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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투성이 된 푸로 魂의 表白
八峰
계급문학의 존재를 시인하느냐 혹은 부인하느냐 하는 논의가 계급문학 시비론일 것이다.
그럼으로 나는 이곳에서 시인한다든지 부인한다든지 만을 말하야 두면 고만이라고 생각한다. 이하 좀 지리할 듯하나 엇지하야 시인한다는 나의 소견을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편적으로 기록한 것임에 지나지 못한다는 말도 미리 말하야 둔다.
문학이라는 것은 저울눈(尺目)을 그어노은 圓筒狀의 蓮소대 가튼 것 이여서 그것을 橫으로 볼 때엔 한 간 한 간식의 저을눈을 한 시대로 보아서 그 문학의 성장과 발달을 살필 수가 잇는 것이며 그것을 縱으로 볼 때엔 그 蓮대의 구멍을 민족으로 보아서 그 민족성의 소장과 발달을 엿볼 수 잇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다시 말하면 連心은 민족성이요 저울눈은 시대의 別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야 문학은 민족성을 핵심 (이라면 어폐가 잇스나 요컨대 일개의 축)을 가지고 시대환경의 肉을 붓치여 가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고 밋는다. 이에 대한 반증으로 우리의 눈 압에 있는 수업는 사실이 橫在하고 잇스닛가 각자는 이 사실에 취하야 증명을 구함이 可하겟다.
사실 세계의 문예를 놓고서 그것을 엽흐로 보면 거긔에는 시대가 그어노코 지나온 經線이 현저하고〈43〉 것을 위로서부터 내려다보면 거긔에는 『께르만族』 『스라브族』 『주-톤族』 『漠族』... 등의 민족의 緯線이 분명하다.
그리하야 이 사실은 문학-예술이 민족성과 시대 환경을 떠나지 못한다는 증거를 세우고 잇다.
사회상태는 변천하야 계급의 대립을 세워 노앗다. 이것은 생활상태의 분열이다. 그리고 이 생활상태의 분열은 생활의식의 분열을 이르키엿다. 이것이 근대적 자본주의가 가저온 커드란 공과다. 그리고 생활의식의 분열은 美意識의 분열을 이르키엿다. 여긔서 뿌르조아의 美感과 푸로레타리아의 美感이 달라젓다. 기교의 美를 찻고 인종의 美를 說하는 것은 뿌르조와의 美感 내지 美學이다. 이와 반대로 어듸까지든지 정의의 美를 찻고 반역의 美를 고창하는 것은 푸로레타리아의 美感 내지 美學이다. 이것은 美意識의 분열에 관한 一二例를 들어슴에 불과한 것이다.
여하튼 생활상태의 분열은 뿌르와 푸로의 대립은 인생관, 처세관, 윤리친, 문예관의 분열을 이르킨 것은 사실이다. 그리하야 뿌르조아의 인생관, 처세관, 윤리관은 뿌르조아의 생활의식을 구성하야써 그들의 문학이 진실로 이곳에서 출발하며 푸로레타리아의 인생관, 처세관, 윤이관은 푸로레타리아의 생활의식을 구성하야써 그들의 문학은 진실로 이곳에서 출발한다.
세상에는 이러케 말하는 사람이 만타. 『뿌르문학이니 푸로문학이니 하는 것은 실업슨 말이다. 노동자의 생활을 제재로 하엿다고 그것이 푸로문학이며 자산가의 家産을 제재로 하엿다고 그것이 곳 뿌르문학이 된다면 강아지를 그린 문학은 강아지 문학이 되고 도야지의 생활을 제재로 붓잡아 쓰면 그것은 도야지 문학이 되지 안켓느냐. 계급문학이란 밋친 놈의 헌수작이라』고.
