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개항과
근대국가의 태동 |
1. 반일주의가 된 민족주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작년에 『한국 근·현대사』교과서의 경제사 서술에 대한 비평을 준비하기까지 교과서를 읽은 적이 없었다. 교과서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교과서 서술은 전문적인 연구 성과의 축적 위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연구자는 연구로서 발언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교과서에 반영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日本軍慰安婦(위안부)’와 러시아에 의한 식민지화 가능성을 둘러싼 파문에서 전문 연구자의 발언이 심하게 매도되는 현실에 접하면서 연구와 상식 간에 괴리가 심각하며, 일반의 상식이 결국 교과서에 의해서 형성된데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어떠한 사상도 관용할 것 같은 多元主義的 세계관이 지배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 근거를 묻는 것조차 禁忌視(금기시)되는 신성한 한국근대사가 일반의 상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分裂的인 상황은 우리나라에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가치가 ‘반일주의’밖에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가? 私席에서 한 번 일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보라. 여기에는 이념의 左右는 물론 지식의 多寡(다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민족주의는 극우의 논리라고 비판하던 논자도 일제시대의 사안에 대해서는 강경한 민족주의자의 言說로 回歸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심지어 모든 거대 담론을 해체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도 민족주의 앞에서 무력할 뿐이다. 과연 ‘반일주의’는 우리 사회의 현재를 지키고 미래를 조망하는 견고한 성곽이 되었는가? 지향할 가치가 없어 허물어져 내리는 사회도 바라지 않지만, 우리 사회가 타 민족과의 대결에 의해서만 겨우 통합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이는 식민의 外傷을 남긴 일본 제국주의가 원인을 제공한 것이지만, 개항 이후 우리나라의 근대사가 오로지 일본의 침략과 그에 대한 저항의 여사로서 교육되고 있는 현실에도 책임이 크다. 20여년 만에 다시 읽게 된 교과서는 화려한 색채와 현란한 구성, 생생한 사진과 사료들이 돋보였지만, 배타적 민족주의의 역사관에 의해 너무나 강하게 규정되고 있었다. 강화도조약의 체결로부터 시작되는 개항기(1876~1905)는 처음부터 일본의 침략 야욕이 실현되어 가는 식민지화과정과 다름없으며, 따라서 개항기의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은 오로지 민족주의, 정확히 말해서는 ‘반일주의’가 있을 뿐이다.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경제 활동마저도 일본에 대한 ‘구국민족운동’의 範疇(범주) 안에 통합되어 있으며, 또한 그러한 한에서만 한국사에서의 위치를 인정을 받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개항기의 역사는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사회운동의 發源地(발원지)이자 母胎(모태)로서 이해되고 있다. 필자는 지금 민족주의가 부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개항기의 역사를 통해 민족주의가 국민국가형성의 시대적 과제와 함께 형성된 역사적 산물임을 배워서 다른 모든 역사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토론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자기비판이 가능한 성숙한 민족주의로 거듭나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또한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이 있듯이 과거는 당대의 문제의식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해방된 지 6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개항기를 보는 관점은 과거와는 달라져야 한다는 의미다. 개항기는 제국주의 일본이 침략하기 시작한 시대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가 근대 세계와 최초로 접촉하기 시작하여 근대 문명을 수용하고 또 반발하면서 현재와 같은 사회로 변화해 가기 시작한, 근대 사회 형성의 초기 국면으로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개항 이후 시작된 근대적 大轉換의 의의를 제대로 인식하고 한국 근·현대사에 개항기를 올바르게 위치 지을 수 있다. 그리하여 청소년들에게 배타적인 세계관을 주입시키는데 始終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자주적 근대화’의 편협함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개항기에 해당하는 장은 ‘II. 근대 사회의 전개’다. 교과서는 근대사의 기본 성격을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과 이에 대한 대응’으로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다음의 교과서 목차에 보듯이 ‘외세의 침략적 접근’에 의한 丙寅洋擾(1866)와 辛未洋擾(1871)에서 근대의 서술을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배경으로서 교과서 첫머리에 ‘19세기 후반의 세계’를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제국주의론이 본 세계로 그리고 있다. 