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삼천리 제10권 제8호 | |||
호수 | 제10권 제8호 | |||
발행년월일 | 1938-08-01 | |||
기사제목 | 삼천리문예 文藝評論, (-톨스토이와 떠스터예프스키-의 비교-) | |||
필자 | 金東仁 | |||
기사형태 | 문예평론 | |||
1. 예술이란 무었시냐, 여긔 대한 해답은 헤일 수 없이 만치만, 그 가운데 그 중 정당한 대답은 「사람이 자기 기름자의게 생명을 부어 너어서 활동케 하는 세계 다시 말하자면 사람 자기가 지어놓은 사랑의 세계 그것을 니름이라」하는 것이다. 어떠한 요구로 말미암아 예술이 생겨났느냐, 한 마듸로 대답하려면 이거시다. 하누님의 지은 세계에 만족지 아니하고 어떤 불완전한 세계던 자기 정력과 힘으로써 지어 놓은 뒤에야 처음으로 만족하는 인생의 위대한 창조성에 말미암아 생겨났다. 예술의 참 뜻이 여긔 있고 예술의 귀함이 여긔 있다. 어떻게 자연이 훌륭하고 아름다우되 사람은 마츰내 자연에 만족치 아니하고 자기의 머리로써 「자기가 지배할 자기의 세계」를〈220〉 창조하였다. 사람이 사람다운 가치도 여긔 있거니와 사람다운 사람의 예술에 대하여 막지 못할 집착을 깨닷는 점도 여긔 있다. 이렇게 예술이 생겨날 필요는 있지만 「필요」 뿐으로는 생겨나지 못한다. 여긔는 생겨날 만한 요소가 잇서야 한다. 그러면 그 요소는 무어시냐 아모 사람의게도 가득 차 있는 에고이즘- 즉, 自我主義 이것이다. 극도의 에고이즘이 한 번 변화한 것이, 참 사랑-자기 있고야 나는 참 사랑이다. 이것- 이 사랑이 예술의 어머니라면 어머니랄 수도 있고 殆라면 殆랄 수도 있다. 자기를 대상으로 한 참 사랑이 없으면 자기를 위하여의 자기의 세계인 예술을 창조할 수 없다. 自我主義가 없으면 하누님이 지은 세계에 만족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예술이 생겨날 수가 없다. 세계에 만족치 못한 「사람」은 국가를 많드렀고 여긔도 못 만족한 「사람」은 가정을 많드렀고 여긔도 만족치 못하여 마츰내 자기 일 개인의 세계이고도 만인 함께 즐길만한 세계 - 예술이라는 것을 창조하였다. 이렇게 자기의 痛切한 요구로 말미암은 「예술」은 이것 즉 인생의 기름자요 인생의 無二한 성서요 인생의게는 없지 못할 사랑의 생명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논리의 안경을 쓰고 이 세상의 문예 예술가를 내여다 보면은 참 예술가다운 예술가는 과연 몇 사람이나 있느냐, 인생을 자기 손바닥 우에 올려놓고 (인생의 지은 세계는 즉 인생 그것이 아니면 않되니까) 이리 구을리고 저리 구을릴 만한 능력을 가진 문학자가 며치나 되는가. 어떤 문학자는 「인생」을 멀리서 바라보고 감히 손을 대이려고도 못하였다. 었던 문학자는 「인생의 문을 열리지 않는다」면서 문만 두다리고 있었다. 었던 문학자는 인생이라는 것을 쿡쿡 찌르면서 자세히 관찰은 하였다. 그러치만 어린애도 하누님의 세계에 만족치 않고 인형이라는 자긔의 세계를 사랑하는 이 인생에서 이 누리에서 오해한 인생이던 어떠한 「자기의 창조한 인생, 자기가 지배권을 가진 인생」을 지어놓고 자기 손바닥 우에 뒤채여 본 문학가는 이 세상에 과연 며치나 되는가. 나는 이즘 참 위대하다는 두 문학자를 붓드러서 이 두 사람의 참 예술적 가치를 비판하려 한다. 2. 톨스토이는 특별히 그의 숭배자 밧게 공정한 비판가의게는 모도 질책을 바닷다. 