이와 가튼 생각은 그 근본에 誤謬가 잇다. 계급문학이란 본질적 경향문제이요 결코 피상적 문제가 아니다. 작품 중에 나타난 작가의 주관과 作中의 인물에 대한 작자의 용의와 태도 여하에 따라서 다시 말하면 작자가 뿌르의식을 가지고 이 작품에 대하얏느냐 또는 작자가 푸로의식을 가지고 이 작품을 제작하얏느냐 하는 것이 그 근본문제이다.〈44〉
지금 여긔에서 계급문학의 相遠点을 들어볼 것 갓흐면 뿌르문학은 첫재 사회악을 긍정한 우에 모든 것을 시작함에 反하야 푸로문학은 첫재 이 사회악을 부정하고서 출발한다. 혹은 부정하는 준비로써 출발한다. 사회악이라는 것은 착취와 침략과 酷使와 정복의 제도와 조직을 일카름이다. 뿌르문학이 기교적 말초신경적 유희적임에 反하야 푸로문학은 열정적 본질적 전투적이다. 이상은 그 차이점의 一二를 예든 것에 불과하다.
하여간 문학상에 계급문학의 분립이 생긴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하야 철저한 설명을 하자면 이곳에서 역사관적 문명비평을 쓰지 안으면 어렵게 되얏스닛가. 이러한 장황한 짓은 하지 안키로 한다. 나는 이것을 계급문학의 존재를 사실로 시인한다고만 결론하고 말겟다.
지금 여긔에서 더 한 마듸의 말을 하여 두고자 한다. 최근 日本에서 푸로레타리아문학이라는 것이 대두하얏지만 그것은 찰하리 지식계급의 『푸로레타리아를 위한 문학』이라 할 것이라고 나는 밋는다. 푸로문학이란 푸로의 의식 일생활 감정속에서 지여진 문예일 것이요 일부 자가한 識者들의 푸로를 위하야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社會OO을 使唆하는 말하자면 무산계급을 위한 문학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푸로문학이 한 개의 문학인 이상 그것이 순진한 푸로레타리아의 생활의식에서 출발한 바 자아-개성에 충실한 전인격적 온전한 「마음」의 투영이 아니면 안될 것은 莫論이다. 피투성이 된 푸로레타리아의 혼의 표백이 아니면 안된다. 이것이 진정한 푸로문학일 것이다. 푸로를 위한 문학 『푸로의 문학』 거긔에도 상당한 구별이 잇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今日의 현상에 잇서서 계급예술-문학의 존재를 시인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인 것을 明言하고 붓을 놋는다.〈45〉
階級을 爲함이냐 文藝를 爲함이냐
金石松
문예와 계급-문학에 계급이 잇느냐 업느냐 하는 문제는 근래 우리 문단에도 상당히 떠들게된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사람에게 계급이 잇느냐 하는 문제부터 해석하랴한다. 문예는 사람의 再現임으로.
사람에게는 계급이 업다. 士農工商은 직업의 구별이오 사람 자체에 엇더한 계급을 짓는 원소가 되지는 못한다. 사람은 性으로 남녀의 구별이 잇고 색으로 黃白紅黑의 차이가 잇고 시간으로 노소가 잇고 민족으로 朝鮮族, 슬라브族, 라텐族, 앵글로색손族 등의 別名이 잇스나 그 사람된 점에는 누구나 일치할 것이오. 조금도 선천적으로 차이점을 가지지 아니하얏스며 상하의 계급을 지을만한 아모러한 이유도 업는 것은 사실이다.
甲도 사람이오 乙도 사람이오 丙도 사람임으로 甲은 丙과도 가틀 것이오 丙은 乙과도 가틀 것이오 따라서 乙은 甲과도 가튼 것은 엄숙한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은 다 가튼 사람이지만은 현대-우리의 눈압헤 뵈이는 이 세상에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분명한 溝渠를 발견할 수가 잇스며 그 溝渠가 잇슴을 따라서 일방의 사람과 타 일방의 사람 사이에 이해를 가티 하지 아니하며 상이한 도덕과 특수한 생활을 하게되며 彼此에 반목 질시하는 한심한 현상을 이루게되는 것도 또한 숨길 수 업는 엄숙한 사실이다.