서양의 자본주의가 산업혁명 이후 독점자본으로 발전함에 따라서 과잉된 자본이 투자의 출구와 새로운 시장을 찾는 점에서 제국주의를 이해하고, 이에 대해 비서구 지역에서 民族解放運動과 社會主義運動이 광범히 전개되었음을 서술하고 있다(금성 39쪽. 여러 출판사에서 펴낸 『한국 근·현대사』교과서의 차례가 동일하여, 금성출판사에서 출간된 것의 체제를 따랐다). 1. 외세의 침략적 접근과 개항 (1) 19세기 후반의 세계 (2) 통치 체제의 재정비 노력 (3)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양요 (4) 개항과 불평등 조약 체제 2. 개화 운동과 근대적 개혁의 추진 (1) 개화 세력의 대두 (2) 개화 정책의 추진과 반발 (3) 개화당의 근대화 운동 (4) 근대적 개혁의 추진 3. 구국민족운동의 전개 (1)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 (2) 대한제국과 독립 협회의 활동 (3) 항일 의병 전쟁의 전개 (4) 애국 계몽 운동의 전개 4. 개항 이후의 경제와 사회 (1) 열강의 경제 침탈 (2) 경제적 구국 운동 (3) 사회 구조와 의식의 변화 (4) 생활 모습의 변화 5. 근대 문물의 수용과 근대 문화의 형성 (1) 근대 문물의 수용 (2) 언론 기관의 발달 (3) 근대 교육과 국학 연구 (4) 문예와 종교의 새 경향 근대사가 이와 같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그에 대한 저항의 역사로 그 기본 성격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근·현대사』 교과서에서는 大院君의 鎖國政策이 개항과 그 이후에 성립한 ‘不平等條約 體制’에 비해서 훨씬 큰 비중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일본과 무력으로 충돌했던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이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측면의 서술마저도 제국주의의 침략과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관점에서만 서술되고 있다. 개항 이후 경제적 변화에 관해서 오로지 ‘열강의 경제침탈’과 그에 대항한 ‘경제적 구국운동의 전개’로서만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西勢東漸의 열강의 진출에 의해 조성된 민족적 위기와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근대사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고 할지라도, 서구 근대 문명과 자본주의를 오로지 제국주의의 침략성 차원에서만 서술하고 있는 것은 시야가 지나치게 협소하다. 교과서도 ‘근대 문물의 수용과 근대 문화의 형성’의 장을 두고 있듯이 ‘근대 사회의 전개’는 제국주의의 침략과 저항이라는 차원에서만 이해될 수 없다. 근대는 제국주의의 침략성이라는 한 가지 얼굴만을 가지고 다가온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갖게 하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응은 두려움과 당황함과 신기함과 좌절감, 그리고 각성된 도전의식 등의 제각각이었지만 거부와 저항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교과서는 이러한 제국주의의 위협과 함께 이루어진 근대 문명의 수용의 문제를 반침략 운동과 아무런 모순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당시의 東道西器論(동도서기론)과 같은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왕조의 정치체제와 사상의 근본적인 전환이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개항의 충격은, 단지 主權喪失의 危機때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갖고 있던 기존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에 더욱 강력한 것이었다. 개항에 의한 제국주의 침략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질서[朝貢體制]로부터 일상적인 의복의 생산방법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머리로부터 발끝까지의 전면적인 변화를 강요했던 것이다. 전통적인 華夷論的(화이론적)인 국제관계가 국민국가간의 새로운 국제관계 속에서 새롭게 정립되어야 했으며, 이에 따라서 동아시아 3국의 정치권력의 동요는 필연적이었다. 이와 함께 영국과 뒤이어 일본의 공장에서 증기력을 이용하여 대량생산된 면제품의 수입은 베틀로 생산한 면포를 대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국 경제사 연구에서 일반적으로 개항을 근대의 기점으로 삼았던 것은 개항을 계기로 한국 사회가 自給自足的인 농업경제에서 국제분업 관계에 편입된 開放經濟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한국 근대 사회 발전의 주요한 계기가 ‘後發性의 優位’를 향유할 수 있었다는 점, 즉 외부로부터 근대화에 필요한 지식·제도·자본을 수입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선발국에서는 미쳐 이용하지 않았던 제도를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鎖國에서 개국으로의 전환이 갖는 의의는 실로 막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항 이전에도 국제교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朝貢貿易體制(조공무역체제) 하에서 이루어진 국가 통제의 관리무역이었으며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한 것이었기 때문에, 국내 산업에 대한 영향력은 미약했다. 