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民族史 千年의 반성 - 金富軾의 三國史記

이강기 2015. 9. 26. 15:28
民族史 千年의 반성 - 金富軾의 三國史記
 
三國 역사를 복원하는 유일한 歷史書, 결점 찾는 데 시간 보낼 수 없어
 

劉載梨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사학과 강사
新羅 정통성 확보를 위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 仁宗(인종) 23년(1145)에 편찬된 「三國史記」이다. 「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을 받아 관에서 편찬한 역사책이다. 金富軾은 책임자로서 감수를 했고, 崔山甫(최산보) 李溫文(이온문) 許洪材(허홍재) 등 11명의 의원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들은 대부분 과거에 급제하여 문장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
 
  고려 초기에는 북진정책이라는 국가적 이상과 관련하여 고구려에 중심을 두고 삼국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舊三國史(구삼국사)」라는 역사책을 편찬하게 되었다. 물론 「구삼국사」가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이 책의 영향을 받아 씌어진 李奎報(이규보)의 「동명왕편」이나 李丞休(이승휴)의 「제왕운기」 그리고 一然(일연)의 「三國遺事(삼국유사)」 등을 보면 적어도 「舊三國史」가 고구려에 그 전통의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舊三國史」가 있는데 왜 다시 「三國史記」를 편찬하려 했을까. 「三國史記」를 편찬하게 된 동기는 역사를 보는 입장이 서로 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거란과의 전쟁을 마감하고 宋나라와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려도 유연하고 세련된 유교정치를 열어가게 되었다.
 
  특히 文宗(문종)대에는 걸출한 학자와 문인들이 대거 배출되었으며 유교 문화도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고려 중기에 접어들면서 건국 초기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역사의식이 이즈음 신라를 계승한다는 역사인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三國史記」에는 고구려의 계승자였다는 사상은 찾아볼 수 없다.
 
  각 권의 첫 머리마다에 편찬자로 이름이 밝혀져 있는 金富軾은 신라 왕족의 후손으로, 숙종 때 과거에 합격하여 평탄한 출세의 길을 걸어왔다.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妙淸(묘청)의 난」이다.
 
  仁宗대에 이르러 요나라가 멸망하고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등장하여 고려에 압력을 가해오면서 국내정치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즉 유교정치에 의해 주춤해진 북진운동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鄭知常(정지상)과 묘청 등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묘청은 나라 이름을 「大爲(대위)」라 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세워 「天開(천개)」라 하였는데 고구려와 연결시켜 생각했던 것 같다. 김부식은 이 반란을 진압하고 묘청난으로 분열된 민심을 재수습하여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대륙의 강자로 등장한 金나라와의 관계에서 유연한 외교술로 안정을 찾으려고 하였다.
 
  사회가 어지러우면 역사 바로 세우기를 강조한다. 그들은 관료와 지식층이 우리나라 역사보다 중국 역사에 더 통달한 것을 개탄하고 중국 역사책만으로 교훈을 삼기엔 부족하다고 느꼈다. 이전에 만들어진 역사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만으로는 정치를 밝혀 권장하고 훈계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역사책을 편찬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책은 유교적 역사관에 입각해야 한다고 보았다.
 
 
  사료적 가치 높은 귀중한 역사서
 
 
  당시 지배층은 역사란 정치의 거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三國史記」는 교훈을 위한 역사서로서 편찬된 것이다. 「三國史記」는 삼국을 모두 「우리」라고 기록하여 우리나라의 도덕성과 특수성을 인정하려는 국가의식을 강조하였다. 이 책은 「서술은 하되 편찬자가 창작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객관적으로 편찬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에게 사료적 가치가 높은 귀중한 역사책이자 기본적으로 사료집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이 지닌 단점도 없지 않다. 유교적 합리주의 입장에서 씌어졌기 때문에 신화를 비판하고 증거주의를 내건 나머지 단군조선과 삼한의 역사를 누락하였으며 전통문화를 축소시켰다. 또 전체 서술에서 신라 위주로 서술되어 있으며, 중세국가의 공식적인 역사책으로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지배층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백성들의 삶의 모습은 별로 다루지 않았다.
 
  따라서 申采浩(신채호)는 「三國史記」를 유교적 사대관념에 사로잡혀 自主의식을 몰각하고 고대사의 진취적인 전통을 폄하하여 서술함으로써 길이 후세에 해독을 끼쳤다고 심하게 비평하였다. 또한 「三國史記」를 사대주의 역사관에 입각하여 마음대로 사료를 없애버렸다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三國史記」는 유교사상에 바탕을 두고 객관적인 원칙 아래 철저하게 문헌기록에 의거하여 편찬하였다.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려는 자세를 견지하여 신라의 고유한 王名표기나 전쟁에서 패배한 사실들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三國史記」는 삼국의 정치와 사회를 아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역사서이다.
 
  「三國史記」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 시각과 긍정적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삼국의 역사를 복원시켜줄 수 있는 사료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우리는 「삼국사기」가 가지는 한계점을 들추어내는 데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오히려 「삼국사기」가 있음으로써 삼국시대의 역사가 되살아날 수 있는 점을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다.●
  (월간조선 1999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