이를 가르처 이른바 인간사회의 계급이라 하며 계급과 계급사이에는 時時로 刻刻으로 피냄새 나는 투쟁이〈46〉 끄니지 안코 계속된다.
그리하야 인류는 역사가 잇슨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싸홈을 계속하야 왓고 그 싸홈은 극도로 복잡하고 극도로 치밀하야 서로 계급이 다른 사람 사이에는 일거수 일투족에도 그 생활의식이 다르고 그 도덕적 충동이 다르며 마츰내 오늘날에는 의식적 생활을 떠나 무의식적 행동에까지로 일일히 상반되는 무서운 현상을 볼 수 잇게 되얏다.
따라서 일계급이 영유한 것이면 타 계급은 영유를 불허하얏고 甲階級이 행하는 일이면 乙階級은 행할 수 업시 되고 말앗다.
사람에게는 원래 아모 계급도 업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사람으르 하야금 계급을 짓게 하고 말앗다.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이곳에서 할 필요가 업슬 줄로 생각한다.
계급을 지은 사람은 계급사이에 싸홈을 하는 동시에 생활에도 계급적 색채가 점점 짓허가게 되얏다. 그리하야 그 생활을 표현하는 문예에 잇서서는 더욱 懸殊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잇게 되얏다. 다시 말하면 종래의 소위 문예라 하는 것은 전부가 소위 지배계급의 그것에 불과하엿다. 그들은 즐기어 전쟁, 淫事, 안일 등에서 제재를 취하얏고 그들의 생활-그들의 문예를 떠나서는 아모 생활도-문예도 업는 것 가티 알앗스며 또한 그들의 생활 그들의 문예외에 다른 무엇이 잇다하면 가진 수단을 다하야 그것을 말살하여 왓다. (이는 문예뿐 아니라 모든 인문상에 이단으로 지목된 것은 모다 동일한 처지에 잇섯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계급전이 맹렬하여 짐을 따라 그들의 생활을 표현하는 문예에도 어느 듯 일종의 전선이 열니게 된 것은 조곰도 기이할 것이 업는 당연한 일의 하나이다.
이에 비로소 문예와 계급-계급문예라 하는 一新語가 생기게 된 것이다.
계급이 업는 사람에게 계급이 생기고 시간 공간을 초월하야 만인의 胸襟에 공감을 주어야할 문예에까지 계급은 생기고〈47〉 말앗다.
이미 생기인 계급이라 싸호는 것도 맛당한 일이오 싸호지 아니하야도 아니 될 일이지만은 나는 이제 한 가지 중대한 의심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업다.
계급을 위하야 싸호느냐 문예를 위하야 싸호느냐 다시 말하면 계급이익만을 위하야 싸호느냐 전인류의 생존을 위하야 싸호느냐?
나는 나 스사로 이 의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엇기 위하야 방금 호을로 애를 쓰는 중이오 계급전보다도 의문전에 머리를 알는 중이다.
(1月 11日 深夜)
藝術家自身의 막지 못할 藝術慾에서
金東仁
계급 공기며 계급 음료수라는 것이 존재할 가능성이 업는 것과 마찬가지로 계급문학이라는 것도 존재치 못할 것이겟지오. 문학에 「푸로레타리아」니 「뿔조아」니 구별하자고 하는 것도 그 구별하자는 사람 자긔의 몰상식함을 나타내이는데 지나지 못함니다. 엇지 문학에 그런 구별을 하겟슴니까. 무산계급의 사정을 쓴 작품이라고 그것을 푸로레타리아 문학이라 하며 상류계급의 사정을 쓴 것이라고 그것을 뿔조아 문학이라 하면 즘승의 사정을 쓴 작품은 금수문학이라 하겟슴니까? 문학은 도덕의 무기가 아니며 교훈긔관이 아니며 그 목적이 온전히 다른지라 엇던 선전적 주의의 명칭올 그 우에 올려노흘 수가 업는 일이외다. 만약 대담히 그런 명칭을 부치는 사람이 잇다하면 그 사람은 위인이던 광인이던 어느 편이겟슴니다.
