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예술의 전망과 흐름 / 문학
순수와 참여에 대한 오해
오세영(吳世榮) / 시인·단국대 교수
1.
해묵은 이야기를 들고 나와 쑥스러운 바 있지만 80년대 우리 문학의 전개를 위해서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명제의 하나로 순수 문학과 참여 문학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 용어들이 60년대 문학논쟁에 예각화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 20여 년간이나 꾸준히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은 누구나 익히 아는 사실이다. 새삼스럽게 이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나는 이의 잘잘못을 가린다던가 어느 한편을 옹호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이들 두 개념은 결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문학이 지닌 다양한 측면의 하나로 상보적 관계에 있다는 점, 그리고 이를 대립적으로 이해해 왔던 것은 독선적인 문학관에서 기인했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이들 개념 규정에서 빚어졌던 오해의 일단을 해명하여, 보다 발전적인 문학의 이해를 도모코자 하는데 목적이 있을 따름이다.
문예학에서 원래 순수 문학이라는 명칭은 없다. 그것은 다만 비순수한 것에 대하여 문학의 본령을 지키고자 하는 문학의 상식적 차원에서 일컬음이다. 문예학에서 순수 문학이란 다음 세 가지 중의 하나를 지시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첫째는 순문학 belles lettres이다. 이는 문학의 범주를 한정함에 있어서 좁은 의미의 문학 즉 imaginative literature를 가리킬 때 원용되는 용어이다. 이미 문학의 기원 혹은 그 발생과정이 설명해 주듯이 문학은 넓은 의미에서 역사, 철학 등 오늘날의 인문 사회과학까지도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순문학이란 바로 이러한 넓은 의미의 문학 didactic과 구별되는 mythos로서의 문학을 뜻한다. 원래 문학이라는 말은 문자로 기록된다는 뜻을 지고 있다. 즉 어원적으로 문학은 문자로 기록된 일체의 문헌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포괄적인 뜻으로 문학을 정의할 수는 없다. 그 중에서 우리가 대상으로 하는 문학은 예술에 본질을 둔 문학, 즉 「상상」,「모방」으로서의 문학, 혹은 삶에 질적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힘」을 지닌 것으로서 문학이다.
둘째는 통속 대중문학의 대립 개념으로서의 순수 문학이다. 19세기 부르주아 문화의 출현과 더불어 문학은 이전의 고답적인 세계로부터 벗어나 세속적 취향에 따르고, 상업성에 결탁하여 영리 추구의 목적으로도 쓰여지게 되었다. 예컨대 신문의 대두와 더불어 갑자기 유행하기 시작한 신문 연재소설 따위이다(1836년 프랑스의 La Presses지(紙)는 최초로 Eugne Sue의 소설을 연재하여 흥행에 대 성공을 거둔다). 말하자면 이와 같은 통속 문학과 구별하여 순수 문학을 가정할 수 있다.
셋째는 시에 한정하여―시의 본질이 무엇보다 그렇기 때문에―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이 이상으로 제시했던 소위 순수시 la poesie pure의 개념이다. 상징주의 시인들, 가령 앙리 브레몽이나 발레리, 말라르메 등은 시의 순수성을 엄격히 주장하여 일체의 사회 현실로부터 분리된 주술로서의 시, 혹은 기하학적 추상 공간으로서의 시를 쓰고자 했다. 특히 발레리는 에드거 앨런 포우의 시론에 토대를 두고 시란 언어에 의한 미의 창조에 목적이 있고 지성이나 모랄로부터는 초연하여 음악이 꿈꾸는 절대세계로 나아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시는 물리학에서 순수한 물이라고 했을 때의 순수성을 지녀야 한다고 믿었다. 상징주의의 순수시란 개념에는 소설이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이를 확대 해석할 경우 순수 문학 일반에 적용되는 원리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상의 개념들이 60년대 순수 참여의 논쟁에서 순수 문학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60년대의 순수 문학은 좁은 의미의 순문학을 가리킨 것도, 통속 문학의 대립 개념을 지칭한 것도 아니며, 더욱이 시에 한정하여 거론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순수시의 본질을 문학 일반에 확대한 원리로 수용할 경우라면 이와 유사한 뜻이 될 수도 있겠으나 이 역시 올바른 개념 규정이 될 수는 없다. 60년대 70년대 순수 문학의 옹호자들이 상징주의 전통에 서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더욱이 현실 사회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문학, 혹은 지성과 모랄이 전혀 도외시된 시만을 창작했다고 보기엔 더욱 힘든 까닭이다.