무론, 그의 청년기의 작품 「幼年, 少年, 靑年」, 「코 - 카사쓰」 「안나, 카레니나」 「戰爭과 平和」 「세빠스토뽀리 - 」등 - 그가 심기 변화하기 전의 작품은 아모도〈221〉 이러타 저러타 하지 아녓지만, 그의 만년의 작품과 논설은 모든 공평한 비판가의게 채쭉을 마잣다. 실상으로 그의 만년은 미치광이다. 「藝術論」에서는 모든 예술가, 특별히 잉글리쉬 쉑스피어과 독일 뻬 - 토 - 펜을 그 큰 작곡가와 작극가를 매도하고 성 딴테까지 버리라고 세계의게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 논리는 세계에서 아모도 비웃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어듸서 나왔느냐. 톨스토이의 귀족적 교만과, 자긔 밖게는 세상에 사람이 없다는 자만심에서 나온 것이다. 「크로있처, - 쏘나타」를 닑고는 아모도 떨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어두운 車室 않에서 무서운 이야기를 신비적으로 하는 곳을 닑을 때는 부르르 않 떨 수가 없다. 「이것 보아라 이것 보아라」 톨스토이는 인생의 가장 악한 면을 붙드러 가지고, 우리의 앞에 내여 대인다. 「이봔, 이리 리취의 죽음」에서 톨스토이는 죽기 전에 뉘우치라고 무섭게 우리의게 달려든다. 「어두움에 반짝이는 빛」에서는 너희의 재산을 모도 가난한 사담의게 주라고 톨스토이는 호령을 한다. 다 - 예를 들 수는 없으되, 실로 만년의 톨스토이는 橫暴한 설교가이었었다. 그는 우리 멱살을 그러 주이고 「이놈, 사랑하여라」하고 명령한다. 그는 우리를 밟고 「겸손하여 지겠느냐, 않지겠느냐」 吐사를 받는다. 그는 우리 머리채를 잡고 1년에 두 번 이상은 부부 同衾을 하지 말나고 엄령을 나린다. 그는 독긔를 쥐고 우리 앞에 막아서서 예배당에 가지 말고 예수를 미드라고 위협을 한다. 참으로 「참회」를 쓴 다음의 톨스토이는 「이상한 경험의 세계로 말미암아 건전한 재능과 건전한 예술의 분야를 내여 던젔다」 그러고 자기의 재능에 대한 자신으로 말미아아 중심을 일코 필요 없는 한 橫暴한 설교자가 되여 버렸다. 비평가들의게 질책을 않 바드려야 않하지 못할 경우에 빠저 버렸다. 이와 반대로 떠스터예프스키는 이와 같은 악평을 않 바닷다. 그는 모든 사람의게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바닷다. 그의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군중이 열광하여 그를 환영하였다. 「사랑의 哲學者여」 「聖人이여」 모든 사람은 그를 존경하였다. 「떠스터예프스키 - 는 금세에는 이해 못하는 사람이 이스되 그는 오는 세기의 문학자이다. 선지자이다」 모든 사람은 그의게 찬사를 받첬다. 톨스토이는 그의 숭배자의게만 「위대한 인격자」라고 칭송을 받고 그 밖의 사람의게는 「악마여」 「사회의 죄인이여」 「그의 교훈은 모도 노파의 헷소리로다」 등으로 惡罵를 바들 때에 떠스터 예프스키 - 는 만인의게 환영을 바닷다.〈222〉 톨스토이는 너무 극단으로 나갓다. 너무 미술적으로 나갓다. 그러하니까 그의게는 반대자도 많었거니와 또 숭배자도 많었다. 그들은 톨스토이를 「구세주」라 부르고 위대한 인물이라 불렀다. 이와 반대로 떠스터예프스키 - 는 특별히 「숭배자」라는 것을 못 가젔다. 만인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였지만 특별히 숭배는 않 하였다. 