이와 가치 존재할 가능성도 업는 것인지라 否存在者에게 가부를 云云할 수는 업슴니다.〈48〉
예술은 인생을 위하여서도 아니고 예술 자신을 위하여서도 아니오. 다만 예술가 자신의 막지 못할 예술욕 때문의 예술이외다.〈49〉
人生生活에 必然的 發生의 階級文學
月灘
계급문학-이것은 어느 때든지 늘 잇슬 것이다. 이 우주 속에 사람이라는 동물이 멸절되야 아주 업서저 버리기까지는 이 계급문학의 두 개 의식은 늘 병행되야 잇슬 것이다. 반듯이 사람뿐만이 안이다. 이러케 말하면 좀 우습지만은 만일 사람 이외의 동물이라도 문학을 갓게된다 하면 역시 거긔에는 甲과 乙이라는 두 가지 계급문학의 현상이 나타나고야 말 것이다. 생활이라는 것이 잇고 생존경쟁이라는 것이 잇는 이상 生이 잇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문학은 반듯이 계급이 잇서 대립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계급의 문학은 시대와 시대를 딸하 성쇠가 교체될 것이다. 문학은 인생의 그림자이오 인생을 떠나서는 문학이 업다. 계급이 잇는 인생인 이상 문학에도 확실히 계급이 잇슬 것이다.
文學上 功利的 價値如何
朴英熙
문학을 순전한 유희나 쾌락만으로 알든 시대는 임이 고대의 일이고 인생의 생활과 人智가 향상함으로 비로소 완전한 근거를 갓게 된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大別해서 二種으로 말할 수 잇으니 하나는 情意的 방면과 또한 아는 실제적 방면이다. 즉 정의적 방면에 주는 것은 美感을 말함이고 실제적 방면에는 공리를 말함이니 전자는 쾌락이고 후자는 생활의 완전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즉 月光이 주는 신비적 美感과 月光이 주는 광명의 실제와 가튼〈49〉 것이다. 그런 故로 이 쾌락과 실제는 鳥類의 兩翼과 가티 늘 평형을 가지고 잇는 것이다. 그 중에 쾌락만히 발달해도 그것은 완전한 가치를 소유하엿다 할 수 업스며 또한 실제만히 발달하여도 그것은 또한 무감정의 무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럼으로 말미암아 문학의 쾌락이라는 것은 실제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잇게 되며 실제라는 것은 그 쾌락을 조절하게 하기 위해서 잇게 되는 것이다. 그런 故로 쾌락은 순전한 관능 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안이라 실제를 위한 쾌락이며 따러서 실제는 공리 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안이라 쾌락으로써 그 자신의 제한을 밧는 것이다. 이에서 비로소 완전한 문학이라는 가치를 소유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를 요구한다하면 그것은 물론 우리의 생활의 불완전한 空隙을 보충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감정으로나 생활로나 더 완전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보통으로 문학이라 하면 엇더한 특수한 것 이외에는 문학 자체 뿐만을 위하게 되니 다시 말하면 유희 본능적 쾌락에서 그 존재의 가치를 시인하엿고 또한 그 문학에서 엇는 美意識에서 실제를 어드려 하엿으며 또한 문학 자체의 이지적 사색의 발달에서 실제를 의미하려 하엿다. 그러나 그 裏面에 생활의식에서 실제를 어드려 하지 안엇고 그 실제를 위해서 쾌락을 어드려 하지 안엇음으로 생활의식의 문학이라는 것은 美意識의 문학이 극도로 발달한 것만큼 그만큼 퇴패되고 말엇다. 안이다. 생활의식의 문학은 그 가치까지 시인하게 되지 못할 만치 頹慶하여 젓단 말이다.