중국의 고급 絹織物의 수입이 조선의 견직업의 발달을 저해하여, 개항 이후 산업적 대응력에서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불리하게 되어있었던 점은 인정해야겠지만, 중국과 조선은 기본적으로 동질적인 산업구조를 가진 국가로서, 소농경제의 안정을 저해할 우려가 있는 국제무역은 극력 제한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항 이후에는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공산품의 유입은 전통적인 산업구조의 재편을 강요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충격에 대해 산업화를 달성한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의 운명은 달라졌던 것이다. 개항 이후 그 이전에 ‘胎動(태동)’하고 있었다는 근대 경제는 어떻게 되었던 것인가? 『국사』교과서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근대 경제로 넘어가는 준비 과정”(170쪽)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교과서는 이러한 변화를 ‘근대 사회의 태동’으로 지칭하고 있다. 근대가 조선 후기에 태동되었다는 것은 아직 출산하지는 않았지만 자라나고 있었으며, 시간이 지나면 근대 사회가 출현할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 근거로서 화폐의 통용, 농촌에서의 廣作 및 鑛山開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 맹아’의 빈약한 실증적 근거는 논외로 하더라도, 교과서가 말하는 근대 경제는 시장경제가 자원배분을 결정하고, 임노동과 자본 간의 생산관계가 성립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태동했다는 근대 경제와 자본주의적 관계가 개항 이후에는 어떻게 계승되고 발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一言半句도 없다. 그리고, 경제적 측면에 대해 소략하게 서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반침략 운동의 근거를 보여 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개항 이후의 경제에 대해 ‘일본의 경제적 침탈’, ‘약탈적 무역’, ‘토지 약탈’과 이에 대한 ‘경제적 구국운동의 전개’가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개방경제로의 이행에 의한 경제구조의 변화와 국제교역에 따른 교역의 이익에 대한 이해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국사』 357쪽; 금성 102쪽). 예를 들면 쌀이 일본으로 약탈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개항 후 주요한 수출품이 쌀이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내시장이 국제시장에서 오랫동안 고립되어 米價가 일본에 비하여 낮았기 때문이었다. 개항 이후 조선의 미가가 일본의 미가에 근접해 가면서 수출 미가는 계속 상승했는데, 이러한 전반적인 교역조건의 호전으로 적어도 미곡 생산자와 수입품 소비자는 교역으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수출에 의한 미곡류통의 攪亂(교란)과 미가상승에 의한 미곡 소비자들의 실질소득의 감소, 그리고 농공분업의 장기적 효과에 대해서는 지적되어야겠지만, 그에 따른 부정적인 측면 때문에 개항기의 국제교역이 경제원리가 통용되지 않는 약탈이 횡행하는 無法天地였다는 식의 서술은 학생들로 하여금 국제교역 자체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갖게 한다고 여겨진다. 이와 같이 경제적 측면까지도 수탈과 그에 대한 대응의 차원에서만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자주적 근대화’의 失敗 責任도 대외적인 요인에 돌려질 수밖에 없다. 교과서를 읽고 난 후 청소년들에게 ‘자주적 근대화’가 실패한 요인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일본의 침략과 동학농민운동의 좌절을 첫째로 꼽게 될 것이다. ‘구국 민족운동’의 첫 번째 단원에 제시되어 가장 많은 분량이 할당되어 있고 “동학농민운동의 열기는 꺼지지 않아 이후 농민의 사회개혁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더 나아가 의병전쟁의 추진력이 되어 반침략 항일투쟁의 역사적 기반이 되었다”(금성 82쪽)라고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교과서에 따라서 “근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한계”(천재교육 94쪽)를 지적하고 있지만, 전체 교과서의 基本構圖가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과 이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에서 동학농민운동이 구국 민족운동의 가장 첫머리에 놓이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일 것이다. 한편 교과서는 동시에 독립협화와 대한제국을 ‘구국 민족운동의 전개’라는 장에 서로 아무런 갈등이 없었던 것처럼 나란히 서술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는 대한제국은 立憲君主制를 지향했던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나서 專制國家임을 宣布했던 것인데, 같은 장에 사이좋게 서술되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한 교과서는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은 전제군주제의 확립을 통해 근대 주권국가를 지향”(금성 87쪽)했다고 단언하고 있다. 