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받은 것은 고종
18년(1231)의 일이었다. 당시 고려는 崔忠獻(최충헌)의 아들 崔怡(최이)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원종 11년(1270) 몽골과
강화가 성립되어 武臣(무신)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약 40여 년 동안 고려는 몽골과의 항쟁을 지속하였다. 고려 武臣정권의
몽골에 대한 이러한 항쟁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왔다. 武臣정권이 항전을 지속하였기 때문에 고려왕조는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외세에
대한 항쟁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교훈적인 역사를 위해서도 이는 강조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정을 검토해 보면 이러한 이해가
반드시 정당한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몽골과의 침입에 고려는 3軍을 출동시켜 이에 대처하였으나 불가항력이었다. 이에
고려 정부는 화의를 추진하여 고종 19년 1월 몽골과 강화가 성립되었다. 당시 최이는 몽골에 끈질기게 저항했다 하여 慈州副使(자주부사)
崔椿命(최춘명)을 처형하려고 했다. 최춘명이 몽골과의 강화가 성립된 이후에도 항전을 계속했다는 이유로 최이가 최춘명을 처형하려 했다는 것은,
몽골과의 강화에 대한 그의 의지가 그만큼 강했음을 알려준다. 그러한 최이가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7월에 강화도로 遷都(천도)를 단행하였다.
최이가 태도를 바꾸어 천도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몽골이 감독관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설치하여 고려의 內政(내정)을
간섭하려 했던 것이다. 이는 최씨 정권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당시 국내 정치상황도 최씨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기에 천도는
정치적 난국을 타개하는 방법의 하나일 수 있었다. 강화천도 이후 최씨 정권의 대몽항전은 本土(본토) 백성들의 지지를
상실하였다. 본토의 백성들을 몽골의 말발굽 아래 버려둔 채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천도한 최씨 정권을 그들이 달가워했을 까닭도 없다. 더구나
夜別抄(야별초)를 이용한 최씨 정권의 유격전은 본토 백성에 대한 몽골군의 무차별한 살육만을 불러일으켰다. 西京(서경)의 감독관 다루가치를
살해하려 한 고려의 관리가 도리어 서경인에게 살해된 사건은 본토 백성들의 최씨 정권에 대한 감정이 어떠했는가를 잘 말해준다. 더구나 최항 정권
아래서 추진된 山城海島入保政策(산성해도 입보정책)은 본토의 백성들에게는 몽골군의 약탈보다 훨씬 가혹한 것이었다.
山城海島入保政策이란 백성들로 하여금 몽골군을 피해 집과 재산을 버려두고 산성이나 해도에 들어가도록 독려하는 정책이었다. 본토의 백성들은 산성이나
해도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몽골군에게 당할 때 당하더라도, 그들이 오기도 전에 집과 재산을 버려둔 채 섬에 들어가기를 즐겨했을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최씨 정권은 야별초를 파견하여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때려 죽이고, 혹은 긴 새끼로 사람의 목을 잇달아 엮어서 물 속에
던져」 죽음에 이르게 했다. 야별초의 이러한 만행은 본토의 백성들로 하여금 몽골군이 오는 것을 기뻐하게 만들었다.
崔氏 정권의 몰락 본토의 백성들이 최씨 정권에 반기를 들었음은 물론이다. 강화천도 이후에도 최씨
정권에 반대한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씨 정권은 이반된 민심을 수습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들이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떠 받들고 있는 8만대장경은 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대장경의 주조를 통해 외적의 침입을 강조하고 일체감을 조성하려 했던
것이다. 최씨 정권의 抗蒙이 이러한 성격을 지녔다면, 설사 그들의 항쟁 때문에 고려왕조가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고려왕조는, 최씨 정권을 지탱시켜주는 도구가 되었을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몽골군이 오는 것을 기뻐했던 당시 본토의 백성들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뒤에도 몽골과의 항쟁은 지속되었다. 최씨 정권의 뒤를 이은 金俊(김준)·林衍(임연)
등도 몽골과의 강화를 원하지 않았다. 몽골과의 강화와 이에 따른 개경으로의 환도는 곧 자신들을 무의미한 존재로 만들고 말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그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신정권이 끝난 뒤의 對蒙(대몽)항전은 三別抄(삼별초)에 의해 수행되었다. 삼별초는
야별초와 후일 몽골로부터 도망온 자들로 조직된 신의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 삼별초의 상당수는 몽골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몽골과 전투를 수행했던 부대였던 만큼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삼별초가 항몽만을 위해 난을 일으켰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삼별초 가운데
일부는 몽골과의 항전을 주장했던 林惟茂(임유무)의 제거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들이 개경환도 이후까지 몽골과의 항쟁을 결심한 데에는 몽골에서
그들의 처벌 의사를 분명히 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결국 삼별초의 성격이나 그들의 구체적인 활동을 무시한 채, 항몽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한 역사 해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가의 군인인 삼별초가 최씨의 私兵(사병)으로 이용되어, 몽골군보다 더한 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도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월간조선 199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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