그러나 완전한 문학일수록 생활의식에 확호한 근거를 두어야하며 또한 만인의 보편한 문학- (즉 생활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잇서야겟단 말이다. 오마의 詩句인 「우리는 물과 가티 오고 바람과 가티 간다.」라는 말을 떡 파는 者나 洋燭만드는 사람에게 읽어준달 것이면 영업에 영리한 그들은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몰은다 (엣스의 말) 하는 말을 보앗다. 그것은 노동자에게는 이해하기에 너무도 이지적이엿든 것이다. 따러서 그 詩는 인생이 생활을 노래한 것보다도 인생의 지식으로부터 第二義的 生의 철학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 故로 上論한 문학적 쾌락과 실제는 지식계급에서 비로소 그 가치를 시인하게 되는 것이고 무산계급에는 아모러한 감흥을 밧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무산계급에서도 문학을 건설하여야 겟다는 것이다. 따러서 또한 진리인 것이다. 그러면 무산계급에는 엇더한 문학이 필요할가를 말하기 전에 그들이 소유한 사회와 생활을 다시 관찰하여서〈50〉 보자.
二
현대의 사회는 산업적 사회이다. 그리해서 이 산업사회에 건전한 예술의 가치여하를 말하기 위해서 위선 자본주의의 정체를 음미할 필요가 잇다. 자본주의는 상업주의가 완전히 발달한 것이나 혹은 과도이 발달한 것이다. 그런 故로 자본주의의 상업이라는 것은 인생이 그 상업을 소유한다는 것보다도 인생이 상업을 위해서 존재하게된다는 말이다. 평이하게 말하면 사람이 금전을 지배하는 것이 안이라 금전이 사람을 지배한단 말이다. 인생을 지배하는 그 금전이 자본주의의 자본이다. 이리해서 그 자본은 소유자의 원하는 것보다도 尤甚하게 다른 약소한 것을 탈취하려하며 그럼으로 거대하게 되려하는 것이다. 이와 가티 利慾的 충동에 지배를 밧는 자본가는 노동력을 구입할 때에 그 노동자의 선천적 소질 여하라든지 혹 노동자의 개성적 가치여하로 노동력의 품질 여하로 음미하려고는 안이한다. 오히려 개성을 무시하고 노동력에만 충실하도룩 강제로 기계와 가티 사용하는 것이다. 다량의 생산만을 주제로 하고 극단으로 근대적 분업을 할 때에 자본주는 노동자를 무슨 물건의 단편으로써 사용한다. 그리는 중에 또한 그 분업보다도 멧 백배 더 급속히 생산하는 기기가 발명됨을 따러 탐욕 만흔 급혈귀의 자본은 더 한층 노동자를 蹂?한다. 이와 가티 근대의 사회는 상업주의의 사회이며 따러서 자본주의화한 사회이다. 이럼으로 자본계급은 무산자를 압박하고 착취하려는 것이다. 그런 故로 또한 자본주의에서는 무산계급을 지배하며 자체의 力을 완전히 발휘하려는 데서 쾌락을 어드려 하며 또한 염가로써 거대한 노동력을 매입하려는 것이 그들의 실제이며 자기 자체의 利慾享樂이 그들의 예술이다. 그럼으로 그들의 예술은 전슚?적 혹 독점적 예술이니 이에 인생 전반의 평형을 상실한 문학이 자본주의 문학일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진실한 각성이 무산계급에서 생기며 무산계급의 반성이 비롯될 때에 그들은 반항과 자유와 생활의 혁명을 무기로 하고 자본계급을 대항하려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문학을 요구하엿다. 이럼으로 무산자의 문학은 반항의 문학이며 혁명의 문학이며 자유의 문학일 것이다. 그것은 다른 까닭이 안이라 자본주의화한 계급의 지배적 利慾的 전제적의 생산의식과 무산계급의 반항적 혁명의 생활의식이 相達한 까닭이다. 이럼으로 생활의식의 지배를 밧는〈51〉 美意識도 다르고 말 것이다. 美意識이 다름으로 말미암아서 그들의 쾌락이 相違하고 쾌락이 다름으로써 문학의 정의적 방면이 相違하게 된다. 또한 자본계급의 실제는 利慾에 잇고 무산자의 실제는 혁명에 잇으니 도모지 兩者의 문학이 相違할 것이다.