과연 한 왕조가 전제군주제를 강화하여 근대 국가로 스스로 전환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이해는 국력을 강화시키는 것과 전제왕권을 강화하는 것을 혼동하는 데서 오는 所致다. 지지기반이 취약한 개화파 정부의 한계도 분명한 것이지만, 근대적 개혁에 매진했던 개화파 정부를 俄館播遷(아관파천)으로 무너뜨리고 독립협회마저 해산시킴으로써 조선왕조는 근대 국가로 변화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대한제국이 근대 국가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가졌던 것은 甲午改革에 의한 제도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지 대한제국 스스로의 개혁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大韓國國制」(1899)가 규정하고 있듯이 외교, 입법, 사법, 행정, 국방 등의 모든 국정을 국왕이 오로지하는 전제정치에 의해 국민은 물론 관료들의 참여도 봉쇄하고 있었던 대한제국에서는, 왕권은 강화되었으나 관료와 대중을 소외시킴으로써, 그 권력기반은 도리어 취약했던 것이다. 內藏院(내장원)과 元帥府(원수부)와 같은 왕실직속기구가 비대화됨에 따라서 공식적인 관료기구는 허구화되어 갔으며, 이로 인해 황실재정이 팽창하여 국가재정의 私物化(또는 家産化)가 진행되는 한편, 측근정치와 賣官賣職으로 인해 근대적 관료제의 성장이 지체되었다. ‘광무개혁’이라고 지칭하는 근대화 정책이 일부 시도되었지만, 그것을 성과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적·재정적 기반은 너무 협소했다. 더욱이 러시아에 접근하고 일본을 배제시켰던 외교정책의 파탄은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전락하게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교과서는, 동학농민운동에 의해 “농민이 주도가 되어 근대 개혁을 추진”(금성 82쪽)하는 것을 전망하다가, 돌연 반대 방향으로 전환하여 조선왕조 체제의 변혁 없이도 근대 사회의 발전이 가능하리라고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양자를 종합하여 ‘농민이 주도하는 전제군주제에 의해 추진되는 근대화’를 전망하고 있는 것일까? 도저히 그 깊은 執筆意圖를 알 수가 없다. 이러한 모순되고 일관성 없는 백화점 식의 서술이 학생들의 논리력 발달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왜 국사 과목을 학창 시절에 대부분 암기과목이라고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전후 논리적인 연결이 안 되는 사항을 공부하는 방법은 암기밖에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3. 근대적 대전환의 어려움과 새로움 청소년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떻게 形成되어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교과서는 어떻게 執筆되어야 할까? 첫째, 개항기가 근대로의 전환기였다는 점을 명확히 서술해야만 할 것이다. 개항기가 단지 제국주의의 위협으로 문호를 개방했다가 일본의 침략으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幕間劇(막간극)이 아니라, 중국 중심의 전통적 국제질서 안에서 자족적인 소농사회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던 조선왕조 체제가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전면적인 변화를 강요받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개항이 근대의 起點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학생들에게 이해시켜야만 할 것이다. 개항은 항구를 열어 통상을 시작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질서 내에서 조선의 위치를 완전히 새롭게 규정하는 것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통상요구를 조선왕조가 거부했던 것은 일본이 보낸 외교문서에 중국의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皇, 勅 등의 문자가 사용되었기 때문이었으며,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조약[丙子修好條規]은 제1조에 조선이 독립국[自主之邦]임을 명기하고 있다. 새로운 국제질서는 이렇게 독립된 주권국가 간의 일대일의 대등한 관계를 형식적 요건으로 하고 있으며, 이후 조선왕조는 이 독립국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 나갈 것인가에 그 운명이 달려 있었다. 이 조약을 두고서 일본의 침략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항상 이야기하지만, 비록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조선의 독립국적 지위를 가장 직접적으로 위협했던 것은 전통적인 종속관계의 해체를 우려한 중국이었다. 특히 중국은 壬午軍亂(1882) 이후 군대를 주둔시키고 국왕의 폐위를 시도할 만큼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여 실질적인 지배관계를 확립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주는 것은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1882)이다. ‘條約’이 아닌 ‘章程’의 형식을 취하여 조선을 조약체결의 대등한 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屬邦(속방)’으로 규정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중국과 일본에서 체결되던 일반적인 불평등조약보다 더욱 불리하게 되어있었다. 