科擧(과거)란 시험을 통해 고위
관리를 뽑는 방식을 가리킨다. 능력이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혈통에 근거해 등용하는 蔭敍(음서)와는 구별된다. 아울러 스스로 시험을 치른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이 추천하는 薦擧(천거)와도 다른 것이다. 前근대 사회에서 시험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것은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중국, 한국, 베트남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과거제가 없었다. 일본과 서구의 봉건사회의 지배층은 무력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武士계급이었다. 그런 만큼, 과거를 통한 관료의 등용은 곧 「文人(문인)들의 지배」로 이어진다.
그것은 문인통치의 전통과 유교적인 교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과거제는 587년 중국에서 먼저 실시되었다. 공정한
시험을 통해 관리를 충원한다는 것 자체가 기득권 세력에 대한 견제 조치, 나아가 天子(천자)의 권한 강화라는 성격을 지녔다. 唐태종은 즉위한 후
실시한 제1회 과거시험에 전국의 수재들이 몰려드는 모습을 보고서, 『아아, 이로써 천하의 호걸들이 모두 나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군』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다. 우리나라에 과거제가 도입, 실시된 것은 고려 광종 9년(958) 때의 일이다. 後周(후주)의 귀화인
雙冀(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광종 역시 호족 출신의 공신세력을 누르고 충성스러운 문신관료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1894년(갑오개혁) 과거제가 폐지될 때까지, 1천여 년 동안 과거제는 대표적인 관리 선발 방식으로 기능했다. 그 이전에
시험을 통해 관리를 충원하는 방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삼국통일 이후의 신라에서는, 신문왕 2년(682년) 國學(국학)을 설치했으며, 이어
원성왕 4년(788년) 독서 삼품과를 설치했지만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신라 사회의 근간인 골품제의 벽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고려 시대의 과거는 문장 쓰는 능력을 시험한 製述科(제술과)와 유교 경전을 시험하는 明經科(명경과)가 중심이었다. 經學(경학) 보다
詞章(사장)을 중시하는 漢唐 유학의 영향 때문이라 하겠다. 잡과는 기술관 등용시험이었는데, 격이 낮았다. 武科(무과)는 설치되지 않았다.
1390년(공양왕 2)에 설치되긴 했지만,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였다. 文臣 중심의 정치제제에 반발해 일어난 武臣의 난 이후,
그러니까 武臣정권기에도 武科는 실시되지 않았다. 고려 말 지방에 근거를 둔 향리층이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에 등장,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이 되었다. 그들은 새로이 도입된 주자학을 이념적 기반으로 삼았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문과, 무과, 잡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문과의 예비시험으로 生員試(생원시)와 進士試(진사시)가 있었다. 역사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생원어른, 진사어른, 초시댁 등은
향촌에서 士族으로 행세했던 부류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문과에 합격해야 출세길이 열렸다. 역시 문과가 핵심이었다. 무반
관료들을 등용하기 위한 武科는 부차적인 범주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역관, 외관, 율관, 음양관 등 전문 기술직을 충원하기 위한 잡과시험에는
중인들이 주로 응시했다. 획일적인 대학입시와 考試제도의 뿌리 법전을 보면
良人(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신분적인 제약이 없지 않았다. 수험생은 시험을 치르기에 앞서 錄名부터
해야 했다. 자신의 성명, 본관, 거주지와 부·조·증조·외조부의 관직, 성명, 본관을 기록한 四祖單子(사조단자)와 6품 이상의 관원이 도장을
찍은 保單子(보단자)를 제출해야 했다. 일종의 자세한 신원진술서와 보증서였던 셈이다. 그야말로 과거는 출세의 공인된
통로이자 지름길이었다. 그런 만큼, 정부에서도 엄정하게 관리하고자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武科의
경우, 한 번에 수천명을 뽑은 사례까지 있었다. 과거의 폐단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욱 두드러져 대리시험, 시험지 교체,
시험관 매수 등 다양한 행위가 자행되었다. 시험 위주의 암기식 공부가 되다 보니, 진정한 학문이 발전할 수 없었다. 시험을 위해 정해진 교과서와
주석서가 힘을 발휘해 획일성을 더욱 부채질하게 되었다. 내용보다는 형식 논리가 지배하게 된 것이다. 또한 잦은 과거로 인해
합격자는 나날이 늘어난 데 비해, 관직은 제한되어 있었다.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았다. 과연 관직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관직의 매매,
붕당간의 대립과 갈등 등과 얽히면서, 과거제는 원래의 「인재등용」이라는 목표와 기능을 크게 벗어나게 되었다. 많은 장점을
지닌 제도였지만, 과거는 마침내 제 본래의 기능을 다 할 수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 급격하게 변하는 세상을 따라갈 수 없었다. 丁若鏞(정약용)
같은 실학자들은 과거제의 폐단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나아가 개혁할 것을 주장해 마지 않았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획일적인
대학입시와 정형화된 考試제도를 보면서, 문득 지난날 과거제의 어두운 면을 읽어낸다면, 이는 지나친 생각일까. 정해진 교과서, 암기식 교육,
그리고 합격 그 자체가 목적인 시험으로는 21세기와 새 천년의 문명을 창조적으로 열어갈 수 없다. 역사는 현실의 거울이기도 한
것이다.●(월간조선 199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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