계급과 계급이 분류되는 때에 문학뿐이 단결을 가질 수 업겟고 계급과 계급이 투쟁하는데 문학뿐만이 평화를 유지할 수 업는 사실로써 이에 계급문학이 분류되는 것이니 하나는 뿌르즈와문학 하나는 푸로레타리아 문학이라. 이에 계급투쟁으로써 생기는 무산계급의 혁명적 사상이 시대정신이라면 이 시대정신의 문학의 공리적 부분은 무산계급문학의 혁명적 사명일 것이다. -(끗)-
作家로서는 無意味한 말
廉想涉
문학은 아모 것에도 예속된 것이 아니다. 어떠한 종교나 운동에 종속적 이용물이 되고 어떠한 계급의 특유물이 되거나 선전기관이 되며 琓弄物이 될 것이 아니다. 그와 가튼 일시기가 잇섯다 하드라도 그것은 그릇된 현상이엇다. 소위 예술이니 인생을 위한 예술이니 하지만 그 어느 견지로서든지 예술의 완전한 독립성을 거부할 수 업다.
더구나 경향이라든지 주의라든지 파라든 것이 작자와 작품을 지배하는 鑄型이 아닌 이상 다시 말하면 예술이 어떠한 鑄型에 백여내이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작가가 어더한 주의라든지 일정한 경향에 구속될 수는 업다. 그러나 그 작품이 완성된 뒤에 第二者가 무슨 주의 무슨 파라고 평정하거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자유일 것이요. 또한 작자로서는 관계가 업는 일일 것이다.
그럼으로 이와 가튼 견지로서는 계급문학의 가부를 논의할 필요가 처음부터 업지 안흘가 한다.〈52〉
그러나 소위 계급문학이란 말의 의의를 좀 생각하야 볼 필요가 잇슬가 한다. 보통 「계급의식」이라는 말이 무산계급의 계급적 자각으로 생기는 그 의식을 의미하는 모양인즉 이러한 의미의 계급문학을 云謂하면 그것은 물론 무산계급의 문학라는 뜻일 것 갓다. 그러나 여긔에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잇슬 것이다.
첫재에는 작품의 취재를 무산계급의 생활과 그 분위기에서 구한다는 뜻.
둘재로는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그 자각을 촉진하야 계급전을 독려하고 고무하는 선전적 태도와 그 작품.
셋재에는 어떠한 의미로는 교양이 부족한 무산계급이 용이히 이해하도록 표현하라는 뜻.
등으로 해석할 수 잇슬 것 갓다.
그러나 문학의 독립성을 시인하고 문학을 낫는데는 작자의 소질이 지중한 관계를 가지고 잇는 것을 알진대 결코 외적으로 무리한 간섭을 할 것도 못될 것이요. 작자 자신이 어떠한 규범에 추종함도 허락지 못할 일이다.