예를 들면, 중국 관원이 조선 내 중국인에 대한 재판권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중국인이 원고이고 조선인이 피고인 사건에 대해서도 조선 관원과 함께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으며, 도성 내에 점포를 개설하고 내지통상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한 위안스카이(袁世凱)는 ‘監國大臣’으로서 內政과 外交를 감독하는 총독정치를 시행했다. 당시 조선의 국제적 지위가 어디로 추락하고 있었던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갑신정변을 단행했던 개화파와 독립협회의 ‘獨立’이 의미하는 바는 일차적으로 이러한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국제질서의 대등한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것이었다. 대한제국이 황제를 칭하여 청국과 대등함을 선포할 수 있던 것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중국을 무력으로 패퇴시키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국은 청일전쟁에 패배한 후에도 상당 기간 조선과 새로운 국제질서에 입각한 외교관계를 맺는 것을 회피하여, 조선은 ‘自主의 國’이지만 ‘平行의 國’은 아니라는 입장을 취해 조약도 체결하지 않고 사신도 파견하지 않으며 國書를 교환하지 않는다는 ‘3不政策’을 유지했다. 1898년에 가서 중국은 비로소 대한제국에 조약 체결을 위한 사신을 파견했으며, 이때 중국은 구미 제국과 같이 조선에 대해 불평등조약의 체결을 주장했던 것이다(1899년 9월 ‘韓淸修好通商條約’ 締結).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세계질서의 주변에 놓여 있었던 조선왕조의 위치와 청일전쟁 이후 중국의 지배력이 약화된 만주와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치적 力學關係에 대한 정교한 이해없이, 현행 교과서와 같이 개항 이후의 역사를 오로지 일본의 침략 야욕과 그에 대한 저항의 역사로 그리는 것은 진실의 절반에 불과한 것이다. 제국주의 열강이라는 한 덩어리의 惡과 피압박민족이라는 善의 對立構圖로 개항기의 국제질서를 서술하는 것은 부엌칼로 뇌수술을 집도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二分法的 구도 속에서는 유동적이었던 열강의 세력균형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았던 조선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수 없다. 현행 교과서에 외교사가 사실상 缺落되어 있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교과서는 개항 이후의 한반도와 만주를 중심으로 한 국제관계에 대해 기초적인 이해가 가능하도록 서술되어야만 할 것이다. 둘째,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화 위에서 조선왕조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과제가 무엇이었는지 명확히 해야만 한다. 독립은 ‘自主之邦’임을 조약에 명기한다고 하여 확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주지하듯이 개항 이후 체결된 조약은 治外法權, 片務的 最惠國待遇 및 協定關稅를 포함하는 불평등조약이었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역사적 임무는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여 불평등한 관계를 평등한 관계로 바꾸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의 제반 제도를 당시의 ‘글로벌 스탠더드’, 즉 서구의 근대 국가의 제도로 고쳐야 함은 물론 대외적 안보를 확보할 수 있는 군사력과 그것을 뒷받침할 경제적 실력을 갖추어야만 했다. 또한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에 수반되는 사회적 갈등을 극복하고 사회 통합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권력의 리더십과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세력의 성장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일본도 개항 이후 구미 열강과 맺었던 불평등조약을 1897년 치외법권의 폐지와 1911년 관세자주권의 회복을 통해 40여 년이 지난 후에야 개정할 수 있었듯이, 불평등조약의 해소는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교과서는 조선왕조가 직면하고 있었던 과제를 당시의 객관적인 국제정세 속에서 명백히 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그 어려움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 교과서는 자주적 근대화의 과제를 제기하면서 일본에 대한 ‘구국 민족운동’을 宣揚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 독립과 근대화가 달성되는 것은 아니며, 일본의 만행을 지적하는 것으로 우리의 실력이 갖추어지는 것도 아니다. 한 교과서는 동학농민군의 신무기로서 ‘장태’를 그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대나무를 가지고 항아리 모양으로 만들어 그 속에 닭과 병아리를 키우던 것이었는데, 볏짚이나 솜을 채워 총알을 막는 한편 칼을 꼽아 굴려서 火繩銃(화승총)으로 무장한 정부군을 크게 무찔렀다고 한다(금성 80쪽). 이러한 ‘신무기’로 무장한 농민군과 이들과 대항할 수 없어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정부군이 機關銃으로 무장한 일본의 신식 군대에 맞서 이길 수 있었겠는가? 우리 학생들은 일본의 힘을 빌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에 나섰던 개화파의 고민을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동학농민군의 실상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다. 