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鄕

구호물자 - 50년대 초 농촌풍경

이강기 2015. 9. 16. 09:29

 

 

구호물자 - 50년대 초 농촌풍경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무렵 정부에서 아이크 방한선물(?)이라며 각 가정에 시 레이숑(미군 휴대용 야전식량) 박스 하나씩을 나누어주었다. 그 바람에 아이들은 산으로 들로 쫓아다니면서 부지런히 잔디씨앗을 훑어 모아야 했다. 선물에 대한 답례로 잔디 씨앗을 미국에 보낸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학생 1인당 한 홉인가 두 홉인가의 의무량을 부과했기 때문이다. 잔디 씨앗 한 홉을 훑어 모으기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시 레이숑 박스가 도청에서 군청, 면사무소를 거쳐 내려오면서 각 박스 안에 든 귀중품(?)이 사라져버렸다. 시 레이숑 박스 안에 무슨 귀중품이라니? 당시 농촌 사람들(특히 각 가정의 젊은이들)이 레이숑 박스를 열어 제일 먼저 찾은 것이 담배였다. 각 박스마다 카멜이나 럭키 스트라익 같은 양담배가 한 갑씩 들어 있었는데 이걸 취급 관청에서 누가 빼 가버린 것이다. "어 우리 집 것에도 없더니 너네집 것에도 없네, 이런 망할 놈의 자슥들.....귀신처럼 다 빼 가버렸다." 며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쇠고기 통조림이나 비스켓, 봉지커피 따위는 하찮은 것들이었다. 개떡이나 멀건 보리죽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있었던 어려운 시절이었건만 이 영양덩어리 음식이 그들에겐 영 낯설었던 것이다. 간혹 꾀스럽게 야채와 함께 국을 끓여 맛나게 먹었다는 가정들도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 가정에서는 누린내가 나내 설사를 하네 어쩌네 하면서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커피는 공기가 들어가 고약처럼 진득진득해진 체 그냥 쓰레기가 되어 버렸다. "더러운 놈들, 제 놈들이 먹지 못하니까 우리한테 갖다 줬구먼"하며 욕을 퍼붓는 할머니들도 있었다. 그 후 간혹 구호품으로 배급받은 우유가루도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어떤 집에선 그릇에 우유를 담아 밥솥에 쪘더니 돌멩이처럼 딱딱해져 버렸다며 개떡 취급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젖이 모자라 갓난아이에게 동냥 젖을 먹이느니 멀건 밥물로 연명을 시키느니 하는 시절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따금씩 미국서 온 구호품이라며 옷가지들이나 모자 신발 등을 나눠주기도 했다. 우리 집엔 허리가 잘록하고 가슴이 톡 튀어나온 여성용 상의 자켓 하나가 배당되었다. 그 당시엔 좀처럼 구경하기 힘들었던 고급 순모 천으로 된 자켓이었는데 그 모양대로는 입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궁리 끝에 고이 보관하고 있다가 수년 후 내 중학교 교복으로 개조하여 3년 내내 귀한 대접을 해가며 입고 다녔다.

 

 

학교에서 나눠주는 구호품은 딱 두 번이었는데, 한번은 건()자두였고 다른 한번은 학용품과 장난감이었다. 자두는 학교 전체에 총 몇 박스나 내려왔는지 한 사람에게 두 알인가 세 알인가 밖에 돌아가지 않았다. 우린 그걸 엉뚱하게도 대추야자라고 불렀는데 아무튼 동전 쪽 만큼 떼어서 입에 넣어보니 정말 기가 막히는 맛이었다. 반쯤 먹고 나머지는 집에 가져 가 어린 조카에게 주었더니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단 것이라고는 가을에 나는 홍시나 곶감, 명절 때나 약간씩 맛보는 조청, 그리고 떨어진 고무신이나 놋쇠 조각(무쇠는 받지 않았다) 같은 것을 주고 산 엿 동강이가 고작이었던 시절이라 설탕에 절어 논 건자두는 그냥 입에서 살 살 녹는 맛이었다. 학교 앞에 과자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간혹이라도 그걸 사 먹는 아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80년대 초쯤이었던가 서울 어느 백화점에서 그 미제 건자두를 발견하곤 옛 시절 생각이 나서 큰 봉지를 하나 사서 먹어봤으나 도무지 옛날 맛이 아니었다.

 

 

학용품과 장난감을 나눠줄 때에는 교실바닥에 번호를 매겨 쭉 늘어놓고는 제비뽑기를 했는데 내겐 콤파스가 돌아왔다. 참으로 신기했던 것은 늘어 논 물건들 중에 그 콤파스가 제일 맘에 들었고 갖고싶었는데 제비뽑기에서 마침 그걸 뽑아 낸 것이다. 그 당시 문방구에서 파는 콤파스는 값싼 양철을 우구려 만든 것이어서 색상도 나쁠 뿐 아니라 약간 힘만 줘도 휘어지고 또 금방 녹이 슬었다. 그에 비해 미국서 온 이 콤파스는 디자인도 전혀 다를 뿐 아니라 단단한 쇠에 고급 도금을 한 아주 멋진 것이었다. 훗날 고등학교 기하시간에도 그걸 갖고 다녔는데 그 무렵까지도 다른 아이들이 갖고 다니는 콤파스는 초등학교 시절에 보았던 그런 싸구려 품질의 것들이었다.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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