톨스토이는 「사랑」의 가명을 쓴 「위협자」이었섰고, 떠스터예프스키 - 는 온건한 「사랑」의 지도자이었었다. 물론 그들의 길의 차이점도 이것이거니와 세상에 비최인 기름자의 각각 다른 점도 여긔 있다. 그러치만 이 우의 평론은 세상 사람이 다 - 아는 바요 그 두 위대한 문학자를 사상 - 주의상으로 논한 점에 지나지 못한다. 한층 더 드러가서 이 두 문학자의 예술적 가치를 평하려면 었지 될고. 예술이란 자아적 사랑이 나은 「자기를 위하여 자기가 창조한 자기의 세계」라는 정의를 세워놓고 즉 예술가란 「한 개의 세상 - 혹은 인생이라 하여도 좋다-을 창조하여 가지고 종횡 자유로 자기 손바닥 우에서 놀릴만한 능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정의를 세워놓고 떠스터예프스키 - 와 톨스토이를 비교하면 그들은 과연 어늬 편이 勝하고 어늬 편이 劣한고. 3. 먼저 떠스터예프스키 - 를 보자. 그는 마츰내 「인생」이라 하는 것을 창조하였느냐. 하였다. 그것도 훌륭한 - 참 인생의 모양에 갓가운 인생을 창조하였다. 「사랑으로써 모든 것을 해결된다」는 인생을 창조하였다. 그러치만 그 뒤가 틀녔다. 그는 자기가 창조한 인생을 지배치를 않고 그만 자기 자신이 그 인생 속에 빠저서 어쩔 줄을 모르고 헤매였다. 「罪와 罰」에서 그는 차차 자기가 빠젔던 자기 인생 가운데서 떠오르다가 또 맥없이 푹 빠지며 「모든 죄악은 법률로써 해결된다」와 「맑은 사랑이 제일이다」라는 큰 모순된 부르짐을 당연한 듯이 발하였다. 「칼 - 마조프 兄弟」도 이와 같이 되여 버렸다. 「惡靈」도 그러코 「白痴」 「학대바든 자들」 「불상한 사람들」 모도 이와 같이 되였다. 자기가 창조한 인생을 지배할 줄을 물났는지 능력이 없었는지는 모르되, 어떠턴 그는 지배를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거긔 지배를 바닷다. 극단으로 말하자면 그는 자기가 지은 인생의게 보기 싫은 패배를 당하였다. 그러면 톨스토이는 어떠냐. 그도 한 인생을 창조하였다.〈223〉 하기는 하였지만 그 인생은 틀린 인생이요 소규모의 인생이다. 그는 범을 그리노라고 개를 그린 화공과 한 가지로 참 인생과는 다른 인생을 창조하였다. 그러고도 그는 그 인생에 만족하였다. 그러고 그 인생을 자유 자재로 인형 놀리는 사람이 인형 놀리듯 자기 손바닥 우에 올려놓고 놀렸다. 꺽구러도 세워 보고 바라도 세워 보고, 웃겨도 보고, 울리워도 보고, 자기 마음대로 그 인생을 조종하였다. 톨스토이의 위대한 점은 여긔 있다. 그의 창조한 인생은 가짜던 진짜던 그것은 상관없다. 예술에서는 이런 것의 구별은 허락지를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요구로 말미암아 창조한 그 세계가 가짜던 진짜던 무슨 상관이 이슬가. 자기의 요구로 말미암아 생겨 나스니까... 톨스토이의 주의가 암만 暴惡하고 떠스터예프스키의 주의가 암만 존경할 만 하더라도 그들을 예술가로써 평할 때는 떠스터예프스키 - 보담 톨스토이가 아무래도 진짜이다. 톨스토이는 자기가 창조한 자기의 세계를 자기 손바닥 우에 올려놓고 자기가 조종하며 그것이 가짜던 진짜던 거긔 만족하엿다. 이것이 톨스토이의 예술가적 위대한 가치일 수 밖제 없다.〈224〉 〈220-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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