개화파의 대일 의존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지만, 斥倭洋을 주장했던 동학농민군의 대청 의식이 어떠했는지도 한 번쯤은 의문을 가져 보아야 할 것이다. 全琫準은 체포 뒤에 일본인 취조관이 “일본이 이 나라를 병탄하려 한다는 의심만을 가지고, 청국인이 너의 나라를 속국으로 삼으려고 하는 데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에” 대해 묻자 “중국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공물을 바치고 있기 때문에 나라를 병탄하려고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하여 조공체제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자주적’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갑오개혁은 한계가 부각될 수밖에 없지만, 근대 국가에 필요한 制度의 整備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갑오개혁은 조선왕조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것이었다. 갑오개혁은 갑신정변의 三日天下와 같이 흔적도 없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법제화되어 대한제국에 의해서도 계승되었다. 한 교과서는 갑오개혁의 설명에서 왕권의 약화 등 정치적 변화를 일본의 침략적 의도와 관련하여 지적하고 있을 뿐 신분제의 근간인 노비제가 최종적으로 폐지된 것이나 貢人(공인)과 六注比廛(육주비전)의 폐지, 조세의 전면적인 금납화, 왕실재정과 국가재정의 분리 등 조선왕조 체제의 근간을 바꾼 것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금성 71쪽). 새로운 교과서는 조선왕조 체제가 근대화되기 위해서 필요한 제도 개혁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인식한 위에서 근대화 노력에 대해서 균형잡힌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셋째, 새로운 교과서는 개항 이후 진행된 경제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이해를 갖도록 해야만 한다. ‘개항 이후의 경제’를 열강의 경제침탈과 경제적 구국운동만으로 서술하는 것을 탈피하여, 왜 조선 사회가 쌀과 콩을 수출하고 면제품을 비롯한 공산품을 수입하는 농공분업관계에 편입되어 들어가게 되었는가를 이해시키고, 그에 따른 경제구조의 변화에 대해 기술해야 할 것이다(米-綿 交換體制). 현행 교과서로는 개항 전에 근대 경제의 ‘태동’이 있었으나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死産되었다는 식의 이해밖에 할 수 없게 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도 속에서는 개항 이후 진행되는 시장경제 체제로의 대전환이 갖는 중요성은 간과될 수밖에 없다. 개항 이전 조선왕조의 경제는 조세나 還穀(환곡)과 같은 財政的 物流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상업도 이러한 재정적 물류와 깊숙이 연관되어 영위되고 있었다(再分配經濟). 재정 위기에서 드러나듯이 이러한 재분배경제는 19세기에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으며, 갑오개혁은 조세 금납화와 貢納制(공납제)의 폐기 등을 통해 개항 이후 사실상 작동 불능에 이른 재분배경제를 폐기하고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시도한 것이었다. 소농 중심의 자족적인 경제체제 하에서 원격지 무역의 자극이 미약한 가운데 상공업의 발달이 제한적이었던 조선왕조의 경제 체제가 개항 이후의 국제무역이 시작됨에 따라서 경제적인 변화를 강요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전환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경제주체의 대응을 ‘경제적 구국운동’이라는 한 가지 범주에 다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은 명백히 무리다. 차라리 그 양상을 있는 그대로 기술해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독점적 특권이 위협받게 된 市廛商人(시전상인)과 같은 특권상인, 개항장의 새로운 기회를 보고 모여든 客主, 내륙의 행상을 독점하려 한 褓負商團(보부상단), 국가정책에 참여한 경험과 지식을 살려 기업설립에 뛰어든 관료, 쌀값이 올라 유리해진 미곡 생산에 힘쓰려는 농민과 지주, 반대로 쌀값이 올라서 실질임금이 낮아진 빈민이나 근로자, 회사를 설립하여 변화에 대응하려 했던 草創期 企業家, 이러한 다양한 경제 주체들의 반응을 보여 주는 것이 당시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적 활동에 지나치게 정치적 함의를 부여하여 구국운동이라는 기준으로 裁斷(재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권 침탈’에 대해서도 상투적인 사고를 벗어나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금과 기술과 지식과 경영능력이 부족한 후진국의 경제개발은 어떠한 전략으로 임해야 할 것인가? 적어도 “철도는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고통과 원성을 불러일으킨 폭력 그 자체”(금성 106쪽)라는 식의 거친 표현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끝으로, 새로운 교과서는 근대 문명의 충격과 새로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되어야 할 것이다. 