그렇다면 순수 참여의 논쟁에서 일컫는 순수 문학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는 한국 문학의 독특한 상황 혹은 그 문학사에서 이해되어야 할 개념이다. 한국 문학사에서 순수라는 문학 용어가 등장한 것은 30년대 말 유진오(柳鎭午)에 의해서였다. 「순수에의 지향」(문장 1939. 6) 유진오는 새 세대 작가들의 문학적 진로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 지향점이 문학의 「순수성」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김동리와 소위 「세대」 논쟁을 일으킨 바 있는데 이것이 아마도 최초의 그 의식적인 사용이 아닌가 한다(그 이전에 주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립 개념으로서의 국민 문학, 민족 문학, 민족주의 문학 등의 명칭이 사용되었을 따름이다). 후에 김동리도 이에 전폭적으로 동의한 바 있지만 「김동리, 순수이의(純粹異義)」(문장 1939. 8) 이때 유진오가 정의한 순수 문학의 개념이 이렇다.
순수란 별 다른 것이 아니라 모든 비(非)문학적인 야심과 정치와 책모를 떠나 오로지 빛나는 문학정신만을 옹호하려는 의연한 태도를 두고 말함이다. 문단의 사조가 전면적으로 혼돈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문학인―지식인의 긍지와 특권을 유지 옹호해주는 것은 오직 순수에의 정열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식적인 정의가 이념적인 대립 명제로 부상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소속된 일단의 프롤레타리아 문인들이 우익 진영의 「청년문학가협회」측의 문인들을 공격하면서부터의 일이다. 이때 김동석(金東錫)은 「순수의 정체」라는 글로 김동리의 「인간성 옹호의 문학」(생활과 문학의 핵심)을 비판하여 순수 문학을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립 개념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소위 「참여 문학」이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한국 문학사상 순수 문학이라는 용어가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립 개념이 아니라 참여 문학의 대립 개념으로 파악되기 시작한 것은 6·25 이후의 일이다. 「가령 이어령(李御寧)의 저항의 문학 등」 50년대, 60년대 참여 문학은 그 당시 이미 묵인되어 있었고 후에 순수 참여의 논쟁에서 공인된 것이지만 이를테면 김붕구(金鵬九)의 「작가와 사회 1966」 등에서 사르트르의 소위 앙가쥬망 문학에 영향받은 것이었거나 혹은 이 용어의 한국어 번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이렇게 보면 결국 한국에 있어서 순수 문학이란 상식적인 차원에서 유진오가 규정한 비정치적인 문학―다시 말해 정치활동으로서의 문학이나 정치 수단으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① 자율적 규범을 지닌 문학, ②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립개념, ③ 사르트르의 소위 앙가쥬망 문학의 대립 개념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한국의 순수 문학을 사르트르가 의미하는 앙가쥬망의 반(反)개념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사르트르 자신이 그의 행동과 철학에서 여러 번 변신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자유론에서부터 시작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론 그리고 다시 자유론에 이르는 의미의 굴절에 조응시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
다 아는 바와 같이 사르트르가 공산주의와 결별했던 것은 그의 앙가쥬망의 본질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종속될 수 없었던 데 있다. 사회나 현실에 대한 참여, 그리고 상황에 대한 투쟁은 사르트르의 경우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하나의 절대적인 이데올로기의 실현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었다. 기실 그에 있어서 앙가쥬망이란 자유의 획득을 위한 앙가쥬망이며, 이때 도그마적 이데올로기는 자유 그 자체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앙가쥬망은 끊임없는 자유에의 기투(企投)가 되는 역설이 성립한다. 원래 앙가쥬망이라는 말은 engager(약속한다, 구속한다, 저당 잡힌다)에서 온 것으로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이란 본디 사회·상황 안의 존재이며 문학은 인간이 자기가 처해있는 상황―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자신을 구속하여 또 그 구속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부단한 자유에의 기투(企投)행위라고 보았다.
물론 60년대, 70년대에 등장되었던 참여 문학을 꼭 사르트르의 앙가쥬망 문학과 동일한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앙가쥬망 문학의 근원지인 프랑스의 경우에도 앙드레 말로, 셍떡쥐베리의 행동주의 문학(창작은 예술 지향적이고 실제 행동으로 참여함), 지이드, 카뮈류의 참여 문학 engagement spontane(지식인의 양심으로 자연스럽게 참여함), 사르트르의 참여문학 engagement reflechi(전제된 이론에 따라 계획적으로 참여함)은 서로 다르다. 영·미의 현대 문학에선 순수 문학, 참여 문학이라는 용어는 사용된 바 없고 대신 다만 정치 시, 사회 시, 프롤레타리아론(論)이라는 개념이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60, 70년대 한국의 참여 문학이 앙가쥬망 문학이라 함은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그것을 고발, 폭로 및 개혁하고자 하는, 문학 그대로 사회 참여라는 뜻의 문학이라는 점에서 사르트르의 그것에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상식적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참여 문학을 사르트르적 개념이나 혹은 상식적인 뜻으로 이해한다면 순수 문학이란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관심을 갖지 않는 문학,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에 자신을 구속시키지 않는 문학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순수 문학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그 자신 독자적으로 존립했던 것이 아니라 참여 문학이 존재함으로서 비로소 명명되게 된 다다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명확한 참여 문학의 개념 규정 없이 명확한 순수 문학의 개념을 밝혀 내긴 힘들다.
