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鄕

야스다 멘조

이강기 2015. 9. 16. 09:28

 

 

야스다 멘조   

 

 

안면장(安面長)’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분이 면장으로 재직했던 기간이 일제시대 말기였기 때문에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40년대 초반 출생자들인 우리 세대는 같은 동리에 살지 않는다면 응당 그 분이 누구인지 모를 법도 하다. 그러나 그 분은 50년대 초까지도 학교(초등)에 무슨 행사가 있으면 으례 나와서 인상 깊은연설을 하곤 했기 때문에 저학년 아이들도 안 면장을 다 알아 보고 혹시 길에서 마주치면 꾸벅 인사를 하곤 했다  

 

 

그분의 연설이 인상깊었다는 것은 그 내용 때문이 아니다. 사실 그 무렵(50년대 초 전시 중)엔 무슨 행사 때마다 면장, 지서장은 물론이고, 자유당이다, 국민회다, 무어다 하는데서 감투를 쓴 어른들이 나와서 천편일률적인 내용의 길고 긴연설들을 하곤 했지만 그걸 듣고 감동받은 아이들은 아마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안면장'의 경우는 그 분의 독특한 연설방법 때문에 '인상깊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된 게 아니었던가 싶다. 훤칠하게 키가 크신 분이 갈색 두루마기를 입고 연단에 올라 눈을 껌벅껌벅 하며 우리 학고(학교)....”(그 무렵 다른 어른들은 주로 우리 핵교라고 발음했다)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연설을 하시곤 했는데 그 말이 나올 때마다 아이들 속에서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길에서나 운동장에서 그 분이 멀리 보이면, 아이들 중 누군가가 우리 학고가...”라는 흉내를 내곤 저희들끼리 킬킬거리곤 했다  

 

 

야스다 멘조는 바로 이 안 면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제말기에 창씨개명을 강제했을 때 안()씨가 야스다(安田)씨로 변했고, 거기에 멘조(面長)라는 말이 붙어 야스다 멘조가 된 것이다. 어른들한테서 들은 이야기로 이 야스다 멘조와 관련이 있는 두어 가지 일화가 있다  

 

 

하나는 이 분의 고집과 배짱에 관련된 이야기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식민지시대 말기에 일제당국은 일본말을 공용어로 쓰도록 강요했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학교에서조차 아이들이 교내에서 조선말을 하다가 걸리면 벌을 받았다. 이런 판국에 공식 행사 때의 연설이 일본말이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서슬 퍼런 시절에도 야스다 멘조는 유유하게 조선말로 연설을 했다. 맨 첫 마디 만은 일본 말로 했다. “와타시와 야스다 멘조데스(안면장올시다).” 그런 다음에는 모조리 조선말로 이어갔다. 아마 모르긴 해도 당시 주재소 일본 순사들의 압력이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면장 나으리께서 엄중한 국가시책을 어기고 있으니 그들로선 기가 막힐 일이었음 직 하다. 그러나 달래고 얼러도 막무가내니 어찌하랴. 야스다 멘조가 내세우는 이유는 간단했다. “일본말을 아무리 배우려 해도 내 머리로선 도무지 깨우칠 수가 없다.”였다. 아마 그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던 것 같고(그는 신식교육을 받은 바 없고 그 때 이미 연세가 높았다) 다른 사람들, 특히 일본 순사들도 일부 수긍했던 것 같다. 그러기에 결국 묵인하고 만 게 아니었던가 싶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 정 안되면 누구한테 일본말 발음으로 적어 달래서 읽으면 될 게 아닌가. 아무래도 그 분의 속뜻은 다른 데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왜 좋은 우리 말 놔두고 네놈들 말로 연설을 해야 돼?”하는 고집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른 하나는 그 분의 어진 심성과 관련된 이야기다. 일제말기의 공출제도는 악랄하기로 유명했다. 관공리들이 아예 집집마다 다니면서 쌀이며 놋그릇이며를 눈에 띠는 대로 빼앗아 갔다. 이 백주 강도질이나 다름없는 공출의 실적을 얼마나 많이 올리느냐에 따라 공무원들의 근무평점도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야스다 멘조는 그 따위 평점에 신경 쓸 분이 아니다. 실적이 의령군에서도 항상 꼴찌였다. 그 분의 모질지 못한 심성에 차마 야박하게 빼앗을 수 없었기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어릴 때 집안 어른들이 항상 안 면장을 칭송했던 것도 다 그런 일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의령 군청에 마치 김삿갓 흉내라도 내는 것처럼 즉흥시를 잘 짓는 노() 아무개라는 공출독려 담당 직원이 있었다. 이 사람에게 제일 골치 아픈 곳이 바로 지정면이었고 또한 야스다 멘조였다. 허구한 날 아무리 독촉을 해도 공출실적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 노 아무개씨가 실적을 알아보기 위해 지정면엘 와 보니 그간 전화로 공문으로 목이 터지고 애가 타도록 독려한 보람도 없이 실적이랍시고 달랑 쌀 10가마니를 면소창고에 쌓아 놓은 게 아닌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점잖은 어른한테 어찌해 볼 수도 없고 하여 결국 다음과 같은 삐딱한 시 한수를 짓는 것으로 울분을 달래었다  

 

 

步至 步至 芝正面,

 

安田面長 來助之

 

供出數字 諸米十('' 변에 들''자 한 '', 가마니란 뜻  

 

 

이걸 우리말로 음을 달아 보면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이 군데군데 섞여 있다. 한 행 한행 자세히 살펴보면, 이 사람의 짓는 솜씨가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첫 행은 애먹이는 지정면에 대해 흉측한 욕설을 퍼붓고 있다. 둘째 행도 안면장에게 욕설을 하고 있다. 는 내=(너의)로도 발음이 되니까 말하자면 안면장 네 X" 하는 소리다. 이런 망측한 일이 있나. 맨 마지막 행도 끝 부분은 제에미 X으랄꺼!“ 또는 제에기랄!“ 하는 소리다. 그러나 뜻을 풀어 보면 이 노 아무개씨의 애타는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공출실적을 점검하려) 걷고 걸어 지정면엘 와 보니,

 

야스다 면장이 나와서 도와주는데,

 

공출숫자가 모두 합쳐 쌀 10가마 밖에 안 되네.

 

제에기랄  

 

 

알고 보면 이 노 아무개씨도 풍류께나 아는 꽤 재미있는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엄혹한 상황에서도 이런 우스개 소리가 나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문득 우리 학고가...” 하는 안 면장님의 목쉰 듯한 음성이 50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귀에 쟁쟁하다

 

(20015)

 

 

 

 

 

 

'故鄕'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호물자 - 50년대 초 농촌풍경  (0) 2015.09.16
난짱에 대한 추억  (0) 2015.09.16
희순아!!  (0) 2015.09.16
하루오 지서장  (0) 2015.09.16
신작로(2)  (0) 2015.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