켜잡고 서 있는 난짱을 보았다. 횐 김을 길게 토하는 얼굴이 시퍼렇게 상기돼 있었다. 부엌에서 어머니가 밥이 뜸이 들려면 좀 기다려야 하니까 불 좀 쬐러 들어오래도 그냥 서 있기만 했다. “내 원 참.” 오히려 어머니가 애가 달아 그냥 솥을 열어 아직 제대로 익지 않은 머들머들한 밥 조금에다 밥솥에 찐 된장국을 뿌려 난짱이 들고 있는 바가지에 부어 주었다. 밥이래야 절반 정도 무를 가늘게 썰어 넣은 무 보리밥이었다.
난짱이 반 마장이나 떨어진 우리 동리까지 밥을 얻으러 오긴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아마도 흉년이 들다보니 100여 호가 넘는 소재지 동리에서도 두 사람 몫의 밥을 얻기조차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살을 에는 것 같은 한겨울 아침 해도 뜨기 전에, 모질게 춥기로 유명한 ‘밤날 들’ 설한풍을 뚫고 우리 마을까지 걸어오려면 얼마나 추웠을까. 맨손으로 바가지를 들고 있는 손과 몸이 후들후들 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옷인들 제대로 껴입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꾸벅 절을 하고 예의 그 땅을 쿵쿵 굴리는 걸음걸이로 사립문을 나가는 난짱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 눈시울이 젖어 온다.
(20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