순수 문학이 소박하게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관심을 갖지 않는 문학이라고 한다면 과연 정치와 사회와 절연한 문학이 있을 수 있을까.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사회적 동물이며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모든 활동은 정치와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일차적으로 작품의 소재를 현실에서 구한다. 그가 작품을 쓰는 매체로서 언어 역시 당대 역사 사회의 산물이다. 그의 가치관 윤리관 사고 방식도 그 시대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작품을 쓰는 행위 속엔 넓은 의미로 그 시대의 정치, 사회의 영향이 매개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순수 문학으로 생각되는 소월의 「진달래 꽃」이나 「산유화」의 경우에도 그 작품세계의 근원을 거슬려 올라가면 거기엔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한을 만나게 된다. 즉 정치 사회적 조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순수 문학이라 할지라도 완전한 의미에서 사회 현실과 단절될 수는 없는 것이다. 순수 문학이 정치 사회적 현실에 관심을 갖지 않는 문학이라는 말은 이와 같은 넓은 뜻이 아니라 좁은 뜻을 지닌 점이다. 그렇다면 좁은 뜻으로서의 정치 사회 현실이란 무엇일까. 그것을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문학에서 미의식보다는 논리의식이, 삶의 보편적 인식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인식이 우선하는 현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력의 소재로서 현실이 아니라, 직접 지시되는 것으로서의 현실이다.
참여 문학과 순수 문학이 어떤 관계에 있느냐의 문제는 참여 문학이 목적 문학이냐, 아니냐의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만일 참여 문학이 목적 문학이라 한다면 그것은 순수 문학과 대립의 관계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참여 문학이 목적 문학이 아니라면 그것은 순수 문학과 상보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 순수 문학과 참여 문학은 본질적으로 문학이 지닌 다면성의 각 일면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원래 서로 모순되는 다양한 요소의 총체성으로 존재하며, 보는 시점에 따라 각기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가령 문학이 인간 삶의 반영이라 할 때, 그것은 정치적 사회적 삶의 반영일 수도 있으며 근원적 인간 조건(예컨대 죽음, 고독, 사랑 등)으로서 삶의 반영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전자는 참여 문학에 후자는 순수 문학에 관련될 터인데 그 어느 하나만이 진실이며 다른 것은 허위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참여 문학이 목적 문학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사르트르의 문학 궤적에서 살펴 볼 수 있듯이 앙가쥬망의 극단적인 행위엔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이 밀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여 문학을 목적 문학을 규정하기 위해선 이 두 가지 조건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첫째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처럼 문학이 하나의 절대적 이데올로기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요, 둘째 그것이 독선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전자가 목적 문학을 뜻하는 것임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사르트르가 시어는 사물의 언어라는 이유에서 시를 참여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참여 문학 이외의 일체 문학을 부정하는 태도는 문학의 본질이 자유에 있음을 부정하고 문학 그 자체를 속박시킨다는 점에서 목적 문학이다.
인간의 모든 가치 있는 행위가 궁극적으로 인간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면 문학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 경우 인간 삶의 행복이란 여러 다양한 측면에서 총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인간 삶을 위한 문학이란 독선적으로 정치 사회적 삶의 개선을 뜻하는 참여 문학을 가리키는 것도, 인간성의 질적 고양을 뜻하는 순수 문학만을 가리키는 것도 될 수 없다. 이 둘을 포함한 모든 가치 있는 문학이 포괄적으로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참여 문학이 목적 문학, 배타적 독선 문학이 아니라면 그것은 순수 문학과 결코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동시에 상호 병존, 의존하는 관계여야 한다. 인간 삶이 여러 다양성 속의 조화 혹은 그 총체성인 것과 같이 어느 한 시대의 문학 역시 여러 다양성 속의 조화, 그 총체성으로 존재하는 까닭이다. 60년대, 70년대 순수 참여 논쟁은 그것을 문학이 지닌 다면성의 하나로 파악하지 않고 배타적인 관계에서 파악했던데 논리의 경직을 가져왔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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