그럼으로 「계급문학」이라는 일종의 부문을 만들어 노코 그 규모에 드러맛는 작품을 만들랴고 하거나 또는 만들라고 주문하는 것은 아니 될 일이다. 비록 작자 자신이 熾烈한 계급의식을 가지고 계급전의 급선봉으로서 문학적 제작에 종사하드라도 자기의 작품을 계급전에 이용하랴는 방편으로 생각하면 계급해방의 투사로서는 충실하다할지 모르나 문학자로서는 실패요 「제로」다. 그것은 문학의 독립성을 말살하고 작가로서의 자기를 자박하는 결과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실제에 잇서서 작품의 제재를 무산계급에서만 구한다는 것은 現 사회에 잇서서-다시 말하면 반대계급 즉 유산계급이 존재한 現 사회에 잇서서는 무리한 주문이다. 그러면 적어도 무산자의 입지에서 제작하라는 주문이 잇슬지 모르나 그 亦 작가의 소질문제에 잇는 것이요. 결코 강요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다음에 계급전의 선전적 사명을 요구함도 만일 이것을 시인한다면 裕餘한 특수계급이 예술을 遊戱視하고 玩弄物視함 가튼 불순한 태도를 면치 못할 것이니 이는 전술한 바와 갓다.
끄트로 저급의 교양을 가진 다대수 민중을 표준하야 작품의 難辭를 피하라함은 일리가 업지 안치만 그리타고〈53〉 작품을 통속화할 수는 업는 것이다. 속담에 살찐 놈 따라 붓는다는 세음으로 취미가 저열하고 이해력이 유치한 일반 민중에게 영합키 위하야 예술적 역량이나 양심을 희생하야 작자 스스로가 비하할 수는 업는 것 이는 문화의 진전이라는 견지로도 취할 바 아닐 것이다.
이를 요컨대 계급문학이 출현되지 못하리라는 것도 아니요. 또 그 출현이 불합리하다는 것도 아니나 다만 일종의 적극적 운동으로 이를 무리히 형성시키랴고 애를 쓸 필요가 업다는 말이다. 필요가 업다는 것보다도 그리함은 문학의 근본 義에 어그러진다는 말이다. 그럼으로 시대상의 필연적 경향 혹은 물산 또는 어떠한 작가의 소질로 인하야 소위 계급문학이라는 것이 형성되고 출현된다하면 그는 문학계의 자연한 일현상으로 용인할 따름일 것이다.
뿔르니 푸로니 할 수는 업지만
稻香
시기상조의 감이 잇습니다. 문학은 인생의 전부를 내여놀 수 업는 것임으로 반듯이 뿔이니 푸로니 할 수는 업지만은 엇더튼 경제의 토대로 현대에서 살어가는 인류에게는 푸로문학이 닐어나는 것도 당연한 일일 줄로 암니다. 그러나 문인으로는 반듯이 뿔이니 푸로니를 표방해야할 것인지 그것은 나로서는 말할 수 업슴니다. 엇더튼 푸로문학이 장차 朝鮮文壇에도 발흥할 것은 여긔서 말할 것도 업슬 줄 암니다.
階級을 超越한 藝術이라야
李七洙
나는 계급문학이라는 말에 대하야 그다지 큰 흥미를 가지지 아니합니다. 母論 지식계급만이 조와할 만한 문학도 잇겟고 특히 유산계급의 흥미에 맛는 문학도 잇겟고 또는 다수의 무식무산민중이 조와할 만한 문학도 잇겟지오. 만일 이러한 의미로 계급문학이라 하면 나는 후자가 만히 생기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작가가 작품을 만들 때에는 다만 거미가 거미줄을 내이고 누에가 고치를 짓는 것모양을 짓는 것이니 거미더러 누엣고치를 지으라 하더라도 무리겟지오. 그럼으로 계급문학을 절규하더라도 그것은 비평가의 소리뿐이지 별로 큰 수익은 업스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계급을 초월한 예술의 존재를 밋습니다. 인생의 생활의 저류에 觸한 문학은 계급을 초월하여서 사람이면 누가 보아도 볼 줄을 모르면 듯기만 해도 문학의 효과를 生할 수 잇는 문학의 존재를 밋습니다. 그럼으로 나는 다만 「참으로」 「자연스럽게」 「힘을 다하야」 문학을 지으려할 뿐입니다.〈55〉
〈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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