현행 교과서가 ‘근대 문물의 수용과 근대 문화의 형성’을 상당한 비중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를 잘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점은 다른 분야의 서술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개항 이전의 조선 시대와 전혀 비교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도입된 기술이 전통적인 기술체계와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그리고 性理學者들의 세계관과 새롭게 전파되던 기독교적 세계관의 차이는 무엇인지, 근대적인 藝術觀(예술관)이 조선 시대의 美學과는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매우 다양한 새로운 文物과 制度가 도입되었음을 열거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근대 문명의 충격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근대 문명의 새로움이 잘 파악되지 않는다. 사상의 변화에 대한 서술도 확충되어야 할 것이다. 개항 이후의 전통사상의 동요와 새로운 사상의 등장과 전파에 대한 서술이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에 대한 서술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보다 폭넓은 전망에서 새로운 문명과의 접촉으로 인한 새로운 세계관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철학과 종교를 포괄하는 사상의 변화를 개관할 필요가 있다. 결국 사람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다. 개항기는 사람들의 생각이 크게 바뀌기 시작한 시대이며, 새로운 교과서는 이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의 변화에 대해 서술해야만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변화가 문화 영역 안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며, 사회의 다른 분야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도록 서술해야 할 것이다. 현행 교과서와 같이 근대 문물의 수용 과정이 제국주의의 침략과 그 대응이라는 전체 구도 속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蛇足(사족)과 같이 되어 있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4. 새로운 교과서의 구성 다음은 새로운 교과서의 개항기-개항과 근대 국가의 태동-의 목차를 구상해 본 것이다. 어떠한 취지로 이렇게 짰는가는 지금까지의 논의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주의를 요하는 점만 간략히 언급하고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1. 국제질서의 변화와 개항 1) 개항기의 국제정세 2) 쇄국에서 개항으로 3) 불평등조약 체제의 성립 2. 전통적 경제 체제의 전환 1) 개항과 국제무역의 전개 2) 전통적 경제구조의 변화 3) 외국 자본의 진출과 대응 3. 근대화의 노력과 근대 국가의 태동 1) 개화 정책의 전개와 갑신정변 2)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3) 갑오개혁과 근대 국가의 태동 4) 대한제국의 성립과 국권 상실 4. 근대 문물의 수용과 각성 1) 전통 사상의 동요와 변화 2)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반발 3) 국권 상실의 위기와 각성 전체의 編名(편명)을 ‘개항과 근대 국가의 태동’이라고 했는데, 근대의 기점으로서 개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근대 국가로의 변혁이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제였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또한 ‘태동’은 근대 국가의 수립에는 결국 실패했지만 근대 국가로의 개혁이 시도되고 특히 갑오개혁에 의해 근본적인 제도 변화를 경험했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현행 교과서의 ‘근대 사회의 전개’가 1910년까지로 되어 있지만, 개항 이후부터 러일전쟁(1904. 2~1905. 9)까지로 시기구분을 한 것은 乙巳條約(1905. 11) 이후는 식민지 시대와 연속성이 강하기 때문이다(개항기에 포함시킨다고 하더라도 1905~1910년의 기간은 근본적인 제도 변화가 진행된 시기로 서술될 필요가 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는 사람의 앞날이 불안하듯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기억하려는 사회의 미래도 낙관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과서에 대해서 우려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미래가 장차 이루어질 청소년의 선택에 달려 있으며, 그들의 선택은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이해에 크게 규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개항기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이 시기가 조선 후기에 태동되던 자생적인 근대가 제국주의에 의해서 死産된 시기가 아니라 전혀 낯선 세계와의 遭遇(조우) 속에서 진행되었던 大轉換의 시기이며, 또 우리가 그 延長線에 있음을 이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사회가 다른 문명을 만나 전면적으로 전환하는 것은 드문 일이며 그만큼 어렵고 새로운 것이었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한 소중한 경험으로서 연구되고 교육되어야 할 것이다.<시대정신창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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